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영원. 생일 축하한다! 정성껏 말았으니까 쭉 들이켜.”
내 앞에 맥주잔이 내밀어졌다. 대체 뭘 얼마나 섞었는지 색이 뿌옇다 못해 거무죽죽했다. 아까 에너지 드링크랑 양주를 들이붓는 것까진 봤는데.
“치워. 처먹고 뒤지라고?”
잔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취기가 한껏 오른 놈들은 기세등등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에는 이쯤 하면 기에 눌려서 내뺐을 텐데, 오히려 더 불이 붙어서는 왁왁 고함을 질렀다.
“알지? 생일주는 원 샷!”
“이 정도면 양반이지. 영범이 생일 때 기억 나냐? 붓 씻은 물에 술 타서 마시라고 했던 거. 응급실 실려 갈까 봐 존나 조마조마했는데.”
“너 오늘 술 많이 안 마셨잖아. 이걸 위해 간 아껴 둔 거 다 알아, 인마.”
짜증이 확 치밀어 올라서 그 말을 한 놈을 노려보았다. 그는 찔끔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 고자질하듯 떠들어 댔다.
“이 새끼 여친 없는 건 다 성질이 더러워서 그래. 생긴 게 아깝다.”
“저번에 그 여자애 생각난다. 금속 조각 수업 끝나고 번호 따러 왔던 애. 기영원이 쳐다보기만 했는데 쫄아서 사과하고 갔잖아.”
“성인군자에 보살 아닌 이상 얘 감당 못 할걸. 저 새끼 말하는 거 듣고도 웃어넘길 정도는 돼야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야, 기영원. 혹시라도 그런 사람 만나면 등부터 확인해 봐. 등에 날개 달려 있는 거 아냐?”
당사자가 듣는 앞에서 겁도 없이 험담을 지껄여 대는 꼴이 같잖았다. 나는 생일주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느릿하게 덧그렸다. 정 못 들어 주겠다 싶으면 저 새끼들 면상에 잔을 꽂아 버릴 생각이었다.
“근데 영원아. 저번에 그, 슈퍼 카 끌고 너 데리러 왔던 누님은? 너 웬 재벌 사모님 만나는 거 아니냐고 소문 다 퍼졌는데.”
“그러니까! 야, 이참에 그 얘기 좀 들려주라. 궁금해 뒈지는 줄 알았다고.”
“이 새끼 언젠가 일 칠 줄 알았어. 그렇지. 기영원이 정상적으로 또래랑 풋풋하게 연애하는 건 아무래도 좀 말이 안 되지.”
“그 누님 대박이던데? 와, 존나 쭉쭉 빵빵.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쫙 빼입고. 난 또 무슨 여배우인 줄 알았잖아.”
놈들은 허공에 몸매 라인을 그려 가며 낄낄 웃어 댔다. 대가리에 든 것도 하는 행동도 하나같이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 꼴을 보다가 툭 던졌다.
“엄마야.”
“……어?”
“뭐?”
나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말했다.
“어머니라고. 이 씨발 새끼들아.”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차가운 침묵이 맴돌았다. 모두가 사색이 되어 입을 떡 벌리고 나를 보았다. 이제껏 마신 술이 다 깨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한참의 정적 끝에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려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음……. 어, 그게……. 미안. 진짜 미안.”
“어, 어머님께서……. 그러니까, 참…… 쭉쭉, 이, 아니라, 정정하시네…… 하하.”
“어머니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시고…… 너도 항상 효도하고…….”
내 인내심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나는 잔을 들어 앞에 있던 안주 그릇에 콸콸 부어 버렸다.
그 뒤로 분위기는 영 시들시들해졌다. 다들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말을 아꼈다. 그나마 있던 술맛까지 뚝 떨어졌다. 시간이 늦은 밤을 지나 새벽으로 갈 무렵, 동기의 연락을 받고 누군가 왔다. 낯선 남자였다. 피로에 찌든 낯에 후줄근한 옷차림, 도수 높은 안경까지 썼다.
“형, 오셨어요? 오늘 밤새 논문 쓰신다면서요. 빨리 끝나셨네요?”
“몰라, 그냥 대충 마무리하고 왔어. 아직도 달리고 있네. 안 피곤하냐? 다들 젊어서 그런가.”
그가 초면인 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어리둥절해하는 시선이 오고 갔다.
“누구야?”
“룸메 형. 대학원생. 뭐라더라? 무슨 분자? DNA? 아무튼 바이러스 같은 거 연구한대.”
“오, 이과에 석사!”
“가방끈 존나 길어!”
평소에 쉽게 접할 일이 없는 인물이다 보니 모두들 흥분해서 그를 반겼다. 예술 전공자들의 특징이었다. 세상 근심 걱정은 혼자 다 뒤집어쓰고 우울해하다가도 별것 아닌 걸로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미친놈처럼 날뛰는 것.
“선배님. 초면에 죄송하지만 한잔하시죠.”
누군가 술기운을 빌려 대담하게도 그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코앞에 들이밀어지는 술잔에 남자가 어설프게 웃었다.
“안 돼. 차 가져왔어. 뻗어도 내 방 가서 뻗어야지.”
“와, 차 있으세요?”
“여기 차 있는 사람 없죠? 학교가 외진 데 있어서 이 시간에 택시 잡기도 쉽지 않을 거고.”
나는 자가용이 있었지만 굳이 학교까지 가져오진 않았다. 수도원과 별 차이 없는 산골짜기 학교에 처박혀 있으면서 차를 몰고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가 차 키를 든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가요. 캠퍼스까지 태워 줄게요.”
일제히 환성이 터졌다.
“형님, 학교 가서 한잔 더? 콜?”
“차는 야무지게 주차해 두시고, 저희랑 한잔 더 하시죠. 이것도 인연인데.”
“오늘 여기 생일인 사람 있어요. 같이 축하해 주세요.”
“크리스마스에 혼자 방에 박혀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난 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 괜히 나 꼈다가 불편하면 어떡하냐.”
불편하다 못해 좆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나에게 시선이 몰렸다. 그들은 애써 나를 못 본 척했다.
“에이, 그런 거 없어요.”
“맞아요. 저희 처음 보는 사람이랑 술 마시는 거 좋아해요.”
“형도 미대생들이랑은 술 안 마셔 보셨죠? 이참에 마셔요.”
잠깐 고민하던 대학원생은 무거운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심지어 나가는 길에 카운터에서 신용 카드를 꺼내 술값을 결제하기까지 했다. 아주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앞좌석과 뒷좌석에 건장한 남자들을 꽉꽉 채운 차가 도로를 달렸다. 우리가 술을 마셨던 번화가엔 그래도 인적이 좀 있었는데, 국도를 따라 캠퍼스 쪽을 향하자 거짓말처럼 인기척이 끊겼다. 하기야 이 시간에 여길 나다니는 생물이라곤 벌레와 야생동물밖에 없을 거다.
“근데 형님. 우리 술은요? 더 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 괜찮아. 있어, 있어. 랩실 옆에 휴게실 있는데 거기.”
대학원생이 운전하느라 전방을 주시한 채 대답했다.
“몇 병이나 사 놨어요?”
“글쎄? 소주 한 박스에 몇 병 들어가더라? 우리는 박스 단위로만 사 놔서 잘 모르는데.”
“와, 미친. 역시 대학원생. 화끈한 거 좀 봐.”
벌건 얼굴로 떠드는 동기의 품에는 편의점 로고가 찍힌 비닐 봉투가 곱게 안겨 있었다. 안에는 말린 오징어와 견과류를 비롯한 안주가 가득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놈들과 부대낄 때마다 짜증이 났다. 나는 줄곧 창밖만 보았다. 을씨년스러운 어둠에 파묻힌 정문 게이트가 휙 스쳐 지나갔다.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험동 앞에 도착했다. 늘 예술관에 처박혀 있다가 가끔 교양 수업을 들으러 타 과 강의동에 가는 게 전부인 미대생들로서는 올 일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대학원생이 입구 잠금장치에 카드 키를 대어 경비 시스템을 해제했다.
“저희 막 들어가도 돼요?”
“지금 아무도 없어. 아까 퇴근하면서 문단속 다 하고 나왔거든. 몰래 먹고 아침 되기 전에 싹 치워 놓으면 괜찮아.”
“보통 대학원생들 막 새벽까지 남아서 일하지 않아요? 대학원 간 친구들 얘기 들어 보니까 그렇다던데. 허구한 날 밤새고.”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마스까지 철야시키진 않더라. 교수님들한테도 최후의 양심이 있는지 뭔지.”
“네? 그럼 형네 교수님은요?”
“우리 교수님? 그 최후의 양심조차 없는 분이셔. 아주 존경스러운 분이지.”
저마다 시답잖은 말을 소곤거리며 조심스레 걸었다. 대학원생이 익숙하게 캄캄한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휴게실 조명을 켰다.
“자, 여기. 들어와.”
휴게실은 대학원생들의 심리 상태만큼이나 후줄근했다. 곳곳에 때가 묻은 구형 정수기는 필터에 바퀴벌레가 살지는 않는지 염려되는 수준이었다. 쓰레기통엔 다 먹고 처박아 둔 컵라면과 편의점 도시락 용기가 수북했다. 구석에 소주가 궤짝으로 쌓여 있는 것을 본 이들이 감탄했다.
“형님 누님들 진짜 빡세게 달리시네요.”
“고졸인 저희는 배움이 짧아서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야, 이래서 사람은 배우고 봐야 한다는 거구나. 역시 만물 석사. 척척 석사!”
“너희 지금 나 놀리냐?”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곧 휴게실 가운데 테이블에 소주가 쫙 깔리고 과자 봉지가 한가득 놓였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쨍한 형광등 빛을 피해 눈을 감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 * *
또 그 꿈이었다. 이마 안쪽이 지끈지끈 울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꿈에서 느낀 두통이 현실에 옮아오기라도 한 건지.
나는 혈압이 낮은 편이라 아침마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거기다 천성이 지랄같이 예민하기까지 했다. 자다 깨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기분이 끝도 없이 더러워졌다. 특히 작업하다 잠깐 눈을 붙였을 때는 더더욱.
그래서 시간표를 짤 때도 오전 수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꼭 들어야 하는 전공 수업이 오전 시간대에 있으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쓰고 누구 하나 죽일 듯 흉흉한 낯으로 강의실에 가서 맨 뒷자리에만 앉아 있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끝나지 않는 크리스마스를 겪은 뒤로는 거기에 불면까지 더해졌다. 밤이 무섭고 잠이 무서웠다. 악몽에 시달리다 간신히 깨어 눈을 뜨고 천장을 보는 순간. 정호현이 죽고 내가 다시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돌아간 건 아닐까, 또다시 그 좆같은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떠는 순간을 겪을 때마다 그냥 차라리 죽고 싶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잔뜩 짜증이 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눈앞의 광경을 보는 순간 기분이 나빠지기는커녕 사르르 풀렸다.
내 품에서 정호현이 얌전히 자고 있었다. 나랑 같은 이불을 덮고, 내 티셔츠를 잠옷으로 입고. 같은 세제에 같은 섬유 유연제를 쓰는데, 이상하게 그 애가 입은 옷에서는 햇살 냄새 같은 게 난다. 이렇게 작고 말캉말캉하고 보송보송한 게 다른 데 가서는 형님에 선배 취급을 받는다고?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정호현은 내 집에서 산다. 올해 여름 무렵부터다. 그는 몸이 얼추 회복되자마자 편입 준비를 했다. 뭐 그리 할 게 많은지 학원을 알아본다, 설명회를 듣는다 하며 바쁘게 뽈뽈 돌아다녔다.
그 애의 부모는 참사를 겪은 후 과보호 성향을 보였다. 그들은 정호현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 나다니는 것을 걱정해서, 매번 서울까지 먼 길을 오가게 하느니 차라리 근처에 살게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 사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그 애의 트라우마 또한 이해해 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그들은 나를 정호현과 함께 생지옥을 헤치고 살아난 같은 학교 선배이자 아들을 여러 번 구해 준 생명의 은인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글쎄. 과연 내가 정호현에게 믿을 만한 사람인가? 진실을 알면 그는 누구보다 나를 증오하고 혐오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정호현이 매달 월세와 생활비를 내겠다는 걸 거절했다. 어차피 나도 남는 집에 사는 것뿐이다. 어머니가 해외에 나가면서 처분하기 귀찮아서 놔둔. 가진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굳이 그 애의 등골을 빨아먹고 싶진 않았다. 그럴 시간에 정호현을 침대에 눕혀 놓고 잔뜩 울린 끝에 다른 걸 빨아 먹는 게 나았다.
그 애와 함께 살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침대에 놓을 베개를 하나 더 사고, 내 칫솔 옆에 그 애의 칫솔을 꽂았다. 세탁을 함께하는 탓에 종종 우리의 옷이 뒤섞였다. 불쾌하기는커녕 신기했다. 무채색 위주인 내 옷 사이에 아이보리색, 하늘색, 민트색 옷가지들이 끼어 있는 게.
“으응…….”
정호현이 젖도 못 뗀 강아지처럼 낑낑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늦었는데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편입 원서 접수가 마감되고 필기시험을 앞둔 시기였다. 매일 바짝 긴장하고 있을 테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와 살게 된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이제는 기분 나쁜 꿈을 꾸고 도중에 깨는 게 무섭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천장을 하염없이 노려보면서 밤을 새우는 대신, 잠든 정호현을 구경하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정호현은 생긴 것만큼이나 잠버릇도 얌전해서, 바로 눕든 모로 눕든 처음 잠든 자세 그대로 아침까지 쭉 자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아기처럼 입술을 살짝 벌리고 새근새근 자는 것도 귀엽고, 갈색 머리가 잔뜩 뻗친 것도 귀엽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 손가락을 물려 주면 뭔지도 모르고 오물거리는 것도 귀여웠다. 스물몇 살 먹고 군대까지 현역으로 다녀온 사내새끼가 자는 모습이 귀여워 보일 줄이야.
잘도 자는 정호현의 뺨을 만졌다. 말캉말캉한 볼을 손끝으로 쿡쿡 찔러도 보고 찹쌀떡 집듯 잡아당겨도 보았다. 매사 빠릿빠릿하던 놈이 정신 못 차리고 곯아떨어져 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안쓰러워서라도 더 자게 놔둘 테지만, 그러기엔 내 성질머리가 좀 글러먹었다.
정호현은 그 나이를 먹고도 아직 뺨에 솜털이 있다. 저 애 또래 다른 놈들은 솜털은커녕 낯짝에 수염 자국과 여드름 자국만 가득하던데. 그래서인지 매일같이 품에 끼고 온몸이 얼룩덜룩해지도록 물고 빨아도 질리지 않았다.
“…….”
뺨이 꼬집히는 감각에 정호현이 작게 인상을 썼다. 깨 있을 땐 내 눈치 살피면서 샐샐 웃기만 하는 게, 자고 있을 때는 나름대로 성질도 내고 짜증도 부린다. 귀엽고 웃겼다.
그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기어이 눈을 떴다. 잠에 푹 절어 흐려진 헤이즐넛색 눈이 나를 보았다. 그제야 뺨을 쭉 늘이던 손을 놔줬다. 별로 세게 꼬집은 것 같지도 않은데 흰 뺨이 살짝 발개졌다. 그는 제 뺨이 달아오른 것도 모르는지 멍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손을 뻗었다.
날이 추워진 이후로 우리 집 침실 사이드 테이블에는 항상 귤이 놓여 있다. 정호현이 귤을 박스로 주문하더니 매일 몇 개씩 꼬박꼬박 가져다 두었다. 나와 달리 새콤달콤한 걸 좋아하지도 않고, 과일은 사과 아니면 잘 먹지도 않는 놈이 왜 그러나 싶어 물어보았다.
〈형은 아침에 약하잖아요. 몸 막 흔들거나, 알람 크게 울리거나, 소리 질러서 깨우면 엄청 짜증 나는 거 알아요. 제 동생도 그랬거든요. 저혈압에 빈혈이라서. 그래서 깨울 때 과일이나 젤리 같은 거 하나씩 먹여 줬어요. 그거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잠도 깨고 기분 상할 일도 없더라고요.〉
정말 필요 이상으로 다정한 놈이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정호현은 자기가 무슨 다정이냐고,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랬다. 정호현은 누구에게나 좆같이 다정했다. 저 새끼 친동생한테까지 질투하고 싶진 않은데.
정호현은 침대에 기대어 앉은 자세로 손만 꼬물꼬물 움직여 귤을 깠다. 머리가 이리저리 뻗쳐선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귤을 까는 게, 꼭 겨울잠에서 막 깬 다람쥐가 도토리 까먹는 것 같았다. 곧 내 입가에 귤 조각이 닿았다.
“형, 아.”
“아.”
냉큼 입을 벌렸다. 달콤한 과즙이 혀를 적셨다. 정호현은 잠이 덜 깨 하품을 하면서도 기계적으로 꼬박꼬박 내게 귤을 물려 주었다. 한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말도 없이 귤만 까먹다가, 정호현이 비로소 정신이 든 듯 짧은 탄성을 질렀다.
“앗, 맞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반쯤 열어 둔 커튼 틈으로 겨울 햇살이 들어와 그 애의 부스스한 머리칼에 깃들었다. 그는 잠기운이 남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웃었다.
“영원이 형. 생일 축하해요.”
1년이 지나 마침내 12월 24일이 돌아왔다. 내가 번화가 술집에서 술을 마셨던 바로 그날이었다.
* * *
샤워를 하고 거실에서 식사 준비를 했다. 정호현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커튼을 활짝 열어 둔 탓에 베란다 통유리창 너머로 밖이 보였다. 살얼음이 끼기 직전의 차디찬 강물이 유유히 흘렀다. 강을 가로지르는 대교를 따라 수많은 자동차들이 오갔다. 하늘은 약간 흐린 편이었다.
나는 원래 끼니때를 거의 지키지 않는 편이었다.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거나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땐 그냥 내킬 때까지 식사를 걸렀다. 그러다 정호현과 함께 살게 된 이후로 아침·점심·저녁을 꼬박꼬박 챙기게 됐다.
바이러스가 처음 퍼진 지 만 1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감염자가 야금야금 나오고 있었다. 확산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아무리 철저히 통제해도 바이러스를 100퍼센트 소멸시킬 수는 없었던 탓이다. 긴급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의료 기관은 항시 백신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항체를 가진 사람은 여전히 정호현이 유일했다. 그는 1년 내내 틈만 나면 피를 뽑혔다.
정부 그 씨발 것들이 애를 얼마나 알뜰살뜰하게 착취하는지, 정호현은 채혈을 하고 온 날에는 아주 정신을 못 차렸다. 이러다 길에서 쓰러질까 봐 내가 차로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태워 오는데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그냥 다 집어치우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다 감염돼서 쳐 뒤지든 말든, 자기들끼리 잡아먹고 지랄 염병을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감염이 확산되자마자 재빨리 캠퍼스를 폐쇄하고 모른 척하던 주제에, 이제 와서 전 국민이 정호현의 피를 빨아먹고 살겠다고? 웃기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살을 찌우진 못하더라도 몸이 더 축나게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귀찮아서 손 놓고 있던 요리를 다시 시작했다. 정호현은 안 그런 척 은근히 입맛이 까다로웠다. 정크 푸드나 맵고 짜고 단 음식은 별로 즐기지 않고, 한식이든 양식이든 정갈하고 담백한 걸 좋아했다. 음식 취향도 꼭 저 같았다. 정호현 덕에 나까지 요즘 팔자에 없던 영양식을 삼시 세끼 챙겨 먹고 있었다.
