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악몽의 끝 (9/12)
  • “정호현 님?”

    “네.”

    “오늘 검사는 다 끝나셨어요. 예약은 다음 주로 잡혀 있으시고, 다음 주엔 채혈만 하고 정밀 검사는 없으시고요.”

    원무과 직원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시선은 내가 아닌 모니터에 고정되었다. 어차피 직원이 하는 말은 매번 비슷비슷하다. 나도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돌렸다. 대합실 소파에 수십 명의 환자와 보호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설치된 커다란 TV에서 뉴스 보도가 흘러나왔다.

    [질병 관리 본부 개발 ‘백일대 바이러스’ 치료 항체, 동물 실험서 효과 확인]

    [검역 시스템엔 구멍 숭숭, 감염 의심 환자 관리 소홀… 사회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 문제 재조명]

    몇 달이 지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우리 학교 이름이 오르내리고, 기자들이 병원 문턱이 닳도록 숱하게 드나든 지가. 때로는 낯익은 얼굴이 생존자 인터뷰라는 타이틀을 달고 TV에 나오기도 했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다.

    저 치료 항체라는 게 어디서 왔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지난주에 내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아 뽑아낸 피에서 추출했겠지. 방금 뽑은 피는 또 어디론가 가서 연구 대상이 될 거고.

    안티-D 백신이라는 것이 있다. Rh-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에게 발병하는 희귀 질환에 대한 치료제의 이름이다. 이 백신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어서, 극소수의 항체 보유자들이 평생 꾸준히 헌혈을 해야만 한다. 이번 참사를 통해 퍼진 바이러스도 그랬다. 아니, 이 경우엔 상황이 더욱 나빴다. 지금까지 밝혀진 항체 보유자가 나밖에 없었으니까.

    캠퍼스를 폐쇄한 뒤에도 감염자는 속속들이 나왔다. 캠퍼스에서 탈출한 사람 중에 이미 감염된 사람이 있는 경우도 있었고, 동물을 통해 옮기도 했다. 고열을 내며 앓기에 그냥 감기인 줄 알고 구출했던 사람이 구급차 안에서 갑자기 변이하는 바람에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부는 군경을 동원하여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을 격리하고, 캠퍼스 인근의 출입을 통제하고 구역 전체를 철저히 소독했다. 그들로서는 최선의 조치였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좀 늦출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을 죄다 죽이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했다. 이미 감염되어 버린 사람을 도로 낫게 할 수도 없었고. 고통에 시달리다 심장이 완전히 멎고 이내 끔찍한 몰골로 되살아나는 광경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밖에. 동물 실험이 성공했다니 부디 백신이 성공적으로 개발되어 이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학교를 빠져나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게. 이불 속에서 한껏 늦잠을 자고, 끼니때마다 식사를 하고,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도 현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얼어붙은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때의 기억이 오히려 더 생생했다.

    나는 눈 쌓인 산에서 구조된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악몽을 꿨다. 레퍼토리도 참 다양했다. 탈출한 게 꿈이었고 깨어나 보니 여전히 캠퍼스 안이었다든가, 바이러스가 기어이 바깥세상에까지 퍼져 모두가 떼죽음을 당한다든가.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과 치료를 꾸준히 받았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다음 예약 때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무미건조한 낯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던 직원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진료 카드를 건네받고 습관적으로 마주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대학 병원 로비는 언제나처럼 붐볐다. 저들 중에도 좀비 바이러스로 가족을, 혹은 연인을 잃은 사람들이 있을까. 내가 캠퍼스에서 목격했던 수많은 사망자들도 조금만 운이 따라 줬다면 지금쯤 살아서 이 로비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반대로 내가 조금만 운이 나빴다면 나는 학교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곳에 있던 수많은 시체들처럼. 그리고 시간은…….

    〈제가 죽는 거 봤어요?〉

    〈……응.〉

    다시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내가 죽으면 항체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세상은 말 그대로 악몽이 될 테니까.

    우리는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왜 선배가 시간을 거슬렀는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주체가 왜 하필 그여야 했는지. 신의 안배일까, 악마의 농간일까, 아니면 극한의 상황에 시달린 끝에 선배와 내가 환각을 본 것일까.

    하기야 이제 와서 고민해 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이제껏 우리는 너무 많은 비현실을 겪었다. 죽은 사람이 괴물이 되어 되살아난다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이었다. 산처럼 쌓인 풀리지 않는 의문들에 하나가 더해졌을 뿐이다.

    나는 널찍한 로비를 가로질러 출구를 향했다. 낯선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바깥으로 완전히 나오기 직전, 유리문 너머로 TV에 뜬 기사 제목이 언뜻 보였다.

    [사고 발생 당시 광우병과 유사한 신종 인수 공통 감염병 연구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갑자기 ‘좀비 바이러스’로 변이한 원인은?]

    미련 없이 문을 닫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실내의 공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눈부신 햇살과 시원한 바깥바람이 메웠다.

    날은 여전히 쌀쌀했다. 겨울만큼이나 매섭다는 꽃샘추위였다. 사람들은 두툼한 패딩을 껴입고 종종걸음을 쳤다. 하지만 병원 뜰에 이른 봄꽃이 하나둘씩 보였다. 길을 따라 심은 벚꽃 나무에도 작은 봉오리가 맺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입원과 통원 치료를 거치는 사이에 계절이 바뀌었다. 내 악몽은 아직도 얼음장 같은 겨울에 멈춰 있는데.

    나는 코트 깃을 여미고 걸음을 옮겼다. 약속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 * *

    낯선 현관문 앞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로 날아온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지. 양손에 짐이 있어서 휴대폰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상하게 긴장되었다. 처음 온 곳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여기가 평소엔 올 엄두도 못 내던 고급 아파트라 그런 걸까. 벽과 바닥이 모두 검은 대리석으로 된 널찍한 복도엔 사람 사는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잣집 초등학생 과외 하러 다녔을 때도 이 정도로 주눅 들진 않았는데.

    조금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직한 현관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검은 티셔츠 차림의 키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원래도 까만 머리카락이 더 까맣게 젖어 있었다.

    “아.”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물러섰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선배가 픽 웃었다.

    “왜 그렇게 쫄아. 네가 눌러 놓고는.”

    병실에서 선배에게 고백했던 날 이후로 그와 제대로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병원에 있을 땐 하루가 멀다 하고 정밀 검사를 받으러 불려 갔고 퇴원한 뒤에도 줄곧 본가에 있었다. 선배는 총알이 옆구리에 아예 박혔던 탓에 더 오래 병원 신세를 졌다. 일정이 묘하게 엇갈려서 만나지 못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기껏해야 몇 주 정도일 텐데, 그를 못 본 지 너무도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피로 얼룩진 캠퍼스도 소독약 냄새가 나는 병실도 아닌 일상적인 공간에서 마주한 선배가 낯설었다. 공포 영화 포스터에서 주인공만 오려 내 로맨틱 코미디 영화 포스터에 덩그러니 얹어 놓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선배.”

    어색함을 지우려 인사를 건넸다. 선배는 가만히 고개를 까딱였다.

    “응. 안녕, 현아.”

    “…….”

    인사를 하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다. 다쳤던 덴 괜찮냐고 물어볼까. 아니, 안 괜찮은 걸 빤히 아는데 뭘 물어봐. 그럼 잘 지냈냐고 할까? 안부는 무슨. 언제부터 선배와 내가 그렇게 꼬박꼬박 예의를 지키는 사이였다고.

    폐허가 된 캠퍼스에서 서로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고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이고, 입을 맞추고 몸까지 섞었던 게 아주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일 같았다. 멋쩍어서 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건 뭐야? 왜 가져왔어?”

    품에 안은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탐스럽게 핀 새빨간 장미 수십 송이가 시야를 메웠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선배가 한 박자 늦게 꽃을 받았다. 그의 큼직한 손에 들리자 꽃이 한층 작아 보였다.

    “선배 주려고요.”

    “나? 나 왜?”

    “그게.”

    내 입으로 말하려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우리…… 그러니까, 처음.”

    “으응. 처음.”

    그가 느릿하게 내 말을 따라 했다. 얼굴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나는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털어놓았다.

    “우리 처음으로 데이트하는 거잖아요. 선배 퇴원하고 처음 보는 거기도 하고요. 축하 선물 겸해서…….”

    그때 병실에서 내가 선배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니까, 선배가 거절하지 않았으니까, 우린 이제 사귀는 사이가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배에게 줄 꽃도 사고 선물도 샀다.

    하지만 선배는 별생각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렇게 편안한 차림으로 날 집으로 불렀겠지. 심지어 방금 씻고 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나 혼자만 쓸데없이 오버해서 너무 앞서 나간 게 아닐까.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선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뭔 헛소리냐고 나를 비난할까? 아니면 고백 한번 한 걸로 대체 어디까지 나간 거냐고, 설레발 작작 치라고 비웃을까. 조마조마했다.

    “정호현.”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너 다른 새끼들한테도 이랬어?”

    “네?”

    “다른 새끼들이랑도……. 데이트, 씨발, 그래. 데이트할 때마다 꽃 사다 바쳤냐고. 넌 누구한테나 다 달게 굴지? 그 예쁜 얼굴로 이제껏 몇 명이나 홀렸어?”

    그가 작게 이를 갈았다.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요.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꼭 그런 건 아니다?”

    “아니, 저기요, 선배.”

    “그럼 뭔데. 어떤 놈한텐 꽃 주고 어떤 놈한텐 안 줬어? 나 선택받은 건가? 와. 존나 영광이네.”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잠깐만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제가 설명할게요.”

    “설명은 무슨. 이게 어디서 잔머릴 굴려.”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 포장지가 와작 구겨졌다. 말 몇 마디 만에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참한 애인 놔두고 이 사람 저 사람 건드리는 천하의 몹쓸 놈이 된 기분이었다.

    “죄송해요.”

    그의 손등에 내 손을 얹었다.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했다.

    “됐어.”

    그가 고개를 팩 돌렸다. 그 와중에도 꽃다발은 여전히 험악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꽃줄기가 으스러지는 게 먼저일까, 그의 기분이 풀리는 게 먼저일까. 나는 핏줄이 도드라진 그의 손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눈치를 살폈다.

    “선배. 삐졌어요?”

    “몰라.”

    “저랑 말 안 할 거예요?”

    “안 해. 그럴 기분 아냐.”

    “저 아무한테나 꽃 주고 그런 짓 안 해요. 선배 간만에 만나는 거기도 하고, 선배가 집에까지 초대해 줬는데 빈손으로 오기 좀 그래서 사 온 거예요.”

    “…….”

    선배는 여전히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린 채였다. 어색해하던 것도 잊고 필사적으로 그를 달랬다.

    “잘못했어요. 앞으로 선배 말고 아무한테도 꽃 안 줄게요.”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눈매가 느슨해졌다.

    “그렇게 예쁘게 칭얼거리면 다 되는 줄 알지?”

    “네? 제가 언제요!”

    어이가 없었다. 이건 또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예쁘게 칭얼거렸다고? 어딜 봐서? 비굴하게 애걸복걸한 게 아니라?

    “영악하긴. 하여간 생긴 값 한다니까.”

    “뭐라고요?”

    “들어와.”

    그는 나를 깔끔히 무시하고 휙 들어갔다. 한 손에 반쯤 구겨진 장미 꽃다발을 든 채였다. 나는 머뭇거리다 얼떨결에 그를 따랐다.

    쇼핑백에 얌전히 들어 있는 아직 못 준 선물이 생각났다. 꽃다발만으로도 잔뜩 놀림받았는데 저것까지 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당할지 몰랐다. 나중에, 그래, 나중에 타이밍 봐서 주지 뭐. 손에 들린 쇼핑백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지만 못 들은 척했다.

    “실례합니다.”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실내는 넓었다. 복도와 같이 집 안도 모두 대리석이었다. 소파와 테이블을 비롯하여 있어야 할 가구는 다 있는데도 이상하게 생활감이 없었다.

    책장과 수납장은 텅텅 비어 있고 뜬금없이 거실 바닥에 책을 산처럼 쌓아 놨다. 전시 도록으로 보이는 하드커버 책과 예술 서적이 뒤섞여 있었다. 그 옆엔 영화 DVD 같은 게 굴러다녔다. 하기야 선배가 알뜰살뜰하게 정리·정돈을 할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부모님이나 다른 분 계세요? 인사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돼. 여기 너랑 나밖에 없으니까.”

    “선배 혼자 살아요?”

    “응.”

    “가족들은요?”

    “없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선배가 가족 얘기를 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섣불리 말을 꺼낸 내 입을 때려 주고 싶었다.

    “죄송해요. 저, 제가 혹시.”

    선배는 나를 돌아보더니 살짝 웃었다. 그가 검지로 내 뺨을 콕 찔렀다. 하지만 나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바짝 쫀 거 봐.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새하얘졌어. 얼린 생크림 같아.”

    “…….”

    “조금만 더 놀려 먹다간 아주 애 울리겠네. 귀엽게 엉엉 우는 것도 보고 싶긴 한데.”

    “…….”

    “넌 모르지? 그동안 내가 너 만지고 싶은 거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우리 호현이 말캉말캉한 뺨도 찔러 보고, 예쁜 손이랑 발도 만지고, 핑크색 자지도 주무르고.”

    “아니, 세상에.”

    저 음담패설은 여전했다. 선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뺨을 찹쌀떡 만지듯 잔뜩 조물거리다가, 결국 내가 진짜 울고 싶어졌을 때쯤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이혼해서 안 본 지 오래됐고, 어머니는 외국에 있어.”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힘이 쭉 빠졌다. 어쨌든 다행이었다. 내가 선배의 상처를 건드린 게 아니어서.

    우리는 캠퍼스를 배경으로 한 악몽에서 벗어나 조금씩 서로의 현실에 스며들었다. 이름과 나이, 생일, 취향, 가족 관계. 그에 관한 것을 하나하나 알아 갈수록 그가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게 실감 났다. 언젠가 그가 나를 꼭 껴안고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내가 살아 있음에 안심했듯이.

    “대학을 멀리 가서 독립하겠다니까 아주 좋아하면서 기왕이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학으로 가라길래, 기분 더러워져서 일부러 국내 대학 골랐어. 그랬더니 내가 안 가면 자기가 가겠다고 바로 짐 싸던데.”

    대학을 고작 그런 이유로 선택하다니. 심지어 우리 학교는 커트라인도 만만치 않은데.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선배 많이 아팠잖아요. 수술도 여러 번 받고. 병원에도 안 오셨어요?”

    “오지 말라고 했어. 얼굴 보면 상처 덧날 것 같아서.”

    선배의 병실에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가족들로 항상 복작복작하던 내 병실과 달리 그의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같은 1인실인데도 훨씬 넓어 보였다. 침대맡에 놓여 있던 과일과 꽃바구니도 기억났다.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금박을 입힌 카드까지 곁들인 게, 누군가 직접 들고 병문안을 왔다기보다는 배달 업체에 주문한 것 같았다.

    아들이 끔찍한 참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 총상을 입고 입원했다는데 와 보지도 않다니. 그 와중에 선물은 꼬박꼬박 보내고, 대학생 혼자 사는데 이런 비싼 집을 내주고. 사이가 나쁘다고 해야 할까, 좋다고 해야 할까. 아주 쿨하다 못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모자지간이었다.

    나는 일단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코트도 벗지 않은 채였다.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무슨 얘길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학교에 있을 때는 대화 주제로 고민할 겨를 따윈 없었다. 식량을 어디서 구할 것인지, 감염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정문까진 어떤 루트로 갈 것인지. 그게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대부분이었다. 햇살이 스며드는 거실에 선배와 평온하게 앉아 있는 상황 자체가 너무도 낯설었다.

