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독식왕 : 클리어러 043화
표정이 굳었던 철웅이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말했다.
“농담이 심하시군요. 정말 이 아이템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닌가요?”
티코이는 뒤쪽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직접 아이템을 복용했던 남자.
그는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티코이가 계속 말했다.
“등급이 낮은 게이머들이라면 분명 비싸게 여길 가격이지요.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아이템은 등급이 높은 게이머들에게 더 큰 가치를 갖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던전 마스터와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 딱 한 번만 스킬을 적중시키면 적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한 번의 스킬을 사용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후퇴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오천만 원짜리 귀환석을 쓰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삼천만 원짜리 귀화제를 쓰는 게 나을까요?”
나는 티코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척하지만 정장을 입은 카오스 게이머 닷컴 측 게이머들도 순간적으로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던전 마스터를 쓰러뜨리는 것과 그냥 후퇴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귀환석과 플레지킹 허니의 차액뿐만 아니라 쓰러뜨리고 얻는 수입도 감안해야 하니까.
철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고집스럽게 말했다.
“귀하가 하시는 말씀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입니다. 설령 고가 마케팅을 한다손 치더라도 어느 정도 수요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삼천만 원짜리 아이템을 고민 없이 살 수 있는 게이머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시죠. 100개에 20억. 이것이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제안입니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티코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더 있습니다.”
“네?”
철웅은 지친 기색을 내보였다. 이곳에 나올 때는 초짜를 상대한다는 가벼운 기분이었는데 이제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다.
심지어 마나를 흘려보내 은근히 위협을 가하는 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일단 20억은 선금으로 주십시오. 그리고 귀화제의 판매와 별도로 저희가 사이트 내에서 상점을 개설할 수 있게 해주세요.”
카오스 게이머 닷컴 사이트 안에 상점을 개설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부분은 게시판을 통해 개인 거래를 한다.
사이트 내에 상점을 개설하면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메리트를 누릴 수 있었다. 신뢰도가 하늘을 찌르는 사이트가 인증한 상점이니까.
다소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라도 개인보다는 상점과 거래하려고 하는 게이머가 많았다.
“수수료는…….”
“물론 안 받으시는 조건으로요.”
“허, 참.”
철웅은 끝내 혀를 찼다. 티코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지못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지요. 저는 협상권만 있을 뿐 결정권은 상부에 있습니다. 돌아가서 보고를 하고 수일 내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48시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연락이 없으면 거래할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곳과 협상하겠습니다.”
철웅과 네 명의 똘마니가 떠나갔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티코이가 턱 하고 숨을 내뱉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머리 위로 삼각형의 귀가 쫑긋 튀어나왔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했어, 티코이. 너 아니었으면 호구 잡힐 뻔했다.”
“주인님이 옆에 계셔서 끝까지 세게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인상 더러운 놈이 성질 부릴까 봐 조마조마했어.”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겁니다. 놈은 협상하러 나온 똘마니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레시피가 우리에게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행동하겠어요.”
“하긴.”
협상은 끝났지만 아직 모든 게 마무리된 건 아니다. 퀘스트는 내 통장에 30억이 입금되어야 완료되는 거니까.
7
티코이가 한창 협상을 진행 중일 때 나도 한 가지 장치를 해두었다.
철웅에게 스킬을 사용한 것.
나보다 레벨이 훨씬 높은 대상을 상대로 한 것이어서 조심스러웠지만, 그렇게 따지면 병수가 유진이에게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로 위험했어야 한다.
오랫동안 레벨이 훨씬 낮은 그가 유진이를 스토킹했던 스킬이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추적.
조그만 마나 조각을 상대 피부에 묻히면 어디로 가든 위치를 알 수 있다.
‘어디 보자…….’
티코이가 모는 자가용 안에서 나는 눈을 감고 남자의 현재 위치를 추적했다. 부하 직원들과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 그는 높다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카오스 게이머 닷컴과 같은 암거래상들은 좀 더 은밀하게 활동할 줄 알았는데 대로변의 큰 빌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추적 스킬은 대상이 있는 곳을 완벽하게 비추지 않는다. 마치 그래픽이 나쁜 구시대의 폴리곤 게임을 보는 것과 같다.
상대적으로 선명한 것은 위치를 알 수 있는 중요 정보들.
웅성거리는 목소리에서 한 가지 힌트가 걸렸다.
“……피스……앤 호…….”
더불어 건물 안에 있는 특정 로고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P와 H를 이용해 만든 기하학적인 문양.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들어본 이름인데.’
핸드폰을 꺼내어 검색을 했다. 피스 앤 호까지 입력하자 자연스럽게 단어가 완성되었다.
피스&호프 길드.
당장 수백 개에 달하는 정보가 나열되었다.
던전 관련 조사를 하면서도 길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지만 피스&호프 길드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세계 3대 길드 중 하나니까.
본부가 있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지부를 가진 초거대 길드다.
‘피스 앤 호프 길드가 카오스 게이머 닷컴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그들과 관련된 정보는 모두 긍정적인 것뿐이었다.
자선 사업을 가장 많이 하는 길드, 버는 족족 기부하는 길드, 게이머의 참된 가치를 전도하는 길드.