내가 맑은 계란국을 끓이는 동안 정호현은 밥을 안치고 밑반찬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처음 같이 살게 됐을 때는 요리 당번을 정해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게 공평하다고 주장하더니, 내가 한 음식을 먹고 나서 얌전히 설거지와 뒷정리 담당을 자처했다. 나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모양이었다.
각자 할 일을 하느라 거실은 조용했다. 둘 다 집안일을 하면서 TV를 켜 두는 성격은 아닌 까닭이다. 특히 뉴스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원치 않는 소식까지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몇 달 전, 아침을 먹으면서 뉴스를 보다 정호현이 백일대 참사 희생자 명단에서 제 친구들의 이름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수저를 내려놓고 화장실에 들어가 이제껏 먹은 걸 모두 게워 냈다. 나는 잠긴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물소리에 섞인 그 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이후로는 같이 영화를 볼 때 빼고는 아예 TV를 꺼 두었다.
“영원이 형. 밤에 악몽 꿨어요?”
테이블에 마주 앉아 막 수저를 들려던 참이었다. 정호현이 불쑥 물음을 던졌다. 내심 좀 놀랐다. 모를 줄 알았는데. 대답 대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뒤늦게 내 시선을 눈치채고 해명했다.
“새벽에 자꾸 뒤척이길래. 혹시 안 좋은 꿈 꿨나 해서요.”
솔직히 말할까. 크리스마스이브 밤부터 크리스마스 새벽까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하면 정호현은 내 말을 믿어 줄까? 믿어 주기는 할 것이다. 저 애는 밖에선 제법 무심하고 야무지게 굴다가도, 나에게 한해서만은 한없이 물러지니까. 하지만 그런 정호현마저도 이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형이 그랬을 줄은 몰랐다며 난처하게 웃다가, 그리고, 그다음에는…….
“아니.”
내 속에서 무언가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거짓말이 튀어 나갔다.
“그냥. 새벽에 깼는데, 다시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그래요?”
“응. 영원이 존나 심심했어.”
“…….”
“근데 우리 호현이는 혼자 뻗어서 잘만 쳐 자더라?”
순수한 걱정과 염려만이 가득하던 정호현의 표정에 금이 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표정 숨기는 건 참 못 하는 놈이었다. 입으로만 굽실거리면 뭐 하는가. 얼굴에 이렇게 써 있는데. 이 또라이 새끼 또 시작이라고.
“어, 아니, 그게. 저 깨우지 그랬어요.”
“아냐. 내가 어떻게 깨워. 피곤하다고 섹스도 못 하게 하는 새끼를. 죄송해서 못 깨우지.”
“그건요, 형. 제가 싫어서 못 하게 한 게 아니라요. 중간에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려서.”
“그래서 더 안 건드리고 놔줬잖아. 자지 주무르던 것도 그만두고 팬티도 곱게 다시 입혀 주고. 내가 너 푹 재우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넌 내가 잠 설치든 말든 좆도 신경 안 쓰지? 응?”
정호현이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저렇게 덜떨어지고 얼빠진 반응을 보이면 괜히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걸 왜 모를까. 1년쯤 함께했으면 슬슬 알아챌 법도 한데. 쟤는 대체 뭘 처먹었길래 이렇게 귀여운 건지 궁금해졌다.
“저……. 형. 죄송해요.”
그가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대체 자신이 왜 사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뽀뽀.”
“네?”
“미안하면 뽀뽀해 줘. 그럼 삐진 거 풀게.”
“지금요? 여기서요?”
좀 생뚱맞은 타이밍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정호현을 안아서 식탁에 올려놓고 울음이 터질 때까지 괴롭히고 싶은데 참은 게 이거였다. 어쨌든 애 밥은 먹여야 하니까.
“뽀뽀 한번 받기 존나 힘드네?”
지레 인상을 썼다. 머뭇거리던 정호현이 손에 들었던 수저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가 반쯤 몸을 일으켜 맞은편의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아직 살짝 물기가 남은 머리칼에서 나와 같은 샴푸 향이 났다.
그는 내 입가에 쪽 입을 맞추었다. 입술 위도 아닌 옆이었다. 어정쩡한 키스만 남겨 놓고 멀어지려는 그의 턱을 붙잡아 확 끌어당겼다. 정호현이 휘청대다 다급하게 식탁 가장자리를 짚었다.
입술을 잔뜩 빨고 문지르다 고개를 살짝 틀어 혀를 넣었다. 단거 싫다고 사탕이나 주스 같은 것도 안 먹는 놈인데, 입술이며 혀가 왜 이렇게 달콤한지 모르겠다.
“흐읏…….”
뒤얽히는 혀끝에서부터 열이 올랐다. 그 애의 목 뒤쪽을 감싸 좀 더 진득하게 끌어당기려는 순간, 지이잉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식탁 위에 올려 둔 정호현의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아.”
막 달아오르려던 공기가 단번에 식었다. 정호현이 황급히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는 그를 보며 짜증스럽게 턱을 괴었다.
“애들 오는 중이래요. 우리도 밥 먹고 준비해서 나가면 될 것 같아요.”
“오긴 뭘 와. 내일, 아니, 그냥 내년에 오라고 해. 영영 안 오면 더 좋고.”
한창 열중하던 중에 방해받으니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네? 형 생일 축하해 주려고 모이는 건데.”
“몰라. 필요 없어.”
“하은이랑 나혜랑 빈이 안 보고 싶어요?”
“전혀.”
“펜션도 예약해 놨는데 아깝잖아요.”
“돈 내가 다 냈는데.”
정호현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난처해하는 기색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가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재밌게 놀아요. 저는 형 생일이……. 비극적인 날로만 기억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정호현은 맹하게 굴다가도 때로 놀랄 만큼 눈치가 빨랐다. 나도 몰랐던 내 뒤척임을 잠결에 알아챌 정도로. 불친절한 단서 몇 가지만으로 내가 크리스마스를 수없이 반복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정도로.
혹시 저 애는 내가 크리스마스 새벽에 뭘 했는지도 벌써 아는 게 아닐까. 아니, 아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 나를 싫어하지 않도록.
“뽀뽀 한 번 더 해 줘. 그럼 갈게.”
정호현이 기다렸다는 듯 말갛게 웃었다.
* * *
차를 몰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국도로 들어서는 동안 나도 정호현도 말이 없었다. 내내 차 안에 편안한 침묵이 감돌았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생각보다 길이 한산했다. 아직 오전이라 그런가. 혹은 아침부터 날이 흐려서일 수도 있겠다. 창 너머로 휙휙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들은 하나같이 까맣고 앙상했다. 마치 말라 죽은 시체의 손을 연상시켰다. 적막한 풍경이었다. 1년 전 그날처럼.
“영원이 형. 저랑 같이 원서 냈던 거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 자세로 얌전히 앉아서 앞만 보던 정호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나 또한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 말을 들었다.
“실기도 보면 안 돼요?”
정호현이 한창 편입 신청으로 골머리를 앓을 때, 나도 그가 지원한 학교에 똑같이 원서를 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저열한 집착이었다. 그 애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일을 하고 다니는 게 싫어서.
정호현은 기겁했다. 자기 전공만 보고 고른 거라 미대 쪽은 어떨지 모르는데 무작정 지원하면 어떡하냐고, 대학을 그렇게 쉽게 고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물론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왜?”
“기껏 서류 평가 통과했는데.”
“귀찮아.”
원래도 나는 대학에 별 뜻이 없었다. 죽어도 가기 싫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가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말했다. 공방을 차리든 개인전을 열든 외국에 이민을 가든 상관 안 할 테니 최소한 학사 학위는 따라고. 내가 앞으로 무슨 작품을 만들든, 사람들은 작품 그 자체보다는 내 이름 아래에 줄줄이 달린 경력에 집중할 거라고.
그래서 조소 전공이 있는 대학 몇 군데에 별생각 없이 원서를 냈고, 그중 한 곳에 입학했다. 그게 하필 백일대였다.
“그래도 학업은 마쳐야죠.”
“대단한 모범생 나셨네. 학교 기숙사에서 과제 하다 그 지랄을 당했는데 또 학교 가고 싶어? 학교에 꿀이라도 발라 놨어?”
“언제까지 집에서 형이 해 주는 밥 먹고 놀 수는 없잖아요. 통원 치료랑 심리 상담도 얼추 마무리됐고, 이제 검진 횟수도 점점 줄인다고 하고요.”
역시나 정호현은 나와 달리 성실했다. 나는 아직도 작년 크리스마스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저 애는 벌써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정부에서 보상금을 줘도 제 미래까지 보상해 주지는 않으니까요. 제 앞가림은 제가 해야죠. 그리고…….”
“그리고?”
“형이랑 학교 같이 다니고 싶어서요.”
“…….”
“그 일 전까진 우리, 학교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잖아요. 수업도 같이 듣고 밥도 같이 먹고 싶고, 형이 학교에선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하고.”
그는 끝내 모를 것이다. 그 쌀쌀한 겨울날 건물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그를 내가 훔쳐보았다는 사실을. 그뿐만이 아니다. 나와 그의 첫 만남은 가운데를 뚝 잘라 억지로 이어붙인 영화 필름처럼 엇갈려 있다. 내가 기억하는 정호현과의 첫 대화는 그의 기숙사 방에서였고, 정호현이 기억하는 나와의 첫 대화는 피로 물든 복도 한복판에서였으니.
“그냥 제 생각은 그래요. 형이 정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요.”
정호현이 말을 마치고 슬쩍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붉어진 귓불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아주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내 세상은 좁은 캠퍼스 안이 전부였다. 내가 떠올리는 미래는 항상 학교 밖으로 탈출하는 것까지였다. 그 이상은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색채의 개념을 영영 모르듯.
그래서 구조되어 치료를 받고 퇴원한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생 목줄에 묶여 살던 개를 갑자기 풀어 주면 아무 데도 못 간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죽음도 살육도 회귀도 없는 하루하루가 낯설었다. 한순간에 주인을 잃고 자유를 얻은 노예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내게 정호현이 찾아왔다. 창이란 창에 죄다 쳐 놨던 암막 커튼을 활짝 열고, 기운차게 집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나를 데리고 나가 식사도 하고 산책도 했다. 밤이 되면 서로 꼭 끌어안고 악몽을 보듬었다. 그렇게 퇴화되어 버린 생의 감각을 차츰차츰 되살렸다. 그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호현은 내 천형인 동시에 속죄였다.
“음악 틀게요.”
쑥스러움을 못 이긴 정호현이 조수석에서 몸을 기울여 카 오디오를 조작했다. 그가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설정이 초기화되었는지 블루투스 대신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 다음 뉴스입니다. 백일대 참사 당시 현장이 담긴 연구실 CCTV 영상이 최종적으로 복구 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낯익은 이름이 귀에 꽂혔다. 무심코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핸들을 꽉 쥐었다.
- 사고 전에도 이미 장비가 노후화되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던 데다, 사고 발생 후 화학 약품 폭발로 화재가 발생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하는데요. CCTV 분석을 맡은 국가 디지털 포렌식 센터 관계자를 연결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죄송해요. 이거 블루투스로 어떻게 바꾸더라.”
정호현이 황급히 버튼을 눌렀다. 라디오는 다른 채널로 바뀌어 나왔다.
- 지난해 12월 발생하여 수많은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 간 백일대 참사. 내일이면 벌써 1주기가 됩니다.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식이 참사 당일인 25일 오전 10시부터…….
단조롭게 흘러나오던 앵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정호현이 전원 버튼을 눌러 아예 오디오 자체를 꺼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까 들은 말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뇌를 후벼 파고 신경을 할퀴었다.
잠에서 깬 후로 수그러든 줄 알았던 두통이 다시 번졌다. 실험동 내부의 싸늘하고 무거운 공기, 떠들썩하게 웃는 소리들, 코를 찌르는 소주 냄새. 그때 느꼈던 감각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속이 메슥거렸다. 유리창 너머로 쭉 뻗은 도로가 한순간 뿌옇게 흐려지며 일렁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마지막 집중력을 쥐어짜 내어 갓길로 빠졌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국도 가장자리, 수풀이 무성한 공터에 차를 세우고 나자마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이마를 짚고 쓰러지듯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형. 괜찮아요? 죄송해요. 제가 잘못 건드려서 괜히…….”
정호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살폈다.
“머리 아파요? 이제 제가 운전할까요? 아니면 집에 갈래요?”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재어 보기도 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데 다른 놈이 귀찮게 말을 걸어 댔다면 왈칵 짜증을 냈을 거다. 좀 닥치라고 한 대 갈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호현은 예외였다.
내 앞에서 겁먹은 새끼 고양이처럼 발발 떠는 정호현도 좋지만, 나를 챙기려 드는 정호현도 싫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작고 말랑말랑한 주제에 의젓한 남자 친구 행세를 하는 게 웃기고 같잖고 귀여웠다. 어디 한번 더 해 보라고 판을 깔아 주고 지켜보고 싶었다.
“나 당 떨어졌어.”
“네?”
“당 떨어져서 힘 하나도 없어. 나 운전 안 해. 못 해.”
눈을 가린 손을 치우지 않은 채 재차 말했다. 내 같잖은 칭얼거림을 그는 믿어 줄 것인가.
“아…….”
짧은 탄성이 흘렀다. 잠시 후 글러브박스를 열고 뭔가를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형, 아.”
“아.”
재깍 입을 벌렸다. 정호현이 내 입에 동그란 것을 쏙 넣어 주었다. 딸기 맛 사탕이었다. 달콤한 사탕을 혀끝으로 굴렸다. 두통이 점차 가셨다.
“우리 좀 쉬었다 가요.”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1, 2분 쉬는 걸로는 안 될 것 같아 아예 시동을 꺼 버렸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이따금 사락사락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지이잉. 평온한 정적을 가르고 정호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나 내 휴식을 방해할까 봐 정호현이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응. 빈아.”
말투가 아주 자상하고 나긋하기 짝이 없었다. 내 앞에선 맨날 예의 차리는 새끼가.
“그래. 호현이 형이야. 잘 오고 있어?”
씨발. 나도 정호현한테 형이라고 할까.
“우리도 지금 자가용 타고 가는 중인데, 잠깐 쉬고 있어. 응? 아니, 휴게소는 아니고.”
정호현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조곤조곤 통화를 이어 나갔다. 내 기분이 바닥으로 치닫는 것도 모르고. 그 애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수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은이랑 나혜는 같이 온다던데. 빈이 너는 뭐 탔어? 뭐? KTX? 청소년 할인?”
뒤에서 손을 뻗었다. 그가 입은 도톰한 카디건을 헤치고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아침은 먹고 출발한 거…… 헉!”
그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깔끔히 무시하고 사탕을 우물거리면서 가슴을 주물렀다. 말라서 잡을 것도 없는 가슴팍을 더듬다가 유두를 만졌다. 몇 번 손끝으로 툭툭 튕겨 주자 곧 젖꼭지에 피가 몰려 셔츠 위로 도드라졌다.
“아, 아니, 빈아. 아무것도 아니야.”
정호현은 휴대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다급하게 나를 밀어냈다. 그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형. 제발요.’
나도 입 모양으로 말해 주었다.
‘이게 어디서 젖꼭지 세우고 딴 새끼랑 시시덕거려.’
“어, 이, 이제 출발해야 할 것 같아서. 형이 이따 또 연락…….”
검지와 엄지로 젖꼭지를 잡아 비틀었다. 정호현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연락할게. 조심해서 와.”
그는 통화 종료 버튼을 마구 연타했다. 전화가 끊긴 걸 확인하자마자 내게 원망 섞인 눈빛을 보냈다.
“왜 그랬어요? 통화하던 도중에 이상한 소리 날까 봐 제가 얼마나…….”
“내 앞에서 딴 놈이랑 노닥거리는 거 좆같아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빈이잖아요.”
“특히 그 새낀 더 안 돼.”
“아니, 왜요?”
“학교에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 그 생긴 것도 시커멓고 속도 시커먼 새끼. 틈만 나면 네 손 주무르고……. 씨발.”
말하다 보니 기분이 더욱 더러워졌다. 입 안에 있던 사탕을 빠드득 깨물어 먹었다. 정호현이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저, 형. 삐졌어요?”
“보면 몰라? 존나게 삐졌잖아. 영원이 삐져서 지금 맛 가기 직전이야.”
“맛은 원래도 가 있었던 것 같…….”
“우리 현이, 요즘 사는 게 너무 편하지? 나오는 대로 막 뱉네?”
그 애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해요. 현이가 잘못했어요.”
“됐어. 애교로 때우면 다야? 자기 예쁜 줄은 알아 가지고.”
“…….”
“그래 놓고 이따 그 새끼 만나면 또 하하 호호 할 거지? 나한텐 현이 너밖에 없는데, 넌 다른 놈들도 꼬박꼬박 챙기잖아.”
“아니에요. 안 그럴게요.”
“아니긴. 맨날 말만 그렇게 하지.”
정호현을 곁눈질로 흘깃 봤다가, 다시 고개를 팩 돌렸다.
“흥.”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호현이 멍하니 있다 무심코 내 말을 되풀이했다.
“……흥?”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험악하게 굳은 낯을 풀지 않았다. 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 그게. 음. 어떻게 하면 삐진 거 풀어 줄래요?”
내 손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하는 말에 기분이 좀 풀렸다. 나는 정호현에 한해서만큼은 어이없을 정도로 약해졌다. 그가 내게 그러하듯이.
“뽀뽀해 줘.”
대뜸 요구했다. 정호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찌푸린 것 같기도 했다.
“그거면 돼요?”
“응.”
정호현이 한숨처럼 웃었다. 다음 순간 어깨가 잡혔다. 반응할 틈도 없이 고개가 돌아갔다. 그대로 부딪치듯 입술이 맞물렸다. 그는 내 입술을 머금고 오물거리다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젖은 입술을 가르고 혀를 얽었다.
정호현은 평소에 단것을 쳐다도 보지 않지만, 나와 키스할 때만은 예외였다. 방금 전까지 사탕을 물고 있어서 단맛이 진동할 내 혀와 입술을 싫은 내색도 없이 잔뜩 물고 빨았다. 키스는커녕 뽀뽀만 해도 기겁할 것처럼 생긴 주제에 제법 질척하게 달려들었다. 아, 더럽게 꼴렸다.
정호현의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그가 운전석과 조수석을 가르는 콘솔 박스 위로 아슬아슬 몸을 기울였다. 좌석 시트에서 어정쩡하게 떠오른 그 애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위로는 쉴 틈 없이 혀를 섞으면서, 아래로는 단정히 다린 슬랙스 주름이 구겨지도록 엉덩이를 주물렀다.
“누가…….”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그가 간신히 속삭였다.
“누가 보면.”
“안 보여.”
“보일지도 몰라요. 도롯가잖아요. 혹시나 남의 차 블랙박스에 찍히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내가 그 새끼 쫓아가서 들이받을게. 블랙박스고 뭐고 못 건지게 으깨 버리면 되지.”
“그럼 우리도 최소 사망 아닐까요?”
“아, 씨발.”
운전석 등받이에 걸려 있던 내 외투를 짜증스럽게 집어 들어 창문을 대충 가렸다. 어차피 반대편은 숲이라 보일 염려가 없으니 이 정도만 해도 괜찮았다.