    “오후에 영화 예매해 놨어요.”

    앞뒤 자르고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선배가 내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배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요즘 제일 인기 많은 걸로 예매했어요. 혹시 취향에 안 맞으면 다른 영화로 바꿀게요. 그리고 오는 길에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이 근처에 딸기 케이크로 유명한 카페 있대요. 이따 밥 먹고 후식으로 먹으러 가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레스토랑은…….”

    “정호현.”

    선배가 말허리를 자르고 불쑥 끼어들었다.

    “아직도 내가 네 선배야?”

    “네?”

    “우리 학교 없어졌잖아. 근데 선배는 무슨 선배야.”

    바이러스 유출 사고는 원자력 발전소 폭발에 준하는 대형 재해였다. 우리 학교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이 모두 출입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총장이 사퇴하고 행정상으로도 폐교 절차를 밟았다. 캠퍼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멀쩡히 학생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작년 2학기 기준으로 졸업 요건을 채운 학생들에게는 졸업장이 주어졌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근처에 있는 다른 대학교로 적을 옮겨야 했다. 슬프게도 선배와 나는 후자였다. 3학년인 나는 그나마 나았다. 선배는 마지막 학기와 졸업 작품 전시회만 남겨 둔 상태였다. 학업을 마치려면 특별 편입 신청을 하든 일반 편입이나 수능 준비를 하든 해야 했지만 일단은 치료가 우선이라는 핑계로 미뤄 두었다.

    바이러스 참사로 전국이 발칵 뒤집힌 판에도 학업 걱정을 해야 하다니. 웃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었는데, 끔찍한 기억들이 나와 선배의 머릿속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영원이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자기야.’라고 하면 더 좋고.”

    “아뇨, 그건…….”

    “반말해도 괜찮아. 넌 그래도 돼. 기영원 닥치라는 말은 언제 또 해 줄 거야? 나 목 빼고 기다리고 있는데.”

    “안 해요! 안 한다니까요. 그건 진짜 홧김에 말실수한 거예요.”

    “야. 그렇게 나랑 거리 두고 싶어?”

    킥킥 웃던 선배가 돌연 웃음기를 싹 지웠다. 원래도 그다지 온화하지 않은 인상이었는데 작정하고 표정을 굳히자 더욱 사나워졌다.

    “너 아까 문 앞에서부터 그랬어. 처음 보는 사이처럼 데면데면하게 굴었잖아. 아냐? 들어오라니까 난감해 죽겠단 표정 짓고, 하지도 않던 예의 차리고. 선배 소리 안 해도 된다는데 말은 또 더럽게 안 들어 먹지.”

    “…….”

    “조금만 만져 줘도 좋다고 자지러지면서 안기던 게 갑자기 내외를 하네? 학교에 갇혀 있을 땐 분위기 휩쓸려서 붙어먹었는데, 이제 와서 맨정신으로 생각해 보니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좆같이 싫은 새끼한테 코 꿰인 거 후회돼?”

    선배가 그렇게 느꼈을 줄은 몰랐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선배가 싫었으면 꽃 사 들고 집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그럼 뭔데. 너 지금 코트도 안 벗고 무슨 벌받으러 온 놈처럼 앉아 있잖아. 빨리 나가고 싶어서 그래? 밖에서 적당히 밥 처먹고 영화 보고, 얼른 눈앞에서 나 치워 버리려고?”

    되찾은 일상의 평온함에 취해서 잊고 있었다. 이제껏 선배가 내 일거수일투족에 얼마나 절박하게 반응했는지. 그는 내가 잠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졌고,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곧장 이성을 잃었다. 우리가 떨어져 있던 몇 주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날카로운 삼백안이 나를 형형하게 노려보았다. 무심결에 몸을 움츠리며 코트 옷깃을 여몄다. 그가 내 팔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순간 통증으로 눈앞이 하얘졌다. 필요 이상으로 날 선 비명이 터졌다.

    “흐윽!”

    선배가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찢어발길 것 같은 눈빛과는 달리 팔목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서슴없이 내 코트를 끌어 내리고 안에 입고 있던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다. 잠깐의 정적 끝에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정호현. 너…….”

    내 팔은 빼곡하게 들어찬 주삿바늘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바늘을 꽂을 수 있는 곳엔 죄다 구멍이 났다. 덜 아문 상처마다 피가 맺혔다. 어떤 곳엔 짙은 멍이 얼룩덜룩하게 번졌다. 꼭 중증 마약 중독자 같은 몰골이었다.

    항체 보유자라는 게 밝혀진 이후 나는 수없이 피를 뽑혔다. 심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굵은 주삿바늘이 팔을 찔렀다. 헌혈 제한 기간 같은 건 지키지도 않았다. 항체를 가진 사람은 아직까진 내가 유일했고, 희생자는 시시각각 늘고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백신을 개발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나는 캠퍼스에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고생할 때보다 더욱 해쓱해졌다. 이걸 들키기 싫어서 외투를 벗는 걸 꺼렸다. 이제 겨울을 넘어 봄으로 가는데, 가족들 앞에서도 긴 옷을 껴입고 멀쩡한 척했다. 내 꼴을 보면 다들 걱정할 테니까.

    “아까부터 너 얼굴 하얀 게…… 당황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 등신같이.”

    “…….”

    “……씨발.”

    선배는 살이 빠져 뼈가 도드라진 내 손목을 엄지로 몇 번 문지르다 툭 놓았다.

    “전 그냥 좀 겁이 났어요. 선배가 그랬잖아요. 처음엔 저 치 떨리게 싫어했다고. 저 새끼랑은 절대 안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고요. 어쩌다 보니 가까워지긴 했는데,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으니까. 선배가 저한테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어요.”

    “…….”

    “우린 원래 아무 접점이 없었잖아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좀비 소굴에서 구르던 얘길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네가 나한테 질린 게 아니고?”

    나는 한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선배를 마주 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그렇게 쉽게 변할 마음이었으면 애초에 고백 안 했어요.”

    그는 대답 대신 내 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샤워실에서 손을 꽉 움켜쥐고 한참 나를 응시했던 때처럼.

    “정호현.”

    “네.”

    “내 예쁜 호현이.”

    그가 시선을 살며시 내렸다. 미동도 없이 나를 응시하던 검은 눈동자가 긴 속눈썹에 가려졌다. 그는 입술을 몇 번 작게 달싹였다. 그답지 않게 할 말을 고르느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나지막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나 싫어하지 마. 내가 널 구해 주지 않아도, 너 노리는 감염자들 대신 죽여 주지 않아도. 내가 큰 잘못을 했어도…… 나 계속 좋아해 줘.”

    심장이 따끔거렸다. 선배가 이렇게 매달리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볼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럴게요.”

    그래서 나는 가만히 웃었다.

    “영원이 형, 좋아해요. 아마도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이 좋아할 거예요.”

    그 또한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내가 웃으니 무의식적으로 따라 웃은 것 같았다.

    “형은 저 좋아해요?”

    “좋아하냐고? 아니, 몰라, 잘 모르겠어.”

    횡설수설 말을 잇는 선배의 입매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학교에서 탈출하면 너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어. 널 알기 전으로 돌아가서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너 말고 다른 생각은 못 하게 된 지 너무 오래됐어. 네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참담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그인데 왠지 내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팔을 벌렸다. 그가 내 품에 쓰러지듯 기대 왔다. 너른 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 현아, 나는 여전히 네가 있어야 돼. 난 너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도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고, 나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가만히 안고 있었다. 안온한 일상 속에서 만난 그가 더 이상 어색하지도 낯설지도 않았다.

    황량한 겨울에 머물러 있던 마음 귀퉁이가 비로소 조금 녹았다. 앙상한 가지 끝에서 하나둘 고개를 내미는 꽃봉오리처럼.

    * * *

    어느덧 점심이 되었다. 이대로 계속 집에서 미적거리다간 끼니때를 놓칠 것 같았다. 미리 알아봐 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딸기 주스랑 딸기 케이크를 먹고, 오후에는 영화를 보고. 영화가 끝나면 또 저녁을 먹어야겠지? 첫 데이트라고 혼자 괜히 긴장해서 이것저것 생각해 왔더니 일정이 상당히 빡빡했다.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일단 선배를 방으로 떠밀어 보냈다. 아무리 날이 제법 풀렸다지만 젖은 머리는 다 말리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거실 소파에 멀뚱하게 앉아 있다 건너편에 시선이 갔다. 반쯤 열린 문 틈으로 내부가 보였다.

    널찍한 방 안에는 옷장이나 침대 같은 일반적인 가구 대신 테이블과 선반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조각칼과 낙서 같은 스케치들, 석고와 찰흙을 비롯한 재료들도. 개인 작업실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도 함부로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외쳤다.

    “집 구경해도 돼요?”

    “다른 것도 마음껏 구경해. 나 옷 갈아입는 거 구경할래? 가까이서 봐도 돼. 구경만 하지 말고 직접 벗겨 주든가.”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안 보겠습니다.”

    “왜? 보라니까?”

    “그게, 저. 생각해 보니까 멋대로 구경하는 거 실례인 것 같아서요.”

    “실례는. 우리 사이에.”

    선배가 낮게 웃었다. 우리 사이라니.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또 웬 또라이 같은 소리야, 하고 흘려 넘겼다지만 지금은 좀 다르게 들렸다. 말에 담긴 무게가 느껴졌다.

    새삼 실감이 났다. 아무도 없는 집에 그와 단둘이 있다는 게. 지금은 목숨을 위협하는 감염자들도 물자를 노리는 탐욕스러운 생존자들도 없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뭐, 선배야 원래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했지만.

    괜히 부끄러워졌다. 나는 정자세로 꼿꼿이 앉아서 애꿎은 벽만 노려보았다. 그러다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병원 예약 때문에 일찍 일어난 데다 피까지 잔뜩 뽑혔다. 몸이 노곤하게 늘어졌다. 어느 순간 나는 폭신한 소파에 고개를 기대고 깜빡 잠들었다.

    칼바람이 매몰차게 뺨을 할퀴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 하늘을 가렸다. 흐린 하늘에선 을씨년스러운 눈발이 흩날렸다.

    끝도 없이 줄줄 흐른 피가 바지 자락과 발목을 죄다 물들이고 땅을 적셨다. 혹한의 날씨에 핏물이 빠르게 얼어붙었다. 종아리에서부터 욱신거리는 통증이 번지다 점점 둔해졌다.

    멍하니 아래를 보았다. 누군가 흙과 눈이 뒤섞인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선배였다.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얼굴에는 이상할 정도로 핏기가 없었다.

    〈선배. 선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나는 총알에 스친 다리의 통증도 잊고 그의 앞에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몇 번 더 그를 불러 보다가, 결국 손을 뻗었다. 먼지와 피로 더러워진 옷깃을 더듬더듬 헤치고 목덜미를 짚었다. 그런데…….

    〈…….〉

    맥이 뛰지 않았다.

    착각일 거다. 날씨가 추워 손이 얼어서 맥을 제대로 짚지 못한 거겠지.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좀 더 낮추었다. 이번엔 손바닥 전체로 차게 식은 그의 목을 감쌌다. 나도 모르는 새에 손을 미친 듯이 떨고 있었다.

    〈일어나요. 일어나 봐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이 산 밑이 바로 버스 정류장이에요. 사람 다니는 길이라고요. 네?〉

    시야가 까맣게 좁아졌다. 가만히 눈을 감은 선배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늘어진 손을, 빠르게 식어 가는 뺨을 만지고 또 만졌다. 사라져 가는 온기를 필사적으로 나눴다.

    〈이제 진짜 탈출이에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버텨요. 우리 나갈 수 있어요. 같이 나가자고 약속했잖아요.〉

    허겁지겁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백한 산이 우리를 둘러싸고 내려다보았다. 감염자도 군인들도 다른 생존자들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살을 에는 바람이 귀 언저리를 찢어발겼다. 선배와 내가 지나온 길을 따라 소복이 쌓인 눈에 검붉은 얼룩이 졌다.

    〈여기까지 와 놓고 포기할 거예요? 왜 대답이 없어요. 선배, 제발 말 좀 해 봐요. 왜 이렇게 차가워요. 왜, 왜 심장이 안 뛰어요…….〉

    기계적으로 그의 어깨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겨울나무처럼 쩍쩍 갈라졌다. 점점 중심을 잡고 앉아 있기가 힘들어졌다. 내가 주저앉은 자리에 느리게 피가 번졌다.

    나는 결국 선배의 가슴 위에 쓰러졌다. 더 이상 움직이지도 맥이 뛰지도 않는 그의 몸 위에 내 몸이 겹쳐졌다. 심장이 으스러지듯이 아픈데. 숨을 쉴 때마다 목을 찢고 폐를 으깨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속삭였다.

    〈선배…….〉

    누가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꿈속에서 현실로 끌려오듯 다급히 눈을 떴다. 뿌연 시야에 까맣고 하얀 형체가 어른거렸다. 나는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누가 목을 움켜쥐고 조르는 것 같았다. 귀에서 삐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호현. 숨 쉬어.”

    “…….”

    “숨 쉬는 데만 집중해.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깊게 들이마시고, 그래. 지금 내쉬어.”

    단호한 음성이 귓가에 박혔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마침내 숨이 터져 나왔다.

    “헉…… 흑, 흐윽.”

    눈앞이 조금씩 맑아졌다. 매끈하게 펼쳐진 천장과 조명,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선배의 얼굴. 시야 구석에 가죽 소파가 어른거렸다. 땀을 흘렸는지 이마와 등이 축축했다.

    꿈이었다. 선배를 부축하고 눈 쌓인 산을 헤매던 것도, 도중에 선배가 축 늘어져서 숨이 멎어 버린 것도. 다 꿈이었다. 지금은 평화로운 초봄의 낮이었고, 여긴 그의 집이었다. 목숨을 위협받을 일 따윈 없는.

    어느새 선배의 옷차림이 변해 있었다. 여전히 까만색인 건 똑같지만 아까 입고 있던 티셔츠가 니트로 바뀌었다. 촉촉이 젖은 머리도 말렸다. 내가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동안 나갈 준비를 한 것이다.

    “현아.”

    그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굳어 있던 머리가 삐걱삐걱 돌았다. 선배가 죽는 꿈을 꿨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이제껏 나보다 선배가 훨씬 힘들었을 텐데, 그런 그의 앞에서 악몽을 꿨니 어쩌니 하며 징징대다니. 첫 데이트를 앞두고 그만큼 분위기 깨는 짓이 없을 거다.

    선배는 소파 등받이를 짚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자니 터질 듯 쾅쾅 뛰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저…….”

    나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뻣뻣이 굳은 입매를 끌어 올려 어떻게든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죄송해요. 깜빡 졸았어요. 준비 다 했어요? 이제 나갈까요?”

    “무슨 꿈 꿨어?”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소파를 짚은 손등에 핏줄이 섰다. 빠드득. 가죽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꿈 꿨냐고. 방금 나 불렀잖아. 숨도 못 쉬고 가위눌리면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는 대로 횡설수설 둘러댔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깨우니까 놀라서 그랬어요. 그게, 그러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졸려서요. 눈 좀 붙였더니 지금은 멀쩡해요. 아, 선배 배고프겠다. 우리 빨리 밥 먹으러…….”

    “학교에 갇혀 있던 때 꿈 꿨어?”

    “…….”

    “꿈에서, 죽었어? 내가.”

