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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29화 (29/245)

# 29

독식왕 : 클리어러 029화

2

내 선언에 암젤과 티코이의 반응은 정반대로 갈렸다.

“왜냐옹. 저런 허접한 여우 없어도 우리끼리 충분히 잘할 수 있다옹.”

티코이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후 목청을 가다듬고 조심히 말했다.

“나는 한 번 너에게 버림받은 적이 기억이 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을 하지? 내게 증거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증거?”

“계, 계약을 해다오.”

그 말에 암젤이 펄쩍 뛰었다.

“웃기지 말라옹! 주인님이 왜 너 따위와 계약을 하냐옹!”

암젤의 말과는 달리 내 대답은 쿨하게 나왔다.

“좋다, 네가 바란다면.”

티코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계약 의식은 어렵지 않았다. 티코이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의 복슬복슬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그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저 티코이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인님을 따르겠나이다.”

“나 역시 또다시 일시적인 변덕으로 너를 내쫓지 않겠다.”

합쳐진 손을 중심으로 밝은 빛이 퍼져 나갔다. 내 눈에 티코이의 정보창이 드러났다.

이름 : 티코이

성향 : 주인의 성향에 따름

스킬 :

수리-고장 난 장비를 새것처럼 복원할 수 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복원에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

업그레이드-장비를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다. 레벨이 오를수록 보유 레시피가 늘어난다.

개발-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낸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창의력이 상승한다.

이력 : 여우족의 한 갈래인 테아족은 대대로 훌륭한 장인을 많이 배출했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티코이는 뒤늦게 계약자를 만나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퀘스트 ‘일곱 시간 안에 던전 마스터 굴복시키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20,000, GP +40,000을 얻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NPC 한 명 포섭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20,000, ‘아르바난의 가죽옷’ ×1을 얻었습니다.]

‘역시.’

던전 마스터를 굴복시키라는 것은 티코이를 포섭하라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물론 퀘스트가 이렇게 주어졌다고 해도 필요가 없다면 파티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후원한 이계인의 목적은 내게 던전을 공략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가 나를 십 년간 가두어놓은 세상에서 NPC를 불러냈다면, 그리고 직접 대면을 하도록 만들었다면 분명 던전 공략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티코이가 어떤 타입의 NPC인지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굳이 데리고 다니며 공략을 함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쩌다 이 던전에 흘러들게 됐지?”

“목소리가 이곳으로 인도했습니다.”

“목소리?”

나는 암젤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기 이외의 NPC와 계약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여전히 골이 나 있었다.

여우의 얼굴을 훑어보았지만 암젤처럼 특이한 표식은 없었다.

나는 암젤에 이어 티코이까지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둘을 만났다면 세 번째가 있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너는 던전 마스터지? 혹시 다른 던전에서 일어나는 일도 알 수 있나?”

영리한 티코이는 내가 한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혹시 저처럼 그곳에서 나온 존재가 던전으로 흘러들지 않았을까 궁금하신 거군요.”

“응.”

“던전에는 저마다 코어라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감추어져 있어서 던전 마스터가 아니면 접근이 불가능하죠. 던전 코어는 던전 안의 몬스터를 주기적으로 재생산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주변의 다른 던전들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죠. 하지만 이 던전이 F급이다 보니 코어의 작용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만약 주인님이 더 등급이 높은 던전을 공략하고 그곳의 코어를 들여다볼 기회를 주신다면 이곳에서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았다. 그럼 너는 당분간 정보를 얻는 데 집중하도록 해. 그리고-”

나는 입고 있는 가죽옷을 벗었다. 아스도라퀸과 싸우는 동안 방어구에는 많은 흠집이 나 있었다.

암젤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너도 벗어. 티코이가 네 옷을 수리해 줄 거야.”

암젤은 분한 얼굴로 나와 티코이를 번갈아 보다가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 변신했다. 눈앞에서 시스루를 벗는 그녀의 동작이 꽤 요염해서 저절로 부끄러운 감정이 생겼다.

