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독식왕 : 클리어러 037화
2
E급 던전 공략 이틀 째.
나와 암젤은 계획대로 3, 4층 공략에 나섰다.
1, 2층 공략 때와 마찬가지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중간에 나는 레벨 30에 도달하여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기존 클래스를 진화하거나 추가 클래스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클래스 진화가 이렇게 빨리 가능하게 된 것은 업적 ‘초고속 클리어’의 효과 덕분이었다. 모든 클래스를 얻자마자 숙련도 최고도가 되니까, 레벨 10마다 진화 가능 메시지가 뜨는 것이다.
원래대로였다면 훨씬 긴 시간이 필요했을 터다.
당장 여기에 클래스를 더 추가할 계획은 없다. 근거리와 원거리를 모두 커버할 수 있게 됐으니 이제는 이 능력을 한 단계 더 진화할 때이다.
“클래스를 진화하겠다.”
[진화할 클래스를 선택하십시오.]
[창술사 -> 마창사]
[궁사 -> 신궁]
나는 ‘마창사’를 골랐다.
[창술사 클래스가 마창사 클래스로 진화했습니다!]
[창술 사용 시 위력이 증가합니다.]
[창술 스킬 구사 시 마나양이 감소합니다.]
[구사할 수 있는 스킬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무기술 전반에 걸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마창사 클래스의 기억이 활성화됩니다.]
[마창사 숙련도가 최고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찾아온 부유감에 눈을 감았다. 새로운 기억을 습득한 전신의 근육이 새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렬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미 오래전에 통과했던 경지이지만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4층 중간쯤 이르렀을 때, 궁술 스킬 하나가 추가되었다.
유도살.
말 그대로 화살이 살아 있는 것처럼 적을 쫓아가 맞히는 스킬이다.
일반 화살보다 위력이 낮기는 하지만, 이런 약점은 스킬의 등급과 레벨을 올리면 해결할 수 있었다.
4층 막바지에 이르러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 던전에도 데미 마스터는 한 마리만 존재했다.
붐비키.
고릴라형 몬스터로 덩치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고릴라의 세 배쯤 되었다. F급 던전이라면 충분히 던전 마스터가 되고도 남을 만큼 강력한 몬스터이기도 하다.
“쿠와아아~”
다행이라면 E급 던전에 등장하는 몬스터인 만큼 레벨이 높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붐비키의 진화형인 붐비킹은 졸개 고릴라 떼를 불러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 상대하기 훨씬 까다로웠다.
쿵! 쿵! 쿵!
타는 듯 붉은 털을 가진 고릴라가 가슴을 때리며 포효했다.
암젤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앞에 나섰다.
“원숭이 주제에 시끄럽다옹!”
E급 던전을 돌파하는 동안 그녀의 모든 스킬도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치타보다 한층 더 강력한 소환수들을 불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번쩍!
강한 빛줄기와 함께 비단결 같은 보라색 털을 지닌 소환수가 등장했다.
날렵하면서도 묵직한 몸을 가진 고양이과 동물은 바로 퓨마였다.
퓨마는 신중한 표정으로 고릴라와 대치했다.
일 분가량 이어진 눈싸움을, 인내심이 적은 붐비키가 먼저 깨뜨렸다.
“쿠와앙!”
두 주먹으로 바닥을 밀면서 달려온 고릴라가 퓨마에게 강력한 일격을 휘둘렀다.
후웅-
퓨마는 잽싸게 붐비키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고릴라의 등을 타고 올라가 뒤통수를 깨물었다.
콰악!
붐비키가 몸을 마구 흔들어 댔다. 실상 퓨마도 약한 동물은 아니지만 일반 고릴라의 세 배가 넘는 덩치와 괴력을 가진 몬스터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암젤는 퓨마를 불러들였다.
그녀가 다음에 불러낸 소환수는 아름다운 레오파트 무늬를 가진 표범이었다.
“크르릉!”
표범과 퓨마의 전투력은 비등하지만 표범이 상대적으로 더 호전적이고 사납다고 알려졌다.
아직은 퓨마와 표범을 한꺼번에 불러낼 수는 없어 번갈아 소환해야만 했다.