    선배가 덤덤하게 쐐기를 박았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도 겪어 보았다는 듯.

    나는 멍하게 그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피를 잔뜩 흘리지도 차갑게 식지도 않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선배가 내 앞에 있었다. 가슴을 꽉 막고 있던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뒤늦게 눈물이 왈칵 터졌다. 서러워서인지 마음이 놓여서인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안아 주세요.”

    꽉 메인 목을 비집고 먹먹한 부름이 새어 나왔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한껏 일그러지는 얼굴을 추스를 겨를 따윈 없었다.

    여전히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선배가 스르르 움직였다. 그는 한쪽 무릎을 소파에 싣고 몸을 기울였다. 쿠션 귀퉁이가 가볍게 꺼졌다. 나를 덮치듯 올라탄 선배 탓에 내 위로 그늘이 졌다.

    “저 좀 안아 주세요. 빨리, 빨리요…….”

    뭐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고 울면서 팔을 벌렸다.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탄탄한 어깨와 등에 힘껏 매달렸다. 그의 몸에 조금이라도 더 닿으려고 애를 썼다. 그의 심장이 뛰는 걸 지금 당장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크고 서늘한 손이 뺨을 감싸 쥐었다. 선배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틀었다. 눈물을 흠뻑 머금은 내 입술 위로 마른 입술이 닿았다. 눈을 감았다. 그는 내 뒷머리를 받치고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나를 달래듯 미적지근하게 비비고 문지르다가, 힘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찬찬히 밀어 넣었다.

    “읏……!”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샜다. 그의 아래에 깔려 있던 내 몸이 절로 들썩였다. 우리의 가슴이 가쁘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허벅지끼리 지그시 맞닿아 눌렸다. 두 사람분의 체중이 실리자 소파에서 작게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감각이 지나치게 예리해졌다. 등줄기가 떨리고 솜털이 곤두섰다.

    우리는 이제껏 늘 절박한 상황에서 서로를 갈구했다. 괴물들이 밖을 배회하는 와중에 차갑고 더러운 바닥을 뒹굴며 입을 맞췄고 누군가에게 쫓기듯 몸을 섞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도 없는 거실은 고요했다. 평온한 햇빛이 닫힌 블라인드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아무도 우리를 해칠 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섹스가 충동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한 우리의 의지였다.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선배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나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더 깊이 맞물리자마자 혀를 빨았다. 질척하게 뒤섞이는 숨결이, 입술 위에서 뭉개지는 따뜻한 감촉이 버거웠다. 꼴사납게 헐떡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그의 허리를 어설프게 감쌌다. 전에 우리가 어떻게 키스했지? 선배는 나를 어떤 식으로 안아 줬지?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게 너무도 낯설었다.

    “괜찮아.”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윗입술이 스칠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였다. 비아냥대지도 건들거리지도 않는 담백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괜찮으니까 마음대로 만져. 확인해 봐. 나 어디 안 가.”

    “안 가요? 정말?”

    “응. 정말.”

    선배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손바닥 전체로 어깻죽지를 둥글게 어루만지고, 등을 타고 내려와 총상을 입었던 옆구리를 살살 쓸었다. 굵은 짜임의 니트 아래로 그의 허리 근육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하아.”

    귓가에 달콤한 한숨이 스몄다. 그는 내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다가, 내 셔츠 자락을 빼내고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아, 앗, 흐으…….”

    옷 아래 맨살에 타인의 손이 닿았다. 내 허벅지 사이에 들어와 있던 그의 허벅지를 힘껏 조였다. 몸이 너무 민감해져서 죽을 것 같았다. 눈물은 진작 멎은 줄 알았는데, 나는 어느 순간부턴가 다시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 현이는 조르는 것도 잘하고 조이는 것도 잘해. 넌 진짜…… 타고났다니까.”

    그는 셔츠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풀었다. 생각처럼 옷이 쉽게 벗겨지지 않자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단추가, 씨발……. 예쁜아. 왜 하필 이딴 거 입고 왔어. 너 옷 벗기다 좆물 다 흘리라고?”

    단추가 하나씩 풀려 나가는 동안 나는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러다 엉겁결에 선배의 니트 밑단을 붙잡았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니트를 확 올려 벗었다. 그는 안에 입고 있던 얇은 반팔 티셔츠까지 벗어 던지고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보였다. 굵직굵직하게 뻗은 어깨와 쇄골, 곧은 목덜미. 목을 가로지른 흉터는 조금 옅어졌지만 아직도 눈에 띄었다.

    그는 바지 단추를 한 손으로 풀어 헤치며 다시 몸을 겹쳐 왔다. 피와 먼지가 묻지 않은 옷자락이, 보송보송한 살갗이, 시체 썩는 악취가 떠돌지 않는 공기가 생경했다.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키스했다. 처음처럼 서툴고 조심스럽게.

    곧 내 셔츠도 벗겨져 나갔다. 차가운 소파 가죽이 등에 닿았다. 선배가 내게서 벗겨 낸 옷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성의 없이 올려 두는 것을 멍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신기하고 이상했다. 지금 우리는 마치, 정말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같았다.

    선배가 내 손에 스르르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의 예민한 살갗을 가르고 그의 단단한 손가락이 얽혀 들었다. 간지럽고 야릇했다. 온몸의 감각이 꽃이 피듯 깨어났다. 선배는 내 다른 쪽 손목을 들어 맥이 뛰는 부분에 입을 맞췄다. 자잘한 키스를 퍼부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주사 자국과 멍으로 흉하게 얼룩진 팔뚝 안쪽 살에 입술을 묻었다.

    “그 좆같은 검사 다 때려치워. 백신이고 나발이고.”

    그가 붉은 혀로 아랫입술을 훑으며 고개를 들었다. 찌푸린 눈매가 한껏 사나워졌다. 그는 집요하게 내 벗은 몸을 훑어보았다.

    “살이 존나 빠졌잖아. 한 입 거리다 뭐다 했는데, 이제 진짜 한 입 베어 물면 없어지겠어.”

    “그래도 검사는 받아야죠. 안 받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그럼 이 예쁜 게 반쪽이 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그가 불만스럽게 이를 갈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뽑히니 아무리 잘 자고 잘 쉬고 잘 먹어도 몸이 좀 축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한 입 거리나 반쪽까진 아닌데.

    “잘못 만지면 너……. 망가질 것 같아. 예쁜데 불안해. 어떡하지?”

    나는 그의 손을 끌어다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도 전해지길 바랐다.

    “괜찮아요. 안 망가져요. 안 망가지니까 만져도 돼요.”

    선배가 천천히 내 가슴을 쓸었다. 쇄골과 어깨도, 허리도 만져 보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촉감으로만 상대를 인식하는 것처럼 신중하게. 그의 손끝에 새겨진 굳은살이 여린 피부를 자극했다. 간지러워서 몸을 뒤채며 끙끙 앓았다.

    “정호현, 꼬물거리지 마. 미칠 것 같으니까.”

    “그렇지만 간지러운데…….”

    “너 젖꼭지든 자지든 핑크빛 도는 곳 죄다 새빨개질 때까지 물고 빨고, 온종일 좆 쑤셔 박은 채로 무릎에 앉혀 놓고, 아주 지랄이란 지랄은 다 떨고 싶은 걸 참는 거야.”

    선배는 한숨을 내쉬고 내 위에 완전히 엎드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묵직한 체중이 실렸다. 그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한 팔로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는 내 목에 코끝을 비비적거리더니 쪽쪽 입을 맞추고 뺨을 문질렀다. 송곳니로 콱 깨물면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사냥감을 앞에 두고, 커다란 맹수가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도드라진 핏대를 따라 살갗을 자근자근 씹다가 맥박이 뛰는 지점을 쭉 빨아들였다. 허리가 팍 튀었다.

    “아!”

    “넌 내가 이대로 네 목 물어서 죽일 거라고 해도 고스란히 내줄 거지? 내 밑에 얌전히 누워서, 예쁜 소리로 울면서.”

    선배가 낮게 잠긴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콧잔등을 간질이기에 코끝으로 톡 쳐올렸다. 사락사락 흐트러지는 새까만 머리칼에서 어렴풋이 샴푸 향이 났다.

    “안 그럴 거 알아요.”

    “너도 그래도 돼. 내 목에 흉터 만들어 달라고 했잖아. 마음대로 목 조르고 할퀴고 살점 뜯어 먹어.”

    “싫어요…….”

    “또 싫어? 그래요, 우리 후배님. 이번엔 뭐가 그렇게 싫으신데요.”

    “선배 아픈 거 싫어요. 안 해요.”

    선배가 픽 웃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고 질척하게 살을 핥았다. 목덜미, 어깨, 가슴팍을 가리지 않고 잔뜩 빨고 깨물었다. 주사에 수없이 찔린 팔뚝만큼이나 위쪽도 얼룩덜룩해졌다. 그가 내 젖꼭지를 입술 사이에 물고 쪽쪽 빨아올릴 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선배의 손에 속옷이 죽 끌려 내려갔다. 좀 부끄러웠다. 선배 앞에서 알몸이 된 게 얼마 만이던가. 괜히 허벅지를 슬쩍 움츠렸다. 선배는 내 미약한 저항을 깔끔히 무시하고 다리를 우악스럽게 벌려 반쯤 발기한 성기를 움켜쥐었다.

    “잘 있었네, 우리 호현이 자지.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쁜 것 같아.”

    “선배, 제발요.”

    “나 이거 빨고 싶어서 뒈지는 줄 알았어.”

    “네?”

    “현이 넌? 안 빨고 싶었어?”

    “무슨, 뭐, 뭘 빨아요? 담배를요? 밀린 빨래를요?”

    “아니이. 내 좆.”

    선배가 말끝을 늘이며 샐쭉이 웃었다. 노골적인 말들이 최소한의 필터도 없이 쏟아졌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내 성기를 느긋하게 주무르고 있었다. 그의 것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귀두를 무는 것만으로도 턱이 빠질 듯 아팠던 게 떠올랐다. 필사적으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그거 빨면 저 입가 다 터져요. 입술 찢어져서 막 피 날 거예요. 그럼 아파서 밥도 못 먹을 거고, 비쩍 곯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한 입 거리 아니고 반 입 거리 될지도 몰라요…….”

    “맞아. 생각해 보니까 안 되겠다. 너 안 그래도 피 잔뜩 뽑혔는데 더 흘리면 안 되지.”

    그가 짐짓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로 저렇게 상식적인 말을 하지? 의심스러워지려는 찰나 그가 나를 휙 뒤집었다.

    “그럼 입 말고 뒤로 내 거 빨아 줘.”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었다. 소파 시트가 뺨에 닿는 것과 동시에 엉덩이가 잔뜩 벌어졌다. 다물린 입구에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이윽고 말캉한 혀가 마른 속살을 쑤셨다. 나는 격렬하게 몸서리쳤다.

    “흣, 으윽……!”

    선배는 내 허벅지를 꽉 움켜쥐어 더 벌려 놓고 얼굴을 한껏 들이밀었다. 엉덩이 살에 그의 콧대와 입매가 짓눌리는 게 낱낱이 느껴졌다. 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고개를 묻고 몸부림을 쳤다. 그래 봤자 선배의 몸에 깔려 있어서 힘없이 바르작대는 게 전부였다.

    옴찔거리는 입구를 줄기차게 빨아 대던 선배가 기어이 혀를 집어넣었다. 혀뿌리까지 처박고 앞뒤로 퍽퍽 쑤셔서 안을 잔뜩 적셨다. 꽤 긴 시간 동안 아무도 건드린 적 없던 속살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졌다. 너무 자극적이었다. 오금이 풀리고 허벅지가 경련했다.

    “아, 아, 아!”

    선배는 혀로는 구멍 안을 쑤시면서 손으로는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 거칠게 주물렀다. 그에 따라 안쪽 벽이 씰룩씰룩 일그러졌다.

    “아읏! 흐으, 윽, 그만, 앗, 이제, 그마안…….”

    구멍 안을 게걸스럽게 휘젓는 혀가 버거워서 무심코 아랫배에 힘을 꽉 주었다. 선배가 내 한쪽 허벅지를 어깨에 걸어 확 잡아당겼다. 몸이 반쯤 돌아갔다. 나는 가랑이를 어설프게 벌린 채 그에게로 질질 끌려갔다.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입 부근이 온통 번들거렸다. 그가 음란하게 젖은 입술로 빙긋 웃었다.

    “예쁜아. 이거 뭐야? 너 자지 왜 이렇게 됐어.”

    믿을 수 없었다. 내 성기가 완전히 곤두서서 꺼떡이고 있었다. 그것뿐이랴, 발개진 귀두 끝에서 맑은 액이 질질 샜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았다. 그가 내 성기를 손끝으로 툭 쳤다.

    “하, 하지 마세요.”

    “뒤를 적셔 줬는데 왜 앞에서 물이 질질 새?”

    “몰라요.”

    “너 그동안 자위한 적 있어? 혼자 자지 잡고 흔들어서 좆물 뺐냐고. 구멍 좀 빨아 줬다고 자지러지는 거 보니까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런 거, 읏, 으응, 왜 물어봐요, 선배 진짜 너무해…….”

    나는 그에게 잡힌 다리를 버둥거렸다. 좁은 소파에서 나름대로 거리를 벌리려 애를 썼다. 선배가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바짝 몸을 붙였다.

    “말해 봐. 응? 했어, 안 했어.”

    “아, 안 했, 안 했어요.”

    “정말? 한 번도? 몽정도 안 했어?”

    “…….”

    “정호현. 대답 똑바로 안 하지.”

    내가 곧장 대답하지 못하자 선배는 검지와 중지를 내게 물렸다. 영문을 모르고 헐떡이며 입술 사이에 들어온 걸 빨았다. 쭙쭙대는 소리가 났다. 손가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빠져나갔다. 그리고 발그스름하게 풀어진 구멍에 단숨에 처박혔다.

    통통하게 오므라들어 있던 내벽이 그의 손가락 모양대로 벌어졌다. 나는 갑작스러운 삽입에 안을 잔뜩 조이며 벌벌 떨었다. 손가락 마디마디를 찐득하게 휘감는 속살을 뿌리치고 도로 쭉 뽑아냈다. 내 안에 박혔다 나온 손가락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퍽.

    “아흐윽!”

    그게 시작이었다. 선배는 사정 봐주지 않고 내 안을 푹푹 쑤셨다. 손등에 단단하게 불거진 마디가 입구에 눌릴 때까지 처넣었다가 확 잡아 뺐다. 나는 곧장 이성을 잃었다. 엉덩이를 힘겹게 뒤틀면서 안에 든 손가락을 베어 물었다. 바짝 선 성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선배…… 으응.”

    “선배 말고 형.”

    “형, 헉! 영원이 혀엉.”

    “그래, 그래.”

    “해, 아읏, 했어요, 나, 했…….”

    “뭘? 자위를?”

    “아니, 아, 말고, 자다가, 흐윽!”

    “몽정했어?”

    안이 빠르게 쑤셔지는 와중에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 누구 나왔어?”

    “…….”

    “또 말을 안 하네. 무슨 꿈 꾸면서 쌌냐니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선배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내 꿈에 나와서 야한 짓을 할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는가. 다 알면서 꼬치꼬치 캐묻는 그가 얄미웠다. 눈시울이 시큰거리더니 곧 물기가 고였다. 선배가 지그시 인상을 썼다.

    “그렇게 귀엽게 봐도 소용없어.”

    손가락을 곧게 세워 내벽을 쑤시는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더 세게, 나 좀 어떻게, 이대로 조금만 더, 아니, 그만, 나 이제 그만.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아, 아아, 흐, 으응, 아!”

