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독식왕 : 클리어러 031화
내 머릿속에 병수라는 이름은 없었다. 친했던 친구라면 얼굴쯤은 기억이 날 텐데, 그냥 초면에 막말을 하며 친한 척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섭섭하게 왜 그래? 초등학교 3, 4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어깨에 올라온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 손을 밀어냈다.
“기억 안 나.”
그때 눈앞에 정보창이 나타났다.
이름 : 이병수
레벨 : 20
성향 : 오더(Order) - / 카오스(Chaos) E = 카오스(Chaos)
업적 : -
랭킹 : 183,885위
스탯 : 근력 33/체력 25/민첩 11/행운 7
스킬 :
액티브-추적(Lv20)
패시브-신체 강화(Lv20)
이력 : 이병수는 자존심은 몹시 센 반면 재능이 부족하고 노력은 하지 않는 성격이다. 때문에 크고 작은 분란을 자주 일으키는 편.
초등학교 동창인 김유진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다. 그의 집착은 스토커 수준이라서 각성 시 사념이 발동해 ‘추적’ 스킬을 갖게 되었다.
현재 가장 큰 목표는 자신이 만든 팀인 ‘드래곤 파워’를 길드 수준으로 키우는 것.(타입 : 신체 강화형)
“풉!”
나는 나도 모르게 커피를 뿜었다.
‘세상에! 팀명이 드래곤 파워라니!’
“야!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뿜은 커피는 병수의 바지로 튀었다. 애석하게도 그가 입고 있고 있는 것은 흰색 스키니진이었다.
“미안하다. 어떡하냐? 물어줄까?”
내가 한 말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묻는 것이었다.
병수는 하찮다는 듯 혀를 차며 바지를 털었다.
“됐어, 나 게이머야. 내가 너한테 바지 값이나 받아내겠냐? 그나저나 너 어떡할래? 남들 공부할 때 학교도 못 다니고, 자격증이라도 따서 공장 같은 데 취직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은 유진이 쪽으로 향했다.
마치 이런 한심한 놈이랑 어울리지 말고 자기랑 만나자는 듯이.
‘이 자식이!’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정보창 이력에 나올 만큼 유진이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면 안 되지.
내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에 유진이가 먼저 나섰다.
“성오도 게이머야. 깨어나자마자 각성했어.”
그녀의 말을 듣고 병수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그가 내뿜는 사나운 기운을 맞으며 나는 귀찮게 됐다고 생각했다. 너무 흔한 패턴이라 게임에서도 숱하게 경험했다.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히 보였다.
‘어쩔 수 없지. 귀찮지만 밟아주는 수밖에. 그런데…… 어떻게?’
막말로 이곳이 던전 안이라면 소리 소문 없이 묻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카페 안이고, 게다가 유진이와 병수, 나는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명분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식 밖의 행동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병수는 이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재밌는 거 한번 하지 않을래?”
“재밌는 거?”
“각성한 이후로 너무 힘이 뻗쳐서 곤란하거든. 그렇다고 매일 던전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너도 나랑 같은 게이머니까, 이해하지?”
“이해는 안 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우리 팔씨름 한번 하자. 친구끼리 재미로.”
‘친구끼리 재미로’라고 말을 했지만 나는 병수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아마도 유진이 앞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것이리라.
게다가 이놈이 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팔씨름이 아니다.
‘신체 강화형’이라는 자신의 이점을 노려서 내 코를 꺾어놓고 싶은 마음일 게 뻔하다. 아마도 팔을 부러뜨릴 각오로 덤비겠지.
“너희들 왜 그래? 갑자기 무슨 팔씨름이야?”
유진이는 황당하다는 듯 도리질을 했다. 내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우리 이만 일어나려는 차였어. 병수 너도 그만 가 봐.”
병수의 시선이 맞잡은 나와 유진이의 손 쪽으로 향했다. 그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보자니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이병수라는 녀석은 초등학교 때 나와 같은 반이었던 게 확실하다. 친했던 것은 고사하고 사사건건 나에게 시비를 걸던 놈이었다.
지금과 똑같은 표정으로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곤 했는데, 그게 왜 그랬던 건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여기 덩치 큰 초등학생 하나 추가요.’
나는 웃으면서 유진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친구끼리 장난으로 하는 건데 뭐, 난 재밌을 것 같은데?”
병수는 코웃음을 치며 반대쪽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빨리 시작하자는 듯 셔츠를 걷어붙였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었으면 상대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생각했을 텐데.’
자존심이 이성을 압도하는 타입은 이래서 늘 실패를 자초한다.
물론 자기 능력에 자신이 있기는 할 것이다. 힘 스탯이 30이 넘는다면 다른 건 몰라도 그쪽으로는 자신이 있을 테니까.
어쩌면 ‘드래곤 파워’라는 팀명도 그래서 붙였는지 모른다.
“풉!”
드래곤 파워라는 이름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바보같이 그만 처웃고 이쪽에 와 앉지?”
병수의 태도로 보아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듯했다.
내가 이놈의 도발에 응한 것은 나름의 계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스탯 자체만 놓고 보면 불리하다. 내 힘은 31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힘을 사용하는 팔씨름은 내가 질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내게는 ‘로또’ 스킬이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5등 밑으로는 되어본 적이 없는.
만약 5등에 당첨되어 스탯이 10퍼센트만 늘어나도 내 힘은 병수를 앞서게 된다.
나는 몸을 일으켜 병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끼리 팔씨름을 하다가 혹시라도 기물이 파손되면 지는 쪽이 변상하는 거다.”
“당연하지.”
유진이는 말릴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스트레칭을 하는 척하며 슬쩍 스킬을 발동시켰다.
