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스노 글로브(IF 메리 배드 엔딩) (11/12)
  • 새하얀 눈이 쌓인 한겨울의 산. 숨이 막힐 듯 거센 칼바람이 쉴 새 없이 불었다. 이미 퍼석하게 부르터 있던 살갗이 시큰거렸다.

    사방이 너무도 고요했다. 죽어 가는 짐승처럼 헐떡이는 내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정강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걸었다. 천근만근 같은 팔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나아갈 때마다 끔찍한 통증으로 무릎이 푹푹 꺾였다.

    겨울의 산은 고요한 외관과 달리 몹시도 혹독했다. 그 흔한 등산로조차 없어 사방에 비쩍 마른 덩굴과 나무줄기가 가득했다. 나는 숱하게 발이 걸려 휘청대다가, 결국에는 거의 네 발로 엉금엉금 기었다.

    내가 부축하고 있는 선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시시각각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선배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져 있는 탓에, 내게는 피가 묻은 목덜미와 흑발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선배, 조금만요. 조금만 더…….”

    종아리에 총을 맞은 데다 나보다 큰 남자까지 짊어지고 가려니 죽도록 힘들었다. 신경을 할퀴는 통증이 점차 무뎌지다가, 곧 한쪽 다리가 무릎 아래로는 아예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그를 지탱한 팔을 추슬렀다. 나는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면서 한 다리로만 절뚝이며 걸었다.

    피를 흘린 만큼 급격히 추워졌다. 나는 덜덜 떨며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내가 선배를 데리고 눈 속을 나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한참 전에 쓰러져서는 눈밭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방향도 제대로 모른 채 무작정 산 아래로, 조금이라도 지대가 낮은 쪽을 향해 걸었다. 찰나 같기도 하고 억겁 같기도 한 시간이 흘렀다. 눈앞이 완전히 흐려지기 직전에 그나마 좀 평평한 공터를 발견했다.

    공터를 보는 순간 힘이 탁 풀렸다. 나는 지금도 한계를 한참 넘은 상태였다. 더 이상 나아가는 건 무리였다. 당장이라도 공터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싶었다. 다시는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해도.

    “아, 아냐. 아니야……. 나는 안 죽어. 살아서 나갈 거야. 살, 아서.”

    아까부터 수없이 속으로 되뇌고 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입을 달싹일 때마다 칼바람에 부르트고 바위에 부딪쳐 찢어지기까지 한 입술이 욱신거렸다. 한쪽 뺨은 커다란 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부어올랐다. 하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 우리 잠깐만, 쉬었다 가요. 여기서…….”

    눈이 폭신하게 쌓인 공터 한가운데까지 선배를 데려갔다. 잠깐 쉬면서 선배의 상처를 다시 지혈하고 나도 정신을 좀 차릴 생각이었다. 옆구리의 총상을 점검하려 그를 눈밭에 눕히는 순간…… 그의 고개가 힘없이 툭 꺾였다.

    “선배……. 선배?”

    선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인상을 쓰거나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마치, 마치 꼭…….

    “선배, 정신 좀 차려 봐요.”

    선배가 왜 이러지? 아까 정문 앞의 울타리를 넘을 때까지만 해도 의식이 있었는데. 통증에 괴로워할지언정 나랑 몇 마디나마 말도 했는데. 아……. 그래. 내가 선배의 옆구리에 패딩을 너무 꽉 동여매서, 갑갑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 얼른 풀어 줘야지.

    나는 그의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나는 손을 미친 사람처럼 떨면서 선배의 허리에 맨 패딩 소매를 풀어 헤쳤다. 그 간단한 동작을 곧바로 못 해서 몇 번이고 헛손질을 했다.

    “……아.”

    피투성이 패딩으로 체온을 잃기 쉬운 목과 심장, 머리 부분을 감싸 주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손을 뻗어서 선배의 상처를 틀어막았다. 패딩으로 어설프게 지혈해 놓는 것보단 훨씬 나을 터였다. 하지만 선배의 상처는 너무 심했다. 너덜너덜해진 손마디 사이로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넘쳐흘렀다. 소복이 쌓인 눈밭 위에 시뻘건 웅덩이가 번져 갔다.

    “선…… 배.”

    떨림이 점점 더 심해졌다. 눈앞이 고장 난 형광등처럼 깜빡였다.

    “정신 좀 차려 보라니까요……. 제발.”

    그 순간 아주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개를 퍼뜩 들었다. 선배의 눈이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가늘게 뜨여 있었다. 버려진 마네킹처럼 고개를 옆으로 꺾은 자세 그대로.

    “정신 들어요? 괜찮아요?”

    “현…… 아.”

    “네, 네. 선배, 저 호현이예요.”

    “나…….”

    그는 혈색을 완전히 잃어 새파래진 입술을 아주 작게 달싹였다. 체온이 너무 많이 떨어져서 입김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흩날리는 눈발이 그에게 닿지 않도록 몸으로 막으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불현듯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 잊어버리지 마.”

    그의 새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피에 젖고 추위에 얼어 만신창이가 된 몸 중에서 오로지 이 부분만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빛이 사라진 검은 눈동자에 느리게 물기가 차올랐다.

    “여기서……. 나가, 더라도.”

    나는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상체를 바짝 낮추었다. 그는 남은 기운을 짜내어 눈을 한 번, 아주 힘겹게 깜빡였다. 긴 눈매에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잊…… 리지…… 마…….”

    그의 말끝이 희미하게 사그라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탁하게 흐려져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 선배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차디찬 공기와 함께 시간마저 얼어붙었다. 이젠 추위도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에 선배와 나, 단둘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말하기를, 적어도 눈이라도 깜빡이기를 기다리면서. 하지만 한참 지켜보아도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선배의 상처를 누르고 있던 손을 옮겨 가슴을 짚었다. 피가 흐르는 입술을 씹으며 한참 동안 맥박을 느끼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그의 심장은 미동도 없었다.

    “아니죠?”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음이 목에까지 끼었는지, 한 음절을 입 밖으로 낼 때마다 숨이 막혔다.

    “아니야. 선배, 아니죠?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어떻게 선배를 두고 혼자 나가요. 선배가 어떻게 여기서……. 이건 아니잖아요…….”

    절망을 피하려 발악하던 뇌가 헛된 망상을 만들어 냈다. 나는 이미 선배와 살아남아 학교를 탈출했고, 지금 이 순간은 그냥 악몽 속이 아닐까. 따스한 봄날에 선배를 기다리며 소파에 늘어져서 잠깐 졸다가 꾼 악몽.

    아주 잠깐 그런 희망을 품었다가, 나는 곧 낙담했다. 손에 묻어나는 차가운 피가, 조금씩 온기를 잃고 굳어 가는 선배의 몸이 지나치게 사실적이었다.

    “……아.”

    심장이 저 끝까지 쿵 내려앉았다. 굵어지는 눈발이 어깨와 머리에 쌓이고, 손발이 파랗게 얼어 동상의 전조를 보일 때까지 꼼짝도 않고 선배를 지켜본 끝에……. 나는 결국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죽었다. 눈 내리는 숲에 나를 홀로 남겨 두고.

    “우리 살아서 같이 나가기로 약속했잖아요.”

    어느덧 입 주변의 감각까지 사라졌다. 내가 실제로 소리 내어 말하고 있는 건지, 머릿속으로만 되뇌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장면을 목격했다. 조금 전까지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심장이 멎어 고깃덩이가 되는 일도 숱하게 겪었다. 그래도 선배와 한 약속들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를 살리려 수많은 죽음을 반복했던 선배가, 결국은 내 앞에서 결말을 맞이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드디어 다 끝이라고 후련한 듯 중얼거리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말 이대로 끝이라고? 나만 산 사람들의 세상에 남겨 두고, 선배는 영원한 크리스마스에 갇혀서 죽어 버릴 거라고?

    “전, 선배 두고 혼자서는……. 못 나가요.”

    선배가 자신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으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곳이 게임 속도 영화 속도 아니며, 내가 스위치를 눌러 쉽게 리셋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지독하게 절망스러웠다고.

    “말했죠. 한 사람만 사는 결말은 없다고요.”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스위치를 누를 것이다. 이 잔인한 세계를 리셋하기 위해서. 선배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주변을 둘러보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기능을 거의 상실한 몸이 말을 듣지 않은 탓에, 나는 곧바로 풀썩 엎어졌다. 눈밭을 기어 근처에 있는 나무 밑동을 붙잡았다. 험한 산자락을 맨몸으로 헤매서인지 추위 때문인지, 내 손은 손톱이 몇 개 빠지고 없었다. 끔찍한 모습이 된 손끝을 나무줄기에 박아 넣고 억지로 몸을 세웠다.

    저 멀리서 검은 형체가 움직였다. 눈앞이 자꾸 가물가물해져서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다. 감염자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던 군인들일까.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나는 메마른 나무에 쓰러지듯 기대어 그쪽을 보았다.

    형체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의 정체는 총을 든 젊은 군인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에 이등병 계급장. 그는 나보다 두세 살쯤 어려 보였다.

    “꼼짝 마!”

