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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18화 (18/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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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018화

    Chapter 08 - 던전에서 꿀 빨기

    1

    오전 8시 50분.

    나는 설레는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던전 개방 10분 전에 관리소 앞에 도착했다. 관리소 직원들도 공무원이기 때문에 정상 업무는 9시에 시작한다.

    물론 심야 근무를 하는 직원들도 있지만 그들은 종일 예약을 한 게이머들을 위해 남아 있는 것이고, 새벽에 새로 던전에 들어가는 게이머는 없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던전 관리소의 일과가 시작되는 것은 오전 아홉시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관리소 앞을 기웃거리자 익숙한 남자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나타났다.

    “어? 일찍 오셨네요?”

    바로 지난번에 이래저래 도움을 받았던 남자 직원이었다. 가슴께에 명찰이 달려 있었지만 이름을 알 필요가 있겠냐 싶어 기억하지는 않았다.

    “네, 던전 언제 여나요?”

    “던전은 항상 열려 있죠. 물론 들어가기 전에 확인을 받아야 하지만.”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되겠네요?”

    “하하.”

    직원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물론 지난번에 예약을 잡아준 것이 자신이니 얼굴을 비친 것만으로도 확인이라면 확인이랄 수 있었다.

    “아무리 F급이라도 혼자서 여러 층을 공략하는 것은 힘든 일이에요. 제가 알아서 처리해 드릴 테니 하는 데까지만 하다가 나오세요.”

    알아서 처리한다는 말은 벌금을 내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이리라.

    직원은 이 젊은 게이머가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마음이 앞서는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던전은 층을 올라갈수록 공략이 힘들어진다.

    아래층만 경험하고 의기양양해하다가 큰코다치게 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네, 고맙습니다.”

    “식사는 이따가 나와서 하실 거죠? 미리 말씀해 놓으시면 원하는 시간에 배달 음식 시켜드릴 수도 있는데요.”

    “아니요, 도시락 싸왔습니다.”

    “도시락이요?”

    나는 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서 싸주신 도시락을 가지고 나왔다. 3단 찬합으로 구성된 도시락은 놀랍게도 인벤토리를 두 칸이나 차지했다.

    “수고하세요.”

    직원에게 꾸벅 인사하고 던전 입구로 걸어갔다.

    일렁이는 막을 통과하자 예의 독특한 공기가 피부를 감쌌다. 내게는 마치 현실보다도 더 현실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공기.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이 마치 이쪽의 내가 진짜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층의 구조는 두 갈림길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조그마한 단상이 놓여 있었다. 세이브 존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단상이다. 그 위에는 모양은 같지만 표지의 색깔이 다른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던전은 특정 게이머가 몇 층까지 공략을 했는지 저절로 기억한다. 세이브 존에 있는 귀환서에 손을 대는 순간, 말 그대로 진행 기록이 저장되기 때문이다.

    1층을 다시 한 번 공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행동이었다. 1층에서 달성할 수 있는 퀘스트는 모두 달성했다.

    게다가 13레벨인 내가 저레벨 몬스터들을 아무리 잡아봐야 레벨이 빨리 오를 리 만무하다.

    같은 시간 동안 공략을 한다면 위층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와 암젤은 나란히 단상 위의 책에 손을 얹었다.

    화악-

    잠깐의 부유감이 찾아오고 우리를 뒤덮었던 빛이 사라지자, 배경은 1층 끝의 세이브 존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시선은 가장 먼저 계단 쪽으로 향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계단 옆에 천막 건물이 있던 장소를 향해서였다. 오늘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도 처음부터 그 자리에 상점이 나타났던 것은 아니었다. 모르긴 해도 던전이 내 시스템을 동기화하는 데 얼마간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역시나, 천천히 녹색 천막 건물이 나타났다.

    나는 암젤에게 물었다.

    “저 상점은 나만 이용할 수 있는 거야?”

    암젤의 이마에 있는 별 모양의 문신이 반짝였다.

    “그렇다옹. 다른 게이머들은 상점을 볼 수도 없다옹.”

    확실히 나만 던전에 있는 상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게이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혜일지 모른다.

    물론 현실에도 아이템 상점이라는 게 있고 각종 방어구와 장비들이 매매되고 있기는 했지만, 간편하기로 따지면 던전 내 상점과 비교할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상점을 이용할 때 현실의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 게임에서처럼 몬스터를 죽이거나 퀘스트를 달성하고 얻은 GP를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가 볼까?”

    나는 벅찬 마음으로 상점을 향해 걸어갔다. 녹색 장막을 확 걷고 들어가자 기이한 공간이 나타났다.

    현실에서는 대개 NPC 점주에게서 아이템을 구입했는데 이곳에는 NPC가 없었다. 그저 덩그러니 가판대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밖의 공간은 마치 소우주처럼 점점이 빛이 반짝이는 새까만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던전 자체도 평범하지 않은 장소이지만 이곳은 더욱 특이했다.

    가만히 서 있자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상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잠시 후 구입 가능한 물품이 표시됩니다. 터치를 하고 값을 치르면 아이템이 가판대 위에 놓이게 됩니다.]

    ‘음, 그런 거였군.’

    메시지가 사라지자 가판대 뒤의 공간에 가로세로 줄이 쭉 그어졌다. 그 위로 하나하나 아이템들이 표시되었다.

    공간의 규격은 인벤토리와 같다.

    나는 그곳에 그려진 아이템들을 둘러보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템은 모두 가상현실 게임 초반부에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 레벨에 맞추어 아이템들이 표시된 게 틀림없었다. 거기에 창술가라는 클래스와 파티원인 암젤의 정보가 더해졌다.

