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왕 클리어러-16화 (16/245)

# 16

독식왕 : 클리어러 016화

Chapter 07 - 십 년 전 친구?

1

종일 예약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6시간짜리 예약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예약을 해서 원하는 층수만큼 공략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보통 고정 파티 멤버들이나 길드가 주로 이용하는 것으로, 날 잡아서 던전 하나를 통째로 털 때 사용하곤 한다.

바꿔 말하면 한 사람이 종일 예약을 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에 속했다.

직원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어요?”

“안 되겠으면 중간에 나오면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종일 예약에는 페널티가 따라붙는데, 그것은 능력이 안 되는 게이머들이 던전을 독점할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국가 입장에서도 전국의 던전이 24시간 잘 돌아가야 결정석 확보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 페널티란 F급 던전의 경우 24시간 안에 적어도 세 개 층은 공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할 경우 수천만 원에 이르는 벌금을 내야 한다.

“음…….”

직원은 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려 예약 날짜를 확인해 주었다.

“이번 주 목요일. 예약이 몇 건 겹치기는 하지만 종일 예약을 잡는 데는 무리가 없겠네요.”

“제 이름 아시죠? 아침에 올 테니까 예약 잡아주세요.”

나는 암젤을 데리고 관리소를 나왔다. 몇 시간이나 안에 붙들려 있어야 했기 때문에 피로감이 상당했다. 박광호는 아직도 사정 청취를 받느라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부터 살인을 하게 되면 그냥 몬스터가 그랬다고 둘러대야지.”

“꼭 그래라옹.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옹.”

귀찮은 걸 싫어하는 묘족답게 암젤의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집에는 어머니도, 누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직 퇴근을 안 하신 모양이고, 누나도 오늘은 심야 근무였다.

아들이 돈 벌어왔다는 사실을 당장 알리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어차피 내일은 두 사람 다 쉬는 날이니까.

여유 있게 알리면 될 것이다.

“아휴~ 피곤하다옹.”

암젤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이, 거기 고양이. 바로 욕실로 들어가도록.”

바닥에 선명하게 까만 고양이 발자국이 새겨진 것이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던전에 들어간 내 몸도 몬스터의 피와 체액이 가득했다.

이제야 암젤의 몸에서도, 내 몸에서도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쪽 직원들은 용케도 아무 말도 안 했네. 직업 정신이라는 건가.’

“귀찮다옹. 발만 씻으면 안 되겠냐옹?”

“헛소리 말고 전신을 빡빡 씻고 나오도록 해.”

“그러면 같이 씻자옹. 오랜만에 이것저것 같이 하면서.”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 할래?”

암젤이 한숨을 내쉬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당장 옷부터 갈아입었다. 몬스터 체액이 묻은 옷은 빨아도 복구가 안 될 것 같았다.

대개 게이머들은 고가의 개인 보호구를 입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게 단순히 방어력 차원의 문제인 줄 알았다.

‘마음에 드는 추리닝이었는데.’

나는 입고 있는 옷을 벗어 돌돌만 뒤 베란다에 있는 쓰레기봉투에 처박았다. 속옷에서도 악취가 났다.

‘마음에 드는 팬티였는데.’

속옷도 벗어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달칵.

욕실 문이 열리고 알몸이 된 암젤이 나왔다. 말 그대로 오 분 만에 샤워를 끝낸 그녀였다. 그녀는 인간형으로 변해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는 중이었다.

“야, 집에서는 인간형으로 변신하지 말라고 했잖아.”

“고양이 발로 어떻게 온몸을 빡빡 씻냐옹? 그나저나…….”

암젤의 시선이 내 몸을 훑었다.

“그런 거였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옹. 좋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들어가겠다옹.”

“어휴…….”

게임 안에서는 이렇게까지 야하게 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바꿔 생각하면 게임 안에서는 샤워를 할 필요도 없었다. 때문에 서로의 알몸을 볼 기회도 없었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몸으로 향했던 시선을 얼른 거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주인님, 방에서 준비하고 있겠다옹~”

“헛소리 그만해!”

2

다음 날.

일찍 잠이 들었기 때문에 새벽에 눈이 뜨였다. 어머니와 누나를 깨울 수는 없어 침대에 앉아 멍하게 있다 보니 문득 방 한쪽에 있는 박스에 시선이 갔다.

