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독식왕 : 클리어러 034화
밥을 먹고 삼십 분쯤 휴식을 취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1층 공략을 끝냈으니 이번에도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상점의 모양은 F급 던전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GP는 173,000.
이번에도 150,000 GP를 사용해 중급 스킬 강화석 세 개를 구입했다.
암젤에게 물었다.
“옷 한 벌 더 사줄까?”
“뭘 그런 걸 굳이 물어보고 그러냐옹. 감사히 받겠다옹.”
신중한 얼굴로 장고를 거듭하던 그녀가 결국 한 가지를 선택했다.
“……정말?”
“제복은 강한 여성의 상징이지 않냐옹. 동영상을 보니 주인님이 저런 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크흠!”
암젤이 선택한 의상은 ‘묘족의 코스프레 No.2’였다.
여자 경찰 제복과 동일한 모양의 의상이다.
가격은 20,000GP.
‘나를 잘 모르는군. 내 취향은 No.1에 가까운데.’
“No.1을 사려고 했는데 잘못하면 주인님이 쇠고랑을 차게 될까 봐 2번을 골랐다옹.”
“배려 감사합니다.”
암젤은 기쁜 얼굴로 새 옷을 입었다. 이번에도 혹시 내가 팔아버릴까 봐 ‘묘족의 품격 No.2’는 얼른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번에야말로 속옷 차림이나 다름없었던 암젤의 속살이 많이 가려졌지만 그보다 더 요염하고 야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상의는 앞섶이 벌어져서 하얀 가슴이 절반 이상 들여다보였다. 타이트한 바지는 왠지 모르게 선정적이고 긴 가죽 부츠는 전체적인 묘한 분위기에 방점을 찍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진짜 여자 경찰들이 이런 걸 입는다고?’
자세히 보니 ‘묘족의 코스프레 No.2’ 아래에 작은 글씨로 ‘멕시코 여자 경찰복’이라고 적혀 있었다.
‘남미라……. 꼭 한 번 가 봐야겠군.’
인상적인 것은 허리춤에 권총이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암젤, 그거 뽑을 수 있어?”
“이거 말이냐옹?”
암젤은 권총집에서 권총을 뽑는 모션을 취했다. 하지만 그것은 권총집과 일체화된 장난감에 불과했다.
‘쓸데없는 부분에서 디테일하네.’
인간형에서 제복을 입었을 때는 요염해 보였지만 고양이 형태로 변하자 귀여운 고양이 옷일 뿐이었다. 암젤의 허리춤에서 조그만 모형 권총이 달랑거렸다.
나는 스킬 로또를 사용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5등에 당첨되었다.
두 번째 중급 스킬석을 사용했을 때, ‘건샷 스피어’의 등급을 B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대성공은 하지 못했다.
마지막 하나는 소득 없이 색깔이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상점을 나온 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지난번의 교훈도 있고,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2층까지만 공략할 생각이었다.
7
2층에 올라섰을 때,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나를 맞았다.
내게 ‘감지’ 패시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기에 섞인 살기를 읽어내기에는 레벨이 아직 많이 모자라다.
순전히 그것은 경험에서 나온 감각이었다.
나는 던전 안과 같은 공기를 십 년 간 경험했다. 103번 플레이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게임 오버를 당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몬스터들과 적들이 한가득인 세상이니까.
모든 변수를 상정하고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나는 던전에 오기 전부터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이병수.’
암젤과 나는 가볍게 눈짓을 교환했다.
흙길을 따라 이십여 미터를 전진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성오!”
앞에서 두 명, 뒤에서 두 명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둘러보았다. 네 명 전원이 다 남자다.
뭔가 하나같이 모솔의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이었다.
만약 멤버 중에 여자가 있었다면, 그리고 센스 있는 인물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드래곤 파워’라는 팀명을 거부했을 것이다.
병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조성오, 개새끼야! 뒤질 준비 됐냐?”
“아!”
나는 병수에게 검지를 향했다.
“유명인이다!”
“뭐?”
“아저씨, 오지게 영상 주인공 맞죠? 팬입니다!”
“풉!”
병수의 팀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병수는 어금니를 깨물고 자기 팀원들을 노려보았다.
화를 꾹 누른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 미친놈아?”
나는 병수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지난 며칠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볼이 야위고 눈동자는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나는 얼굴에서 조소를 거두었다.
움찔.
병수를 제외한 나머지 게이머들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드래곤 파워 멤버들은 레벨이 전부 10에서 15 사이이다.
두 명이 고스트형 게이머, 한 명이 매지션형 게이머. 그나마 신체 강화형인 병수의 레벨이 20으로 가장 높았다.
병수는 방금 자기가 느낀 위압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팔씨름을 했을 때 분명히 느꼈다. 상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적어도 힘에서는 자신이 앞선다고 생각했다.
팔씨름에서 지고 창피를 당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는 경찰 옷을 입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이 고양이를 보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
이제야 그때 카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이 고양이는 각성수이고 이놈이 자신에게 이상한 술수를 걸었던 게 틀림없다.