    손가락이 잔뜩 긁고 지나간 속살에서 날카로운 쾌감이 번졌다. 허리와 엉덩이가 공중에 확 떴다. 음낭에 고여 있던 정액이 어찌할 새도 없이 쭉 뿜어졌다.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내 자지를 붙잡아 입에 머금었다. 귀두 전체를 머금고 맛있게 우물거리다가 볼이 오목하게 패도록 빨아서 나오는 정액을 죄다 받아 삼켰다.

    “호현아. 아주, 그냥, 존나 바쁘지? 위아래로 질질 흘려 대느라. 좆 박기도 전에 벌써 늘어지면 어떡해.”

    나는 아랫배와 허벅지 안쪽에 처덕처덕 묻은 정액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훌쩍였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살갗에 가죽 시트가 달라붙었다. 눈에 그렁그렁 물기가 맺혀서 선배가 흐리게 보였다.

    “매번 똑같은 악몽을 꿔요.”

    “…….”

    “학교에 갇혀 있는 꿈요. 어떤 꿈에선 우리가 끝까지 함께하지만…… 어떨 때는 크게 싸우고 서로 잔뜩 상처 입히고, 그러다 헤어져요. 그게 차라리 나아요. 적어도 살아서 숨 쉬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떨 때는…….”

    “응. 알아. 내가…….”

    선배가 말하다 말고 뜸을 들였다.

    “내가 왜 모르겠어.”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그 안에서 같은 상처를 보았다. 잠시 떨어졌던 손이 다시 얽혔다. 선배는 한 손으로 나와 깍지를 끼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성기 밑동을 붙잡았다. 그의 상태도 나와 다를 것 없었다. 잔뜩 열이 오른 성기가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요도 구멍에 맺힌 액체가 가느다란 실을 만들며 아래로 뚝뚝 흘렀다.

    선배가 내 발목을 쥐고 가랑이를 한껏 벌리게 했다. 성기와 음낭, 그 아래 회음과 구멍까지 낱낱이 드러났다. 그의 자지 끄트머리가 꺼떡이며 아랫배를 툭툭 쳤다. 묵직한 귀두가 닿은 자리에 물기가 묻었다.

    “이제 좆 넣어 줄게. 쭉쭉 잘 빨아 먹어.”

    그가 픽 웃고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핏줄이 불거진 굵은 기둥이 참으로 흉악했다. 어림잡아 계산해 보아도 배꼽 바로 아래까지 들어올 것 같았다. 내가 저걸 몇 번이나 넣었다니.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긴장한 탓에 무의식적으로 구멍을 움찔거렸다. 그걸 빤히 보던 선배의 눈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나를 통째로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이었다. 잔뜩 달아올라 발씬거리는 입구에 귀두가 닿았다.

    “흐읍.”

    눈을 질끈 감았다. 체중을 실어 지그시 눌러 오는 힘을 못 이기고 탄탄한 속살이 벌어졌다. 하지만 귀두를 반쯤 머금은 게 전부였다. 뒤로 물렸다가 다시 파묻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좀 더 많이 들어갔다.

    “안은 다 적셔 놨는데, 너무 좁아서 그런지 영 길이 안 나. 몇 달 안 박혔다고 그새 낯 가려?”

    “잠깐, 만요…… 읏!”

    아래에서부터 숨 막히게 밀어붙인 끝에 결국 귀두가 찔꺽 밀려 들어왔다. 타인의 성기가 배 안에 고개를 들이미는 감각 자체가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반사적으로 내벽을 확 조였다.

    “하아……. 씨발, 미치겠네.”

    선배가 지그시 이를 악물며 눈을 감았다. 선선한 실내 온도와 대조적으로 그의 앞머리와 관자놀이가 땀으로 젖었다.

    잠깐 멈췄던 자지가 도로 들어왔다. 속살이 기둥에 찰싹 감겨 들러붙었다. 빼낼 때는 내장이 통째로 딸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조금 무섭고 불편하고 아프고, 그보다 더 많이 미칠 것 같았다. 꽉 다물린 속살을 귀두로 조금 헤집다가 뒤로 물러서고, 질척한 액을 묻혀서 다시 박아 넣고. 그렇게 여러 번 반복했다.

    드디어 성기가 반쯤 삽입되었다. 선배가 전보다 호리호리해진 내 골반을 움켜쥐고 호흡을 골랐다. 그의 허리와 배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그대로 허리에 힘을 주어 지그시 밀어 넣었다.

    “흐으, 앗, 아아……!”

    배 안 전체가 찌르르 울렸다. 내벽이 그의 자지 모양대로 뭉그러졌다. 허겁지겁 선배에게 팔을 뻗었다. 그의 맨등을 꼭 끌어안고 매달렸다. 그가 내 뒷머리를 받쳐 올려 땀이 밴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간을 보듯 몇 번 더 박는 동안 점차 속도가 붙었다. 푹, 찌걱, 쩍. 내벽과 자지가 마찰하면서 낯 뜨거운 소리가 났다. 내가 아래에서 선배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밀어붙이는 움직임과 그가 위에서 쑤셔 박는 움직임이 조금씩 어긋났다.

    선배가 내 사타구니를 꽉 짓눌러 고정해 놓고 거세게 박아 댔다. 활짝 벌어져 허공에 떠오른 다리가 마구 떨렸다. 몸이 반으로 접혀서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엉덩이가 한껏 쳐들려서 성기가 맞물린 곳이 낱낱이 보였다. 번들거리는 굵은 기둥이 쑥 빠져나갈 때면 발간 구멍과 회음이 미미하게 부어올랐다가, 다시 처넣으면 주변 살이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너무 외설적이었다. 흥분이 확 치고 올랐다. 음란한 광경을 더 보고 있다간 정말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눈을 감아 버렸다.

    “거기, 거기 이상해요. 아파, 간지러워, 아니…….”

    “여기……. 그래, 여기 더 박아 줘?”

    나는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를 더 먹으려고 박자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었다. 간지럽고 홧홧한 감각이 아랫배에서부터 점점 번졌다. 익숙한 동시에 오래도록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서도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을,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신을……. 다름 아닌 이 순간 느꼈다.

    “우리 현이, 읏, 오늘따라 왜 이렇게 보챌까. 내 자지가 그렇게 그리웠어? 울다가 아주, 하아. 숨 다 넘어가겠어.”

    선배가 수직으로 위에서부터 콱콱 찔러 넣으면서 물었다. 샅끼리 거세게 철썩철썩 부딪쳤다. 말 중간에 거친 숨이 섞였다.

    “응…… 으응.”

    “제대로 말해야지. 자지가 그리웠다고.”

    선배가 뭘 요구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귓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발끝이 움찔 곱아들었다. 성기가 박힌 아래에도 힘이 들어갔다.

    “자지, 그, 그리웠…….”

    “그럼 나는?”

    “…….”

    “영원이도 그리웠어? 보고 싶었어?”

    그의 성기는 여전히 귀두가 걸릴 때까지 물러났다 내벽을 잔뜩 뭉개며 들어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배 안을 퍽퍽 으깨는 듯한 삽입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밭은 숨에 실려 속내가 고스란히 튀어나왔다.

    “네, 보고, 싶, 흐읏! 영원이, 형, 보고 싶었어요.”

    “응. 나도 호현이 보고 싶었어.”

    그가 내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었다. 뜨겁고 뭉클한 혀가 입 안을 헤집었다. 나는 눈도 못 뜨고 줄줄 울면서 키스에 응했다. 맹목적으로 혀를 휘감고 입술을 빨았다.

    성인 남자 두 명분의 체중을 받는 소파가 연거푸 삐걱거렸다. 우리 둘 다 결코 작은 키가 아닌 탓에 좁아서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선배가 목을 울리며 불만스러운 신음을 삼켰다. 내 엉덩이를 잡고 주무르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몸이 번쩍 떠올랐다.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에 물린 성기에 체중이 실려 더 깊게 박혔다. 아프고 무서워야 정상인데 소름 끼치게 좋았다. 쌀 뻔했다.

    “헉, 으응…… 아, 아!”

    선배는 나를 내려 주기는커녕 그대로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야가 덜컹이며 흔들렸다. 무서워서 허겁지겁 그에게 매달렸다. 땀 밴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고 목에 팔을 둘렀다. 선배가 내 등을 토닥였다.

    “잘 잡고 있어.”

    그는 침실 문간에 우뚝 선 채 내 엉덩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거세게 쳐올렸다. 습한 내벽이 간헐적으로 확 조여들었다 풀렸다. 뱃가죽 바로 아래까지 비스듬히 찔러 넣은 성기가 또렷이 느껴졌다. 성기를 감싼 내벽에서부터 엉덩이, 등허리, 발끝까지 저릿저릿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할딱였다.

    “잘 잡고 있으랬더니 좆만 꽉꽉 무네.”

    선배가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눈빛에 여유가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윗배를 꾸욱 눌렀다.

    “안 돼요, 저 숨 못 쉬겠어요. 자꾸 밑에서, 막 쑤셔서…… 지금 여기까지 들어왔어.”

    “알아? 넌 정말…… 사람 돌아 버리게 하는 데 뭐 있어.”

    대답할 틈도 없이 침실 벽에 밀어붙여졌다. 등에 차가운 대리석이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이 바짝 긴장했다. 선배가 잇새로 짧게 신음하더니 나를 추슬러 안았다.

    “그만 조여. 침대까지 가기도 전에 좆물 받고 싶어서 그래?”

    몸 전체가 크게 들썩였다. 선배는 나를 허공에 띄워 벽에 기대게 한 채 거침없이 박아 댔다. 단단한 벽이 쿵쿵 울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랑이끼리 꽉 맞물려서 속이 죄다 뭉개졌다. 그와 내 배, 허벅지, 바닥에까지 체액이 흘렀다.

    아무리 해도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몸이 붕 떠올랐다가 그의 자지 위에 콱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각도와 강도를 바꿔 가며 들쑥날쑥 쳐올리는 움직임에 내 성기가 물을 뚝뚝 흘리며 이리저리 튕겼다. 나는 엉덩이에 보조개가 패도록 힘을 주고 성기를 힘껏 조여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바닥에 팽개쳐질 것 같았다.

    “흐읏, 정호현, 그만.”

    선배가 이를 악물었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목에도 핏대가 섰다. 지나치게 섹시했다.

    그는 나를 받치고 성마른 움직임으로 뒤돌았다. 몸이 확 넘어갔다. 너무 순식간이라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낯선 천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싶더니……. 터엉! 푹신한 이불이 깔린 매트리스가 나를 받았다. 선배를 끌어안았을 때 나던 향이 은은히 맴돌았다.

    “헉, 하아, 헉, 허억…….”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가슴팍을 들썩이며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선배가 내 위에 올라타 몸을 기울였다. 흉터가 남은 탄탄한 가슴과 복부 아래 흉악한 사이즈의 성기가 위협적으로 꺼떡였다. 대가리부터 기둥 절반 넘는 부분까지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귀두 가운데 옴폭 팬 구멍에서 맑은 액체가 울컥 넘쳤다.

    큼직한 손에 한쪽 발목이 잡혔다. 나는 요 몇 달 동안 손목과 발목조차도 가늘어졌다. 이러다간 진짜 그의 한 손아귀에 발목이 통째로 들어갈 것 같아 위기감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 정도면 어디 가서 작다거나 연약하단 소린 안 듣는데.

    그는 잔뜩 벌어진 내 다리 사이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제 성기를 쥐었다. 시선만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그는 핏줄이 돋은 굵은 기둥을 느릿하게 주무르며 복사뼈에 입을 맞추었다. 도드라진 뼈대를 잔뜩 핥고 깨물다 발목과 발등에도 입술을 대었다.

    자위하는 그를 보며 나 또한 흥분했다. 조금 전까지 성기를 씹어 먹고 있던 구멍이 멋대로 옴찔거렸다. 배 안이 잔뜩 달아올라서 괴로웠다.

    팔을 뻗어 선배의 목 뒤쪽을 끌어당기며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힘 있게 감쌌다.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훤히 드러난 구멍에 성기가 철썩 틀어박혔다. 안이 비어 있던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못 견디게 반가웠다. 나는 엉덩이를 확 띄워 올리며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터뜨렸다.

    “아윽!”

    이제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자꾸 움츠러드는 내 허벅지를 우악스럽게 벌리고 부딪쳐 올 뿐이었다. 살 치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배 안이 그의 성기 모양대로 일그러지고 짓이겨지다가 마침내 죄다 녹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섬유 유연제 향이 나는 이불 위에서 짐승처럼 뒤엉켰다. 선배가 내 손에 도로 깍지를 껴 침대에 찍어 눌렀다. 나는 쾌감을 못 이겨 덜덜 떨리는 발끝을 허공에 쳐들었다가 선배의 허벅지와 종아리 뒤쪽을 문지르길 반복했다.

    사정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약한 곳만 골라서 쾅쾅 찧어 대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갈 것 같다고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깍지를 끼지 않은 손으로 선배의 맨등을 긁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터뜨리다 마침내 고개를 한껏 젖혔다.

    “…….”

    질식할 것 같은 절정이었다. 찡한 쾌감이 아랫배를 헤집었다. 우리의 배 사이에서 문질러지던 내 성기에서 정액이 터졌다. 간헐적으로 힘을 줄 때마다 정액이 쭉쭉 밀려 나왔다. 그 와중에도 선배는 내 안을 줄기차게 쑤셨다.

    한계까지 좁아진 내벽이 성기를 비틀고 쥐어짰다. 선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밀어 넣었다 끝까지 빼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퍼억! 소리가 나도록 처박았다.

    “흐윽……!”

    그는 내 눈가의 점이 있는 곳에 입술을 누른 채 엉덩이 살이 짓눌리도록 바짝 밀착했다. 내장 저 깊은 곳이 둔하게 요동쳤다. 그의 자지가 아닌 심장이 내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사정은 몹시도 길고 집요했다. 성기가 몇 번이고 꿈틀대며 배 속을 온통 정액 범벅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동안 나는 장기가 죄다 자지에 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견디며 그의 품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예전에는 섹스하다가도 언제 습격을 받을지 몰라서, 바깥에 소리가 새어 나갈지 몰라서 몸을 사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다. 이대로 더 했다간 그가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진짜 이상해질 것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힘이 안 들어가는 팔로 침대 위를 짚고 기었다. 성기가 주룩 빠졌다. 미끈한 정액이 내벽을 타고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도중에 발목이 턱 잡혔다.

    “예쁜아. 어디 가? 가지 마.”

    선배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빙긋 웃었다. 성욕을 감출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는 눈이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몇 달을 못 봤는데 한 번 싸고 말려고? 존나 서운하게?”

    “잠깐만요! 그, 저, 침대 걱정돼서요.”

    “침대가 왜.”

    “저 때문에 더러워지면 어떡해요? 세탁 힘들잖아요.”

    “괜찮아. 정액을 질질 흘리든 분수를 뿜든 다 괜찮으니까 마음대로 해.”

    선배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위기감을 느끼고 머리를 굴렸다.

    “그거 말고 또 있어요.”

    “아, 그러세요. 이번엔 또 뭔데요.”

    그의 얄팍한 인내심은 늘 그렇듯 몇 초 만에 동이 날 터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영화 예매해 놓은 거요. 힘들게 좋은 자리 잡았단 말이에요. 밥 먹고 카페도 갔다 가려면 시간 빠듯한데.”

    “영화, 그래. 영화 좋지. 영화 꼭 봐야지.”

