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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35화 (3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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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035화

    8

    한 시간 뒤,

    병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에서 까무러칠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으윽!”

    축축한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야 생각났다.

    성오에게 패배하고, 갑자기 나타난 치타 떼에게 유린을 당한 사실이.

    게이머들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치명상을 입거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게 아니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확실히 회복을 하기 위해서는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자기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드래곤 파워 멤버의 얼굴이었다.

    고스트형 게이머인 그는 평소 병수에게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다.

    “야, 성오 그 새끼 어디 갔어?”

    “그건 왜 묻는데?”

    “왜긴 왜야? 잡아서 족쳐야 할 거 아니야?”

    “……하하.”

    고스트 형 게이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어느새 그의 뒤로 다른 드래곤 파워 멤버들이 다가와 섰다.

    병수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발 주제 모르고 나대지 좀 마라.”

    “뭐? 이 새끼들이…….”

    “대체 왜 우리가 너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해야 되는 거냐?”

    멤버 중 하나가 고스트를 소환했다.

    노인 고스트가 나타나더니 봉으로 병수의 턱을 올려쳤다.

    “커헉!”

    쿠당탕-!

    화가 난 병수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 새끼가! 너 미쳤어!”

    아무리 세 놈이 붙어 있다고는 해도 자신의 능력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더구나 셋 중 하나는 매지션형 게이머이기 때문에 없는 셈 쳐도 무관하다.

    그는 바닥을 박차고 달려가 고스트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퍽!

    주먹이 정확하게 고스트의 가슴팍을 때렸다. 하지만 노인은 살짝 얼굴만 찡그렸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환된 고스트는 일정 이하의 충격에서는 신형이 흩어지지 않는다.

    병수는 놀란 얼굴로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뭔가가 전과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쾅!

    노인의 봉이 다시 한 번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끄억!”

    몸이 풀썩 꺾이며 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다.

    “이제 알겠냐? 너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병신아.”

    병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왜지? 왜 주먹에 힘이 안 실리는 거지?

    “너 전에 우리가 죽인 그놈들, 생각나냐?”

    고스트형 능력자가 말한 사건은 약 두 달 전에 일어났다.

    던전을 공략하던 중 다른 게이머들과 시비가 붙었다.

    원래 그냥 넘어가도 될 만한 사소한 일이었는데, 자존심이 센 병수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양측에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숫자에서 밀린 상대 게이머 두 명이 그 일로 목숨을 잃었다.

    ‘왜 그 일을…….’

    병수는 당시의 일을 더 자세히 떠올렸다.

    게이머들의 시체는 마치 젤리처럼 녹아내렸다.

    던전에서 살인을 한 것은 처음이라 어쩔 줄 몰라 했는데, 그것을 보고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놈들의 옷가지를 치우다가 파란색 결정석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을 손에 쥔 것은 병수였다.

    당시만 해도 그는 다른 멤버들과 능력이 비등했다.

    결정석을 손에 쥐자마자 밝은 빛이 터졌다. 결정석의 에너지가 옮겨온 뒤, 그는 다른 멤버들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다른 멤버들도 그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놈이 그 일을 꺼내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불쾌한 예감이 가슴을 스쳤다.

    ‘혹시…….’

    “이제 알았냐? 너도 똑같은 일을 당한 거야, 인마.”

    다른 고스트형 멤버가 히죽 웃음을 짓더니 말을 보탰다.

    “너 같은 변태 새끼랑 같이 다닌 건 너 아니면 E급 던전에 들어올 수 없어서였어. 그게 아니면 누가 너 같은 놈이랑 같이 다니냐?”

    “잠깐만!”

    병수는 당황했다.

    “야! 우리 친구잖아! 설마 나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지?”

    “친구?”

    세 명의 멤버가 서로 마주 보았다.

    “하하하!”

    배꼽을 잡고 웃던 그들은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시발, 살다 보니 오늘 같은 날도 오네.”

    “뭔 일만 당하면 오줌이나 질질 싸는 놈이……. 나 원, 쪽팔려서.”

