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독식왕 : 클리어러 064화
8
던전 마스터가 있는 층은 다른 층보다 상대적으로 작았다. 세 시간쯤 전진을 했을 때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후우…….”
나는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아린이 치유의 곡을 연주해 파티원들의 체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던전 마스터가 있는 장소에는 수십 개의 관이 깔려 있었다. 희뿌연 재가 날리고 음울한 공기가 떠도는 공동 묘지.
우르르릉!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들이 한꺼번에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진동은 점점 강해지더니 급기야 수십 개의 관 뚜껑이 들썩거렸다.
펑! 펑-!
폭발음을 울리며 관 뚜껑이 차례로 날아오른다. 먼지가 치솟고 관 안쪽에서 언데드들이 하나씩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공포스러운 광경이지만 나는 여유가 있었다.
‘똑같네.’
이 던전의 마스터 이름은 ‘벡실룸’이다. 미라형 몬스터인 이놈은 가상현실 게임에서도 같은 연출로 등장했었다.
“크으으…….”
“크르르르…….”
몸뚱이의 절반이 썩어 내린 언데드들은 흐느적거리며 관 안에서 발을 뺐다.
그리고.
콰앙-!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폭발음을 내며 중앙에 있던 가장 커다란 관의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바싹 말라붙은 미라였다.
몇백 년은 묵었을 법한 창백한 미라가 느리게 눈을 떴다.
레벨 47의 입장에서 레벨 70짜리 던전 마스터의 등장을 지켜보는 기분은 긴장감이 있었다.
벡실룸이 두 팔을 벌렸다. 진공청소기를 작동시킨 것처럼 던전 안의 공기가 그를 중심으로 빨려들더니, 급기야 먼저 깨어난 언데드들의 살점이 부서져 그에게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말라비틀어진 몸뚱이에 처덕처덕 썩은 살들이 달라붙는다.
살이 차오르고 신장이 불어났다.
2미터, 3미터…….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커진 던전 마스터가 거만한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나 포션을 꺼냈다. 그것을 쭉 들이켜고 소환술을 사용했다.
“카리스!”
본래 스켈레톤이었던 몬스터들이 검은 뼈다귀를 갖추고 등장했다.
“크르르…….”
카리스들은 검은 소환수가 되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훨씬 사납고 용맹해진 느낌.
언데드류의 몬스터들을 소환수로 만들면서 느낀 건데, 확실히 일반 몬스터보다 언데드가 상성이 좋은 것 같았다.
검은 소환술 자체가 마이너스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벡실룸이 관 밖으로 발을 빼냈다.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을 중심으로 회오리가 형성된다. 그것은 곤 강력한 돌풍이 되어 우리에게 쏘아졌다.
쿠과과광-!
공간을 절반 이상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한 스킬이었지만 우리는 직격타를 맞지 않았다.
아린이 ‘방패의 곡’을 연주해 높은 방벽을 세운 것이다.
퍼엉-!
그사이 내가 소환한 카리스들이 던전 마스터에게 접근했다. 스케레톤 몬스터들이 열심히 검을 휘둘렀지만 기대만큼 강한 대미지는 들어가지 않는다.
급할 것은 없었다. 어차피 던전 마스터와의 일전은 일정 이상의 시간을 소모해야 끝낼 수 있는 싸움이니까.
벡실룸은 귀찮다는 듯 카리스를 발로 걷어찼다. 그럴 때마다 소환수들의 녹색 게이지가 크게 깎였다.
암젤 역시 표범 세 마리를 소환했다. 거대한 몬스터를 중심에 놓고 다섯 마리 소환수가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크르르르!”
“캬오옹!”
벡실룸은 자기를 공격하는 소환수들을 내버려 두고 두 팔을 허공을 향해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까 튕겨져 나가 바닥 여기저기에 널려 있던 수십 개의 관 뚜껑이 들썩거리며 솟구쳤다.
벡실룸이 앞으로 뻗은 손짓에 수십 개의 관 뚜껑이 날아왔다.
워낙 많은 숫자가, 워낙 빠른 속도로 날아든 공격이었기 때문에 아린이 방패의 곡을 연주해도 전부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각자 몸을 움직여 관 뚜껑을 피했다. 동시에 나는 아린을 향하려는 관 뚜껑도 차단했다.
쾅! 쾅-!
“캬오오오~!”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지럽게 얽혀갔다.
9
쿵-!
세 시간이 넘게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던 던전 마스터가 무릎을 꿇었다. 싸움의 막바지에 이르자 나와 NPC들 또한 모두 지쳤다.
각자 보유한 포션도 거의 남지 않았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슬롯 네 개짜리 소환수들을 내보냈다.
“키아아악!”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오르는 세루피들.
검은 새가 살점이 떨어져 최초의 모습에 가까워진 벡실룸의 얼굴로 굵은 화염을 쏟아냈다.
화르르륵-
“크아아!”
불이 붙은 머리통을 감싸 쥐고 던전 마스터가 괴로운 비명을 내지른다.
벡실룸은 손을 뻗어 세루피 한 마리를 움켜잡았다. 그대로 벽에 집어 던지자 한 번에 3분의 2가 넘는 생명력이 닳았다. 한 마리 검은 소환수가 빠진 틈을 암젤이 소환한 퓨마들이 메꾸었다. 동시에 아린이 수면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수면의 곡은 레벨이 높고 저항력이 강한 몬스터들을 상대로는 잘 통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처럼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면 적중률이 높아졌다.
“크으…… 크르르…….”
미라 몬스터가 느리게 주먹을 휘저었다.