    그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저렇게 할 뿐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밖에 홈 시어터 있는 거 봤지? DVD 많은 것도 봤고? 이따 거실 1열에서 실컷 봐.”

    “…….”

    “자, 다음 핑계.”

    “선배가…….”

    “뭐? 선배?”

    내 말이 도중에 뚝 끊겼다. 갑자기 주변 공기가 몇 도는 내려간 것 같았다.

    “형이라 부르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또 어디서 선배 소리가 쳐 나와.”

    “아니, 그게 아니라요.”

    “아까부터 더럽게 내빼지? 싫으면 싫다고 하라니까? 별 같잖은 이유 들이밀지 말고.”

    싫은 게 아니었다. 무서운 거였다. 이래선 안 된다고, 더 빠져들면 위험하다고 걸어 놨던 브레이크가 풀릴 것 같아서. 변명하려다 움찔해서 입을 다물었다. 지금 구구절절 해명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선배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졌다. 그가 내 발목을 확 끌어당겼다. 나는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하고 줄줄 끌려갔다. 그가 나를 제 밑에 깔아 누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씨발, 정호현. 넌 뒈졌어.”

    아, 영화는 물 건너갔구나. 눈앞이 깜깜했다.

    * * *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했다. 말마따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아무것도 못 하고 폭신한 이불 위에 엎드려 있다가 손만 내밀어 핸드폰을 찾아 쥐었다. 시계를 보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영화 시작 10분 전이었다. 식사하고 디저트까지 먹고 갈 걸 고려해서 일부러 느지막한 시간대로 예매해 놨었는데, 그것조차 소용없게 되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긴 했지만 영화관까지 갈 방법이 요원했다. 택시를 잡는 데만 10분쯤 걸릴 거고, 대중교통은 말할 것도 없고. 아파트 앞에 자가용이라도 주차해 놓지 않은 이상은 도저히 제때 못 갈 것 같았다.

    눈물을 머금고 핸드폰 화면을 도로 껐다. 고심해서 준비해 온 첫 데이트 계획이 화려하게 물 건너갔다. 그 자리를 땀, 정액, 눈물 등의 체액이 메웠다. 나는 회포를 풀고 진솔한 얘기를 하는 대신 엉엉 울면서 신음을 잔뜩 내질렀다. 뭐라 해야 할지 모를 심정이었다.

    “뭐 해?”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선배가, 아니, 형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 맨상체를 드러내고 트레이닝복 바지만 입은 차림이었다. 근사하게 벌어진 어깨 골격, 탄탄한 가슴팍과 옆구리가 훤히 보였다.

    그는 그나마 나았다. 나는 진이 빠져서 이제껏 알몸으로 축 늘어져 있다가 간신히 속옷만 주워 입고 있었다. 스스로 일어나 씻으러 갈 기운조차 없어서 형이 수건에 물을 적셔 와서 몸을 닦아 줬다. 그 과정에서 온갖 음란한 말로 잔뜩 놀림을 받긴 했지만.

    “그냥요. 폰 봤어요.”

    짙은 먹색 이불 위에서 뒹굴고 있자니 내가 입은 연하늘색 속옷이 지나치게 도드라졌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가리긴 또 뭘 가려. 볼 거 다 본 사이에.”

    “…….”

    “근데, 호현아. 팬티는 또 뭐 이렇게 귀여운 걸 입었어. 생긴 것도 몽글몽글 솜사탕 같은 게, 팬티도 꼭 솜사탕색 같은 걸 입고 왔네.”

    “그냥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입은 거예요. 놀리지 마세요…….”

    “뭐, 하기야. 넌 자지 색까지 예쁘니까.”

    “악!”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오는 음담패설에 등골이 다 서늘했다. 나는 다급하게 이불을 있는 대로 끌어다 몸에 칭칭 감았다. 형은 픽 웃고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베개에 반쯤 얼굴을 파묻고 그 손길을 받았다.

    “그래서, 폰으로 뭐 봤는데?”

    “시간요.”

    나는 우울하게 고백했다.

    “늦었어요. 영화 티켓 날아갔어요. 지금 시간 맞춰 가려면 자가용 있어야 해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인생이 어떻게 항상 계획대로만 되겠어. 힘내, 예쁜아.”

    그가 내 등을 토닥이며 심드렁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영화는 글렀다 치고. 밥은 어떡할래요?”

    “집에서 먹을래?”

    “집에서요? 요리해서요? 아니면 배달시켜요?”

    “마음대로 해.”

    “형은 뭐 먹고 싶어요?”

    “나? 호현이.”

    “저 말고요. 음식이요, 음식.”

    “몰라. 그럼 됐어.”

    “아니, 저기요…….”

    형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덜 마른 머리의 물기가 이불에 스며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끌어안고 나른하게 뒹굴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피 묻은 흉기를 들고 주변을 경계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를 떠올려 보았다. 너무 많이 갈아서 오히려 날이 상해 버린 칼 같았다. 이게 그의 원래 성격이었을까. 보송보송한 침대에 늘어진 그와 얼어붙은 캠퍼스를 배회하던 그 사이에 너무도 큰 간격이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찌르는 듯 아팠다.

    “아무거나 먹자. 너 좋아하는 거.”

    그가 내 허리를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어 왔다. 그의 등을 얼떨결에 마주 안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나름대로 고백도 했고, 그, 사귀는 것 비슷한 사인데…… 형한테서 확답은 못 들었지만, 아무튼. 친구 자취방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배달 음식은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집에 식재료 있어요?”

    형이 내 목에 뺨을 비볐다. 사납고 예민한 생김에 어울리지 않는 게으른 동작이었다. 낯선 사람에게 쓰다듬어 달라고 다짜고짜 머리를 들이미는 짐승 같기도 했다. 대답은 조금 후에 돌아왔다.

    “네가 요리해 주게?”

    “네. 해 먹을 만한 거 있으면요. 없으면 장 봐 오거나 배달시키고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의 옆구리에 새겨진 흉터가 보였다. 희끄무레하게 옅어지는 다른 흉터와 달리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명했다. 봉합 수술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불그스름한 상처. 정문 앞에서 입은 총상이었다. 저 흉터를 단 사람이 환자답게 골골대기는커녕 방금 전까지 나를 죽도록 괴롭혔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요리까지 시키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렇게까지 매너 없는 놈은 아니었다.

    “네가 무슨 요리를 한다고.”

    “저 요리 잘……. 그게, 음.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할 줄은 알거든요.”

    “너 아까 잔뜩 박혀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또 부엌에 쪼르르 가선 꼼지락거리기만 할 거지? 쓸데없이 예쁘기만 하고 덜떨어진 게.”

    “…….”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형이 뻔뻔하게 주장하는 ‘정호현 예쁜이 설’은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일까. 평균 신장을 훌쩍 넘는 20대 중반의 남성을 두고. 이러다간 그의 머릿속에 있는 나는 아주 걸음마도 못 하는 꼬맹이 솜사탕이 될 것 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구깃구깃해져서 거실 소파 옆에 나뒹굴고 있을 내 셔츠를 다시 주워 입고 싶진 않았다. 아쉬운 대로 침대 헤드에 걸려 있던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껴입었다. 확실히 내겐 좀 헐렁했다. 나는 티셔츠를 입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비장하게 선언했다.

    “쉬고 있어요. 다 되면 부를게요.”

    형은 대답 대신 킥킥 웃으며 돌아누웠다. 그의 맨어깨가 웃음기로 잘게 들썩였다.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에 갔다. 주방도 거실과 마찬가지로 난잡한 건지 깔끔한 건지 모를 상태였다. 정작 수납장은 텅텅 비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 물건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와인 셀러에 뜬금없이 딸기는 왜 넣어 둔 거야? 냉장고 계란 트레이에는……. 여기도 딸기가 있네.

    잠시 주방을 뒤진 끝에 몇 가지 재료를 찾아냈다. 유리병에 담긴 파스타 소스와 스파게티 면 같은 것들. 원래 한식보단 양식이 만들기 훨씬 간단하고, 그중에서도 면을 삶고 소스를 얹기만 하면 되는 스파게티가 제일 쉽다고 했다.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냄비에 물을 올리고 끓기를 기다리며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침실 쪽은 잠잠했다. 형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직 덜 말린 머리를 말리고 있을까? 아니면 침대에 누워서 뒹굴고 있을까? 베개에 푹 파묻혀서 눈을 감고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간질간질한 기분이 되었다.

    우리가 평화롭게 단둘이 마주 앉아 식사를 한 건 70주년 기념관에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실 식사라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메뉴라고는 사무실 비품으로 보관되어 있던 과자와 인스턴트 수프, 유통 기한이 아슬아슬한 주스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 말했다. 내가 너무 예뻐서 죽을 것 같다고. 고작 그것만으로.

    이제 우리는 호화로운 고급 레스토랑에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번화가 음식점에도 갈 수 있었다. 이제껏 너무도 당연히 영위했던 일상인데 낯설게 느껴졌다. 고작 그것조차 못 누리고 허망하게 죽어 간 사람들이,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폐쇄된 캠퍼스에 너무도 많았다.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다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냄비에 올려 둔 물이 어느새 끓고 있었다. 재빨리 스파게티를 넣었다. 면이 익는 동안 치즈와 버섯을 좀 썰어 둘 생각이었다. 싱크대 아래에 있는 보관함에서 칼을 찾아 들고 일어서려는데.

    “아.”

    머리를 쪼개는 통증이 밀어닥쳤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현기증. 철분 부족에 시달리는 성장기 청소년도 아니고, 이 나이 먹고 빈혈로 고생할 줄은 몰랐다.

    내 손을 벗어난 칼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칼날이 맨허벅지를 살짝 스쳤다. 따끔한 통증에 고장 난 형광등처럼 깜빡이던 시야가 뒤늦게 돌아왔다.

    맨살에 가늘게 붉은 선이 생겼다. 밴드를 붙이기도 뭣할 정도로 얕은 상처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긁힌 곳이 하필 중앙 도서관 열람실에서 칼에 베였던 쪽이었다. 내게 칼을 휘두른 이의 씨근덕대는 숨소리가, 게이트 너머로 탐욕스럽게 팔을 뻗는 감염자들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했다.

    그때 내가 흘린 피가 바지를 흠뻑 적시고도 모자라 발을 타고 울컥울컥 흘렀다. 그 몸을 하고 감염자들로부터 도망치고, 심지어는 폭설을 헤치고 한참 걷기까지 했다. 칼날에 갈라져 쩍 벌어진 상처를 소독할 때의 기억도 떠올랐다. 싸늘한 ATM 부스 안에 내 울음 섞인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던 것도.

    “헉, 헉…….”

    다리가 마구잡이로 떨렸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어느덧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아까까지 느꼈던 설렘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씁쓸한 자괴뿐이었다.

    냄비 속의 내용물이 부글부글 끓어 넘쳤다. 뒤늦게 스파게티에 생각이 미쳤다. 요리를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애꿎은 면만 잔뜩 태우게 생겼다. 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을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냥 있어.”

    그때 뒤에서부터 어깨가 잡혔다. 형이었다. 그는 나를 타박하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불을 껐다. 낭패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칼은 왜 꺼냈어? 국자나 들고 있지. 그게 훨씬 더 귀여울 것 같은데.”

    “죄송해요.”

    내 말을 듣긴 한 건지, 그는 엉망이 되어 버린 냄비 안을 묵묵히 주시했다. 그러다 스르르 뒤돌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덤덤한 무표정이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새까만 시선이 핏기 없이 질려 있을 내 얼굴을, 형편없이 떨리는 팔다리를, 가늘게 그어진 상처를 차례로 보았다.

    “나 파스타 안 좋아해. 그냥 피자 시키자.”

    “…….”

    “그래도 되지? 그래. 시킬게.”

    안 좋아하는 사람이 집에 면에 소스까지 사 놓을 리가 있나.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담긴 오류를 지적하는 대신 힘없이 웃었다.

    “……네.”

    * * *

    “알았어요. 약이랑 밥이랑 다 잘 챙겨 먹을게요. 그때 그 선배 만나는 거예요. 아시죠?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어디 위험한 데 가는 것도 아니고, 연락도 꼬박꼬박 하잖아. 응, 응. 네. 학교 근처에도 안 갈게요. 네. 푹 쉬고 계세요.”

    현관에 서서 통화를 하며 한 손으로 피자 박스를 건네받았다. 앱으로 주문하면서 미리 결제를 해 뒀더니 배달원은 피자만 주고 쌩하니 가 버렸다. 전화를 끊는 것과 동시에 문이 닫혔다.

    뒤에서 팔이 뻗어 나와 현관문을 턱 짚었다. 내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형이 고개를 기울여 내 뺨과 눈물점에 입을 맞추었다. 따끈따끈한 피자엔 관심도 없는지 나를 품에 가둬 놓고 한참 지분거리다가, 척추를 타고 흐르는 찌릿찌릿한 느낌에 다리가 풀릴 때쯤이 되어서야 놓아주었다.

    “누구야?”

    그가 뒤늦게 물었다. 참 빨리도 묻는다 싶었다. 이미 통화하는 거 듣고 누군지 눈치챘을 텐데.

    “어머니요.”

    “왜? 당장 들어오래?”

    “아뇨. 늦게 오래요. 기왕이면 그 선배 집에서 자고 내일 오라시는데.”

    그를 돌아보았다. 애써 눈을 휘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집 앞에 기자들이 진 치고 있대요. 저번 달에도 이러는 바람에 지금 할머니 댁에서 신세 지고 있는데. 할머니 댁 주소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지금 가면 좀 난감할 것 같아요.”

    그와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구조되고 나서 언론은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뭐가 그리 궁금한지 아직 병상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환자 앞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질문을 퍼부었다. TV 채널마다 생존자들의 인터뷰 영상을 온종일 대문짝만하게 내보냈다. 백일대 참사 생존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섣불리 나섰다가 욕을 잔뜩 먹고 사과한 영화감독도 있었다.

    나는 심지어 생존자이자 유일한 항체 보유자였다. 이보다 좋은 먹잇감은 없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 아직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언론 접촉을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취재진들이 우리 집과 부모님 직장, 심지어는 할머니 댁에까지 꾸역꾸역 찾아왔다. 나 때문에 애꿎은 가족들까지 피해를 봤다.

    “저, 영원이 형. 혹시 저 하룻밤만 재워 주실 수 있어요?”

    오전에 만나서 저녁쯤까지 그와 시간을 보내다 집에 가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처음 와 본 집에서 재워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하다니. 염치없는 부탁인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형 곤란하시면 그냥 근처 다른 데…….”

    “아냐. 자고 가.”

    승낙이 너무도 쉽게 떨어졌다. 그러니 괜히 더 미안해졌다. 역시 이렇게 갑자기 폐 끼치면 안 될 것 같다고, 24시간 카페에 가든 모텔에 가든 알아서 하겠다고 사양하려 했다. 그보다 형이 좀 더 빨랐다.

    “현아, 오늘 밤에 나랑 같이 있자. 응?”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어도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 삼백안으로 눈웃음을 치자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심장이 멋대로 일렁였다. 기분이 더 이상해지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저야 고맙죠. 형만 괜찮다면요.”

    “있잖아. 그거 알아?”

    “네?”

    “나 섰어.”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저 섰다는 말이 보초를 섰다든가 들러리를 섰다는 뜻은 아닐 거고.

    “아니, 네? 지금요? 여기서요?”

    “밤새 너 안고 뒹굴면서 여기저기 물고 빨 생각 하니까 꼴리는데 어떡하라고. 씨발, 하루가 뭐야. 너 그냥 여기서 살아. 형이 피자 100판 사 줄게.”