당시에 시야를 덮었던 무서운 환각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병수의 시선이 자신의 팀원 중 하나인 매지션 능력자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매지션 게이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같은 술수를 부리지 못할 것이다.
팀원인 매지션 능력자가 ‘반사’ 스킬을 가지고 있으므로.
평소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능력이지만 적어도 오늘은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상한 술수에만 당하지 않는다면 자기 혼자서도 충분히 조성오를 죽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휘감았다.
“왜 그래? 눈싸움하려고 날 기다린 건 아니잖아?”
조성오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딴판으로 바뀌었다.
나는 표정이 굳은 병수를 보며 생각했다.
‘던전 안이라면 괜찮지.’
죽이는 것도, 묻어버리는 것도.
꼴깍.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신호음이 되어 양측이 동시에 움직였다.
선제공격을 한 것은 고스트형 게이머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게이머들보다 적을 공격하는 데 더 적극성을 띠는 경우가 많다. 제 몸을 직접 사용해서 싸우는 게 아니기에 부상의 위험이 적다 보니 용감해지는 것이다.
게이머들의 몸에서 하얀 덩어리들이 쑥쑥 빠져나오더니 형체를 갖추고 달려왔다.
하나는 두 주먹이 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남자, 다른 하나는 두꺼운 봉을 든 노인 고스트였다.
적어도 신형 자체는 굉장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고스트 능력이 이런 거였구나!’
캉! 캉!
나는 창을 휘둘러 고스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번 무기를 맞대고 나니 알 수 있었다.
‘별거 아니네.’
고스트를 운용하는 게이머들의 레벨은 각기 12, 15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들이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고 마나를 운용해 고스트를 불러낸 것이다.
고스트를 부리는 것은 결국 마나를 운용하는 일이었으므로 콘트롤러로 게임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희는 주인을 잘못 만났다!’
쾅!
폭발음을 일으키며 길어진 창날이 불꽃 주먹을 가진 남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연기처럼 훅 신형을 흩어버린 것뿐이지만, 곧 고스트를 소환했던 게이머가 피를 토하며 뒤로 나자빠졌다.
본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아니지만 마나로 연결되어 있는 터라 내상을 입고 만 것이다.
나는 방향을 바꾸어 이번에는 봉을 휘둘러 오는 노인을 향해 스킬을 날렸다.
‘토네이도 스피어!’
후웅-!
강한 돌개바람이 노인 고스트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일직선으로 꽂히는 봉을 몸을 굴려 피한 뒤, 창날을 휘둘러 노인의 몸을 갈랐다.
“커헉!”
고스트를 소환했던 게이머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두 명의 게이머를 제압하는 데 고작 3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병수는 여전히 제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있었다.
지금과 같은 그림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기 혼자서 싸워도 충분히 이길 상대인데, 네 명이 함께 덤비면 결과가 뻔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는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뭐하고 있어? 병신들아!”
그의 호통에도 고스트형 능력자들은 입술 끝만 비틀 뿐, 다시 반격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처음과는 달리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병수를 보자 귀찮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쟤들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 스토킹 한 것도 너고, 오줌 싼 것도 넌데.”
“뭐?”
“아니야? 너 유진이 좋아하지? 그날 카페에 나타났던 것도 우연이 아니라 스토킹 한 거잖아.”
“이 새끼가!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는 당황하여 드래곤 파워 멤버들의 눈치를 보았다.
“너를 적당히 두드려 패고 갱생시키는 방법도 생각 안 한 건 아니야. 하지만 내 경험상…….”
나는 이마를 살짝 긁적였다.
“갱생이 되는 놈이 있고, 안 되는 놈이 있더라고. 게임에서 얻은 교훈이지만 현실이라고 다르진 않겠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병수는 주먹을 쥐고 달려왔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이다. 그저 힘에만 의존한 싸움법.
레벨 20이면 그럭저럭 떨거지들을 모아 대장 노릇을 하기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놈은 자기가 골목대장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나는 몸을 틀어 병수의 주먹을 피했다.
연이은 동작으로 균형을 잃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병수의 두 발이 바닥에서 떼어졌다.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떼어낼 수 없는 상대의 힘에 당황했다.
‘이럴 수가…… 분명히.’
팔씨름을 할 당시에는 자신의 힘이 더 셌다.
상대가 오늘 레벨이 2가 더 오르고, 거기 방어구의 버프까지 더해 지금은 자기보가 힘이 더 셀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는 그였다.
나는 표정 변화 없이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병수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줄줄줄.
오줌 줄기가 가랑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휴, 디러.”
나는 병수의 몸을 멀리 내던졌다.
매지션 게이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상대 스킬을 반사하는 능력 말고는 다른 기술도 갖지 못한 그는 이 싸움에서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암젤.”
“알았다옹.”
암젤이 치타들을 소환했다. 그것을 본 게이머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게 뭐야?”
“크르르릉!”
“으아아악!”
숲 속에 절망에 찬 게이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