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전야제 (12/12)

“정 주임, 덮자.”

두툼한 결재판이 책상 위에 툭 던져졌다. 검은 가죽 표지 위에는 ‘결재를 바랍니다’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나는 내내 침묵을 지키다 반문했다.

“……예?”

책상 앞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에서 찌들대로 찌든 담배 냄새가 커피 냄새에 뒤섞여 묻어 나왔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냄새를 피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바깥의 경치를 구경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지금은 마침 퇴근길 러시아워였다. 하늘이 어둑해지고 하나둘씩 가로등 불이 켜지는 거리에 차들이 빽빽했다.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쉴 새 없이 번쩍였다. 역시나 오늘도 정시 퇴근은 글렀다.

“이거 덮자고. 더 질질 끌 사안 아닌 것 같다.”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푹 묻고 기대어 앉은 부장이 결재판을 손가락으로 툭툭 튕겼다. 내가 최근 몇 주간 피땀 흘려 모으고 만든 자료들이 골칫덩이 폐지 덩어리 취급을 받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결재판에 새겨진 글자가 한순간 어른어른하게 흐려졌다.

“덮자는 말씀은.”

“적당히 달래서 끝내. 여기 요구 사항이 뭐였지? 이번 공모전이었나? 그냥 수상자 명단 끝자리쯤에 올려 줘. 장려상 정도면 불만 없겠지. 불만 글은 내리라고 하고.”

“하지만, 부장님.”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이 새끼 벌써 커뮤니티 몇 군데에 글 올렸어. 이러다 언론에까지 얘기 들어가면 어쩔 거야? 기사라도 나면 회사 이미지 바닥에 떨어지는 거 한순간이야. 요즘 같은 시대에.”

“어차피 근거 없는 악성 컴플레인입니다. 먼저 규정을 어긴 건 그쪽이고요.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대응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못 들었어? 최 전무님 연줄이야, 그 참가자. 애국평화당 의원 아들이랬나. 임원실에서도 이번 건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지시 내려왔고. 여기서 우리가 더 뭘 어떻게 손을 써?”

“그런 이유로 수상자 명단에 올리면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이것 때문에 떨어진 다른 참가자들은 무슨 죄…….”

“그럼 우리는? 우리는 무슨 죄로 이 좋은 연말에 이러고 있겠냐? 나도 좀 집에 가자, 호현아. 어?”

“…….”

“정 주임, 언제 입사했지? 작년 하반기인가?”

“올해 상반기 공채입니다.”

“아직 학생 물이 덜 빠졌을 때긴 하네. 직장 생활 뭐 별거 있냐. 거, 몇 년 전에. 알지? 백일대 참사인가 뭔가. 정 주임이 걔네 또래였던 것 같은데.”

몇 년이 지났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름이 심장 한구석을 푹 찔렀다.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한기가 번졌다. 나는 차렷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몸에 힘을 주었다.

“그때도 윗선에서 묻자고 해서 어영부영 넘어갔잖아. 바이러스 퍼지자마자 학생들 버리고 튄 인간들 조사했더니 어용 교수들 줄줄이 엮여 나와서. 정의 구현 좋지. 좋은데, 그거 건드리다가 우리가 물 먹을 판인데 어떡해. 아무튼 이 건은 여기서 종결이야.”

그는 나를 흘긋 보고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는 내가 보고를 올리러 오기 전에도 심드렁한 낯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말마따나 연휴를 앞둔 이 좋은 때에 집에도 못 가고 사무실에 처박혀 있는 게 싫긴 하겠지. 일은 전부 내가 했지만, 어쨌든.

“가 봐. 경위서 초안은 연휴 다음 날 아침까지 내 책상에 올려놓고.”

그냥 퇴근하지 말란 얘긴가? 크리스마스 연휴를 악성 컴플레인 수습하는 데 다 쓰란 얘긴가? 나는 한숨을 삼키며 부장이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결재판을 집어 옆구리에 꼈다. 사무실에 돌아가고 있는 난방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머릿속이 뜨거웠다.

“아, 참. 정호현 주임?”

“예?”

“연줄이니 임원 지시니 이런 거 기록 안 남겼지? 혹시라도 있으면 다 파쇄해.”

“……예.”

그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느라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건성으로 인사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올해 처음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상대는 따로 있었다. 저딴 부정부패와 비리에 찌든 상사가 아니라.

“…….”

나는 웃으려 했다. 언제나처럼 적당히 가식적으로. 하지만 일그러지는 입매를 걷잡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허리를 깊이 숙여 90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뒤돌아 나왔다.

나 빼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 나를 반겼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목전에 두고 모두들 신나게 칼퇴근을 한 모양이다.

이미 해는 완전히 졌다. 아직도 도로는 퇴근길 행렬로 꽉꽉 차 있다. 평소였다면 저 사이에 끼어 가는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몹시도 간절했다. 야근을 마치고 뻥뻥 뚫린 도로를 달려 집에 가느니, 교통 체증이든 뭐든 제발 그냥 집에 좀 보내 줬으면 싶었다.

“하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아까부터 눈 안이 뜨겁고 목이 꽉 죄는 듯 시큰시큰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적막한 사무실에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눈이 빠져라 모니터만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꼈다.

“여보세요.”

- 현아.

스피커를 거쳐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대뜸 내 이름을 불렀다. 형은 내게 전화를 걸 때든 받을 때든, ‘여보세요’ 대신 이름부터 부른다. 함께한 지 몇 년쯤 되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다.

“형? 일 끝났어요?”

헛기침을 몇 번 해서 잠긴 목을 풀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 으응.

그가 습관처럼 말끝을 늘였다. 그는 항상 스스로에 관한 일에는 심드렁한 태도를 고수했다. 오히려 내가 궁금해져서 다시 물었다.

“대관 장소는 저번에 거기로 확정된 거야?”

- 그냥 뭐.

바이러스 유출 사고로 백일대가 폐교된 후, 우리는 새로 편입한 학교에서 무사히 졸업까지 했다. 그 뒤 형은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취미였다. 향후 진로 계획에 대해 넌지시 물어봐도, 평생 일 안 해도 우리 토끼한테 사과 100박스 사 줄 능력은 되니까 걱정 말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물론 나는 진지하게 항변했다. 늘 말하는 거지만 첫째로 사과 100박스는 절대 다 못 먹고, 둘째로 나는 토끼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항상 그렇듯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샐쭉이 웃으며 내 엉덩이를 주무르려 들기에 아예 학을 떼고 그 뒤로는 입을 다물게 됐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은 예술에 완전히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대단했다. 이런 걸 그냥 작업실 구석에 아무렇게나 방치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형을 설득해 인터넷에 사진이라도 올려 두자고 했다. 작품이 사라져도 남은 기록을 볼 수 있도록. 그게 예기치 않게 이래저래 유명해져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개인전까지 열게 되었다. 이것도 사실 인터뷰니 방송 출연이니 하는 걸 죄다 거절하고 타협한 결과다.

그리고 나. 내가 한창 취직 준비를 할 때쯤 우리 둘은 유례없이 크게 싸웠다. 눈 내리는 캠퍼스를 배경으로 70주년 기념관에서 서로 노려보며 죽일 듯 몰아붙였던 때 이후로 그렇게 크게 싸운 건 처음이었다.

〈정호현, 생각 똑바로 해. 안 그래도 피 뽑히느라 구멍 송송 뚫린 찹쌀떡처럼 된 게, 허옇게 떠서 말라비틀어진 게 무슨 돈을 벌러 가? 네까짓 게 벌어 봤자 얼마 번다고. 어디 좆같은 곳에 가서 하루 종일 개고생하다가 몸만 축나겠지. 네가 돈 벌어 온다고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아? 그깟 푼돈, 씨발, 줘도 안 받아.〉

〈…….〉

〈좋은 말로 할 때 닥치고 얌전히 있어. 내 집에 처박혀서 내가 해 주는 거나 받아먹고 있으라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게.〉

그가 악다문 잇새로 으르렁거리듯 폭언을 토해 냈다. 그는 누구 하나 잡아 죽일 듯 무섭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가 내면의 불안과 절박함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때였다면 소심한 반항을 몇 번 해 보다가 결국은 그에게 적당히 맞춰 주었을 것이다. 그의 뒤틀림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그가 왜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지 아는 이상 져 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만은 달랐다. 나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형이 뭐라 하든 취직할 거예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건 미안해요. 형의 동의 없이 큰 결정 내린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바꾸진 않을 거예요.〉

〈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좆같아 미치겠어? 취업인지 지랄인지 하는 핑계 대고 뛰쳐나갈 만큼?〉

제 분을 이기지 못해 그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고, 새까만 눈동자가 불길한 빛으로 일렁였다. 한때는 그의 눈에 서린 것이 순전히 광기인 줄 알았던 적이 있다. 이제 나는 저 눈에서 상처를 본다.

〈아니에요.〉

〈아니면 뭔데. 밖에 너 꼬시는 새끼라도 있어? 그 새끼는 사과 200박스 사 준대? 아, 그래. 당장이라도 나가서 그 씹새끼 모가지 따고 오면 돼? 그럼 내 옆에만 있을래?〉

〈그것도 아니라, 아니, 형! 일단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그래, 해 봐. 우리 예쁜 현이가 말하는데 얼마든지 들어 줘야지.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일 건지 들어나 볼게.〉

〈전 지금도 형 집에 그냥 얹혀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지금까지야 아직 학생이라는 핑계라도 있었지만…….〉

〈내 토끼 내 집에서 평생 키우겠다는데 그게 뭐.〉

그가 빠득 이를 갈더니 곧바로 받아쳤다. 잠깐 할 말을 잃었다. 토끼 아니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여기서 토끼 타령을 하다간 언쟁이 흐지부지될 것 같았다.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있었지만, 취업까지 포기하고 눌러앉긴 싫어요. 그건 또 다른 문제니까.〉

〈대체 뭐가 문젠데? 씨발,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그가 홧김에 버럭 큰소리를 냈다. 다른 때는 화가 나도 험악하게 빈정거릴지언정 섣불리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는데. 이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면 우리의 갈등은 평생 평행선으로 남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잘게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서서히 떨림이 멎었다.

〈제가 제 사랑에 스스로 떳떳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

당장이라도 내 멱살을 낚아챌 것 같던 형이 뚝 굳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어느새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여 있었다.