    “100판씩이나 못 먹어요…….”

    “그럼 뭐. 사과? 사과 100박스 사 주면 먹을래? 토끼야?”

    “당연히 사과도 그만큼 못 먹죠! 그리고 토끼 아니에요.”

    그가 씩 웃더니 다짜고짜 내 엉덩이를 주무르려 들었다. 나는 한 손에 피자 박스를 들고 간신히 피했다. 잠깐 실랑이를 벌인 끝에 영 불만스러워 보이는 그와 떨떠름한 표정을 한 내가 거실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았다.

    또 엉뚱한 소릴 할세라 재빨리 피자 포장을 열었다. 갓 만든 피자 냄새가 확 퍼졌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서 표면 곳곳이 갈색으로 익었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형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파인애플이나 올리브처럼 호불호가 갈리는 재료는 제외하고 제일 기본적인 치즈 피자를 시켰다. 언뜻 눈치를 보니 싫진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여긴 괜찮아요? 이상한 사람들 안 찾아와요?”

    콜라 페트병 뚜껑을 열자 치이익 김이 빠졌다. 주방에서 가져온 머그 컵에 콜라를 따르며 물었다.

    “글쎄. 뭐, 관리실에서 웬만한 침입자는 다 거르니까.”

    “역시 비싼 아파트는 비싼 값을 하네요.”

    콜라를 따르는 데만 정신이 팔려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리고…….”

    “네?”

    “퇴원하고 여기서 나간 적 없어.”

    손이 우뚝 멎었다. 무심코 형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 표정 없는 낯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 서늘한 얼굴 아래에 얼마나 처참히 썩어 문드러진 상처가 있는지. 그래서 오히려 섣불리 아는 체할 수 없었다.

    “우리 빨리 피자 먹어요. 식겠다. 저도 피자는 퇴원하고 처음이에요. 병원 밥 진짜 맛없었는데, 그죠.”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대신 씩 웃으며 피자를 권했다. 팔팔 끓어 넘치는 냄비 앞에 주저앉은 내게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듯이.

    “더 맛있는 거 못 사 줘서 미안해요. 첫 데이트니까 분위기 있는 곳 데려가고 싶었는데. 음……. 하하. 이건 데이트라 하기도 좀 그러네요. 다음엔 꼭 가요.”

    “진짜로?”

    “진짜로요. 우리 본관에서 손가락 걸고 약속했잖아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것도 잔뜩 보러 다니자고. 그때 말했던 학교 앞 카페는 이제 못 가게 됐지만.”

    싸늘한 본관 로비, 어렴풋이 밝아 오는 메마른 새벽하늘, 길을 따라 늘어선 앙상한 가로수들, 하얗게 스미던 입김. 한순간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지나간 겨울의 한기가 나를 좀먹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좀 알아봤는데요. 이 근처에도 괜찮은 카페 몇 군데 있더라고요. 딸기 케이크로 SNS에서 엄청 유명한 곳도 있고요. 대신 거기 갈래요? 딸기 들어간 거 있는 대로 시켜요. 올봄에 나온 딸기 우리가 몽땅 먹어요.”

    형은 신기하고 벅찬 것을 보듯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윽고 나를 따라 어렴풋이 웃었다.

    “응. 갈래. 나 꼭 데려가.”

    적막함을 몰아내려 TV를 켜고 거실에 굴러다니던 DVD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수많은 영화 DVD 중 태반이 외국어로 된 것들이었다. 영어면 그나마 나았다. 제목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안 오는 것들도 있었다.

    “영원이 형…….”

    울상이 되어 조용히 형을 돌아보았다. 소파에 느슨히 기대어 콜라를 홀짝홀짝 마시던 그가 피식 웃었다. 생긴 것만 보아선 독한 양주만 마실 것 같은데, 핏줄이 돋은 길쭉길쭉한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콜라였다. 너무 달아서 나는 잘 마시지도 않는.

    “영화가 너무 어려운 것밖에 없어요.”

    “그래, 예쁜아. 햄스터랑 다람쥐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라도 틀어 줘?”

    “그게 아니라요.”

    “귀엽긴 하겠네. 조그맣고 하얀 게 꼭 자기 같은 거 보고 있으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얗다는 건 백번 양보해서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그맣다는 말은 도저히 납득 못 하겠다. 어쨌거나 이러다가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진짜 동물 애니메이션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새로운 제안을 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영화 보러 나갈래요? 제가 티켓 다시 예매할게요. 어차피 여기 있는 DVD, 형은 한 번씩 다 봤던 것들일 텐데. 그냥 나가서 최신 영화 봐요.”

    “밖에서 다른 놈들이랑 부대껴서 영화 보자고? 그럼 네 엉덩이는 언제 만지라고.”

    “안 만지면 되잖아요! 엉덩이든 어디든 만지면 안 돼요. 영화관에서 그러는 거 진짜 비매너예요.”

    “몇 시간 동안 널 옆에 앉혀 놓고 엉덩이도 못 주물러? 그런 엿 같은 게 어디 있어.”

    “영화관만이 아니에요. 집에서도요. 우리 영화 보는 동안만은 집중 좀 하면 안 될까요?”

    “응. 좆 까.”

    “…….”

    그의 인성은 역시나 매일매일 나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나는 찍소리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긴 그의 집이고 나는 하룻밤 끼어 자는 처지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DVD를 뒤적였다. 다행히 한국어로 번역된 게 몇 개 있었다. 그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였다. 첫 데이트에 볼 영화로는 좀 애매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거실 조명을 끄고 영화를 재생했다. 액션 영화답게 장면이 빠르게 휙휙 전환되었다. 그때마다 화면 불빛이 색을 달리하여 어둑어둑한 실내를 메웠다. 아직 따끈따끈한 피자를 집어 들자 치즈가 죽 늘어졌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잊고 있던 식욕이 되살아났다.

    화면 속 주인공은 양손으로 총을 쏘고 자동차로 추격전을 벌이며 건물이란 건물은 죄다 때려 부쉈다. 도시를 지키려는 건지 멸망시키려는 건지 모를 행적이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말이 없어졌다. 나도 형도 식사를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수다스럽게 떠드는 성격은 아니었다.

    일찍 일어나서인지 낮 내내 침대에서 시달려서인지 아직 저녁밖에 안 됐는데 졸렸다. 나만 그런가 싶어 형을 흘긋 보았다. 그는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옆얼굴의 윤곽을 따라 창백한 빛이 흘러내렸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영상이 반사되어 그의 까만 눈동자 속에 고였다.

    처음으로 그의 눈을 가까이서 들여다본 게 언제였더라. 기숙사 방에 급하게 숨었다가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들었을 때였던 것 같다. 무작정 그 사람을 구하러 나가려는 나를 형이 잡아다 침대에 찍어 눌렀던 때.

    그때부터 그랬다.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은 항상 질척하고 집요했다. 까만 눈 안에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세상에서 제일 증오스러운 상대를 보는 것 같다가도 때로는 묘하게 애틋했다. 다른 생존자들을 적당히 가식적으로 대하다가도 그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 형형한 시선이 나를 휘어잡아 끌고 가는 것 같아서.

    “…….”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돌아보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 총 쏘는 소리,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지금 내 눈동자도 그처럼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고 있을까, 무심코 궁금해졌다.

    그때였다. 정적을 깨고 섬뜩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 캬아아악!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소리였다. 잊을 만하면 악몽에 등장해 나를 밤새 괴롭히는데 어떻게 잊겠는가.

    “헉!”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갑자기 발작하듯 움직이는 바람에 테이블에 팔을 세게 부딪쳤다. 그러고도 아픈 줄도 몰랐다. 형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을 확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옆을 더듬었다. 무기가 될 것을 찾는 듯. 어긋나 버린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거실 벽면에 걸린 커다란 TV로.

    기관총을 든 주인공이 찌그러진 차 위에 올라서서 총을 난사했다. 그 아래에 좀비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되어 잿빛에 가깝게 부패한 얼굴, 덜렁이는 팔다리, 상처를 타고 뚝뚝 흐르는 진물. 정교한 CG를 입혀서 정말 그럴듯해 보였다. 이 영화에 좀비도 나오던가. DVD 케이스만 보고 대충 고른 거라 몰랐다.

    이윽고 장면이 바뀌어 귓가를 가득 메우는 좀비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하지만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쾅쾅 뛰었다. 흐려진 시야에 참혹한 광경들이 어른거렸다.

    뒤늦게 내가 팔로 쳐 버린 테이블에 생각이 미쳤다. 충격 때문에 테이블 위에 놓아뒀던 머그 컵이 쓰러져 있었다. 안에 반쯤 남은 콜라가 잔뜩 엎질러졌다.

    “아……. 하하하.”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웃는 것 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영화 따위에 대경실색하다니. 놀라서 콜라까지 엎어 버리고. 욕을 들어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저 진짜 바보 같죠. 얼핏 들으니까 진짜……. 그것들이랑 비슷하게 들려서. 그래 봤자 그냥 특수 효과음 같은 건데. 아니, 아뇨. 지금 생각하니까 별로 안 비슷한 것 같아요. 괜히 과민 반응 했네요.”

    “…….”

    “이러다 테이블 다 젖겠어요. 얼른 티슈 가져올게요. 죄송해요.”

    “정호현.”

    하지만 그는 나를 비웃지도 놀리지도 않았다.

    “억지로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

    힘겹게 만들어 낸 웃음이 스르르 사라졌다. 참담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려 그의 품에 안겼다. 고개를 묻고 어리광을 부리듯 등에 팔을 둘렀다. 그는 나를 천천히 마주 안았다.

    “형은 괜찮아요?”

    TV에서는 여전히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다. 하지만 거실을 가득 메우던 시끄러운 소리들이 점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자리를 우리의 고요한 숨소리가 메웠다.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의 속눈썹이 깜빡이는 것까지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우리는 화면에서 쏟아지는 색색의 불빛에 의지하여 서로를 응시했다. 내 뺨을 찬찬히 더듬던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턱을 쥐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입술이 닿았다.

    나는 등을 대고 바닥에 쓰러졌다. 형이 내 위로 타고 올랐다. 턱을 으스러질 듯 강하게 쥐고 혀를 밀어 넣어 입 안을 헤집는 것을 받아 주다가, 반 바퀴 휙 굴러 반대로 깔아 눌렀다. 그가 순순히 내 아래 누웠다.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그의 눈 속에 얼음장 같은 빛이 맺혔다.

    한 팔로 바닥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혹여나 딱딱한 바닥이 불편할까 그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받치고 고개를 틀었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 위에 살짝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났다.

    “…….”

    큼직한 손이 내 허리를 잡았다. 그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다음 순간 그가 아래에서부터 예고도 없이 달려들었다.

    “흐읍, 읏!”

    잡아먹히는 것 같은 키스였다. 입술이 찢어지고 혀가 뽑히는 줄 알았다. 내 엉덩이 아래에서 그의 성기가 빠르게 발기하여 고개를 쳐들었다. 어찌나 크고 단단한지 옷 너머로 누르는 것뿐인데도 엉덩이 안쪽이 뻐근하게 아팠다.

    하지만 괜찮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이 순간만큼은 지금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그의 숨이 멎은 건 아닌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도 나도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내색하지 않았다. 얇게 앉은 피딱지 아래 아직 덜 아문 상처가 있는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우리의 생명을 노리는 괴물도 살을 에는 추위도 없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절박했다.

    * * *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침실에 쳐 놓은 두꺼운 암막 커튼 사이로 흐린 빛이 새어 들어왔다. 옆을 돌아보았다. 형이 나를 끌어안은 채 자고 있었다.

    몽롱하던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그제야 기억났다. 어제저녁, 우리는 영화 한 편을 다 보기도 전에 불이 붙었다. 영화 줄거리 따윈 기억도 나지 않았다. 거실 바닥과 소파를 오가며 실컷 뒹군 뒤에야 침실로 갔다. 내 발로 간 기억은 없으니 아마 형이 축 늘어진 나를 안아서 옮겨 줬던 것 같다.

    나를 탈진할 지경이 되도록 몰아붙이고도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는 나를 침대에 올려놓고 한참을 괴롭혔다. 온몸 구석구석 그가 핥고 빨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물먹은 솜 같은 몸을 끌고 씻으려고 욕실에 갔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형이 잔뜩 싸 넣은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렀다.

    결국 우리는 늦은 밤이 되어 잠들었다. 한 침대에서 베개 하나를 반씩 나눠 베고. 사실 나는 잠들었다기보다는 기절한 것에 가까웠지만.

    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나를 향해 모로 누운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규칙적인 숨이 새어 나왔다. 까만 머리칼이 흐트러져서 반듯한 이마와 눈썹 위로 흘러내렸다. 내 허리를 끌어안은 팔도, 희미한 빛을 받은 뺨도 체온에 데워져 따끈따끈하고 향긋했다.

    형이 이렇게 푹 잠든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늘 먼저 곯아떨어졌고 늦게 일어났다. 그는 내가 자는 동안 벌겋게 충혈되어 날이 선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잠든 그는 깨어 있을 때와 딴판으로 순해 보였다. 이렇게 평온한 표정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신기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보들보들했다. 그의 잠을 방해할까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그냥 언제까지든 원하는 만큼 푹 자게 두고 싶었다. 지금껏 그는 너무도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 테니까.

    지금이 몇 시쯤 됐을까. 밖이 환한 걸 봐서는 최소한 새벽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한낮까지 늘어지게 잔 건 아니겠지? 어제 거실에 두고 잊어버린 휴대폰이 떠올랐다. 부모님께 연락해야 한다는 것도.

    학교에서 처음 바이러스 유출 사고가 터졌을 때, 본가에 계시던 부모님은 뉴스 속보로 소식을 접했다. 다급히 내게 연락을 했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고 메시지는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그 뒤로도 연결이 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라도 내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그때의 기억은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트라우마가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무사히 구조되어 치료를 받은 지금도 반나절이라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몹시 불안해하셨다. 나도 그걸 알아서 어딜 가든 주기적으로 꼬박꼬박 연락을 했다. 내가 너무 오래 자 버려서 부모님이 또 걱정하고 계시면 어쩌지. 마음이 급해졌다.

    숨을 죽이고 몸을 살살 빼내어 형의 품에서 벗어났다. 내가 누워 있던 빈 공간에 찬 기운이 들세라 이불도 조심스레 덮어 주었다. 다행히 그는 깨지 않았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거실로 나갔다. 온몸이 욱신욱신 아파서 죽을 맛이었다.

    거실은 어제 모습 그대로였다. 영화가 엔딩 크레디트까지 모두 올라간 까만 화면에서 멈춰 있었다. 한두 조각 남은 피자는 식은 지 오래됐고, 내가 엎지른 콜라도 끈적끈적하게 말라붙었다. 이걸 언제 다 치우나. 한숨이 나왔다.

    일단은 연락이 먼저였다. 소파 위에 팽개쳐 놨던 휴대폰을 주워 시간을 확인했다. 액정에 뜬 숫자를 보자마자 안도했다. 오전 6시 반. 아직 다들 주무실 시간이었다.

    [어머니]

    [잘 놀고 있어? 저녁은 먹었고?]

    [시간 나면 아빠한테도 메시지 보내라]

    [정지현]

    [우린 오빠 빼고 소불고기 먹는다]

    [(사진)]

    [남은 거 없어~ 안 줘~ 돌아가~]

    [아버지]

    [아들. 용돈 더 필요하냐?]

    안 읽고 쌓여 있는 메시지 사이에서 가족들이 보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픽 웃어 버렸다.

