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독식왕 : 클리어러 048화
서둘러 그것에 손을 얹고 자신의 느낌을 따라갔다.
곧 그녀의 입에서 조용한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주인…… 님?”
깨달은 순간 연결되었던 감각이 끊어져 버렸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던전 마스터의 임무에 더 집중할 수 없게 됐다.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불균형은 점차 임계점을 향해 갔다.
사건의 원흉은 한 마리의 변종이었다.
3층의 데미 마스터 라이에킹.
평소 던전 마스터를 만만하게 여기고 있던 그 녀석이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라이에킹은 먼저 거짓 정보로 마스터를 꾀어냈다.
그다음 수하들을 불러 그녀를 포위했다.
“뭘 하려는 거야……?”
아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라이에킹은 몇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탐욕이 서려 있었다.
던전 안의 몬스터들은 마스터에게 반항할 수 없는 심리적인 저항감이 있다. 일반 몬스터라면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하겠지만 데미 마스터는 달랐다.
원래 명령과 복종의 개념이 약한 성격인 데다 던전 안의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 월등한 기량을 가지고 있다.
던전의 몬스터는 공략을 하러 들어온 게이머들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이지만 녀석은 영악하게도 자기보다 강해 보이는 게이머들이 나타날 때마다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했다.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코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나타난 변종은 이처럼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던전 브레이크는 결국 이런 변종이 많아져서 발생하는 것이다.
“크르르르…….”
핏발 선 데미 마스터의 눈을 마주 본 아린은 저절로 몸이 떨려왔다.
만약 던전 마스터의 임무에 충실하여 균형을 깨뜨릴 가능성이 있는 놈들을 솎아냈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레벨 또한 지금보다 높아졌을 터.
과거 자기 능력을 극히 일부만 되찾았더라도 놈이 자신을 공격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린은 궁지에 몰리고 나서야 자기 잘못을 깨달았다.
사방이 몬스터들로 꽉 막혀 있어서 도망을 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싸워야…… 한다.’
몬스터와 싸우는 것은 그녀에게 익숙한 일이다. 원래 있던 세계에서 숱하게 해온 일이 바로 몬스터 사냥이었으니까.
하지만 파티원으로서 그녀의 포지션은 후방 지원이었다.
뒤로 물러나 동료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버프를 날리는 게 그녀의 임무였다.
레벨이 일정 수준 이상 되고 나서는 물론 혼자서 충분히 사냥할 수 있는 실력이 되었지만 실제로 그럴 일은 없었다.
파티에 자신보다 공격 능력이 뛰어난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각자 자연스럽게 포지션을 잡고 스스로 잘하는 것만 하면 되었다.
레벨이 12밖에 되지 않는 라이에킹에게 뒤통수를 맞아 위기에 빠지다니.
어이없는 일이지만 현재 자신에게는 이를 물리칠 힘조차 없다.
‘주인님…….’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며칠 전 코어를 통해 느꼈던 것은 분명 그분의 기운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주인님이 있는 곳이 결코 이곳과 멀지 않다는 것을.
목소리가 말했던 대로 기다리면 자신을 맞으러 찾아올 거라는 걸.
‘아직 죽을 순 없어!’
하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감은 그녀는 강하게 현을 튕겼다.
띠링!
던전 마스터가 항상 연주하던 음률이 아님을 눈치챈 늑대들은 움찔 놀랐다. 단순한 가락이지만 그 안에 날카로운 살기가 담겨 있었다.
한편으로는 질책처럼 들리기도 했다. 감히 너희들이 나에게 반항을 하느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그녀의 모습에 몬스터들은 저마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본래 마스터에게 반항할 수 없도록 설정된 그들이다.
이 억제력은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작용했다.
몬스터들이 주춤대는 사이 아린의 손가락은 하프 위에서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띠링! 띠리링-!
귀에 꽂히는 강한 음색이 물리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낑!”
“끼이잉!”
레벨이 5~7에 불과한 소형 라이에들이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났다.
라이에킹은 당황했다.
그는 이번 일이 아주 쉽게 성공할 줄로 알았다. 이제껏 봐온 바로 던전 마스터의 전투 능력은 전무했으니까.
늘 시무룩한 얼굴로 슬픈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전부였다.
던전 마스터를 빨리 물리치고 기세를 몰아 최상층에 있는 ‘고보르’에게 도전할 생각이었다.
반란의 시작 지점을 3층으로 잡은 것은 6층에 그놈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오기 전에 던전 마스터를 맡고 있었던 놈.
놈은 머리가 나쁘지만 전투력에 있어서만큼은 던전 안의 다른 어떤 몬스터보다 뛰어났다.
고보르는 던전 마스터에게 호의적이다. 그녀가 하프를 연주할 때마다 멍청한 얼굴로 경청하곤 했으니까.
‘지금은 잠을 자고 있겠지.’
무능한 던전 마스터를 추종하는 고보르는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잤다. 이번 일을 획책할 때에도 놈이 항상 낮잠을 자는 시간을 고려했다.
라이에킹은 눈앞에서 필사적으로 하프를 연주하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멍청한 놈들이 이까짓 것에 몸을 사리다니!’
“캬우웅!”
라이에킹이 높은 울음을 내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라이에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물러나던 걸음을 멈추고 데미 마스터를 곁눈질했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던전 마스터와 데미 마스터 중 누가 더 두려운 존재인지.
지금 던전 마스터를 공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약해빠진 던전 마스터가 데미 마스터를 이길 가능성은 없으니까.
“커허엉!”
눈치 빠른 라이에 한 마리가 가장 빨리 아린에게 달려들었다.
파악-!