〈제가 어디에 취업하든 얼마를 벌든 형한텐 별것 아닌 푼돈인 거 알아요. 그래도 제가 번 돈으로 형한테 뭐든 해 주고 싶어요. 형은 이해 못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제 사랑이에요. 전, 이런…… 이런 마음으로, 형을 사랑하고 있어요.〉

최대한 의연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조금 전까지 화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우두커니 서서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조금 충혈된 눈으로 오래도록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다고 갈등이 곧바로 해결된 건 아니다. 그 뒤로도 우리 둘의 신경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소서를 쓰던 나를 형이 달랑 들어 안고 안 놓아준다든가, 모니터 앞에 갑자기 고개를 들이밀고 살벌하다 못해 흉흉한 저음으로 영원이 삐졌다고 선언한다든가 하는 사소한 협박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협박은 역시 침대에서였다.

형은 취준 기간 내내 나를 밤새 깔아 눕히고 진이 쏙 빠지도록 괴롭혔다. 곯아떨어져서 면접에 못 가게 하려는 의도인가 싶었다. 취업 준비용 정장을 산 날에는 내게 정장을 입혀 놓은 채 엉망진창으로 뒹굴어서 값비싼 맞춤 정장을 하루 만에 못 쓰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단추가 죄다 사라지고 없는 셔츠와 정액 범벅이 된 넥타이와 가랑이 부분 박음질이 뜯겨 나간 바지를 붙들고 울상을 지었다.

몇 달간 이어진 팽팽한 신경전의 결과는……. 크리스마스이브 전날까지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지금의 내가 말해 주고 있다.

- 10시쯤에 들어갈 것 같은데. 그때쯤엔 너도 집이지?

“네?”

형의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황급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벌써 9시였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된 거지?

- 세 시간 뒤에 내 생일이잖아.

요 며칠간 바쁜 시간을 짜내어 형 몰래 준비하던 게 있었다. 매년 형의 생일마다 꽃다발과 선물을 꼭꼭 챙기긴 했지만 진짜 연인다운, 그러니까, 커플들만의 무언가를 못 해 준 것 같아서 처음으로 큰맘 먹고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지금쯤 내가 시킨 택배가 집 앞에 얌전히 놓여 있을 터였다. 아까 오후에 정신없이 일하던 와중에 택배 도착 문자를 받은 기억이 있으니 확실하다. 그 택배를 나보다 선배가 먼저 발견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게다가 미리 주문을 넣어 둔 케이크도 찾으러 가야 했다. 형이 이렇게 일찍 도착할 줄, 그리고 내 퇴근이 이렇게까지 늦어질 줄은 몰랐는데!

“영원이 형!”

다급하게 큰 소리를 냈다. 목이 욱신거렸다. 곧바로 잔기침이 올라와서, 나는 휴대폰 스피커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린 채 잔뜩 갈라진 소리로 기침을 했다.

- 방금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사레들렸어요.”

- 무슨 기침을 그렇게 죽을 듯이 해, 현아. 난 또 너 큰 병 걸린 줄 알았잖아. 햄스터처럼 쪼그만 게 목구멍까지 좁아서 그런가.

“좁아? 내 목이?”

작다느니 말랑하다느니 하는 말은 형에게 하도 들어서 이젠 반쯤 해탈했다. 180센티에 가까운 직장인 남성에게 그런 소릴 하는 건 형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였다. 자기 목구멍 사이즈까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니, 그 전에. 목구멍에도 좁고 넓고가 있나?

- 맞잖아. 내 거 끄트머리만 물어도 숨 막혀 죽으려고 하고, 목젖에 닿을 때까지 넣어 주면 아주 힉힉 울면서…….

“으악, 형!”

또 음담패설이 아무런 예고 없이 불쑥 치고 들어왔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묘하게 홧홧하던 얼굴에 열기가 더해졌다. 나는 다급하게 비명을 질러 그를 제지했다.

“어, 그, 조금만 더 늦게 오면 안 돼?”

- 뭐?

“한, 10시 반이나……. 11시쯤에.”

- 갑자기 뭔 나사 빠진 소리야, 예쁜아.

“나 아직 야근 덜 끝났는데.”

- 씨발, 또 그 부장인지 부랄인지 하는 새끼지.

“할 게 좀 더 남아서. 형도 볼일 다 마치고 천천히 와요, 응?”

- 난 볼일 없어. 너 보는 일 말고.

“그럼 근처 카페 가 있을래요? 마치고 그리로 갈까?”

- 왜 그래야 하는데? 먼저 집 가서 너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되지. 우리 현이가 생일 전날까지 독수공방시켜서 존나 짜증 나지만, 뭐 어쩌겠어. 집 가서 요리나 처하고 있어야지.

“그, 그러면 PC방에라도…….”

- 정호현. 뭐 하자는 건데?

뭔가 석연치 않다는 것을 감지한 그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내가 생각해도 몹시 어설픈 핑계였다.

- 내가 집에 가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형, 그게요.”

- 똑바로 설명해. 지금 기분이 좀, 어? 좆같아지려고 하니까.

최악이다. 열 때문에 머리가 안 돌아가서 그런가. 회사 일도 그렇고 형 생일 준비도 그렇고, 무엇 하나 스무스하게 되는 게 없다.

“그게…….”

나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새 열이 더 올랐는지 얼굴 전체가 불덩이 같았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가득 묻어났다. 아무리 머리를 돌려도 이 상황을 무마할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두통은 갈수록 심해져서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이따 다 설명할게. 형, 미안해요. 사랑해요!”

다다다 쏘아붙이듯 숨도 안 쉬고 다급하게 말한 후 전화를 끊어 버렸다. 형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한 박자 후에 때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형은 지금쯤 기분이 잔뜩 상해 있을 텐데. 큰일이었다.

* * *

불을 끄고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이미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해서 휑한 건물을 떠나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퇴근길 교통 체증 피크 시간대는 지났는데 도로는 여전히 붐볐다. 연말이라 그런 걸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고 한 건지 길가의 가로수에 반짝이는 전구가 치렁치렁 달려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어닥쳤다. 버스 정류장의 얄팍한 벽과 지붕은 한기를 막아 주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패딩과 털모자, 핫팩 따위로 중무장하고도 발을 연신 동동 굴렀다. 그들의 머리 위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잠시만요, 실례합니다.”

정류장 앞에 바글바글 모여 선 사람들을 뚫고 들어갔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언제 오는지 확인하려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묵직한 두통이 번졌다.

“아…….”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자 축축한 땀이 묻어 나왔다. 컨디션이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최근에 연이은 야근으로 무리를 했더니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다. 병원에 가기엔 이미 시간이 한참 늦었다. 얼른 집에 가서 약이라도 먹어야겠다. 형이 오기 전에.

난방이 잘되는 사무실에 있다가 길에 나오니 펄펄 끓던 열은 조금 식었다. 대신 머리가 걷잡을 수 없이 아파졌다. 이래서야 버스를 타더라도 집까지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자가용을 가져올 걸 그랬나? 새삼 후회스러웠다.

내 차는 작년 내 생일 때 형이 사 줬다. 꽃집 앞을 지나치다 형이 생각나서 장미 다발을 사고,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날에는 퇴근길에 양손 가득 딸기 디저트를 사 들고 가서 형에게 먹이고…… 떠오를 때마다 이래저래 자잘한 선물을 하는 나와 형은 반대였다. 그는 내내 무심하다가 1년에 한두 번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스케일 큰 선물을 던져 주었다.

그는 생일 전날까지도 아무런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선물로 뭘 갖고 싶냐고 물어본 적도 없었기에 그냥 이대로 자연스레 넘어가려나 싶었다. 생일날 형이 다짜고짜 내 손에 차 키를 떨어뜨려 주기 전까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광택이 반드르르한 새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심지어 고급 외제 차였다. 평범한 사회 초년생 신입사원이 몰고 다니기엔 튀어도 지나치게 튀었다. 생일 선물치고 너무 과하다고 난색을 표하는 내게 그가 한 말은 딱 한 마디였다.

〈오다 주웠어.〉

몇 번 입씨름이 오갔으나 결국 나는 형에게 졌다. 하기야 그가 내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날 이후로 집 주차장에는 형의 새까만 차와 내 은색 차가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회사에 쓸데없는 소문이 퍼질까 걱정되어서 출퇴근할 때는 거의 타지 않긴 하지만.

이렇게 아팠던 건 백신을 만든다는 명목하에 피를 쪽쪽 뽑힐 때 이후로는 처음이다. 나는 이제 피를 뽑히지 않는다. 몇 년 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인공 백신 개발이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채혈을 하고 병원을 나오던 날, 나를 담당하던 대학 병원의 의료진들이 일렬로 서서 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기분이 너무나도 이상해서, 나는 형과 함께 차를 타고 돌아가는 내내 반쯤 넋을 놓고 있었다.

고작 2, 3년 남짓 지났는데 취직이니 뭐니 바쁘게 살다 보니 그 일도 벌써 가물가물하다. 내 피 안에, 딱히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내 안에 인류를 살릴 유일한 단서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 반쯤은 꿈처럼 느껴진다. 눈발이 휘날리는 캠퍼스에서 형과 함께 비현실적인 경험을 했던 것 또한.

주기적으로 채혈을 하느라 자연스레 담배도 끊게 되었다. 원래도 한 달에 한 갑 정도 피우는 수준이었던지라 끊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제 금연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는데도 나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같은 집에 사는 형에게 폐를 끼칠까 염려되어서이기도 하고, 그럴 시간과 돈으로 차라리 딸기를 사 가서 형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좋다.

끼익,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버스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그새 빨갛게 얼어 버린 코끝을 문지르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 뒤쪽에 가서 기둥을 잡고 섰다. 버스가 출발함과 동시에 발작적인 기침이 올라왔다. 나는 코트 소매에 코와 입을 묻고 비틀거리며 기침을 토해 냈다.

“콜록, 콜록!”

도무지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몇몇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쏠리는 걸 알았지만 내 의지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었다. 기도는 이미 잔뜩 부어서 숨을 쉴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목 안에서 언뜻 피 맛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저…….”

내 앞에 앉아서 휴대폰 게임을 하던 학생이 눈치를 살피더니 쭈뼛쭈뼛 일어섰다.

“여기 앉으실래요?”

“아니에요. 앉아 계세요.”

“저 어차피 이제 내리거든요……. 그리고 좀 앉으셔야 할 것 같은데.”

“네?”

학생은 두꺼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나를 위아래로 미심쩍게 훑어보았다.

“그러다 쓰러지시겠는데요.”