    “어쩔까? 죽여야겠지?”

    “한 번 했는데, 두 번이라고 못 할까.”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병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저항하고 싶어도 그에겐 더 이상 그럴 힘이 없었다.

    9

    한참 내 뒤를 쫓아오던 암젤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냐옹?”

    “응, 나도 들었어.”

    멀리서 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

    암젤이 물었다.

    “그놈들은 왜 살려준 거냐옹?”

    “병수를 빼면 딱히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으니까. 또…….”

    나는 병수를 보던 다른 드래곤 파워 멤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은 같은 팀 멤버를 바라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병수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그들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금이 그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공교롭게 병수의 몸에서 두 개의 결정석이 나왔다.

    자줏빛 결정석은 이미 보았던 경험이 있어서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을 손에 쥐자, 한 번 보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흡수가 가능한 스킬 스톤입니다. 스킬 ‘추적(B, Lv20)’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흡수하시겠습니까?]

    ‘추적’은 특이한 능력이었다. 추적하고 싶은 대상을 지정하면 조그만 마나 조각이 생성되는데, 그것을 상대의 몸에 붙이면 어디든 상대가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직접 몬스터에게 사용해 보고 알게 된 사실이다.

    또 하나의 결정석은 파란색을 띠고 있었다. 사파이어처럼 투명하고 깊은 빛깔.

    그것을 손에 쥐자 예상 못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스탯 스톤을 흡수하면 ‘근력 2’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흡수하시겠습니까?]

    스킬 스톤뿐만 아니라 스탯 스톤이라는 것도 있었다니.

    메시지가 알려준 대로 결정석을 흡수하자 정말 근력 스탯이 2 올랐다.

    드래곤 파워의 다른 멤버들에게는 스킬 스톤 하나와 스탯 스톤 두 개가 나왔다.

    스킬 스톤은 매지션형 게이머에게 나왔는데, 그것은 그가 가진 유일한 스킬이었던 ‘반사(C, Lv10)’를 품은 것이었다.

    나는 그 스킬을 흡수할 수 없었다. 마법사 클래스 숙련도가 초급 이상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기 때문에.

    대신 암젤이 그것을 흡수했다.

    NPC도 스킬 스톤을 흡수할 수 있다니, 이 또한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고스트형 능력자들에게 나온 스탯 스톤 두 개는 각기 행운을 1씩 올려주는 것들이었다.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었으니 굳이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병수에 대한 원한은 크지 않다.

    되레 나보다는 다른 드래곤 파워 멤버들 쪽의 원한이 훨씬 커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드래곤 파워 멤버들의 성향은 모두 ‘카오스’였다.

    카오스 성향을 가진 게이머들이니만큼 병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작이 오지게 동영상이라니. 그래도 명색이 동창인데 불쌍하네.’

    10

    [퀘스트 ‘열 시간 안에 2층 돌파’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6,000, GP +32,000을 얻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다섯 시간 안에 E급 던전 2층 돌파’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17,000, ‘C급 스킬 에그’ ×1을 얻었습니다.]

    [레벨 28가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허억, 허억.”

    암젤은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벌렁 바닥에 누워 버렸다.

    나 역시 허리를 꺾고 숨을 골랐다.

    “겨우 시간 안에 들어왔네.”

    병수 패거리를 상대하며 소요된 시간이 있기 때문에 서둘러서 공략을 진행했다. 덕분에 온몸의 기력을 모두 소진해야 했다.

    나는 이번 층을 공략하고 얻은 히든 퀘스트 보상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C급 스킬 에그.

    이것 역시 상점에서는 구할 수 없고, 히든 퀘스트를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암갈색 달걀 하나가 새로 들어 있었다. 아이템을 꺼내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스킬 에그를 사용하면 랜덤으로 C급 스킬 하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쩌적-

    스킬 에그 한가운데에 금이 갔다.

    이것은 연출일 뿐이지 실제로 달걀 안에서 뭔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꽝’이 나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나는 조금 긴장했다.