    군인이 내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며 외쳤다. 철컥. 소총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하…….”

    위협과 공포를 느껴야 마땅한 상황인데 웃음이 나왔다. 내가 저 군인에게 죽으면 선배는 크리스마스로 돌아갈 테니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서, 나이되 내가 아닌 나와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우, 움직이면 즉각 발포하겠다!”

    오히려 군인이 내 몰골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만도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로 칠갑을 한 사람이 넋이 나간 채 웃고 있으니.

    “쏴.”

    “허억!”

    “빨리…… 윽, 쏘라고.”

    나는 선배가 말한 회귀의 메커니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시간을 너무 끌었다간 선배는 다시 살아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극한에까지 몰린 사고의 폭이 좁아졌다.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뭐 해요, 안 쏘고!”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군인은 크게 움찔할 뿐 방아쇠를 바로 당기지 않았다. 총을 든 손이 내게까지 보일 정도로 떨렸다.

    “사……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가 말을 더듬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그의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 멀리서 또 하나,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의 이등병은 어설프긴 했지만 어쨌거나 훈련을 받은 티가 났다. 산길을 수색할 때 상체를 살짝 낮추고 언제라도 사격이 가능한 자세로 걸어왔다. 하지만 새로 나타난 형체는 아니었다. 사지가 줄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임이 엉망이었다.

    “끄으……. 끅, 으윽.”

    적막한 숲속에 소름 끼치는 목울음이 퍼졌다. 짓무르고 으스러진 다리를 질질 끌면서 감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해야 군인의 등 뒤로 몇 걸음쯤 떨어진 거리였다.

    “즈, 즉각 발포하겠다!”

    정면의 내게만 정신이 팔려서, 군인은 뒤에서 다가오는 감염자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방아쇠에 검지를 걸고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캬아악!”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군인이 몸을 뻣뻣이 굳힌 채 고개만 돌려 어깨 너머를 보았다. 제게로 달려드는 죽은 이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눈이 두꺼운 안경알 너머에서 경악으로 한껏 커졌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입을 쩍 벌린 감염자가 군복 옷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으아아아악!”

    군인이 발악하듯 당긴 방아쇠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 그 순간 끔찍한 충격이 나를 덮쳤다. 누군가 무거운 쇠막대로 명치를 확 찔러 떠민 것 같았다.

    “윽…….”

    나는 휘청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다. 내 가슴에서부터 시뻘건 피가 터져 나오는 광경이 너무도 느리게 보였다. 간신히 체중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는 가슴께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시야에 눈 내리는 산의 광경이 담겼다. 선배는 여전히 눈을 맞으며 누워 있었다. 군인은 감염자와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뒹굴며 산 채로 온몸이 뜯어 먹히는 중이었다.

    뻣뻣이 굳은 고개를 돌렸다. 선배의 얼굴은 여전히 옆을 향해 있었다. 살짝 뜨인 눈을 감지도 못한 채. 그의 창백한 뺨에 내린 눈이 녹지도 않고 눈꽃 모양 그대로 쌓였다. 시시각각 힘이 빠지는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서, 선……. 배.”

    말해 주고 싶었다. 같이 살아 나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다음번’엔 꼭 성공하라고. 하지만 폐에 구멍이 뚫린 건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꺽꺽대는 가냘픈 숨소리만이 목구멍 틈새로 샐 뿐.

    이윽고 페이드아웃되는 영화처럼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 * *

    “헉!”

    튕겨지듯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식은땀에 푹 젖어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내 가슴팍을 더듬었다. 척척하게 젖은 티셔츠가 살에 들러붙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총에 맞은 흔적도, 피도, 눈과 흙먼지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평온한 실내,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 기숙사의 내 방이었다.

    “…….”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과제를 하던 책상 위는 참고 서적과 프린트로 엉망이었다. 노트북은 전원을 끄는 것도 잊고 한참 방치해 놨더니 자동으로 절전 모드로 전환되었다. 난방이 펑펑 돌아가고 있는 보일러 패널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한겨울치고는 실내 온도가 몹시도 훈훈했다. 살을 에는 추위에 익숙해진 탓에 지금의 따뜻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홀린 듯 일어섰다. 엉망으로 구겨진 이불이 침대 아래로 툭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발로 내디딘 방바닥 역시 따끈따끈했다.

    충전기에 연결되어 배터리가 100퍼센트까지 충전된 휴대폰이 보였다. 누구 거지?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휴대폰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폰을 쓴 건 중앙도서관 1층에서 도망칠 때였다.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로 학생증 QR코드를 띄우고, 그걸로 게이트를 열어 감염자들을 내보냈다. 그러고는 선배와 함께 건물 밖으로 무작정 달렸다.

    그때 나는 다리를 칼에 찔려 피를 심하게 흘리는 상태였다. 게다가 뒤에서는 온갖 흉기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수백 명의 감염자와 함께 몰려왔다. 워낙에 절박한 상황이었던지라 휴대폰을 어쨌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중앙도서관에서 도망쳐 70주년 기념관으로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전체에 전기가 나갔다. 어차피 찾을 수도 없고, 찾아 봤자 충전할 방도가 없었기에 곧 잊어버렸다.

    오랜만에 보는 휴대폰이 너무 낯설었다. 나는 주춤주춤 다가가 휴대폰을 앞뒤로 살폈다. 깨진 흔적도 핏자국도 없이 멀쩡했다. 전원 버튼을 눌러 보았다. 짧은 로딩 끝에 휴대폰이 켜졌다. 우르르 쏟아지는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 알림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날짜부터 살폈다. 화면에 뜬 오늘 날짜는……. 12월 25일.

    “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

    나는 휴대폰을 든 채 굳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단번에 밀물처럼 쏟아져 뇌가 정지해 버렸다.

    피로 물든 캠퍼스. 죽었다 되살아나는 사람들. 쌓이는 시체만큼이나 끊임없이 내려 쌓이는 흰 눈. 정문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 그리고……. 심장을 꿰뚫는 총탄의 감각.

    선배가 말했다. 그는 내가 죽을 때마다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돌아간다고. 그의 목을 가로지른 커다란 흉터가 생각났다. 몸 곳곳에 처참히 그어진 다른 흉터들도. 그의 숨이 멎는 순간까지도 그 흉터는 지워지지 않았다. 낙인처럼 남아 차가워진 선배의 목을 조였다.

    나는 잠옷으로 입고 있던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배와 옆구리의 살이 보였다. 이 정도로는 모자랐다. 나는 확인해야 했다. 지금 당장, 내 눈으로 똑똑히.

    티셔츠 자락을 올리다가 아예 머리 위로 빼내어 확 벗어던졌다. 어느새 나는 손을 조금 떨고 있었다. 마침내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숨을 들이켰다.

    “…….”

    내 가슴에, 명치에서 살짝 왼쪽으로 기울어진 위치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어딘가에 긁힌 생채기 따위도 아니고, 실과 바늘로 꿰맨 수술 흔적도 아니었다. 적나라한 총상이었다. 총탄이 틀어박힌 곳의 살이 뚫리고 찢겨져 나간 자국.

    총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지만 통증 또한 전혀 없었다. 생긴 지 꽤 오래된 흉터처럼 오돌토돌한 요철이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세차게 날아온 총탄이 갈비뼈를 뚫고 심장에 처박히는 감각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때의 기억을 계속 되새기고 있다간 미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미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가슴께를 더듬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정수리에서부터 뒷덜미, 등줄기, 손과 발의 혈관을 타고 차가운 물줄기가 흘렀다. 비로소 현실이 내게 찾아들었다.

    나는 죽어서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지난 죽음의 기억을 가진 채로.

    그럼 선배는? 내가 깨어났으니 지금쯤 선배도 돌아왔을 텐데.

    〈나, 잊어버리지 마.〉

    마지막 순간에 그가 힘겹게 속삭인 말이 떠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발치에 걸레짝처럼 내던진 옷 대신 다른 옷을 급하게 입었다. 보송보송하게 세탁해서 섬유 유연제 향을 풍기는 옷이 몹시도 생경했다. 이마를 축축하게 적신 식은땀은 미처 닦지 못했다.

    방문을 열었다. 방 안과 대조되는 복도의 싸늘한 공기가 확 밀려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피비린내는 아직 나지 않았다. 나는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시고 달려 나갔다.

    * * *

    나는 그를 복도 한가운데에서 처음 만났다. 감염자에게 쫓겨 허둥지둥 도망치던 와중이었다. 몇 층, 어느 쪽 복도였는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기에는 그간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가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기숙사를 헤집고 다녔다. 복도와 계단을 수없이 지났다. 이따금 썩은 내를 풍기며 열린 방문 틈으로 기어 나오는 것들은 무시했다. 처음의 나와는 다르게.

    인적 없는 서늘한 복도를 얼마나 뛰어다녔을까. 마침내 저 멀리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 복도 한복판에 쓰러진 캐리어, 그리고 검은 형체. 너무도 오랜 시간을 함께한 탓에 이제는 실루엣 끄트머리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쿵. 심장이 세게 뛰었다. 까맣게 좁아진 시야에 그밖에 보이지 않았다.

