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독식왕 : 클리어러 066화
티코이의 얼굴이 시무룩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느낌상 차원문의 열쇠를 사용하면 또 다른 형태의 전투를 치르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중요한 퀘스트는 항상 전투와 연결되는 법이니까.
이제야 머릿속이 정리가 되었다.
몇 시간 안에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준비를 갖추어라.
이것이 전투를 치르게 된다는 말과 뭐가 다르겠는가?
“싸움이라면 환영이지.”
지난번에 벡실룸과 싸우고 상점에 들러 포션을 보충했다. 그것은 역시 차원문의 열쇠를 사용하게 되면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이머라면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나는 양옆의 NPC들을 돌아보았다.
“준비됐지? 간다.”
나는 다시 한 번 열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원문의 열쇠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환한 빛이 분사되었다. 열쇠에서 시작된 빛은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더니 곧 거실을 가득 채웠다.
넓은 거실이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 터진 뒤, 하얀 공간 사이에서 커다란 문이 하나 나타났다. 손잡이 아래에는 열쇠 구멍이 달려 있다.
나는 차원문의 열쇠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내 뒤로 암젤과 아린이 바싹 붙었다.
구멍에 열쇠를 꽂자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우리 세 명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4
빛으로 둘러싸인 길을 한참이나 걸어갔다. 어디가 끝인지 모를 길이 쭉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걷고 있다는 자각도 없을 정도였다.
결국 암젤이 불만을 터뜨렸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냐옹?”
나 역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열쇠를 사용하는 일에 다시 한 번 숙고를 했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우리가 들어왔던 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미 꽤 멀어져서 점처럼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 암젤이 소리쳤다.
“출구다옹!”
빛이 끝나는 곳을 중심으로 소우주 같은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처음에 작은 크기였던 그 공간은 마치 도화지에 물감이 번지듯 점점 커져 갔다. 우리가 걸어가지 않아도 공간 자체가 확장되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깐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생각을 고쳐먹었다.
‘잘못되지는 않겠지.’
소우주가 우리를 집어삼켰다.
어두운 하늘, 그리고 차가운 공기.
갈색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 안으로 까끌까끌한 모래가 들어왔다.
“퉤!”
모래를 뱉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우리 세 사람의 앞에 거대한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량한 배경 안에 서 있는 탑은 어찌나 높은지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결투의 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유저는 이곳에서 이계의 군주와 결투를 벌이게 됩니다.]
[72명의 군주를 모두 쓰러뜨리면 당신은 이계를 독식하는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이계? 왕?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아린이 물었다.
“주인님, 무슨 일이세요?”
“이 탑에서 우리가 군주와 싸우게 될 거래. 72명의 군주를 모두 물리치면 이계의 왕이 된다는데?”
“네?”
‘대체…….’
나는 상황을 유추해 보았다. 차원문의 열쇠로 올 수 있는 공간이 이런 곳이었다니.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
그저 하늘을 뚫을 기세로 서 있는 탑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계의 군주라고?’
이계는 다른 세상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우리 쪽 세상을 기준으로 다른 세상을 일컬을 때 쓰는 용어.
‘그런 곳이 있었나?’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습기는 하다. 던전과 게이머의 출현, 그리고 내가 십 년 동안 들어가 있었던 가상현실 게임 공간을 생각하면 이제는 무슨 얘길 들어도 믿어야 할 형편이니까.
우리가 들어왔던 길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퇴로가 없으니 물러갈 길도 없다.
‘저 성의 각 층에 이계의 군주가 있다고?’
모르긴 해도 지금 보이는 탑이 이계의 전부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군주라는 놈들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이곳에 불려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싸움을 붙이는 거지? 내가 이계의 군주들을 물리쳐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암젤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를 각성시키고 NPC들을 목소리로 유인한 자와 연결되어 있다.
대답에 인색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암젤은 그자가 메신저로 택한 NPC였다.
“암젤.”
“왜 그러냐옹?”
“왜 내가 이계의 군주와 싸워 야하는 거지?”
대답을 듣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 이번에는 암젤의 이마에 있는 문신이 반짝 빛났다.
“먼저 먹지 않으면 먹혀 버리기 때문이다옹.”
“먹힌다고? 뭐가? 우리 쪽 세상이 말이야?”
“그렇다옹. 이계의 군주들이 인간을 각성시키고 던전을 만든 것은 그것을 이용해 이면의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다옹. 이계는 만 년마다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데 이번 선출전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옹.
왕이 된 헤레디투스는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강자들의 욕구를 분산하기 위해 이번 일을 계획했다옹. 이계의 군주들은 저마다 이면 세상의 왕이 될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옹.”
그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을 각성시킨 이유가 뭐야? 왜 던전을 만들어 성장을 시키는 거지? 네 말대로라면 정복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인데.”
“이계의 군주들이 반대편 세상으로 나오려면 카오스 성향을 지닌 매개체가 필요하다옹. 아울러 이면의 세상에 나왔을 때 게이머를 병사로 삼으려는 목적도 있다옹.
카오스에 물든 게이머가 많아지고 자격을 갖춘 게이머가 출현하면 그들을 이용해 군주들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할 거다옹.”
나는 암젤의 말에 머릿속이 맑게 개인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 카오스 게이머를 죽이도록 한 이유.
다른 게이머들과 다른 방식으로 각성시켜 퀘스트를 부여한 까닭.