아무리 컨디션이 좀 안 좋아도 그렇지, 나보다 한참 작은 십 대 애한테 자리 양보를 받다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애는 내가 뭐라 받아치기도 전에 나를 냉큼 앉히고는 책가방을 멘 채 뒷문 앞에 가 섰다.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밖을 보았다. 살짝 녹은 얼음처럼 차게 이지러진 도시의 야경이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간다. 그 일을 겪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내가 캠퍼스를 무사히 탈출하여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거라고, 형과 같은 집에서 매일 함께 잠들고 깰 거라고……. 3년 전 이맘때의 나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것이 거짓말처럼 세상은 그때의 참사를 빠르게 잊었다. 이제는 TV 채널을 아무렇게나 돌려도, 하루 종일 라디오를 틀어 두어도 ‘백일대’라는 이름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에 구멍이 뚫린 사람처럼 숨을 멈추던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지이잉……. 코트 안에서 둔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직 10시가 안 됐는데, 혹시 형이 벌써 도착한 건가 싶어 황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화면에는 형의 이름 대신 내 얼굴이 가득 떴다. 영상 통화였다. 아까 내게 자리를 양보해 준 학생은 나보고 쓰러질 것 같다고 했었는데, 카메라를 통해 보니 그래도 아픈 티가 크게 나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전화 너머의 상대를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디마디가 쑤시는 손을 힘겹게 움직여 이어폰을 꺼내 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첫 마디를 뱉기 전 몇 번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나혜야?”

- 호현 오빠!

스피커 너머에서 왁자지껄한 소음들이 흘러들어 왔다. 화질이 썩 좋지 않은 화면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잡혔다. 배경을 보니 술집 같다.

- 저희 지금 2차 왔어요! 여기 안주도 완전 맛있고 분위기도…… 앗. 지금 집 가는 길이세요?

- 하이. 직장인 동지.

짧은 단발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나는 엷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은아, 오랜만이다.”

- 오, 정장 빼입은 거 봐. 역시 대기업이라 때깔이 다르네. 지금 퇴근하는 거야? 살아는 있냐?

“나야 뭐. 너는 어때? 잘 지내?”

- 하루하루가 거지 같지 뭐. 다른 회사원들 서류 가방 들고 퇴근할 때 나는 비닐봉지 들고 퇴근해. 철야하는 동안 갈아입은 옷 넣은 거. 1주일 내내 집에 못 들어갔을 땐 그 봉지 그냥 통째로 버렸잖아……. 썩었을까 봐 열어 보기도 무서워서…….

- 아하하. 언니는 무슨 그런 말까지 해?

- 예전엔 개발자들 맨날 체크 남방만 입는 거 이해 못 했는데 이제 완전 알겠더라. 구겨지고 뭐 묻어도 티 안 나고 최고야. 색깔별로 딱 3장이면 돼. R, G, B.

- 으하하학!

김나혜가 뒤로 발라당 넘어가며 웃어 젖히는 소리가 이어폰을 뚫고 나왔다. 나는 급하게 통화 볼륨을 줄였다. 오하은의 반대편에서 덩치 큰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한빈이었다.

- 형님, 안녕하십니까.

학교에서 탈출하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에 펜션을 빌려 놀았던 이후로 우리는 매년 이맘때만 되면 자연스럽게 모인다. 모두가 모이는 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통화로라도 안부를 전한다. 누군가 공식적으로 제안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 어허, 좀 비켜 봐. 빈아. 네 덩치에 누나 다 가린다.

- 죄송합니다.

- 너는 어째 군대 갔다 와서 더 큰 거 같냐? 에이, 설마. 아니겠지. 거기서 더 클 데가 어디 있다고.

- …….

- 뭐야, 진짜야?

- 많이는 아니고…… 그냥 한 3센티…….

- 맞다! 오빠, 그거 아세요? 오늘은 빈이네 형도 오셨어요! 어? 어디 갔지? 방금 전까지 여기 계셨는데.

- 영원 선배 전시회는 언제래? 그 선배는 절대 그런 말 안 해 주잖아.

- 저희한테도 티켓 주실까요? 아니면 저희가 사서 가야 해요? 오빠가 선배한테 잘 말해서 몇 장 받아다 주시면 안 돼요? 의리 티켓!

- 안주 더 시켜도 됩니까?

- 짜식. 당연히 되지. 우리 빈이 많이 먹고 무럭무럭 커. 아니, 여기서 더 크진 말고, 어, 커도 되긴 하는데…… 아무튼 시켜, 시켜!

2차라더니 벌써 술을 많이 마셨는지 다들 아주 인사불성이 된 상태였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정신이 없었다. 나에겐 다행이었다. 허옇게 질려서 식은땀이 맺힌 내 모습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으니. 그들은 잔뜩 신이 나서 500시시짜리 맥주잔을 가득 채우더니 나를 향해 눈을 빛냈다.

- 호현아. 네가 건배사 좀 해 줘.

- 박수, 박수!

“나 그런 거 잘 못 해.”

-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해 주세요. 네? 우리끼린 나올 만한 거 다 나왔단 말이에요.

제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건배사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여기는 공공장소이지 않은가. 애써 입매를 올려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얘들아. 미안한데……. 나 지금 버스라서 안 될 것 같아.”

하지만 그들은 실망하기는커녕 더욱 흥분했다. 오하은이 잔을 들어 올리며 우렁차게 선창했다.

- 나! 지금! 버스라서!

김나혜와 한빈이 뒤따라 외쳤다.

- 안 될 것 같아!

뽀얀 거품을 얹은 잔들이 화면 속에서 경쾌하게 부딪쳤다.

- 메리 크리스마스!

“…….”

따로 떼놓고 보면 나름대로 차분하고 성실한 애들인데 모이기만 하면 왜 이렇게 정신 사나워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손마디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픽 웃어 버렸다.

두통과 메슥거림이 갈수록 심해져서 창에 옆머리를 기대고 견딘 끝에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집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 들러 미리 주문해 놨던 케이크를 찾았다. 폐점 시간 10분쯤 전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기다리셨죠. 차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막혀서. 정말…… 콜록! 콜록, 정말 죄송해요.”

카페 사장은 마감 준비를 다 마치고도 나 때문에 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장이 짜증 어린 표정으로 돌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 흠칫했다.

“저…… 손님. 괜찮으세요?”

“네?”

“아니, 아니에요. 여기 주문하신 딸기 케이크요. 조심히 가져가세요. 맛있게 드시고요.”

내 꼴이 그렇게 심각한가. 괜히 골골거리는 티를 내서 형의 생일을 망치면 안 되는데.

여기까지는 그래도, 그나마 괜찮았다. 이래저래 힘든 하루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좋게 마무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집 앞 거리 모퉁이에서 막 방향을 틀려는 찰나, 갑자기 오토바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새하얀 헤드라이트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이끌고 급히 피하느라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이 떨어졌다.

뻔뻔하게도 인도로 다니던 주제에, 오토바이 운전자는 나를 향해 짜증스레 클랙슨을 울렸다. 나는 벽에 등을 세게 부딪쳤다가 간신히 바로 섰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케이크 상자가 형편없이 찌그러진 채 인도에 나뒹굴고 있었다. 안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이 뭘 좋아할까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크리스마스이브에 맞춰 몇 주 전부터 예약 주문을 해 두었던 케이크가 엉망이 되었다.

벽에 쓸려 더러워진 코트도, 어깨와 등의 욱신거림도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짜증과 서러움이 그 자리를 메웠다.

“……하.”

나는 열 오른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일단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길바닥에서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형은 아직 오지 않았다. 현관 앞에 얌전히 놓여 있는 택배를 재빨리 낚아챘다. 박스를 열어 내용물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내가 산 건데도 괜히 부끄러워서 뺨이 화끈거렸다. 아무리 연인 간이지만 역시 좀 오버한 건가 싶었다.

일단 택배는 방에 대충 처박아 놓고 나왔다. 그보다 요리가 더 급했다. 원래는 케이크는 일단 냉장고에 넣어 두고 다른 요리로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자정쯤 케이크에 초를 꽂고 축하 노래를 불러 주려고 했다. 그리고 케이크를 먹으면서 와인 한 잔. 그런데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요리에 좀 더 공을 들여야겠다.

원래 우리 집 요리 담당은 형이었다. 딱히 계량이나 조리법에 신경을 쓰지 않는데, 그냥 고기를 대충 턱턱 뒤집어 굽고 조미료를 손에 잡히는 대로 뿌려서 건성건성 내놓는데도 이상하게 형이 만든 음식은 뭐든지 맛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위해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짬짬이 요리 블로그와 동영상을 찾아보며 공부를 했다. 웬만해선 그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려울 테니까.

팬에 올리브유를 가득 붓고 불을 올렸다. 손질된 생새우와 마늘 팩을 꺼내 포장을 뜯었다. 오늘 내가 만들 요리는 감바스다. 요 며칠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는데, 나름대로 간단하고 조리 시간이 길지 않으면서 만찬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음식으로 이만한 게 없었다. 여기다 미리 사 둔 마늘 바게트나 소시지, 햄 같은 걸 곁들일 생각이었다.

야심 찬 시작과 달리 갈수록 뭔가 알쏭달쏭해졌다. 마늘을 일정한 크기로 얇게 써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내가 본 블로그와 동영상 속의 사람들은 너무 쉽게 하던데. 아까부터 눈가가 화끈거리는 게 열 때문인지 마늘의 매운 기운 때문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대체 기름을 어디까지 달궈야 할지 몰라서 한참 기다리다가 새우와 마늘을 집어넣은 순간……. 퍽! 퍼벅! 살벌한 기세로 기름이 튀더니 팬 안의 모든 것들이 거멓게 변해 버렸다.

“…….”

도저히 못 먹을 수준이 된 감바스를 앞에 두고, 나는 한 손에 국자를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숨조차 꾹 참은 채로. 뺨을 타고 땀방울이 뚝, 흘러내렸다. 기름에 잠긴 시커먼 식재료들이 점차 뿌옇게 보였다.

삑삑삑삑, 덜컥. 마침 타이밍 좋게 현관문이 열렸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척이 점차 가까워졌다.

“현아, 국자는 또 왜 들고 있어. 요리도 못 하고 칼질도 못 하고, 쓸데없이 예쁘기만 한 게. 나 생일이라고 재롱부리는 거야?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고.”

“…….”

“……정호현?”

이름을 불렀는데도 꼼짝도 않는 내가 이상했는지 형이 가까이 다가왔다. 뒤에서부터 큼직한 그림자가 졌다. 이젠 익숙해진 향이 확 밀려들었다. 곧이어 검은 외투를 걸친 팔이 내 옆으로 쑥 뻗어 나와 불을 껐다. 부글거리던 팬 속의 내용물이 조금 잠잠해졌다.

