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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왕 클리어러-4화 (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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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식왕 : 클리어러 004화

    Chapter 02 - 나도 게이머?

    1

    나는 트레이닝복 바지 안에 손을 꽂은 채로 고양이와 눈싸움을 벌였다. 이 집은 아파트 11층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길고양이가 들어올 수 없는 위치이다.

    베란다를 통해 옆집 고양이가 넘어왔을 수도 있지만 한 번도 옆집에서 고양이가 우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 고양이는 길고양이나 가난한 아파트 주민이 키우는 애완묘라기엔 너무 기품이 있었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하얀색 털과 황금빛을 띤 깨끗한 눈망울, 그리고 도도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꼿꼿한 자세라든지 모르긴 해도 혈통이 좋은 고양이 같았다.

    더군다나 한 가지 특이점이라면 일반적인 고양이와 달리 삼각형 모양의 큰 귀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얼핏 사막여우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응?”

    10여 초 동안 고양이와 대치하던 나는 문득 이런 생김새의 고양이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가 나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다시 울음소리를 냈다.

    “냐아~ 옹.”

    애처로운 목소리가 마치 빨리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암젤?”

    고양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더니 긴 한숨을 뽑아냈다.

    “휴우~”

    ‘고양이가 한숨을 쉬었어?’

    타박타박 걸어오더니 내 발밑에 앉았다. 오래전에 헤어진 가족을 상봉한 것처럼 기쁜 얼굴로 내 다리에 볼을 비볐다.

    고양이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처럼 살가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 나는 둔중한 것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양이가 다가와 내 볼을 핥았다.

    “주인님, 너무 놀라지 마라옹. 나는 귀신이 아니다옹.”

    나는 여전히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진짜 암젤이라고?”

    “맞다옹. 주인님이 알고 있는 그 암젤이 맞다옹.”

    암젤은 내가 게임기에 접속해 있을 때 만났던 고양이다.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가 아니라 묘족.

    게임의 스토리상 파티원으로 맞이할 수 있는 NPC 중 하나였다.

    진행시에 유용한 소환 능력과 환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번 반드시 파티원으로 집어넣었던 NPC다.

    NPC를 현실에서 보게 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왜긴 왜겠냐옹. 주인님을 만나러 왔다옹.”

    “저기, 내가 확신이 안 생겨서 하는 말인데, 혹시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꾸었던 거. 그거 꿈이 아니었던 거야?”

    “당연하다옹. 꿈이었다면 어떻게 내가 여기 있겠냐옹.”

    “이해가 안 되는데.”

    “주인님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온 것이다옹. 말이 길어질 것 같은데 물 한 잔만 주면 안 되겠냐옹?”

    나는 밥그릇에 물 한 잔을 따라 바닥에 놓아주고 생각난 김에 냉장고에서 아침에 먹다 남은 고등어까지 꺼내 주었다.

    암젤은 신나게 그것을 먹었다.

    “우왕! 맛이 느껴진다옹! 이런 기분 처음이다옹! 생선이 이렇게 맛있는 것인 줄 몰랐다옹!”

    “하하.”

    이 녀석이 나랑 같은 걸 느낀다니 신기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거의 십 년을 함께 보내다시피 한 NPC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커졌다.

    암젤은 물과 생선을 다 먹고 만족스럽게 배를 드러내고 누웠다.

    원래 이 고양이는 생긴 것과 달리 하는 행동은 천박하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도도하게 굴면서 내 앞에서만 본모습을 보이곤 했다. 바닥에 앉아 고양이가 생선 맛의 여운에 취해 있는 걸 지켜보았다.

    암젤이 몸을 휙 뒤집더니 조그맣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고양이를 중심으로 밝은 빛이 분사되었다. 잠시 후 고양이가 사라지고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가진 묘족 여자가 나타났다.

    160센티미터 중반의 키에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성.

    귀가 다소 뾰족하고 동공이 세로로 길쭉하다는 점만 빼면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곤란하게도 변신한 모습이 알몸에 가까웠다. 입고 있는 옷이 속옷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암젤은 그 상태로 내게 와락 안겼다.

    “주인님! 보고싶었다옹!”

    “앗! 잠깐!”

    나는 곤란해하면서 몸을 뒤로 뺐다. 게임 속에서 그녀의 이런 옷차림을 숱하게 보았지만 현실에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실에서는 모든 감각이 생생하다.

    묘족 여자의 부드러운 몸의 느낌이 고스란히 내 살갗에 전해졌다.

    어색함이 커진 나머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기다려 봐.”

    방으로 가서 티셔츠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이거 입어.”

    암젤은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으나 군말 없이 옷을 입었다. 그러더니 되레 기쁜 얼굴이 되었다.

