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독식왕 : 클리어러 051화
김밥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은 아린이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어머님은 음식 솜씨가 좋으세요!”
티코이도 실력이 뛰어나지만 아린의 입맛에는 이쪽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우리 시어머니가 한 솜씨 하신다옹.”
“누가 네 시어머닌데?”
식사를 마치고 꿀물까지 한 잔씩 마시자 기분이 거나해졌다. 치열함은 전혀 없이 마치 피크닉을 온 것 같은 던전 공략이다.
적당히 쉬다가 몸을 일으켰다.
6층의 공략도 어렵지는 않을 전망이었다.
이곳의 대외적인 던전 마스터는 고보르라는 녀석이었다.
레벨이 30~35 사이인 이 몬스터는 일신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머리가 나빠서 원 패턴의 공격밖에 할 줄 모른다.
우리 파티의 전투력을 감안하면 30분이 넘지 않을 공략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던 나는 퍼뜩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히든 퀘스트를 달성하고 얻은 보상.
검은 소환술사라는 새로운 클래스를 얻은 데 정신이 팔려 그것을 깜박하고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보았다.
‘역시.’
그 안에는 최고급 스킬 강화석 하나가 들어 있었다.
스킬의 등급을 무조건 한 단계 올려주는 아이템.
스킬창을 열어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목록을 살펴보았다.
후보에서 제외할 수 있는 스킬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로또.
S급인 스킬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고급 스킬 강화석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전투 시에 자주 사용하는 액티브 스킬들을 보았는데 급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전투 스킬들은 어느 정도 레벨과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
배보다 배꼽이 커지면 실전에 사용하기 부담스러워지니까.
그런 내 시선이 아래로 이동했다. 두 가지 패시브 스킬 중 하나에 특히 더 눈길이 갔다.
투시자의 눈.
이 스킬은 나보다 수준이 낮은 상대의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등급을 올리면 정보를 볼 수 있는 대상의 범위가 넓어지고 아울러 정보의 질이 향상되었다.
나보다 수준이 낮아야 한다는 전제가 사라진다는 뜻.
지금까지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등급을 올려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명예’ 항목 메인 퀘스트가 다름 아닌 ‘카오스 게이머 처치하기’니까.
게이머를 상대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보다 강한 상대와도 맞닥뜨릴 수 있다.
결심을 굳힌 나는 강화석을 꺼냈다.
[등급을 올릴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스킬 목록 중 ‘투시자의 눈’을 터치했다.
화악-
손 안에서 붉은빛이 터지며 메시지가 이어졌다.
[스킬 ‘투시자의 눈’의 등급이 S가 되었습니다!]
[업적 ‘초고속 클리어’의 효과로 기억이 활성화됩니다.]
[스킬의 레벨이 100이 되었습니다!]
등급이 오른 스킬이 단숨에 만렙이 되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짜릿하다.
레벨을 올리려고 노가다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청량감을 준다.
내가 강화를 할 동안 암젤과 아린은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 공간에 있을 때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은 같은 상황에 이골이 나 있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싱긋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고보르를 사냥하러 가 볼까?”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갔을 때쯤 갑자기 석연치 않은 기분이 느껴졌다.
암젤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료 NPC를 만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현실로 돌아온 뒤 같은 감각을 딱 한 번 느낀 적이 있었다.
감별 스킬까지 가지고 있지 않아서 누구인지, 몇 명인지까지는 특정할 수 없었다.
‘왜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 걸까.
걸음을 멈춘 채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관리소 직원의 시선이다.
그가 나를 보던 찜찜한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야 밝혀진 셈이다.
관리소까지 끌어들인 것을 보면 이 위에 기다리고 있는 놈들이 누구일지 범위를 좁히는 게 가능했다.
거래를 위해 카오스 게이머 닷컴 놈들을 만났을 때, 그때도 관리소 직원은 눈짓만으로 우리를 통과시켰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와 오늘, 던전 공략을 하면서 다른 게이머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하루쯤은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틀 연속이라면 이상하다.
내 공략 속도를 감안하면 한두 팀은 마주쳐야 정상이니까.
‘어떡하지?’
방법은 두 가지다.
부딪치거나, 아니면 피하거나.
며칠 전에 같은 일을 겪었다면 아마도 조용히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협상을 하면서 보았던 박철웅의 아우라는 그만큼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그때와는 사정이 달라졌다.
레벨이 조금 오른 정도로는 간극이 크게 좁혀졌다고 볼 수 없다. 그보다 큰 변화는 우리 쪽 파티가 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파티 밸런스를 높여 줄 중요한 동료가.
놈들은 아직 아린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상대에게는 없는 또 한 가지 절대적인 메리트가 이쪽에 있었다.
“주인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린이 물었다.
감이 좋은 암젤과 달리 그녀는 아직 사태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지금 처한 상황을 말해주었다.
“정말요? 나쁜 놈들이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요?”
나쁜 놈이라니, 그녀다운 표현이다.
“걱정 마.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네, 걱정 안 해요.”