“형…….”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형편없이 막힌 소리가 났다. 목이 꽉 메어서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형이 내 어깨를 감싸 돌려세웠다.

가장 먼저 단단하게 굳어진 입매와 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 곧게 뻗은 목에는 이젠 꽤 희미해져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는 흉터가 있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

“…….”

그렁그렁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형의 표정이 좀 더 심각해졌다. 나를 실컷 놀려 먹으면 먹었지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는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내 꼴이 생각보다도 더 엉망인 모양이다.

“흐으…….”

그 순간 최후의 둑이 터졌다. 나는 소리 내어 울어 버리고 말았다. 열꽃이 피어 발개진 양 뺨이 눈물로 흠뻑 젖도록.

* * *

한번 터진 울음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형의 품에 안겨 욕실로 운반되면서도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 울었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지면서도 울었고, 옷을 갈아입혀지고 침대에 쏙 넣어지면서도 울었다. 엉망진창이었던 오늘 하루를 모두 털어놓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자, 아.”

그가 상비약 상자에서 감기약을 꺼내 먹여 줄 때쯤에야 이성이 돌아왔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스물다섯을 넘어 서른으로 가는 나이에 통곡을 하다니. 내가 곧바로 알약을 받아먹지 않고 머뭇거리자 그가 무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알약은 못 먹겠어? 사과 맛 시럽 사다가 먹여 줄까, 토끼야?”

“토끼 아니라니까…….”

아직 울음기가 남아서 칭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나왔다. 수치심이 한층 증폭되었다. 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코를 훌쩍였다.

“순하고 하얀데 눈만 빨간 게 어떻게 토끼가 아니야. 그래, 뭐. 토끼치곤 좀 사람 같이 생기긴 했네.”

이대로 듣고만 있으면 저 말도 안 되는 토끼 얘기가 한참 더 이어질 것 같았다. 형의 손바닥에 놓인 알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 알약 잘 먹어요. 지금 먹을게요.”

하지만 형은 손을 뒤로 확 빼 버렸다. 나는 졸지에 허공을 움켜쥐게 되었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부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형이 픽 웃었다.

“자기야, 약 주세요. 해 봐.”

“네?”

“어서.”

예전에도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때도 열이 오르고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아까 저지른 짓이 있어 뭐라 항변할 수도 없었다.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자기야, 약 주세요.”

그제야 형이 내 손에 알약 몇 개를 떨어뜨려 주었다. 약을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물컵을 건넸다. 목이 아파서 물 한 모금도 넘기기 힘들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삼켰다. 그가 잘했다는 듯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주 열이 펄펄 끓네. 뺨은 다 익어 가지고.”

“…….”

“왜 미련하게 온종일 혼자 앓았어. 아프면 휴가를 쓰든가 했어야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급하게 처리할 일도 있었고.”

“아픈데 분위기는 무슨 분위기. 너희 회사 그 등신 같은 꼰대 새끼들, 뒈질 때도 분위기 봐 가면서 뒈지라고 해.”

“…….”

“언제부터 이렇게 비실거렸어? 오늘 아침엔 괜찮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비실까진 아닌데.”

“응? 호현아. 비쩍 곯은 거 몇 년 동안 잘 먹여서 겨우 한 입 거리 만들어 놨더니, 하루 만에 도로 반 입 거리 됐잖아.”

나는 주기적으로 채혈을 할 때보다 살이 좀 올랐다. 형이 아주 작정하고 매일 영양식을 차려 주는 데다, 형 덕에 내 취향이 아닌 달콤한 디저트들을 자주 먹고, 직장에선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하니까. 서글픈 사무직의 숙명이다.

형은 반 입 거리가 드디어 한 입 거리가 됐다며 은근히 흐뭇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내심 걱정스러웠다. 이러다가 서른이 넘어가면 배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형은 몸을 쓰는 직종이라 그런지 여전히 근사한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처음 봤을 때만큼 찌우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그가 내 뺨을 조물조물 만졌다. 열이 오른 피부에 그의 체온은 시원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크고 단단하고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가 한숨을 쉬며 손끝으로 내 뺨을 툭 건드렸다.

“생일이고 뭐고, 이런 앨 데리고 뭘 해. 이제 잘래?”

그 말에 나른하게 가라앉아 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뻐근한 두통을 무시하고 눈을 부릅떴다.

“안 돼!”

“왜.”

“형 생일이잖아. 밥도 먹어야 하고, 케이크도……. 케이크는 망가졌지만, 아무튼. 자정 될 때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야 해. 이대로 자면 서운하니까.”

망가진 케이크 상자를 떠올리고 좀 시무룩해졌지만, 어쨌든 웅얼웅얼 말을 마쳤다. 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나는 호현이가 집에 오지 말라고 지랄하던 게 더 서운한데?”

“……네?”

“왜 모른 척해. 영원이 존나 서운했다고.”

그가 이를 반쯤 악물고 말했다. 따끈따끈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까 경황이 없어서 그의 전화를 멋대로 끊어 버린 기억이 떠올랐다. 그 뒤로 계속 걸려오는 전화도 다 무시하고 쫓기듯 사무실을 나섰던 것도.

“들어나 보자, 예쁜아. 아깐 왜 그렇게 난리를 친 건데? 또 뭔 깜찍한 짓을 꾸미나 싶어서 와 봤더니, 다 죽어가는 얼굴로 국자 들고 엉엉 울기나 하고.”

“아니, 형. 그게요.”

야단법석을 떤 것에 비해 결과가 너무 처참해서 형을 볼 면목이 없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머뭇 고백했다.

“일단은, 형 줄 케이크…… 사 왔는데.”

사나운 눈매에 힘을 주고 인상을 쓴 채 나를 내려다보다가, 그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케이크?”

“식탁에 올려놨는데. 혹시 봤어요?”

“봤지. 그게 나 줄 케이크였다고? 상자 형태가 상당히 추상적이던데? 난 또, 네가 집 앞에서 폐지 덩어리라도 주워 온 줄 알았잖아. 내 벌이가 모자라서 우리 현이가 부업까지 하는 건가 싶어서 반성했는데.”

“…….”

폐지 덩어리라니. 오랜 고민 끝에 큰 맘 먹고 사서 소중하게 품고 온 건데. 집 앞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망가지긴 했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게 조금 전인데 다시 울고 싶어졌다.

“케이크하고, 또 뭐.”

“선물도…….”

“아, 선물. 선물 좋지. 뭐 샀는데?”

뒤늦게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 같지도 않은 케이크만 사고 선물은 없냐고 책망을 듣는 한이 있어도 이 얘기는 꺼내는 게 아니었다. 케이크만으로도 이미 잔뜩 책망을 들었는데, 구석에 대충 처박아 둔 택배 상자를 형이 발견하는 때엔…….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아니에요. 이건 그냥 못 들은 걸로…….”

“뭐냐니까?”

급히 수습해 보려 했지만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사과했다.

“현이가 잘못했어요…….”

“뭐? 내 생일인데 선물도 하나 없어? 세상에, 씨발. 서운해서 눈물이 다 나네?”

형이 이를 갈았다. 눈물이 난다는 말과는 딴판으로, 아주 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어딨어.”

“뭐, 뭐가?”

“내 선물.”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벌떡 일어섰다. 나도 그를 따라 침대에서 튕겨지듯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곧바로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오는 바람에 신음을 삼켜야 했다.

“미안해요! 우리 내일 백화점 갈래요? 나 엊그저께 월급 들어왔는데. 형 갖고 싶은 거 뭐든지 사 줄게요. 응?”

“그렇지. 지랄을 떨려면 돈지랄로 해야지. 우리 현이가 뭘 좀 아네.”

“…….”

“근데, 있잖아. 내가 언제 네 주머니 털어먹고 싶댔어? 털어 봤자 몇 푼 나오지도 않는 게.”

“…….”

“아냐, 별거 안 해. 네가 사 온 거만 좀 볼게. 나 엿 먹이면서까지 뭘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지 궁금해서 그래. 응?”

“혀엉…….”

그는 내 애원을 무시하고 짜증스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드레스 룸으로 이어지는 문 옆에 처박혀 있던 택배 상자를 발견했다. 그가 이미 열려 있던 상자 입구에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포장용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딱 죽고 싶었다.

“예쁜아.”

잠시 후 그가 나를 불렀다. 아까까지 성질이 나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이게 뭐야.”

“…….”

이불 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못 들은 척했다.

“이거 진짜 네가 산 거야?”

“아니.”

“아니긴 뭐가 아냐. 여기 쓰여 있네. 주문자 정*현.”

“그거 나 아니야.”

“너 아니면 누군데. 네 동생이라도 돼?”

“아냐, 몰라…….”

꽁꽁 싸매고 있던 이불이 확 걷혔다. 형이 한 손으로는 이불을, 한 손으로는 택배 내용물을 든 채 침대 앞에 서 있었다. 투명한 비닐 속에 든 보송보송한 흰색 토끼 귀와 꼬리 세트를 보는 순간 얼굴 전체가 화악 달아올랐다. 약으로 가라앉힌 열이 다시 오르는 느낌이었다. 내 반응을 집요하게 지켜보던 그가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하……. 뭐 이딴 귀여운 게 다 있지. 너 이런 거, 씨발, 대체 어디서 배웠어? 나 미치게 만드는 법 연구라도 했어?”

수치심으로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버둥거리며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반항은 쉽게 저지되었다. 그가 내 위에 올라타 느긋이 포장을 뜯었다. 나는 그의 아래에 깔려 드러누운 채 그 광경을 고스란히 보아야 했다.

“토끼 귀 머리띠, 여기까진 그렇다 치고. 이건 뭔지 알기나 해?”

형이 비닐에서 꺼낸 토끼 꼬리를 들어 보였다. 주먹 크기의 하얀색 털 뭉치 아래 뭉툭한 화살촉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집게 핀 같은 거 아니었어요? 바지 뒤쪽에 집어서 고정하는.”

“이게 핀으로 보여?”

“그럼 자석이나…….”

“이거 다 유린데 자석이 어딨어.”

사실 제품 상세 페이지는 제대로 읽어 보지 않았다. 연인을 위한 이벤트에 딱이라는 문구만 보고 샀다. 회사에서 근무 중에 몰래 휴대폰으로 쇼핑한 거라,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화면을 보이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느라 자잘한 설명까지 읽을 짬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 그래, 호현아.”

