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독식왕 : 클리어러 055화
“…….”
이것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결과다. 레벨 40이 100,000위 안에 들어가는 경계였던 모양이다.
더불어 메인 퀘스트 보상은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 PHASE 1을 완수했습니다.]
[‘차원문의 열쇠’ ×1을 얻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다섯 가지 메인 퀘스트 1단계를 모두 클리어하는 것이 PHASE 1이었다는 건가? 차원문의 열쇠는 또 뭐고?
내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하려는데 암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휴. 질긴 놈이었다옹.”
그녀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박철웅의 시체를 툭툭 찼다. 박철웅의 몸뚱이는 벌써 조금씩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애초에 던전 안에서 벌어진 싸움이 바깥에 알려질 일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 놈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조치를 취해둔 덕분에 더 신경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게 자업자득이라는 거지.’
다만 이번 일은 앞으로 닥칠 골치 아픈 일의 전조이기도 했다. 박철웅이 개인의 의지로 나를 찾아오지는 않았을 거니까.
두말할 것 없이 카오스 게이머 닷컴 즉, 피스&호프는 적으로 돌리기에 부담스러운 존재다.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최종 보스급의 적과 맞닥뜨렸다고나 할까?
더구나 이번 일로 넷이나 목숨을 잃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는 이미 글렀다고 보아야 한다.
“쳇.”
첫 번째 메인 퀘스트를 달성하려고 무리한 것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급하게 돈이 필요하지 않았더라도 암거래는 했겠지만 충분한 사전 조사 없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돈 욕심이 많지 않다.
현실 경험이 적어서인지 남보다 부자가 되고 싶다든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 많다거나 하는 욕구가 적었다.
내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게임을 하는 일이다.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을 얻고,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
꼭 현실 던전에 들어가는 게이머가 되지 않았더라도, 어떤 형태든 게임만 할 수 있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퀘스트의 종용을 받아 수십억의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됐고, 그것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적이 만들어졌다.
‘혹시…….’
퀘스트의 배치 자체가 나를 일정한 흐름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찜찜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타고난 게이머니까.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날 정도로 게임을 좋아한다. 다음 스토리가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한 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주인님, 여기 있다옹.”
고개를 돌리자 인간으로 변신한 암젤이 양손에 결정석을 들고 있었다. 그것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왼손에는 붉은색의 결정석이, 오른손에는 푸른색의 결정석이 쥐어져 있다.
일단 나는 스탯 스톤부터 받아 들었다.
[지금 흡수하시겠습니까?]
“그래.”
화악-
결정석을 빠져나온 여러 줄기의 파란 마나가 내 팔을 휘감았다. 몇 번 겪어봤으니 이제는 이 느낌에도 꽤 익숙해졌다.
레벨 업과 상관없이 얻은 스탯이기 때문에 보너스를 받은 것 같은 기분도 했다.
결정석 하나를 흡수함으로써 단숨에 체력이 7 상승했다.
처음 정보창에서 확인했던 대로 6이 아닌 것은 놈이 자기 부하의 스탯 스톤을 흡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졸개들의 스탯 스톤까지 따로 흡수했더라면 더 많은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부분이다.
다음으로 나는 암젤의 왼손에 들려 있는 스킬 스톤으로 손을 뻗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박철웅에게서 얻을 수 있는 스킬 스톤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핸드 소드(A급, Lv50) 스킬 스톤입니다.]
다만 이 결정석은 지금 내가 흡수할 수 없는 스킬이다.
[검술사 숙련도가 초급 이상이 되어야 흡수할 수 있는 스킬 스톤입니다.]
“음…….”
그냥 포기하고 결정석을 인벤토리에 넣을 수도 있지만 나는 갑자기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바닥에 앉아 메뉴창을 활성화해 합성 모드로 들어갔다.
전에 제임스에게 얻었지만 흡수하지도, 처분하지도 않은 ‘엑스 자 베기’ 스킬 스톤을 꺼냈다.
그것을 방금 얻은 스킬 스톤 옆에 나란히 놓았다.
[합성에 실패한 잔여물은 ‘쓰레기’로 분류됩니다. 그래도 합성을 시도하시겠습니까?]
이 메시지는 볼 때마다 사람을 고민하게 만든다.
확률이 높은 합성을 할 때도 신경이 쓰이는데, 잘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거슬렸다.
나는 내가 잘하는 짓일까 다시 한 번 숙고했다.
하지만 뭐,
아직 ‘부’ 2단계 퀘스트가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이니 돈이 급하지는 않다.
게다가 블러드스톤과 콜드스톤은 처리하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으니까.
‘엑스 자 베기’는 그렇다 쳐도 ‘핸드 소드’는 꽤 좋은 스킬인데, 이만한 결정석을 신분 노출 전혀 없이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스킬 스톤을 합성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번은 직접 시도해 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엑스 자 베기(C급, Lv18)와 핸드 소드(A급, Lv50)를 합성하시겠습니까?]
“……그래.”
두근두근.
심장을 조이는 BGM이 시작되었다.
아는 레시피가 거의 없었을 때, 이것저것 시도해 보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성공보다는 실패할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수백, 수천 번의 실패를 통해 일종의 감을 익힐 수 있었다.
이것과 이것을 합성하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든지, 양은 이 정도로 하는 게 적당할 것 같다든지.
그런 수많은 삽질 끝에 상당량의 레시피를 알아내기도 했다.
이번에도 그 ‘감’이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될지도 모른다고.