옷을 티코이에게 건넨 그녀는 재빨리 내 몸을 껴안았다.

“명심해, 여우. 주인님은 내 거야.”

그것을 보고 티코이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전히 너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군. 걱정 마. 나는 수컷이다.”

펑!

연기가 흩어지더니 티코이가 인간형으로 변신했다. 묘족이나 여우족, 그리고 몇몇 NPC는 이처럼 여러 가지 형태로 변신하는 것이 가능하다.

티코이로 말하자면 여우, 수인, 인간 세 가지 형태로 변신할 수 있었다.

티코이가 변신한 모습은 이지적인 풍모를 가진 젊은 남자였다. 키는 170센티미터 후반에 피부가 희고 깔끔한 인상이다.

바깥에 나가면 암젤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혹할 만한 외모였다.

티코이는 중지로 안경을 끌어올리고 나서 말했다.

“단순한 수리 말고 제게는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물론 재료가 필요하기는 하지만요.”

“뭐가 필요하지?”

“주인님, 결정석 가지고 계시죠?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은 아스도라퀸을 개조하면서 다 써버려서요. 적당한 걸로 두 개만 주십시오. 주인님이 벗어주신 옷의 성능이 썩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개조를 한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결정석은 필요치 않다는 거죠.”

나는 인벤토리에서 결정석 두 개를 꺼내 주었다.

“시간은 얼마나 걸려?”

“지금 기술 수준으로는 적어도 열흘은 걸릴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는 주인님과 계약을 맺었으니 제 능력도 더 빠르게 오를 겁니다.”

나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면 무기나 다른 장비도 맡기려고 했었다. 하지만 전부 맡기면 열흘 이상은 던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일단은 피오리오 가죽옷 하나만 맡겼다.

티코이가 말했다.

“완성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핸드폰 번호가 어떻게 되시죠?”

“핸드폰?”

“네? 혹시 없으신가요?”

“있기는 한데, 너도 핸드폰이 있어?”

“물론이죠. 저는 24시간 내내 던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죠. 이 던전에 저만 이용하는 뒷문이 있거든요. 바깥에 작지만 아파트도 한 채 있습니다. 주소 알려드릴 테니 언제든지 오세요. 변변치 않은 솜씨입니다만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나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긴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게 빨랐을 수도 있다.

“그래, 완성되면 연락해.”

나는 티코이에게 내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아르바난의 가죽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암젤과 함께 귀환서가 놓여 있는 단상으로 걸어갔다.

그 위에 손을 올리자 밝은 빛이 몸을 감쌌다.

3

내가 던전 밖으로 걸어 나오자 관리소 앞을 서성거리고 있던 소장이 밝은 얼굴로 뛰어왔다.

“무사하셨군요!”

던전을 나온 것이 오전 열시가 살짝 넘어가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소장은 제멋대로 조사를 포기하고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잘하셨습니다. 초보 게이머가 맡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었어요.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던전의 위험 요소는 제거되었습니다. 이제 제한을 해제하셔도 되요.”

“네?”

나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얼굴의 소장에게 인벤토리에서 꺼낸 결정석을 내밀었다.

그것은 던전 마스터를 물리쳐야 얻을 수 있는 굵은 결정석이었다.

소장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는 동안 나와 암젤은 관리소 직원 몇 명과 던전에 다시 들어갔다. 불안 요소가 사라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5층으로 바로 이동하여 정상적인 외견을 갖추고 있는 아스도라퀸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왔다.

“던전 마스터가 변이를 일으켰던 모양이군요. 알아보았더니 이런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변종은 어디까지나 돌연변이니까 그놈만 죽이면 다시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번개가 같은 자리에 두 번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저희 던전은 오히려 더 안전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장이 하는 말은 백 퍼센트 틀린 말이었지만 굳이 바로잡아주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보고를 올렸으니까 상급 기관에서 조사원이 나올 겁니다. 간단한 절차니까 금방 끝날 거예요. 2, 3일 뒤에 성오 씨 계좌로 의뢰비와 성공 보수가 입금될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니요. 제가 더 감사하죠!”

