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독식왕 : 클리어러 030화
Chapter 12 - 동창
1
하품을 하며 아파트 입구에서 나올 때, 빵 하고 경적 소리가 울렸다. 돌아보자 빨간색의 쿠페가 서 있었다.
크기는 작아도 매끈하게 잘 빠진 차다.
그 안에서 낯익은 여자아이 하나가 손을 흔들었다. 두 번째 보니 그녀의 얼굴에서 어렸을 적의 흔적이 더 많이 보였다.
나는 차로 걸어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빨리 나왔네?”
“네가 늦은 거야. 여섯 시 오 분이잖아.”
“아…… 미안.”
열린 문 안으로 암젤이 잽싸게 탑승했다. 빨간색 망토와 모자를 쓴 고양이를 보고 유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웬 고양이? 네가 키우는 거야?”
“응, 집에 두고 오기가 좀 그래서.”
“정말 예쁘다. 종이 뭐야?”
유진이는 양손으로 암젤을 안아 올리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암젤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캬악!”
“어머, 성깔 있는 고양이네.”
암젤은 휘리릭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응, 그놈 성격이 좀 못됐어.”
“냐아옹.”
언제 이빨을 드러냈었냐는 듯 암젤이 눈을 반짝이며 귀여운 척을 했다.
“고양이 옷 네가 사준 거야? 너 보기보다 센스 있다.”
“아니야. 자기가 골랐어.”
나도 모르게 한 말이지만 유진이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가게는 내 마음대로 갈 건데 괜찮아? 너는 오랜만이라 잘 모를 거 같아서.”
“응, 괜찮아. 아무 데나 가.”
능숙하게 자동차를 운전하는 유진이를 슬쩍 옆 눈으로 보았다. 그녀에게서 향기로운 냄새가 밀려왔다.
단발로 자른 헤어스타일 탓에 어렸을 때처럼 보이시한 분위기가 엿보였지만, 몸매나 옷차림은 성숙한 여성의 것이었다.
짧은 바지 아래 하얗고 긴 다리가 드러났다.
“뭐라고 했니?”
“응?”
“흥이라고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난 아닌데?”
“미안, 내가 잘못 들었나 보다.”
“냐아옹~”
암젤이 내 시선을 피해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2
바뀌는 풍경을 보며 나는 감탄을 했다. 상당 부분이 변하기는 했지만 이곳은 어렸을 때 내가 살던 동네다.
이 근처에 나와 유진이가 다녔던 초등학교가 있다.
유진이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저기 가자.”
나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대봉이네 분식’이 있었다.
대봉이네 분식.
대봉이는 다름 아닌 가게 사장님의 장남 이름이다. 우리가 초등학생 때 대봉이 형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때만 해도 역사가 오래된 가게였는데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왜냐하면 게임 안에 십 년 동안 갇혀 있을 때, 엄마가 해준 음식 말고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이 바로 대봉이네 치킨이었기 때문이다.
대봉이네 분식에서는 분식만 팔지 않는다. 오히려 대표메뉴는 치즈 가루가 듬뿍 뿌려진 치킨이었다.
한 마리 팔천 원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이랑 돈을 모아서 자주 왔었다.
‘으음…….’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
유진이는 웃는 얼굴로 앞장섰다.
“빨리 가자. 나 배고파.”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분식점 아저씨는 그대로였다. 초등학생들은 이미 하교를 한 시간이라 가게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는데 아저씨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성인 두 명이 들어오자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유진이가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잘 계셨어요? 저 유진이에요. 중학생 때까지 자주 왔었는데.”
“유진이?”
주인아저씨는 살짝 눈을 찡그리더니 오래지 않아 그녀를 기억해 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얼굴 까먹겠다.”
아저씨의 시선이 이번엔 내게로 옮겨왔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의 표정이 점차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혹시 너, 성호니?”
“네? 어떻게 아셨어요?”
이름이 살짝 틀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기억력이 엄청난 수준이다. 아저씨는 들고 있던 주걱을 놓더니 조리대에서 돌아 나와 나를 끌어안았다.
“성호야, 너 그때 몸 아파서 병원에 있었잖아. 몇 년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이제 괜찮아?”
마치 몇 년 못 본 자식을 본 것처럼 반기는 아저씨를 보며 나는 예상 못한 전개에 어리둥절했다.
“너 친구들하고 오면 늘 저기 구석에서 게임기만 붙들고 있었잖아. 대봉이도 너한테 게임기 들고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랬는데.”
“하하. 기억력 좋으시네요. 형은 지금 뭐 해요?”
“몇 달 전에 장가갔어. 얼른 앉아라. 치킨 먹을 거지? 더 시킬 거 있으면 얘기하고.”
대봉이 형이 장가를 갔다는 얘길 들으니 시간의 흐름이 피부로 느껴졌다.
변하지 않은 주인아저씨나 가게 안의 풍경이 가슴 가득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 생글거리는 유진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여기 올 생각을 했어? 나는 네가 기대하는 거 같아서 더 비싼 거 먹으러 갈 줄 알았는데.”
“어머, 날 뭘로 보고 그러는 거니? 네가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펑펑 쓸 수 있는 입장은 아니잖아. 그걸 떠나서 너 깨어나면 같이 여기 와보고 싶었거든. 혹시 불편한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굿 초이스야. 나도 대봉이네 치킨 엄청 먹고 싶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저씨가 치킨을 들고 왔다. 쟁반 위에는 함께 주문한 튀김이랑 어묵도 있었다.
아저씨는 더불어 바닥에 작은 접시 하나를 놓았다.
“우리 예쁜 아가씨는 이거 드세요~”
접시에는 삶은 닭고기가 담겨 있었다.
“어떻게 암컷인 줄 아셨어요?”