체력이 얼마 남지 않고 졸음까지 쏟아지는 상황이라 그것은 하릴없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나는 바자야의 활을 꺼냈다.
‘연사!’
짧은 시차를 두고 쏘아진 세 대의 화살이 미라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퍽! 퍽! 퍽!
“크아아아!”
길고 처량한 목소리를 토해내며 던전 마스터의 몸뚱이가 기울어졌다.
쿵-!
[퀘스트 ‘일곱 시간 안에 던전 마스터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27,000, GP +55,000을 얻었습니다.]
[‘미라의 정수’ ×1을 획득했습니다.]
[레벨 48이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던전 마스터를 물리치고 레벨이 오른 것도 기쁘지만 나는 ‘미라의 정수’를 획득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벡실룸에게서 미라의 정수를 얻는 방법은 몬스터가 죽기 직전 심장을 파괴하는 것밖에 없다.
이것뿐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으나, 똑같이 심장을 파괴해도 미라의 정수가 출현하는 것은 확률에 따라 달라졌다.
미라의 정수 출현 확률은 약 30퍼센트.
효과는 전투 불능에 빠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어도 회복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재생력을 부여받는 것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일반 회복제와는 달리 미리 복용을 해도 1회에 한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아이템은 어려운 전투를 치르기 전에 먼저 복용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곤 했다. 당연히 시장에서 수억을 호가하는 가격에 팔리고 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사파이어 모양의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사냥 자체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저절로 긴 한숨이 나왔다.
“후우~”
[‘차원문의 열쇠’ 사용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차원문의 열쇠’의 이용 기간은 7일입니다.]
‘끝까지 조건을 붙이는구나.’
사용기간을 제한했다는 사실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불만은 없었다.
일주일이나 열쇠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Chapter 20 - 노아 알렌
1
“오케이. 알았어, 제시카. 오늘 밤에 보는 거야. 그래, 나도 당연히 기대되지. 이따 봐~”
노아는 말투와 달리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방금 통화한 제시카 알바레즈는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할리우드 배우다.
평범한 남자라면 실물이라도 한 번 보기 위해 안달을 내겠지만 그에게 제시카는 핸드폰에 저장된 수백 명의 여자 중 하나일 뿐 특별할 게 없었다.
노아 알렌.
그는 명실 공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매스컴에 나서는 일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도 언론에서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압도적인 재력을 가진 젊은 천재.
바야흐로 게이머들이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보다도 인기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는 개중에도 특별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 3대 길드인 피스&호프의 부길드장.
이미지가 좋고 잘 나가는 길드이니 당연히 쏟아지는 관심이 컸다.
“으~ 지겹네!”
집 안에는 어젯밤 치른 파티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명색이 게이머라서 숙취가 심하지는 않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로움을 느낀다.
‘일이나 해볼까?’
형인 니콜라스는 길드를 운영하고 던전을 공략하는 게이머 본연의 업무에 충실했다. 대신 자신이 하는 일은 피스&호프를 움직이는 은밀한 부분인 카오스 게이머 닷컴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음…….”
그는 사이트에 접속하여 곧장 관리자 메뉴로 들어갔다. 직원들은 매일 그에게 꼭 알아야 할 사실을 간추려 메일로 보고를 했다.
“응?”
메일을 읽어 내려가던 그는 관심이 가는 사항을 하나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리에고 등불? 이건 뭐야?’
아이템도 아이템이지만 판매자 이름에 더 눈길이 간다.
OG. 승인된 지 얼마 안 되는 새로운 판매자였다.
‘한국이라고 했지?’
한국은 세계 아이템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 나라이다. 따라서 지부를 만드는 데도 후순위로 밀려 최근에야 지부가 창설되었다.
크게 관심이 없는 곳이었는데 한 달 전 사정이 바뀌었다.
귀화제.
그 아이템이 처음 보고되었을 때 또 시답잖은 물건에 그럴듯한 이름만 붙였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효과가 무려 마나와 체력 소모량을 일정 시간 줄여주는 것이었다. 그게 허풍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적잖이 놀랐다.
‘아직도 새로운 아이템이 개발될 여지가 있다니!’
암시장이든 정식 시장이든 게이머용 아이템 시장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던전과 게이머의 숫자가 더 늘지 않고 있었으니까.
신기하게도 전 세계 게이머의 숫자는 이십만 명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새로 각성자가 나오려면 기존 게이머들이 사망을 하거나 능력을 잃어야 한다.
따라서 게이머용 아이템 시장의 크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등급이 높은 게이머들의 장비 고급화는 여전히 성장 가능성이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방어구 같은 것들은 못 쓰게 될 때까지 몇 년은 걸리기 때문에 시장이 작아지는 추세였다.
초기부터 워낙 공격적으로 개발된 탓에 더 이상 새로운 아이템이 나올 가능성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쓸 만한 아이템이 별안간 시장에 나오다니.
귀화제는 성능도 뛰어났지만 만들어낸 과정이 더 놀라웠다. 기존 아이템을 새로운 방법으로 ‘조합’하여 만든 것이었으니까.
노아는 귀화제의 재료가 무엇인지 밝혀졌을 때 깜짝 놀랐다.
자신의 등급은 A이다. A 이상의 등급은 없으니까 브레인형 게이머로서는 최고 수준이라는 뜻이다.
뛰어난 브레인형 능력자의 기준은 단순하다. 각성과 함께 지식을 깨우치는 것이 브레인형 게이머이므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자가 가장 우수한 게이머가 되는 것이다.
물론 각성 후에도 연구를 통해 능력을 신장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응용’의 수준이었다. 각성한 지식을 가지고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세계 최고의 브레인형 게이머인 자신도 이런 식의 조합이 가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