    “헉, 하아, 하아…….”

    가쁜 숨을 고르며 그에게로 터벅터벅 다가갔다. 복도에 내 발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지난번에 그는 쓰러진 캐리어 위에 자연스레 걸터앉아 있었다. 주변 환경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도 태연한 태도라, 그때의 나는 허겁지겁 도망치던 와중에도 위화감을 느꼈다. 저 사람은 대체 이 상황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때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었다 되살아나 자신을 만나러 올, 그러나 자신을 알지 못하는 크리스마스의 정호현을.

    쿵. 쿵. 쿵. 빨라지는 심장 박동과 함께 엄지손톱만 하게 보이던 검은 형체가 조금씩 커졌다. 선배는 내게서 비스듬히 등을 돌린 각도로 앉아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

    선배, 그렇게 부르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캐리어가 아닌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손에는 도끼는커녕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캐리어에서 쏟아진 생필품들이 그의 주변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상태였다.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아무렇게나 앉아서,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그나마 실낱처럼 남아 있던 희망과 생기가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그야말로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구해 주겠다던 건 다 거짓말이었어? 그렇게 절절하게 약속해 놓고, 또 뒈져서 다 까먹을 거야? 나를 또 지옥에 처박겠다고? 나더러 처음부터 다시 그…… 그 좆같은 짓을 하라고? 아니……. 아니야. 이건 아니야. 호현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응? 안 죽겠다고 했잖아! 대답해. 대답하라고!〉

    처절하게 악을 쓰는 선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너는, 죽으면 안 돼. 여기 있는 사람 다 뒈져도, 헉……. 너는 살아야 해.〉

    끊임없이 피가 솟는 상처를 움켜쥔 채, 핏발 선 눈으로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했던 말 또한.

    의식이 흐려지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넓은 캠퍼스를 가로질러 간신히 정문까지 도달했는데, 수많은 회귀를 거치는 동안 꼭꼭 숨겼던 비밀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는데. 탈출을 코앞에 둔 채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크리스마스로 돌아온 자신을 인지한 순간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의 입으로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완전히 텅 비어 버린 그의 눈동자만으로도 지나치게 충분했다.

    쿵……. 크게 내려앉은 심장이 가슴 안을 바윗돌처럼 짓눌렀다. 숨을 쉴 수 없어졌다.

    “……선배.”

    갈라진 음성으로 속삭이며 한 발짝 내디뎠다. 선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못 들은 것일까, 아니면 환청으로 치부한 것일까.

    지금에야 깨달았다. 나는 마라톤을 막 완주한 사람처럼 온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관자놀이와 턱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처음에 내가 선배를 미친 사람 보듯 했던 것처럼, 지금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영락없이 미친놈인 줄 알 것이다.

    “안녕, 선배.”

    목에 힘을 주고 좀 더 또렷이 말했다. 망가진 인형처럼 멍하니 있던 그의 턱이 움찔했다. 그가 내 목소리를 들었음을 확신했다. 가슴 속의 쿵쿵거림이 더욱 거세어졌다. 심장이 발악하듯 피를 뿜어 전신의 혈관을 채웠다. 죽음의 기억을 만회하려는 듯이.

    “저…… 안 잊어버렸어요. 선배가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하나도 안 잊고…… 다시 만나러 왔어요.”

    그의 고개가 느리게 삐걱삐걱 움직였다. 새까만 눈동자에 형광등 빛이 흐리게 반사되었다. 어쩐지 목이 메었다.

    “이 말, 나가고 나서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지금 반드시 말해야 했다. 내가 또 죽게 되면, 다음번엔 이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좋아해요.”

    선배는 내 말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새하얗게 일어나고 곳곳에 피가 맺힌 그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너무도 낡고 녹이 슬어서, 간단한 명령을 받아들이는 데도 한참 걸리는 기계 같았다.

    “…….”

    이내 그의 눈동자에 여러 종류의 감정이 퍼져 나갔다. 경악, 불신, 그리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차오르는 환희.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잠깐 생기를 되찾았던 눈이 살의로 일그러졌다.

    “아니야…….”

    그는 한 손을 들어 발작적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입매와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파르르 떨리고 목에도 핏대가 섰다.

    “아니라고.”

    선배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조금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는 입속말로 낮게 중얼거리며 내게로 한 발짝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호현은 죽었어. 아무것도 기억 못 해. 지금은 크리스마스고, 난 다시 처음으로……. 그런데 왜? 왜, 왜?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저게 정호현일 리가…….”

    “저 호현이 맞아요. 선배가 아는 그 정호현이요.”

    “닥쳐!”

    그가 악다문 잇새로 윽박질렀다. 고작 그것만으로 숨이 거칠어졌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흰자가 잔뜩 충혈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선배.”

    “씨발, 또 환각이…….”

    그가 큰 보폭으로 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에 멱살이, 아니, 목이 잡혔다. 악에 받친 우악스러운 손길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쿵! 선배와 나는 한 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다. 바닥에 부딪친 뒤통수와 등, 어깨가 욱신거렸다.

    “컥, 흐윽!”

    그는 내 목을 움켜쥔 채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창백한 인공의 빛이 그의 등 뒤에서부터 쏟아졌다. 얼굴에 온통 그림자가 진 가운데 이성을 잃고 번들거리는 검은 눈동자만이 보였다.

    “정호현은 죽었어. 죽어서 날 다시…… 빌어먹을 크리스마스로 보냈다고. 넌 진짜 정호현이 아니야.”

    그가 다시금 중얼거렸다. 내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 같았다.

    “저, 호현, 맞…….”

    “닥치라고 했지.”

    목덜미를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전혀 쉬어지지 않았다. 뺨이 달아오르고 귀가 먹먹해졌다. 선배가 입매를 비틀며 픽 웃었다.

    “하, 씨발. 이젠 제법 진짜 같네? 이 좆같은 시스템에도 업데이트란 게 있나?”

    나는 힘겹게 손을 뻗어 내 목을 감싼 선배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힘을 주느라 잔뜩 도드라진 손등의 뼈대와 굵직한 핏줄이 만져졌다.

    눈앞에 빨갛고 파란 얼룩이 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끝의 감각에만 의존하여 조금씩 움직였다. 검은 외투를 입은 팔뚝을 지나 몸통으로 옮겨 갔다. 내 기억 속, 그가 총상을 입었던 옆구리까지.

    그의 옆구리는 겉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옷 아래 맨살에 남아 있을 것이다. 지난 죽음의 처참한 흔적이.

    “…….”

    선배가 눈에 띄게 흠칫했다. 한순간 그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 틈을 타 입을 열었다.

    “아…… 팠죠.”

    선배는 매번 이런 고통과 절망을 겪었던 것일까. 횟수를 기억하는 것만 스무 번이고, 그 뒤로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반복하면서.

    “선배, 많이 아팠죠. 다친 곳…….”

    “…….”

    “선배가 마지막까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너무 아파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도 최대한 노력한다고 했는데. 제가 모자라서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

    “미안, 해요, 흐으, 같이 나가자는 약속, 못 지켜서…….”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는 눈매가 젖어 들었다. 선배를 다시 만나게 되면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북받치는 울음을 참기에도 벅찼다. 나는 선배의 아래에 깔려 목을 잡힌 채 끅끅대며 소리 없이 울었다. 이내 그 움직임조차 조금씩 희미해졌다.

    “내, 가…….”

    숨통을 조르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려 나갔다. 바닥에서 약간 떠 있던 내 머리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내 상체를 끌어올려 꽉 껴안았다. 맞닿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내 뺨을 감싼 채 온 얼굴에 얼룩진 눈물을 엄지로 닦아 내고 또 닦아 냈다.

    “호, 현아. 현아? 후배님. 정신 차려.”

    “…….”

    “가짜인 줄 알았어. 그냥, 환각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어. 매번 그랬어서 지금도 그런 줄 알…… 아니야, 미안해. 내가, 그냥, 미안, 아, 안 돼. 또 죽으면 안 돼, 응? 미안해. 정신 좀 차려 봐, 현아…….”

    “좋아해요.”

    “…….”

    “좋아해요……. 사과 말고, 선배요. 저, 선배 좋아해요.”

    생기 없이 차가워져 가던 선배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고작 한 번만으로 이렇게 끔찍한데,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 나를 수도 없이 보았을 선배는 더욱 괴로울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어 선배의 품에 무작정 매달렸다. 피에 흠뻑 젖지도 싸늘하게 굳어 버리지도 않은 몸을 끌어안고 울면서 좋아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으…… 흑, 흐윽.”

    결국 그에게서도 짐승 같은 흐느낌이 터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파고들며 나를 마주 안았다. 지금 놓치면 결코 다시 되찾을 수 없을 것처럼. 서로 다른 박자로 쿵쿵 뛰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맞춰졌다. 가쁜 숨소리와 뺨을 적시는 눈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죽은 자와 죽었다 되살아난 자만이 가득한 복도에 유일하게 두 명, 산 사람이 있었다.

    * * *

    우리는 탈출을 포기했다.