형이 빙긋 웃었다. 입매만 웃을 뿐 눈은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원래도 온화함이나 친근함과는 거리가 먼 인상인 데다 그렇게 웃으니 한층 오싹해졌다.

“형이 다 알려 줄게. 이거 어떻게 쓰는지.”

* * *

“아!”

신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젖혔다. 머리띠에 달린 토끼 귀도 그 움직임을 따라 젖혀졌다. 아래에서 내 가슴을 우물거리던 형이 목 안으로 낮게 웃었다.

“귀 까딱거리는 거 진짜 귀엽네.”

그가 말하는 내내 축축이 젖어 든 양 가슴이 웅웅 울렸다. 나는 심지어 형이 아까 갈아입혀 준 흰색 반팔 티셔츠를 벗지도 않은 채였다. 하도 물고 빨아서 흰 원단이 투명해지고, 그 위로 분홍빛 살점이 두 개 비쳐 보였다. 정신이 나갈 만큼 부끄러웠다.

“머리띠만이라도…… 읏! 벗으면, 안 돼?”

“으으응.”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가슴을 물었다. 얇은 천과 유두가 함께 입술 사이에 빨려 들어갔다. 뜨겁고 습했다. 그는 한쪽 젖꼭지를 빨아올리며 다른 쪽을 툭 튕겼다. 작은 자극에도 가슴팍 전체가 찌릿했다. 젖은 천 아래 솟아오른 유두가 그의 엄지에 일그러지며 더 붉게 달아올랐다.

살이 좀 붙은 이후로 형은 기다렸다는 듯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달려들어 잡을 것도 없는 가슴살을 마구 주무르며 유두를 빨고 씹어 댔다. 샤워를 하다 문득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기분 탓인지 예전보다 조금 통통해지고 색이 진해진 것 같다. 이러다가 이젠 정말 그가 누누이 말하던 핑크가 아니라 새빨간 색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읏! 흐윽.”

가슴 양 끄트머리에 주어지는 자극에 자꾸만 하반신이 멋대로 들썩였다. 그때마다 아래가 빠듯하게 조여졌다. 잊을 만하면 아래에 박힌 토끼 꼬리가 내벽을 자극했다.

“왜 이렇게 발발 떨어. 꼬리 다 젖겠다, 토끼야.”

망할 토끼 꼬리. 이렇게 쓰는 물건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쩐지 단순히 귀랑 꼬리 세트일 뿐인데 성인용품 마크가 붙어 있더라니!

다리를 넓게 벌리면 근육이 땅겨져서 안이 불편하고, 다리를 모으면 보송보송한 털이 사타구니에 닿아서 더 간지럽고. 힘을 줘서 빼내려고도 해 봤지만 아랫부분이 굵직한 화살촉 모양이라서 쉽게 빠지지 않았다. 죽을 맛이었다.

“이거 이상해. 뺄래, 빼 줘.”

“그거 빼면 내 좆 꽂아야 하는데 괜찮아?”

“영원이 형!”

“너, 열나서 그런지…… 젖꼭지가 따끈따끈해. 색도 평소보다 더 빨갛고. 잘못 빨았다가 톡 터지면 어쩌지?”

그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하기야 언제는 그렇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서럽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디가 불거진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연약한 살점을 옷 위로 마구 비벼 댔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나는 가슴에서부터 올라오는 쾌감을 못 이겨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가, 어깨를 짚었다가, 머리채 사이에 손을 밀어 넣었다. 새카맣고 숱이 많은 머리칼이 내 손안에서 헝클어졌다. 귓바퀴에 달린 피어싱들이 선득한 빛을 발했다.

젖꼭지 위에 찰싹 달라붙어 덮인 천이 거슬렸는지, 형이 잠깐 입을 떼고 거친 손길로 티셔츠를 확 젖혔다. 그 아래 드러난 맨살은 이미 흠뻑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유두가 잔뜩 빨갛게 달아오른 것으로 모자라 유륜 주변으로 붉은 기가 번졌다. 가슴팍 군데군데 잇자국이 났다.

“…….”

눈앞에 드러난 외설적인 광경을 낱낱이 살피며 숨을 한 차례 들이마시고, 그는 도로 내 가슴에 고개를 박았다. 질척대는 입술과 가슴이 장애물 없이 곧바로 맞닿는 감각이 아찔했다. 쭈웁……. 젖꼭지와, 그 주변의 도도록이 부어오른 살까지 한입에 빨아 먹혔다.

해열제를 먹었어도 은은한 열감이 남은 몸은 쾌감 또한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잔뜩 힘을 주어 세운 혀끝에서 젖꼭지가 뭉개졌다. 애무에 호응하듯 허리가 휘어지며 가슴팍이 점점 더, 더, 위로 떠올랐다. 그의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경련할 때마다 토끼 귀도 들썩거렸다.

이대로 계속 유두를 빨리다간 이상해질 것 같았다. 나는 엉덩이에 토끼 꼬리를 꽂은 채 버둥거렸다. 발끝으로 형의 허벅지를 마구잡이로 밀어 대다가, 엉덩이를 들썩여 매트리스에 대고 짓이겼다.

“그만, 으응, 간지러워, 흐으, 읏!”

내 하반신은 이미 스스로 흘린 쿠퍼액으로 엉망이었다. 양 허벅지 사이로 투명한 실이 죽 늘어졌다. 바짝 곤두서서 액을 흘려 대는 성기와 음낭 아래 보송보송한 토끼 꼬리가 언뜻 보였다.

“가게 해 줘?”

“으, 으응.”

“똑바로 말해야지, 현아. 뭘 해 줄까?”

“정액, 싸게 해 줘……. 빨리요. 혀엉…….”

그가 씩 웃고 내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꼬리를 통째로 움켜쥐었다. 탄탄한 팔뚝에 힘줄이 불거지고, 솜사탕 같은 희고 둥근 털 뭉치가 큼직한 손아귀에서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퍼억! 역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단단한 손바닥이 구멍 위에 닿아 눌릴 때까지.

뭉툭한 끄트머리가 배 안 깊숙이 처박혔다. 딱딱하고 인공적인 유리가 내벽을 짓이기는 감촉.

“……!”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바보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로 굳었다. 그 직후 허벅지가 파들, 떨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꼬리가 처박힌 내벽을 중심으로 경련이 점점 커졌다. 지독한 쾌감이 빠르게 전신의 신경을 타고 번졌다.

아래에서 희멀건 액이 튀어 올라 내 가슴팍에 뿌려졌다. 형은 기다렸다는 듯 정액을 유두에 묻혀 빨았다. 세게 빨아올릴 때마다 정액이 한 움큼씩 쏘아졌다. 나는 사정하는 내내 허벅지 사이에 낀 형의 팔뚝을 꽉꽉 조이며 울었다.

“자지는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많이도 쌌네. 젖 빨아 주는 게 그렇게 좋았어?”

그새 정액 한 방울이 뺨에 튀었나 보다. 형이 내 뺨에 묻은 것을 핥아 먹고 그 자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아직도 내 안에 박혀 있는 꼬리를 툭 쳤다. 보송보송하던 꼬리털이 체액에 푹 절어 있었다.

“하읏!”

“우리 토끼, 큰일이다. 꼬리가 이렇게 다 젖어서 어떡해?”

“하지 마…….”

“이런 짓 하고 싶어서 산 거 아냐? 하여튼 현이는 생긴 거랑 다르게 참 변태 같다니까. 설마 내 좆보다 이게 더 좋은 건 아니지?”

“이렇게 쓰는 건 줄 정말 몰랐단 말이야!”

심드렁한 어조로 나를 놀리는 형이 얄미웠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긴 싫었다. 저 입을 다물게 해 주고 싶었다. 발갛게 부은 눈가에 힘을 주고 형을 노려보았다.

“나도 형한테 할 거야.”

“뭘?”

나는 코를 작게 훌쩍이며 몸을 일으켜 그의 바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기왕 변태 취급을 받은 김에 진짜 변태 같은 짓을 해 볼 생각이었다.

“형 위에 올라타서 못 움직이게 해 놓고, 이거 잔뜩 빨 거예요. 도중에 싫다고 해도 안 놔줘. 이번엔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

할 수 있는 최대한 강압적인 어조로 으름장을 놓았다. 뜻밖의 말을 들은 형이 멍한 얼굴로 굳었다. 한 박자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이것도 내 생일 선물이야? 어떻게 이런 예쁜 생각을 다 했어?”

“……네?”

무서운 생각이 아니고?

“좆 대가리 다 헐 때까지 빨아도 돼. 아예 내 생일 내내 계속 물고 있을래? 그래, 그것도 좋겠네. 하루 종일 내 좆물만 마셔.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대 주고 있을게.”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이었다. 당황하거나 기겁하거나, 아무튼 조금쯤은 그런 걸 기대했는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하루 종일까지는 아니고요. 전 그냥 조금만.”

“나 어떻게 할 건데. 깔고 앉을 거야? 아님 묶을래? 상처 내도 돼.”

“안 묶어요. 상처도 안 내요! 제가 왜 형한테 그런.”

“네가 온종일 내 거 오물거리는 상상만 해도 좆 터질 것 같아.”

그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드러누웠다. 그걸로도 모자라 나를 번쩍 들어 자신의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을 마주 보는 방향이 아닌, 서로가 서로의 하체를 보는 반대 방향으로. 앞으로 흘러내린 토끼 귀가 시야를 가렸다. 나는 허둥지둥 귀를 젖혔다.

“얼른.”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나는 엉겁결에 그의 바지 앞섶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서도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기선제압을 한 후에 당황한 그를 보면서 실컷 능욕해 주고 싶었는데, 역으로 내가 능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입은 바지의 단추를 열고 지퍼를 내렸다. 형이 냉큼 허리를 들어 협조했다. 망설이다 속옷도 조심스레 끌어 내렸다. 안에 비스듬히 수납되어 있던 성기가 대각선으로 튕겨 올라왔다. 귀두 가운데 옴폭 팬 곳에 고여 있던 투명한 액이 뚝, 느리게 흘러 내 손등에 떨어졌다.

“…….”

그것을 홀린 듯이 보다가 고개를 가까이했다. 머리가 아래로 숙여지면서 자연스레 엉덩이가 들렸다. 지금쯤 형의 시야에는 엉망으로 젖은 토끼 꼬리가 박힌 엉덩이가 낱낱이 보이고 있을 것이다.

“아!”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엉덩이를 덥석 움켜쥐었다. 내벽의 형태가 변하면서 안에 박힌 뭉툭한 유리 토막이 낱낱이 느껴졌다. 내가 주춤하는 것을 느낀 형이 재촉했다.