하지만 암젤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같이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베테랑 중의 베테랑 NPC였다.
아직 레벨이 낮아 예전 기량은 못 찾았다고 해도 기본 소양 자체는 저급 몬스터들이 당해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두 마리 소환수를 노련하게 바꿔가며 붐비키의 혼을 쏙 빼놓았다.
고릴라는 소환수들의 정신없는 공격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슴만 쿵쿵 때려댔다.
고릴라의 눈이 자기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는 고양이와 마주쳤다.
그 순간.
암젤의 환각술이 발동했다.
“쿠아앙!”
끔찍한 환각을 본 고릴라는 양손을 휘저어 대며 실체가 없는 적으로부터 달아났다.
암젤은 표범을 불러들였다.
연이어 다섯 마리 치타를 소환했다.
“크르르릉!”
치타들은 처음에 슬금슬금 견제를 하다가 붐비키가 겁에 질린 상태라는 것을 알아채고 무리를 지어 적을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데미 마스터와 싸움에선 내가 나설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나 암젤 누가 몬스터를 쓰러뜨리든 퀘스트를 달성한 보상은 똑같이 주어진다.
더군다나 나 자신의 레벨을 올리는 것 못지않게 암젤의 전투 숙련도를 올리는 것도 중요했다.
유진이가 했던 말마따나 상급 던전으로 갈수록 파티의 중요성이 커지기 때문에.
“잘했어, 암젤!”
“흥! 별거 아니다옹.”
3
[퀘스트 ‘열두 시간 안에 4층 돌파’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8,000, GP +36,000을 얻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여섯 시간 안에 E급 던전 4층 돌파’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20,000, GP +40,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31이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오늘도 깔끔하게 일과를 마쳤다.
던전은 깊어질수록 공략이 힘들어지고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진다. 때문에 오늘은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 말고 간식도 많이 챙겨왔다.
남은 간식을 암젤과 나누어먹은 뒤 던전을 나왔다.
다음 날도 공략은 계속되었다.
첫날 보았을 때 표정이 딱딱했던 관리소 누나는 이제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진짜 3일 연속으로 왔네? 내가 여기 일한 지 2년이 넘었는데 너 같은 게이머는 처음이야. 정말 4일 만에 공략을 끝내면 신기록인 거 아니?”
“기록은 깨라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호호. 자신감은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 던전에서 방심은 늘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니까.”
“걱정 마세요. 만약 부상당하면 누나가 치료해 주면 되잖아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여직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때 뒤에서 ‘어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리소 소장이 낸 헛기침 소리다. 관리소 직원들은 방침 상 게이머들과 필요 이상으로 친해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현실성 없는 명목상의 규칙일 뿐이지만, 깐깐한 이곳의 소장에게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누나, 힘드시겠어요.”
“호호. 알아줘서 고마워.”
나는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하고 기분 좋게 던전 입구로 걸어갔다.
[호감]
암젤은 주인의 뒤를 쫓으며 생각했다.
‘점점 여자를 상대하는 데 노련해지고 있다옹. 이거 이거 위험하다옹.’
3일 차 공략을 끝낸 뒤, 내 레벨은 33이 되었다.
히든 퀘스트 보상은 계속 경험치와 GP뿐이었다. 마치 창술사와 궁사 클래스 방어구를 모두 주었으니 당분간은 기대하지 말라는 듯.
방어구 세트를 여러 벌 가지고 있을 때, 간단히 의상을 체인지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방어구를 입은 상태로 ‘의상-저장’ 메뉴를 활성화하면 입고 있는 옷이 저절로 저장된다.
이때 입력한 이름이 나중에 의상을 바꾸는 시동어로 작용한다.
나는 의상 1번에는 피오리오 세트, 2번에는 아르바난 세트를 저장했다.
앞으로 각각 ‘피오리오, 아르바난’이라고 시동어를 말하면 저절로 해당 세트로 의상이 바뀌게 될 것이다.
4
던전 마스터와의 일전을 하루 앞두고 티코이에게 연락이 왔다.
방어구 세트의 업그레이드를 마쳤다는 얘기였다.