읽으면 읽을수록 오글거린다.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거북함이 느껴졌다.
‘이게 전부가 아닐 것 같은데’ 하는 느낌.
‘아!’
아까 협상하러 나온 남자를 조금 더 추적해 본 결과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남자가 길드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그것도 꽤 높은 지위에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상급자에게 보고를 올리는 모습이 비쳤다.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겉으로는 정상적인 길드인 양 보이는 피스&호프가 이면으로는 카오스 게이머 닷컴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스&호프는 끊임없이 자선 사업을 하면서도 길드의 덩치는 계속 키워왔다.
‘기부를 하는 것은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였구나.’
겉으로는 천사의 얼굴을 한 길드가 이면으로는 암거래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도 살인을 일삼으면서.
세계 최대 암거래사이트가 얼마만큼 수익을 창출할지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아마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그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게이머 계의 이런 치부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나를 각성시킨 이가 메인 퀘스트를 준 이유…….’
공교롭게도 첫 번째 퀘스트부터 위험한 녀석들과 연결되었다.
‘혹시…….’
영웅의 역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무력, 뛰어난 지능…… 만 가지고도 안 된다.
이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재력과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 동료들도 필요하다.
‘내가 너무 끼워 맞추는 건가…….’
나는 픽 웃음을 내뱉고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게임상의 의혹은 진행을 하다 보면 저절로 밝혀질 테니까.
나는 그저 클리어가 목적인 일개 게이머일 뿐이다.
마음껏 콘텐츠를 즐기면 그만이다.
8
초조한 분위기 속에 이틀이 흘러갔다.
처음엔 여유를 부리던 티코이마저 슬슬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왜 연락이 없지?’
배짱을 부리기는 했지만 이제부터 새로운 루트를 찾아 협상을 하기는 늦었다.
‘부’ 항목의 퀘스트가 사라진다면 현실적으로 이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은 물 건너간다.
유니크 등급의 장비를 거치지 않고는 에픽 등급과 레전드 등급의 장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레벨 5가 하락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티코이 집 거실에 모여 앉아 우리는 핸드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48시간이 되기 5분 전, 드디어 벨소리가 울렸다.
띠리리리리-
발신자를 특정할 수 없는 번호.
카오스 게이머 닷컴 놈들이 틀림없다.
티코이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연락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거래를 확정 짓도록 하지요. 얘기 나눴던 대로 선금을 먼저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이트에 등록된 계좌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네.”
“……됐습니다. 금액을 쪼개서 몇 단계에 걸쳐 우회하게 했습니다. 한 시간 안에 20억이 모두 입금될 것입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의미로 발생하는 추가 비용은 모두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약속하신 아이템은 언제까지 완성될까요?”
“일주일에 스무 개씩 5주에 걸쳐 제작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요. 상점 개설은 이미 해드렸습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거래를 이어갈 수 있길 희망합니다.”
전화를 끊자 티코이의 머리에서 쫑긋 여우 귀가 튀어나왔다.
“후우~”
“됐어?”
“네, 사이트에 등록한 주인님의 계좌로 한 시간 안에 20억이 입금된다고 합니다.”
“좋아.”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앞으로 10억을 더 벌어야 했다.
티코이는 노트북을 열어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 접속했다. 전화로 들은 대로 상점 개설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보통 거래 대금의 20퍼센트까지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너무 파격적이라 찜찜할 정도다.
나는 티코이와 상의를 했다. 어떤 아이템을 얼마의 가격으로 내놓을지.
가장 우선으로 선택된 상품은 ‘추그니다킹 뿔’과 ‘곤파스킹 머시룸’이었다.
상대적으로 가장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 아이템들이니까.
사이트 내에 개설된 상점에 상품을 등록하면 5~10퍼센트 정도는 비싼 가격에 올릴 수 있다. 사이트를 이용하는 구매자들이 그 정도 차액을 감안하고라도 개인 거래보다 상점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고민 끝에 ‘추그니다 킹 뿔’은 경매로 설정했다. 물론 사진을 띄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담컨대 이 정도 완성도를 가진 추그니다킹 뿔은 이제껏 한 번도 거래된 적이 없을 것이다.
티코이가 나머지 상품들을 올리는 동안 나는 플레지킹 허니, 일명 ‘귀화제’ 합성 작업을 했다.
티코이는 넉넉잡아 5주가 걸린다고 했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빨리 완성할 수 있는 수량이었다.
우리는 일부러 ‘귀화제’의 물량을 제한할 생각이었다.
수요보다 공급이 적으면 가격은 올라가게 마련이니까. 게다가 박리다매를 하면 나만 힘들어진다.
협상할 때는 앓는 소리를 했지만 카오스 게이머 닷컴도 ‘귀화제’의 가치를 높게 본 모양이었다.
광고를 하고 예약 구매자를 모집하면서 내건 가격이 3만 달러였다.
우리에게 개당 이천만 원을 지급하고도 천만 원이 훨씬 넘는 마진을 남기는 셈이다.
이것은 우리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직접 판매를 할 때 이 가격을 따라가면 되니까.
나는 티코이가 했던 말을 피부로 실감했다.
‘게이머들이 돈을 벌기 쉬운 세상이라더니 정말이었구나!’
물론 게이머도 게이머 나름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