    [어제저녁에 선배랑 피자 먹고 영화 봤어요]

    [피곤해서 바로 자느라 답장 못 했어요. 죄송해요]

    [아버지께도 연락드릴게요]

    그 선배랑 피자 먹고 영화만 봤겠는가. 부모님께는 차마 말씀드리지 못할 이런저런 짓도 했다. 양심이 쿡쿡 찔렸다. 집엔 거짓말로 핑계 대고 애인이랑 외박한 불효자의 심정이 되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무사히 잘 간 걸 확인하고 거실을 조금씩 치웠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허리까지 찌르르한 통증이 번졌다. 물티슈로 테이블을 닦고 음식물을 따로 모으고 피자 박스를 차곡차곡 포개 둔 것까진 좋았는데, 쓰레기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형을 깨우긴 미안했다. 휑한 집 안을 둘러보다 침실 맞은편 방문을 살짝 열었다. 형이 맘대로 구경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이것저것 뒤지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통이 있는지만 찾아보는 거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아.”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흘렸다. 그 방이었다. 형의 작업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에 섞여 점토와 석고 냄새가 났다. 다른 곳은 좀 휑하긴 해도 그럭저럭 사람 사는 집처럼 보이는데, 여기만 아틀리에 같았다.

    차마 멋대로 들어가진 못하고 문간에 멈춰 섰다. 절반 넘게 열린 문 너머로 어제는 미처 못 보았던 것들이 보였다. 방 가운데 커다란 조형물이 있었다. 한창 만들던 중이었는지 두루뭉술했지만 대략적인 형체를 알아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시체였다. 수많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투박한 덩어리로도 축 늘어진 육체들을 절묘하게 표현해 냈다. 터치가 깔끔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섬뜩했다. 거칠게 깎고 파낸 표면 하나하나에 광기가 배어 있었다. 결코 평범한 재능이 아니었다. 미술에 전혀 조예가 없는 나도 알 정도였다.

    겹쳐진 시체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한쪽 얼굴은 제법 섬세하게 윤곽을 잡아 놓은 데 비해 다른 쪽은 닳은 것처럼 밋밋했다. 뺨부터 목덜미와 어깨까지, 한쪽만 유독 형태가 흐렸다. 미완성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구상 단계부터 의도적으로 얼굴 절반을 날려 버린 거였다.

    나는 방에 들어온 원래 목적도 잊고 생각에 사로잡혔다. 색감도 질감도 동일한 점토로는 표현에 한계가 있다. 형은 뭘 나타내고 싶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런 식으로 보일까? 혹시…….

    뒤에서부터 비쳐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셔서?

    콰앙! 커다란 소음이 집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조형물에 넋을 팔고 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호, 현아. 정호현!”

    침실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형이 문틀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아까 봤을 때만 해도 옅은 햇살을 머금고 있던 까만 머리칼이 어느새 식은땀에 푹 절었다.

    “어디 갔어. 어디 갔냐고…….”

    그가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무작정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영원 선배. 저 여기 있어요. 영원이 형!”

    거실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성이 날아가고 음울한 충동만 남은 눈을 마주하는 순간 품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반응할 겨를이 없었다. 중심이 확 기울었다.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등과 뒤통수가 아팠다. 그나마 그를 깔아뭉개는 불상사는 면했다. 대신 내가 아래에 깔렸지만.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누워 거친 호흡을 골랐다. 내 위에 엎어진 형의 심장이 미칠 듯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나까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힘겹게 팔을 뻗어 그의 맨등을 안았다. 자면서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등 또한 축축했다.

    “형, 여기 학교 아니에요. 집이에요.”

    “…….”

    “기억나요? 우리 어제 같이 피자 먹고 영화도 봤잖아요.”

    이윽고 그가 움직였다. 내 눈을 빤히 주시하며 뺨과 귀, 손을 한 번씩 만져 보았다.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겨 주는 그의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꿈인 줄 알았어.”

    목소리가 잔뜩 잠겨서 더 낮아졌다. 그는 말을 잇다 말고 눈을 꾹 감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분명히 너 안고 잤는데, 네가 잠투정하면서 내 품에 파고들었던 것까지 다 기억나는데. 깨 보니까 넌 없고 좆같은 천장만 보여서……. 너랑 있었던 건 다 꿈이고, 나는 또, 또…….”

    “또 돌아간 줄 알았어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그의 등과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악몽으로 괴로워할 때, 식칼 하나 제대로 쥐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 고작 영화 효과음 따위에 필요 이상으로 놀랄 때. 그는 아무 내색 않고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도 결코 괜찮지 않았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형, 방에 가요. 가서 좀 더 자요. 저랑 같이. 아직 7시도 안 됐어요.”

    “…….”

    “아깐 제가 잘못했어요. 말도 없이 나가는 게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이번엔 어디 안 갈 거지?”

    “네. 아무 데도 안 갈게요.”

    “그래, 정호현. 또 그래 봐. 또 멋대로 뽈뽈 기어 나가 봐. 나 미쳐 돌아 버리는 꼴 보고 싶으면.”

    그가 신경질적으로 피식 웃었다. 눈에 처절한 광기가 어렸다.

    “너 없어지는 거 다시 겪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죽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 죽게…….”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라면 영문도 모르고 쏟아지는 폭언이 마냥 소름 끼치고 무서웠을 것이다. 저 미친놈이 나한테 다짜고짜 왜 이러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가 왜 내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지. 그래서 나는 그를 밀어내는 대신 좀 더 깊게 안았다.

    “형 마음대로 해요.”

    * * *

    “흐응.”

    잠결에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뒤에서 나를 안은 채 자고 있던 형이 어깨를 가만가만 토닥여 주었다. 어울리지 않게 자상한 손길이었다. 생긴 것만 보아서는 내가 조금이라도 잠을 방해하면 당장 침대에서 끌어내 바닥에 패대기칠 것 같았는데.

    다시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막 잠에 빠지려는 찰나, 형이 내 허리를 쓸었다. 그냥 잘 자라고 다독여 주는 거라기엔 어딘가 좀 이상했다. 하지만 졸음 탓에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나는 형의 손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잠을 청했다.

    나는 잘 때 긴 옷을 입지 않는 편이었다. 특히 긴 바지를 입고 자면 자꾸 옷이 다리에 휘감겨서 갑갑했다. 본가에서는 반바지를 입고 잤고, 기숙사에서는 어차피 볼 사람이라고는 룸메이트밖에 없으니 편한 티에 속옷 차림으로 자기도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반팔 티셔츠와 속옷만 입었다. 남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 지는 주제에 잠옷을 위아래 세트로 내놓으라고 할 정도로 염치없진 않아서, 형의 티셔츠만 빌려 입고 바지는 빌리지 못한 탓이다.

    따뜻하고 큰 손이 맨허벅지에 기어들어 왔다. 여린 살갗에 손의 굳은살이 쓸려서 감각이 곤두섰다. 그는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파고들어 와 안쪽 살을 느릿하게 주물렀다. 나는 잠기운에 함빡 젖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아……. 혀엉.”

    “왜, 예쁜아.”

    “뭐 하는 거예요…….”

    “신경 쓰지 말고 자. 잠버릇이야.”

    말하는 도중에도 손은 꾸준히 움직였다. 잠버릇치고는 말소리가 지나치게 또렷했다. 지적할 기운도 없었다. 일단은 계속 자기로 했다.

    내가 다시 얕은 잠에 빠졌을 무렵, 살살 간을 보면서 허벅지를 주무르던 손이 뒤로 옮겨 갔다. 드로어즈 위로 뼈가 도드라진 골반을 더듬고 그나마 살집이 좀 있는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한창 자던 중이라 온몸이 이완되어 있었다. 그의 손에 잡힌 엉덩이 살이 말캉하게 일그러졌다.

    “그만.”

    하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머리가 형의 목 부근에 툭 닿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 머리 아래로 제 팔을 밀어 넣어 팔베개를 해 주었다.

    “잠버릇이라니까.”

    그의 손이 엉덩이를 실컷 희롱한 끝에 신축성 있는 천 아래로 들어왔다. 동시에 머리 아래에 깔려 있던 팔을 움직여 티셔츠를 들쳐 올렸다. 손바닥으로 가슴 근육 전체를 문지르다가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워 비볐다. 어쩐 일로 다정하게 대해 주나 했더니, 이러려고 팔베개해 준 거였나. 배신감과 억울함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빨리 자. 자꾸 꼬물거리지 말고.”

    “그, 러엄……. 이것 좀 치워 주세요.”

    “잠버릇이라 어쩔 수 없어.”

    “가슴이랑 엉덩이 만지는 게, 어떻게…….”

    “잠버릇 맞는다니까 그러네.”

    잠버릇은 무슨. 이렇게 의도적이고 뻔뻔하고 문란한 잠버릇이 어디 있다고. 기가 찼다. 항의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벌어진 입술 사이에선 말 대신 새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비몽사몽 정신이 없는 내게 말을 걸어 정신을 쏙 빼놓고, 그는 팬티를 옆으로 젖히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의 검지가 입구 위를 꾸욱 눌렀다. 잠기운에 나긋나긋해진 속살이 별다른 저항 없이 손가락을 물었다.

    한 마디가 간신히 들어왔던 손가락이 도로 나갔다가 이번엔 두 마디쯤 파묻혔다. 그는 게으르고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안을 살짝살짝 쑤셨다. 감각이 너무도 예민해져 있어서, 손마디가 내벽을 긁는 작은 마찰에도 등과 허리가 움찔거렸다.

    “아, 흐읏, 아아…….”

    “낑낑대긴. 안 자고 뭐 해? 자라니까?”

    “이러는데 어떻, 읏, 어떻게 자요. 나 못 자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자는 도중에 자꾸 방해받으니 조금 신경질이 났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손을 휘저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

    “네가 자니까 이걸로 참는 거야.”

    형이 내 손을 붙잡아 몸과 함께 끌어안았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살짝 웅크린 자세로 그의 품에 갇혀 버렸다. 귓가와 목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내 등과 그의 가슴팍이 맞닿아 있어서, 구멍을 쑤시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어깨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구에서 깔짝거리던 손가락이 좀 더 깊이 들어왔다. 헛숨을 삼켰다. 막 자고 일어나서 딱 좋을 정도로 따끈따끈하던 몸에 조금씩 열이 올랐다. 자꾸 목 너머에서부터 흐느끼는 소리가 나오려 했다.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참았다.

    긴 손가락이 구멍 안을 이리저리 휘젓고 긁어내렸다. 내벽이 따끈하게 풀려 있어서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다. 속살이 그의 손가락을 지그시 감쌌다가 스르르 풀어지길 반복했다. 다리를 비비 꼬듯 움츠리고 달콤한 숨을 흘렸다.

    “이젠 손가락만 넣어 줘도 좋아 죽으려고 하네?”

    “흐응…… 아, 아, 하윽!”

    “이것 봐. 안이 찐득하게 다 녹아선, 아무 데나 쑤셔도 앙앙 울잖아. 야해 빠져 가지고. 더 풀어 주고 말고 할 것도 없겠네.”

    “그런 거 아니에요. 나 안 울었어.”

    “으응, 우리 호현이 안 울었어요? 그럼 자지는 왜 세우고 있어요? 물 다 흘리면서?”

    “아, 아니야…….”

    “아니긴. 자는 거 붙들고 바로 박아도 자지러지면서 질질 쌀 것 같은데.”

    그가 내 안에서 손가락을 쑥 뽑아냈다. 젖은 손가락으로 다물린 입구의 주름을 슬슬 누르고 문질렀다. 그러다 속옷을 허벅지까지 끌어 내리고 다시 박아 넣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꽈악 물었다.

    “자고 있었는데……. 자는데 형이 자꾸 막 만져서 그래요. 자다가 일어나면 이렇게 되는 거 당연하잖아요.”

    안 그래도 자다 일어나서 아래에 피가 몰리는데, 민감한 곳을 잔뜩 쑤시기까지 하니 발기할 수밖에 없는데. 몽롱한 정신에도 서러워졌다. 눈도 못 뜨고 그의 팔을 톡톡 밀어냈다.

    “나 잘래요. 빨리 자라면서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느새 조금 거칠어진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확 끌어당겼다. 손길이 어쩐지 조급했다.

    “현아. 나랑 섹스하자.”

    하체가 바짝 맞붙었다. 흉흉하게 발기한 그의 성기가 바지 위로 내 엉덩이 골을 쿡 찔렀다. 너무 단단해서 아팠다. 꼬리뼈 아래에 멍이 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 자는 내내 박고 싶어서, 씨발, 진짜……. 돌아 버릴 뻔했어. 내 좆 너한테 박을래. 하자, 응?”

    그는 내 허리를 팔로 휘감아 안고 연거푸 아랫도리를 잘게 문지르고 쳐올렸다. 발정 난 짐승처럼. 나는 속옷까지 벗겨졌다지만 그는 아직 옷을 입고 있는데 섹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잠깐만요, 영원이 형. 그만.”

    왜 이리 조급하게 굴까. 항상 음탕한 언행으로 나를 잔뜩 괴롭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흐물흐물하게 녹여 먹던 사람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뭔가 이상했다. 눈을 뜨고 뒤돌아보았다.

    형의 눈에 잠기운이 전혀 없었다. 흰자에는 옅게 실핏줄이 서 있었다. 그를 진정시켜 침실로 데려간 후, 그가 얌전히 눈을 감는 걸 확인하고 나도 잠들었다. 하지만 그는 한숨도 자지 않았다. 아니, 잘 수 없었던 거다. 세상모르고 쿨쿨 자는 나를 한 침대에 누워 지켜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뒤로 손을 뻗어 그가 입은 트레이닝복 바지의 허리 부분을 건드렸다. 형은 기다렸다는 듯 내 팔뚝에 입을 쪽 맞추었다. 내가 옷을 제대로 벗기지 못하자 친절하게도 내 손목을 잡고 움직여 허리 밴드를 끌어 내리게 했다. 뒤이어 성기 윤곽이 팽팽하게 불거진 드로어즈도 벗겼다. 자지가 기다렸다는 듯 튕겨져 나와 내 엉덩이에 닿았다.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

    다가올 삽입을 기다리며 베개에 옆얼굴을 푹 파묻었다. 성기가 몇 번 미끄러지면서 입구 주변에 물을 잔뜩 묻히다가, 이윽고 자리를 잡았는지 한 지점을 꾹 밀어붙였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흣……!”

    성기가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몇 번을 겪어도 적응하기 힘든 감각이었다. 좁은 골반을 억지로 벌리고 성기를 퍽퍽 처넣을 때면 몸속 전체가 뻐근했다. 둘 다 결코 골격이 여리고 가냘프지 않은 탓에, 엎치락뒤치락 뒹굴면서 섹스하다 딱딱한 뼈끼리 부딪치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형에게 매번 홀랑 넘어가고야 마는 것은 뒤에 이어지는 쾌락이 지나치게 중독성이 강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열기를 품고 미끈거리는 속살에 귀두가 파묻혔다. 그 후는 좀 수월했다. 성기가 좁은 내벽에 끼어서 더 안 들어갈 때마다 허리를 살살 돌려 속살을 훑어가면서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밀어 넣었다. 아직 남은 졸음기와 잊을 만하면 주어지는 미적지근한 쾌감과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뒤섞였다. 지금이 현실인지 야한 꿈을 꾸는 건지 언뜻 헷갈렸다. 형은 성기 밑동을 잡은 채 삽입되는 정도를 조절하다가, 거의 다 들어갔을 때쯤 성기를 놓고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마저 박았다.

    “읏…… 하아.”

