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독식왕 : 클리어러 050화
소재와 디자인에서 소소한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모양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NPC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의상 체인지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이다.
던전 안에서야 옷이 야해도 상관없는 일이니 그녀에게도 평상복과 전투복, 양쪽 다 준비시킬 필요가 있어 보였다.
‘오늘은 시선을 좀 받더라도 이대로 가는 수밖에 없겠네.’
아린이 고른 의상은 지금 입고 있는 것보다 방어력과 마나 증폭률이 크게 상승한 것이었다.
가격은 30,000 GP.
티코이의 손을 거치면 성능이 더욱 좋아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린은 기뻐하며 새 옷을 받더니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심장이 덜컥 할 정도로 놀랐다.
“잠깐!”
“네? 왜 그러세요? 주인님?”
나는 순진한 아린의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NPC들은 수치심이라는 게 없는 건가?’
어쩌면 주인인 내 앞이라 속살을 보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고개를 가만히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갑옷 안에 간단한 속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남아 있는 GP로 중급 포션과 하급 마나 포션을 각각 아홉 개씩 샀다.
그것을 NPC들과 세 개씩 나누어 가졌다.
Chapter - 17 어설픈 습격
1
역시 아린은 돌아오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여자치고 큰 키와 길게 늘어뜨린 금발, 그리고 일상복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의상.
“우와, 엄청 예쁘네. 모델인가?”
“외국인 같은데? 코스프레하나 보다.”
행인들의 말소리가 오감이 발달한 우리 세 명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아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 복장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비치는 건가요?”
“음 뭐랄까, 그런 점이 없지는 않지만…… 예쁘다는 뜻으로 말하는 거니까 신경 쓸 것 없어.”
내 말에 아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저 때문에 주인님이 함께 창피를 당하시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됩니다.”
“그렇지 않아. 오히려 이곳에서는 미인과 같이 다니는 남자가 능력 있다고 생각해.”
“미인…….”
아린의 고개가 푹 떨궈졌다.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 공간에서는 그녀에게 예쁘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아린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NPC에게도 마찬가지다.
예쁜 여자 NPC는 일종의 법칙 같은 거니까 자연스럽게만 생각했을 뿐이다.
게임 안에서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아름다움이 현실로 나오게 되자 특별한 개성이 되었다. 암젤도 그렇고, 아린도.
어쩌면 나는 남들 눈에 행운아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야옹!”
고양이 울음소리에 옆을 보았더니 암젤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 그녀에게 한마디 해주었다.
“너도 예뻐, 암젤.”
“흥, 나도 안다옹.”
[의기양양]
나는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오른 감정 메시지를 보고 혀를 찼다.
‘이런 뻔뻔한 묘족 같으니!’
2
집에 가기 전에 우선 들른 곳은 티코이의 집이었다. 던전 안에서 생각한 대로 우리 집에 대뜸 아린을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티코이가 밝은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주인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가 고생한 것에는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냐옹?”
암젤의 말을 무시한 티코이의 눈이 아린 쪽으로 향했다.
“던전에 있다는 동료가 아린이었군요!”
“응, 앞으로 친하게 지내도록 해.”
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분은 누구죠? 어떻게 내 이름을…….”
티코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거, 참.’
이 녀석의 상처는 아마 새로운 NPC를 만날 때마다 계속 들추어질 것 같았다.
나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자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티코이의 집에는 욕실이 세 개 있었다.
덕분에 던전에 다녀온 우리 세 사람은 각각 한 개씩의 욕실에 나누어 들어갈 수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암젤이 과자를 먹고 있었다.
아린은 아직 나올 기미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원래 여자의 씻는 시간이 남자보다 길다는 것은 상식이다.
암젤 이 녀석이 지나치게 빠른 거지.
나는 티코이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당분간 네가 아린을 맡아주었으면 해.”
“네, 주인님은 가족분들이 계시니 아무래도 불편하시겠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주거지를 바꿀 생각은 없으십니까? 앞으로 동료가 더 늘어나면 그들이 생활할 공간이 필요하고, 앞으로는 위험에 노출될 일도 많을 테니까요.”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같은 생각을 했다.
퀘스트를 달성해 판이 커질수록 좀 더 그럴듯한 아지트가 필요해질 거라는.
무엇보다 걱정이 되었다.
카오스 게이머들을 상대하다 보면 분명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 생길 텐데, 그러면 어머니와 누나에게도 피해가 미칠지도 모른다.
“주인님, 제가 한번 알아봐도 되겠습니까? 보안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 아무래도 주택이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천히 하자. 아직 돈도 충분치 않고.”
“네.”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티코이의 눈은 이미 빛나고 있었다.
에휴, 이 유능한 워커 홀릭 같으니.
철커덕, 철커덕.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자 아린이 샤워를 마치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몸을 씻는 일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몰랐습니다.”
“뭐?”
암젤이 전혀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샤워를 마친 아린은 한 달 동안 묵은 때를 벗고 말끔해져 있었다. 그늘이 졌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으며 나를 보고 웃었다.
