# 67
독식왕 : 클리어러 067화
몬스터를 지정하자 배틀 포인트가 소모되었다. 5,500포인트가 뚝 떨어져서 0이 되자 순간적으로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용도가 정해진 이 포인트를 아낀다고 해도 따로 써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잘한 거겠지?’
굵은 빛줄기가 뚝 하고 떨어졌다.
파지직-
빛 덩어리 안에서 몬스터 한 마리가 나타났다. 거미와 같은 생김새를 지니고 덩치가 무척 큰 게 틀림없는 아스도라퀸이었다.
일반적인 생김새와는 달리 몸 여기저기에 결정석이 박혀있다.
“크르르르…….”
처음 마주쳤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지만, 같은 편으로 소환하자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나는 이 몬스터가 비록 일반형보다 소환 가능 포인트가 500 많았을 뿐이지만 실제 능력차는 그것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암젤이 아스도라퀸을 보고 놀랐다.
“앗! 저놈은?”
“이번엔 적이 아니야. 우리를 돕게 하려고 소환한 거야.”
“아…… 그러냐옹?”
나와 오래 같이 다녔던 NPC답게 설명 불가능한 상황이 펼쳐져도 납득이 빨랐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편한 일이다.
큼지막하게 떠올라 있던 카운트가 0이 되었다.
나와 NPC들은 긴장된 마음으로 적의 출현을 기다렸다.
[전투가 개시됩니다.]
우르르릉-!
이번에는 한꺼번에 여러 줄기의 빛이 떨어졌다. 나와 반대되는 지점에 여러 개의 생명체가 나타났다.
군주 슬라둠.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강력한 몬스터라면 얼마든지 상대했지만 이계의 군주라는 개념은 생소했다.
과연 얼마나 강한 놈이 나올 것인지,
시선이 닿은 곳에 검은 갑옷을 입은 이계인 열다섯과 다른 이계인보다 머리가 두 개쯤 더 큰 인간 하나가 나타났다.
그 옆에는 등이 굽은 아주 왜소한 이계인이 있었다.
이계인이라는 설명을 들어서 그렇지 몬스터와 크게 구별되는 외견이 아니었다.
군주가 누구인지는 구분하기 쉬웠다. 덩치가 산만 한 녀석은 뿜어내는 아우라가 다른 이계인들과 확실히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배통의 넓이가 매우 넓고 멧돼지처럼 뻐드렁니가 나 있다. 인상도 아주 고약해 보였다.
그는 예상치 못한 곳에 오게 되었다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댔다.
“이게 뭐야!”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발밑이 진동할 정도다. 그의 호통에 옆에 있는 왜소한 몸집의 이계인이 흠칫 놀랐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왜 이런 곳에…….”
‘역시…….’
나는 놈들이 보이는 촌극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처럼 이계의 군주라는 녀석도 이곳으로 끌려들어 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일까?
내가 사는 세상과 이계의 교착 지점 같은 곳인가?
나를 각성시키고 이곳에서 군주와의 대결을 성사시킨 놈은 최소 신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스케일이 큰 작업을 할 수 있었을 리 없다.
“응? 뭔 소리야? 눈앞에 있는 적들을 물리치라고? 이놈들을 죽이면 이면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돼지를 닮은 군주 슬라둠이 허공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에게도 나와 마찬가지로 메시지창이라도 뜬 모양이다.
“아! 이제 알았습니다! 슬라둠 님, 이곳은 이면의 세상으로 가는 통로가 분명합니다. 길을 막는 저 문지기들을 해치우면 이면의 세상으로 직행할 수 있을 것이 확실합니다!”
“멍청한 놈!”
슬라둠은 손에 들고 있는 철퇴를 들어 왜소한 몬스터를 향해 휘둘렀다.
쿵-!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보고서도 눈을 의심했다.
‘죽였어? 자기편을?’
하지만 곧 놀라운 일이 하나 더 일어났다. 슬라둠의 철퇴가 깔린 밑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군주시여!”
“흥!”