    애초에 탈출은 불가능했다. 선배는 수많은 회귀를 거치며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루트로 한 번씩 가 보았고, 바로 직전 삶의 선배와 나는 정문 밖까지 갔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었다. 정문 밖에 군인들이 총을 든 채 대기하고 있을 줄이야. 희망을 품고 선택한 길이 가장 큰 절망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커 보였던 정문이 그 모양이니 다른 루트는 안 봐도 뻔했다. 정문보다 난이도가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선배가 겪은 지난번들과 달리 이번에는 나도 기억을 가진 채 돌아왔다. 총을 맞았던 가슴에도 흉터가 남았다. ‘선배가 회귀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후에 죽는다’가 조건이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내가 또 죽으면 다음번에도 기억을 가지고 되살아날지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아니라면, 선배는 완전히 리셋되어 버린 세계에서,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나와 전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형벌이 있을까.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또 탈출을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곧바로 기숙사를 떠나기로 했다. 기숙사는 처음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 학생들이 많이 몰려 있던 장소 중 하나였다. 감염자 밭이 되어 버린 식당은 물론이고, 편의점도 일찌감치 싹 털려서 건질 게 없었다. 여기 머물러 봤자 물밖에 없는 샤워실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이나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몇 없는 물자를 두고 다른 사람들과 다투거나.

    중앙도서관도 그냥 패스했다. 지난번엔 거기서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났던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내겐 그런 것보다 선배와 둘이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다.

    감염자 수가 적고 학생들이 잘 찾아오지 않으며 그나마 물자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곳. 그 조건에 들어맞는 장소는 한 곳뿐이었다. 70주년 기념관.

    우리는 겨울옷을 단단히 껴입고 각자의 기숙사 방에서 물건들을 최대한 챙겼다. 그리고 손을 잡은 채 캠퍼스를 걸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기 전이라 빙판길을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이따금 길에 돌아다니는 감염자들이 보일 때면 근처 건물에 잠깐 몸을 숨겼다. 하지만 다른 생존자와 교류하거나 한 건물에서 몇 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면 이렇게 침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방에서 어슬렁거리는 시체들을 보고 패닉에 빠져 아무것도 못 했겠지. 애초에 기숙사를 떠난다는 선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선배도, 그리고 어느 정도는 나도 안다. 어느 건물이 위험한지, 어느 루트로 가야 그나마 감염자를 덜 마주치는지, 언제쯤 눈이 오기 시작하고 언제쯤 전기와 수도가 끊기는지.

    우리는 순탄히 70주년 기념관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 나는 부상자 신세였다. 바깥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건물 안에도 항상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선배도 나도 신경이 한계까지 곤두서 있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매 순간이 폭풍전야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전기와 수도가 들어오고 난방 시설이 멀쩡히 작동할 시점이었다. 두 번째로 온 70주년 기념관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멀끔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제외하면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대학교 내부 같았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1층 사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저번에도 머물렀던 곳이었다.

    자리를 잡고 가장 먼저 우리가 한 일은 지하실을 막는 것이었다. 자전거를 묶어 둘 때 쓰는 자물쇠가 달린 와이어를 찾아와 지하실 문손잡이에 칭칭 감았다. 여기서 일하던 하재민 과장이 갑자기 지하실에 내려가 배전반 스위치를 내려 버리는 바람에 선배가 위험에 처했던 적이 있다. 이번에도 그가 그렇게 행동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을 대비해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다.

    그다음으로는 위층에서 쓸 만한 물자를 죄다 챙긴 후 계단을 봉쇄했다. 철제 캐비닛을 겹겹이 쌓고 그 안에 온갖 무거운 잡동사니를 꽉 채워 두었다. 지난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어차피 위층에 올라가 봤자 거기 있는 감염자들을 완전히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더군다나 위층에 있는 시설이라고는 회의실이나 행사용 홀 같은 곳들뿐이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길을 열어 둘 이유가 없었다.

    하재민 과장이 원래 어디 있었다고 했더라? 지하실이었나, 위층 어딘가였나.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결국 죽을 사람인데.

    물자가 지난번에 비해 확연히 풍족해졌다. 위층을 봉쇄하기 전에 회의실들을 닥치는 대로 뒤졌고, 하재민이 열쇠를 꺼냈던 기억을 되살려 잠긴 캐비닛을 열어 접대용 다과까지 확보했다. 거기다 찾아낸 것들을 다른 사람과 나누거나 빼앗길 일조차 없었다.

    탈출을 포기하자 매일매일이 평온했다. 지난 삶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아등바등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우리는 모아 둔 식량과 바리케이드로 막아 둔 문을 점검하고 굳게 걸어 잠근 창문 너머로 삭풍이 불어 닥치는 바깥 풍경을 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목적도 희망도 없이.

    달칵. 나는 스위치를 눌러 작은 라디오를 켰다. 이 라디오는 건전지를 넣어 작동하는 것으로, 며칠 전 사무실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는 걸 찾아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라디오든 TV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대에 이런 구형 라디오 따윈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보다 반가울 수 없었다.

    전파가 잡히지 않으니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그 대신 처음 찾았을 때부터 안에 들어 있던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했다. 드르륵 테이프 감기는 소리가 나더니,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크기의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래된 노래였다. 나와 선배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서정적인 반주 위에 기교 없이 정직한 목소리가 얹혔다. 그것만으로도 적막한 사무실의 공기가 조금 풀렸다.

    “선배, 여기요.”

    벽에 기대어 앉은 선배의 손에 딸기 맛 사탕을 떨어뜨려 주었다. 그가 픽 웃으며 사탕을 받았다. 큼직한 손바닥 위에 놓인 동그란 사탕 한 알이 몹시도 작아 보였다.

    “후식이야?”

    “네. 입가심하시라고요.”

    “난 사탕 말고 네 혀 빨고 싶은데.”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툭 던졌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음담패설은 언제 들어도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표정이 하도 덤덤해서 진심인지 농담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아니, 그……. 갑자기요?”

    “핑크색인 게 똑같잖아.”

    “전혀 다른데요.”

    “뭐가?”

    “제 혀보단 사탕이 훨씬 맛있지 않을까요? 단맛도 나고 딸기 향도 나잖아요.”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역시 그렇죠?”

    “그럼 이렇게 하자.”

    선배는 한 손으로 사탕을 쥔 채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확 감아 당겼다. 그의 앞에 서 있던 나는 졸지에 비틀거리며 그에게로 끌려갔다.

    “둘 다 한 번씩 빨아 보고 정할게. 어때? 괜찮지?”

    “잠깐, 잠깐만요. 선배!”

    그의 위로 완전히 자빠지기 직전에 간신히 벽을 짚고 버텼다. 막 내 뺨을 감싸며 입을 맞추려다가 제지당한 그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왜. 싫어?”

    “싫다기보단…….”

    “후식으로 네 젖꼭지 빨아먹겠다고 하면 기겁할까 봐 혀만 얘기한 건데. 그것도 안 돼? 존나 각박하네, 후배님.”

    “그게 아니라, 선배 팔에 상처 있잖아요.”

    “뭐?”

    “제가 잘못 건드려서 덧나면 어떡해요. 아파 죽을 것 같다고 하셔서 제가 밴드까지 붙여 드렸는데.”

    급하게 떠올린 핑계를 주워섬겼다. 하지만 선배의 표정은 묘했다. 잔뜩 삐진 척을 하며 나를 놓아주거나, 듣는 둥 마는 둥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줄 알았는데.

    “정호현.”

    “네?”

    뭔가 이상했다. 나는 그의 팔에 허리를 붙들린 채, 완전히 주저앉은 것도 일어선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멈췄다. 그는 내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한참이나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내 팔에 상처 같은 거 없어.”

    “…….”

    “그 상처는 저번이야. 이번이 아니라.”

    그가 옷소매를 걷어 맨팔을 보여 주었다. 한때 내가 붙여 준 캐릭터 밴드가 있던 자리가 말끔했다. 대신 흉터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다친 것처럼 가늘고 흐린 흉터가.

    선배의 말이 맞았다. 나는 저번과 이번을 헷갈리고 말았다. 위층을 탐색하느라 상처를 입은 선배의 팔에 밴드를 붙였던 것도,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피웠던 것도 모두 저번이었다.

    고작 두 번째인데도 기억에 혼선이 생긴단 말인가. 스스로가 한심했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해 한참 멍하니 있다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네요……. 죄송해요.”

    한 마디쯤은 타박을 들을 줄 알았는데 선배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어쩐지 착잡해 보였다. 아니, 단순히 착잡함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좀 더 씁쓸하고 참담한 감정이었다. 그는 나를 응시하던 시선을 내리며 이를 갈았다.

    “……씨발.”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선배가 한발 빨랐다. 그가 거친 손길로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위에 주저앉혔다. 거리가 갑자기 확 가까워졌다. 아슬아슬하게 이마끼리 부딪치지 않았다.

    “그딴 표정 짓지 마.”

    “제 표정이 어떤데요?”

    “내가 모를 것 같아? 좆같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네?”

    “우리 후배님은 또 뭐가 그렇게 좆같은 건데? 나랑 같이 크리스마스로 돌아온 거? 탈출 포기한 거? 아, 둘 다인가?”