[합성에 성공했습니다!]
[‘엑스 자 파동(A급 Lv50)’을 얻었습니다!]
“응?”
반신반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어리둥절했다. 나는 두 개가 합쳐져 하나가 된 붉은색 결정석을 내려다보았다.
엑스 자 파동이라니.
C급 스킬 스톤 하나와 A급 스킬 스톤 하나를 합성해 A급 스킬 스톤 하나를 얻었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손해를 본 것일 수도 있다.
금전적으로 따지면 C급 스킬 스톤 하나만큼 증발한 거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
‘블러드스톤끼리도 합성이 되는구나!’
마찬가지로 콜드스톤도 합성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시도해 봐야 의미가 없는 일일 터다.
스킬 스톤처럼 화학적 변화가 아닌 단순한 덧셈, 혹은 따로따로 흡수하는 것보다 손해가 나는 상황이 펼쳐질 확률이 높으니까.
이 정보가 얼마나 중요하게 쓰이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든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좋아.”
나는 만족스럽게 바닥에 놓인 스킬 스톤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흡수할 수 있는 스킬 스톤입니다. ‘엑스 자 파동(A급, Lv50)’을 지금 흡수하시겠습니까?]
‘응?’
재료가 둘 다 검술 관련 스킬이기 때문에 당연히 합성으로 만들어진 스킬도 같은 검술 계열이겠거니 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스킬의 합성 자체가 말 그대로 화학적 경계를 무너뜨렸다는 뜻이 된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대답했다.
“흡수한다.”
스으윽-
붉은색 마나 줄기가 튀어 올랐다. 스탯 스톤을 흡수했을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스킬 ‘엑스 자 파동’을 얻었습니다.]
“으음…….”
경험해 본 적 없는 스킬이니, 정확하게 어떤 스킬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스킬 정보를 열어보았다.
[엑스 자 파동]
타입 : 액티브
등급 : A
레벨 : 50/50(Max)
효과 : 마나를 발현해 엑스 자 모양의 파동을 발사한다. 무기를 활용하면 더욱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설명은 짧지만 이해는 쉬웠다.
나는 히루도의 창을 꺼냈다.
스킬을 얻으면 머리로는 알지 못해도 몸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텅 빈 벽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엑스 자 파동!’
하얀색 기운이 창날을 통해 발현되더니 창끝에 맺혔다.
웅웅거리며 기세를 확장한 마나가 창을 더욱 묵직하게 만들었다.
나는 수 미터 떨어진 벽을 향해 힘껏 창을 내려쳤다.
퍼엉-!
엑스 자 모양의 파동이 창날에서 뻗어 나갔다. 무거운 기운이 바닥을 휩쓸었다.
꽈과광-!
넓은 벽이 한꺼번에 진동했다. 돌무더기가 튀며 먼지가 일었다.
나는 깊이 파인 동굴 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데?’
히루도의 창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는데, 암젤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왜?”
“깜박 하고 있었다옹. 빨간색 결정이 하나 더 있다옹.”
암젤은 그렇게 말하고 자기 인벤토리에서 블러드스톤 하나를 꺼냈다. 어디서 난 걸까 생각했던 나는 곧 기억을 떠올렸다.
아까 카오스 게이머 닷컴 졸개들을 쓰러뜨렸을 때 암젤은 박철웅 몰래 블러드스톤 하나를 챙겼었다.
“여깄다옹.”
나는 암젤이 내민 블러드스톤을 받아 들었다.
[흡수할 수 없는 스킬 스톤입니다.]
[‘힐(B, Lv28)’을 흡수하려면 초급 이상의 백마법사 숙련도가 필요합니다.]
“음…….”
‘힐’은 모든 백마법의 기본이 되는 동시에 매우 유용한 스킬이기도 하다. 가지고 있다면 좋겠지만 크게 욕심이 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파티로 사냥을 하면 어느 정도 역할 분담이 필요하니까. 한 사람이 이런저런 역할을 모두 맡는다면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일단 인벤토리에 넣으려고 생각했다가, 순진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아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가진 스킬 중에는 ‘치유의 곡’이라는 게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힐’과 ‘치유의 곡’은 같은 백마법 계열이었다.
전에 암젤이 ‘반사’ 스킬이 담긴 블러드스톤을 흡수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번에도 그것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린, 이건 네가 흡수해 봐.”
“제가…… 결정석을요?”
아린은 주인이 방금 결정석 두 개를 흡수하는 것을 보았다. 다른 세상에서도 워낙 여러 가지 신묘한 능력을 보여주던 그였기에 크게 이상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그 일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니까.
“제가 흡수할 수 있는 물건인가요?”
“아직은 몰라. 하지만 될지도 모르니까 속는 셈치고 한번 해보면 되지.”
아린은 블러드스톤을 받아 들었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 미간을 찡그리던 그녀는 거기에서 빛이 새어 나오자 깜짝 놀랐다.
“어? 어……?”
블러드스톤에서 빠져나온 기운이 아린에게 모두 흡수되었다.
이내 그녀의 손에는 잿빛으로 변한 돌덩이만 남겨졌다.
“어때?”
아린은 몇 차례 눈을 끔벅였다. 자기에게 찾아온 변화를 알아챈 그녀가 대뜸 하프를 손에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한층 능숙하고 현란해진 음률.
그녀가 연주하는 것은 ‘치유의 곡’이었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같은 곡을 들었기 때문에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스킬의 효과가 더욱 강력해졌다.
아린이 기뻐하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