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독식왕 : 클리어러 011화
2
탕! 탕!
“쥐새끼들아 덤벼라! 너희들의 상대는 나다!”
박광호는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다소 멘트가 과한 느낌이 있었지만 연기에 도취되어 열심히 어그로를 끄는 그를 보고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스스로 두려움을 쫓기 위해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리라.
박광호에게 몰려드는 쥐 떼는 내가 잽싸게 나서서 모두 정리를 했다.
창 한 번 휘두르는 데 두세 마리의 쥐가 꿰어 나갔다.
던전 1층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것은 덴몬이라는 쥐를 닮은 괴수이다. 이놈들의 레벨은 1~2 사이로 그야말로 잡몹 중의 잡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던전에 출현하는 몬스터는 모두 내가 십 년간 했던 게임에 등장했던 놈들이다. 때문에 레벨이 얼마고, 약점이 무엇인지는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게임을 103번이나 클리어했는데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찍! 찍!
날카롭고 긴 이빨을 가진 팔뚝만 한 쥐들은 최소한의 판단 능력도 없는지 도망갈 생각도 않고 잘도 몰려들었다.
몬스터들을 죽이고 나온 결정석들은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작은 결정석은 인벤토리의 한 칸밖에 차지하지 않고, 게다가 나오는 것들이 죄다 같은 종류라 겹쳐 쌓기가 가능했다.
암젤도 오랜만에 신이 났다. 그녀는 소환수를 불러내지 않고 자기가 직접 뛰어다니며 쥐들을 학살했다.
[공통 퀘스트 ‘덴몬 스무 마리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200이 주어집니다.]
[레벨 7이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스탯은 여전히 고르게 분배했다.
레벨이 오르면서 내 안에 마나량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 게임에서 마나는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이 가능하다. 꼭 스킬을 통해 발현하지 않아도 일반적인 동작에서도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다.
달리는 속도를 빠르게 한다든지 도약력을 상승시킨다든지 하는.
나는 거의 뛰다시피 던전을 통과해 갔다. 왜냐하면 퀘스트 중에 다섯 시간 안에 1층을 돌파하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하나의 퀘스트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 이런 행동 때문에 피를 보는 것은 박광호였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나를 쫓아오기 바빴다.
“왜 그렇게 빨리 가는 거야? 자네는 이곳이 두렵지도 않나?”
“전혀요.”
되레 내 입꼬리는 한쪽으로 말려 올라가 있었다. 만약 누군가 보았더라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암젤도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 오랜만에 내 옆에서 사냥을 하는 것도 그렇고 레벨이 오르는 것도 매우 즐거웠기 때문이다.
“잔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하라옹.”
일정 거리를 나아가자 드디어 덴몬보다 더 강한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렇다고 해도 이놈도 덴몬의 아류일 뿐이다.
덴몬킹.
이름답게 일반적인 덴몬보다 2배가량 덩치가 크고, 머리 위에는 조그만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찍찍! 찍!”
덴몬킹이 지시하자 놈의 뒤에 있던 덴몬들이 우르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박광호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놈들을 한쪽으로 몰았다.
잔챙이들은 암젤에게 맡기고 나는 덴몬킹에게 달려갔다.
콱! 콱!
비록 레벨은 7에 불과하지만, 수년 동안 몸으로 익힌 기술은 잊지 않았다. 내 움직임은 마치 전문으로 창술을 배운 무술가의 그것과 같았다.
덴몬킹이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싸움이 결판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찌익-!”
놈이 사라진 자리에 보다 굵은 결정석이 남았다.
[공통 퀘스트 ‘덴몬킹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100이 주어집니다.]
박광호는 혀를 내둘렀다.
“자네는 어째 싸울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군. 아니면 본래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건가?”
어쨌든 그는 던전에 들어선 지 삼십 분도 되지 않아 대부분의 걱정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외국인들을 다른 방향으로 보낸 성오의 결정도 더 이상 탓하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그것들이 다 돈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3
1층의 3분의 1지점에 도달했을 때 드디어 두 번째 괴수가 나타났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 싸움다운 싸움이랄 수 있었다.
챙! 챙! 챙! 챙!
날카롭게 금속을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전방에서 서너 마리의 곤충형 괴수가 나타났다. 신장 일 미터 정도의 사마귀를 닮은 괴수의 이름은 케라이아였다.
레벨은 3에서 4.
지금까지 덴몬을 상대하며 자신감이 붙은 박광호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고 방패를 앞세워 소리를 냈다.
탕! 탕!
“여기다! 이놈들아!”
챙! 챙! 챙!
나를 향해 달려오던 케라이아가 방향을 바꾸어 박광호에게로 갔다.
“비렁뱅이도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옹.”
처음으로 암젤의 입에서 박광호를 인정하는 말이 나왔다.
나를 따라 레벨 7이 된 그녀는 세 마리의 스라소니를 소환했다.
평범한 고양이의 탈을 벗은 야생 포유류들이 매섭게 곤충형 괴수들에게로 달려갔다.
“캬악!”
“캬아옹!”
제법 볼만한 싸움이 연출되었지만 케라이아들은 스라소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적들을 물리친 스라소니 세 마리가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돌아오라옹.”
암젤의 말에 펑펑펑 소리를 내며 소환수들이 사라졌다.
던전에 들어오고 한 시간 반가량이 지났을 때, 우리는 이미 1층 3분의 2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쉴 틈 없는 강행군에 박광호는 헉헉거리기만 할 뿐, 감히 쉬자는 말도 내뱉지 못했다.