“됐지?”
할 말이 없어진 정호현이 입만 벙긋거렸다. 방금 전까지 쥐고 있던 해바라기 씨를 순식간에 빼앗긴 햄스터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씩 웃고 좌석 등받이를 한껏 젖혔다.
* * *
정호현은 옷이 홀랑 벗겨진 채 내 위에 엎드렸다. 입고 있던 카디건과 슬랙스는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고, 셔츠는 단추를 죄다 풀었다. 활짝 열린 셔츠 자락 사이로 희멀건 가슴팍과 연분홍색 유두가 보였다.
손을 내려 맨엉덩이를 주물렀다. 탄력 있는 살이 내 손 아래에서 뭉그러졌다. 말캉한 감촉을 만끽하다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단단히 다물린 구멍에 손끝이 닿았다.
“아!”
정호현이 짧게 신음하며 몸을 들썩였다. 그 애 아래에 깔린 내 성기에 은근한 자극이 가해졌다.
“현아, 나 깨물어 줘.”
“어딜…….”
그는 입술을 깨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아무 데나. 상처 날 때까지 깨물면 더 좋고.”
“네? 안 돼요. 제가 왜 형한테 상처를 내요.”
“빨리이.”
중지로 입구를 살살 문지르며 채근했다. 마음대로 해 보라는 뜻에서 고개를 살짝 젖히고 눈을 감았다. 정호현은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입구가 움찔 다물렸다 풀어지길 반복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이윽고 그가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맥박이 뛰는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조금 망설이다가, 앞니를 살짝 세워 흉터를 긁어내렸다. 이가 덜 난 어린 고양이가 깨무는 것 같아서 아프지도 않았다.
“헉…….”
“아팠어요? 그만할까요?”
그 애가 말할 때마다 목에 진동이 전해졌다. 그것까지 흥분되었다.
“아니…… 존나 꼴려. 더 해 줘.”
흥분으로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정호현은 조심스럽게 내 목을 핥고 빨았다. 그러다 실수처럼 살짝 깨물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자지에 피가 확 몰려 꿈틀거렸다. 이대로 목에 빨간 자국이 남았으면 좋겠다. 아니, 아예 살갗과 혈관이 찢어져 피가 흘렀으면 좋겠다. 가로로 그어진 흉터 위에 새 상처가 생겼으면 좋겠다. 정호현이 내 목을 물어뜯는다니. 그만큼 꼴리는 게 어디 있을까.
나는 그의 서툰 애무를 받으며 계속 손끝으로 구멍을 만지작거렸다. 근육이 어느 정도 이완되었다 싶을 무렵 중지를 세워 쑥 밀어 넣었다. 간신히 한 마디가 들어갔다. 손가락 하나만 넣어도 꽉꽉 조이는 좁은 구멍이 내 자지는 대체 어떻게 먹는 걸까. 매번 신기했다.
“읏, 흐윽.”
그가 신음을 삼켰다. 쫄깃한 속살에 파묻힌 손가락을 조금 뺐다가 더 깊게 넣었다. 손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뜨겁게 조여드는 안을 살짝살짝 긁어 주었다. 정호현의 등을 안고 구멍을 헤집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너 혼자 딸 칠 때 있잖아. 내 자지에 똑같이 해 봐.”
내 위에서 달콤한 신음을 흘리며 나긋하게 풀려 가던 몸이 움찔 굳었다. 정호현이 짧게 헛숨을 삼켰다.
“네 거랑 같이 잡고. 응?”
그가 머뭇거리다 손을 내렸다. 우리의 배 사이에 끼어 있던 단단한 성기 두 개를 한 손에 감싸 쥐었다. 내 건 이미 끄트머리에서 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정호현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음담패설을 들을 때마다 기겁하는 주제에, 그는 매번 착실히 흥분했다.
이윽고 그는 자지를 위아래로 천천히 주물렀다.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 같긴 한데 여전히 소극적인 움직임이었다. 툭 불거진 귀두끼리 맞물려 비벼졌다. 딱딱한 기둥을 감싼 표피가 그의 손길에 따라 위로 쭉 쓸렸다 아래로 내려가길 반복했다.
정호현이 혼자 성기를 주무르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하얀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선 눈을 감고 쾌감에 잔뜩 집중할 것이다. 흥분이 오를수록 자지를 흔들어 대는 손길이 빨라지고 연분홍빛 통통한 귀두에 맑은 액이 맺히다가, 이윽고 좆물이 쭉 뿜어지겠지.
저 애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자위할까. 다른 누군가한테 자지를 박고 허리를 흔드는 상상? 아니, 씨발. 이건 좀 좆같은데. 그럼 나한테 박히면서 앙앙대는 상상?
“평소에 이렇게 자위해? 생긴 것만큼 얌전하게 하네. 어떻게 하는데. 앉아서? 누워서?”
“그런 거 왜 물어요.”
“궁금하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앞에서 시켜 보는 건데.”
“몰라……. 묻지 마요.”
정호현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말 중간에 신음이 섞였다. 그 애가 정신이 딴 데 팔린 틈을 타서 구멍에 검지까지 욱여넣었다. 간헐적으로 조여드는 뜨끈한 내벽에 내 손마디가 득득 긁혔다.
“우리 집에서도 한 적 있어?”
“안 했어요.”
“진짜?”
“진짜…….”
“한 번도 안 했어?”
“네에.”
이성이 날아가서 거의 울 지경이 되었는데도 부정하는 걸 보니 아마 진짜로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래, 자위 생각이 안 날 만도 했다. 나는 같이 살게 된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정호현을 깔아 눕혀서, 목이 쉬고 눈가가 짓무르고 좆물이 더 안 나올 정도로 박아 댔으니까.
“그래. 이젠 좆 안 박아 주면 못 가겠지? 구멍이 허전해서.”
“…….”
정호현이 말없이 헐떡였다. 얼굴에 열이 올라 발갰다. 손안에 찬 성기 두 개를 주무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구멍을 퍽퍽 쑤셔 주면서 똑같은 걸 다시 물었다. 그제야 그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순하고 솔직하게 반응하는 게 귀여워서 뽀얀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예쁜아, 여기 왜 이래?”
깊숙이 박아 놓은 손가락을 가위 모양으로 벌렸다. 내벽이 반사적으로 꽈악 수축했다. 젖은 속살이 손가락에 찰싹 휘감겨서는 비비면 비비는 대로 일그러졌다.
“지금 네 안 다 풀려서, 내 손가락 막 쥐어짜고 있어. 더 쑤셔 달라고 난린데.”
“아, 아, 아! 앗, 흐으……!”
“좆 박는 얘기 하니까 꼴렸어? 형 자지 먹고 싶어졌어?”
“으으응.”
그가 응석을 부리듯 내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그새 눈물을 좀 흘렸는지 목 부근이 축축했다. 평소엔 그렇게 강단 있고 어른스럽던 놈이 좆이랑 구멍을 조금만 만져 줘도 흐물흐물하게 풀려서는 울먹거린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다.
더 참기 힘들었다. 이대로 깔짝깔짝 손장난만 하다간 정호현이 싸기 전에 내가 먼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박아 놨던 손가락을 쑥 빼고 정호현의 허리를 잡았다. 그 애를 번쩍 들어 내 위에 올리고 유일하게 입고 있던 셔츠까지 쑥 벗겨 냈다. 이대로 조금씩 주저앉힐 생각이었다. 그는 밭은 숨을 내쉬며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든 듯 나를 만류했다.
“혀, 형! 영원이 형.”
“왜.”
“잠깐만요. 이대로 하면 안 돼요.”
“그래요. 이번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데요.”
최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물었다. 안쪽도 말캉말캉하게 다 풀어 놨고, 이제 박기만 하면 되는데. 하여간 찬물 끼얹는 건 제일 잘하는 새끼였다.
“그게…….”
정호현은 내 위에 어정쩡하게 올라앉은 채로 뒷좌석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제 바지 주머니에 든 지갑에서 황급히 뭔가를 꺼냈다. 그가 꺼내 든 것을 보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뭐 어쩌라고.”
“콘돔 끼고 해요. 차 안이니까.”
“그래서?”
“뒤처리하기 힘들잖아요.”
“좆 까. 힘들어도 내가 힘들어.”
“…….”
“언젠 네가 한 적 있어? 매번 내가 했지. 축 늘어져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 내가 안아서 씻겨 주고 정액 긁어내 줬잖아.”
“형이 힘들어질까 봐 더 신경 쓰는 거예요. 아무튼 노콘노섹이에요.”
그 애가 자기 딴엔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래 봤자 뺨이 발개지고 눈이 풀려서 위엄은 그다지 없었다. 반박하는 대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준비성도 좋지. 이건 또 언제 샀어?”
“형이 맨날 시도 때도 없이 하니까…….”
“그래서 너도 언제 어디서든 좆받을 준비 하고 있는 거야? 야해 빠져 가지고. 우리 현이는 차암, 머리에 그 짓 할 생각밖에 없나 봐.”
“그런 거 아니에요!”
정호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눈가에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귀엽긴 한데 더 하면 애 울릴 것 같았다.
저 망할 콘돔을 빼앗아 던져 버리고 바로 박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콘돔을 사다가 꼼지락꼼지락 야무지게 지갑에 넣고 다녔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줘 봐.”
콘돔을 선뜻 받아 들었다. 포장을 뜯고 콘돔 가운데 정액받는 부분을 툭툭 튕겨 보다가 귀두부터 씌웠다. 사이즈를 고려하지 않고 샀는지 나한테 좀 작았다. 그 와중에 콘돔에서는 딸기 향이 났다. 이건 또 뭐야. 내 취향 고려해 준 건가? 아, 씨발. 웃겨 뒈지겠다.
돌돌 말린 고무를 펴서 자지 절반 좀 넘게 콘돔을 씌웠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불편해서 절로 인상이 써졌다. 정호현이 조마조마한 기색으로 내 표정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네가 직접 넣어.”
목소리가 생각보다 좀 더 낮고 흉흉하게 나갔다. 평소엔 뭘 넣어요? 자판기에 동전을요? 어쩌고 하면서 모른 척했을 정호현이 얌전히 올라타 내 옆 시트를 짚었다. 발갛게 물이 든 구멍에 귀두가 꾹 눌렸다.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몸을 내렸다.
얇은 콘돔을 뒤집어쓴 귀두가 조금씩 들어갔다. 이제껏 나한테 박힌 게 몇 번인데 정호현은 아직도 서툴렀다. 하도 조여 대서 자지가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콘돔에 젤이 발려 있어 생으로 처넣는 것보단 좀 나았다. 그가 요령 없이 무작정 몸을 꾹꾹 내리기만 하는데도 작은 구멍이 힘겹게 벌어졌다.
“읏, 흐윽…….”
한껏 용을 쓰는 정호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허벅지 근육이 단단하게 긴장하고, 카 시트를 짚은 손등에도 핏줄이 섰다. 그 애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갈색 머리칼이 흐트러져 표정을 가렸다.
그는 꼿꼿이 선 성기 위로 주저앉았다가 다시 살짝 일어서길 반복하면서 성기를 조금씩 집어넣었다. 하지만 진도가 몹시도 느렸다. 체중이 실려 평소보다 삽입이 더 버겁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에서 뿌드득 소리가 날 것 같았다.
“…….”
뭔가 이상해서 그 애의 안색을 살폈다. 뒤늦게 깨달았다. 정호현이 한참이나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바짝 힘이 들어가 보조개가 팬 엉덩이를 토닥이며 달랬다.
“현아. 숨 쉬어야지.”
“헉! 허억…… 하아, 헉.”
막혀 있던 호흡이 그제야 터졌다. 도무지 긴장을 못 푸는 것 같아서 그 애의 뺨을 감싸고 끌어당겨 가벼운 키스를 몇 번 했다. 그가 작게 훌쩍이면서 내 품에 쓰러졌다.
“형……. 힘들어요. 아파요.”
“더 못 넣겠어?”
그가 눈물이 잔뜩 고인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할까? 이제 빼?”
이번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이렇게 예쁜 걸 어떻게 놔줘. 정호현이 빼 달라고 울었어도 안 뺐을 거다. 잔뜩 물고 빨고 잘 느끼는 곳을 찔러서, 어떻게든 더 해 달라는 소리가 나오게 했겠지.
“힘 빼고 내 위에 엎드려 봐. 허벅지 벌리고, 무릎 좀 더 올리고.”
그는 얌전히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내 걸 물고 엎드린 정호현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붙잡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살짝살짝 들었다 놓으면서 느리게 삽입했다.
“흐, 읏, 하윽!”
어느 순간부터 그가 내게 동조하여 엉덩이를 자의로 들썩였다. 귀두가 젖은 속살에 연거푸 미끄러졌다. 처음 길을 내자 그 뒤는 그나마 좀 수월했다. 정호현이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날씬한 배가 오르내렸다. 쭉쭉 빨아 먹히는 것 같았다.
어느덧 성기가 절반 넘게 들어갔다. 탄탄하고 쫀득한 살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내 자지를 물고 놓지 않았다. 엉덩이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개처럼 마구 빨아 댈 때도 내 혀를 이렇게 조였는데. 아까 구멍 풀어 줄 때 손가락으로만 쑤시지 말고 엎어 놓고 빨아 주기도 할 걸 그랬다. 그럼 정호현은 또 안 된다고, 부끄러워 죽겠다고 앙앙 울겠지. 새삼 아쉬웠다.
정호현의 엉덩이를 붙잡고 있던 손을 옮겨 내 골반 양옆에 놓인 허벅지를 쥐었다.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마구잡이로 쳐올렸다. 성기가 안쪽을 들쑥날쑥 찍었다. 그의 몸이 내가 아래에서부터 치받는 힘을 못 이기고 위로 들썩들썩 떠올랐다. 허벅지를 힘 있게 눌러 고정해 놓고 계속 박았다.
“아아! 아, 아, 아…….”
아까는 누가 보면 안 된다고 그렇게 내외를 하더니, 막상 좆을 넣어 주니까 정신 못 차리고 울기만 한다. 잔뜩 발기한 그 애의 예쁜 성기가 흔들리면서 내 아랫배를 철썩철썩 쳐 댔다. 내 배 위에 멀건 액이 드문드문 묻었다.
안을 직접적으로 두들기는 자극이 무서웠는지, 정호현이 잔뜩 박히는 와중에도 엉덩이와 허벅지를 이리저리 틀었다. 내벽이 뭉그러지면서 내 걸 꽉꽉 짓이겼다. 쾌감을 피하려는 심산이었겠지만 오히려 어설프게 기교를 부리는 것 같아 더 꼴렸다.
퍽! 퍽! 퍽! 살 부딪치는 소리가 차 안에 크게 울렸다. 그러다 성기를 처박던 움직임을 스르르 멈추었다. 정호현이 의아한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초점 없는 눈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나 당 떨어졌어. 더 못 하겠어.”
정호현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한참 섹스하던 도중에 갑자기 당 떨어져서 못 하겠다는 놈은 처음 봤을 거다.
“사탕 먹여 줘.”
그가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엉덩이를 살짝 들고 조수석 앞에 있는 글러브박스를 향해 팔을 뻗었다. 깊게 박혀 있던 성기가 슬슬 빠졌다. 팽팽하게 씌워 놓은 콘돔 표면이 번들거렸다. 성기가 빠져나가는 것조차 자극적인지 정호현이 애달픈 신음을 흘렸다.
“흐응…….”
좆 대가리가 구멍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그와 동시에 정호현이 사탕을 집어 드는 데 성공했다. 벌벌 떨리는 손끝에 개별 포장이 된 딸기 맛 사탕이 걸려 올라오는 것을 보자마자 허벅지를 확 눌러 내려앉혔다. 수직으로 곤두선 성기가 내벽을 일시에 가르고 저 안까지 꽂혔다.
“아, 흐윽!”
정호현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간신히 들고 있던 사탕을 내 가슴팍에 툭 떨어뜨렸다. 뒤이어 눈물방울도 후드득 떨어졌다.
“까서 먹여 줘. 빨리.”
정호현이 울면서 사탕을 도로 집었다. 그 간단한 동작을 하는데도 몇 번이고 헛손질을 했다. 손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는 데다 내가 퍽퍽 치받아 대는 바람에 자꾸 엇나갔다. 그때마다 그의 성기에서 물이 질질 샜다.
한참 고군분투한 끝에 내 입술에 사탕이 닿았다. 사탕을 냉큼 물고 정호현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아, 아, 아, 연거푸 신음하면서 온 얼굴이 흠뻑 젖도록 울어 대는 그 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눈물이 스며 얼핏 짠맛이 났다. 고개를 틀어 각도를 바꿔 가면서 입술을 찢고 혀를 뽑을 기세로 집요하게 키스했다. 동그란 사탕이 우리의 혀 사이에서 인공적인 단맛을 남기고 녹아내렸다.
격렬한 키스가 버거워서 할딱거리는 정호현을 끌어안고 쉴 새 없이 박아 올렸다. 맞물린 사타구니가 얼얼해지도록. 그러다 어느 순간 정호현이 끙끙 앓으면서 꼼지락거렸다. 왜 그러나 싶어 잠시 놔줬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졌다.
“가, 갈 것 같, 아, 아, 흣, 흐응!”
뭘 어찌할 틈도 없었다. 그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엉덩이에 힘을 주어 내 성기를 쥐어짜면서 사정했다. 자지에 엉겨 붙은 속살이 조여들었다. 내 가슴팍과 아랫배에 정액이 쭉 쏘아졌다. 그는 벌어진 입술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젖은 속눈썹을 파들파들 떨면서 절정에 몸부림쳤다.
나도 더 참기 힘들었다. 정호현의 골반을 쥐고 내벽을 아주 뭉개 버릴 기세로 힘껏 처박았다. 그가 아직 사정하던 중인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눈앞이 번쩍였다. 바짝 올라붙은 음낭에서부터 좆 기둥을, 귀두를 타고 절정이 확 치솟아 올랐다.
“읏……!”
그대로 정액을 싸질렀다. 진득한 액체가 꽉 끼는 콘돔 표면 아래에 꾸역꾸역 밀려 나와 고였다. 내 걸 잘라먹을 듯 조이는 내벽에 대고 찌걱찌걱 비비면서 남은 한 방울까지 죄다 짜냈다.
“헉, 후우…… 흣.”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호현은 아직 박혀 있는 성기를 빼낼 기운조차 없는 듯 내 품에 고개를 묻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맨등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일부러 발기가 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콘돔 아랫부분을 붙잡고 좆만 빼냈다. 그를 받쳐 안고 발간 구멍에 콘돔 끝부분이 삐죽 삐져나와 있는 광경을 감상했다. 정호현이 기겁해서 버둥거렸다.
“빼 주세요. 느낌 이상하단 말이에요.”
“그래, 그래.”
오래 두고 볼 생각은 없었던지라 선뜻 수락했다. 콘돔 끄트머리를 잡고 살살 당겼다. 고작해야 정액이 든 얇은 라텍스 한 겹일 뿐인데, 그새 내벽이 도로 좁아졌는지 잘 빠지지 않았다. 힘을 주어 쭉 빼냈다. 정호현이 흐느끼듯 신음하면서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콘돔 빼 주는 건데도 느꼈어? 아주 발정 났나 봐.”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렇게 치면 형이 더…….”
“응. 이제 알았어? 나 발정 나서 눈 돌아간 변태 새낀 거.”
“…….”
