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독식왕 : 클리어러 063화
메티카 여섯 마리 다음에 나타난 것은 카리스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뼈다귀 몬스터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양손에는 낡은 방패와 검을 쥐고 있었다.
겉으로는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실상 이 몬스터는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대체로 뼈마디 전체가 매우 견고하고 공격 기술도 뛰어났으니까.
게다가 방어 능력이 좋아서 원거리 공격도 잘 통하지 않고, 각종 원소 저항력도 높은 편이었다.
혼란의 곡.
카리스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아린이 연주를 시작했다.
길드원들은 뒤에서 악기 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갑옷을 입은 금발 미녀가 작은 하프를 들고 연주하고 있다.
매우 그럴듯한 광경이고 연주도 근사했지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던전에서 뭐하는 거야?’
거침없이 전진해 오던 스켈레톤들이 아린의 연주를 듣더니 걸음을 딱 멈추었다.
달그락달그락.
몸이 떨리기 시작하고, 춤을 추듯 팔다리를 흔들어 댄다.
아린의 연주가 빨라졌다.
거기 맞춰 혼란이 커진 카리스들은 급기야 거칠게 무기를 휘둘렀다.
게이머들이 아닌 서로를 향해.
퍽!
“크악!”
퍼억!
“크아악!”
나는 스켈레톤들이 서로에게 상당량의 대미지를 입히길 기다린 뒤, 마무리 스킬 한 방을 쏘았다.
‘토네이도 스피어!’
파바바박-!
거친 회오리가 카리스들의 몸뚱이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퀘스트 ‘카리스 두 마리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800을 얻었습니다.]
유진이와 동료들은 또 한 차례 충격에 휩싸였다. 소환술로 퓨마를 불러낸 것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악기를 연주해서 몬스터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이었다.
그들은 저네들끼리 소곤거렸다.
“진짜 뭐야? 저 사람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 길드에 스카우트해야 하는 거 아니야?”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더 이상 사사로운 일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사냥을 하러 왔으니까 그냥 사냥을 즐겨야지.
유진이를 제외하면 어차피 또 볼 사람들도 아니고.
원래 유진이 쪽이 주도해야 할 던전 공략이 자연스럽게 나와 NPC들의 주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5
[퀘스트 ‘열 시간 안에 9층 돌파’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10,000, GP +20,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43이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일반 퀘스트는 달성했지만 히든 퀘스트까지 달성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본래 파티원들이 아닌 사람이 세 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보니, 원하는 만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서두른 거니?”
“미안해. 사냥을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몰입이 돼서.”
유진이의 얼굴에 의혹이 드리웠다.
“너 정말 게이머 된 지 한 달밖에 안 된 거 맞아?”
그렇게 물었다가 혼자 고개를 내젓는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십 년 동안 병원에 있었던 애한테…….”
그녀는 자조적인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너 보면서 무슨 생각한 줄 알아? 십 년 전에 너는 누구보다 게임을 잘 했잖아. 사실 나도 게임을 좋아하고 승부욕이 강해서 너를 한 번쯤 이겨보고 싶었었거든.
너한테 말은 안 했지만 밤을 새워서 연습한 적도 있어. 그런데 절대 따라잡을 수 없었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그 생각이 났어.”
나는 또다시 입이 근질거렸다. 진짜로 이 애라면 내가 십년 동안 가상현실 게임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어줄 것 같은데.
생각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 말을 할 순 없었다. 내 얘기를 듣는 순간 유진이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고 말 거니까.
저쪽을 보니 혜리와 현아가 암젤과 아린에게 열심히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얼핏 듣기로 길드에 들어와 달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NPC들은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있었지만.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해야 할 순간이 왔다고 느꼈다.
“잠깐 여기로 와보시겠어요?”
내 말에 혜리와 현아 두 사람이 걸어왔다. 그녀들은 유진이의 옆에 나란히 서서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세 명의 여자를 앞에 두고 스킬을 사용했다.
‘기억 삭제.’
시간이 정지되었다.
[삭제하고 싶은 기억을 말하십시오.]
“나와 NPC들에게 품었던 의심을 모두 지워줘. 대신 기분 좋은 사냥이었다고만 기억하게 해줘.”
조그마한 빛이 유진이와 혜리, 그리고 현아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네 시간 이십 분, 다섯 시간 오 분, 네 시간 오십 분만큼의 기억이 삭제되었습니다.]
[삭제된 기억만큼 새로운 기억이 채워집니다.]
스킬이 발동되자 나는 기력이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나가 조금밖에 남지 않아 현기증을 느꼈다.
정지되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잠시 멍한 얼굴이었던 길드원들이 정신을 차렸다.
유진이가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괜찮아? 역시 D급 던전을 공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
“응……. 장난 아니네.”
나는 스킬이 제대로 효력을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혜리와 현아도 다소 기가 죽은 얼굴에서 처음의 자신만만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더 이상 암젤과 아린에게 길드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쓸모가 있네.’
가상현실 게임 공간에서 기억 삭제 스킬은 크게 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스킬 에그에서 이것이 나왔을 때 실망했었지.
하지만 이제 보니 꽤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현실에서는 오늘 같은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날 테니까.
6
목요일, 금요일도 같은 패턴의 공략이 이어졌다.
나와 NPC들이 주도해서 던전 공략을 하고 사냥을 하는 동안에는 길드원들이 큰 혼란에 빠진다. 세이브 존에 도착한 뒤에 나는 그녀들의 기억을 삭제했다.
결과적으로 의심 없이 D급 던전 세 개 층 공략을 마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레벨이 4 더 올라 47 레벨이 되었다.