아린은 허리춤에 단도를 뽑아 늑대의 목을 그었다.
한 줄기 선혈이 튀면서 몬스터가 나뒹굴었다.
단도는 그녀가 근접전에 사용하는 최소한의 방어책이었다. 뒤로 물러나 연주만 하더라도 가끔 먼 곳에 있는 자신을 공격해 오는 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단도를 휘두르는 동시에 연주도 끊겨 버렸다.
움찔거리던 라이에들이 한꺼번에 이성을 되찾았다.
“캬우웅!”
라이에킹이 또 한 번 내지른 울음소리가 신호가 되어 한꺼번에 던전 마스터에게 달려갔다.
그것을 본 아린은 절망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인님…….’
퍽! 퍽-!
“끼잉!”
“낑!”
귓가를 때리는 몬스터들의 비명 소리.
더불어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돌아본 곳에는 귀여운 얼굴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익숙한 그 얼굴이 누구인지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암젤?”
“이게 무슨 일이냐옹! 저딴 놈들한테 공격이나 당하고!”
아린의 눈이 암젤의 뒤로 향했다.
그곳에 그분이 있었다.
그토록 뵙기를 갈망하던 분!
파티의 리더이자 계약을 맺어 자신의 주인이 되었던 분이 활시위를 잡고 있었다.
피잉! 핑! 핑!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것들은 어김없이 라이에들의 몸뚱이를 꿰뚫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목도하자 더 큰 확신이 떠오른다.
“주인님!”
그가 이쪽을 보았다. 화살을 날리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입가에 상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린!”
아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9
데미 마스터의 반란은 뜻밖의 상황을 만나 꺾어졌다. 그는 늘어나는 몬스터 시체를 바라보며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게이머인가?’
단순한 게이머 같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던전 마스터가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니까.
그녀의 눈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다.
‘젠장!’
라이에킹은 몸을 돌렸다. 영악한 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란이 실패로 돌아갔어도 목숨은 건사해야 했다.
다른 늑대들이 속절없이 사냥당하는 틈에 몸을 빼냈다.
“허억! 허억!”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그는 자기 뒤에 뭔가가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릉!”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섬뜩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잽싸게 다리를 놀렸지만 쫓아오는 맹수의 발이 더 빨랐다.
콰악-!
결국 놈에게 엉덩이를 물렸다.
“깨애앵~!”
인간 게이머들과 고보르를 제외하고는 자기가 최강인 줄 알았던 데미 마스터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대강 라이에 무리를 정리하고 나머지는 암젤에게 맡겼다.
아린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아린.”
“주인님! 정말 주인님이 맞나요?”
“당연하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굳이 얘길 듣지 않아도 그녀가 이쪽 세상에 와서 큰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티코이처럼 빠르게 적응을 하는 경우는 흔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아린 쪽이 정상이겠지.
“고생했어.”
“흐흑!”
아린이 내 몸을 와락 껴안았다. 인간형의 암젤이 귀엽고 요염한 스타일이라면, 아린은 가냘프고 청순한 타입이다.
그녀의 의상 역시 암젤의 것 못지않게 속살이 많이 드러나 있었다.
미녀의 부드러운 몸이 강하게 부대껴 오자 절로 부끄러운 감정이 생긴다.
신나게 늑대들을 사냥하던 암젤이 뒤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아린! 내가 싸우는 틈에 비겁하게 그러기냐옹!”
나는 아린을 밀쳐 낼까 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자연히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아린은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파티의 일원이 되었었지.
‘악사’ 클래스는 단순히 연주만 잘하면 되는 캐릭터가 아니다. 연주를 통해 치유와 버프를 실현하고 적을 괴롭히는 공격 스킬을 사용하기도 한다.
필연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요구했다.
혼자서는 빛을 보기 힘든 클래스지만 파티의 일원으로는 대단히 유용한 포지션이기도 했다.
아린이 합류한다면 전력이 크게 상승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틈에 표범이 라이에킹 한 마리를 내 발 앞에 물어왔다.
놈은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혀를 차며 아린에게 물었다.
“어쩌다 이런 놈한테 당하게 된 거야?”
짐작컨대 이 던전의 주인은 아린일 것이다. 그녀가 데미 마스터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던전 마스터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리라.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니야. 됐어.”
눈앞에 드러난 아린의 정보창을 본 내가 대답했다.
이름 : 아린
성향 : 주인의 성향을 따름
스킬 :
치유의 곡 - 아군의 체력과 마나를 회복시킨다. 레벨이 오를수록 회복량이 늘어난다.
혼란의 곡 - 적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력 : 음악의 본고장으로 유명한 콘푸시온 출신인 아린은 영주의 성에서 열리는 콘테스트에 참가하러 가던 중,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하게 된다. 때마침 지나가던 조성오가 현장을 보고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만명의 악사 중 하나만 가지고 있다는 ‘마나 악사’로서의 재능을 깨우친 그녀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바꾸고, 조성오와 계약을 맺은 뒤 파티의 일원이 되었다.
‘능력이 초기화됐구나.’
스킬이 두 개뿐인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런 잡몹에게 무시를 당하고 반란을 허용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활을 등에 꽂고 인벤토리에서 히루도의 창을 꺼냈다.
유니크급 무기의 시퍼런 창날을 올려다 본 라이에킹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낑! 끼잉!(살려주세요! 부탁입니다!)”
싸악-
무심하게 지나간 창날이 한때 데미 마스터였던 몬스터의 목을 베었다.
[퀘스트 ‘라이에킹 한 마리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800을 얻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던전 내 반란 진압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10,000, ‘최고급 스킬 강화석’ ×1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