    우리는 무료하리만치 평온한 매일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선배도 나도 이유 없이 날카로워지는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물자를 산더미처럼 쌓아 둔 안락한 요새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도, 가끔은 걷잡을 수 없이 숨이 막혔다. 우리 둘이 합의 하에 탈출을 포기하기로 했으면서, 이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음을 둘 모두 뼈저리게 느꼈으면서…….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우린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 봤는데. 정문으로 가 봤자 탈출 따윈 불가능하다는 걸 죽음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웠는데.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하란 말이야.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빳빳이 세웠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네. 오해예요.”

    “하……. 정호현. 너는 내가 아주, 병신으로 보이지?”

    “…….”

    무슨 대답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선배에게서 빠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한순간 그의 눈에 위험한 빛이 스쳤다.

    그는 내 멱살을 틀어쥐어 확 끌어당겼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목이 졸렸다. 콧잔등이 스칠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그가 씹어 뱉듯 읊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덕이니 희망이니 입바른 소리만 하던 새끼가, 다 죽은 눈으로 멍하게 보기만 하는데…… 내가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

    “제가 후회하는 건 하나예요.”

    선배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집요하게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내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선배가 수없이 크리스마스를 반복하는 동안 한 번도 선배와 함께해 주지 못했던 것.”

    바스락. 선배의 손아귀에서 사탕 포장지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

    그는 조용히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환희와 절망이 공존하는 몹시도 모순적인 표정이었다. 그는 뭐라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틀어 다가왔다. 두 입술이 성마르게 맞물렸다.

    * * *

    낡은 라디오는 오래된 노래들을 연이어 재생했다. 노래 사이사이에 가끔씩 달칵거리며 테이프 헛도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그 소리들을 배경음 삼아 사무실 바닥에서 뒹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서로를 옭아매듯 움켜쥐었다. 서로의 허벅지 사이에 허벅지를 끼워 넣고, 바지를 벗지도 않은 채 옷 위로 하체를 맞붙였다. 불룩한 앞섶이 저들끼리 비벼지고 문질러지며 크기를 키웠다. 마찰을 거듭하며 몸이 점차 달아올랐다.

    “정호현. 고개 들어.”

    투박한 손길이 턱을 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다시금 잡아먹히듯 키스당했다. 흠뻑 젖어서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선배가 파고들었다. 거친 숨결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딸기 맛 사탕의 잔향마저 오싹했다.

    코끝이 엇갈리고 짐승 같은 숨소리가 엉키는 가운데 그의 눈이 번득였다. 항상 음울하고 날카롭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날것의 욕망으로 넘실거렸다. 단순히 욕망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내게 발정하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눈을 가진 감염자들이 가득한 무채색의 세상에서, 그만이 나의 유일한 현실이었다.

    서로의 등과 허리를 부둥켜안고 서로에게 닿지 않으면 당장 죽을 것처럼 하체를 비벼 댄 탓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잔뜩 발기했다. 바지가 갑갑할 지경이었다. 선배가 자신의 허리에 어설프게 감겨 있던 내 손을 확 끌어다 앞섶에 놓았다.

    “만져 줘.”

    “아…….”

    “내 좆 지금 터질 것 같으니까, 좀 주물러 달라고. 그 예쁜 손으로. 쌀 때까지 해도 돼.”

    선배가 거친 숨을 고르며 내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손이 싫어? 그럼 발로 밟아 볼래? 그것도 좋을 것 같아. 넌 발끝도 핑크색이잖아. 우리 호현이는 어떻게 된 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꼴리는 데가 없어.”

    귓가에 나직이 흘려 넣는 음담패설에 어질어질해졌다. 선배가 내 발을 움켜잡고 자신의 가랑이에 끌어다 놓기 전에 황급히 손을 놀렸다. 선배는 정말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내가 서툴게 그의 바지 단추를 열고 지퍼를 내리는 동안 그는 한 손으로 내 엉덩이를 주무르며 목덜미에 고개를 박고 여린 살을 잘근거렸다.

    “예쁜아…….”

    “네.”

    “죽지 마.”

    “안 죽을게요.”

    열린 앞섶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더듬었다. 묵직하게 발기한 기둥이 잡혔다. 이제껏 이런 걸 어떻게 바지 안에 욱여넣고 있었나 싶다. 검은 속옷이 팽팽해져서 귀두 윤곽까지 다 보였다. 불뚝 솟아올라 얼룩이 진 부분을 엄지로 문질렀다. 성기가 내게까지 느껴질 만큼 강하게 꿈틀거리더니 크기를 좀 더 키웠다. 여기서 더 커질 수 있다니. 새삼 놀라웠다.

    “선배도 죽지 마세요.”

    “또 죽으면?”

    “저도 또 죽을 거예요. 몇 번이든 선배 만나러 돌아갈 거예요.”

    “그럼 다른 놈들은?”

    “네?”

    “우리 후배님은 맨날 다른 놈들까지 살리겠다고 지랄하잖아. 저번에도 그랬지.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은 모르고.”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 떡 주무르듯 주무르던 선배의 손에 한순간 힘이 들어갔다. 엉덩이가 터질 것 같이 아팠다. 하지만 아프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통증과 함께 쾌감이 피었다.

    “……몰라요.”

    나는 생지옥이 된 캠퍼스에서 선배 외에도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배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선배가 혼자 악착같이 견뎌 온 시간들을, 그의 비밀을 알아 버린 이상 그럴 순 없었다.

    중앙도서관에서 만난 여학생 두 명. 그리고 본관에서 문을 열어 준 타 학교 체대 남학생. 공대 교수님, 대학원생, 이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교직원…….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스쳐지나갔다. 잊고 있는 무언가를 상기시키듯 가슴 한구석이 둔하게 시큰거렸다.

    “그래, 현아.”

    선배의 목소리가 상념을 갈랐다. 선배는 내 손을 더 깊숙이 밀어 넣어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하며 허리를 은근한 박자로 쳐올렸다. 그 아래 깔린 내 것 또한 흥분해서 쿠퍼액을 울컥 쏟았다.

    “몰라도 돼. 아무것도.”

    나는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젖혔다. 보온 목적으로 사무실 바닥에 깔아 두었던 서류 더미에 머리칼이 문질러졌다. 가슴을 쿡쿡 찌르던 아픔이 어느덧 쾌감에 밀려 사라졌다.

    선배는 서툰 애무를 받으며 내 옷을 벗겼다. 손가락과 손바닥의 굳은살이 맨살에 스치는 감각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티셔츠를 가슴께까지 끌어 올려놓고, 선배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내 가슴에 난 흉터에 닿아 있었다.

    “봐도 봐도 좆같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지난번의 내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가슴의 흉터를 볼 때마다 살기등등하게 이를 갈았다. 그의 몸에는 이것보다 심한 흉터가 몇 개나 더 있을 텐데도.

    “그 이등병인지 뭔지 하는 놈, 그때 확실히 죽은 거 맞지?”

    “그게 중요해요? 어쨌든 지금은 다시 살아났을 텐데.”

    “왜. 지금이라도 나가서 다시 대가리 따고 올까?”

    “아니, 선배. 어쨌든 사람이잖아요. 감염된 것도 아니고.”

    “어쩌라고. 너한테 상처 낸 새끼는 감염자만도 못해. 이 예쁜 몸 어디에 총알 박아 넣을 데가 있다고. 딴 걸 박으면 박았지.”

    “…….”

    “그 새끼랑 또 뭐 했어? 으응? 몸 부대낀 건 아니지?”

    “아무것도, 안…… 하윽!”

    그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다짜고짜 젖꼭지를 덥석 물고 빨아들이는 바람에 내 가슴도 압력의 방향을 따라 튀어 올랐다.

    “아, 앗, 으응…….”

    그는 쭙쭙 소리가 나도록 가슴을 빨며 다른 쪽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굴리고 튕겼다. 그의 입 속에 물린 살점이 뜨겁게 젖어 들었다.

    선배는 기어이 유두를 양쪽 다 빨갛고 통통하게 만들어 놓은 뒤에야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혀를 내어 총탄이 틀어박혔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가슴팍을 길게 핥았다. 흉터는 다른 곳보다 감각이 조금 더 예민했다. 아슬아슬하고 도착적인 쾌감이 피었다. 왜 선배가 자신의 목에 난 흉터를 물어뜯어 달라고 종용했었는지 이제는 좀 알 것도 같다.

    민감한 살갗이 핥아지는 감각에 정신이 팔려 선배가 내 발목을 당기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한 박자 늦게 눈을 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지 자락 아래 희멀겋게 드러난 맨 발목이 큼직한 손에 틀어잡혀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발을 자신의 성기에 가져갔다.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불그스름한 성기에 발끝이 닿았다. 발등에 대고 귀두를 비비적거리자 말끔한 살갗에 액이 묻어났다. 뜨뜻하고 미끌거리고, 말할 수 없이 간지러웠다. 발바닥을 중심으로 야릇한 열기가 피었다.

    “선배!”

    “왜요, 후배님.”

