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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28화 (28/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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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028화

    Chapter 11 - 꾀 많은 여우

    1

    ‘아!’

    불현듯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가상현실 게임을 1회 차 플레이할 때, 그러니까 십 년 전, 이렇게 생긴 여우족 캐릭터를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처음에는 적으로 등장하지만 결국 동료가 되어 파티로 집어넣을 수 있는 타입의 NPC였다.

    한 번 동료로 맞았었지만 전투력이 약하고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아 과감히 파티에서 내쳐 버렸다.

    내가 원래 그런 면은 확실하니까.

    공략이 중요하지, 애정으로 캐릭터를 키운다는 것은 내 성향과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한번 같이 다녀보고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2회 차부터는 당연히 이 여우가 있는 공략 루트를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자그마치 십 년 전에 잠깐 스쳤던 인연이니까.

    ‘그런데 이 여우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잘 알고 있지? 암젤도 아는 모양인데.’

    설마 파티에서 내쫓은 원한을 품고 있는 건가?

    유저의 입장에서 NPC의 심리를 분석하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 내게는 여우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보다 현재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암젤은 아스도라퀸에게 고전하고 있었다.

    치타들은 아무리 소환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묘족의 외출 No.4’를 입고 나서 마나 증폭률이 오르긴 했지만 소환술을 연속으로 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캬악!”

    결국 그녀도 아스도라퀸이 쏜 독에 뒷다리를 맞고 말았다.

    나는 재빨리 거미에게 화살을 날렸다.

    주위가 워낙 어두운 데다 목표물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서 조준하기 쉽지 않았다. 다만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암석들 덕분이었다.

    거미의 몸통을 뒤덮은 반짝이는 암석들.

    그것들에 생각이 이르자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여우족 캐릭터의 역할은 전투에 국한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장비를 수선하고 재료를 모아 강화하는 역할을 더 즐겼었다.

    ‘혹시 내가 캐릭터를 잘못 사용했었나?’

    여우는 아스도라퀸을 불러내면서 자신의 개조에 의해 재탄생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우가 이 몬스터에 뭔가 조작을 했다는 뜻이 된다.

    내 화살이 암석 중 하나가 박혀 있는 거미의 미간을 조준했다.

    ‘연사!’

    퓩! 퓩! 퓩!

    쨍-!

    연사로 쏘아진 화살 세 대 중 두 대가 거미의 미간을 맞혔다. 암석이 깨어지면서 그것이 내뿜던 빛이 사라졌다.

    거미는 당황하여 즉시 방향을 바꾸어 달아났다.

    나는 거미가 있던 쪽으로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결정석.

    몬스터를 죽이면 나오는 결정석이 거미의 몸 이곳저곳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결정석이 어떻게 거미의 능력을 끌어올린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덕분에 이 까다로운 몬스터를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암젤!”

    내 부름에 암젤이 뒷다리를 끌며 달려왔다.

    “입 벌려.”

    나는 암젤의 입안에 포션을 부어주었다. 절반을 따라주고 나도 나머지 절반을 마셨다.

    뒷다리를 회복한 암젤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거미, 엄청 강력하다옹. 이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옹.”

    나는 개조된 아스도라퀸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내 생각을 말해주었다.

    암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알았다옹.”

    거미줄을 타고 움직이며 독액을 뿜어내던 거미가 다시 천장을 통해 내려왔다.

    마나를 회복한 암젤이 세 마리의 치타를 소환했다.

    이번에 치타들은 아스도라퀸의 머리 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숨을 들이켜려고 했던 거미가 긴 다리로 치타들을 잡아끌었다.

    날카로운 이빨로 소환수들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커허엉-!”

    치타들이 희생되며 생긴 틈을 이용해 나는 잽싸게 거미의 배 쪽을 타고 올라갔다.

    몸통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결정석들.

    무기를 창으로 바꾼 나는 그것들을 차례대로 내려쳤다.

    쨍! 쨍!

    두 개를 깨뜨렸을 때, 아스도라퀸이 포효하며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거미가 다시 줄을 타고 올라갔다.

    나는 거미의 반응에서 이 공격법이 확실히 먹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

    어둠 속에 숨어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티코이는 여유에 차 있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한 시간째, 성오와 암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정석을 이용해 몬스터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지난 한 달간의 연구 성과로 밝혀낸 것이다.

