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독식왕 : 클리어러 042화
6
다음 날.
카오스 게이머 닷컴 한국 지부와 만남이 성사되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인물이 다섯.
그중 세 명이 남자고 두 명이 여자였다.
뜻밖에 네 명의 정보창은 확인을 할 수 있었다. 그 말은 곧 다섯 중 넷이 나보다 레벨이 낮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면 능력치가 확인되지 않은 한 명이 그만큼 강자라는 말이 된다. 이들이라고 만에 하나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은 것이 아닐 테니까.
나는 오늘 암젤과 티코이 둘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전투 능력이 일천한 티코이는 웬만하면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있어야 원활한 사업 얘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키가 190센티미터는 훌쩍 넘는 건장한 남자가 전면에 나서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그가 인사와 함께 내민 명함은 검은색이었다. 카오스 게이머 닷컴 주소와 이름, 그리고 이메일만 나와 있는 심플한 형태였다.
적힌 이름은 박철웅. 물론 본명이 아닐 테지만.
유일하게 정보창을 확인할 수 없는 능력자다. 나는 그의 손을 잡는 순간 나와 레벨 차가 현격하다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신체 강화형이라 가정을 한다 해도 적어도 10 이상은 차이가 날 것 같았다.
상대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범죄자 주제에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 나도 그 범죄에 가담하기 위해 나온 거니까.
상대 다섯 명, 우리 측 세 명이 우르르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장소는 F급 던전이다.
심지어 던전 관리소에서는 신분 확인을 하지도 않았다.
철웅이 관리소 쪽을 향해 슬쩍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게이머들의 세상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던전에서 카오스 게이머 닷컴 측 인물들만 돌아오더라도 의문이 제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썩었네, 썩었어.’
이쪽 세상에는 아예 발을 딛지 않는 편이 좋을 뻔했지만 이제 어쩔 수가 없다.
좋든 싫든 카오스 게이머 닷컴을 통해 내 존재도 까발려지고 말았다.
던전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한참을 안으로 이동했다.
동굴처럼 생긴 던전을 걸어가며 앞을 막는 몬스터들은 카오스 게이머 닷컴 측 게이머들이 해치웠다.
물론 철웅은 일절 행동에 나서지 않고 내 옆을 걷기만 했다.
일정 지점에 이르자 특이한 장소가 나타났다.
돌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인공물이 아닌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이었다. 공교롭게도 모양이 딱 테이블과 의자처럼 생겼을 뿐이다.
던전 내부는 게이머가 인위적으로 꾸미거나 조작할 수 없으니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상 복구 되어버린다.
철웅이 말했다.
“앉으시죠.”
나는 그 말을 자연스럽게 티코이에게 넘겼다.
“앉으래.”
의자가 두 개뿐이니 협상의 주체인 두 사람만 앉을 수 있다.
철웅은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물건을 볼 수 있을까요?”
인간의 모습을 한 최영호, 아니, 티코이가 인벤토리에서 ‘플레지킹 허니’를 꺼냈다. 유리병에 담긴 용액은 30그램이었다.
“체력과 마나 소모량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하셨죠?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있을까요?”
철웅의 물음에 티코이가 고개를 저었다.
“양에 따라 지속 시간이 달라집니다. 효과는 직접 체험해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게이머마다 반응이 다를 수 있으니까.”
이것은 미리 상의한 내용이었다. 정확하게 30퍼센트를 줄여준다고 말하기보다 조금이라도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30퍼센트는 체험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훨씬 크게 느낄 수 있는 수치다.
철웅은 용기 안의 꿀물을 지그시 보았다.
“더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까?”
“귀화제는 게이머의 등급과 무관하게 효능을 보입니다. 따라서 이 아이템은 등급이 높은 게이머가 사용할 때 가치가 더 커질 것 같네요.”
“음.”
철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티코이가 아닌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이템의 효능을 시험해 볼 겁니다. 마지막으로 권고 드리겠습니다. 만약 이 아이템이 가짜로 판명될 경우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의 안전은 보장하지 않습니다.”
“헛소리 말고 확인이나 해!”
시종 불만 섞인 표정을 짓고 있던 암젤이 쏘아붙였다.
여기 오기 전에 계속 주의를 주었건만 결국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한마디 한 것이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네 명을 쓱 훑던 그가 한 명을 지목했다.
나머지 세 명이 안도하는 표정을 짓고 지명받은 남자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도 그럴 수밖에.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아이템을 복용하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잘못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철웅이 말했다.
“이 직원은 스킬을 세 번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이템이 효과가 있다면 네 번 이상 사용할 수 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가는 방법이었다.
만약 네 번 연속 사용할 수 없더라도 스킬을 사용하면 스스로 달라진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장사 하루 이틀 하는 놈들이 아니네.’
같은 편을 아무렇지 않게 모르모트로 삼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훨씬 독한 집단이기도 하다.
피시험자로 지목된 남자는 테이블에 놓인 플레지킹 허니를 잡았다. 심호흡을 하더니 뚜껑을 열었다.
유리병 안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올라왔다. 플레지킹의 독이 첨가되긴 했어도 기본은 플레지 허니이므로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남자는 얼굴을 찡그린 채 플레지킹 허니를 쭉 들이켰다.
내 눈에는 좋은 아이템 마시면서 인상을 쓰는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남자의 인상이 천천히 펴졌다. 슬슬 느낌이 오는지 자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한 차례 헛기침을 했다.