    나는 기겁하며 몸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선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발목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그 와중에도 그의 성기는 내 발에 꾹꾹 눌리고 문질러지며 더욱 빳빳해졌다.

    “헉! 그, 그만, 뭐 하시는…….”

    “자지 만져 달랬는데 안 만져 줬잖아.”

    “그건…….”

    “아냐, 신경 쓰지 마. 그냥 내가 알아서 네 발 갖고 딸 칠게.”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아까까지도 아주 정신을 못 차리던데? 젖꼭지 빨리는 게 그렇게 좋았어?”

    “으악!”

    나는 몸을 움츠리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뒤에는 벽이, 앞에는 선배가 있어 도망갈 곳이 없었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선배가 멋대로 벌리지 못하도록 다리를 꼭 모으고 옆으로 돌아누워 버렸다. 발끝에도 한껏 힘을 주어 옹송그렸다. 선배가 빠득 이를 갈았다.

    “정호현. 이리 안 와?”

    “잠깐만요, 이상한 것 같…… 읏,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손으로 만지는 것도 싫고 발도 싫고, 씨발. 이젠 왜, 내 좆에 닿기도 싫은가 봐? 나랑 붙어먹는 게 그렇게 끔찍해?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하라니까?”

    “그런 게 아니라…….”

    아까 옷이 죄다 벗겨진 탓에 나는 속옷 한 장만 간신히 입고 있었다. 그것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산뜻한 민트색 드로어즈였다. 선배의 눈이 내 속옷을, 훤히 드러난 맨다리를, 그 아래 투명한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맨발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볼 만한 구석도 없을 텐데, 어째서인지 그의 눈이 흥분으로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하…….”

    선배가 수직으로 올라붙은 제 성기 밑동을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으로 내 무릎을 꽉 눌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음 순간……. 퍽! 무릎 뒤쪽, 여린 살과 살이 맞붙은 틈에 성기가 쑤셔 박혔다.

    “…….”

    상상조차 못 한 도착적인 행위에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벙긋거렸다. 성기를 반쯤 빼낸 선배가 다시 퍽, 찔러 넣었다. 오금에 굵직한 것이 쑥쑥 드나들었다. 타인의 신체가, 그것도 성기가 처박힐 거라 생각지도 못한 부위에 가해지는 자극이 아찔했다.

    “벌려. 온 다리에 좆물 처바르고 싶은 거 아니면.”

    단단히 힘을 주고 있던 다리에 절로 힘이 풀렸다. 선배는 내가 유일하게 걸치고 있던 드로어즈를 찢듯 벗겨 냈다. 내 벗은 몸을 홀린 듯 내려다보던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너 또 죽으면……. 이번엔 정말로,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죽으면 죽이겠다니, 그게 무슨 이상한 말이에요. 그렇게 받아치려 했다. 싱거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선배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검지와 중지가 내 입에 물렸다. 나는 가쁘게 헐떡이며 그것들이 성기라도 되는 것처럼 빨았다. 곧 흠뻑 젖은 손가락이 빠져나가더니 아래에 닿았다.

    닫힌 입구를 함부로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간신히 한 마디쯤 물렸다.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선배는 손가락을 살짝 빼냈다가 반 바퀴쯤 돌려 다시 푹 찔러 넣었다. 그의 긴 손가락에 새겨진 작은 흉터 하나하나가 요철이 되어 내벽을 긁는 것 같았다. 고작 손가락 두 개일 뿐인데 아래가 빠듯했다. 나는 안을 쑤셔지는 내내 다리를 어설프게 벌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에 따라 판판한 뱃가죽이 움찔거렸다.

    그는 길이 덜 든 구멍을 몇 번 성급하게 쑤시고 곧바로 성기를 맞붙였다. 나는 뒤쪽의 벽에 등을 최대한 붙였다. 선배가 싫다거나 이 행위가 거북해서가 아니었다. 굵직한 핏줄에 휘감긴 저것이 도저히 들어갈 것 같지 않아서였다.

    간을 보듯 성기를 엉덩이 골에 대고 몇 번 문지르다가, 기어이 미끈한 귀두가 구멍 위에 턱 눌렸다. 그의 입매와 턱이 단단히 굳어졌다. 그리고 이내, 잔인할 만큼 느리게…….

    “아……. 아, 으, 흐읏.”

    벽과 선배 사이에 끼어 거의 몸이 반쯤 접히다시피 해 있던 탓에, 내 시야에서는 성기가 삽입되는 광경이 너무도 잘 보였다. 숨이 막히고 등줄기가 선득해졌다. 촘촘히 다물려 있던 입구의 주름이 펴지고, 속살이 성기를 환영하듯 찰싹 들러붙고, 내장이 떠밀려 늘어나는 감각이 낱낱이 느껴졌다. 귀를 기울이자 찌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따금 창밖을 뒤흔드는 겨울바람 소리와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옛날 노래와 성기가 구멍에 처박히는 소리. 부조화도 이런 부조화가 없다.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안을 덜 풀어 줘서인지, 다 넣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안에서부터 턱 막혔다. 더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꽉 조여든 내벽을 귀두가 짓눌렀다. 통증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응, 아, 선배, 아파요.”

    “힘 좀 풀어. 안 그래도 좁아 터지겠는데…….”

    선배 또한 불편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간신히 절반 정도 박힌 성기가 꿈틀거렸다. 그에 맞춰 뱃가죽이 미미하게 들썩였다. 배 안에 거대한 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아…….”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아랫배를 지그시 눌러 보았다. 내벽이 눌리면서 어디가 잘못 건드려졌는지 배 안 전체가 찌릿했다. 선배에게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정, 호현, 너…… 진짜.”

    선배가 험악한 숨을 눌러 참으며 내 허벅지 뒤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성기가 체중을 싣고 안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악!”

    통로가 아닌 생살을 억지로 찢어서 뚫으려 하면 이 정도로 아플까. 나는 선배의 아래에 깔려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훌쩍였다.

    “더는 안 돼요. 저 죽어요.”

    “엄살은. 좆만 먹이면 맨날 죽는다고 울지.”

    “진짜, 죽어요, 하으, 선배에…….”

    “만져 주는 대로 발딱발딱 세우질 말든가, 좀 덜 예쁘기나 하든가.”

    그는 짜증을 내면서도 무작정 밀어붙이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반만 넣은 채로 슬쩍슬쩍 쳐올리기 시작했다. 왕복 운동이라기보다는 진동에 가까운 둔한 자극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았다. 그가 한번 툭 치받을 때마다 성기를 감싼 속살이 통째로 일렁였다.

    “아직 반밖에 안 넣었는데 왜 벌써 숨이 넘어가. 핑크색 구멍은 죄다 빨갛게 물들어 가지고, 응? 현아. 한 번 박을 때마다 네 구멍 오물거리면서 더 빨개지는 거 알아? 딸기 맛 사탕은 내가 먹었는데 네가 딸기색이 되면 어떡해.”

    상스럽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음담패설이 쏟아졌다. 그럴 정신만 있었다면 진작 귀를 틀어막았을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하필 아까 선배가 자지를 비비던 발이었다. 발그스름하게 물든 발가락 사이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늘어졌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쾌감이 빠르게 차올랐다. 나는 어느 순간부턴가 선배의 박자에 맞춰 엉덩이를 미미하게나마 들썩이고 있었다. 더 이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던 안도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갈수록 목 뒤쪽이 화끈거리고 배 안이 웅웅 울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 헉, 흐윽, 아, 아!”

    나는 선배의 어깨에 매달려 끙끙 앓다가 고개를 휙 젖히며 사정했다. 그와 나 사이에 짓눌려 이리저리 꺼떡이던 성기에서 정액이 튀었다. 동시에 그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주 잠깐, 호흡조차 잊게 하는 정적이 흘렀다. 신경을 태우는 쾌락 속에서 언뜻 눈이 마주쳤다.

    내 안에 반쯤 박힌 기둥이 크게 꿈틀거렸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성기는 쉴 새 없이 불뚝거리며 정액을 한가득 토해 놓았다. 아직도 좀 뻑뻑한 감이 있던 내벽이 빠르게 젖어 들었다.

    이제 끝났나……. 턱 끝까지 숨이 차서 힘들었다. 이마와 목덜미는 땀에 젖고 하반신은 정액으로 미끈거렸지만 닦아 내야겠다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지쳤다. 뒷머리와 등을 짓누르는 벽의 차가움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가 픽 웃고 정액으로 범벅이 된 내 배를 살살 쓸어 주었다.

    “예쁜아, 그렇게 힘들어? 누가 보면 온종일 좆질만 한 줄 알겠네.”

    “하아, 하…….”

    “현아.”

    “…….”

    “있잖아, 현아.”

    “왜요…….”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내 몸을 만지작거리는 선배의 손길이 묘하게 성가셨다.

    “이제 끝까지 들어갈 것 같지 않아?”

    축 늘어져서 숨만 색색 몰아쉬다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

    “한번 보내서 몸도 야들야들하게 풀어 놨고, 안도 적셔 놨고. 다 박을 수 있겠는데?”

    “또, 또 한다고요?”