던전을 나온 뒤 유진이가 물었다.
“힘들었지?”
“응, 그래도 재밌었어.”
“다음에 또 같이 던전에 들어가자. 언니들도 이번 공략이 꽤 재밌었대.”
“그래.”
암젤과 아린은 길드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내 기억 삭제 스킬이 유진이를 비롯한 혜리, 현아에게 좋은 기억만 남게 했다.
스킬의 효과 덕분에 그녀들은 우리와 꽤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했다.
“공략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봐요~”
“네, 조심히 가세요~”
나는 멀어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졌다. 3일간의 던전 공략으로 D급 던전 11층까지 공략한 기록을 갖게 됐으니까.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도 우리끼리 귀환서를 통해 던전 마스터가 있는 12층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던전 마스터는 일반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존재니까. 나와 NPC들만으로 던전 마스터를 사냥할 수 있을지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지난 3일 동안 나는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다.
검은 소환술사의 빈 슬롯을 모두 채운 것.
레벨 30~40 사이의 몬스터 여덟 마리를 소환수로 만들었다. 스켈레톤화된 놈들의 능력은 버프를 받아 1.5배 더 강해졌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
검은 소환술은 대량의 마나를 필요로 하는데 내가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다.
아이템.
나는 마나 포션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원래 파티의 전투력보다 강한 보스몹을 잡을 때는 물약을 충분히 챙기는 게 상식이니까.
비록 마나 포션을 사느라 남은 GP를 몽땅 소진해야 했지만, 시방 GP가 중헌 것이 아니니까.
7
D급 던전 12층.
던전 마스터가 있는 곳답게 발을 내딛자마자 무거운 분위기가 전해졌다.
암젤은 개운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떨거지들이 없으니 훨씬 편하고 좋다옹.”
“떨거지들이라니. 그래도 덕분에 우리가 고생을 덜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맞아. 어제까지 같이 싸웠던 사람들한테 떨거지는 너무 했어.”
아린까지 그렇게 말을 하자 암젤은 혀를 쏙 내밀고 고양이로 변신했다.
아무래도 인간형보다는 고양이 형태를 더 선호하는 그녀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3일간의 공략은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언제까지 시답잖은 놈들 때문에 우리가 애를 먹어야 하는지 한심하다옹.”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레벨 301이이었을 때는 이만한 던전을 십 분 안에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가상현실 게임에서 처음 레벨을 올릴 때에 비해 지금은 무척 빨리 강해지는 중이었다.
속도를 따지자면 두세 배는 된다. 게임 속에서는 하루 종일 사냥을 했는데도 그렇다.
더구나 메인 퀘스트가 열린 뒤로 현실에서의 게이머 생활도 슬슬 재미가 붙는 참이었다. 전개가 어떻게 될지 전혀 짐작할 수 없으니까.
항상 같은 스토리를 반복해야 했던 가상현실 게임을 생각하면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메리트다.
“키아악!”
거친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붉은 깃털을 가진 커다란 새가 날아왔다.
정식 명칭 ‘세루피’인 이 몬스터는 허공에서 화염을 내뱉으며 공격을 해온다.
레벨도 30대 후반이기 때문에 같은 타입의 몬스터 중에 강한 편에 속했다.
일반적으로 전투 지형을 따질 때 아래보다는 위를 점유한 쪽이 유리하다. 더구나 세루피는 광범위한 화염 공격을 퍼붓기 때문에 시야의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던전 마스터와 싸우기 전에 체력을 보존하고 귀찮은 싸움을 피하기 위해 대항마를 내세웠다.
“모르돈.”
내 의상이 피오리오 세트에서 모르돈 세트로 바뀌었다. 티코이의 손을 거치면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마법사용 방어구.
심플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지는 디자인이 마치 나 자신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마법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나는 조용히 두 마리 소환수를 불러냈다.
“세루피.”
검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그 안에 뼈만 남은 몬스터 두 마리가 나타났다. 슬롯을 네 칸이나 차지하는 이 몬스터를 나는 총 세 마리 소환수로 만들었다.
레벨 30대 후반의 몬스터들이 버프를 받아 50레벨 대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
“윽!”
소환술을 사용한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나 지금 내 수준보다 높은 소환수를 불러내는 것은 신체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마나가 거의 바닥나는 바람에 현기증이 일었지만 그냥 버텨냈다.
이 역시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직업 숙련도는 최고도이지만 레벨 자체가 못 따라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불편하기는 해도 언제까지 내 레벨에 맞는 능력만 사용할 수는 없으니까.
현실로 나온 뒤 갖게 각종 버프를 잘 활용하려면, 그리고 혹시 닥칠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비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몸에 무리가 가는 상황도 최대한 겪어보는 것이 좋다.
“캬아악!”
검은 소환수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마주 오던 세루피들은 일순 날갯짓을 멈추었다.
게이머에 대한 공격 본능은 코어를 통해 저절로 장착되었지만 지금 나타난 것은 자신과 같은 타입의 몬스터이다.
느낌이나 모습은 달라도 혼란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내가 소환한 세루피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정확히 인지했다.
화르르륵-
허공은 수놓은 불덩어리가 붉은 새들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키엑!”
“키에에엑!”
날개에 불이 붙어 비틀거리는 세루피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퍽! 퍽! 퍽!
대여섯 발을 쏘고 나서야 몬스터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역할을 마친 소환수들은 즉시 불러들였다.
소환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마나 역시 되돌아오니까. 소환술을 장시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 역시 잘 다루어야 할 테크닉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