내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퀘스트 ‘네 시간 안에 몬스터 합계 100마리 이상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1,000, GP +5,000을 얻었습니다.]
[레벨 9가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업적 ‘라가망의 전설’ 효과와 퀘스트 달성 보상으로 확실히 레벨이 빨리 오르고 있었다.
나는 달리면서 스탯 포인트를 분배했다.
이 정도는 너무 손에 익어 눈감고도 가능할 정도이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나는 시간을 잊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몬스터를 베고,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전율을 느꼈다.
십 년간의 감금 생활도 어쩌지 못한 게이머의 본능이 되살아난 것이다.
‘슬슬 나올 때가 되었군.’
던전 1층을 완전히 통과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한 무리의 몬스터를 지나쳐야 했다.
레벨은 5에서 6정도이지만 그 이상으로 까다로운 놈들이었다.
“킥킥킥킥.”
낮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또 다른 놈들이 나오는 거야?”
겁을 먹은 박광호에게 말했다.
“이번엔 나서지 마세요. 놈들은 제가 처치할 겁니다.”
어둠 속에서 세모난 눈들이 형광 빛을 발하며 번뜩였다.
4
제임스는 여자 친구인 앨리스와 함께 성오 일행을 거리를 두고 쫓아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던전을 호기심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명성을 얻기 위해 싫어도 들어가는 장소가 던전이었다.
사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성오 일행이 자신들을 의심하지 않은 것은 자체로 생초보라는 것을 인증한 셈이다. 원래 경험이 많은 게이머일수록 던전에 아무나와 함께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니까.
던전은 바깥과 완전히 차단된 공간이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제대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
경찰 투입은 불가능한 건 물론이고 CCTV도 없는 곳이 던전이었다.
“후후, 역시 초보들 털어먹기가 제일이라니까.”
근래 게이머들의 사망 사고는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가장 많이 봉변을 당하는 것은 초보 게이머들이다.
제임스와 앨리스는 초보 게이머를 전문으로 약탈하는 범죄자들이었다.
원래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범죄를 저질렀지만 차차 의심을 받게 되어 한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두 사람이 각성하기 전에 한국드라마를 좋아해서 한국어를 공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땐 물론 한국어를 범죄에 이용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건 그렇고 진짜 초보 맞아? 어떻게 저렇게 능숙한 거야?”
성오와 박광호가 관리소에서 테스트를 받는 장면을 확인한 두 사람은 여유만만이었다. 하지만 어떤 베테랑보다도 거침없이 던전을 돌파해 가는 그들을 보고 식겁한 마음이 들었다.
“저 어린놈이 주도하는 모양인데, 원래 나이가 어리면 더 용감하잖아. 아마 인터넷으로 미리 조사를 하고 나왔겠지. F급 던전 1층은 개나 소나 공략할 수 있는 곳이니까.”
제임스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쩌면 저 젊은 놈이 자기보다 던전 공략에 능숙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점점 과감하고 현란해지는 기술을 보고 타깃을 잘못 잡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옆에 붙어 있는 고양이는 또 어떠한가? 소환술을 사용해 웬만한 게이머보다도 나은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기분 탓인지 그 고양이도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앨리스는 귀여운 생김새에 용맹하기가지 한 암젤에게 완전히 넋이 나갔다.
“저 고양이는 나 줘. 알았지? 달링?”
“슈퍼펫 가격이 얼만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더구나 저 정도 능력이라면 아마 부르는 게 값일 거야.”
앨리스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제임스의 말에 토를 달진 않았다. 원래 슈퍼펫은 길들이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은 인내심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기척을 지우고 성오 일행을 뒤쫓아 갔다. 하지만 상대는 마치 단거리 질주를 하듯 던전을 돌파하고 있어서 절반쯤 쫓아가다가 결국 꼬리를 놓치고 말았다.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거야?”
“상관있어? 우리 대신 열심히 해주면 고마운 일이지.”
“하긴.”
걷다 보니 전방에서 무기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네.”
두 사람은 걸음을 빨리해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 펼쳐진 장면을 보고 약속이나 한 듯 몸이 굳고 말았다.
성오 혼자 열 마리가량의 몬스터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양손에 창을 든 채로.
그가 휘두르는 창끝에서는 회오리가 쏟아져 나왔다. 무기를 휘두르는 횟수에 맞추어 회오리는 점점 더 커져서 숫자에서 불리한 싸움을 하는데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되레 몬스터들이 풍압에 떠밀려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성오는 좁은 길목을 막은 채로 적들을 몰아붙이고, 한 놈씩 바람을 뚫고 나오면 도끼를 꺼내어 머리통을 쪼갰다.
허공에 손을 뻗어 도끼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이차원의 주머니라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 던전 1층에 나오는 몬스터는 모두 수준이 낮지만 딱 한 종류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이 있다.
작은 키에 초록색 피부를 갖고 있어 레프리콘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몬스터의 정식 명칭은 ‘자보타’였다.
놈들은 개개인의 전투력은 낮지만 무리 활동을 하기 때문에 집단으로 공격해 오면 상대하기 까다롭다. 단순히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손발이 잘 맞는 집단 전술을 펼치기 때문이었다.
제임스는 성오가 자보타 무리를 상대하는 것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마치 몬스터의 특성을 속속들이 잘 꿰고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특성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전에 응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올해로 3년째 게이머를 하고 있는 자신조차 이 같은 방식을 실천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자식…… 천잰가?’
그는 십 분이 채 되지 않아 열 마리의 자보타를 모두 해치운 성오를 보고 계획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앨리스의 팔을 잡아끌고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