소장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을 통해 훈훈한 감정이 전달되어서 나는 그의 이름쯤은 기억해 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명찰이 붙은 가슴께로 시선을 옮기다가 곧 마음을 바꾸었다.

‘이제 여기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니까.’

마지막으로 한 일은 라이선스를 발급받는 것이었다. 며칠간의 던전 공략으로 내 능력은 입증이 되었다.

게이머가 가진 능력의 종류와 수준은 다양하기 때문에 측정을 하더라도 백퍼센트 정확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여기 추가되는 정보가 몇 등급의 던전을 공략했느냐, 공략은 몇 명이서 했는가 하는 것들이었다.

게이머의 능력은 경험이 쌓일수록 상승하기 때문에 재측정을 통해 라이선스를 갱신하는 것도 가능하다.

심사 결과 내 등급은 D급으로 나왔다. 그 말은 곧 국가 전산망에 내 신상이 등록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명실상부 정식 게이머가 된 것이다.

4

집에 돌아오자 거실에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이 놓여 있었다. 일을 그만두라고 말씀드렸는데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럴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일을 안 하시게 하려면 내가 빨리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에 접속해 인근에 있는 다른 던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F급 던전 공략을 끝냈으니 다음에 할 일은 E급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더 높은 등급에 도전하고 싶지만, 아직 그럴 레벨이 아니었다.

던전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한다. 공략을 실패해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단계적으로 차례차례 밟고 올라가는 것이 나았다.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솔솔 졸음이 왔다.

암젤은 이미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휴대용 게임기를 손에 들고 침대로 올라갔다. 암젤을 옆으로 살짝 밀어내고 침대에 누웠다.

십 분쯤 게임을 했을까?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눈을 뜬 것은 시끄럽게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창밖을 보자 쨍쨍 햇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그리 오래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것은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던전 관리소에서 연락한 건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성오니?”

전화기 안에서 들려온 것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나야, 유진이.”

“아아~”

“뭐야, 그 반응은. 내 전화가 반갑지 않은가 보네?”

“아니야. 반가워, 반가워. 그런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언니한테 물어봤지. 너 혹시 오늘 시간 되니?”

“응, 별일 없는데. 왜?”

“왜긴, 너 전에 나한테 밥 산다고 했잖아. 그거 오늘 저녁에 사주면 안 돼?”

“그래, 상관없어.”

“좋아, 그럼 내가 여섯 시까지 너희 아파트 앞으로 갈게. 시간 맞춰서 나와.”

“알았어.”

통화 막바지에 유진이의 음성은 매우 밝았다.

얼마나 비싼 걸 먹으려고 이렇게 신난 거지?

나는 살짝 귀찮게 됐다는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원래 계획은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아까 하던 게임을 마저 클리어하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암젤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깜짝이야!”

“누구냐옹?”

“친구야, 이따 같이 밥 먹기로 했어.”

“친구라면 혹시 전에 찾아왔던 여자 친구 말이냐옹?”

“그냥 사람 친구야. 여자 친구는 아니고.”

“흐응~”

암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데려가라옹.”

“뭐? 네가 사람들한테 얼마나 주목받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귀찮아서 안 돼.”

“고양이처럼 행세하겠다옹. 절대 사람 말은 하지 않겠다옹.”

나는 굳은 의지를 보이는 암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긴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놔두고 가는 것도 조금 미안한 노릇이었다.

“알았어. 같이 가자.”

암젤은 훌쩍 뛰어서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어디가?”

“외출하는데 씻어야 될 거 아니냐옹.”

그 말은 내게는 꽤 충격이었다. 암젤이 스스로 씻겠다고 나서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암젤이 ‘묘족의 품격 No.2’를 입고 나타났다.

“여우한테 그 옷을 맡기는 게 아니었다옹. 입고 나갈 옷이 이거밖에 없지 않냐옹.”

“누가 네 옷차림에 신경을 쓴다고 그래?”

“흥! 주인님은 모르는 여자들만의 그런 게 있다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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