“빨아 줘, 빨리.”

나는 신음을 삼키며 주춤주춤 성기에 입가를 가져다 댔다. 내 머리가 그의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깊숙이 파묻혔다. 머리띠에서부터 쫑긋 솟은 토끼 귀가 아래로 쳐져서 그의 다리를 간질였다. 일단 귀두 끝에 쪽 키스하고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나름대로 많이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제 겨우 귀두만 물었다. 그런데도 벌써 턱이 뻐근했다.

“우리 현이 좆 더럽게 못 빠는 건 언제 나아지려나. 매일같이 물려도 안 나아지는 거 보니까, 이대로 평생 끼고 살아야겠다.”

형이 내 엉덩이를 주무르며 킥킥 웃었다. 그 말에 이유 모를 오기가 솟았다. 나는 비장한 기세로 펠라티오에 임했다. 입 안 가득 귀두를 우물거리며 음낭을 만지작거렸다. 기둥을 위아래로 쓸어 올렸다 내리기도 했다. 숨이 막히고 헛구역질이 나는 것도 꾹 참고 성기 전체가 타액으로 젖도록 성심껏 빨았다. 형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고 움직이느라 토끼 귀 머리띠가 비뚤어지고 앞머리가 흐트러져 맨 이마가 드러났다.

“읏…….”

그렇게 얼마나 애를 썼을까. 형에게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올라타 있는 그의 허리 근육이 단단히 긴장했다. 흥분의 징조였다.

혀끝에 고인 쿠퍼액을 꿀꺽 삼키고 성기를 뱉어 냈다.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기둥 전체가 번들거렸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더 커지고 흉악해진 것 같았다. 고개를 틀어 입술로 기둥을 문질러 주다가 다시 성기를 물었다. 귀두의 툭 불거진 테두리를, 그 아래로 이어지는 힘줄을 혀끝으로 굴려 가며 빨았다. 손으로는 돌처럼 굳은 허벅지 안쪽을 살살 쓸어 주었다.

“하아, 윽.”

이번엔 신음이 아까보다 한층 선명해졌다. 매번 형이 나를 정신없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라는 사실이 묘하게 뿌듯했다. 신이 났다. 내 들뜬 기분을 반영하듯 엉덩이가 달싹였다.

그때였다. 토끼 꼬리가 박힌 뒤에 더운 숨이 닿았다. 뒤이어 따뜻한 혀가 팽팽히 벌어진 입구를 핥았다. 혀를 세워서는 꼬리와 구멍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듯 둘레를 따라 쿡쿡 찔러 댔다.

“아…… 형, 무슨, 으응, 앗!”

힘이 풀려 그의 아랫도리에 얼굴을 묻은 자세 그대로 엎어질 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

“그거 알아? 너 여기 살 좀 올랐어. 그동안 잘해 먹인 보람이 있네.”

큼직한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꼬리를 물고 있는 구멍 아래 회음이 꾸욱 눌렸다.

“여기도 좀 통통해졌고. 뽀얀 살에 꽃물이 들어선……. 맞다, 너 이쪽에 점 있지. 점도 예쁘게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지독한 수치심이 들었다. 나는 허겁지겁 손을 뻗어 엉덩이를 가리려 했다.

“보지 마.”

“왜. 예쁘기만 한데.”

“부끄럽……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엉덩이가 깨물렸다.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내가 주춤한 틈을 타 형이 본격적으로 달려들었다. 여전히 꼬리를 박아 놓은 채로 엉덩이 살을 잔뜩 주무르고 구멍과 회음이 녹진녹진해지도록 핥고 빨았다. 분명 엉덩이에 잇자국뿐만 아니라 손자국까지 남았을 것이다.

“계속 내 거 빨래, 아니면 꼬리 빼고 뒤에 넣을래? 너 하는 거 보니까 진짜 하루 종일 빨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난 그것도 좋은데, 네가 죽지 않을까? 넌 조금만 힘들면 맨날 죽는다고 칭얼거리잖아.”

난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인데, 저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천하의 엄살쟁이가 된 느낌이다. 그러게 좀 덜 크든가. 형이 야속하고 미웠다. 어쨌거나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훌쩍이면서 형의 성기를 뱉고 고개를 들었다. 귀두에서부터 내 입술에까지 타액이 주욱 이어졌다.

“형 거 넣을래.”

“…….”

“너, 넣으면…… 안 돼? 입 아파서 못 하겠어. 계속하면 입 더 아파질 거고, 그럼 나, 반 입 거리 돼서…….”

“……그래, 넣게 해 줄게. 힘 풀어.”

그가 내 엉덩이를 툭 쳤다. 무심코 그의 말대로 했다. 축축한 꼬리가 그의 손에 틀어잡혔다가, 내벽을 가득 메운 것이 통째로 끌려 나가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달아올라 있던 점막에는 그것마저 자극이었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발기한 내 성기에서 묽은 액이 뚝뚝 흘렀다.

젖은 손가락을 빠는 듯한 소리와 함께 꼬리가 빠졌다. 굵은 유리가 박혀 있던 자리가 욱신거렸다. 형은 푹 젖은 꼬리를 아무 데나 집어 던지고 내 몸을 확 뒤집어 그 위로 올라탔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아랫도리를 맞추자 발간 구멍이 기다렸다는 듯 옴쭉거리며 귀두를 물었다.

“나 좋으라고 아픈 몸으로 케이크랑 요리 준비하고.”

“헉, 하아…….”

“나 좋으라고 토끼 귀랑 꼬리도 달고.”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아래가 묵직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무기질적인 유리가 아닌 그의 성기로. 내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어서인지, 그의 것이 평소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나 좋으라고, 예쁜 구멍 잔뜩 벌려서…… 읏, 자지도 넣게 해 주고.”

그는 찬찬히, 그러나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밀어 넣었다. 점차 배가 불러 왔다. 조금이라도 성기를 더 깊이 먹으려고 나는 다리를 있는 힘껏 벌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사타구니에 그의 아랫배가 지그시 맞닿아 올 때까지.

“나 좋으라고 태어났나, 내 현이는.”

“영원이 형.”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웃으며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여러모로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원래 계획대로 흘러간 건 단 하나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이것이 내가 그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었다. 어설픈 실수들 속에 묻힌 진심을 알아주길 바랐다. 숨조차 쉬지 않고 나를 지켜보던 형이 엷게 웃었다.

성기가 쭉 빠져나갔다가 다시 치고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휙 꺾으며 쾌감에 진저리쳤다. 비뚤어져서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머리띠가 그 움직임에 벗겨졌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느긋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기와 구멍이 안온한 리듬으로 툭, 툭……. 맞물렸다. 내장 저 깊은 곳에 숨 막히게 굵은 것이 파고들었다 빠져나갔다. 귀두가 찌르고 간 자리에서부터 간질간질한 감각이 피었다. 절로 달콤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꼬리를 오래 끼우고 있느라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에는 조금 부족했다. 좀 더 세게, 더 빠르게 박아 줘도 좋을 텐데. 어쩐지 애가 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꾹꾹 조이며 삽입을 졸랐다.

“힘 풀어……. 조이지 마. 살살 할 거야.”

“으응…… 흑.”

“보채도 소용없어. 안 그래도 골골대는 애 병원 실려 가게 만들기 싫…… 읏, 정호현. 조이지 말랬지.”

그가 힘이 들어간 내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을 손바닥 전체로 꾹꾹 주물렀다.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품에 매달렸다. 그가 한숨을 쉬더니 내 등을 받쳐 안고 다시 움직였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은 채 배 안의 감각에 집중했다. 성기가 뜨겁고 부드럽게 이완된 내벽을 느긋이 찍어 올렸다.

양 뺨이 열기로 화끈거렸다. 지금쯤 내 얼굴은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을 터였다. 몽롱한 기분으로 눈을 떠 형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눈 다 풀렸네. 그렇게 좋아?”

“응. 기분…… 아, 기분, 좋아.”

“현이는 누구 거야?”

“현이…… 영원이 형 거.”

이제까지 간을 보듯 살짝살짝 치대기만 하던 그가 푹, 길게 올려붙였다. 하으으……. 목구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온 무언가를 꾹 삼켜 내며 내 이마에 키스했다.

“네가 예뻐서 죽을 것 같아.”

우리는 마주 보고 끌어안은 자세로 반 바퀴 굴렀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위에 올라타 목덜미에 뺨을 기대고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그가 내 엉덩이를 움켜쥐어 자신의 성기 위에 놓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체중을 실어 몸을 내렸다. 쑤욱……. 젖은 속살이 단번에 꿰뚫렸다.

그는 삽입하고도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내 골반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채 살짝살짝 돌렸다. 꼿꼿이 곤두선 성기가 내벽을 마구잡이로 휘저었다. 배 안의 상상조차 못 했던 부분이 들쑥날쑥 쑤셔졌다.

“그렇게 쥐어짜면 좆질을 어떻게 해.”

나는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문지르며 자지러졌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엉덩이에 보조개 생겼네. 너 꽉꽉 조일 때마다, 자꾸, 여기에…….”

그가 손을 뻗어 내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쾌감으로 손바닥과 발바닥이 뜨거워지고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이러다간 가랑이를 맞대고 비비적거린 것만으로도 가 버릴 것 같았다.

“아…… 안 돼.”

“쌀 것 같아?”

“싫어…… 안, 돼에, 아읏!”

벌써 이렇게 쉽게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발끝으로 그의 종아리를 죽 긁어 내리고 무릎을 세웠다 펴며 꼼지락거렸다. 어떻게든 사정을 참아 보려는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쾌감은 너무도 빨리 차올랐다.

“흐으응…… 으, 흑! 하아.”

그의 것을 물고 있는 내벽에서부터 쾌감이 터져 나왔다. 나는 형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바르르 떨었다. 우리의 배 사이에 낀 내 성기가 정액을 울컥울컥 토해 냈다. 사정이 끝나고, 바짝 굳어 있던 몸에 힘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잘했다는 듯 내 뺨을 쓸어 주고 가볍게 키스했다.

“힘들어? 그만할까?”

나는 어지럽고 몸이 축축 늘어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고개를 저었다.

“형은 아직이잖아.”

“너 힘들면 그만해. 이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아냐, 더 할래. 형 생일인데.”

형이 땀에 젖은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너 짊어지고 헐레벌떡 응급실 달려가면, 와. 퍽이나 인상 깊은 생일이겠다. 너무 인상 깊고 좆같아서 평생 못 잊을 거야.”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웬일로 다정하게 말해 주나 했더니. 심지어 그가 한 말이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나만 잔뜩 가 버린 채로 끝내긴 싫었다.