“나랑 1년 내내 붙어먹으면서도 몰랐어? 우리 예쁜이는 공부만 잘하지, 눈치는 존나게 없구나?”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다 쓴 콘돔 주둥이를 묶었다. 말문이 막힌 정호현이 나라 잃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웃기고 귀여운데 꼴렸다. 지금 한 번 더 박아 주면 아주 숨넘어가게 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번들거리는 성기를 쥐고 몇 번 주물러 도로 세웠다. 내가 뭘 하려는지 알아챈 정호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영원이 형. 콘돔!”
콘돔을 꼬박꼬박 챙길지언정 섹스 자체를 하지 말라고는 안 하는 게 저 애다웠다. 그는 다급하게 지갑을 찾아 뒷좌석을 뒤졌다. 시야에 맨엉덩이가 씰룩거렸다. 아까 내가 줄기차게 치댄 탓에, 뽀얗고 탄탄한 엉덩이가 발개져 있었다. 한 입 베어 물고 싶었다. 방금 사정한 것도 잊고 성기가 다시 흉흉하게 일어섰다.
그의 뒤에 따라붙어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다른 손으로는 성기를 구멍에 맞췄다. 정호현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려 했다. 저항할 틈을 안 주고 그대로 박아 넣었다.
“아!”
정호현이 풀썩 엎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위에 올라타 몇 번 더 쑤셨다. 이미 한 번 절정을 겪은 내벽이 자지를 어렵지 않게 받아먹었다. 그가 서러움에 눈매를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돌렸다.
“노콘노섹이라고…… 흐읏, 했는데, 왜.”
“알아. 안다고. 노 콘트롤 노 섹스잖아.”
“그거 아니…….”
“으응. 그래. 이따 형이 좆물 다 빼 주고, 몸 다 닦아 줄게.”
“약속은요? 우리 약속 늦으면 어떡해요.”
“아, 맞다. 지금 늦는다고 전화할래? 폰 갖다줄까? 난 계속 박고 있을게.”
“…….”
그 이후로도 정호현이 훌쩍이면서 뭐라 쫑알쫑알 항의했다. 물론 제대로 듣진 않았다. 뺨과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으면서 허리를 놀렸다. 결국 그는 저항을 포기하고 내 아래에서 예쁜 소리로 잔뜩 울었다.
* * *
우리는 결국 원래 약속 장소였던 역 앞에 제일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늦은 게 미안했는지 정호현은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래, 정호현은 약속 시간을 어기기는커녕 아예 모임 주최를 맡아서 사전 답사에 인원 통솔까지 할 놈이니까.
집 안에만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법 인적이 있는 거리에 나오자 하나둘 보였다. 사방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했다. 가게마다 리스나 산타 모자, 루돌프 인형 같은 걸 걸어 놨다. 이따 저녁쯤 되면 조명을 환하게 밝히고 캐럴을 틀어서 더 요란해질 것 같았다.
같은 12월 24일인데 누군가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잔뜩 들떠 있고 누군가는 참사 1주기 추모 행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 경계에 내가 있다. 1년 전 크리스마스 새벽에 그런 짓을 해 버린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일 축하를 받으러 나온 내가. 싸구려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았다.
“영원이 형?”
정호현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어느덧 역 앞 교차로 신호등이 초록 불로 변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몇 초 동안 신호가 바뀐 모양이었다.
빠앙! 출발하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경적 소리가 귀에 꽂혔다. 거기다 뒤에서 일부러 상향등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백미러를 흘긋 보았다. 뒤 차 운전자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3초를 못 기다리고 개지랄을 하네? 씨발. 그렇게 급하면 어제 쳐 나오든가.”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 불안해진 정호현이 물어보았다.
“창은 왜 열어요?”
오른손으로 핸들을 잡고 왼손을 창틀에 걸쳤다. 흉터투성이 팔뚝이 바깥에 반쯤 드러났다.
“알잖아. 내가 분노 조절을 좀 못 하는 거. 아냐, 걱정하지 마. 다른 거 안 해. 저 씹새끼랑 인사만 좀 할게. 응?”
이대로 뒤에 대고 엿이나 먹여 줄 생각이었다. 욕은 덤이고. 그러나 그 전에 정호현이 나를 뜯어말렸다.
“참아요, 형. 그냥 가요. 괜히 이상한 사람들이랑 시비 붙으면 골치 아프잖아요. 나중에 블랙박스 확인하고 위협 운전으로 신고하든가 해요.”
그 애의 손이 내 손등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하여간 저 새끼는 자기 예쁜 건 잘 알아 가지고, 저렇게 귀엽게 보채면 다 되는 줄 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창문을 올렸다.
다른 애들은 역 앞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갔다. 크리스마스이브지만 아직 이른 오후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 틈에서 불쑥 솟아오른 머리를 보는 순간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반대로 정호현은 안색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얘들아, 안녕. 우리 왔어.”
정호현이 살갑게 던진 인사에 테이블에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애들이 벌떡 일어섰다.
“와, 이게 누구야. 우리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잘 지냈어? 하은아.”
“나야 뭐. 아, 맞다! 기다리다 우리 먼저 점심 먹었어.”
“잘했어. 늦게 와서 미안해.”
머리가 짧은 여자애가 호탕하게 웃으며 저보다 훌쩍 큰 정호현을 끌어안으려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냥 계속 빤히 쳐다봐 주었다. 그녀는 쭈뼛쭈뼛 팔을 도로 내리더니 나를 향해 90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호현 오빠.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 앗. 잘 지내셨어요, 선배.”
그 옆에 딸린 쪼끄만 여자애도 마찬가지였다. 정호현을 부둥켜안고 헹가래라도 칠 기세이던 놈들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하나같이 기가 죽었다. 그 사이에서 정호현이 난처하게 웃었다.
“형님들. 오셨습니까.”
상봉 현장을 묵묵히 보고만 있던 놈이 알은체를 했다. 어떻게 들어도 꼭 조폭이 할 법한 인사였다. 그는 짙은 색 베이스볼 캡을 벗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호현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빈아. 너 머리.”
모자 아래 반삭으로 빡빡 깎은 머리가 있었다. 안 그래도 포비즘적으로 생긴 놈인데 머리까지 저 지랄을 해 놓으니 험악하다 못해 흉악했다.
저게 정호현보다 네 살이 어리다고? 둘이 나란히 세워 놓고 보면 부잣집 막내 도련님이랑 경호원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정호현은 저런 새끼가 뭐가 귀엽다고 빈아, 빈아 하면서 끼고 도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참으로 더러웠다. 나도 영원아, 하고 불러 줄 것도 아니면서.
“1월에 입대라서.”
한빈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문질렀다. 일부러 앳된 척 쑥스러운 척 하는 것 같아 심기가 한층 뒤틀렸다. 틈만 나면 정호현한테 같잖은 수작 부리는 거 다 봤는데, 씨발.
“벌써 가?”
“예. 어차피 올해는 쭉 휴학했고, 내년에 복학해 봤자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요.”
“이상하게 보다니. 빈이 너, 무슨 일 있었어?”
“별것 아닙니다.”
“별거 아닌데 1학년만 마치고 계속 휴학하다 바로 입대해? 우리야 학교 자체가 없어졌으니 강제 n수생 신세지만, 넌 아니잖아.”
“그냥…….”
“응, 그냥.”
“말 걸고 쳐다보고, 그때 있었던 일 물어보고…… 자꾸 제가 불쌍하다고 해요.”
그 말에 모두 낯빛이 어두워졌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인터뷰를 전부 거절한 나와 정호현은 괜찮았지만, 언론에 얼굴이 팔린 사람들은 원치 않는 관심을 잔뜩 받아야만 했다. 커뮤니티 사이트 수백 곳에 인터뷰 캡처 사진이 돌아다녔다. SNS에서는 생존자 혹은 희생자의 지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나타났다. TV고 컴퓨터고 스마트폰이고 죄다 환멸이 났다.
분위기가 한도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오하은이 애써 화제를 돌렸다.
“호현아. 너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안색은 또 왜 이래? 안 그래도 하얀 게, 아주 햇빛도 못 받은 것처럼.”
“…….”
정호현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그는 여러모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까 차에서 정액이 더 안 나올 때까지 섹스하고 온 탓에 아직까지 기진맥진했다. 잔뜩 울어서 눈시울은 빨갛고 속눈썹은 아직 살짝 젖어 있었다. 두꺼운 겨울옷 아래에는 내가 남긴 자국이 잔뜩 있을 것이다.
김나혜가 까치발을 한껏 들어 그를 심각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다 있는 용기를 죄다 쥐어짜 내 나를 쏘아보았다.
“우, 우……. 우리 호현 오빠, 괴, 괴롭히지 마세요!”
이건 또 뭔 개소리지.
“선배가 오빠 때렸죠? 울렸죠?”
내 어깨, 아니, 가슴팍에나 올까 싶은 여자애가 작은 주먹을 말아 쥐고 항의했다. 정호현의 몰골을 보고 내가 그를 두들겨 패서 울리기라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호현이 그 애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랬다.
“나혜야. 그런 거 아니야. 나 맞은 적 없어.”
“왜 그러셨어요! 이 오빠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와, 진짜 너무한다!”
“나 때릴 데 많은데. 아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호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애가 저러는 게 어이없겠지.
“오빤 또 착해 빠져서 맞고만 있었죠?”
“안 맞았다니까.”
“맞았잖아요! 막 쌍욕도 듣고 멱살도 잡혔죠? 밀쳐져서 저 멀리 날아갔죠?”
“내가 그런 짓 당하고도 참을 것 같아? 나 그때 중도에서 몸싸움하는 거 못 봤어?”
“봤으니까 이런 말 하는 거죠. 오빠 갑자기 코피 터지고 기절하는 바람에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
둘은 나를 앞에 두고 한참 동안 삐악거렸다. 이대로는 저 같잖은 대화가 영영 안 끝날 것 같았다. 소파 등받이를 비스듬히 짚고 이야기를 듣다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서, 지금.”
둘 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정호현을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얘 괴롭혔다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돌이켜 보니 별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뭐. 다른 의미에서 괴롭히긴 했…….”
“으악, 형!”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호현이 달려들어 내 팔을 확 끌어당겼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창백하던 얼굴에 확 핏기가 돌았다.
“우리 저기 음료 주문하러 가요.”
그가 내게 팔짱을 끼고 카페 카운터 쪽을 가리켰다. 귓바퀴까지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워서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카페 직원이 우리를 향해 물었다.
“주문 도와 드릴까요?”
이제 정호현은 카페에 가면 내게 뭘 마실 건지 묻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어차피 시키는 건 매번 똑같으니까.
“딸기 주스랑 아메리카노 한 잔씩 주시고요. 아, 아메리카노는 따뜻한 거요.”
“네.”
“형, 먹을 것도 시켜요? 우리 늦어서 점심 못 먹었잖아요.”
그가 베이커리 진열장을 살피며 물었다. 나도 덩달아 시선이 그리로 갔다. 케이크와 빵, 쿠키 종류가 몇 개 있었다.
“응.”
“뭐 먹을까요?”
“몰라. 케이크?”
“이따 형 생일 케이크 먹을 건데.”
“그럼 아무거나.”
카페 안은 난방 중이라 좀 더웠다. 나는 정호현이 올해 봄에 선물해 줬던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갑갑해서 목도리 매듭을 느슨하게 했다.
“햄 치즈 파니니도 하나 추가해 주세요. 이거 데워 주시는 건가요?”
“…….”
“저기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정호현이 진열장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직원의 시선이 내게, 정확히는 내 눈높이 조금 아래에 고정되었다. 그는 목에 그어진 흉터를 보고 있었다. 정신이 팔려서 정호현의 말도 못 들을 정도로.
집에서 정호현과 단둘이 있을 땐 몰랐다. 그 애는 내 몸에 흉터가 얼마나 있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흉터투성이 가슴에 안기고 굳은살이 가득한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걸 보면 놀라거나 혐오스러워할 거라는 사실을.
의아해하던 정호현의 얼굴에서 표정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는 입을 다물고 상대를 한참 빤히 보았다. 내겐 거의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어, 앗! 네, 손님. 햄 치즈 파니니 말씀이신가요?”
“……네.”
“데워 드릴게요. 음료랑 같이 드리면 될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정호현이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입매만 올려 싱긋 웃었다. 그가 자신의 목 부근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방금 무례하셨던 거, 아시죠?”
당황한 직원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입을 벙긋거렸다. 그는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 사과했다. 그도 정호현 또래, 많아 봤자 내 또래로 보였다.
“그게, 저. 죄,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정호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서늘하던 얼굴에 뒤늦게 온기가 돌아왔다. 주문한 음식을 받아 테이블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눈을 연거푸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곤란할 때 나오는 저 애의 버릇이었다.
“미안해요. 기분 나빴어요?”
“뭐가?”
“형 일인데 제가 멋대로 나서서요.”
“글쎄. 아무 생각 없었는데.”
다른 놈들이 날 꺼려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래 봤자 내 앞에선 쫄아서 찍소리도 못 할 테니까. 정호현만 날 싫어하지 않는다면 나는 뭐든지 괜찮았다. 그 애마저 나를 혐오스러운 괴물 보듯이 본다면, 정말로 영원히 죽어 버리고 싶을 것 같았다.
6인용 테이블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주스 속 딸기를 빨대로 툭툭 건드렸다.
“오빠, 저 이번에 수능 본 거 아세요?”
“그랬어? 몰랐네. 알았으면 선물이라도 보내 줬을 텐데. 공부하느라 힘들었겠다.”
“전 어차피 1년밖에 안 다녔으니까요. 그냥 반수 하는 셈 치고 한 번 더 봤어요.”
“야, 있잖아. 수능 날 나혜 얘가 나한테 전화로 얼마나 징징거렸는지 알아? 마킹 밀린 것 같다느니, 시간 분배 실패해서 망했다느니 우는소리 엄청 했어. 그래 놓고 막상 까 보니까 점수 잘 나왔더라?”
“헤헤. 그런 얘기 할 사람 언니밖에 없는 거 알잖아.”
“하은이 너는? 가을부터 학교 다닌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응, 뭐. 근처 대학교 들어가긴 했는데. 특별 T/O로 들어간 거라 다 알아보더라고. 참사 생존자라고 편입 다 받아 주는 게 어디 있냐고, 역차별이래. 그래서 그냥 등록 취소했어.”
“아…….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살아 보겠다고 간신히 탈출해서 나왔더니 세상이 날 못살게 구네. 유학이라도 가야 하나.”
다들 전공도 취향도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참사 발생 당시에 백일대 내부에 있었다는 것 외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당장 나와 정호현만 봐도 그랬다.
적막하던 겨울날 강의실 창문 너머로 그를 훔쳐보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 음란한 상상까지 했다. 하지만 굳이 그 애를 찾아내 연락처를 묻거나 안면을 터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짧은 관찰만으로도 정호현은 나와 전혀 맞지 않는 부류라는 것을 직감한 탓이다. 우리는 수채화와 유화처럼 질감부터 달랐다. 저 애가 나를, 혹은 내가 저 애를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시도도 해 보기 전에 단정 지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내가 허겁지겁 도망치다 하필 정호현의 방이 있는 복도를 지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정호현이 절묘한 타이밍에 문을 열어 나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면. 저 애와 내가 살면서 한 번이라도 마주치는 순간이 있긴 했을까. 크리스마스에 벌어진 재앙이 전혀 연관 없는 삶을 살던 우리를 만나게 했다. 섞일 일 없다 믿었던 두 세계가 섞였다.
“어? 저기요, 아가씨.”
낯선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수다를 떨던 이들이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중년 남녀 한 쌍이었다.
“혹시 그, TV 나온 아가씨 아닌가? 맞네, 맞아. 뉴스에도 나오고 백일대 참사 특집 다큐에도 나왔잖아. 생존자 김 모 양. 예쁘장하게 생겨서 딱 알아봤지.”
“어휴,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 그냥 좀 가.”
“아니. TV에서만 보던 사람 실제로 보니까 신기하잖아.”
남자는 옆에서 여자가 팔을 잡아당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큰 소리로 떠드는 남자에게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대낮부터 거하게 걸친 모양이었다.
“고생 많았죠? 그 다큐멘터리 보고 우리 집사람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학생들 불쌍하다고. 가만 보자. 이거 커피라도 한잔 사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뇨. 괜찮아요.”
김나혜는 마시던 커피 잔을 양손으로 꽉 쥐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받아요. 아저씨가 친구들 것까지 다 사 줄 테니까.”
“진짜 괜찮은데요…….”
“저기요. 안 마신다잖아요.”
보다 못한 오하은이 거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물러서기는커녕 한층 언성을 높였다.
“내가 뭐 몹쓸 짓 한대? 딸 같아서 그러지. 우리 딸도 올해 대학교 들어가는데, 남 일 같지가 않아서 그래.”
“진짜 내가 못살아! 여보. 애꿎은 학생들 붙들고 무슨 소리야. 그냥 가자니까?”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쏠렸다.
“아, 그래. 실례지만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그 바이러스인지 뭔지 하는 거, 대체 어떤 쌍놈의 새끼가 퍼뜨린 거요? 다큐 봐도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던데. 아가씬 직접 겪었으니까 알 거 아냐?”
“…….”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퍼졌다. 직원도 손님들도 이쪽을 기웃거리기만 할 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껏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정호현이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실롄 거 알면 묻지 마시죠.”
“그냥 반가워서 말 몇 마디 건 것 가지고 왜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어. 응?”
“본인이 싫다지 않습니까.”
“자넨 또 뭐야. 이 아가씨 남자 친구인가?”
듣던 중에 좆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누가 누구 남자 친구야. 절로 인상이 확 구겨졌다. 김나혜가 용기를 내어 나섰다.
“아저씨. 그만 좀 하세요. 커피 마시러 오셨으면 조용히 커피만 마시고 가시라고요!”
“이것들이 어디서 어른한테 싸가지 없이…….”
“여보, 제발 좀.”
“인터넷 지라시 보니까, 어? 그거 다 조작이라던데. 간첩 새끼들이 우리나라 사람들 다 죽이려고 일부러 바이러스 풀어 놓은 거라던데! 너희도 한통속 아냐? 다 짜고 치는 거 아니냐고!”
간첩? 일부러? 짜고 친다고? 머릿속에 차가운 불꽃이 확 일었다. 내가 끝없이 반복되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버텼는지, 탈출한 후에도 하루하루 무슨 마음으로 살았는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따위로 지껄일 수는 없었다.
버럭버럭 질러 대는 고함 소리가, 한껏 일그러진 얼굴이 이상하게 낯익었다. 저런 큐비즘적이고 전위적으로 생긴 꼰대 새끼를 내가 알 리가 없는데. 어쩌다 알게 됐더라도 곧 머릿속에서 지웠을 텐데. 어디서 봤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놈을 노려보다 불쑥 입을 열었다.
“4133?”
갑자기 튀어나온 네 자리 숫자에 모두가 나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상대방의 안색이 변했다. 내 짐작이 맞았다. 씩 웃었다.
“아까 지랄하던 흰색 승용차. 너지?”
“뭐?”
“위협 운전에 음주 운전까지. 이야, 씨발. 가지가지 하네. 누구 하나 차로 치고 감방에서 크리스마스 보내게?”
절반도 안 남은 딸기 주스를 빨대로 휘휘 저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남자의 얼굴이 울긋불긋 달아올랐다.
“이 미친…… 미친놈이 뭐라고…….”