    나는 어떤 물건을 사야 할지 금방 결정을 내렸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상점에 어떤 물건들이 있을지 대충 예상을 했고, GP를 어떻게 써야 할지도 구상을 해놓았다.

    판매가는 게임에서의 가격과 똑같았다.

    암젤에게 말했다.

    “너 방어구 하나 사라.”

    “아무거나 골라도 되는 거냐옹?”

    “그래, 나 돈 많아.”

    “역시 주인님밖에 없다옹. 감사히 고르겠다옹.”

    암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묘족 전용 방어구라고 해봐야 세 종류밖에 없었다. 거기다 성능이나 가격도 고만고만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암젤이 앞발을 뻗었다.

    “저걸로 하겠다옹.”

    나는 그녀가 고른 방어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저거?”

    “어차피 성능의 차이는 별로 없다옹. 그렇다면 중요한 건 디자인 아니겠냐옹?”

    암젤이 고른 것은 ‘묘족의 품격 No.2’라는 상품이었다. 붉은색 체크무늬 망토와 같은 색상의 모자로 이루어진 의상이다.

    내 눈에는 No.1이나 No.3가 방어구로서의 무게감이 더 있어 보였지만 뭐 본인의 선택이 그렇다고 하니.

    [‘묘족의 품격 No.2’의 가격은 5,000GP입니다. 구입하시겠습니까?]

    “그래.”

    대답과 함께 촤르륵 하고 값이 치러지는 소리가 났다. 공간을 떠난 아이템이 가판대 위에 놓였다.

    암젤은 인간형으로 변신했다.

    언제 보아도 민망한 차림의 그녀가 망토를 두르고 모자를 썼다. 비키니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그런 걸 걸쳐 봤자 왠지 더 에로틱해 보일 뿐이었다.

    암젤이 내 팔짱을 끼고 얼굴을 비볐다.

    “고맙다옹, 주인님. 잘 쓰겠다옹.”

    “그래.”

    암젤에게 방어구를 사주었으니 남은 돈은 모조리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도 방어구일 수 있었다.

    지난번엔 몬스터를 죽인 체액이 잔뜩 묻는 바람에 속옷까지 쓰레기봉투에 버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방어구를 사는 데 GP를 쓰지 않기로 했다.

    F급 던전에 출몰하는 몬스터 정보를 쭉 살펴보았을 때, 앞으로 레벨이 오를 것을 감안한다면 방어구씩이나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물론 PK의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그게 그렇게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닐 테니까.

    ‘오늘은 버려도 상관없는 추리닝을 입고 나왔고 말이지.’

    게다가 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히든 퀘스트.

    지난번에도 보상으로 ‘창술가의 장갑’과 ‘피오리오의 창’을 얻지 않았던가.

    히든 퀘스트가 주는 보상은 현재 내 상태를 반영한다. 창술가 클래스를 선택했기에 그에 걸맞은 아이템이 나온 것이다.

    요는 앞으로도 히든 퀘스트를 달성할 때마다 필요한 장비들이 채워질 거란 뜻이기도 했다.

    만약 여기서 어설픈 장비를 구입한다면 이중으로 돈을 낭비하는 꼴이 될 테고 시스템이 그 사실을 반영해 아예 보상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현재 보유한 156,000GP를 한 군데에 올인하기로 했다.

    척.

    내 손가락이 하나의 아이템을 터치했다.

    [‘스킬 강화석’의 가격은 10,000GP입니다. 중복 구매를 원하시면 희망하는 수량을 말씀하십시오.]

    “열다섯 개.”

    [150,000GP가 차감됩니다. 이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래.”

    내 과감한 선택을 보고 암젤이 감탄을 터뜨렸다.

    “역시 주인님은 대범하다옹. 나 같으면 손이 떨려서 그만한 GP를 한꺼번에 쓰지는 못할 거다옹.”

    촤르르륵 하고 소유하고 있는 GP가 거의 바닥까지 떨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GP야 또 벌면 되니까.

    하수 게이머들이 범하는 대표적인 실수 중 하나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많을수록 공략과는 더 멀어진다.

    ‘단순한 게 제일이지.’

    내게는 강화해야 할 스킬이 하나뿐이다. ‘로또’는 처음부터 A등급이었기 때문에 이 스킬을 S급으로 올린다는 것은 불필요한 작업이었다

    확률 자체가 극악이기 때문에. 열다섯 개의 평범한 스킬 강화석으로는 부족하다.

    시도를 하더라도 행운 스탯을 더 올리고, 등급이 높은 강화석을 구입한 뒤에 하는 것이 맞다.

    마찬가지 이유로 같은 A급 스킬인 ‘투시자의 눈’도 제외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붉은색 돌덩이를 손에 쥐었다. 돌 한가운데 상형된 고대 문자가 빛을 뿜었다.

    [스킬 강화석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강화하길 원하는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내 앞에 보유 스킬 세 가지가 나란히 열거되었다.

    미리 생각해 둔 대로 ‘토네이도 스피어’를 선택했다.

    파앗-

    손 안의 강화석이 빛나며 효과가 발동했다.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토네이도 스피어’의 등급이 한 단계 올라 등급 C가 되었습니다.]

    [스킬의 기억이 활성화됩니다.]

    [‘토네이도 스피어’의 레벨이 20이 되었습니다.]

    “헉!”

    한 방에 성공할 줄은 몰랐다. 한꺼번에 강화석 열다섯 개를 몽땅 산 것이 잠깐 후회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강화 확률은 등급이 높아질수록 뚝뚝 떨어지는 거니까.

    두 번째 강화석을 손에 쥐려고 했던 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잠깐……. 확률이라고?’

    어차피 강화는 행운 스탯의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른 스킬 쪽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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