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독식왕 : 클리어러 046화
3
피스&호프 한국 지부.
지부장실에 두 남자가 마주앉아 있었다.
데이비드 정과 박철웅.
세계 3대 길드로 통할 만큼 거대한 길드의 지부답게 피스&호프가 대한민국 게이머계에 차지하는 입지는 대단했다.
불과 일 년이 안 되는 시간 안에 국민 중 대다수가 데이비드 정을 매스컴에서 최소 한두 번은 보았을 정도다.
그만큼 이 길드가 홍보에 들이는 노력은 컸다. 여타 다른 범죄 집단과는 다르게 뻔뻔할 정도로 이면을 감추고 밝은 면을 부각시키는 데 적극적이었다.
잘나가는 길드의 지부장답지 않게 지금 데이비드 정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린 채 확인했다.
“레시피를 알아내지 못했다고요?”
“네, 3일 동안 분석에 매달렸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데이비드 정의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철웅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더 깊이 숙였다.
얼마 전 한 게이머에게 우선 판매권을 얻은 ‘귀화제’.
이 아이템은 현재 카오스 게이머 닷컴 내에서 가장 핫한 상품으로 부상했다.
물론 이보다 더 비싸고 성능 좋은 아이템은 많았지만, 귀화제가 가진 특별함은 다른 요소를 모두 덮을 정도로 대단했다.
마나 소모량과 체력 소모량을 일시적으로 줄여주는 아이템.
이것이 가진 잠재력을 게이머들은 금방 알아보았다.
심지어 단순히 그런 아이템이 있다더라 하는 소문이 아니라,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서 예판을 시작했다.
새 아이템의 등장은 평소 암거래를 자주하는 게이머든 아니든 큰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1차 예판 물량인 스무 개는 금방 주문이 끝났고 차기 물량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지부 자체 평가에서 3만 달러가 아니라, 그 세 배를 책정해도 팔릴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당연히 이런 사실을 본사도 알고 있었다.
백여 개에 달하는 지부 중 하나일 뿐인 한국 지부는 단번에 주목을 받게 됐다.
데이비드 정은 이런 기회가 결코 자주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시아의 일개 국가를 맡은 지부장에서 단번에 위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여기까지만 생각했을 때는 당연히 두 팔 벌려 반길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레시피를 밝히는 데 난항을 겪고 있었다.
레시피만 알면 판매자와의 관계는 역전된다. 정상적인 절차로 ‘우선 판매’가 아닌 ‘독점 판매’가 가능하게 되니까.
일개 판매자가 카오스 게이머 닷컴만 한 집단과 경쟁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유통망 자체가 비교되지 않을뿐더러 재료 공수에도 불리하다. 심지어 판매자는 법적인 방법으로 억울함을 호소할 길도 없었다.
그래서 다소 마음에 들지 않은 조건을 내걸어도 받아들였던 것이다.
“놈들이 아이템에 술수를 부린 것은 아닙니까? 더미 재료를 섞었다든지?”
“그런 짓을 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밝혀진 재료는 플레지 허니와 플레지킹 스팅 두 가지뿐입니다. 심지어 비율까지 알아냈습니다만 저희 쪽 전문가가 아무리 제조를 해도 같은 아이템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데이비드 정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귀화제’ 같은 아이템이 자기 지부에서 나왔다는 것은 도약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다가는 추락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차려진 밥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위에서 볼 땐 당연히 무능의 극치로 비칠 테니까.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냉정히 대안을 찾을 때이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입술 끝을 비틀었다.
“레시피를 꼭 알아내야 합니다.”
철웅은 고개를 들고 지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가 말한 의도를 단번에 이해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요. 무슨 뜻인지 알죠?”
“네, 지부장님.”
4
나는 암젤과 함께 세 번째 NPC가 있을지 모르는 던전으로 향했다. 그곳의 위치는 지난번에 공략한 E급 던전과 멀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집에서 꽤 떨어진 장소라는 뜻.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면허증을 따야지 안 되겠네.’
나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가상현실 게임에서 사용했던 이동수단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곳의 배경은 이쪽의 역사 관점으로 볼 때 봉건시대와 비슷했다. 신분의 고하가 분명하고, 각 지역을 군주가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물론 대략적인 시스템이 비슷하다는 것이지 다른 점도 많다.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스킬들과 마물이 판을 치는 곳이었으니까.
모든 능력을 한계치까지 키운 경험이 있는 나는 각종 환수를 타고 이동하기도 하고 나중엔 마법 스킬로 대륙을 횡단하기도 했다.
만약 지금도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자동차 따위를 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수준에서 드래곤을 타고 대륙 횡단 스킬을 쓸 정도로 성장하려면 매우 요원한 일로 여겨졌다.
바꿔 생각하면 환수는 그곳에서 실컷 부려봤으니 이곳에서는 자동차를 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동차란 남자의 영원한 장난감이자 로망이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절로 한숨이 나오고 고개가 내저어졌다.
퀘스트를 달성하고 던전 공략하기도 바쁜데 언제 시간을 내서 운전면허를 딴단 말인가.
심지어 메인 퀘스트는 관련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 수락이 되어버린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개인적인 시간은 전혀 갖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이 상황이 백 퍼센트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퀘스트를 달성하면 보상을 얻고, 그 보상은 결국 성장으로 이어지니까.
진성 게이머의 행복은 결국 공략과 성장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운전사가 잔돈을 거슬러 주며 나를 보고 웃었다.