그는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한 대 갈길 듯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나를 정면으로 보고 주눅이 들었는지 정말로 때리진 못했다. 술기운이 올라 벌건 이마를 타고 땀이 흘렀다.
빠각. 살벌한 소리가 났다. 한빈이 앉아 있는 방향에서였다. 그는 여전히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앞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린 포크가 형편없이 찌그러진 채였다. 가느다란 일회용 플라스틱 포크도 아니고, 제법 크고 튼튼한 금속제 포크가. 기겁한 정호현이 그의 굵직한 팔뚝을 툭툭 두드렸다.
“잠깐만, 빈아. 너 손에.”
“…….”
“빈아, 한빈!”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빈이 손을 놓았다. 꼬깃꼬깃 구겨진 포크가, 아니, 한때 포크였던 것이 쟁반에 툭 떨어졌다. 우리는 물론이고, 나를 향해 폭언을 퍼부으려던 남자와 그 옆에 선 여자도 질린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저, 손님. 매장 내에서 소란을 피우시면 다른 분들께…… 헉.”
뒤늦게 주의를 주러 온 아르바이트생마저 덩달아 놀랐다. 그 틈을 타 여자가 남자를 카페 문 쪽으로 억지로 떠밀었다.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 이게 다 무슨 망신이야.”
포크를 망가뜨려 죄송하다고, 한빈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몇 번이나 꾸벅꾸벅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포크값을 배상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생은 내 쪽을 흘긋 보더니 떨떠름해하는 낯으로 사양했다. 아까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날 희대의 흉악범 보듯 쳐다보는 표정이 좆같아서 면상에 포크를 꽂아 주고 싶었다.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모두가 우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대놓고 여길 보는 사람도 있었고, 아닌 척하면서 손으로는 휴대폰 키패드를 불이 나게 두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메신저나 SNS에 ‘야, 대박. 나 지금 카펜데 여기 난리 났음.’ 이딴 말이나 쳐 보내고 있지 않을까. 뭘 힐끔거리고 지랄이냐고 윽박지르려다 참았다. 그러면 또 현이가 곤란해할 테니까.
“이제 가자.”
손을 슬쩍 뻗어 정호현의 손끝을 쥐었다. 그는 나를 돌아보고 쓰게 웃었다. 그 애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 * *
카페 옆 주차장에 세워 뒀던 차에 애들을 태우고 펜션을 향해 달렸다. 다른 놈들, 특히 한빈은 태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요즘 편입 준비 때문에 부쩍 피곤해하던 정호현이 저렇게 들뜬 건 오랜만에 봤다.
“차 진짜 좋다. 아, 맞다! 있잖아요, 호현 오빠.”
뒷좌석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번 달에 드디어 면허 땄어요. 이제 시동 거는 법 알아요. 겨울철에 배터리 방전되는 것도 알고요.”
“와. 수능도 보고 면허도 따고, 나혜는 올 한 해 엄청 열심히 살았네.”
조수석에 앉은 정호현이 뒤를 돌아보고 붙임성 좋게 웃었다. 저런 시답잖은 잡담에까지 일일이 반응해 주는 게 참으로 정호현다웠다. 내 앞에선 바짝 얼어서 아무 말도 못 하던 놈들이 쟤 앞에만 서면 수다스러워지는 이유가 아닐까.
“빈이 넌 면허 있어?”
“응.”
“언제 땄는데?”
“오토바이는 고등학생 때부터 탔고, 자동차 면허는 수능 끝나고…….”
“고등학생?”
차 안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하, 하하하. 빈이 너, 참 멋진 청춘을 보냈구나. 지금도 타고 다녀?”
“아니. 형이 위험하다고 타지 말라고 해서.”
“하은 언니도 스쿠터 타고 다녔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캠퍼스가 하도 넓으니까, 다른 건물에서 하는 강의 연속으로 있을 땐 뛰어서는 제시간에 못 가겠더라고.”
“스쿠터는 어디 있어? 언니가 타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우리 동아리 어떤 새끼가 훔쳐서 튀었어. 내가 스쿠터 키 맨날 부실 서랍에 넣어 놓는 거 알고 쏙 빼 갔더라. 그 잔머리를 야구 시합할 때 좀 써먹어 보지.”
“뭐? 와, 참 나. 진짜 뻔뻔하네. 도둑은 잡았어?”
오하은은 잠깐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정문 근처에서 발견됐어. 망가진 스쿠터랑 같이. 헬멧도 안 쓰고 훔친 스쿠터로 급하게 도망가다가, 가로등 들이받고 날아가서…… 즉사했대.”
“……아.”
“그나마 다행이지. 곧바로 심장이 멎어서 뜯어 먹히진 않았다니까.”
“…….”
“…….”
등 뒤로 서늘한 침묵이 번지는 것을 느끼며 핸들을 꺾었다. 차는 펜션 앞마당에 들어섰다. 바퀴 아래에서 잘그락잘그락 자갈이 굴렀다.
정호현은 다른 애들과 연락하면서 몇 달 전부터 내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 물론 내 의사는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나야 아무 관심 없는 놈들 낯짝을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느니 그냥 집에 처박혀 정호현을 껴안고 온종일 뒹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보기 드물게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내년부터는 몰라도 올해만큼은 떠들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해 주고 싶다고 했다.
다들 다사다난한 1년을 겪으며 사람 많은 곳엔 신물이 났다. 그래서 고른 게 여기였다. 독채로 되어 있어서 타인과 마주칠 일이 없는 산속의 펜션.
“경치 좋다. 공기도 엄청 맑고. 어딜 봐도 다 산이네.”
“그러게. 언니, 저쪽 산 봐 봐. 꼭 우리 학교 뒷산 같지 않아?”
별생각 없이 감탄하던 김나혜가 한 박자 늦게 흠칫했다.
“……미안.”
안에 들어와 짐을 풀고 각자 사 온 것들을 꺼냈다. 먼저 오하은이 백팩을 열었다. 그 안에 초록색 소주병이 빼곡했다. 다른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언니.”
“아니, 소주만 대체 몇 병을…….”
주변에서 경악에 찬 반응들이 쏟아졌다. 오하은이 뻐근한 어깨를 빙빙 돌리며 뿌듯하게 웃었다.
“난 한 놈만 조져.”
다음으로 김나혜도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자잘한 것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이거는 차 안에서 멀미할까 봐 멀미약 가져온 거고요, 숙취 해소제도 갖고 왔어요. 과자랑, 초콜릿이랑, 음료수랑……. 라면도 좀 챙겼어요. 이건 계란이랑 치즈예요. 라면에 넣어 먹으면 맛있으니까. 아, 맞다. 떡볶이도 있어요. 여기 당면 사리도요.”
“그래. 우리 나혜, 고생했네. 덕분에 맛있는 거 많이 먹겠다. 고마워.”
정호현이 이미 반쯤 해탈한 것 같은 얼굴로 온화하게 웃었다.
“형이 사 줬습니다.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니까.”
한빈의 가방에는 육포와 견과류 같은 마른안주와 캔 맥주가 잔뜩 들어 있었다. 아주 호프집이라도 차릴 기세였다.
“나는 이거.”
그리고 정호현이 팩에 담긴 생 연어와 새우를 내놓았다. 과자나 인스턴트 같은 싸구려 안주로 때우기 십상인 대학생들 술자리에선 보기 힘든 고급 메뉴였다.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다.
“와.”
마지막으로 내가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 온 걸 내려놓았다. 묵직한 아이스박스가 거실 바닥에 놓이자 쿵 소리가 났다. 뚜껑을 열었다. 아이스 팩을 잔뜩 넣어 신선한 상태로 가져온 소고기가 가득했다.
“오다 주웠어.”
손을 털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감탄했다.
“우와.”
마당에 있는 바비큐 그릴에 소고기를 구웠다. 그동안 다른 애들은 밥과 밑반찬을 준비했다. 마음만 같아선 정호현한테만 이것저것 해 먹이고 다른 새끼들은 생고기를 처먹든 밖에 나가 풀을 뜯어 먹든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싶었다.
아까보다 하늘이 좀 더 흐려졌다. 고기를 굽느라 불 앞에 서 있는데도 덥기는커녕 쌀쌀했다. 이러다 밤새 눈이 내려서 내일 돌아갈 때 귀찮아질지도 모르겠다.
불티 섞인 연기가 피어올라 적막한 겨울 하늘에 번졌다. 그 위로 내 입김이 하얗게 스몄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화염에 휩싸인 기숙사를 등지고 정호현의 손을 잡은 채 도망칠 때도, 보닛에 불이 붙은 자동차에서 황급히 빠져나와 금속 벽을 넘을 때도 보았다.
“도와줄 거 있어요?”
정호현이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애초부터 일을 거들 작정으로 왔는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였다. 아까 차에선 내 밑에 깔려 정신없이 울기만 하던 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반듯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꼴에 자기도 남자라고 여자애들 틈에 둘러싸이면 머리가 위로 불쑥 솟았다.
“이제 제가 구울까요? 형 운전도 혼자 다 해서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몸 좀 녹여요. 춥잖아요.”
소매 아래로 드러난 정호현의 팔뚝을 흘긋 보았다. 전보단 덜하지만 아직 주삿바늘 자국이 있었다. 피부가 희어서 그런지 원래 살성이 약한 편인지, 바늘에 찔린 곳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발갛게 피가 맺혔다. 저런 놈한테 고기 굽는 걸 시키고 안에 들어앉아 받아먹기만 하라고? 처먹은 고기가 죄다 얹힐 판이다.
“응. 도와줄 거 있어.”
“뭔데요?”
나는 고기 굽는 집게를 들지 않은 손으로 까딱 손짓했다. 정호현이 쪼르르 다가왔다. 내 옆에 선 그 애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다른 애들보다 훌쩍 크면 뭐 하는가. 내가 보기엔 좆만 한데.
“있잖아.”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둥그스름하고 말랑한 귓바퀴에 솜털이 곤두섰다. 날이 추워서인지 내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해서인지는 모르겠다.
“…….”
정호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짝 쫄아 있는 게 다 보여서 웃겼다. 일방적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손을 내려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악!”
그 애가 소스라치게 놀라 나를 확 밀어냈다. 매번 저렇게 반응하니 몇 번을 놀려 먹어도 질리질 않는다. 그는 얼굴이 빨개져선 혹여나 누가 봤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보며 킥킥 웃었다.
“밖에서 고기 구우려니까 손이 시려서. 우리 현이 따끈한 엉덩이 만지면서 손 좀 녹이려고 했지.”
“영원이 형. 제발요. 지금 우리 둘만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근데, 현아.”
“왜요.”
“난 왜 영원아라고 안 불러 줘?”
“뭐라고요?”
정호현이 별 개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을 했다.
“너 다른 새끼들한텐 이름 잘만 불러 주잖아. 그것도 존나 다정하게.”
“쟤네는 동생들이잖아요. 하은이는 동갑이고.”
“그럼 나도 이제부터 네 동생 할래.”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말하던 중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나한텐 선배나 형 같은 호칭으로만 부르다 가끔 선심 쓰듯 영원이 형이라고 불러 주는데. 그렇다고 자기야 소리를 자주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여기 있어요. 호현이 형.”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집게로 들고 있던 고기가 눌려 육즙이 찍 새어 나왔다. 그걸 본 정호현이 움찔했다.
“내가, 씨발. 있다면 있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어떻게.”
“그냥 이름만 한 번 불러 달라니까요? 그게 그렇게 좆같이 어려우세요? 네? 호현이 형?”
이를 악물고 꼬박꼬박 형 소리를 붙였다. 정호현이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영…….”
벌컥. 안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오하은이 고개를 내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빨리 들어와! 밥 다 됐어!”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한껏 인상을 쓴 나와 눈이 마주치고, 오하은은 곧바로 한 음절을 덧붙였다.
“……요.”
* * *
노릇노릇 잘 익은 소고기를 메인으로 다른 음식 몇 가지를 곁들여 상을 차렸다. 메뉴 조합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각자 자기들 먹고 싶은 것만 사 왔는데, 한 상 가득 차려 내니 그래도 제법 구색은 갖췄다. 널찍한 상 위로 여러 쌍의 젓가락들이 바삐 오갔다.
마트에서 장을 보다 정호현에게 먹이고 싶은 음식이 눈에 띄면 망설임 없이 카트에 넣고, 끼니때가 되면 상을 차리고, 맛있다고 눈을 빛내는 그 애를 보면서 나도 수저를 들고. 다른 이들이 매일매일 당연하게 누리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까지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홀로 싸워야 했다. 다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유로.
배를 채우고 본격적으로 술판을 벌이기 전에, 커다란 케이크가 등장했다. 듬뿍 바른 생크림 위에 딸기가 빈틈없이 가득 얹혀 있었다. 멀리서 얼핏 보면 그냥 딸기를 산처럼 쌓아 둔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정호현이 불붙인 초를 꽂은 케이크를 들고나오고, 뒤에서 다른 애들이 박수를 쳤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나 싶다. 내가 좋아할 만한 케이크를 골라 사고 여기까지 소중하게 가져와서는, 꼬물꼬물 초에 불도 붙였을 걸 생각하니 깜찍해 죽겠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영원이 형, 생일 축하합니다!”
모두가 목청껏 노래를 부르다 ‘사랑하는’ 부분에서 내 눈치를 살피며 입만 벙긋거렸다. 저 새끼들에게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결국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부른 건 정호현뿐이었다.
“형, 초 불어요. 빨리요.”
정호현이 잔뜩 들떠서 재촉했다. 말갛게 웃는 그 애의 얼굴을 보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어 버렸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촛불을 단숨에 불어 껐다. 다시금 환성과 박수가 터졌다.
작년 생일에는 어두컴컴한 술집에서 좆같이 말아 놓은 생일주를 받았다. 올해 생일에는 환하고 따뜻한 펜션 거실에서 딸기가 가득한 케이크에 꽂힌 초를 불었다. 옆자리에는 저열한 농담을 주워섬기며 낄낄대는 동기 놈 대신 정호현이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한 조각씩 자른 딸기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각자의 앞에 놓았다. 마른안주와 과자들을 먹기 좋게 펼쳐 놓고 잔에 술을 채웠다. 종이컵 가득 소주를 따른 오하은이 외쳤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위하여!”
웃기는 구호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지 서로를 돌아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술잔이 몇 번 돌자 분위기가 풀어졌다. 애초에 접점 없는 삶을 살던 이들이라, 신변잡기에 대해 떠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나오는 건 그때의 이야기였다.
“그때 본관에 있던 사람들이요.”
“체대생들?”
“처음에 좀 찝찝하긴 했는데, 그래도 말도 워낙에 잘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길래 들어갔거든요. 근데 그런 꼰대 쓰레기들일 줄은 몰랐어요.”
“그때 깜짝 놀랐어. 창고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나갔는데, 너랑 하은이가 있잖아.”
“나도 놀랐거든? 호현이 너 보자마자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럴 뻔했다니까.”
“아, 맞다. 호현 오빠가 빈이랑 저랑 동갑이라고 알려 줬잖아요. 그때 저 비명 지른 거 기억나세요?”
“기억나지. 소리 하도 커서 좀비들 다 몰려오는 줄 알았어.”
“그거 아세요? 심지어 빈이가 저보다 생일 늦어요. 빈아. 너 11월생이었지?”
“어. 11월 30일.”
“빈이 얘가 생긴 건 좀 무서운데, 알고 보면 되게 귀여워. 나 저번에 빈이가 형이랑 통화하는 거 들었는데, 뭐라는지 알아? 형아래, 형아. 빈아. 그때 형아라고 한 거 맞지?”
“……예.”
“꺅, 어떡해! 진짜 귀여워.”
“호현이나 영원 선배나, 다른 사람들한텐 꼬박꼬박 형님이라고 하면서. 이경환이었나? 그 대학원생한테도.”
“…….”
“…….”
죽은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모두들 기분 좋게 취해서 떠들다가, 찬물을 정통으로 맞은 듯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한순간에 침울한 정적이 번졌다.
“1년 지났네. 벌써. 아직도 그때 일 생생하게 다 기억나는데.”
“그러게.”
“우리 작년 이맘때 뭐 하고 있었지?”
“난 방에 틀어박혀서 과제 하고 있었어.”
“나는 동아리 MT 계획 짠다고 애들이랑 부실에 있었고.”
“전 있잖아요. 그때 죽은 사람들, 진짜 죽은 건지 실감이 안 나요. 진혁이도, 이경환 씨도, 교수님도, 본관에서 같이 도망쳤던 체대생 남자애도요. 개강하고 학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사실 합동 분향소 한 번 갔다 온 적 있거든.”
오하은이 스스로 소주병을 들어 빈 잔을 채우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영정이 끝도 없이 있었어. 다들 젊은 사람들이라 따로 영정 사진을 찍었을 리가 없으니까 학생증 사진 아니면 신분증 사진을 걸어 놨더라. 가끔 아예 셀카 인화해서 걸어 놓은 곳도 있고. 물론 모르는 얼굴이 훨씬 많았는데, 가끔 아는 얼굴도 보이는 거야.”
“…….”
“중도에서 나 죽이려고 덤볐던 새끼도, 내가 야구 배트로 패 죽인 좀비도 있었어. 내가 기억하는 건 피투성이에 썩어 문드러진 모습인데, 액자 안에선 다들 좋은 옷 차려입고 웃고 있으니까…….”
오하은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눈물이 툭 떨어졌다. 종이컵 끝까지 찰랑찰랑 차오른 투명한 소주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그 애는 자신의 눈물이 섞인 소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가 뭘 잘못했을까?”
근본적인, 그러나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김나혜 또한 덩달아 훌쩍이기 시작했다. 한빈은 반쯤 남은 자신의 맥주잔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학 때까지 학교에 남은 게 잘못이었나? 안심하고 평소대로 생활하란 방송 나와서, 그것만 믿고 가만히 있었던 게 잘못이었어? 살아 보겠다고 좀비로 변한 사람들 때려죽인 게 잘못이야?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아무도 잘못 안 했어.”
산발적으로 퍼지는 울먹임을 가르고 정호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하은아. 우리는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어.”
평소엔 조금만 괴롭혀도 파드득 몸서리치면서 과민 반응을 하는 주제에. 내 눈치를 살피며 비굴하게 웃기도 하고 섹스할 때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흠뻑 울기도 하는 주제에. 이럴 때만큼은 정호현은 놀랄 만큼 차분하고 담담했다.
“끔찍한 일이 꼭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냥……. 사고였어. 언제 어디서 누가 겪을지 모르는, 천재지변 같은 사고였을 뿐이야. 그게 다야.”
1년이 지난 지금도 정호현은 여전히 적당히 야무지고 또 적당히 맹하다. 눈치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면서도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 슬쩍 발 빼는 것도, 그러다가도 정작 끝까지 불의를 못 본 체하지는 못하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나는 종종 그 애에게서 구원을 본다. 그 애가 내 품에서 자다 깨어 기분 좋게 햇볕을 쬘 때, 소년티가 남은 천진한 웃음을 터뜨릴 때, 내게 조곤조곤 다정하게 속삭일 때. 그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 고해 성사를 하면, 온화하게 풀어진 낯으로 너의 죄를 사하노라고 말해 줄 것만 같다.
그렇게 나는 매번 다시금 깨닫는다. 그 애는 나의 유일한 속박이자 영원한 해방이라고.