그 안에는 내가 어렸을 때 했던 게임기와 게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걸 보관하시면서 어머니와 아버지 기분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깨어나고 한 달 동안 집에서 빈둥거리면서도 박스에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은 혹시라도 다시 게임 안에 빨려들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상현실 게임에 갇힌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그리운 기분으로 하나하나 그것들을 꺼냈다.

관리에도 신경을 쓰셔서 모든 게임이 에어캡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후우…….”

게임을 보자 열 살 시절의 감성이 되살아났다. 정말 미친놈처럼 게임을 좋아했었다.

밥 먹듯이 날을 새우고 학교에 갈 정도로.

어렸을 때 그렇게 게임만 했는데도 나는 친구가 적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주위에는 늘 친구들로 북적거렸다.

우리들은 서로 침을 튀기며 토론을 벌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고,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게임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지식과 실력을 갖춘 나였기에 자연스럽게 내 주위엔 남자애들로 가득했다.

‘남자애들……?’

생각해 보니 무리에 꼭 남자만 있었던 건 아닌 것 같다. 대부분의 여자애는 어른 흉내를 내며 우리를 무시했지만 유독 한 여자아이만은 언제나 우리들 무리에 끼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꽤 예쁘장한 용모에 집도 잘 살고, 성적까지 좋았다. 그런 여자애가 게임 마니아였으니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만 따라다녔다. 그녀의 게임에 대한 열정은 결코 나 못지않았으니까.

어렸을 때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몇 번은 그 여자애의 집에 가서 자고 오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는 밤새 게임을 했었다.

“하하.”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녀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이름이…….

얼굴은 대체로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김…….”

“김 맛있다옹! 더 달라옹!”

깜짝 놀라 돌아보자 암젤이 잠든 채로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었다.

“김…… 유…….”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기억하기를 그만두었다. 뭐 어차피 다시 볼 사이도 아니니까.

대신 뽁뽁이를 해제하고 휴대용 게임기를 손에 들었다.

오랜만에 다시 게임을 하려니 가슴이 저릿저릿해졌다.

서너 시간쯤 게임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3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창으로 강한 햇살이 새어들고 있었다. 닫힌 방문 밖으로 여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는 모양인데 무슨 재미있는 얘길 하는지 깔깔거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이런 일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암젤은 방문 앞에 선 채로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 소변 마려운데 왜 거실에서 떠나질 않는 거냐옹.”

누나가 사다준 고양이용 화장실은 베란다에 있었다. 거실에서 베란다는 훤히 내다보인다.

“고양이 주제에 부끄러움 타기는. 화장실에 가서 볼일 보면 되잖아.”

“아…….”

암젤은 뭔가를 깨닫고는 방을 나갔다.

방문이 열리자 거실에 있던 어머니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성오 일어났니? 얼른 옷 입고 이리와. 친구 와 있다.”

“친구요?”

나는 내가 아직 속옷 차림이라는 것을 깨닫고 문으로 몸을 가렸다.

“기억 안나? 유진이?”

어머니와 누나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단발머리 여자아이였다. 동그란 뒤통수와 하얀 목덜미가 어쩐지 낯이 익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새벽에 떠올렸던 기억을 완성할 수 있었다.

‘맞아! 이름이 김유진이었지?’

나는 방에서 옷을 입으며 생각했다.

‘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무리 친했던 전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십 년 전의 일이다. 그것도 단짝처럼 둘만 붙어 다녔던 것도 아니고 두루 친했던 친구 중의 하나일 뿐이다.

‘차라리 병권이나 학현이가 보고 싶은데 말이지.’

어느덧 볼일을 마치고 나온 암젤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문틈으로 거실을 내다보았다.

“저 여자는 누구냐옹?”

“십 년 전 친구야. 집도 이사했는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네.”

“흐응~ 그러니까 십 년 전 여자 친구가 주인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다 그거냐옹?”

“여자 친구라고 하니까 이상하잖아. 그냥 친구야, 친구.”

“흥!”

암젤은 침대로 훌쩍 뛰어올라와 나를 노려보았다.

“마음에 안 든다옹.”

“네가 마음에 안 들게 뭐가 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