티코이를 집으로 부를까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바꾸었다.
어머니나 누나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될지도 모를뿐더러, 말끝마다 ‘주인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남들이 볼 때 결코 자연스러운 장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암젤은 그나마 눈치가 빠른 편이지만, 그런 면에서 티코이는 조금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집을 나서자 오늘도 역시 암젤이 졸래졸래 따라 나왔다.
“오늘도 티코이 만나러 가는 건데?”
“안다옹.”
“너 티코이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렇다옹. 하지만 걔네 집에 있는 간식은 좋아한다옹. 여우 주제에 취향은 참 고급이다옹.”
나는 도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암젤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티코이는 집 앞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모습을 발견한 그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너무 큰 소리로 인사하지 마.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아! 그렇군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암젤이 인간형인 티코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늘도 간식 있냐옹?”
“응, 너 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있다.”
“그럼 됐다옹.”
암젤이 턱을 치켜들고 먼저 티코이의 집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빨라진 걸로 보아 디저트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시죠, 주인님.”
티코이의 집은 지금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와 비교하면 정말 럭셔리했다.
심지어 열 살 이전에 살았던 우리 집보다도 훨씬 좋다.
티코이의 고급스러운 취향이 반영되어 가구나 인테리어도 매우 세련되었다.
평소에는 별로 돈 욕심이 안 나는데 이곳에만 오면 빨리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거실에 앉아 과자를 집어먹고 있었더니 티코이가 업그레이드를 마친 방어구를 들고 왔다.
피오리오 세트와 묘족의 외출 No.4.
나는 티코이가 펼쳐 놓은 피오리오 세트를 보고 감탄했다.
아직 성능은 보지 않았지만 일단 겉모양만 보아서는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원단의 질감이나 광택이, 한눈에도 전보다 진일보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암젤은 자신의 옷 ‘묘족의 외출’을 보더니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들고 있던 마카롱을 떨어뜨린 것으로 보아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입가가 저절로 실룩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딘지 저렴한 티가 나던 시스루 옷이 고급스럽고 세련된 모양으로 탈바꿈했다.
“으음. 여우, 실력이 형편없지만은 않군.”
“고맙다는 인사로 알아듣겠다.”
나는 차례차례 피오리오 세트에 손을 올려보았다. 성능의 변화를 확인하자 놀라움이 한층 더했다.
[창술사의 장갑+]
등급 : 레어
효과 : 근력 +5, 민첩 +3, 창을 이용한 스킬 사용 시 마나 증폭 +8%, 콤보에 의한 효과 ×130%
[창술사의 신발+]
등급 : 레어
효과 : 근력 +3, 민첩 +6, 창을 이용한 스킬 사용 시 마나 증폭 +7%, 회피율 ×130%
[창술사의 가죽옷+]
등급 : 레어
효과 : 체력 +7, 행운 +5, 창을 이용한 스킬 사용 시 마나 증폭 +7%, 반격에 의한 효과 ×130%
세트 효과 : 창술 스킬 사용 시 마나소모량이 30퍼센트, 방어구로 인한 방어력 상승효과가 30퍼센트 증가, 창술 숙련도가 20퍼센트 빠르게 증가
전반적으로 성능이 30~40퍼센트가량 향상되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티코이, 대단한데? 고마워.”
“황송합니다, 주인님.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제 숙련도도 많이 올랐습니다. 작업 속도가 빨라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칭찬을 받은 티코이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게임에서는 이 정도로 실력이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현실로 온 뒤 잠재력이 폭발하게 된 건가?’
여기에는 물론 티코이 본인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이쪽 세상의 특별한 환경도 한몫한 것 같았다.
제한된 조건에서만 능력을 펼쳐야 하는 게임과는 달리 현실은 자유도가 훨씬 높다.
많은 정보를 쉽게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이나, 결정석과 같은 새로운 재료가 티코이의 잠재력을 깨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너를 파티에 넣길 정말 잘한 것 같아.”
“주인님!”
더하면 울 것 같아서 나는 얼른 화제를 옮겼다.
“암시장에 대해서는 좀 알아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