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독식왕 : 클리어러 015화
2
“네? 계좌 이체요?”
난 계좌 이체란 것이 무엇인지 한참 생각해야 했다. 이럴 때 부족한 사회 경험이 발목을 잡다니.
그도 그럴 수밖에 게임 안에 있을 때는 돈에 관한 것이 모두 GP로 거래되었기 때문에 현실의 금전 거래에 대해 무지했다. 막연하게 결정석을 주면 현금 다발을 주는 그림을 상상했었다.
“혹시 계좌가 없으신가요?”
“네……. 없는데요.”
직원은 내심 혀를 찼다. 이런 모습은 딱 아직 미성년 티를 못 벗은 스무 살 남자아이인데.
자기가 스무 살 때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던전에 들어와서 몇 시간 만에 수천만 원을 벌었다.
거기다 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살인까지…….
눈앞의 청년을 대하다 보니 현실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아 직원은 머리를 붕붕 내저었다.
“어차피 입금이 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결정석이라는 것이 시세가 일정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 지금 계좌를 하나 만드는 건 어떤가요?”
“은행에 안 가도 되나요?”
“네, 저희 업무에 결정석 거래가 포함돼 있다 보니 계좌 개설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성오 씨 같은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고맙습니다. 그럼 만들어주세요.”
던전에 들어갔던 직원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각자 손에 제임스와 앨리스의 옷가지를 들고 있었고, 이로써 내가 한 말이 사실임이 판명되었다.
사람이 죽었으니 간단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국의 던전에서 외국인이 죽은 거니까.
관리소는 이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던전 사고 처리반이라는 곳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집에는 언제 보내주는 거냐옹.”
암젤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나는 박광호가 누워 있는 치료실로 갔다. 박광호는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박광호의 정보창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스킬란에서 로또가 지워지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사망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스킬 스톤을 떨군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꼭 죽지 않더라도 전투 불능이 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으면 스킬 스톤을 떨어뜨리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그것밖에 없었다. 하긴, 진짜로 상대를 죽여야 스킬 스톤을 얻을 수 있는 거라면 던전 내에서의 PK는 훨씬 성행했을 것이다.
강한 능력이 곧 돈이자 명예인 세상에서 남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더구나 증거 인멸이 가능한 던전 안이라면.
만약 제임스와 앨리스 두 사람과 싸운 것이 등급이 높은 던전 안이었다면, 그리고 죽은 그들의 옷가지를 제거해 버렸다면 괴수에게 사망했다는 보고만으로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게이머의 사망 사고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들었다.
스킬 스톤의 수요가 있는 상황에서 게이머들끼리 서로를 노린다면 더욱 많은 사망 사고가 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떤 의미에서 능력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스킬을 잃는다면 이미 게이머로서의 기능은 못하게 된 거라고 볼 수도 있지만.
‘조심해야겠네.’
던전이 생각보다 더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싸워야 할 것은 비단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꺼내어 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입금이 완료되었다는 문자.
직원은 계좌를 개설하고 체크카드까지 만들어주었다.
첫날부터 던전 관리소의 거의 모든 서비스를 이용한 셈이다.
나는 문자로 입금된 금액을 확인하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일십백천…… 천사백만 원?”
내가 가상현실 게임에 들어갔던 것은 열 살 때이다. 그때 내 일주일 용돈이 만 원이었었나?
물론 게임 안에서 엄청난 단위의 GP를 사용하곤 했지만 현실의 돈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더구나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에 벌어들인 돈이다.
‘이러니 다들 게이머가 못 돼서 안달이지.’
이 돈을 갖다 드리면 어머니가 뭐라고 할지, 그리고 누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었다.
그때 박광호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으으…….”
나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좀 괜찮으세요?”
“여기가 어디…….”
박광호는 방 안을 둘러보더니 이내 상황이 이해되었는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윽!”
가슴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죽을 위기에 처했던 사람치고는 굉장히 빨리 회복한 셈이다.
능력자에게 마나는 여러 가지 작용을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회복력 상승이었다.
레벨이 낮은 그로서는 마나양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회복이 훨씬 빨랐다.
나는 박광호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아저씨, 우리가 던전에서 천사백만 원을 벌었어요.”
“뭐?”
박광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내게 말했다.