“그래도.”

“또 나 배려하느라 그러는 거야? 이렇게 골골거리면서 배려는 뭔 배려. 됐으니까 쉬어. 쓸데없이 착해 빠져선.”

“그래도, 응? 조금만 더.”

“정호현. 말 안 듣지.”

“나 더 하고 싶어요. 형이랑 계속 섹스할래요. 네?”

아슬아슬한 침묵 끝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얼굴만 믿고 예쁘게 보채면 다 되는 줄 알지? 하여간 넌…… 자기 귀여운 걸 너무 잘 알아.”

“아니, 네?”

“엎드려서 구멍 벌려 봐.”

나는 그의 몸 위에서 비칠비칠 내려와 엎드렸다. 형이 그때까지도 입고 있던 검은색 티셔츠를 휙 벗어던지더니 내 엉덩이를 벌렸다. 온갖 체액으로 미끈거리는 골 사이에 흉흉한 성기가 끼워졌다.

“힘들거나 아프면 말해. 또 혼자 끅끅거리면서 울고만 있지 말고.”

“내가 언제…….”

“아까 기억 안 나? 하도 숨넘어가게 울어서, 난 또 눈물로 국자 가득 채우려는 줄 알았잖아.”

형이 엄지로 내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붓고 짓무른 살갗이 쓸리자 조금 따가웠다. 눈가에 정신이 팔린 사이 뒤에서부터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 언제든 그만둬도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형도 내심 욕구불만이긴 했는지, 위에서부터 박아 넣는 움직임이 점점 강해졌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기꺼웠다. 폭설처럼 쏟아지는 애정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맞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 옆을 짚은 형의 팔을 끌어다가 품에 꼭 안았다. 조각을 하는 사람답게 손과 팔뚝 곳곳에 굳은살과 자잘한 생채기가 보였다. 그리고 악몽 같던 그해 크리스마스의 흔적이 낙서처럼 그어져 있다. 많이 나아져서 이젠 목덜미나 팔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외출해도 시선을 받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지만, 아직도 나는 이 흉터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욱신거린다. 그의 아래에 깔려 흔들리는 와중에도 팔의 흉터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하…….”

형이 헛숨을 삼켰다.

“우리 현이는, 씨발. 나 더 꼴리라고 일부러 이러는 건지…….”

잠깐 멎었던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까보다 좀 더 거친 형태로. 그가 한 번 내려찍을 때마다 몸속 어딘가가 얼얼했다. 나는 헐떡이며 그의 다리에 내 종아리를 얽어 당겼다. 구멍이 멋대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게 느껴져서 수치스러웠다. 형이 내 목덜미와 어깨 사이의 여린 살에 입술을 묻은 채 뒤에서부터 손을 뻗어 앞을 만져 주었다.

나는 형의 아래에 깔려 엉덩이만 들어 올린 어정쩡한 자세로 흔들렸다. 엉덩이를 뒤로 빼면 삽입이 깊어지고, 앞으로 당기면 그의 손에 성기를 비비는 꼴이 되어 난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지점을, 퍼억! 세게 찔렸다. 찰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형의 손에 잡힌 성기에서 물이 질금질금 흐르고 있었다.

“하으, 아, 잠깐, 형, 그만, 아, 응!”

그는 멈춰 주기는커녕 더욱 속도를 높였다. 내 목덜미에 파묻힌 그의 우뚝한 콧날, 그 아래 잇새로 짐승 같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를 끌어안은 팔뚝에 한껏 핏줄이 섰다.

퍽! 내벽을 죄다 긁어 놓으며 물러났던 성기가 다시 같은 곳에 틀어박혔다. 도를 넘은 자극이 무서워서 몸을 확 웅크렸다. 쾌감을 피하려는 발악이었으나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각도가 바뀌면서 철썩, 철썩, 철썩, 제일 민감한 곳이 정통으로 연거푸 짓이겨졌다.

“아, 읏, 거기 하지 마아!”

“으응. 그래, 그래.”

“너무 빨라…….”

“안 빨라.”

“쉬, 쉬는 시간은?”

“그딴 게 어딨어. 네가 더 하자며.”

그의 팔뚝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래에서 자꾸만 꼼지락거리는 내 손이 성가셨는지,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찍어 누르듯 깍지를 끼고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성기 뿌리 안쪽이 시큰거리듯 뜨거워졌다. 그가 내 배 안에 새파란 불을 지핀 것 같았다. 이미 몇 번이나 갔는데 또 밀려오는 쾌락이 무서웠다.

“형, 나 진짜, 안 돼요…… 못 참겠어, 흐으, 제발 그마안…….”

어정쩡하게 떠오른 엉덩이와 허벅지가 미친 듯이 떨렸다. 그는 나를 끝내 놔주지 않았다. 나를 온몸으로 덮어 누른 채 내벽을 으스러뜨려 버릴 기세로 치받아 왔다. 힘들어 죽을 것 같지만, 제발 그만해 달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어째서인지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의 깊고 무거운 애정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롯이 느껴져서일 것이다.

실금하듯 흘린 것들로 형의 손을 적시고 침대 시트에 웅덩이를 만든 끝에야 절정이 찾아왔다. 내 성기가 그의 손 안에서 꿈틀거렸다. 참을 겨를도 없이 정액이 멋대로 터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진저리를 쳤다.

“아, 아…….”

“또 나와? 위로는 눈물 흘리고 아래로는 좆물 싸고. 바쁘네, 현이.”

“나, 흐윽, 나 또…… 흐, 아, 아아!”

“괜찮아. 막 싸질러도 돼.”

사정하느라 절로 안에 힘이 들어갔다. 완만하게 부풀어 있던 회음이 수축하면서 성기가 도중에 꽈악 붙잡혔다.

“다 괜찮은데, 예쁜아. 이건, 좀 놔주고……. 내 좆 아예 다, 읏, 뽑아 먹으려고?”

아무리 엉덩이를 씰룩이고 안에 든 성기를 조였다 풀어 봐도 오르가슴은 도무지 끝나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서 눈물이 나왔다. 나는 사정하는 내내 그의 팔에 이마를 댄 채 도리질을 치며 울었다.

“하……. 미치겠네.”

형이 이를 빠득 갈며 허리에 힘을 주어 간신히 빼냈다. 오래도록 쏘아지던 정액 줄기가 겨우 잦아들 무렵 그가 내 뺨을 감싸 확 돌렸다. 온 얼굴이 눈물범벅인 데다 눈이 풀리고 입가로 타액이 질질 흐르는 모습을 들켜 버렸다.

흐물흐물해진 나를 잔뜩 놀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나를 집요하게 보기만 했다. 사납게 찌푸려진 눈썹과,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새까만 눈동자.

녹아 버린 내벽에 성기가 깊숙이 처박혔다가, 다음 순간 귀두까지 쭉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다시, 더 안 들어갈 때까지. 그의 단단한 치골이 엉덩이 살을 한껏 짓누를 때까지. 배꼽 바로 아래까지 틀어박힌 성기가 한 차례 꿈틀거리더니 정액을 왈칵 쏟아 부었다. 내벽이 죄다 흠뻑 젖어 들었다.

“헉, 하아…….”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땀이 밴 이마를 맞대 왔다. 격렬한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종일 나를 괴롭히던 열기보다도, 팬 위에서 끓던 기름보다도 더 뜨거운 무언가에……. 안온한 감정의 바다에 잠겨 있는 느낌이었다. 바깥에 몰아치는 칼바람은 어느새 잊혔다.

* * *

우리는 같은 잠옷을 나눠 입고 잠들었다. 한 벌짜리 위아래 세트로 된 잠옷의 상의를 내가, 하의를 형이 입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왜 굳이 불편하게 한 벌로 된 옷을 둘이서 나눠 입냐고 하겠지만……. 원래 형은 상의를, 나는 하의를 잘 안 입고 자는 타입이라 딱 맞았다.

사실 잠옷은 총 두 벌이다. 똑같은 디자인으로 하나는 검은색 바탕에 민트색 무늬, 하나는 민트색 바탕에 검은색 무늬. 백화점 의류 매장을 지나다 이걸 보자마자 형이 떠올랐다. 그가 틈만 나면 민트색 속옷 어쩌고 하며 날 놀려서인지도 모르겠다. 백화점에는 다른 용건으로 갔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손에는 곱게 포장한 커플 파자마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야심 차게 두 벌을 샀는데도 막상 내 몫의 민트색 잠옷은 잘 입지 않았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도 한번 불이 붙으면 밤새 형에게 잔뜩 괴롭힘 당해서, 결국엔 잠옷이 푹 젖어 못 입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아예 검은색 잠옷 하나를 위아래로 나눠 입는 게 습관이 되었다.

“으응…….”

섹스의 여운에 약 기운까지 겹쳐 죽은 듯 곯아떨어졌다가 새벽에 잠깐 깼다. 가장 먼저 내 허리에 감긴 묵직한 팔의 존재가 느껴졌다. 분명 널찍한 킹사이즈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들었는데, 어느새 형이 침대의 절반을 넘어도 한참 넘어와 있었다.

“…….”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새까만 앞머리가 넘어가서 이마가 드러난 것도 모른 채 가만히 잠든 얼굴이 몹시도 평온해 보였다. 사르르 내리깐 속눈썹도, 고요하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도. 혹여나 그가 깰세라 손끝으로 뺨을 살살 쓸어 보았다. 새삼스레 벅찬 애정이 피었다.

나는 꾸물꾸물 구석으로 물러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 침대가 형에게는 좁았던 모양이다. 괜히 팔을 밀어내거나 이리저리 뒤척여서 그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또 깨어났다. 사방은 여전히 캄캄했다. 형이 편히 잘 수 있도록 비켜 준 게 아까 같은데, 어느새 그는 다시 내게 바짝 붙어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광활하기 짝이 없는 빈 침대가 보였다. 족히 두세 명은 더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나는 공간이 모자라서 모로 누워야 했다.

“형?”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이듯 불러 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형은 넓은 데서 팔다리 마음껏 뻗고 자고 싶은가 보다. 그래, 그럼 비켜 줘야지 뭐. 하품을 하며 벽 쪽으로 몸을 더 붙였다.