    “반밖에 못 넣고 깔짝거렸는데, 너도 구멍 근질거릴 거 아냐.”

    “선배, 저, 잠깐, 그만…….”

    그가 샐쭉하게 웃었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내 골반을 단단히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허겁지겁 손을 뻗어 선배의 팔뚝을 붙들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한 차례 잔뜩 싸질러 놓고도 크기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박혀 있던 성기가 살짝 뒤로 물러났다가. 질척이는 내벽을 가르며 그대로…….

    “읏, 아, 아아아!”

    저 안까지 틀어박혔다.

    “헉! 흐……. 흐윽.”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한순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선배의 팔뚝을 더듬더듬 움켜쥔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충격적인 광경이 보였다. 흉악할 정도로 굵은 자지가 엉덩이 사이에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번들대는 구멍이 빨갛게 달아올라선 주름 하나 없이 늘어났다. 찢어지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아랫배가 미미하지만 육안으로 보일 만큼 솟아올랐다.

    “선배, 그만, 빼 주세요. 저 죽을 거예요.”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선배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선배가 나를 추슬러 안으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으응, 안 죽어.”

    “진짜로, 죽을 것 같, 읏, 아아! 사, 살려 주…….”

    “안 죽는다니까. 내가 우리 현이를 왜 죽여. 네가 죽으려 해도 못 죽게 할 건데.”

    “무서워요…….”

    “그래, 그래, 예쁜아. 이제 다 들어갔어. 무서운 거 더 없어.”

    그가 나를 대충 토닥였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울면서 아래를 더듬거렸다. 툭 찌르면 터질 듯 팽팽히 당겨진 회음 아래, 아직 한두 마디쯤 남은 기둥 아래쪽이 만져졌다.

    “…….”

    이제 다 들어갔다면서. 거짓말. 배신감에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다 안 들어갔잖아. 왜, 왜 거짓말해요…….”

    나는 눈앞이 그렁그렁해진 채 칭얼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의 나는 상당히 꼴사나울 것 같았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선배는 그런 나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대체 뭐에 꼴린 건지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나를 일으켜 제 위에 앉혔다. 내 체중이 고스란히 실린 성기가 안을 푹 찔러 올리는 느낌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그의 것이 끈적한 내벽을 밀어젖히고 끝도 없이 들어왔다.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쩍, 쩍, 젖은 살끼리 부딪쳐 야한 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뭉근하게 들썩이던 움직임이 점점 더 커졌다. 배 안이 퍽 쳐올려질 때마다 온 세상이 덜컥거렸다.

    “아, 아, 아아!”

    자지러지며 휘떡 넘어가는 내 허리를 선배가 한 손으로 턱 받쳤다. 그 와중에도 밑에서 찍어 올리는 움직임은 갈수록 거세어졌다. 시야가 빨갛고 파랗고 노랗게 얼룩졌다.

    영문을 모른 채 무서워졌다. 이대로 계속 박히다간 영영 망가질 것 같았다. 구멍이 찢어져 버리거나 내벽이 뚫려선 안 될 곳까지 뚫릴지도 몰랐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선배의 허벅지를 짚었다.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몸에 힘을 주어 성기를 뽑아내고 일어서려는데…….

    “정호현, 또 어딜 가려고.”

    선배가 내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 세게 쥐었다. 접합부를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또 나만 혼자 두고…… 사라지려고?”

    그는 이를 악물고 내 골반을 힘껏 짓눌러 내려 앉혔다. 간신히 일어날 각오를 했던 몸에 도로 힘이 풀렸다.

    “으흑…… 아, 읏, 아아!”

    퍼억! 살 마찰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삽입이 너무 깊어서 절로 헛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믿을 수 없게도, 내 성기에서 투명한 물이 확 뿜어졌다.

    하필 요도 구멍이 위쪽을 향하고 있었던 탓에, 물은 선배의 가슴팍에 정통으로 흩뿌려졌다. 심지어는 그의 목덜미에 난 흉터에까지 몇 방울 튀었다. 내가 싼 것이 성기를 힘겹게 물고 있는 구멍 테두리에 둥글게 고였다가 뚝뚝 흐르는 느낌에 몹시도 수치스러워졌다.

    “…….”

    선배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적신 물방울을 느릿하게 훔쳐 냈다. 시선은 여전히 내게 향한 채였다. 그 동작으로 자잘한 흉터가 그어진 손등 또한 번들번들하게 젖었다.

    그는 지독한 절정에 몸부림치는 나를 붙들고 세차게 박아 넣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통에 성기 끄트머리가 전립선을 지나 한참 더 들어왔다. 찔려선 안 될 곳까지 무자비하게 찔렸다. 하지만 쾌락에 절어 버린 몸에는 그것마저 소름끼치게 좋았다. 벌어진 입에서 타액이 질질 흐르고 팔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파들파들 떨렸다.

    머릿속을 잠식한 쾌락 위로 눈 덮인 산의 광경이 어렴풋이 어른거렸다. 자꾸만 흘러나오는 피와, 점점 무뎌지는 통증과, 종아리까지 쌓인 눈의 감촉 또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선배에게 더욱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 끔찍한 기억을 모두 잊으려 애쓰듯.

    이윽고 그 또한 두 번째 사정을 시작했다. 배꼽까지 처박힌 성기가 꿀럭거리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참기 힘들었다. 나는 엉덩이를 이리저리 뒤틀며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결국 압력을 못 이긴 그의 성기가 빠졌다. 그 와중에도 사정은 계속되었다. 내벽을 죄다 긁으며 나오는 궤적을 따라 정액이 한 줄기로 뿌려졌다. 이제 완전히 잦아들었다 생각한 내 성기에서 도로 물이 찔끔 샜다.

    그는 정액의 절반을 내벽 안에, 그리고 남은 절반을 구멍에 귀두를 짓누른 채 쏟아냈다. 귀두가 꿈틀거릴 때마다 정액이 한 움큼씩 쏘아졌다. 그중 일부는 아직 덜 오므라들어 뻐끔거리는 구멍으로 역류했다.

    “하, 하아, 흑, 흐으…….”

    그의 사정이 끝난 뒤에야 막힌 숨통이 트였다. 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시체처럼 늘어져 헐떡였다. 겉은 물론이고 몸 안까지 온통 질척거렸다. 눈앞이 빠르게 가물가물해졌다.

    “읏…….”

    그때 젖은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잡아 비트는 감각에 정신이 들었다. 선배가 축 늘어진 내 몸을 고쳐 안으며 좆을 들이밀었다. 아랫도리 전체가 체액 범벅이 되어서 미끌거리는 탓에 그도 구멍을 벌리고 각도를 맞추느라 몇 번 헛손질을 했다. 구멍이고 내벽이고 한껏 녹진해져서 이제 아무 느낌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두툼한 귀두가 입구를 벌리자 욱신거렸다.

    “…….”

    그만하라고 하려 입을 열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쉭쉭 공기 새는 소리만 났다. 숱한 마찰로 부어오른 안에 다시금 성기가 꽂혀 들어왔다.

    “아……. 제발…….”

    내 가냘픈 애원은 너무도 쉽게 묵살당했다. 집요한 섹스가 다시 시작되었다.

    선배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내 등과 엉덩이를 받쳐 들고 빠르게 쳐올렸다. 그러다 자세가 성에 차지 않는지 나를 휙 뒤집어 뒤에서부터 다시 박았다. 나는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저항이고 뭐고 의식을 간당간당하게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머리와 달리 내 몸은 쾌감에 야속하리만치 정직하게 반응했다. 하도 많이 싸서 발갛게 달아오른 성기가 끝도 없이 또 일어섰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체액이 전신에 처발라졌다. 선배는 허리를 움직이는 중에도 정액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집요하게 내 뺨에 문질러 묻혔다. 영역 표시를 하듯.

    그렇게 시달리다 결국 까무룩 잠들었다. 꿈속에서도 나는 그와 섹스하고 있었다. 그런데 꿈이라기에는 묘하게 감각이 사실적이었다. 아무리 생생한 꿈이어도……. 내가 싸지른 분수와 정액이 뒤섞인 묽은 액이 사타구니를 타고 흐르는 느낌까지 나던가?

    뭔가 이상해서 결국 잠에서 깼다. 천근만근 같은 눈을 억지로 떠 보니, 세상에. 나는 정말로 박히고 있었다.

    “안녕, 후배님……. 깼어?”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누운 채로 허리를 잘게 쳐올리다가, 선배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캉하게 풀어져 있던 내벽이 갑자기 꽉 죄어드는 감각에 내가 깨어났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제발, 제발 그만 좀…….”

    울분을 담아 선배를 툭툭 쳐 보았다가, 자꾸 풀리는 눈매에 한껏 힘을 주고 성질도 내 보았다가, 결국엔 서러워져서 엉엉 울었다. 선배는 짓무른 내 눈가에 잔뜩 입을 맞추며 나를 토닥토닥 어르고 달랬다. 평소 그의 인성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의 다정함이었다. 하지만 감동적인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그러면서도 내내 행위를 멈추지 않았으니까. 이런 다정함은 필요 없으니 제발 자지부터 빼 줬으면 싶었다.