    펑-!

    깨진 달걀 위로 꽃가루가 날리며 메시지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C급 패시브 스킬 ‘마인드 리더’를 얻었습니다.]

    ‘마인드 리더!’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인드 리더’는 나보다 레벨이 낮은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스킬이다.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잘만 활용하면 상대 몬스터의 약점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

    나는 암젤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NPC의 감정이 단어로 나타났다.

    [배고픔]

    “암젤, 집에 가자.”

    던전에서 나올 때는 주위에 천천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관리소로 가자 소장은 칼퇴근을 했는지 보이지 않고, 몇몇 직원의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던전 관리소는 기본적으로 24시간 체제이기 때문에 3교대 근무가 불가피하다.

    야간에는 대개 최소한의 인원만 남아 있지만, 던전이 커질수록 관리소의 인력도 늘어났다.

    이는 업무에 꼭 그만큼의 인원이 필요하다기보다는 경제논리를 따른 측면이 컸다.

    높은 등급의 던전을 찾는 게이머들은 필연적으로 거물들이다.

    거물들을 낮은 직급의 공무원들이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거래되는 결정석의 질에서도 차이가 난다.

    대단위의 돈이 오가는데 그만큼 더 강한 보안이 필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인벤토리에서 결정석을 끝없이 꺼내자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입장할 때 내 신분을 확인했던 공무원이다.

    “1층만 공략하신 거 아닌가요?”

    “2층까지 공략했는데요?”

    “네? 혼자서요? 하루 만에 두 층을?”

    “혼자는 아니죠.”

    내 시선이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암젤에게 향했다. 그녀의 몸 위로 현재의 감정 상태가 떠올랐다.

    [귀찮음]

    문득 나는 마인드 리더가 일반인을 상대로도 통하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결정석 분류를 하고 있는 여자 공무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의 시선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부끄러움]

    당연히 일하고 있는데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부끄럽겠지. 시선을 돌리려는데 이번엔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호감]

    ‘호감?’

    나한테 호감이 있다는 건가?

    어느새 발밑에 다가온 암젤이 다리를 꾹꾹 눌렀다.

    [한눈팔지 마라옹.]

    처음으로 감정이 문장으로 나타났다. 내가 알아채 주었으면 하고 강하고 신호를 보낸 탓일까?

    어쨌든 나는 새로 얻은 능력 덕분에 앞으로 꽤 재미있어 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결정석 분류가 끝나자 직원이 확인서를 뽑아주었다.

    어떤 종류의 결정석이 몇 개씩 포함되어 있는지 쓰인 메모 같은 것이다. 정산이 끝난 뒤에 딴말이 나올 수가 있으니까 서로 확인을 주고받는 절차였다.

    이대로 게이머가 돌아가면 시세를 감안해 결정석의 정산이 이루어진다. 그 대금이 곧바로 게이머의 계좌에 입금되는 것이다.

    결정석을 원하는 업체들은 줄을 서 있었으므로 거래는 밤늦게까지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졌다.

    지난번 아스도라퀸의 변종처럼 특이한 결정석일 경우만 경매를 거쳐야 하는 탓에 시간이 더 지체될 수 있었다.

    나는 관리소를 나서면서 직원에게 인사했다.

    “내일 봐요, 누나.”

    누나라는 말에 그녀의 얼굴이 약간 발그스름해졌다.

    “내일이요?”

    “네, 내일도 예약했거든요. 글피까지 4일 연속 예약했어요.”

    “네?”

    직원은 키보드를 두드려 확인한 뒤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괜찮으시겠어요? 힘들 텐데?”

    “괜찮아요. 그럼 수고하세요~”

    한창 공원을 벗어나는 중에 암젤이 문득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드디어 주인님이 여자들한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구나옹.”

    “무슨 소리야? 웬 추파?”

    “흥!”

    암젤은 도도한 걸음걸이로 먼저 걸어갔다. 그녀의 머리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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