앙금처럼 가라앉은 슬픔을 남기고 술자리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다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잡담을 주고받았지만 한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여럿이 힘을 합해 어수선하게 어질러진 상을 순식간에 척척 치웠다. 한빈이 들고 왔던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 꾸벅 인사를 했다.
“저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좀 있으면 자정인데?”
정호현이 당황으로 눈을 연거푸 깜빡였다.
“네. 외박하면 집에서 걱정해서…….”
“늦었는데 어떻게 가려고 그래.”
“형이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자가용으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일에까지 정호현과 저 새끼가 한 지붕 아래에서 잠드는 꼴을 안 봐도 되어 다행이었다. 혹시나 한빈이 여기서 자고 가겠다고 하면 멱살을 잡아 내쫓을 의사도 있었다.
“아, 나도.”
“하은이 너도 가게?”
“빈아. 너희 형 차에 혹시 자리 남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 역까지만 데려다주시면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아, 안 되면 그냥 택시 불러서 바로 갈게.”
“아뇨. 이따 전화해서 누님 집까지 태워 줄 수 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밤길 위험하니까.”
“언니, 나도 갈래!”
다른 사람들도 속속들이 짐을 챙겼다. 이상함을 눈치챈 정호현이 다급히 나섰다.
“얘들아. 갑자기 왜 다 가려는 거야? 여기 불편해? 노는 거 재미없어서 그래?”
“어…… 음……. 호현 오빠. 있잖아요.”
“응?”
“저희도 눈치라는 게 있거든요.”
김나혜가 쭈뼛쭈뼛 고백했다. 정호현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저, 그게요.”
김나혜가 한껏 까치발을 들었다. 그 애는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도 자연스레 몸을 낮춰 주었다. 그들은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그래 봤자 한 공간에 있어서 다 들렸다.
“선배가 아까 오빠 없을 때 그랬는데요.”
“응.”
“적당히 처먹고 눈치껏 꺼지라고.”
“…….”
“방해하면 다 죽여 버린댔어요.”
정호현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았다. 마치 은신처에 간식을 잔뜩 숨겨 뒀다가 한순간에 털린 햄스터 같았다. 어쨌거나 나는 찔릴 게 없었다. 그의 시선을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뭘 봐.”
곧 모두가 떠날 준비를 마치고 현관으로 나갔다. 정호현은 그때까지도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잘 놀다 갑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영원 선배, 있잖아요. 12월 25일이 평생 끔찍한 날로 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이 다행히 선배 생일이어서, 이렇게 좋은 추억 만들어 줘서 고마워요.”
바란 적도 없는 감사 인사였다. 어쨌거나 나는 저들이 1초라도 빨리 꺼져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김나혜가 뒤돌아보았다.
“아 참, 그리고요.”
“…….”
“우리 호현 오빠 잘 부탁드려요. 헤헤.”
이윽고 펜션의 묵직한 나무문이 닫혔다. 바깥의 마당에서 언뜻 다른 자동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빈의 형인지 누나인지 동생인지, 아무튼 데리러 온다던 사람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널찍한 펜션에 비로소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다섯 명 중 세 명이 떠났을 뿐인데 온 세상이 잠든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멍하니 있던 정호현이 그제야 따졌다.
“형, 왜 저한텐 말 안 해 주고…….”
“오늘 내 생일이야. 좀 이따 날짜 바뀌어서 내일 되면 크리스마스고.”
“…….”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영원이 형.”
“생일이랑 크리스마스에, 애인 놔두고 다른 새끼들 불러서 밤새 놀겠다고?”
“형이 그렇게 느꼈을 줄은 몰랐어요. 저랑은 매일 같이 있으니까, 오늘만큼은 애들 불러서 같이 놀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 아니, 그냥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몰라. 우리 현이는 맨날 사과만 잘하지. 내 맘 같은 건 좆도 몰라주고.”
“서운하게 해서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웃음기 없는 얼굴이 제법 심각했다. 내가 이 지랄을 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그는 싫증 한번 내지 않고 매번 꼬박꼬박 받아 주었다. 수많은 회귀를 거치며 만난 모든 정호현이 그랬다. 나를 극도로 싫어하고 꺼려 하면서도 사과해야 할 땐 서슴없이 굽히고 들어왔다.
1년 전 요맘때 어떤 놈이 말했다. 내게 애인이 생기면 등에 날개가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이따 홀딱 벗겨서 살펴봐야겠다. 정호현의 벗은 몸은 수도 없이 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확인해야지. 그 김에 좀 만지고 핥기도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랑 밤새 놀려던 건 아니었어요. 여기 어차피 침실 여러 개 있으니까, 좀 놀다가 잘 때 되면.”
“나랑 둘이서만 자려고 했어?”
정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실하긴 또 얼마나 성실한지, 저 애는 고작 하룻밤 놀러 오면서도 침실 배정안까지 짜 왔다. 내일 몇 시쯤에 일어날지, 아침엔 다른 애들과 뭘 먹을지도 다 생각해 놨겠지. 그런데 어쩌나. 그 계획은 내가 박살 냈는데.
“근데, 호현아. 방을 따로 쓰면 뭐 해. 방음이 안 되는데. 너 앙앙대는 소리 다른 새끼들한테도 들려주려고?”
“네, 네?”
“너 섹스할 때 아래위로 물 질질 흘리면서 집 떠나가게 울잖아. 그거 사방팔방에 다 들려주려고 그런 거야?”
정호현의 평정이 깨졌다. 그는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오른 채 변명했다.
“그럴 생각 없었어요! 여기선 그냥, 잠만 자고 가려고 했어요. 스킨십은 집에 돌아가서 해도 되니까.”
“뭐? 크리스마스이브에 외박하면서, 심지어 한 침대에 누워서, 섹스를 안 한다고? 그럼 대체 밤새 뭐 하려고 했는데. 실뜨기? 끝말잇기? 좆같은 베개 싸움?”
“같이 누워서 얘기하거나…….”
“얘기는 좆 박으면서 해도 되잖아.”
“날짜 바뀌기 전에 다시 생일 축하해 주거나.”
“축하하는 데 얼마 걸린다고. 지금 해도 되겠네. 응? 뭐라고? 영원이 형 생일 축하한다고? 그래. 고마워.”
“…….”
“다음은 뭔데. 설마 이것만 하고 손만 잡고 자려고 했어?”
정호현이 소심하게 쥐어짜 낸 제안들이 죄다 기각되었다. 그는 눈을 연달아 깜빡이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게 다 보였다.
“둘이서만 한잔 더 하는 거요. 저 형이랑만 마시려고 스위트 와인 따로 사 왔는데.”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무심결에 픽 웃었다. 정호현은 쓸데없는 부분에서까지 착실하게 로맨틱했다. 첫 데이트랍시고 장미꽃 다발을 사 들고 왔을 때부터 알아봤다. 틈만 나면 저 애를 깔아 눕히고 잔뜩 물고 빨고 녹여서 박을 생각밖에 없는 나와는 정반대였다.
펜션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이제 곧 자정이었다. 모든 게 시작된 그날이 1년의 시간을 거쳐 다시 돌아오려 했다. 불안함인지 죄책감인지 모를 것으로 가슴이 일렁였다.
“그래. 와인 마시자. 얘기……. 그래, 얘기도 좀 하고. 네 말대로.”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무드 등 하나를 제외한 조명은 모두 껐다. 그래도 사물을 분간하는 덴 문제가 없었다. 창밖의 뜰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으므로. 트리에 칭칭 감긴 꼬마전구들이 반짝일 때마다 방 안까지 온화한 빛깔로 물들었다.
정호현이 오프너를 능숙하게 돌려 와인을 열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코르크 마개가 뽑혀 나왔다.
“이건 언제 준비했어? 케이크도 말 안 하고 사 왔잖아.”
고개를 숙이고 와인을 따르는 데만 집중하던 그가 나를 흘긋 올려다보더니,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씩 웃었다.
“오다 주웠어요.”
둥근 와인 잔에 가득한 액체에서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확 풍겼다. 우리는 포도 주스나 다름없는 달콤한 와인으로 건배했다. 내게도 혀가 아리도록 달게 느껴지는 술인데, 정호현은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마셨다.
우리는 조용히 잔을 비웠다.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따금 싱거운 잡담을 나누고, 바깥에 영롱하게 반짝이는 트리를 구경했다. 큼직한 와인 병에 내용물이 절반 정도 남았을 무렵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형은 작년 생일에 뭐 했어요? 70주년 기념관에서 제가 물었을 땐……. 기억 안 난다고 했었죠.”
“그랬지.”
“아직도 기억 안 나요?”
그때 나는 한계 직전까지 닳아 문드러져 있었다. 셀 수 없는 회귀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었다. 내 이름이 뭐였는지, 내가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 내가 몇 살인지조차 가끔 헷갈렸다. 그래서 모든 걸 정호현과 연결하여 수없이 되새기고 되새겼다. 정호현은 스물넷, 그러니까 나는 두 살을 더해서 스물여섯. 그 애는 경영학과고 나는 조소과. 그런 식으로라도 나를 잊지 않으려 발악했다.
학교를 탈출하고 나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깥세상에 처음 나와 보는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까맣게 잊고 있던, 누군가에겐 당연한 상식일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푹 팬 상처에 새살이 차오르듯.
나는 빈 와인 잔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유리 표면에 크리스마스트리의 주황색 불빛이 아롱졌다.
“학교 밖에서 술 마셨어. 새벽까지.”
“형 생일이라서 모인 거예요?”
“응. 그러다 누가 장소 옮겨서 더 마시자고 해서, 자리 접고 학교 돌아왔는데.”
“네.”
“…….”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밧줄이 목을 칭칭 감아 틀어쥐고 있는 것 같았다. 정호현이 자연스럽게 와인 병을 들어 내 잔을 도로 채웠다.
“더 말 안 해도 돼요. 기억 안 나는데 억지로 기억할 필요 없어요. 다른 얘기 할까요?”
때마침 밖에서 웅장한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있는 큼직한 원목 괘종시계가 울리는 소리였다. 시계는 정확히 열두 번을 울리고 멈췄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와인으로 가득 찬 잔을 들어 올리려다 말았다. 대신 주먹을 꽉 쥐었다.
“정호현.”
“네.”
“현아.”
“…….”
정호현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 또한 와인 잔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작고 둥근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밖에서부터 들어오는 트리 불빛이 그의 한쪽 뺨을 환하게 적셨다. 빛을 받는 반대편에는 푸른 음영이 졌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대로 평생 묻어 두고 살자고 다짐했다. 솔직히 말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날짜가 12월 25일에 가까워질수록 그때의 꿈을 꾸는 횟수가 늘어났다. 꿈을 거듭할 때마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던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그때 나눴던 어수선한 대화가, 공기 중에 퍼지는 술 냄새가, 차를 타고 캠퍼스로 들어가면서 느꼈던 묘한 기분이 바로 어제 겪은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불현듯 알았다. 내 죄를 고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영영 크리스마스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말할 기회는 다름 아닌 지금이었다. 반드시 지금이어야 했다.
“사실 기억나. 그날 뭐 했는지.”
“…….”
“그렇게 학교에 돌아와선……. 한잔 더 하러, 실험동에 갔어.”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정호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깔고 테이블만 보았다. 내 입을 빌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 * *
“우리 존나 불쌍하지 않냐? 크리스마스인데 어디 가지도 못하고 거지 같은 산골짜기에 처박혀서.”
“취업도 안 되는 전공인데 또 돈은 오지게 많이 들어. 재료비 다 합치면 벌써 차 한 대 뽑고 남았죠? 서울에 자취방 구했죠?”
“얘들아, 조금만 조용히 하자. 너무 시끄러우면 경비원 아저씨 오실지도 몰라.”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아 술만 들이켰다. 쓰기는 더럽게 써서 절로 인상이 써졌다. 내일 숙취가 걱정되었지만 일단 지금은 알 바 아니었다.
“야.”
옆에 있는 새끼를 툭 쳤다. 목젖이 다 보이도록 크게 웃어 가며 떠들던 놈이 어수룩한 낯짝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고 빈 잔을 내밀었다.
“따라 줘.”
“어, 어.”
그가 재깍 술병을 들어 내 잔을 채웠다. 이때다 싶어 다른 놈들이 끼어들었다.
“엇, 나도. 혼자 마시기 있냐?”
“다 같이 짠 하자.”
“영원이 원래 소주 맛대가리 없다고 잘 안 마시지 않냐?”
“생일이라 좀 달리고 싶나 봐. 그렇지?”
뭔 헛소린가 싶었다. 대답 대신 그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술기운이 올라 녀석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상대도 맛이 가 있는 건 마찬가지라, 그래도 좋다고 히죽거리며 술을 받았다.
여러 명에게 한 잔씩 따르니 순식간에 한 병이 동났다. 다들 왁자지껄한 소리를 지르며 잔을 맞댔다. 그러다 누군가의 눈먼 팔에 컵라면 용기가 부딪쳐 쓰러졌다. 안에 남아 있던 국물이 쏟아져 내 소매를 적셨다.
“아, 씨발.”
원래도 거의 없던 인내심이 술을 마셔서 한층 더 희박해진 상태였다. 곧바로 욕이 튀어 나갔다. 검은 옷이라 겉으로 보기엔 얼룩이 진 것 말고는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라면 냄새가 진동했다. 축축하고 기름진 국물이 맨살에까지 스몄다. 한마디로 좆같았다.
“헉. 미, 미안.”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더러워졌다. 허둥지둥 사과하는 놈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어디 가?”
“내 방.”
“갑자기 왜?”
“네가 꺼지라며. 그만 처먹고 좀 꺼지라고 라면 들이부은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어, 저기.”
대학원생이 나를 불렀다. 그는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채로도 용케 말을 이었다.
“랩실에 세제 있는데. 일단 그걸로 얼룩 좀 뺄래? 기숙사까지 가면 옷에 물 다 들 것 같은데.”
한숨을 쉬고 돌아보았다.
“랩실요?”
“응. 키 받아.”
그가 들고 있던 카드 키를 휙 던졌다. 잔뜩 취해 있어서 조준이 살짝 빗나갔다. 팔을 쭉 뻗어 아슬아슬하게 받았다.
“어느 랩실요.”
“저쪽 복도 끝에서 세 번짼데. 문 한 번 더 열고 들어가서, 안쪽 실험실에 있어.”
“한 번 더 연다고요?”
“그냥 보면 알아.”
그는 대답 대신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젖혔다. 저 꼴이 된 인간한테 자세한 설명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카드 키를 쥐고 몸을 돌렸다.
건물 내부가 온통 깜깜한 가운데, 오아시스처럼 유일하게 불이 켜진 휴게실이 등 뒤로 점점 멀어졌다. 시야 가득 새카만 복도가 펼쳐졌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일어나서 걸으니 취기가 확 번졌다. 어디가 어딘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주정뱅이처럼 중얼거리면서 복도에 늘어선 문을 헤아렸다. 도어록에 카드를 갖다 대니 다행히도 삐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더듬더듬 나아갔다. 굳게 닫힌 유리창을 통해 가로등 빛이 들어와서 실내 풍경이 간신히 보였다. 캐비닛과 선반에 시약병과 기계 같은 게 있는 걸 빼면 일반적인 대학교 사무실 같았다. 파티션으로 나뉜 자리마다 데스크톱이 있었다.
안쪽에 경고 표시가 붙은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아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문을 한 번 더 열고 들어가야 한다던. 푸른 불빛이 깜빡이는 잠금장치에 키를 갖다 대어 문을 열었다.
“존나 개판이네.”
실험실 안을 보자마자 솔직한 심정이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서 얼핏 보기만 해도 가관이었다. 넓지 않은 실험실에 빼곡히 들어찬 기기들은 구입한 지 20년쯤 된 것 같았으며, 위험해 보이는 약품들이 아무 잠금장치 없이 활짝 열린 보관함에 가득했다. 어디선가 기계가 돌아가고 있는지 웅웅 소리가 들렸다. 영화에서처럼 먼지 한 올 없는 새하얀 벽과 바닥에 첨단 기계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풍경까진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건 좀 심했다.
하기야 예술관 실습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사방에 찌들어 눌어붙은 물감 자국이 가득하고, 기자재들은 한 100년쯤 쓴 것 같았으며, 지하라 환기가 잘 안 돼서 공기는 눅눅하고 퀴퀴하기 짝이 없었다. 다들 거기서 하루 종일 작업을 하고 숙식까지 해결하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 과나 여기나 등록금이 적지 않은데, 학교가 받아 처먹은 돈들은 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졌다.
일단 불부터 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뒤 분간 못 하고 아무거나 건드렸다간 바로 뒈질 것 같았다. 하지만 벽을 아무리 뒤져도 형광등 스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신경질이 났다. 이 와중에도 소매에서는 좆같은 라면 냄새가 풀풀 올라오는데, 머리 아파 죽겠는데. 내가 뭐 하러 남의 연구실까지 몰래 들어와서 이 지랄을 하나 싶었다.
짜증스럽게 여기저기를 더듬다가 손에 뭔가 걸렸다. 곧바로 스위치를 눌렀다. 하지만 불은 켜지지 않았다. 혹시나 경비 시스템을 건드린 건가 싶어서 잠시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알코올이 이성을 무디게 했다. 나는 팔을 뻗어 다른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이번엔 제대로 누른 건지 형광등이 몇 번 깜빡이다 켜졌다.
세제는 실험실 구석의 싱크대에 있었다. 세제도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다. 이미 절반 넘게 쓴 데다 약품인지 때인지 모를 것으로 시커먼 얼룩이 졌다. 맨손으로는 건드리기도 싫을 정도였다. 이딴 걸 찾겠다고 이 고생을 했다니.
싱크대에 서서 젖은 옷소매를 대충 씻어 냈다. 그 와중에도 자꾸 취기가 올라 어질어질했다.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나는 불을 끄고 문을 닫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갔다. 웅웅대는 소리가 어느 순간부턴가 뚝 멎었다는 사실은 끝내 알지 못했다.
휴게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두가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기요.”
“어어.”
대학원생에게 카드 키를 돌려주었다. 그는 빨갛다 못해 검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가 혀 꼬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딴 건 안 건드렸지? 잘못 건드리면 나 죽어. 교수님이 나 죽일 거야.”
“아까 불 켜려다 다른…….”
다른 스위치를 잘못 건드린 것 같다고 말하려 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별거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괜히 찜찜해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갑자기 몸을 확 숙이며 구역질을 했다.
“우웨에엑.”
인상을 쓰고 한 발짝 물러나 피했다. 대학원생은 곧 그 자세 그대로 잠에 빠졌다. 토사물이 묻는 걸 무릅쓰고 다가가 그를 깨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말 걸기를 포기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놈들 상태도 엉망이었다. 신발까지 벗어 던지고 소파에 대자로 뻗어 코를 고는 놈, 물을 마실 심산이었는지 정수기까지 기어가선 정수기 밑동을 껴안고 잠든 놈, 소주병을 바닥에 떨어뜨려 깨 먹은 놈까지. 참 지랄도 골고루 하고 자빠졌다.
“야. 나 간다.”
“…….”
“간다고.”
잠든 놈 중 하나를 툭툭 걷어차며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꼴을 보니 이대로 뻗어서 아침까지 자다가 다른 학생이나 직원, 최악의 경우엔 교수에게 걸릴 판이었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저들을 일일이 깨워서 기숙사에 데려갈 의리까진 없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쓸쓸한 어둠이 드리운 캠퍼스를 걸어 기숙사에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방이 나를 반겼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싸한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속이 메슥거렸다.