    이쪽 세상에서 결정석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들은 결정석을 이용해 차를 굴리고 공장이 돌아가게 만들지만, 그것 이외에도 이 신비한 보석의 쓰임은 많았다.

    결정석은 몬스터나 게이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을 활용하면 장비나 무기를 강화하고, 더 나아가 더욱 강력한 아이템을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으음…….”

    티코이는 안타까운 마음에 침음성을 삼켰다.

    ‘적어도 내 이름만 기억해 줬더라면…….’

    그렇게 생각했다가 얼른 머리를 붕붕 내저었다.

    ‘저놈은 내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 내가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외로움에 떨며 보내야 했던가!’

    성오의 선택을 받지 못한 티코이는 자신의 능력을 조금도 개발하지 못하고 그대로 잊히고 말았다.

    ‘내 능력이면 그를 훨씬 빛나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티코이는 한편으로 지금이라도 그 기회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에는 그동안 쌓인 마음의 앙금이 너무 컸다.

    어둠 속의 여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나는 아스도라퀸과의 싸움에서 점점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물론 멀리서 볼 때는 나와 암젤이 던전 마스터에게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집요하게 한 일은 거미의 몸에 박힌 결정석을 모두 깨뜨리는 것이었다.

    결정석이 하나하나 깨져 갈수록 아스도라퀸의 전투력은 눈에 띄게 떨어져 갔다.

    나는 바자야의 시위를 당겨 거미의 아랫배를 겨누었다. 마나 화살은 시위를 당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력이 강해진다.

    최대치의 마나를 머금은 화살이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피잉-

    일직선의 궤도를 타고 날아간 화살이 마지막 남은 결정석을 정확히 맞추었다.

    쩡-!

    “크아아악!”

    거미가 포효하며 벌렁 뒤로 넘어졌다.

    “후우, 이제 다 됐네.”

    개조되지 않은 상태로 맞붙었다면 삼십 분 안에 끝날 수 있는 싸움이었다.

    정확히 측정하진 않았어도 아스도라퀸은 개조를 거쳐 적어도 레벨이 5 이상은 오른 듯했다.

    그 정도면 평소의 던전 마스터로 생각하고 들어온 게이머들이 충분히 고전할 수 있는 수치였다.

    나는 거미가 쓰러진 틈에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마셨다. 이번에도 절반을 마시고 절반은 암젤에게 주었다.

    앞다리로 병을 잡고 포션을 쭉 들이켠 암젤이 혀를 빼물었다.

    “힘들어 죽겠다옹. 이제 쥐어짤 마나도 없다옹.”

    “괜찮아. 이제 네 역할은 끝났으니까.”

    결정석을 깨뜨리면서 내가 아스도라퀸에게 해둔 또 하나의 장치는 바로 베퉅루킹 독화살을 요소, 요소에 박아 넣는 것이었다.

    열다섯 대가 넘는 화살이 급소를 파고들면서 거대한 아스도라퀸도 천천히 중독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크르르르…….”

    주둥이를 움찔거리는 거미를 앞에 두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플레지킹 허니.

    체력과 마나 소모량을 일정 시간 30퍼센트 감소시켜 주는 아이템이다.

    독과 혼합된 꿀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플레지 허니와는 다르게 몹시 쓴맛이 났다.

    나는 창을 비껴들고 달려갔다.

    ‘토네이도 스피어!’

    아스도라퀸이 저항하기 위해 긴 다리를 움찔거렸지만 중독된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던전 마스터에게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퍽! 퍽! 퍽!

    플레지킹 허니의 효과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내 마나도 바닥났다.

    아스도라퀸의 거대한 몸뚱이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퀘스트 ‘아스도라퀸 한 마리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10.000이 주어집니다.]

    [퀘스트 ‘다섯 시간 안에 던전 마스터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12,000, GP +25,000을 얻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세 시간 안에 F급 던전 5층 공략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30,000, ‘아르바난의 장갑’을 얻었습니다.]

    [레벨 24가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창술 스킬 한 가지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내 눈앞에 이전에 선택하지 않은 스킬 두 가지를 더한 총 네 개의 스킬 목록이 떠올랐다.