티코이가 말했다.
“아린도 평상복이 필요하겠군요.”
역시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문제를 인지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까지는 좋은데, 입은 옷이 던전 안에서와 똑같은 갑옷이었으니까.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 옷을 입은 채 24시간 생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잘 부탁해.”
나는 티코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3
다음 날.
던전 공략을 위해 집을 나선 시간은 오후였다.
아린과 합류하러 티코이의 집으로 갔다.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갑옷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연보랏빛 원피스가 맞춤옷처럼 잘 어울렸다. 드러난 피부는 새하얗고 키가 크고 비율이 좋아서 마치 CF의 한 장면처럼 보기 좋았다.
“주인님!”
아린이 밝게 웃으며 달려왔다. 그간의 고생은 이제 완전히 털어낸 얼굴이었다.
육체적인 것보다도 마음고생이 대단히 컸을 터다.
나야 원래 있던 세상에 돌아온 것이지만 아린의 입장에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 덜렁 떨어진 거니까.
거기다 정체불명의 목소리에게 던전 마스터가 되라는 지시까지 받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봉변을 당할 뻔하기도 했지.
명색이 나와 함께 가상현실 게임 공간을 평정한 NPC인데, 라이에킹 같은 잡몹에게 당했다는 것은 굉장히 치욕스러운 일이다.
“가자.”
내가 앞장서자 아린과 암젤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4
던전에 도착한 우리는 두 패로 나누어졌다.
나와 암젤, 그리고 아린으로.
아린에게는 아직 인간 신분이 없었다. 어제 던전에서 나올 때도 비밀 통로를 이용해 따로 빠져나온 그녀였다.
두 번째로 본 관리소 직원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약간 경직된 것 같기도 하고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
어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두 번이나 같은 일을 당하니 의구심이 생겼다.
내가 유명한 게이머도 아닌데 직원이 특별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뭔가 있는데…….’
나는 의심은 일단 가슴속에 담아두었다.
던전이 위험한 장소라는 것은 이미 첫 번째 공략 때 배웠다. 이곳은 현실과 완벽히 유리된 새로운 세상이다.
밖에서 볼 때는 아무 이상 없이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무법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 곳이다.
귀환서에 손을 얹고 단숨에 3층 세이브 존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갑옷으로 의상을 바꾼 아린이 서 있었다.
아린과 합류를 한 마당에 굳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략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곳의 던전 마스터는 그녀이니까.
아린의 명령 한마디면 모든 몬스터가 길을 터줄 것이다. 그것 말고도 단숨에 6층으로 올라가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편법을 택할 수 없는 이유는 퀘스트의 달성 조건 때문이었다.
어제 이곳에 들어오면서 자동 수락된 메인 퀘스트 ‘던전 한 개 이상 획득하기’.
던전을 획득하려면 관련 퀘스트를 모두 달성해야 한다.
어제 절반을 해치웠지만 아직 절반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남은 세 개 층에는 특별히 강한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해 두 명의 NPC에게도 익숙한 놈들이고 레벨의 격차 또한 크다.
마주치는 몬스터들은 우리를 보고 혼란에 빠졌다.
일반적인 게이머라면 무조건 공격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만, 일행에 던전 마스터도 끼어 있는 것이다.
놈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여유 있게 사냥을 했다.
4층과 5층을 통과하는 데 총 네 시간가량이 소요되었다.
마치 산책을 하는 것처럼 여유 있는 공략이었다.
퀘스트를 달성하는 것과 동시에 신경을 기울인 일은 아린의 숙련도를 쌓는 것이었다.
그녀 안에는 가상현실 게임 공간에서 축적된 노하우가 있지만 시스템상으로는 어쨌든 한 번 초기화를 거쳤다.
시스템상의 숙련도를 올리는 데는 물리적인 시간을 들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소형 하프를 통해 쏟아지는 그녀의 연주를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마치 훌륭한 BGM을 듣는 것과 같다.
장소는 현실의 던전이지만 가상현실 게임 안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향수도 불러일으켰다.
나 이외의 파티원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암젤도 그녀의 존재감만은 인정했다.
“아린이 연주 하나는 참 잘한다옹.”
5층 세이브 존에 이르러 나는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암젤도 기쁘게 내 앞으로 와서 앉고, 아린도 내 대각선 자리를 차지했다.
인벤토리에서 어제보다 한층 커진 찬합을 꺼냈다.
어머니에게 적당히 사정을 설명하고 더 많은 양의 도시락을 싸 온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도시락을 싸 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 본인이 이 일을 즐겁게 생각하고 계시니까.
요즘 어머니의 모습은 내가 열 살 때 보았던 모습과 거의 같았다.
현실로 처음 돌아왔을 때보다 잔소리가 살짝 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반가웠다.
어차피 집에서 함께 생활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나 역시 그때까지만이라도 어머니가 싸주시는 도시락을 마음껏 먹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