얼룩진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에 깨끗이 씻자 술은 좀 깼지만 이번엔 잠이 몰려왔다. 머리를 대충 말리는 둥 마는 둥 하고 맨상체에 바지만 입은 채 침대에 엎어졌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아까 본 실험실의 풍경이, 내 손바닥 아래에서 달칵 눌리던 스위치의 감촉이 뇌리에서 씻은 듯 지워졌다.
* * *
그렇게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었다. 만취해서 아침이 되어서야 기어들어 온 룸메이트가 변이하여 나를 덮쳤다. 바야흐로 끝나지 않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날 밤에 있었던 일들은 내 안에서 뭉뚱그려졌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밖에서 술을 마셨고, 모르는 선배 차를 얻어 타고 학교에 돌아왔고,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기숙사 방에서 아침까지 잠들었다고. 그게 다라고. 알코올에 푹 절어 버린 뇌는 그 이상을 기억하지 못했다. 거기다 회귀를 반복하면서 기억이 더욱 흐려졌다. 내 신상 명세조차 흐릿한 판국에, 한밤중에 술 처먹고 뭘 했는지 또렷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죽음을 되풀이하던 와중에 이 사태의 원인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어느 연구실에서 변종 바이러스가 유출되었다 했다. 몇 번째 회귀에서 알게 되었는지, 누가 말해 줬는지, 어디서 얻은 단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실 자체만 뇌리에 남았다. 그 말을 듣고도 짚이는 게 없어 그냥 넘겼다. 이 학교에 연구실이 한두 개도 아니고, 나는 연구나 실험과는 거리가 먼 전공이었다.
정호현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눈 덮인 운동장을 가로질러 본관까지 왔다. 거기서 만난 대학원생이 말했다.
〈새벽에 누가 온도였나? 조명이었나? 아무튼 조절 장치를 잘못 건드려서, 바이러스가 돌연변이 해서 비정상적으로 증식했다나? 그랬던 것 같은데.〉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는 정확히 짚어 낼 수 없었다. 뇌리를 파고드는 묘한 기시감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교수의 SUV를 타고 정문으로 향하다 실험동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딱 한 번 와 봤던 건물이었다. 딱 한 번, 크리스마스 새벽에.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보는 순간, 잊고 있던 것들이 되살아났다. 노란 폴리스 라인이 쳐진 정문과 전기가 나가서 무용지물이 된 잠금장치 위에 기억 속 장면이 덧씌워졌다. 그날 밤 대학원생이 저기서 카드 키를 대어 문을 열었다. 건물 옆에 주차된 채 버려진 승용차는 그날 밤 내가 얻어 타고 왔던 차였다.
바이러스는 크리스마스 새벽에 모종의 원인으로 변이했다고 한다. 방학 시즌인 데다 공휴일 새벽이었기에 발견이 늦었으리라. 아침이 되어 누군가 바이러스 배양 상태를 점검하러 들어갔다가 감염되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실험실을 체크할 사람이라면 밤새 학교에 남아 있던 대학원생 정도밖에 없겠지. 그는 심장이 멎었다 곧 되살아났을 것이고, 모든 이성이 사라지고 식인 욕구만 남은 채로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찰칵, 찰칵, 찰칵. 머릿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연거푸 났다. 퍼즐 조각들이 하나하나 맞춰졌다.
〈저기서 바이러스가 새어 나갔다고? 누가……. 조절 장치를 잘못 건드려서?〉
〈선배.〉
〈씨발, 그거였어? 그것 때문에 내가, 내가 이제껏.〉
부정하고 싶었다. 내가 착각한 거라고, 지나치게 넘겨짚은 거라고. 하지만 모든 단서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형이라며 대학원생을 소개하던 동기, 딴 건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하던 대학원생의 목소리, 내가 늦은 새벽에 술자리를 뜰 때까지만 해도 휴게실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
〈벌을 받은 거라고? 내가 잘못해서…….〉
그들의 환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고주망태가 된 모습이 아닌, 잔뜩 부패해서 곳곳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진물과 고름이 흐르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네가 한 거지? 네가 했잖아. 너지? 다 네 잘못이야. 네가 범인이야. 네가 다 죽였어.
“내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나는 고해 성사를 하듯 손을 모아 쥐었다. 하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깊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한껏 참았다가, 천천히 흘려보내듯 말했다.
“내가 했어.”
정호현은 내가 이야기하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반듯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듣기만 했다. 그 애의 사려 깊은 침묵이 오늘따라 너무도 무서웠다. 지옥 같은 시간이 흐르고,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뒷말을 짐작할 수 없는 서두였다. 이를 악물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형 실험동 지날 때부터 좀 이상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모르는 게 있을 거라고 짐작했어요. 그 뒤로도 몇 번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잖아요. 이 얘길 하려고 했던 거죠?”
그랬다. 하지만 매번 실패했다. 말을 꺼냈다가도 용기가 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양 얼버무렸다. 경악 어린 눈으로 나를 볼 정호현이 두려웠다. 그 애마저 나를 손가락질한다면.
“1년…….”
정호현이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그의 시선이 발작적으로 떨리는 내 손에 닿아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참았네요.”
“평생 말 안 하려고 했어.”
“왜요?”
“왜? 왜냐고?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해? 씨발, 당연히, 죽도록 무서웠으니까.”
신경질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호현은 묵묵히 나를 마주 보았다.
“참사 일으킨 원흉이라고 TV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온 세상 사람들한테 평생 욕먹고 낙인찍히는 건 안 무서워. 그건 괜찮아. 그런 벌이라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어.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런데 너는, 호현아. 너는 안 돼. 너마저 날 미워하게 되면.”
“아까도 말했잖아요.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고요.”
“아니. 내 잘못이야. 내가 그때 거기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아무거나 누르지만 않았어도, 실수한 것 같다고 제대로 말하기만 했어도.”
“그럼 우리가 만날 일도 없었겠죠.”
“하지만.”
“형 잘못이 맞다 하더라도.”
그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형은 이미 너무 큰 벌을 받았어요. 이제 됐어요.”
정호현은 내 손을 감쌌다. 나는 아직도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쥔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손등과 손마디를 살살 문지르는 손길에 한껏 움켜쥔 주먹이 서서히 풀렸다.
그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받쳐 올렸다. 손을 살며시 펴게 하고, 하도 꽉 쥐어서 손톱자국이 난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입맞춤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상상하는 결말은 언제나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평생 비밀을 털어놓지 않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거나, 내가 사태의 원인임을 알게 된 정호현이 나를 증오하고 경멸하거나. 감히 바라지도 않았던 세 번째 결말이 내 앞에 있었다.
“…….”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한 줄기 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정호현이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손을 뻗어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에 감싸인 그 애의 뺨을 만져 보았다. 보송보송했다. 다른 땐 조금만 건드려도 그렇게 쉽게 앙앙 울면서, 이럴 때는 눈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 잘못 때문에 다니던 학교를 잃고 친구들을 잃고, 몸이 흉터와 주삿바늘 자국으로 얼룩졌는데. 몇천만 분의 1 확률로 태어난다는 항체 보유자인 탓에 앞으로의 생이 통째로 틀어질지도 모르는데. 저 애는 그래도 괜찮은 걸까. 그래도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걸까.
내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가만히 얼굴을 맡기고 있던 정호현이 간격을 좁혀 왔다. 나는 당연한 순서처럼 눈을 감았다. 눈시울에 남아 있던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이윽고 감은 시야 너머로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다. 녹아내릴 듯 달콤한 맛이 났다.
* * *
이상한 밤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끌어안았고, 평소처럼 입을 맞췄고, 평소처럼 서로를 만졌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그의 멱살을 잡듯 거칠게 끌어당겨 키스했다. 테이블에 올려 둔 잔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의 짐승 같은 숨소리가 허공을 메웠다. 뒤얽히는 혀에서 와인 향이 진동했다.
“헉, 하아…….”
정호현이 맞물린 입술 너머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내 등을 안고 있던 손을 내려 니트를 끌어 올렸다. 따뜻한 손이 내 맨허리를 더듬었다. 순간 눈에 초점이 확 나갔다.
그를 뒤로 떠밀어 침대에 쓰러뜨렸다. 그 애 위로 오렌지색 트리 전구 불빛이 아른아른 쏟아졌다. 시트 위에 흐트러진 갈색 머리칼이 숫제 황금빛으로 보였다.
니트를 아래에서부터 확 끌어 올려 벗고 침대에 올랐다. 흐드러지게 누운 정호현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그가 내 목뒤를 감싸 끌어당겼다. 나는 사냥감을 찾는 맹수처럼 달려들어 그 애의 턱선과 목덜미, 귓불을 잔뜩 물고 빨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내 눈물이 여린 살을 적셨다.
제일 위의 것 하나만 빼고 단추가 죄다 단정히 채워진 셔츠가 거슬렸다. 불만스레 셔츠 깃을 물어뜯었다. 정호현은 목을 고스란히 내주며 내 앞섶을 더듬었다. 철컥. 그 애 손에 허리띠가 풀려 나갔다.
“너 앞으로, 셔츠, 입지 마.”
씨근덕대는 호흡 사이로 경고했다. 그의 위에 올라타 성급한 손길로 단추를 풀다가, 결국 가운데 두어 개는 푸는 걸 포기하고 확 잡아 뜯어 버렸다. 튕겨 나간 단추가 시트 위를 굴렀다.
정호현이 내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평소에 자기가 입는 방향이 아니라 그런지 그 애도 좀 헤맸다. 답답해서 그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치워 버리고 직접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내친김에 정호현의 것까지 풀었다. 양옆으로 훤히 열린 그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이미 성기가 반쯤 서서 드로어즈 자락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입에 한가득 넣고 쭉쭉 빨고 싶었다. 속옷째로 성기를 감싸 쥐었다.
“벌써 섰네.”
“형, 흐윽, 형도…….”
“맞아. 내 좆 터지기 직전이야.”
딱히 숨길 이유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어서 사실 그대로 말했다. 정호현이 분한 듯 입술을 앙다물더니 내 어깨를 잡아 눌렀다. 내 위에 올라타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몸에 힘을 풀고 순순히 깔려 주었다.
처음으로 키스했을 때가 떠올랐다. 중앙 도서관 1층 카페 바닥에서. 싸늘한 공기 중에 떠다니던 먼지와 미친 듯이 쾅쾅 뛰던 심장과 나를 내려다보던 정호현의 젖은 눈초리가 아직도 뇌리에 선했다.
정호현이 몸을 낮추어 내게 키스했다. 입술을 벌려 혀를 마주 빨았다. 그 애의 손이 흉터가 있을 내 목을, 그리고 가슴팍을 천천히 쓸었다. 목 너머로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가 내 성기를 쥐었을 때는 참을 수 없었다.
“헉.”
낮은 신음이 터졌다. 안 그래도 한껏 발기해 있던 것이 더 흥분했다. 맑은 액이 질질 새어 나와 속옷을 적셨다. 그는 천 위로 두툼하게 불거진 윤곽을 더듬다가 아예 속옷을 쑥 내렸다. 잔뜩 힘이 들어간 자지가 퉁 튀어나왔다.
“형 자지 만져 주려고? 우리 현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여운 짓만 할까. 나 생일 선물 주는 거야?”
“형 거……. 자꾸 젖어요. 축축해.”
정호현이 살짝 찌푸린 낯으로 내 성기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 흉내를 내어 나름대로 더티 토크 비슷한 걸 해 보려고 노력한 듯했다. 그래 봤자 원래 생겨 먹은 것부터가 말갛고 예뻐서, 칭얼거림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안 들렸다.
씨발, 뭐 이딴 귀여운 게 다 있지. 나는 심각해졌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애 손을 덥석 붙잡아 내 자지에 올려놓았다.
“응. 물 존나 나오지? 너 때문에 뒈지게 꼴려서 그래. 더 만져 줘, 얼른. 쌀 때까지 해도 돼.”
“…….”
정호현이 소리 없이 기겁했다. 살다 살다 이런 글러먹은 새끼는 처음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뜻밖의 행동을 했다. 더는 못 하겠다고 물러서지도, 내가 시킨 대로 하지도 않고……. 양손으로 좆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여 사탕을 빨듯 머금었다. 입술이 작고 입 안도 좁아서 많이 들어가진 않았다. 숨을 꾹 참고 입을 벌려서 최대한 문 게 반 뼘 정도였다.
그 애는 내 허벅지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열과 성을 다해 자지를 빨았다. 손으로는 기둥을 살살 흔들어 주기도 하고, 음낭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노력은 가상했지만 좋은 말로도 능숙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애무였다. 심지어는 힘들어서 좆을 문 채 낑낑 앓기도 했다.
“으응……. 흡, 으읍.”
그러나 나는 그 서툰 애무에 발정했다. 솜털이 있는 하얀 뺨이 불룩하게 부푼 것도, 입술이 힘겹게 오물거리는 것도 예뻤다. 흥분으로 숨이 거칠어지고 아랫배와 사타구니 안쪽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는 참기 힘들었다. 정호현의 뒷머리를 지그시 눌러 성기를 박았다. 그대로 몇 번 왕복하다가 뿌리치듯 놔줬다. 입술 사이에 물린 성기를 쑥 뽑아냈다. 타액과 쿠퍼액이 진득하게 섞여 귀두에서부터 그 애 입가에까지 이어졌다. 뺨이 발긋해져서 괴롭게 콜록대는 정호현을 깔아 눕혔다.
“네 자지도 빨고 싶어. 지금 당장. 빨아도 되지? 된다고? 으응, 그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속옷을 발목까지 단번에 끌어 내려 벗겼다. 허벅지를 활짝 벌려 가랑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쪽쪽 빨면 과즙이 나올 것 같은 예쁜 좆을 서슴없이 물었다.
정호현의 허리가 퍽 튀었다. 성기가 미끄덩하게 짓쳐 들어와 내 입천장 안쪽을 찔렀다. 못 움직이게 그 애의 골반을 짓누르고 볼이 움푹 패도록 기세 좋게 빨아 올렸다.
“형, 조금만 천천히…… 아! 흐, 윽!”
정호현이 자지러지면서 버둥거렸다. 이미 넋을 놓아선 눈이 다 풀렸다. 아까까지 내 성기를 빠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입술도 맥없이 벌어졌다. 더럽게 야했다. 다른 놈들 앞에서의 단정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 애 좆을 빨면서 한 손으로는 내 걸 쥐고 문질렀다. 손이 금세 체액으로 번들거렸다.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으로 통통한 엉덩이 살을 잡아 벌리고 구멍을 쑤셨다. 정호현은 좆이 잔뜩 빨리는 감각을 견디느라 뒤가 열리는 것도 모르고 마냥 흐느끼기만 했다.
뜨끈한 내벽에 물린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안을 풀어 주다가, 귀두를 혀로 굴리는 것과 동시에 잘 느끼는 곳을 지그시 눌렀다. 정호현의 몸이 그 순간 딱 굳었다. 손으로 시트를 마구 긁고 발끝으로 내 어깨를 꾹꾹 밀어내던 것도 멈췄다.
“으…… 하으……!”
벌어진 입이 다물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이 오므라들어 손가락을 힘껏 조였다. 그는 본능에 따라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도로 박아 넣었다. 입 안에 정액이 왈칵 쏘아졌다. 혀에 흥건히 고이는 것을 그대로 삼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요도 구멍을 혀끝으로 쑤셔서 나오는 걸 죄다 싹싹 핥아 먹다가, 더 안 나올 때가 되어서야 놔줬다. 내 손가락을 문 채로 허공에 떠올라 바들바들 경련하던 엉덩이가 풀썩 떨어졌다.
“어떻게 넌 좆물까지 맛있어?”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정호현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헐떡였다. 대답할 정신도 없는 모양이었다.
“뒤 한번 쑤셔 준 것 가지고 바로 질질 싸네. 우리 예쁜이는 좆 빨아 주는 것보다 박히는 걸 더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야해 빠져서 어쩌려고 그래.”
그가 가파르게 호흡할 때마다 아랫배가 오르내렸다. 그에 따라 내벽이 안에 든 손가락을 탄력 있게 쥐었다 놓았다. 좆이었으면 벌써 쌌을지도 모른다. 손가락에 엉겨 붙는 속살을 뿌리치고 쑥 빼냈다.
“현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 다 기억할 거지?”
땀에 젖은 그 애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쾌락의 여운에 잠긴 헤이즐넛색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아까 내가 한 말도 안 잊어버릴 거지?”
“…….”
“앞으로도 나……. 좋아할 거지?”
그의 눈매가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대답이 나오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네.”
“내가 그런 짓을 했어도?”
“괜찮아요. 전 상관없어요. 형이 뭐든, 뭘 했든.”
나는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품에 안겼다. 그가 자연스레 내 등을 끌어안고 토닥였다.
“내 이름 불러 줘.”
“영원이 형.”
“말고.”
그는 잠깐 망설였다. 투명한 눈동자가 내 눈을 곧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꿈결처럼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영원아.”
순간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이젠 내가 끝까지 기억할게. 모두 다.”
정호현이 웃었다. 너른 들판에 곱게 내린,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 같은 미소였다. 뒤이어 한 마디가 더 흘러나왔다.
“사랑해.”
나는 홀린 듯 그 애에게 키스했다.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스르르 눈을 감으며 내게 응했다. 우리는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 불빛 속에서 입을 맞추었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먼 길을 돌아 마침내 결승점이자 출발점에 도착한 사람들처럼.
그가 내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나는 그의 허리를 바짝 안았다. 서로의 손이 서로를 진득하게 매만졌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놓고 허벅지를 더듬었다. 서로에게서 간헐적인 탄성이 터졌다.
그의 다리를 벌리고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정상위로 넣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좀 부족했다. 더 깊이, 더 많이 닿고 싶었다. 내 성기를 뿌리까지 처박아서 음낭이 엉덩이에 짓눌릴 때까지 밀어붙이고 싶었다. 따뜻하고 나긋하고 부드러운 정호현의 안을 모조리 짓이기고 으스러뜨려 나로 채우고 싶었다. 그래도 저 애는 ‘괜찮아요, 형. 전 좋아요.’ 하고 웃으면서 고스란히 받아 주지 않을까.
한쪽 다리를 들어 내 어깨에 걸었다. 가랑이가 훤히 열리고도 모자라 엉덩이가 살짝 떴다. 꽃물이라도 든 듯 발그스름한 구멍에 성기를 맞췄다. 다가올 삽입을 직감한 정호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양손으로 엉덩이 살을 잡아 벌려 놓고 허리에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내 체중이 비스듬히 실린 성기가 느리게 파고들었다.
“흑…….”
정호현이 버거운지 자꾸 몸을 뺐다. 그때마다 엉덩이를 움켜쥐어 내 좆을 머금은 입구가 다 보이도록 다시 벌렸다. 늘씬한 허벅지 안쪽을 손아귀 전체로 주물러 풀어 주기도 했다. 안이 하도 좁아서 움츠린 자세로는 도저히 삽입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힘겹게나마 꾸역꾸역 들어갔다.
밀려 들어가던 성기가 중간에 턱 막혔다. 아직 반도 안 들어갔는데. 정호현이 제 아랫배를 더듬었다. 뭐라 애원하려 절박하게 입을 열었는데, 결국 나오는 건 토막 난 신음뿐이었다.
“흐으, 읏, 헉.”