아린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는 이쪽 세상에 오기 전에 비슷한 상황을 숱하게 겪은 사실을 기억했다.
그때마다 주인님은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곤 했다.
파티에 합류한 지금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만만한 놈들이 아니야. 아마 놈들도 자기 쪽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그 점을 노리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방법이 있는 거냐옹?”
암젤이 궁금한 눈으로 물었다.
나는 두 NPC에게 계획을 말해주었다.
4
6층에 올라가자 아니나 다를까.
한 무리의 게이머가 길을 막고 있었다.
드래곤파워 놈들과 다른 점이라면 보다 당당하게, 마치 자기네가 기다리고 있는 게 함정 따위가 아닌 양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멤버 구성은 며칠 전 던전 안에서 협상을 벌일 때와 비슷했다.
다만 오늘은 검은 정장 대신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박철웅은 오늘도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수트가 방어구 역할을 할 리는 없다. 그만큼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다거나, 혹은 우리를 얕잡아 보고 있다는 거겠지.
나는 그의 오만함에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이군요.”
“네.”
박철웅의 인사에 나는 짧게 답했다.
길을 막은 것이 좋은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쓸데없는 문답을 길게 나눌 생각은 없기 때문이었다.
내 반응이 덤덤한 것을 보고 박철웅이 되레 놀란 눈치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합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전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던 ‘귀화제’의 인기가 매우 높습니다. 그때 한 번 거절 의사를 밝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묻고 싶어서 왔습니다. 조성오 씨, 우리에게 레시피를 알려줄 생각이 없으십니까?”
내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딴에는 놀라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지만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놈들인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자그마치 세계 3대 길드다. 단순한 암거래 사이트라면 몰라도 세계 3대 길드가 일개 게이머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테니까.
“싫다면?”
박철웅은 검지을 들어 올려 자기 코끝을 두드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파악-!
잠깐 사이에 그에게서 폭풍 같은 마나가 쏟아졌다. 기세가 대단했지만 나는 조금도 움츠리지 않았다.
‘레벨이 50이 넘으면 이 정도는 되어야 정상이지.’
내 눈에 박철웅의 정보창이 보였다.
이름 : 박수철
레벨 : 52
성향 : 오더(Order) E / 카오스(Chaos) B = 카오스(Chaos)
업적 : -
랭킹 : 70,397위
스탯 : 근력 55 /체력 40 /민첩 49 /행운 34
스킬 :
액티브 - 핸드 소드(A, Lv50)
패시브 - 신체개조(A, Lv50)
이력 : 유능한 게이머였던 박수철은 한때 리더로서 대규모 파티를 이끈 적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적성을 찾은 것은 피스&호프에 들어간 뒤이다.
살인 혐의를 받고 미국으로 도주했을 때 우연히 정태환(데이비드 정)을 만나 길드에 입사하고, 성형 수술과 신분 세탁을 거친 뒤 그의 수족으로 되었다.(타입 : 변신형)
약점 : 자기 능력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 뜻밖의 틈을 드러낼 때가 있음. 핸드 소드는 동작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해 실제 근접전에서는 무적이나 다름없는 스킬이지만 위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신체 개조를 거쳐야 한다. 신체 개조가 많은 양의 마나를 소모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공을 펼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보상 : 핸드 소드(40-30%), 신체 개조(20-5%), 근력 6(70-55%), 체력 4(50-35%), 민첩 5(45-35%)
‘본명이 박수철이네.’
투시자의 눈이 S급이 되면서 볼 수 있는 정보가 늘어났다. 마지막에 추가된 약점과 보상이 그것.
약점은 두루뭉술하게 표현될 때가 많아서 직관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보상 옆의 괄호에 나온 숫자는 첫 번째가 내 행운 수치를 감안한 드롭률, 그리고 두 번째가 원래의 드롭률이었다.
게이머를 상대한 경험은 많지 않아서 변수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섰다.
변신형이라는 유형은 처음 보는 것이기도 하고, 과연 박수철 씨가 얼마만큼의 능력을 보여줄지.
“협상은 지난번에 충분히 했습니다. 조성오 씨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알고 있어. 협박하러 온 거잖아.”
무심한 내 태도에 카오스 게이머 놈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졸개들은 조용히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박철웅을 보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나는 자객들 하나하나의 레벨과 스킬을 확인했다.
역시나 박철웅을 제외하고는 별 볼 일 없는 놈들이었다.
[메인 퀘스트 ‘카오스 게이머 셋 이상 처치하기’가 수락되었습니다. 기한은 7일입니다.]
‘허, 참.’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되레 상기시켜 주어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이겨야 할 이유가 늘어난 셈이니까.
박철웅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우리는 성오 씨를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 대접하고 레시피를 들을 생각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한 말이라면 나쁘지 않다. 대놓고 죽이겠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말이니까.
머리가 조금만 돌아간다면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문 뒤에 기다리는 것은 물론 죽음일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고 살려 보낸다는 것은 더 말이 안 된다.
아마도 날 죽이고 블러드스톤 혹은 콜드스톤까지 털어가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