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독식왕 : 클리어러 023화
내 앞에 처음 클래스를 선택했을 때처럼 기본 클래스들이 나열되었다. 창술사는 이미 선택을 했기 때문에 목록에서 빠졌다.
나는 두 번째 클래스로 ‘궁사’를 선택했다.
웨펀마스터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는 두 가지 이상의 무기 클래스를 두 번 이상 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있다.
물론 ‘검술가’를 선택하면 초급 검술가 숙련도가 생겨 제임스에게 얻은 ‘엑스 자 베기’를 흡수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효율성을 두고 보았을 때 ‘근거리 무기+근거리 무기’보다는 ‘근거리 무기+원거리 무기’가 낫다고 판단했다.
거기다 아직 PK로 얻은 스킬 스톤을 소모해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것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따로 있을 것이기 때문에.
[궁사 클래스의 기억이 활성화됩니다.]
[궁사의 숙련도가 최고도가 되었습니다.]
내 신체는 또 한 차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레벨이 오르면서 기본 신체 능력이 향상되었으므로 처음만큼 큰 변화는 아니었다.
[궁사용 기본 스킬 한 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표시된 스킬 중 하나를 고르십시오.]
나는 세 가지 기본 스킬 중 ‘연사’를 선택했다.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초반에 가장 활용도가 높은 스킬이기 때문이다.
[스킬의 기억이 활성화됩니다.]
[연사의 레벨이 10이 되었습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까 사용하고 남은 스킬 강화석을 모두 꺼냈다.
개수는 총 여덟 개.
무기를 다루는 직업만 택한 탓에 마나의 양이나 운용 능력이 아직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로또 스킬 한 번쯤은 여유 있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두 번 연속 사용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나는 스킬 로또를 발동시켰다.
허공에 일곱 개의 공이 떠오르고 손에는 번호가 적힌 종이가 쥐어졌다.
파각, 파각.
열심히 번호를 대조한 내 얼굴에 애매한 표정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로또 5등에 당첨되었습니다!]
[당첨자의 모든 스탯이 20초간 10퍼센트 상향됩니다.]
그래, 이게 자연스러운 결과지.
지난번에 너무 운이 좋았던 것이다.
마나를 회복하고 다시 스킬을 사용한다 해도 결과가 더 좋게 나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20초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빠르게 강화석을 손에 쥐었다.
다섯 개째에 이르러 드디어 바라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스킬 ‘연사’의 등급이 C가 되었습니다.]
[스킬의 기억이 활성화됩니다.]
[‘연사’의 레벨이 20이 되었습니다.]
시간 안에 여덟 개 강화석을 전부 사용했지만 B등급까지 강화하지는 못했다.
나는 아쉬운 대로 몸을 일으켰다.
4층이 다른 층에 비해 더 공략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대장격 몬스터가 자주 출현한다는 것이다.
세리쿰킹과 베툴루킹의 출현 빈도가 잦은데, 그것은 던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심해졌다.
던전을 절반쯤 통과했을 때, 전방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야, 씨. 어떡해! 이제 해독제도 떨어졌어!”
“그러니까 주제넘게 왜 4층까지 오자고 한 거야? 3층까지만 공략해도 돈은 충분히 벌 수 있는데.”
“그래도 빨리 등급을 올려야 아무 길드에라도 들어가지. 어디 가서 파티 게이머라고 하면 간지가 안 난다고.”
“너는 목숨보다 간지가 중요하냐!”
티격태격 대는 목소리는 분명 3층에서 마주쳤던 게이머들의 것이었다. 서로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보니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들이 막아서고 있는 장소가 중앙 통로라는 점을 떠올렸다. 필연적으로 그곳을 통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귀찮게 됐네.’
웬만하면 상관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이 길을 막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히든 퀘스트를 달성하려면 빠른 공략 타임은 필수였다.
전갈 몇 마리를 베어버리고 전진하니, 과연 세 명의 게이머가 베툴루킹 두 마리를 놓고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세 명 중 하나는 신체 강화형이고 한 명은 고스트형, 나머지 하나는 매지션형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게이머는 능력에 따라 분류가 지어진다.
신체 강화형은 박광호나 제임스가 그랬던 것처럼 신체 능력과 방어력이 뛰어난 타입이고, 고스트형은 자기 몸과 연결된 분신을 만들어 그것을 조종해 싸우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매지션은 특화된 몇 가지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게이머다.
그밖에도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이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내가 가진 게임 시스템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의 각성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떤 유형이든 등급이 높아야 인정을 받고 그에 걸맞은 활동을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눈앞의 게이머들처럼 F급 던전 4층도 공략하지 못해 쩔쩔매는 것이다.
세 명의 파티가 싸우는 방식은 신체 강화형 게이머가 전면에서 어그로를 끌고 고스트형 게이머가 딜을 넣으며 매지션 게이머가 지원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신체 강화형 능력자가 베툴루의 독에 중독되어 버렸다. 매지션은 안티도트 마법을 시전할 줄 모르고, 그나마 가져왔던 해독제마저 몽땅 떨어진 상황이었다.
고스트형 능력자도 레벨이 높지 않아 분신을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젠장! 방법이 없어! 그냥 도망치자!”