흐물흐물 녹을 때까지 구멍을 쑤시고 빨아 줘도 삽입할 때만 되면 정호현은 매번 힘들어했다. 죽는다 어쩐다 하며 칭얼거리는 건 다반사고, 자지를 다 박기도 전에 눈물부터 터뜨리기도 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둘 다 급해서 전희가 좀 짧았다. 버거울 만도 했다. 그래, 어쩔 수 없다. 정호현은 과즙이 든 젤리처럼 달고 말캉해서 조금만 잘못 다루면 망가지니까. 성심껏 잘 녹여 먹는 수밖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의 미니 테이블이 보였다. 둥근 와인 잔 하나는 쓰러지고 하나는 그대로 있었다. 성기를 반쯤 박은 채로 팔을 뻗었다. 정호현이 힘겹게 울먹였다.
“영원이 혀엉……. 움직이지 마요. 배 땅겨서 아파요.”
“으응. 잠깐만.”
“정말 찢어질 것 같…….”
내 어깨에 걸린 그 애의 종아리를 건성으로 토닥이면서 잔을 가져왔다. 진하고 달콤한 액체를 한 모금 물고 입을 맞췄다. 내 상체가 숙어지면서 정호현의 몸이 거의 반으로 접혔다. 어지간히도 숨이 찬지, 입에 넣어 주는 것조차 제대로 못 받아먹어서 입가로 흘렀다.
“입 더 벌려야지. 다 흐르잖아.”
“으, 흑.”
“구멍도 못 벌리고 입도 못 벌리고, 응? 심지어는 좆도 더럽게 못 빨아. 예쁜아, 대체 잘하는 게 뭐야. 귀엽게 우는 것밖에 못 해?”
“아니야.”
“아냐? 근데 왜 자꾸 와인 흘려. 안에 정액 싸 줘도 다 흘리잖아.”
“아니야…….”
훌쩍이는 정호현을 달래 가며 조금씩 박았다. 와인을 입에서 입으로 한 모금 먹이고, 성기를 살살 밀어 넣고, 다시 와인을 먹이고. 아무리 스위트 와인이라도 도수가 꽤 높았다. 그리고 정호현은 생긴 것처럼 술이 세지 않다. 취기가 돌면서 내 아래 깔린 몸이 점차 보드랍게 풀어졌다.
“있잖아요, 형. 입술에서 단맛 나요.”
“내 입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 향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머리칼이 시트에 문질러져 사락사락 소리가 났다. 주황빛 조명 아래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뺨이 붉었다.
“……사탕 먹는 것 같아.”
그러면서 작게 키득키득 웃는다. 귀여워 죽겠다. 나도 그를 따라 피식 웃으면서 아랫도리를 좀 더 밀어붙였다. 성기가 따끈한 내벽을 꾹 찔렀다. 아, 하고 짤막한 신음이 터졌다.
“너 사탕 안 좋아하잖아.”
“형은…… 괜찮아요. 형이니까.”
“그럼 더 빨아 볼래? 혀도 빨아 줘.”
정호현은 대답 대신 내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손도 따끈했다. 서툰 키스를 받으며 마저 삽입했다. 성기가 느릿느릿 파고들어 가다가, 마침내 안쪽 벽에 툭 부딪혔다.
촉촉하고 뜨거운 속살에 파묻히는 느낌에 만족스러운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정호현 또한 참고 있던 호흡을 내쉬었다. 안에 들어온 성기의 형태를 내벽으로 확인해 보려는 듯, 아랫배가 간헐적으로 꽉꽉 조였다 풀렸다. 자각 없이 저렇게 야하게 구는 것도 재능이었다.
어느 정도 자지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으로 넘어갔다. 어깨에 걸리지 않은 쪽 다리를 잡아 내 허벅지 아래에 깔았다. 가랑이가 엇갈린 채로 꽈악 맞물렸다.
“읏!”
나른하게 늘어져 숨을 고르던 정호현이 눈을 떴다. 처음 해 보는 체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무심결에 다리를 버둥거렸다. 하지만 한쪽 다리는 내 어깨에 걸쳐지고, 한쪽 다리는 내 밑에 깔렸다. 몸이 완전히 붙들려 있어서 달아날 수 없었다.
빈틈없이 꿰어 있던 사타구니가 들썩였다. 그때마다 내 등 뒤 허공에 뜬 발끝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다른 자세로 할 때보다 확실히 깊게 들어갔다. 기둥 아래쪽까지 젖은 점막에 감싸이는 감각이 아찔했다.
“아, 아…… 흐, 으, 아아!”
한번 치받을 때마다 정호현의 몸이 위로 덜컥덜컥 밀려 올라갔다. 이러다가 침대 헤드에 부딪히겠다 싶었다. 어깨를 안아서 확 끌어 내렸다. 그는 도로 내 밑에 갇혔다. 어쩔 줄 몰라서 고개를 이리저리 뒤채다가, 결국 내 품에 매달려 목덜미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각도를 조금씩 바꿔 가면서 찔렀다. 촉촉하고 말캉한 안이 쉴 새 없이 씰룩이며 내 걸 빨아 먹었다. 어서 빨리 사정하라고 쥐어짜 내는 것 같았다. 한참 미친 듯이 박다가, 이러다가 자제 못 하고 정호현을 망가뜨릴 것 같아 잠시 멈췄다.
“헉, 허억.”
정호현의 옆에 팔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애도 쌕쌕대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울음이 터졌는지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접합부는 쿠퍼액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엉망진창이 됐다. 샅을 죄다 적시고 허벅지까지 질척거렸다. 우악스럽게 치댄 탓에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이 붉어졌고, 내 아랫배에 잔뜩 마찰한 음낭과 자지도 발그스름했다. 한계까지 벌어져 옴찔대는 구멍이 용케도 내 걸 물고 있었다.
존나 꼴렸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좀 진정하려고 멈춘 건데, 이러다가 더 맛이 갈 것 같았다. 손을 뻗어 와인 잔을 들었다. 와인은 이제 기껏해야 한두 모금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걸 죄다 정호현의 가슴팍에 쏟아부었다.
“아!”
열 오른 몸에 갑자기 차가운 액체가 끼얹어지자 그가 깜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숙여 연분홍빛 유두를 입에 물었다. 다른 데가 다 빨개졌으니까 여기도 잔뜩 빨아서 빨갛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달콤한 술을 뒤집어쓴 젖꼭지를 빨면서 천천히 허리를 놀렸다. 아래에서 찌걱찌걱 소리가 났다.
“네 젖꼭지에서도 단맛 나. 사탕 먹는 것 같아.”
유두를 한가득 문 채로 웅얼거렸다. 발음이 뭉개졌다.
“너 우는 소리 거실까지 다 들리겠다. 그렇지?”
정호현이 꼼지락꼼지락 허리를 뒤틀었다. 와인과 체액으로 온몸이 다 젖어서는, 가랑이를 활짝 벌리고 자지에 박힌 채로 끙끙 앓는 모습이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나 너랑 밤새 이런 거 하려고 했어. 근데 넌 다른 새끼들이랑 여기서 다 같이 자려고 했다고? 존나 생각 없이?”
“흣…… 으, 으응…….”
“밖에 걔들 있었어 봐. 난리 났을걸. 이렇게 크게 울어 대는데. 이래도 다른 새끼들 계속 챙길 거야? 응?”
그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내벽을 쑤시는 움직임을 좀 더 빠르게 했다. 위에서 박는 동작에 맞춰 정호현의 안에도 꼬박꼬박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낮추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현아. 나한텐 너밖에 없어. 다 잃고 너 하나 가졌어.”
“…….”
정호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축축한 갈색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열에 들뜬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살며시 웃었다.
“현이 다 가져요……. 전부 형 거예요.”
가슴팍에서부터 새하얀 열기가 확 치솟아 올라 뇌리를 잠식했다. 자제고 뭐고 더는 불가능했다. 어깨에 걸린 허벅지를 움켜쥐고 골반이 부서지도록 처박아 넣었다. 쾌감이 버거워서인지 자세가 힘들어서인지 정호현의 종아리가 달달 떨렸다.
다리를 풀어 내리고 그를 거칠게 뒤집었다. 엉덩이를 양손으로 벌리고 드러난 구멍에 성기를 맞춰 밀어 넣었다. 푹 젖은 속살이 기다렸다는 듯 기둥에 휘감겼다.
“흣, 흐윽, 으, 응!”
다시 넣자마자 봐주지 않고 곧장 철썩철썩 찧었다. 어설프게 무릎을 꿇고 버티던 정호현이 푹 엎어졌다. 그의 위에 올라타 뼈대가 도드라진 어깨와 등을 깨물고 핥았다. 뽀얀 살에 얼룩덜룩 자국이 남았다. 역시 날개는 없는 것 같다.
“읏, 하아…….”
고개를 젖히고 열 오른 신음을 토했다. 점점 숨이 차올랐다. 성기를 힘껏 잡아 뺐다가 다시 처넣기를 반복하며 내벽을 연거푸 뭉갰다. 그때마다 정호현이 울음에 가까운 신음과 함께 엉덩이를 내밀어 내 것을 스스로 먹었다. 미칠 것 같았다.
퍽, 퍽, 퍽. 움직임을 반복할수록 안이 점점 좁아졌다. 촘촘한 속살이 내 걸 물고 놓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허리에 힘을 주어 좆을 뽑아냈다. 안을 잔뜩 긁어 놓고 간신히 귀두까지 빠져나왔다. 방금 전까지 정호현의 안에 박혀 있던 성기가 흉흉하게 꺼떡거렸다.
힘없이 엎드린 정호현의 배 아래에 손을 넣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를 안고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찬찬히 내 위에 앉혔다. 아래에서부터 성기가 쑤욱 꽂혔다. 정호현이 황급히 뒤돌아보았다.
“왜 갑자기…….”
벌벌 떨리는 그의 손이 내 허벅지를 짚었다, 팔뚝을 짚었다 했다. 엉덩이도 어설프게 달싹였다. 어떻게든 체중을 덜 실어 보려고 용을 쓰는 것 같았다.
“이상해요, 너무 많이 들어왔, 으, 응. 안 돼요.”
“괜찮아. 힘 풀고 그대로 앉아 봐.”
“죽어요, 아윽! 저 그러면, 진짜 죽는단 말이에요. 안쪽 다 터져서, 막, 피 철철 나고…….”
“그래, 그래. 우리 현이 예쁘다.”
아무 말이나 허겁지겁 주워섬기는 게 귀여워서, 눈에 뵈는 게 없는 와중에도 그의 뺨에 쪽 뽀뽀를 했다. 좀 더 놀려 먹고 싶었지만 지금은 나도 좀 급했다. 팔로 허리를 감아 자지가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게 조절한 채 아래에서부터 쳐올렸다.
“흣…… 아! 흐으, 응!”
아까에 비해 신음이 확 높아졌다. 체위가 바뀌어 성기가 민감한 부분을 제대로 콱콱 찧어 대는 모양이었다. 도를 넘는 쾌감을 억지로 참느라 내 위에 올라앉은 그 애의 다리가 마구 버둥거렸다. 발뒤꿈치로 침대 위를 꾹꾹 눌러 대다가, 발끝을 오므려 시트를 잔뜩 구겼다. 내벽이 쉴 새 없이 벌름거렸다. 이대로만 있어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황홀한 숨을 몰아쉬었다.
“으응, 읏, 아…… 앙!”
“앙?”
픽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나 사실 나도 여유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싸고 싶다, 싸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꼿꼿이 서서 위아래로 흔들리는 정호현의 좆을 훑고 주무르며 속도를 높였다. 자지에 빠르게 열이 몰렸다. 어느 순간 그가 고개를 확 젖혔다. 내 팔뚝을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쥐고 온몸을 뻣뻣이 굳혔다.
“아, 아……!”
하도 울어서 정호현의 목소리 끝이 애달프게 갈라졌다. 허공에 정액이 쭈욱 뿜어졌다. 단단하게 굳어진 내벽이 내 성기를 터트릴 듯 조였다. 흰 시트 위에 정액이 후드득 뿌려지는 모습이 몹시도 자극적이었다.
그 애의 엉덩이를 눌러 내려앉히면서 나도 허리를 힘껏 튕겨 올렸다. 속살을 죄다 짓이길 기세로 처박고 사정했다. 사정하는 도중에도 성기를 살짝 뽑았다가 다시 꾸욱 박고, 다시 찔러 넣기를 반복했다. 꿀럭꿀럭 밀려 나오는 정액을 내벽 전체에 집요하게 처발랐다.
“하아, 흐, 헉, 하아…….”
정호현은 한동안 축 늘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의 골반을 붙잡고 들어 올려 자지를 뽑아내는데도 아무 저항 없이 몸을 맡겼다.
“엉덩이 벌려 봐.”
사정의 여운으로 목소리가 잠겼다. 그 애가 넋이 나간 채 내 지시에 따랐다. 평소였다면 부끄러워서 못 하겠다고 잔뜩 칭얼거렸을 텐데. 마찰로 발갛게 부은 입구가 드러났다. 구멍이 살짝 뻐끔거리더니, 그 사이로 뿌연 정액이 주룩 흘렀다.
정호현이 내 앞에서 스스로 엉덩이를 벌려 좆물 범벅이 된 구멍을 내보인다니. 말도 안 되게 야했다. 머릿속이 또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내 성기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곧게 선 좆을 위협적으로 꺼떡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잘 벌리고 있어. 다시 박게.”
“네?”
정호현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가 기겁하며 다리를 오므렸다. 침대 반대편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의 발목을 잡아 도로 끌어왔다.
“으악!”
“가지 마, 예쁜아. 너 전부 내 거라며. 어디 가려고 그래.”
“아니, 그게. 잠깐만요. 또 하려고요?”
“말했잖아. 밤새 할 거라고.”
“어……. 그……. 쉬는 시간! 쉬는 시간은 없나요?”
“그딴 게 어디 있어.”
“방금 전까지 그렇게 시달렸는데 어떻게 바로 다시 해요. 형이 생각해도 좀 심하지 않아요?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
“으응, 뭐. 난 양심이라곤 좆도 없는 새끼라서.”
“그러다 저 기 쪽쪽 빨려서 진짜 반 입 거리 되면요?”
“걱정 마. 내가 와인도 먹여 주고 고기도 구워서 먹여 주고, 아무튼 다 먹여 줄게. 토실토실해질 때까지.”
“그럼 반의반 입 거리는요? 반의반의 반 입 거리는요?”
섹스할 힘은 없고 종알거릴 힘은 있나 모르겠다. 정호현은 한동안 같잖은 핑계를 늘어놓으면서 파닥거리다가, 결국 현실과 타협하고 내 품에 얌전히 안겼다. 터지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킥킥 웃으면서 그 애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창밖을 보았다. 트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어두운 밤을 밝히고 있었다. 그 뒤로 배경처럼 펼쳐진 밤하늘에서 어느덧 하나둘 눈송이가 내렸다.
* * *
눈을 뜨자마자 흰빛이 시야를 물들였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낯선 원목 천장이 보였다. 몇 초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 정신이 들었다. 아, 그랬지. 여긴 우리 집이 아니라 펜션이었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온통 새하얀 색이었다. 밤새 함박눈이 내려 펜션 앞마당이 온통 설원이 되어 있었다. 잎이 다 떨어지고 없는 나뭇가지에도, 마당 구석에 주차해 둔 내 차에도 눈이 소복이 쌓였다. 어젯밤 내내 창가를 지키며 반짝반짝 빛나던 트리 불빛은 어느새 꺼졌다.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는 눈부신 풍경을 바라보다 내 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호현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밤새 그렇게 괴롭혔는데 제때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머리가 잔뜩 뻗치고, 발갛게 짓무른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았다.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이불 위로 드러난 목과 어깨는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가득했다. 밤새도록 내가 새긴 흔적이었다.
목과 어깨뿐이랴. 그 아래는 더 심할 거다. 전신에 흔적을 남기다 더 남길 곳이 없어서, 나중엔 심지어 정호현의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고 회음을 잔뜩 물고 빨았다. 그 애는 목이 잔뜩 쉬어선 제대로 된 신음을 내지 못하고 힉힉거렸다. 길고 질펀한 섹스가 끝난 뒤에도, 씻으러 제 발로 가기는커녕 구멍에서 줄줄 흐르는 정액을 내버려 둔 채 축 늘어졌다. 그는 내가 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지긋지긋한 기숙사 방 천장이 보이지도 건너편에 누운 룸메이트가 나를 죽이려 들지도 않았다. 밖에는 사락사락 눈이 내리고, 내 품에선 정호현이 얌전히 자고 있었다. 그게 다였다.
정호현이 잠결에 이불을 끌어당겼다. 아무리 보일러 온도를 잔뜩 올려놨다지만 알몸으로 자고 있으니 추울 만도 했다. 별생각 없이 이불을 올려 맨어깨를 감싸 주었다.
문득 내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다른 건 다 평소 그대로였다. 마디가 불거지고 곳곳에 굳은살과 흉터가 들어찼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다.
손등에 있던 가느다란 흉터. 첫 번째 회귀 때 생겼던, 세탁실에서 이름 모를 남자애에게 밴드를 빌려 붙였던 그 흉터가 보이지 않았다. 지우개로 지워 내기라도 한 것처럼 말끔하게. 대체 언제 나은 거지. 몇 달 전? 며칠 전? 아니면 어제? 모르겠다. 매일매일 내 몸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사는 성격은 아니라.
언젠가 정호현이 말했다. 내 몸에 새겨진 상처들이 점점 회복되고 있다고. 그러나 내가 보기엔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나는 여전히 만신창이였으므로. 그 애가 싱긋 웃고 덧붙였다.
〈자기 몸이라서 잘 모르는 거예요. 제가 보기엔 딱 알겠는데요. 봐요, 여기 목에 난 것도. 전보다 훨씬 옅어졌잖아요.〉
그냥 나 듣기 좋으라고 빈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정호현은 늘 쓸데없이 다정했으니까. 그래서 그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흘려 넘겼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정호현이 맞았다. 나는 낫고 있었다. 1년 전에 생긴 작은 상처가 이제 겨우 나을 만큼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가장 오래된 흉터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그다음, 또 그다음에 생긴 것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 목을 가로지른 가장 큰 흉터까지 지워지리라. 겨우내 눈이 쌓이고 쌓여 단단한 얼음이 되어도,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나를 어둠 속에 고립시켜도, 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녹아내리듯이.
아직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정호현을 가만히 안아 보았다. 체온에 데워진 따뜻한 이불 아래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맥박은 규칙적이고 평온했다. 살아…… 그래, 살아 있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정호현이, 내게 안겨 포근하게 자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완전히 안심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잠든 그 애의 귓가에 어젯밤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호현아.”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젯밤 정호현이 하얗게 웃으며 내게 속삭였던 것과 같은 말을.
“…….”
두 번째 속삭임은 아주 작았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창밖에 내리는 눈조차도 듣지 못하게. 하지만 정호현만은 귓가에 눈꽃처럼 내려앉은 문장을 알아채 줄 것이다. 그 애는 내가 말한 것도, 그리고 말하지 않은 것까지도 매번 착실히 기억해 주었으니까.
바깥은 여전히 고요했다. 흐린 하늘에서부터 눈송이들이 나풀나풀 내렸다. 나는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정호현을 이불째로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폭신한 침구에 파묻힌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모처럼 맞는 아늑한 휴일. 무언가에 쫓기듯 서두를 필요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이대로 한숨 더 자야겠다. 늘어지게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해야겠다. 현이가 좋아할 만한 걸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