    스킬의 등급은 모두 C였다.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건샷 스피어’를 골랐다.

    창끝이 폭발을 일으키며 길어져 적을 꿰뚫는 스킬이었다. 이 스킬을 사용하면 창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스킬의 기억이 활성화됩니다.]

    [‘건샷 스피어’의 레벨이 20이 되었습니다.]

    나는 던전 마스터가 남긴 결정석을 주웠다. 이 결정석은 크기도 크기지만 에너지의 응축도가 일반 결정석과 크게 차이가 난다.

    빛깔도 여타의 결정석과는 조금 달랐기 때문에, 이것을 제시하는 것이 곧 던전 마스터를 공략했다는 증표가 되었다.

    할 일을 마친 나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아스도라퀸이 사라지자 홀 안을 에워쌌던 거미줄도 모두 사라졌다.

    나는 아직 달성하지 못한 퀘스트가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이미 죽인 던전 마스터를 굴복시키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곳에 또 한 명의 던전 마스터가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가 진짜라고 할 수 있겠지.

    “그만 나오시지?”

    움찔 몸을 떠는 조그만 실루엣이 보였다.

    “주인님 말하는 거 못 들었냐옹? 확 잡아끌고 오기 전에 제 발로 나오라옹.”

    나는 암젤을 제지하고 말투를 바꾸어 조금 부드럽게 말했다.

    “아까는 미안했다. 이제 생각이 났어. 이름이 타코이랬나?”

    “티코이다!”

    여우가 발끈하며 몸을 드러냈다.

    얼굴이 상기된 여우는 매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이 녀석을 굴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했다.

    ‘싸우라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생각을 정리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너 혹시 우리 파티에 들어오고 싶은 거야?”

    여우가 놀란 가슴을 한껏 부풀렸다.

    “누가, 너, 너네 따위의 파티에 드,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거냐? 흐, 흥!”

    ‘들어오고 싶어 하는 거 맞네.’

    알기 쉬운 반응을 보며 나는 팔짱을 끼었다.

    “나한테도 기준이라는 게 있다. 그냥 아무나 받아줄 수는 없어. 일 분 주겠다. 자신을 PR해 보도록.”

    내 말에 암젤은 여우 못지않게 당황했다.

    “안 된다옹. 저딴 놈을 왜 받아준다는 거냐옹. 주인님과 나한테 이빨을 드러낸 놈 아니냐옹.”

    나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댔다.

    암젤은 몹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역시 불쾌한 예감이 맞았어!’

    깊은 고민에 빠진 여우에게 다시 말했다.

    “시간 간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아.”

    눈을 질끈 감은 티코이가 소리쳤다.

    “저, 저는 말입니다. 무기와 방어구를 수선할 수 있고 강화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그거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부족해.”

    물론 이런 NPC가 있다면 편리하긴 하겠지만 게임을 하는 동안 나는 주로 방어구가 못쓰게 되면 새 것으로 바꾸는 방법을 택했다.

    더 좋은 장비는 끊임없이 나오니까. 어차피 공략을 위해 사용하는 GP라면 아깝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과거에 티코이를 파티에서 내쳤던 것이다.

    당황한 눈알을 쉼 없이 굴려대던 티코이가 말을 이었다.

    “이쪽 세상은 우리가 있던 곳과는 다릅니다. 몬스터를 죽이면 결정석이 나온다는 말씀입죠. 아스도라퀸을 보셔서 아실 겁니다. 제 기술과 결정석이 가진 잠재력을 결합하면 뛰어난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서포트하면 전 세계의 던전을 모두 공략하는 것도 결코 꿈이 아닙니다!”

    티코이는 흥분한 나머지 목에 핏발이 잔뜩 섰다. 말을 마구 쏟아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진심이 나왔다.

    이제 와서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실제로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방금 말한 일이었다.

    눈앞의 인간을 서포트해서 최강의 게이머로 만드는 것!

    나는 티코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흐음…….”

    던전을 공략하면서 느낀 것은 내가 성장하는 방식과 등장하는 아이템들이 게임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티코이가 방금 한 말로 변수가 생겼다. 만약 결정석을 이용해 게임에서보다 더욱 강한 장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곳에서 얻었던 이상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

    게이머로서 어찌 그것이 욕심나지 않겠는가.

    나는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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