“야! 나는 어쩔 건데? 뛰지도 못하는데!”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던전에서 마주친 게이머들은 서로 모른 척하는 것이 예의다. 몬스터를 죽이는 일은 결국 돈과 연결되는 일이니 자칫하다가는 칼부림이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던전 자체가 치안이 확보가 되지 않는 장소라 서로에게 품는 경계심이 매우 컸다.
“저기요.”
내가 말을 꺼내자 가장 뒤쪽에서 있던 매지션 게이머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맛!”
나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곤란한 상황 같은데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땀을 뻘뻘 흘리며 고전하고 있던 고스트형 게이머가 얼른 소리쳤다.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럼 일단 환자 데리고 뒤로 물러나세요.”
세 명의 게이머는 당황했지만 순순히 부상자를 끌고 뒤로 빠졌다.
자기들보다 어려 보이는 이 게이머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라서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방이 깨끗이 트이자 나는 창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베툴루킹 두 마리는 집게를 콱콱 찍어대며 기고만장해 있었다.
나는 뭔가를 깨닫고 둘 중 한 마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베툴루킹 중에는 드물게 독주머니가 신체 외부에 달린 놈이 있다.
대다수 베툴루는 배 안쪽에 독주머니가 있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독을 추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배 밖에 독주머니가 달린 놈은 그것만 따로 떼어내어 독을 수거할 수 있었다.
키리리릭-
베툴루킹 한 마리가 다섯 쌍의 다리를 재게 놀리며 먼저 달려들었다. 나는 놈을 향해 스킬을 날렸다.
‘토네이도 스피어!’
파바박-!
몬스터가 풍압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나는 연계 동작으로 벽을 차고 도약해 동작이 정지된 놈의 꼬리를 잘라 버렸다.
팍-!
꼬리가 없는 베툴루는 전력을 거의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스스로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뒤로 빠지기 바빴다.
나는 도망가는 놈을 쫓아가며 연속으로 창을 휘둘렀다.
중간에 다른 한 놈이 꼬리를 휘둘렀지만 되레 잘리기 좋게 몸을 갖다 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의 창격에 놈도 꼬리를 잃었다.
“캬아악!”
15레벨짜리 베툴루킹 두 마리를 죽이는 데는 삼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놈들이 사라지기 전에 독주머니를 떼어냈다.
[‘베툴루킹의 독주머니’ ×1을 얻었습니다.]
세 명의 게이머는 내 실력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자신들이 고전했던 몬스터를 이토록 짧은 시간에, 그리고 이토록 깔끔하게 물리치다니.
암젤이 그들의 반응을 보고 턱을 치켜들고 젠체했다.
“그럼 빡공하세요~”
결정석을 챙긴 내가 그대로 가버리려고 하자 매지션 게이머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내가 돌아보자 그녀가 겸연쩍은 투로 말했다.
“죄송한데…… 저희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이미 충분히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한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고스트 형 능력자가 재차 부탁했다.
“부상자가 있어서 3층으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공짜로요?”
“네?”
던전 공략을 하다 보면 다른 게이머들에게 구조를 당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지금처럼 레벨이 맞지 않는 던전에 욕심을 부리고 도전했다가 고립이 되면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엔 구조를 기다리거나 다른 게이머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대신 이럴 때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한다.
바로 가지고 있는 결정석을 모두 내어주는 것.
인터넷으로 정보를 알아보고 온 나는 룰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맨입으로 부탁하는 것은 매너가 아니다.
내 말을 이해하고 매지션 능력자가 말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전부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이차원의 주머니’에서 결정석을 꺼낸 뒤 내게 내밀었다.
대개 결정석 수거는 파티 중 한 사람이 전담한다. 세 사람이 공략을 했다고는 해도 전진한 거리가 얼마 되지 않다 보니 양이 많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더 지체되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고스트형 능력자에게 얼른 말했다.
“부상자를 업으세요.”
“네?”
“안 그러면 쫓아오기 힘들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전방을 향해 뛰어갔다.
“잠깐만요!”
“기다려요!”
당황한 게이머들이 얼른 부상자를 등에 업고 쫓아왔다.
나는 혼자 공략을 하던 때처럼 빠르게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나아갔다.
4층을 공략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3층과 똑같이 열 시간이었다. 히든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절반 이하를 목표로 해야 한다.
조건이 늘 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공략 시간을 네 시간으로 줄여 잡았다.
“암젤, 서두르자!”
“알았다옹!”
세 명의 게이머는 헉헉 대며 쫓아오기 바빴다.
“저 사람은 뭔데 저렇게 잘 싸우는 거야?”
“능력 자체가 강한 것 같지는 않은데, 경험이 많나?”
무엇보다 놀란 것은 따라가는 고양이가 소환술로 치타를 불러내는 장면을 본 뒤였다.
“우왓! 뭐야 저건?”
“각성수? 있다고 말만 들었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야!”
그들은 결정석을 내준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오늘 좋은 구경을 한다고 생각했다.
신체 강화형 게이머가 동료의 등에 업힌 채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그 예쁜 여자는 어디 갔지?”
“정말. 밥만 먹고 돌아갔나?”
두 남자 게이머가 입맛을 쩝 다셨다.
암젤이 바로 그 미녀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