    “와! 이 옷에서 주인님 냄새가 난다옹!”

    그녀는 한참이나 셔츠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먼저 물었다.

    “이제 설명해 봐. 어떻게 네가 여기 있는 거야?”

    “음…….”

    암젤은 신중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바로하고 말했다.

    “나는 주인님이 사라지고 한동안 패닉에 휩싸였다옹. 며칠 동안 찾아 헤매다가 결국 못 찾고 주인님이 나를 버린 건 아닌가 오해도 했었다옹. 훌쩍이다가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옹.

    꿈은 아닌데 눈은 뜰 수 없고…… 꼭 가위에 눌린 기분이었다옹.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옹. 주인님 곁으로 보내주겠다고, 지금까지처럼 그를 잘 보필하라고.”

    “목소리?”

    나는 순간 어이없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어이없기로 치면 꿈인 줄 알았던 가상현실 공간에서 NPC가 튀어나왔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혹시 다른 말은 못 들었어?”

    “주인님이 십 년 동안 게임 안에 있었던 것은 각성의 과정이라고 했다옹. 주인님은 일반 각성자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될 거라면서 행운을 빈다고도 말했다옹.”

    “뭐?”

    각성?

    일반 각성자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거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내 몸을 더듬어 보았다.

    요즘 들어 살이 찐 것 말고는 특별히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TV나 인터넷에서 본 각성자들은 뭔가 하나씩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확실해? 난 내가 달라진 걸 전혀 모르겠는데?”

    “그건 원래 그런 거다옹. 각성을 인지하려면 매개체와 접촉이 필요하다옹.”

    “그것도 목소리가 알려준 거야?”

    “아니다옹. 목소리가 직접 해준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옹. 잠에서 깬 뒤 이런 게 생겼다옹. 그 뒤로 이런저런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옹.”

    암젤이 가리킨 것은 자신의 이마였다. 그곳에는 문신처럼 별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목소리가 그녀를 메신저로 삼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를 자각하게 하고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 그자가 나뿐 아니라 다른 인간들도 각성시킨 건가?”

    “아니다옹. 주인님은 다른 인간들을 각성시킨 존재들과는 전혀 다른 성향과 목적을 가진 인물에 의해 각성을 했다옹.”

    “그래서 그게 누군데?”

    암젤은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한데 그건 나도 모르겠다옹.”

    나는 ‘목소리’가 정보를 제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암젤을 통해 궁금한 것을 물을 수는 있지만 답할 수 있는 것만 답한다.

    당장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아예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걸까?

    나는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을 던졌다.

    “왜 나만 십 년이나 의식 불명이 됐던 거지? 다른 사람들은 각성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40일 정도였다는데.”

    “거기에는 그만 한 이유가 있다옹.”

    암젤은 문신 근처를 살짝 매만지더니 말을 이었다.

    “주인님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장치였다옹. 다른 각성자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장치 말이다옹.”

    “특별한 장치?”

    나는 다시 한 번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말이 안 되잖아. 난 십 년이나 병원에 누워 있어서 신체 능력이 평균 이하야. 게다가 남들보다 훨씬 늦은 시점에 각성을 했는데, 지금부터 성장해서 따라잡는다 해도 너무 늦은 거 아니야?”

    “꼭 그렇지는 않다옹. 주인님에게는 주인님만의 장점이 있다옹. 한계가 뚜렷한 다른 능력자들에 비해 주인님은 가상현실 게임 시스템을 이용해 자신의 능력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다옹. 게다가 주인님이 현실에 적응하면 할수록 나와 같은 NPC들이나 아이템들이 현실에 나타나는 일이 많아질 거다옹. 한 마디로 레벨 업을 할수록 게임 속 세상과 이곳의 동기화가 빨라지는 거다옹.”

    “뭐?”

    나는 암젤이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게임 속에서 나는 절대자나 다름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최종 보스 바르트룸을 한 칼에 베어버릴 정도의 힘을.

    같은 능력을 현실 세상에서 갖게 된다면 아마 적수가 없을 것이다.

    “주인님, 준비됐냐옹?

    “준비라니?”

    암젤은 입고 있던 셔츠를 훌렁 벗었다.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묘족 여자의 향긋한 살내음이 콧속에 미쳤다. 강하게 눌러오는 부드러운 몸 때문에 의식이 날아갈 것 같았다.

    동시에 머릿속에 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치열하게 레벨 업에 매달렸던 게임 속에서의 기억이.

    한참 동안 내 몸을 끌어안고 있던 암젤이 손을 풀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강한 빛을 발하던 이마의 문신이 천천히 희미해졌다.

    나는 저절로 알 수 있었다.

    베란다에서 보았던 많은 각성자처럼, 나 역시 게이머가 되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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