“손님, 게이머신가 보네요. 돈도 많이 벌고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을 테니 부럽습니다. 나도 내일이라도 당장 각성을 하면 좋을 텐데. 허허.”
“네에…….”
대답할 말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 그냥 마주 웃고 말았다. 언뜻 보아도 예순은 훌쩍 넘어 보이는데 게이머를 꿈꾸고 있다니.
일반인이 게이머를 바라보는 관점은 나이와는 무관한 듯했다.
암젤과 함께 던전 관리소 쪽으로 걸어갔다. 이곳 역시 일대에 다른 건물들 없이 허허벌판이었다.
법적으로도 던전 인근 수백 미터까지는 주거지나 상점이 들어서지 못하게 되어 있다.
F급 던전인 이곳은 집 앞 던전처럼 산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층수는 6층.
겉모양은 산과 비슷하지만 테마는 동굴이다.
던전 관리소에서 예약 확인을 하자 직원이 내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다른 던전 관리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유익한 공략 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이번 공략의 목적은 최대한 빨리 동료 NPC를 찾아내는 것이다.
예약은 이틀밖에 하지 않았고 퀘스트 기한도 며칠 남지 않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코이 때를 생각하면 예상 못 한 변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이번엔 다른 욕심 내지 않고 ‘탐사’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관련 활동을 시작하여 메인 퀘스트 ‘던전 한 개 이상 획득’이 수락되었습니다. 기한은 7일입니다.]
“젠장.”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또 하나의 메인 퀘스트가 수락되어 버렸다.
7일이면 이 던전 말고 다른 곳을 예약해 공략하기는 충분치 않은 시간이다. 결국 이곳 던전을 공략하고 마스터가 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이 던전의 모든 퀘스트를 달성해야 한다.
“에휴.”
[업적 ‘맵 제작자’의 효과로 맵이 제공되었습니다. 맵은 인벤토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해당 던전에서 달성할 수 있는 퀘스트는 27개입니다.]
1. 리에고 한 마리 처치하기(경험치 +20)
2. 리에고 다섯 마리 처치하기(경험치 +100)
3. 네뭉 한 마리 처치하기(경험치 +5)
4. 네뭉 열 마리 처치하기(경험치 +50)
…….
나는 빠르게 퀘스트를 스캔했다. 가장 눈여겨본 것은 마지막에 열거된 것들이었다.
티코이를 만났을 때 퀘스트의 숫자가 늘어난 적이 있다.
‘던전 마스터 처치하기’와 ‘던전 마스터 굴복시키기’가 중복되어 나타났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퀘스트가 없었다.
어쩌면 동료 NPC를 찾는 것 자체가 통째로 메인 퀘스트로 옮겨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계획이 틀어졌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음가짐을 새로 했다.
예상 밖이기는 하지만 문제가 생길 만큼은 아니다.
“암젤, 가자!”
“냐옹!”
5
테마가 동굴인 던전답게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불과 십 미터 전방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오감이 발달한 게이머인데도 이럴진대, 일반인이라면 아마 몇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캬아악!”
“키익!”
주위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이 어둡기 짝이 없는 데다 정체불명의 몬스터 울음소리까지 들려온다.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 수 있을 환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비단 나뿐 아니라 이곳에 들어오는 대다수의 게이머가 그럴 것이다.
F급 던전은 모든 던전 중 가장 난도가 낮고 대부분의 하급 던전이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정보를 찾을 수 있으니까.
먼 곳을 응시하자 점점이 떠다니는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던전 1층에는 두 종류의 몬스터가 등장한다.
리에고와 네뭉.
네뭉이 전투 능력이 전혀 없는 몬스터임을 감안하면 정확하게는 한 종류의 몬스터만이 위협이 된다고 보아야 했다.
리에고는 박쥐형 몬스터였다. 대개의 경우 선제공격을 하지 않고 상대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급강하하면서 이빨을 들이민다.
자체의 공격력이 강하다기보다는 어둠 속에 숨어서 공격해 온다는 사실 자체가 성가셨다.
역시나.
몇 미터 나아가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뚝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피하는 대신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창을 휘둘렀다.
파악!
“키에엑!”
[퀘스트 ‘리에고 한 마리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20을 얻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박쥐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흉물스러운 몬스터의 몸통은 천천히 녹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대신 깨끗이 잘린 날개 한 쌍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몬스터는 죽임을 당하는 순간 사체가 사라지기 때문에-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체의 일부분을 얻고자 할 때는 이렇게 살아 있는 채로 잘라내야 했다.
[‘리에고 날개’ 한 쌍을 획득했습니다.]
날개를 주워 인벤토리에 넣은 나는 근처의 빛 무리가 어른거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네뭉.
이 초소형 몬스터는 동굴 전체에 걸쳐 서식하는데 몬스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종이다.
반딧불이처럼 꽁무니에서 빛을 내 동굴 안을 약간이나마 밝히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네뭉이 날아다니는 곳은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밝은 편이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 이놈들이 최소한의 길잡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두 손으로 창을 잡고 타이밍을 쟀다.
수십 마리의 네뭉이 한데 겹치는 순간, 무기를 내려쳐 강한 풍압을 날려 보냈다.
‘토네이도 스피어!’
파바박-!
묵직한 바람이 몬스터들을 강타했다.
후두둑.
네뭉이 한꺼번에 바닥에 떨어진다.
[퀘스트 ‘네뭉 한 마리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10을 얻었습니다.]
[퀘스트 ‘네뭉 열 마리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50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