“고맙다. 내게 던전에 들어갈 기회를 준 거, 그리고 목숨을 살려준 거.”
“됐어요. 같이 들어갔으니 돕는 게 당연하죠. 그래도 계산은 확실히 해야 하니까 아저씨 몫은 삼백오십만 원이에요. 맞죠?”
“아니, 나는 이백만원만 받겠다.”
“네? 왜요?”
“나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처음 약속한 돈을 다 받아. 그리고 거기 들어가 보니 알겠더라.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백 미터도 전진하지 못하고 다시 나와야 했을 거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어그로를 끌어주면 사냥이 쉽겠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암젤만 데리고도 충분히 공략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광호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어차피 2층부터는 같이 갈 전력이 못되었다.
박광호는 한숨을 내쉬고 계속 말했다.
“게다가 그 외국인들, 네가 마뜩찮아 하는 걸 알면서 내가 같이 들어가자고 했지. 내가 아니었으면 너까지 봉변을 당하진 않았을 거야. 폐만 끼쳐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너무 그럴 거 없어요. 그놈들이 그런 일을 저지를 줄 저라고 알았겠어요?”
박광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성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던전 안에서 활약하던 모습은 도저히 초보자의 그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본 적은 없지만 어떤 베테랑 게이머보다 나아 보였다.
게다가,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기고 살인까지 했는데 이렇게 태연한 모습이라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던전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이번 경험으로 확실히 알았다.”
“아저씨도 훈련을 열심히 하면 1층쯤은 공략할 수 있을 거예요. 돈 많이 벌어서 부인과도 다시 만나셔야죠.”
“아니.”
박광호는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전 부인은 이미 재혼을 했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내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다만 그동안 못 보내줬던 애들 양육비 정도는 부담하고 싶어. 그래도 던전에 들어가는 것은 그만하련다. 이번 일로 정신이 번쩍 든 기분이야. 요행에 기댈 것이 아니라 다시 제대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대꾸하지 않았다. 확실히 박광호는 던전에 어울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PK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할까?
“그리고 말이지. 갑자기 이런 말 하는 건 이상하지만 나를 속박하고 있던 불쾌한 덩어리가 쑥 빠져나간 기분이야. 내가 왜 그렇게 도박에 집착했었는지 이해가 안 돼.”
그 말을 듣고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로또 스킬과 함께 도박에 대한 집착까지 사라져 버린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쨌거나 잘된 일이었다.
“도박은 하지 마세요. 아저씨는 그리 운이 좋아 보이는 인상이 아니니까.”
“뭐? 갑자기 그렇게 심한 말을 하기냐?”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박광호의 행운 스탯은 3이다. 처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수치였다.
나는 그의 팔을 토닥였다.
“기왕 결심하셨으니 열심히 사세요. 이제부터 아저씨 최대 무기는 성실함입니다.”
“……격려를 듣는데 왜 화가 나는 거지?”
3
나는 서울시 던전 사고 처리 전담반 과장이라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조회 결과 제임스와 앨리스는 미국에서 수배 중인 인물들로 밝혀졌다.
이로써 내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다.
던전 사고 처리 전담반 과장은 게이머였다. 나보다 레벨이 높아 정보창을 볼 수 없었다.
풍기는 분위기로 판단컨대 상당히 레벨이 높아 보였다. 적어도 제임스보다는 강할 것이다.
“혹시 충격을 받진 않았니? 이런 경우 무료로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다. 필요하면 내가 연락을 해두마.”
“괜찮습니다.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과장이라는 사람은 허리를 낮추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현장에서 뭐 다른 걸 줍거나 그러진 않았니?”
“다른 거라니, 뭘요?”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어깨를 으쓱 했다. 셔츠 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어 내밀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일이 더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명함에는 이한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네, 이제 가도 되나요?”
“응, 그래.”
바닥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암젤을 깨워 나가려는데, 이한호가 내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놈들은 미국에서만 열 명이 넘는 게이머를 죽였다. 혹시라도 죄책감 가질 거 없어.”
‘죄책감? 내가 왜?’
나가다 보니 내게 통장을 개설해 주었던 직원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가장 빠른 예약 가능일이 언제인가요?”
“네?”
관리소 직원은 질렸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종일 예약을 하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