“군주들을 다 죽이면 왕이 될 수 있다고? 그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옹. 주인님을 각성시킨 자는 주인님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옹. 클리어해야 할 게임이라면, 그리고 적절한 보상만 주어진다면 주인님이 뭐든 할 거라고 생각했다옹”
“…….”
누군가가 내 속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보상이 욕심난다기보다는 그것을 달성하는 과정 자체에 더 흥미가 생긴다.
게다가 독식왕이 될 수 있다니.
클리어 보상치고 이보다 그럴 듯한 게 어디 있겠는가?
나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오늘따라 암젤을 통해 많은 얘기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투의 탑에 왔기 때문일까? 오늘은 뭘 물어도 대답해 주는 건가?
나는 암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암젤을 통해 이야기하는 당신은 누구지?”
한참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암젤이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옹.”
“……쳇.”
암젤 이마에 있는 문신에서 빛이 꺼졌다. 나는 포기하고 다시 탑을 올려다보았다.
‘쓰러뜨려야 할 군주가 72명이라고?’
어차피 거부하기 힘든 싸움.
긴 여정이 될 것 같았다.
5
탑 1층에 들어서자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탕!
시험 삼아 밀어보았지만 열리지 않는다. 나는 문득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이곳에 오게 된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미리 알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뭔가를 더 준비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결투의 탑 1층에 입장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PHASE 1의 클리어 포인트를 정산합니다.]
[부 : B, 명예 : S, 지위 : A, 영토 : A, 동료 : A]
[5,500BP를 얻었습니다.]
[배틀 포인트로는 소유한 던전의 몬스터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군주 서열 72위 ‘슬라둠’과의 대결이 성사되었습니다.]
[오 분의 대기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결투가 시작됩니다.]
나는 넓은 실내를 둘러보았다.
오래된 성의 내부를 보는 것 같은 풍경이다. 원형의 공간에는 장애물도, 숨을 곳도 전혀 없었다.
이곳에서 누군가와 대결을 한다면 말 그래도 전면전이 될 것이었다.
서열 72위 슬라둠.
나는 내 대결 상대라는 자의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혹시 아는 놈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불행히도 처음 보는 이름이다. 가상현실 게임 공간에 몬스터 말고 군주까지 카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럴 때가 아니지.’
오 분이 지나면 바로 대결이 시작된다고 한다. 허공에 큼지막하게 나타난 숫자가 남은 준비 시간을 알려주었다.
[04:56]
‘5,500포인트? 이걸로 소유 던전의 몬스터를 불러낼 수 있다고?’
궁금증을 갖자마자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포인트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눈앞에 긴 목록이 펼쳐졌다.
F-001 : 덴몬(100 BP), 덴몬킹(200 BP), 케라이라(200BP)…….
F-002 : 리에고(120 BP), 네뭉(10 BP), 라이에(250 BP)…….
E-001 : 인판스(500 BP), 디플로(500 BP), 숄크(1,000 BP)…….
‘이런 식이군.’
보자마자 이해가 되었다. 포인트를 소모해 소유 던전의 몬스터를 대결에 투입할 수 있는 모양이다.
‘어쩌지……?’
내 눈은 저절로 가장 강한 몬스터인 던전 마스터 쪽으로 향했다.
아스도라퀸(5,000 BP), 아스도라퀸+(5,500 BP)
고보르(5,000 BP)
추그니다킹(8,000 BP)
‘젠장. 뭔 놈의 포인트가…….’
한 마리 불러내면 모든 포인트가 소진될 정도다. 심지어 추그니다킹은 불러낼 수조차 없었다.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양으로 밀어붙이느냐, 아니면 질로 승부하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양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F급 던전의 몬스터들은 그야말로 잡몹 중의 잡몹들이니까.
큰 기술에 당하면 한꺼번에 쓸려 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나마 강한 몬스터들은 E급 던전의 몬스터들이었다. 상대가 어떤 타입인지 모르니 적당히 조합을 해서 내보내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목록을 훑는데 문득 위화감이 드는 것을 깨달았다.
F-001 몬스터 목록에 같은 이름이 두 개 있었다.
‘아스도라퀸’과 ‘아스도라퀸+’
‘뭐지?’
나는 아스도라퀸+를 길게 터치했다.
눈앞에 떠오르는 정보창.
이름 : 아스도라퀸+
레벨 : 35
스킬 : 흡입, 물어뜯기, 독액 발사
비고 : 거미형 몬스터 아스도라 무리의 여왕. 수백 마리의 아스도라를 거느리는 여왕답게 일반 아스도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강하다.
아스도라퀸+는 티코이의 개발로 재탄생된 아스도라퀸이다. 일반형보다 레벨이 5 이상 높고 레벨 이상으로 강한 능력을 발휘한다.
정보를 보자 곧바로 이해가 된다.
‘티코이, 이 귀여운 녀석.’
티코이가 업그레이드한 장비에 +가 붙은 것처럼 그가 업그레이드시킨 몬스터에도 +표기가 붙었다.
내가 직접 상대해 보았기 때문에 개량된 아스도라퀸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공략법을 알지 못하면 상대하기가 매우 버거운 몬스터다.
‘좋아.’
포인트도 딱 들어맞았다.
나는 방금 전까지의 계획을 수정하고 아스도라퀸+ 한 마리만 대결에 참가시키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