철웅이 지시했다.
“지체하지 말고 스킬을 써봐.”
“네!”
신체에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확신한 게이머가 벽으로 다가갔다. 그의 동료가 모두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의 정보창을 보았으므로 쓰려는 스킬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괴력.
신체 강화형인 것을 감안하면 자기 장기를 순간적으로 증폭시키는 기술이리라.
남자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주먹을 들었다. 그 주먹에 마나가 휘감겼다.
기합 소리와 함께 벽을 후려쳤다.
꾸궁-!
벽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파편이 튀어 나가며 둥그런 홈이 만들어졌다.
남자는 연속해서 반대쪽 주먹을 내질렀다.
꾸웅-!
이번에는 더 많은 파편이 튀었다.
아마도 연속으로 사용할수록 위력이 증폭되는 모양이었다.
세 번째.
쿠웅-!
위력이 증폭된 스킬은 발밑이 흔들리게 했다.
여기까지는 모든 이의 예상의 범주에 있는 일이다. 문제는 다음의 한 발이었다.
남자는 살짝 주춤하는 것 같았지만 결심을 하고 네 발째의 스킬을 벽을 향해 꽂았다.
콰앙-!
약해진 벽이 한꺼번에 깨어져 나가며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동료들이 팔을 들어 얼굴로 향하는 돌 부스러기를 막았다.
반면 철웅은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파편이 얼굴로 튀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마나가 아직 충분하다고 판단한 게이머가 다시 한 번 스킬을 내지르려 했다.
“그만!”
철웅의 명령에 그가 주먹을 멈추었다.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하며 열기를 가라앉히는 남자는 몹시 들뜬 모습이었다. 평소에 세 발까지가 한계였는데 다섯 발을 내지르게 되었으니 크게 고무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스킬은 콤보가 이어질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마지막 한 발을 터뜨리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철웅이 스킬 사용을 멈추도록 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동굴이 흔들리면서 머리 위로도 부스러기가 떨어질 정도였으니까.
잘못하면 공간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철웅은 냉정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스킬을 사용했던 남자가 숨을 고르면서 대답했다.
“분명히 마나 소모량이 적어졌습니다. 체력도 늘어난 기분이 들었고요.”
“부작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플레지킹 허니는 체력과 마나 소모량을 30퍼센트 낮춰준다.
아이템을 복용한 남자는 평소 스킬을 세 번 반 정도 사용할 만큼 마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정확하게 세 번 사용할 정도였다면 스킬을 네 번 내지르는 것이 한계였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아이템의 효과가 과대 선전된 셈이다.
철웅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말없이 자기 옷에 묻은 돌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또 다른 긴장감이 공간을 채웠다.
“성능은 확인했습니다. 기분이 나빴다면 죄송합니다. 워낙 가짜 물건을 팔려는 자가 많아서요.”
“이해합니다.”
“물량은 어느 정도 되나요?”
티코이가 중지로 안경을 끌어 올린 뒤 대답했다.
“수량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만 충분히 주시면 원하는 만큼 공급할 수 있습니다.”
“네?”
철웅은 크게 놀랐다.
“구하기 어렵지 않은 아이템이라는 건가요?”
“네, 모르실까 봐 드리는 말씀인데 ‘귀화제’는 완성품인 상태로는 구할 수 없습니다. ‘제조’를 해야 하지요.”
“음.”
거기까지는 예상을 했던 일이다. 만약 완성품인 채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더라면 진즉 알려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재료를 공수하기 쉽지 않으리라고 여겼었다.
자신 있게 물량을 맞출 수 있다고 하는 걸 보니 재료 또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말인 것 같다.
“레시피를 팔 생각은 없습니까? 물론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겠습니다.”
티코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시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아시겠지만 저희는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릅니다. 제가 말하는 합당한 가격이란 말 그대로 정당한 액수입니다. 100억이면 어떻습니까?”
대화를 지켜보는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00억이라니.
그 돈이면 퀘스트 달성 조건의 세 배를 넘는다.
하지만 티코이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레시피는 팔 수 없습니다. 100억이 아니라 그 열배를 제시하셔도 저희의 대답은 같습니다.”
“흠.”
철웅은 입술 끝을 비틀었다. 100억 정도 부르면 흔들릴 줄 알았는데 상대의 완강한 반응에 내심 당황했다.
사실 티코이의 대답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플레지킹 허니는 레시피만 안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직접 합성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그런 걸 전혀 티내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다니, 역시 나 대신 협상을 하도록 내세우길 잘했다.
철웅이 두 번째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제조를 해주시면 판매는 저희가 하는 걸로요. 아시다시피 저희의 판매 노하우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독점 판매권을 주신다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거절합니다.”
1초도 망설이지 않는 티코이의 대답에 철웅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워낙 인상이 험한 남자라 가볍게 찡그리는 것만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실제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만약에 수틀려서 이곳에서 실력 행사를 한다면 우리 세 명으로는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귀환석을 만지작거렸다.
철웅은 티코이의 표정변화 없는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독점 판매권이 안된다면 우선 판매권은 어떤가요? 일정 수량만 우리가 먼저 판매할 수 있게 해주시면 그 뒤에는 사이트 내에서 직접 판매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조건은요?”
“500개에 10억 어떻습니까?”
티코이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상체를 세우고 팔짱을 끼었다.
“100개에 30억. 그 이하로는 안 됩니다.”
긴장감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