그렇게 나는 다시 잠들었다. 피로와 잠에 절어 뭐가 이상한 건지도 몰랐다. 어쩐지 좀 숨이 막히고 답답한 것 같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침대 구석에 찌부러진 상태였다. 그리고 형은 자신 몫의 이불까지 내 온몸에 둘둘 감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덮지 않고. 나는 누에고치 꼴이 되어선 벽과 형 사이에 짓눌려 납작해지기 직전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기 전에 먹은 약 기운이 슬슬 떨어지나 보다. 일단은 일어나서 상비약을 더 먹어야겠다.

“영원이 형…….”

“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목소리가 낮게 잠기긴 했지만 졸린 기운은 없었다. 먼저 깼으면서, 내가 갑갑해하는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풀어 주지도 않고. 조금 서러워졌다.

“나 약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일어나도 될까요?”

“예쁜아.”

“네?”

“안 죽었지?”

그가 불쑥 물었다. 여전히 나를 감싼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내 시야에선 그의 턱선과 귀밖에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겨울 햇살이 그의 검은 머리칼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목덜미와 등에, 나를 끌어안은 팔에 쏟아졌다.

“안 죽었어요. 몰골이 좀 죽다 살아난 사람 같긴 하지만.”

“안 죽을 거지?”

“……나쁜 꿈 꿨어요?”

“아니, 그냥.”

“…….”

“그냥…….”

그는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말간 햇살 속을 떠도는 먼지마저 보일 정도로 고요한 아침.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어쩐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게 매일 밤 잠들어 아침에 깨어나고 외출하고 일을 하고 인파에 섞여 들었다. 이제는 좀비가 나오는 영화나 게임도 그저 오락거리로만 흘려 넘길 수 있다. 트라우마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현실과 악몽을 구분하지 못해 헛소리를 하는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이따금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심하게 아플 때. 그리고…… 매년 크리스마스 때.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은 이곳이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일이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연례행사처럼 코끝에 피비린내 섞인 겨울 냄새가 스친다.

형을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가 이불에 칭칭 감겨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만 쏙 내밀어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가져다 댔다.

“봐요, 저 멀쩡하게 살아 있어요.”

“안 멀쩡하잖아. 딱 봐도 병자 꼴인 게.”

“…….”

그가 재깍 받아쳤다. 나름대로 위로해 주려고 꺼낸 말인데. 반박할 수가 없어서 더 슬펐다.

“형 보고 싶었어요.”

“바로 옆에서 같이 잤는데도?”

“응.”

코앞에서 뚱하게 나를 응시하던 형이 피식 웃었다. 검은 삼백안, 가로로 길게 트인 눈매가 휘어졌다.

“나도 현이 보고 싶었어. 지난밤 동안.”

나도 마주 웃었다.

“생일 축하해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침대에서 뒹굴다가, 약을 먹으려면 뭐라도 배를 채워야 할 것 같아서 미적미적 일어났다. 도저히 못 먹을 꼴이 된 감바스는 형이 싹 치웠다. 지금쯤 음식물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겠지. 희생된 마늘과 새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간단하게 차린 음식들로 아침 식사를 하고 소파 아래에 앉았다. 어제 형이 폐지 덩어리인 줄 알았다던 케이크 상자를 냉장고에서 꺼내서, 소파 앞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미처 몰랐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상자가 뒤집어져서 위쪽 모서리부터 푹 패었다. 이런 말을 하자니 슬프기 짝이 없지만, 내가 봐도 솔직히 좀 폐지 같았다. 애써 의연한 척 포장을 열었다.

“…….”

“…….”

우리 둘은 잠시 말을 잃었다. 침묵 끝에 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다시 사 올까요?”

“됐어. 이제 와서 뭔.”

“지금이라도 나가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케이크 구하기 쉬운 줄 알아? 몸도 안 좋은 게, 코 빨개져서 훌쩍대면서 쪼르르 돌아다니기만 할 거지? 됐으니까 그냥 있어.”

“…….”

“그래, 이것도 나름대로 전위적이고 좋네. 혹시 어제 오다가 뭐, 행위 예술이라도 했어? 우리 현이는 그림은 더럽게 못 그리는데 뜻밖의 분야에 재능이 있나 봐.”

형의 신랄한 평이 마음을 푹푹 찔렀다. 나는 시무룩하게 일어섰다.

“형 의견은 잘 알았어요. 다시 사 올게요.”

그가 나를 확 끌어당겨 옆에 앉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먹자. 처먹어서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그는 케이크와 같이 들어 있던 플라스틱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크림이 덕지덕지 묻은 비닐 포장지를 대충 뜯어 나이프를 꺼내더니, 다짜고짜 케이크를 반으로 자르려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 잠깐만!”

황급히 형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막 케이크에 칼을 꽂으려던 자세 그대로 시선만 올려 나를 보았다. 다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초는 꽂아야 하지 않을까? 생일 케이크인데.”

“초? 여기에? 현아, 혹시 이것까지 행위 예술의 일부야?”

“왜 자꾸 놀려…….”

내가 정말 울고 싶어졌을 때쯤이 되어서야 형의 놀림이 멈추었다. 우리는 녹아내리다 만 얼음 같은 몰골의 케이크에 조심스레 초를 꽂았다. 그리고 라이터를 가져와 불을 붙였다. 담배를 끊은 지 꽤 된 지라, 라이터를 어디 넣어 놨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던 도중에 이상함을 감지했다. 원래도 균형이 위태위태한 상태였던 데다 촛불의 열기가 더해져 상단의 크림이 살짝 녹은 탓에, 딸기를 가득 얹은 새하얀 케이크가 스르르 쓰러지기 시작했다. 눈사태가 일어난 설산처럼.

“사랑하는 영원, 이, 형…… 으악!”

나는 케이크를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형조차도 이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이 조금 커졌다. 어떻게 손을 써 볼 겨를도 없이 케이크는 장렬하게 무너져 내렸다.

“…….”

“…….”

정적이 감돌았다. 우리는 꼼짝도 않고 굳어 눈앞의 참상을 바라보았다. 1년에 단 하루뿐인 날인데, 형의 생일이자 크리스마스 전날인데. 뭐라 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때였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멍하니 케이크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삐걱 옆을 보았다.

형이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휘어지고 입매가 보기 좋게 트였다. 그는 웃음기를 못 이겨 내게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그의 한쪽 팔이 자연스레 내 어깨에 툭 얹혔다. 유쾌한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 또한 어느새 그에게 감화되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어서 형에게 사과하고 케이크를 수습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채 웃고 또 웃었다. 하도 웃어서 배가 땅기고 눈시울에 물기가 맺힐 때까지.

결국 케이크는 형의 사정없는 칼질 끝에 몇 조각으로 분해되어 접시에 담겼다. 우리는 나란히 포크를 들었다. 형은 딸기부터 집어 먹고 나는 그나마 덜 단 빵 부분을 공략했다. 한 조각이 거의 사라졌을 무렵 말을 꺼냈다.

“영원이 형.”

“왜, 예쁜아.”

그는 다음 조각을 접시에 담으며 여상히 대답했다. 내게서 자연스레 고개를 돌린 채였다. 집 전체에 난방이 펑펑 돌아가고 있어서 그는 겨울인데도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소파 아랫부분에 느슨하게 기댄 등과 아무렇게나 뻗은 다리, 크림이 듬뿍 묻은 나이프로 케이크를 덜어 도자기 접시에 담는 손길.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광기 어린 흉흉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쩐지 조금 목이 탔다.

“나 또 선물 있어.”

“뭔데?”

이건 케이크를 주문하기 전부터, 토끼 귀와 꼬리를 사기 한참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틈날 때마다 습관처럼 형에게 무언가를 사다 안기기를 좋아하는 내가 아직 한 번도 그에게 선물한 적 없는 것.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슬그머니 꺼냈다. 케이크를 가져올 때 이것도 주머니에 몰래 넣어 왔다. 그는 접시에 케이크 조각을 담은 채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새까만 삼백안이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내 손에 들린 것을 주시했다.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속삭였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나랑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

“사랑해요.”

“…….”

“영원이 형, 사랑해.”

한 곳에 붙박여 있던 그의 시선이 내 손목을, 팔을, 목덜미를 타고 느리게 올라왔다. 눈이 마주쳤다. 기다렸다는 듯 화답하거나 나를 능글맞게 놀려 먹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작은 벨벳 케이스 위에 놓인 두 개의 반지 중 조금 더 큰 것을 집었다. 형의 손을 감싸 쥐고 잡아당기자 너무도 순순히 끌려왔다. 단단한 마디가 도드라지고 흉터가 남은 약지에 반지를 조심스레 끼워 넣었다. 혹여나 사이즈가 맞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맞았다. 몇 날 며칠 반지 사이즈 표를 보며 고민하고, 잠든 형의 손을 붙들고 끙끙대며 몰래 사이즈를 잰 보람이 있었다.

내가 반지를 끼워 준 뒤에도 그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홀린 듯 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내 것도 끼워 달라고 재촉하는 대신 고요히 웃어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입술을 몇 번 달싹인 끝에, 마침내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낮게 가라앉아서 꽉 메인 음성이었다.

“나도, 호현아. 나도…… 사랑해.”

그는 케이스에 남아 있던 또 하나의 반지를 가져왔다. 크고 길쭉길쭉한 손에 쥐어진 반지가 몹시도 작아 보였다. 나는 내 왼손 약지가 그에게 붙들려 반지가 끼워지는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몹시도 기분이 이상했다.

백일대 캠퍼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우리. 아직은 어리고 서툴렀으며 갑작스러운 사태에 넋이 나가 있던, 혹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을 헤매느라 잔뜩 날이 서 있던, 3년 전 이맘때의 정호현과 기영원.

그 무렵의 우리는 상상이나 했을까. 훗날에 우리가 이렇게 될 거라고. 만약 지금의 우리가 그때의 우리에게 미래를 귀띔해 줄 수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말해 준다 한들 믿기나 할까. 믿지 않겠지. 그때는 당장 코앞에 닥친 아포칼립스로부터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했으니까.

“메리 크리스마스, 정호현.”

형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속삭였다. 아직 크리스마스까지는 하루가 남았지만 뭐 어떤가. 나도 그를 따라 조금 더 환하게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창밖은 마냥 맑았다. 눈이 내릴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겨울 하늘 아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가볍게 흔들렸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아무래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닐 모양이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가 함께 맞이할 크리스마스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있을 테니까. 어떤 해에는 눈이 내리고, 어떤 해에는 내리지 않고, 어떤 해에는 케이크가 멀쩡하고, 어떤 해에는 망가지고……. 그렇게 각기 다른 형태의 수많은 크리스마스를 보낼 것이다. 서로의 곁에서, 조금씩 낫고 있는 상처를 보듬으면서.

〈끝〉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