    몇 시간을 붙어먹었을까. 결국 선배도 잠에 빠졌다. 어디도 가지 못하도록 나를 양팔로 꽉 얽어맨 채였다. 깊숙이 박은 성기는 끝내 빼 주지 않아서, 나는 아랫배가 빠듯하게 부풀어 오른 불편함 속에서 눈을 붙여야만 했다.

    빠르게 가라앉는 의식 너머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까 재생해 두었던 카세트테이프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낡을 대로 낡은 라디오인데, 너무 오래 틀어 두었던 것일까. 기어이 소리가 조금씩 늘어졌다.

    나는 느리고 음울한 사랑 노래를 배경 음악 삼아 곯아떨어졌다. 등 뒤로 느껴지는 선배의 체온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 * *

    빈틈없이 내려 두었던 블라인드를 간만에 올리고 창문을 손가락 한 마디 너비만큼 살짝 열어 두었다. 밖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 얼어붙은 캠퍼스의 정경 너머 바로 옆 건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거세어졌다. 지난번에 우리를 몹시도 애먹였던 폭설의 시작이었다. 어차피 이번에 우린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을 테니 상관없지만.

    나는 사무실의 아무 데스크에나 걸터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오래도록 이어진 섹스에 시달리느라 전신이 노곤했다. 반나절 정도 흘렀나, 아니, 한나절인가. 모든 창문과 창을 꽁꽁 닫아걸고 실내에만 있다 보니 시간 감각이 흐려진다.

    “여기.”

    뒤에서 선배가 불쑥 다가오더니 내 어깨 위에 부드러운 것을 툭 덮었다. 사무실 의자 중 하나에 걸려 있던 무릎 담요였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데다가, 이름만 무릎 담요지 온몸을 덮고 자도 될 만큼 커서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같이 덮어요.”

    선배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성가신 듯 손을 휘저었다.

    “됐어.”

    “선배도 추우시잖아요.”

    “정호현, 또 같잖은 헛소리 주워섬기지.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덮고 있어. 말라 비틀어져서 엉덩이랑 뺨 말고는 만질 데도 없는 게, 또 비루먹은 병아리처럼 열 내면서 골골거리는 꼴 못 봐 주겠어.”

    “저 그렇게 마르진 않았…… 아니, 제가 언제 골골거렸어요?”

    “저번에.”

    “…….”

    “도서관에서 아파 죽겠다고 엉엉 울었잖아. 여기로 도망쳐 올 땐 칼빵까지 맞아서 정신 못 차렸지.”

    나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지난번의 이야기는 그에게도 나에게도 트라우마였다. 함께 살아서 나가자고 그렇게 굳게 약속해 놓고 결국은 실패했으니.

    “저 지금은 안 아파요.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담요 자락을 다시 벌려 틈을 만들어 보였다.

    “선배가 옆에 있어 주면 더 따뜻할 것 같아요.”

    나를 빤히 보던 선배가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서 예쁜 짓 하는 법만 배워 가지고.”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나는 담요로 그의 등과 어깨를 꼼꼼히 감쌌다. 결코 작은 체격이 아닌 우리 둘을 동시에 감싸느라 담요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위아래 온통 새까만 옷을 입은, 키 크고 사납게 생긴 남자의 몸을 감싼 극세사 담요라니. 담요는 파스텔 톤의 포슬포슬한 하늘색인 데다, 심지어 귀여운 캐릭터까지 그려져 있었다. 전혀 안 어울리는 듯 묘하게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그러고 나자 더 할 일이 없었다. 우리는 넋 나간 사람들처럼 멍하니 창밖에 내리는 눈만 보았다. 대화도 눈 맞춤도 없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휘날리는 눈발 외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단조로운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희끄무레한 눈 사이로 무언가 보였다. 사람의 형체 같았다. 한순간 그냥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감염자인가 했지만, 자세히 보니 역시 사람이었다. 감염자는 저렇게 절박하고 날렵하게 움직이지 않으니까.

    “역시 좀 쌀쌀하네.”

    선배가 흉터가 그어지고 핏줄이 불거진 손으로 흘러내리는 담요를 추스르며 중얼거렸다. 창문 너머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을 그 또한 알아챘을 텐데, 그의 눈은 여전히 음울한 권태에 젖어 있었다. 나도 별 감흥 없이 대꾸했다.

    “그러네요. 이제 창문 닫을까요? 바람 소리 너무 시끄럽죠? 눈도 들어올 것 같고.”

    “아니. 몇 분만 더 환기하고 닫자.”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시야에 라디오가 들어왔다. 어제 노래를 듣겠다고 틀어 뒀다가 선배와 한바탕 뒹구는 바람에 잊어버렸던 것이다. 카세트테이프가 끝까지 돌아간 시점에서 자동으로 재생이 멈춰 있었다.

    라디오를 가지러 가기도 귀찮아서 팔만 뻗어 옆을 대충 더듬었다. 손끝에 네모반듯한 전자기기의 감촉이 걸렸다.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달칵, 차르륵.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프가 거꾸로 돌아갔다. 다시 처음으로, 다시, 다시……. 나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기계음에 멍하니 귀를 기울였다.

    밖에 어른거리는 형체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심지어 형체는 한둘이 아니었다. 이 거센 눈발을 뚫고 여러 명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정강이까지 쌓인 눈을 필사적으로 헤치고, 이따금 눈밭에 넘어져 허우적거리기도 하면서. 그 뒤로 익숙한 감염자들의 모습이 따라붙었다.

    폭설로 시야가 제한된 탓에, 한참이 더 지난 후에야 사람들의 생김새가 어렴풋이 보였다. 학생들이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키 작은 여학생, 단발에 야구 잠바를 입은 여학생, 그리고 눈에 띄게 덩치가 큰 남학생. 어딘가 낯익은 인상이었다. 저 사람들, 어디서 만났더라…….

    “언니. 저 안에 사람 있어요!”

    “뭐?”

    “저기, 헉, 70주년 건물에, 사람…….”

    “저기요!”

    그들도 블라인드를 올려 훤히 드러난 창을 통해 우리를 발견했는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몰골은 세찬 눈발 속에서도 눈에 띄게 처참했다. 온몸이 피와 먼지로 얼룩덜룩한 데다 머리와 어깨에는 허옇게 눈이 쌓였다.

    “사람 살려요!”

    누군가 악을 썼다. 실내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쩌렁쩌렁하게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하지만 굳이 이 안락한 요새의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을 도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또 헛된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 내 앞에서 죽어 가는 선배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뼈아프게 실패하고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에, 영혼이 빠져나간 빈껍데기처럼 멍하니 복도에 주저앉아 있던 선배를…….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되감기 버튼 위에 얹고 있던 손을 옮겨, 재생 버튼을 눌렀다. 망설임은 없었다. 카세트테이프가 덜컥거리며 귀에 익은 노래를 흘려보냈다.

    “안 들리세요? 도와 달라고요!”

    “살려 주세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어느덧 사람들은 건물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들을 쫓아온 감염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못 보려 해도 못 볼 수 없는 거리까지 다가왔는데도 선배와 내가 미동조차 없자, 점차 그들의 눈에 절망이 번졌다.

    그들은 우리만 보고 맹목적으로 달려왔다. 퇴로를 확보하거나 대책을 궁리할 겨를 따윈 없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사냥감을 둘러싼 감염자들이 기쁘게 울부짖었다.

    “끄륵, 끄, 윽…….”

    “컥!”

    “아, 안 돼!”

    “아아악!”

    비명, 피, 뼈와 살을 찢는 소리. 모두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내겐 그저 거슬리는 소음에 불과했다. 나는 버튼을 눌러 노래 볼륨을 조금 높였다.

    선배가 창문을 도로 닫고 잠금장치를 단단히 채웠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바깥의 참혹한 소리들이 두꺼운 유리에 막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다시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가 담요 아래에서 내 손을 더듬어 찾았다. 나도 손끝을 꼼지락거려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는 내내 꼭 붙어 앉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하늘을 보았다. 이곳에 있는 한 우리는 안전했다. 모든 것이 엑스트라 내지는 특수 효과용 소품에 불과한 이곳, 흑백의 단조로운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주인공이었다.

    “…….”

    나는 선배를 무심코 돌아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도 나를 흘긋 보았다. 다 죽은 눈으로 멍하니 보기만 한다고, 선배가 내게 울분을 담아 말했었지.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선배 또한 눈동자에서 생기를 찾아볼 수 없다.

    폐쇄된 캠퍼스, 그 안에 갇히기를 자처한 우리, 이대로 세상이 끝난대도 상관없을 것처럼 끊임없이 내리는 눈. 마치 거대한 스노 글로브(Snow Globe) 안에 있는 것 같다.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지만, 영영 계절이 바뀌지 않는 단절된 세계. 아까 그 사람들도 결국은 스노 글로브 밖의 이물질에 지나지 않으리라.

    라디오는 지치지도 않고 같은 노래를 재생한다. 나는 그것을 한 귀로 들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우리는 이대로 영원히 크리스마스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우리만의 유리구슬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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