“이렇게 예쁜데 수컷일 수가 없잖아. 그나저나 고놈 정말 예쁘네. 오십 평생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는 처음 본다. 인간으로 치면 연예인 시켜도 되겠어.”
“얘 우쭐해하니까 그만 하세요.”
“냐아옹~”
암젤은 도도하게 의자에서 내려가 접시 앞에 앉았다. 그녀는 아무런 간도 되어 있지 않은 닭고기 냄새를 맡더니, 멀어지는 아저씨를 보고 생각했다.
‘이 양반이, 내가 고양이인 줄 아나.’
나는 대봉이네 치킨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은 뒤 감탄했다.
“맛있다!”
대봉이네 치킨이 그리웠던 이유가 단순히 추억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건강한 맛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이 맛은 다른 가게에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유진이와 나는 추억에 젖어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몸은 컸어도 마음은 그대로다.
십 년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은 무척 신기한 일이었다.
만약 게임 안에 끌려 들어가지 않았다면 얘랑 베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여자랑 남자랑 베프가 될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하고 다시 보니 유진이는 틀림없는 여자였다.
그것도 무척 예쁘게 생긴.
왜 전에는 몰랐지?
무심코 아래를 보니 암젤이 나를 무서운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깜짝아!’
“냐아옹~”
나는 입도 대지 않은 그녀의 접시를 보고, 치킨 한 조각을 몰래 놓아주었다.
암젤은 눈에서 살기를 풀고 허겁지겁 그것을 먹었다.
3
분식집 주인아저씨는 내가 하려는 계산을 한사코 마다했다. 결국 자주 오겠다는 약속만 하고 가게를 그냥 나왔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동네를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카페였다.
말 그대로 덩치 큰 초딩이나 다름없는 나는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 처음이었다.
유진이는 자기가 알아서 주문을 했다. 자기 것은 아메리카노, 나는 카라멜 마끼아또였다.
카페 직원이 유진이를 찬찬히 보더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김유진 게이머 아니세요?”
“아, 네…….”
“죄송한데 사인 한 장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팬이라서…….”
“그러세요.”
유진이는 직원이 내민 종이에 사인을 해주었다.
상황을 알고 몇몇 사람이 호들갑스럽게 다가와서 그들에게도 사인을 해주고 사진까지 찍어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신기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기다렸지? 미안해.”
“아니야.”
우리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 의자에 앉아 무릎 위로 올라온 암젤의 등을 쓰다듬고 있자니, 이것도 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이가 나를 보고 웃었다.
“카페에 오는 것도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여자 친구도 생기고 그러지.”
기분 탓인지 그 말을 하는 유진이의 얼굴이 살짝 빨개진 듯했다.
처음 맛본 카라멜 마끼아또는 꽤 맛있었다.
커피를 맛있다고 느끼다니, 나도 명실상부 어른이 된 걸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게임 얘기로 넘어갔다. 유진이는 여전히 여자치고는 드문 골수 게이머였다.
“이 일은 여유 시간이 많은 편이라 게임할 시간이 많아서 좋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나도 오랜만에 게임을 다시 해본 결과 던전에 들어가는 것과 게임기로 게임을 하는 것은 비슷한 면도 있지만 서로 다른 재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 우리나 되니까 이런 관점으로 얘기를 하는 거겠지만.
지난 십 년 동안 출시된 게임 얘기를 들으며 나는 마음이 들떴다. 할 게임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즐거운 일이니까.
유진이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너 던전에 들어갔었다고 했지? 어땠어?”
나는 그녀에게 던전을 공략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물론 PK를 당할 뻔하거나 티코이를 만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내 얘기를 듣는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정말? 이틀 만에 혼자 최상층까지 공략을 했다고?”
“응, 라이선스도 받았어.”
“너 실력이 보통이 아닌가 보구나. 혹시 괜찮으면 우리 길드에 들어오지 않을래? 내가 얘기하면 면접을 볼 수 있을 거야. 우리 길드는 소수 정예라서 멤버를 자주 뽑지는 않거든.”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솔플이 좋아서.”
암젤과 티코이가 있으니까 정확히 말해 솔플은 아니지만.
“하긴, 너는 온라인 게임 잘 안 했었지?”
“게임은 공략하려고 하는 거지, 친목을 도모하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잘 생각해 봐. 등급이 높은 던전은 절대 혼자 공략할 수 없어.”
“알았어. 생각해 볼게.”
유진이는 실망한 듯했지만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물론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나는 문득 제임스에게 얻은 스킬 스톤이 생각났다. 유진이는 나보다 경험이 많으니 얘길 하면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고 나서 오늘은 그냥 넘어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고, 더구나 그 얘길 하면 살인을 한 이야기도 해야 할 테니까.
아무리 초등학교 동창이라지만 두 번 만나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다시 대화를 이어가려는데 갑자기 테이블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군가가 옆에 다가와 선 것이다.
올려다 보니 덩치 큰 남자였다.
그는 대뜸 반가운 음색으로 말을 했다.
“유진아! 여기서 또 보네?”
“어? 병수야…….”
유진이의 얼굴은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색하고 거북한 표정.
나는 유진이에게서 반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병수라는 남자가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줄 알았다.
“이쪽은 누구?”
병수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기억 안 나니? 초등학교 때 우리랑 같은 반이었잖아. 성오야, 조성오.”
“조성오?”
병수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몇 초 뒤 그의 주름진 이마가 펴졌다.
“아~ 성오! 너 병원에 있지 않았어? 죽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야!”
병수의 막말에 유진이가 깜짝 놀라 제지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네? 언제 깨어난 거냐? 너.”
나는 내 어깨 위에 올라온 병수의 손을 흘긋 보고 대답했다.
“미안한데, 너 나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