철퇴를 치운 자리에서 이계인이 찌그러져 있었다. 괴상한 장면이지만 워낙 이상한 일을 많이 겪은 탓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아마 몸집이 작고 전투 능력이 형편없는 반면 질긴 생명력을 가진 이계인인 모양이었다.
“화를 내실 일이 아닙니다. 저놈들을 해치워야 이면의 세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납작해진 부하가 슬라둠의 관심을 우리 쪽으로 옮겨놓았다.
슬라둠의 포악한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뭐냐옹? 저 덜떨어진 것들은?”
암젤이 인상을 썼다.
황당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이계의 군주와의 싸움이라기에 진지한 상황을 예측했더니 등장하자마자 촌극을 벌이는 풍경이라니.
어쨌든.
슬라둠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의 입꼬리가 싸악 올라갔다.
“문지기들치고는 허약해 보이는군. 저놈들을 물리치면 내가 모든 군주 중에 첫 번째로 이면의 세상에 나갈 수 있다. 비록 지금껏 오명을 쓰고 있었지만 먼저 건너가서 힘을 키우면 그 차이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게 될 터!”
“맞습니다! 군주시여, 얼른 저 별 볼 일 없는 놈들을 해치워 버리십시오!”
“시끄러!”
슬라둠이 철퇴로 다시 한 번 부하를 향해 내려찍었다.
꽝-!
녹색 피가 튀고 조그만 몸집이 더욱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히익! 죄송합니다요! 슬라둠 님!”
그 부하는 여전히 죽지 않았다.
나는 슬슬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울 거냐 말 거냐? 돼지 자식아.”
“뭐?”
슬라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이런 대담한 말을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보창이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투시자의 눈은 이계의 군주를 상대로도 효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름 : 슬라둠
서열 : 72위
레벨 : 65
스탯 : 근력 60 체력 45 민첩 30 행운 15
이력 : 슬라둠의 가문은 서열 60위권에 머무는 나름 명문 가문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천천히 가세가 기울었지만, 그가 군주 자리를 물려받을 때만 해도 서열은 67위를 유지했다.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왕위 쟁탈전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동안 세력이 더욱 줄어들어 끝내 꼴찌가 떨어지고 말았다. 운도 따라주지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유에는 현 세대의 슬라둠 본인의 무능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약점 : 무식하게 힘만 이용해 몰아붙이는 스타일이다. 직선형의 돌진만 유의하면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을 것.
카오스 게이머를 상대할 때보다는 간소화된 정보창이다. 그래도 필요한 정보는 모두 담겨 있었다.
레벨이 65라는 것은 벡실룸보다도 약하는 뜻이다.
E급 던전 마스터보다는 강하고 D급 던전 마스터에는 못 미치는 수준.
나는 왜 차원문의 열쇠를 사용하는 데 D급 던전 마스터를 물리치는 조건을 달았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D급 던전 마스터와의 싸움은 이 녀석과 싸우기 위해 마련된 훌륭한 모의전이었다.
더불어 레벨 70짜리 몬스터를 한 번에 잡았다는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벡실룸은 가상현실 게임에서 여러 번 싸웠던 경험이 있어 공략법을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눈앞에 있는 이 녀석 정도라면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투시자의 눈이 친절하게 약점도 일러주고 있잖아?’
힘만 믿고 직선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은 사냥하기 가장 쉬운 타입이다.
“우오오오!”
분노한 슬라둠이 발을 굴렀다.
쿵! 쿵-!
“되게 시끄러운 놈이다옹.”
암젤이 미간을 찡그리고 귀를 막았다.
납작해진 신하는 군주가 진노한 모습을 보고 불똥이 튈까 봐 몸뚱이를 뒤뚱뒤뚱 움직여 달아났다.
“저놈들을 죽여라!”
슬라둠이 철퇴를 쥔 팔을 앞으로 내밀며 명령했다.
열다섯 개체의 갑옷을 입은 병사가 무기를 치켜들었다. 다섯 놈이 창을 들고 있고, 다섯 놈은 검, 그리고 다섯은 활을 잡고 있었다.