‘로또!’
카페 안의 공기가 느려지고 공중에 일곱 개의 공이 나타났다.
손에는 번호가 적힌 종이가 쥐어졌다.
8, 15, 19, 21, 33, 40.
허공에 있는 공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뒤섞였다.
잠시 뒤 하나씩 개봉되기 시작했다.
8.
‘오케이!’
21.
‘벌써 두 개!’
나는 당첨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어서 열린 번호들은 나의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렸다.
32, 14, 18, 41, +40.
[당첨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기회를 노려주세요.]
‘젠장!’
눈앞에서 병수가 으스대며 팔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도저히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는 싸움.
‘빌어먹을.’
나는 어쩔 수 없이 병수의 손을 맞잡았다.
아귀에서 신체 강화 형 능력자 특유의 강한 힘이 느껴졌다. 피부색이 점차 검게 물드는 것을 보니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단 내 힘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나 역시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온힘을 끌어모았다.
병수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힘이라면 자신이 압도할 줄 알았는데, 상대도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셋 하면 시작한다.”
병수가 카운트를 셌다.
“셋…… 둘…….”
난감한 마음에 아래를 보았는데, 문득 암젤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내게 살짝 윙크를 보냈다.
암젤은 자리를 바꾸어 병수의 맞은편으로 왔다.
“하나!”
게이머 두 명의 팔씨름이 시작되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맞섰지만 조금씩 팔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테이블이 버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린다.
어느새 변고를 알아챈 가게 안의 몇몇 사람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중 두 명은 핸드폰으로 촬영까지 했다.
병수의 피부색이 바뀐 시점에 이것은 이미 게이머들 간의 시합이라는 것이 들통 났다.
일반인 입장에서는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병수에게 패배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는 건가!’
“냐아옹~”
암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으아악!”
병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체를 추켜세운 것이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팔을 꺾어버렸다.
쿠당탕-!
테이블 한쪽이 뒤집히며 병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게 끝이면 좋은데 병수는 마치 눈앞에 보이지 않는 벌레라도 있는 것처럼 양팔을 마구 휘저어 댔다.
“으악! 으아악!”
쉬-
낯선 소리가 주위에 퍼졌다. 마침 음악이 바뀌면서 카페 안이 조용해진 찰나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나와 유진이, 그리고 카페 손님들의 시선이 향했다.
흰색 스키니진을 입은 병수의 바지 한가운데가 노랗게 물들어갔다.
‘어휴…….’
그러게 왜 안 어울리는 하얀색 바지는 입어가지고.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달았다.
병수의 맞은편으로 이동한 암젤이 환각 스킬을 사용한 것이다. 시합 도중 들린 고양이 울음소리에 병수의 시선이 무심결에 암젤 쪽으로 향했다.
환각 스킬에 걸리는 시간은 1초로 충분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병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그리고 유진이에게로 향했다.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더니, 이내 바지가 축축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진이가 내 손을 잡았다.
“그만 가자.”
나는 이 사건이 어떤 타이틀로 인터넷에 올라가게 될지 기대되었다. 암젤에게 몰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굿잡!’
4
유진이는 꽤 충격이 컸는지 운전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 내가 좀 심했지? 그래도 오랜만에 본 친군데.”
“아~ 니, 전혀!”
유진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친구는 무슨 친구. 쟤, 초등학교 때도 너한테 계속 시비 걸고 그랬잖아. 내가 네 편 들면 도망가고 그랬던 앤데.”
“그런 것도 기억나?”
“이상하게 내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서 엄청 곤란했어. 특별히 뭔가 하는 것도 아니라 신고하기도 좀 그렇고.”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병수에게는 ‘추적’ 스킬이 있다. 유진이를 짝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생겼다는 그 스킬이 유진이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때 너 스킬 사용했던 거지?”
“응?”
“그렇잖아. 갑자기 병수가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넘어갔는데. 그…… 오줌까지 지리고 말이야.”
‘예리한데!’
암젤이 한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도 그렇게 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 스무 살밖에 안 된 애가 인생을 복잡하게 살았나 봐.”
암젤의 환각 능력은 상대가 기억하는 가장 불쾌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물론 반대로 기분 좋은 환상에 취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 말이 우스웠는지 유진이가 풋 하고 웃었다.
“어쨌든 이제 걔가 네 앞에 나타나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겠지?”
대신 내 쪽은 이걸로 끝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병수는 나 때문에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졌다.
19세기 같았으면 수치심에 자살을 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21세기니 아마 어떻게든 내게 복수하려 할 것이다.
‘나도 바라는 바니까.’
아까 같은 끝맺음이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병수 같은 타입은 확실하게 밟아줘야지, 아니면 계속 귀찮게 엉겨 붙는다.
내 힘이 아니라 암젤의 능력을 빌린 것이므로, 나 역시 개운치는 않았다.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사실 차로 데려다주는 것은 남자인 내가 해야 되는 건데.”
“오~ 아니까 다행이네. 나중에 면허 따려면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
“그래, 고마워.”
“오늘 즐거웠어.”
유진이의 표정은 아까의 해프닝 따위 완전히 잊은 얼굴이었다. 어렸을 때도 이 애의 이런 쿨함을 좋아했었다.
“잘가~”
멀어지는 유진이의 차를 바라보고 있자니 암젤이 내 다리를 꾹꾹 눌렀다.
“왜?”
“빨리 들어가자옹. 닭고기 한 조각 말고 먹은 게 없어서 배고프다옹.”
“그러게 집에 있지 그랬어.”
“흥,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할 것 아니냐옹.”
“그건 또 뭔 소리야?”
암젤은 기운이 없는지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휘적휘적 먼저 아파트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