‘오히려 저놈들이 상대하기 어렵겠군.’
커다란 투구를 써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다혈질인 군주에 비해 부하들은 매우 침착해 보였다.
창과 검을 들고 있는 병사들이 당장 진격을 시작했다.
궁병들은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낮춰 활을 쏠 준비를 했다.
나 역시 아군을 독려하는 기함을 내질렀다.
“가자!”
암젤이 표범을 소환했다. 아린은 방패의 곡을 연주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아스도라퀸+가 공기를 흡입하자 달려오고 있던 병사들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나는 히루도의 창을 들고 선봉에 나섰다.
‘건샷 스피어!’
쾅-!
거리를 확보하고 날린 스킬이 가장 앞서 달려오고 있는 병사의 목을 찔렀다.
“크헉!”
리치가 나보다 길고, 비슷한 길이의 무기를 들고 있지만, 건샷 스피어는 공격 범위가 긴 기술이었다.
내 스킬을 대비 못한 병사가 치명상을 입고 피를 토했다.
6
슬라둠은 패닉에 빠졌다.
‘뭐야. 이게?’
상대의 숫자나, 몸집을 감안했을 때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도 병사들만 내보내면 금방 끝나는 싸움일 줄 알았다.
하지만 전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부하들이 아니라 문지기 녀석들이었다.
개개의 실력은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싸움을 이끄는 모습이 매우 노련했다.
특히 창을 든 자가 적절한 명령을 내려 몇 안 되는 아군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크악!”
“끄아악!”
시간이 갈수록 이쪽의 병력이 줄어들어 간다. 그럴수록 상대의 기세는 더욱 사나워졌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슬라둠은 굼뜬 몸을 뒤뚱거리며 달려 나갔다.
쿵! 쿵! 쿵!
자기 앞을 막고 있는 병사를 철퇴로 후려쳤다.
“크억!”
그의 철퇴질에 병사가 목숨을 잃고 날아갔다.
‘저런 무식한 놈을 봤나!’
나는 열심히 창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슬라둠이 같은 편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방금 하나가 죽었으니 이제 상대 전력은 군주인 슬라둠을 포함해 여덟이 남았다.
그중 넷이 궁병이고, 창병과 검병이 각각 둘씩이었다.
나는 암젤과 아스도라퀸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각자 졸개들을 맡아! 돼지는 내가 잡는다!”
내 말을 들은 슬라둠의 눈썹이 올라갔다.
“뭣이!”
덩치도 조그마한 놈이 겁도 없이 자기를 혼자 상대하겠다고 하다니 눈이 뒤집혔다.
“이노옴!”
거칠게 휘둘러진 철퇴가 공기를 가르고 날아왔다.
나는 슬라둠에게 진격하던 걸음을 멈추고 납작 몸을 숙였다. 동시에 창을 치켜들었다.
키리링-!
철퇴가 히루도의 창을 휘감았다. 레벨 65짜리 몬스터의 공격이었지만 히루도의 창은 이래 봬도 유니크급의 무기이다.
철퇴에 꺾이는 일 없이, 충격을 받아냈다.
“카리스!”
내 부름에 검은 회오리가 피어나며 소환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에에…….”
“크르르르…….”
검과 방패를 꼬나 쥔 스켈레톤들이 적을 인지했다.
“뭐, 뭐라고?”
슬라둠은 놀란 나머지 주춤했다.
‘소환술을 사용했어?’
소환술은 이계에서도 특정한 무리들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소환술을 사용하는 것은 대개 마법을 부리는 자들이다.
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자가 소환술까지 부리는 경우는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익!”
철퇴를 회수하려 했지만 히루도의 창에 감긴 무기는 쉽게 회수되지 않았다.
그 틈에 스켈레톤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 이!”
직선형의 공격만 할 줄 아는 멧돼지 군주는 레벨 50대에 이르는 검은 뼈의 소환수들에게 속수무책으로 공격을 허용했다.
퍽! 퍽!
“으악! 으아악!”
“시끄러운 놈이다옹.”
암젤이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슬라둠을 곁눈으로 보며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