    그가 내 등에 가슴을 바짝 붙이고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아랫배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 작은 행동조차도 야릇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젖히고 발뒤꿈치로 그의 종아리를 꾹 눌렀다. 한계까지 벌어진 안이 멋대로 움찔거렸다.

    “현아, 너.”

    따뜻하고 큰 손이 내 아랫배를 감쌌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성기가 들어온 곳 위를 지그시 눌러 왔다. 숨이 턱 막혔다.

    “아!”

    “너 여기 또 볼록해졌어. 이거 내 자지야?”

    “몰라요…….”

    “큰일 났네. 살 빠져서 그런가, 안 그래도 날씬하던 게 더 가늘어졌어. 이러다 자지 윤곽 다 비치겠다.”

    배가 연거푸 눌렸다. 명치나 다른 급소를 눌리는 거랑은 좀 다른 감각이었다. 이러다가 진짜 내장이 터질 것 같아 무서웠다.

    “하지 마요, 정말 죽을 것, 아아!”

    “죽을 것 같아? 좋아서?”

    “헉, 아니…… 흐응, 으, 흑!”

    “으응, 그렇지. 너무 좋으면 그럴 수 있지.”

    아니라고 하려다 신음이 터지는 바람에 말이 잡아먹혔다. 형은 태연하게 딴소리를 하면서 저 깊은 곳까지 처박은 성기를 슬쩍슬쩍 움직여 내벽에 미끄러뜨렸다. 움직임이 조금씩 커졌다. 한번 들썩일 때마다 배 안이 저릿저릿했다. 도저히 신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감은 눈 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현이는…… 하아. 영원이 형 좋아, 싫어?”

    “영원이 형?”

    “응.”

    “조, 좋, 아아! 좋아. 너무 좋아…….”

    “자기야 좋아요, 해 봐.”

    “자기야. 좋아요, 진짜, 좋아…… 좋아해요.”

    “응, 자기야. 나도 좋아해…….”

    그 한마디에 울음이 왈칵 터졌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줄줄 흘렀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성기를 감싸 쥐고 허리를 자근자근 놀렸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안에 박힌 게 너무도 잘 느껴졌다. 섹스하는 중인데 이상하게 자꾸 눈이 감겼다. 뺨에 닿는 베갯잇도, 형의 숨소리도, 내 배와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도 전부 기분 좋았다.

    간간이 형에게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그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흥분이 내게 불을 지피고, 내가 정신없이 내지르는 소리가 다시 그를 흥분시켰다. 눈물에 젖어 흐릿한 시야에 커튼 틈으로 스미는 아침 햇살과 허공에 잘게 떠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점차 쾌감이 올랐다. 틈틈이 흘린 것들로 흥건해진 내 성기가 꿈틀거렸다. 사정의 전조였다. 형이 민감하게 알아채고 성기 끝을 엄지로 꽉 눌러 막았다. 요도가 터질 것 같았다.

    “헉!”

    “이제 싸게 해 줄까? 아니면 더 할래?”

    “더, 싫어, 빨리.”

    빈말로도 더 해 달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더 하는 거 싫으니까 빨리 싸게 해 달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서 말 대신 색색대는 호흡만 샜다.

    “싸는 거 싫어? 더 빨리해 줬으면 좋겠어?”

    그는 뻔뻔하게도 내 말뜻을 정반대로 해석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자지 막아 달라고 보채는 것 좀 봐. 그래, 그래. 예쁜아. 알았어…… 좆물 안 새게 형이 꽉 막아 줄게.”

    형은 내 저항을 싹 무시하고 고개를 틀어 내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서러워서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는 성기를 막고 있지 않은 손으로 내 한쪽 허벅지를 잡아 올렸다. 다리가 쩍 벌어져서 팽팽해진 구멍이 드러났다. 갑자기 움직임이 확 거칠어졌다. 퍽, 퍽, 퍽! 접합부가 연거푸 부딪혔다. 성기가 쭉 빠졌다가 안까지 처박히기를 반복했다.

    내벽이 찌르르하다 못해 얼얼했다. 나는 발끝으로 침대 시트를 긁고 밀어 대며 몸부림쳤다. 본능적으로 그의 손바닥에 성기를 박아 넣기도 했다.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고, 내가 무슨 소리를 내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잡혀서 허공에 떠오른 허벅지가 감전된 것처럼 벌벌 떨렸다.

    “죽어요, 저 진짜 죽어요, 으응, 형……. 자기야, 제발……!”

    그는 성기를 틀어쥔 손을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죽어 버릴 것 같다 싶을 때쯤 자지가 막힌 채로 절정에 올랐다. 한순간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엉덩이를 들썩여 성기에다 꾸역꾸역 밀어붙였다. 내벽 깊은 곳이 쿵, 세게 찍혔다. 몸 안에서부터 지독한 쾌감이 터져 나왔다.

    “흐읏, 아…… 흑!”

    타인의 손에 잡힌 성기가 꿈틀거렸다. 악다문 잇새로 흐느낌이 샜다. 사정이 막혀서 그런지 절정이 무서울 정도로 길었다. 다리를 버둥거리고 허리를 들썩이고, 손끝으로 나를 안은 형의 팔뚝을 긁어 대며 엉엉 울어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오지 못한 정액과 쾌락의 잔재가 몸 안에서 뒤섞여 오래오래 맴돌았다.

    그가 성기를 더 들어갈 수 없을 때까지 처박은 채로 꾸욱꾸욱 밀어 올렸다. 미끄덩한 속살이 잔뜩 짓이겨졌다. 구멍이, 배가, 아니, 가슴까지 뻐개지는 듯 아팠다. 이러다가 자지가 명치까지 뚫고 들어올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 상태로 사정이 시작되었다. 내 안에 틀어박힌 성기가 둔하게 요동쳤다. 수없이 섹스를 했어도 여기까지 들어온 적은 거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인데, 거기다 정액을 싸지르기까지 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이대로 헛구역질을 하면 정액이 올라올 것 같다는 생각이 어른거렸다.

    형이 다짜고짜 몸을 쑥 뺐다. 판판한 배 안에 박혀 있던 게 속살을 억지로 뿌리치고 물러났다. 귀두까지 빠지는 순간 성기가 수직으로 퉁 튀어 올랐다. 기둥이 위협적으로 번들거렸다.

    “돌아누워 봐.”

    “…….”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헉헉대며 정면에 있는 침실 벽만 멍하니 보았다.

    “말귀 못 알아듣지? 덜떨어진 게 쓸데없이 귀여워선, 잔뜩 울기만 하고.”

    몸이 번쩍 들리더니 바로 눕혀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형에게서 등을 돌리고 옆으로 누워 있었는데, 순식간에 천장이 보였다. 몸을 추스를 힘도 없어서 양다리가 힘없이 벌어졌다. 도로 다물린 구멍을 비집고 정액이 줄줄 새는데도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그가 제 성기 아래쪽을 붙잡아 내 허벅지 안쪽을 툭툭 쳤다.

    “벌릴 거면 똑바로 벌려야지.”

    그는 사정의 여운이 남아 달아오른 뺨으로 빙긋 웃었다. 다리를 움츠리고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혹시 또, 또 할 건 아니죠?”

    “왜? 너 아직 안 쌌잖아.”

    “괜찮아요. 더 안 해도 돼요.”

    “아냐. 괜찮을 리가 없어. 자지 통통하게 부어서 이렇게 서럽게 우는데.”

    형이 나를 내려다보면서 느긋하게 다가왔다. 바로 옆 매트리스에 체중이 실려 푹 꺼진다 싶더니,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 정말 괜찮…….”

    “뭐? 괜찮다고?”

    그가 예고도 없이 내 성기를 덥석 쥐었다. 내 것은 사정하지 못하고 가 버린 탓에 지나치게 민감해져 있었다. 이불에 툭 스치기만 해도 시큰거렸다. 그런 걸 냉큼 움켜잡으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하윽!”

    “진짜 괜찮아? 정말로?”

    젖은 귀두가 그의 엄지에 슬슬 문질러졌다. 별것 아닌 움직임에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아뇨. 안 괜찮아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안 괜찮은 것, 아, 잠깐만……. 제발 이것 좀.”

    “그렇지? 안 괜찮지?”

    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기가 차고 말문이 막혔다. 발을 들어 한 대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내 성기를 손아귀에 쥐어 터트릴까 봐 무서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탄탄한 어깨에 내 한쪽 다리가 걸렸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허벅지에 가늘게 그어진 상처를 물고 빨았다. 주방에서 칼을 놓치면서 살짝 긁힌 상처였다. 나는 낮게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잠시 수그러들었던 열기가 다시 올랐다.

    눈이 그치고 얼음이 녹은 지도 한참 됐는데, 아직 우리 안에는 겨울이 남아 있었다. 피와 썩은 살점과 악취로 얼룩진 겨울이.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서툴러서 가슴 속에 도사린 한기를 몰아낼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런 흉터투성이 사랑은 처음이라 서로를 보듬는 법 또한 몰랐다. 그저 어설픈 침묵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무작정 품에 파고들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까지 맹목적인 쾌락을 갈구할 뿐이었다. 왜 형이 감염자들이 득실거리는 운동장 한복판에서도 시체가 가득 쌓인 창고에서도 다음이 없는 사람처럼 섹스에 몰두했는지, 비로소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겨울도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가 영원한 크리스마스에서 마침내 벗어났듯이.

    * * *

    “형. 준비 다 했어요? 나갈까요?”

    물음이 끝나자마자 침실 문이 열렸다. 형은 대답 대신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니트 위에 긴 모직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평소 옷차림과는 딴판이었다. 이런 옷도 갖고 있을 줄 몰랐, 아니, 물론 형이라고 면접이나 경조사 같은 자리에까지 날티 나는 차림으로 가진 않을 테니까 당연히 있겠지만. 그래도 좀 낯설었다.

    패션의 완성은 옷걸이라고, 그는 져지나 티셔츠 같은 옷을 입을 때도 멋지긴 했다. 그런데 이런 멀쑥한 차림을 하니 더욱 그가 새삼 키도 크고 훤칠하게 잘빠졌다는 게 실감 났다. 귓가에 달린 퇴폐미 가득한 피어싱과 깔끔한 핏의 코트가 안 어울리는 듯 묘하게 어울렸다.

    “웬일로 코트 입었어요?”

    “싫어?”

    “아뇨, 전 좋아요. 멋있어요. 근데 형은 이런 옷 불편하다고 싫어했잖아요.”

    “첫 데이트잖아.”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이제껏 내가 수도 없이 강조했던 말인데, 이상하게 얼굴이 빨개졌다. 부끄러워하는 걸 들키기 싫어서 괜히 고개를 돌렸다.

    “식당 예약해 놨어요. 요 앞에서 택시 잡아타고 조금만 가면…….”

    “택시를 왜 타?”

    “네?”

    형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 말에 잘못된 점이 있었나 무심코 되짚어 보았다.

    “너 말고 다른 새끼랑 좁은 데서 부대끼는 거 싫어. 생각만 해도 좆같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국의 택시 기사님들을 매도했다. 나는 곧 뜻을 꺾었다. 그래, 그가 사소한 일에 예민하고 까칠하게 구는 게 하루 이틀 일이었던가.

    “그럼 어떻게 가죠?”

    그가 코트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있던 손을 꺼냈다. 손끝에 새까만 차 키가 달랑달랑 걸려 나왔다. 그걸 보고 얼이 빠졌다.

    “이 밑에 주차돼 있어. 내려가자.”

    “아니, 저기요. 형?”

    “왜.”

    “차 있는 거 왜 진작 말 안 해 줬어요. 차 타고 갔으면 우리 어제 영화 시간 안 늦을 수 있었잖아요…….”

    “내가 뭐 하러?”

    뚱한 대꾸가 돌아왔다. 기운이 쭉 빠졌다. 형은 무슨 영화를 좋아할까 몇 날 며칠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상영 시간표를 몇 번씩이나 확인해 가면서 제일 좋은 시간대의 제일 좋은 자리를 예매하고, 형에게 휘말려 섹스를 하는 도중에도 영화 생각에 전전긍긍하고. 형이랑 영화 한번 보겠다고 쏟았던 내 노력이 죄다 헛짓거리가 되었다. 허탈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너 옆에 앉혀 두고 등신같이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느니, 그 시간에 너랑 물고 빨고 뒹구는 게 낫지. 네 엉덩이도 못 만지는 영화관에 뭐 하러 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티켓은……. 내 노력은…….”

    “티켓 100개 사 줄게. 엄청 큰 TV도 사 주고, 네가 좋아하는 영화 DVD 있는 대로 다 사 줄게. 아, 맞다. 사과도 100박스 사야지. 우리 토끼 먹이게.”

    예의 사과 100박스가 또 등장했다. 토끼 아니라고 항변하려는 찰나 그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어젠 그냥, 너랑 너무 있고 싶었어. 너랑 둘이서만.”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더는 따질 수 없었다. 우리는 현관으로 나갔다. 신발을 신으려다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어제 들어오면서 놓아둔 쇼핑백이 신발장 옆에 있었다.

    “아.”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꽃다발 말고 또 다른 선물. 어제는 그에게 면박당하는 게 무서워서 모른 척 묻어 두었다. 하지만 이제는 줄 때가 된 것 같았다.

    “영원이 형.”

    현관에 서 있던 그가 이쪽을 보았다. 남성복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을 급하게 뒤졌다. 종이 포장을 뜯고 안에 든 것을 내밀었다.

    “이거요.”

    “뭔데?”

    “목도리요.”

    목도리는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남색이고 끝에만 회색 패턴이 살짝 들어갔다. 형이 까만 옷을 즐겨 입는 건 알지만, 옷이 까만색이니까 포인트로 목도리에 색이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서 샀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갸웃하며 물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줘? 나 생일도 아닌데.”

    “제가 주고 싶어서요. 우리 사귀는 사이니까 이 정도는 줄 수 있는 거잖아요.”

    “사귀어?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온 물음에 멍해졌다.

    “아니었어요?”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했다.

    “저는…… 사귀는 줄 알았……. 그게, 그러니까 제 말은요. 좋아한다고 고백도 했고, 뽀뽀도 하고 다른 것도 했으니까…….”

    말하던 도중에 더할 나위 없이 씁쓸해졌다. 더 이상 말하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나는 당황으로 눈을 연달아 깜빡였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 바닥만 본 채 애써 입매만 올려 웃었다.

    “죄송해요. 저 혼자 오해했나 봐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럼, 사귀는 게 아니야?”

    “……네?”

    “이제껏 우리가 붙어먹은 건 뭐였어? 호현아. 입에 혀 넣어서 잔뜩 빨고 예쁜 젖꼭지랑 엉덩이도 만지게 해 주고, 자지도 박게 해 줬잖아. 지금까지 다 나 갖고 논 거였어? 이제 학교 탈출해서 나한테 볼일 없어졌으니까, 나 홀랑 따먹고 버리려고?”

    저속하기 짝이 없는 단어 선택에 어질어질해졌다.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매몰차게 거절당한 건 난데 왠지 내가 나쁜 놈이 되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형의 오해를 한시바삐 정정해야 했다.

    “아니에요! 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런 게 아니라.”

    황급히 변명하다가 흠칫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웃음기로 살며시 휘어져 있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또 놀림받았다.

    “흐으…….”

    긴장이 풀리면서 서러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다른 일도 아니고 이런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로 사람을 놀려 먹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형이 나빴다.

    “왜, 왜 놀려요. 형 너무해…….”

    눈앞이 그렁그렁해졌다. 나는 결코 쉽게 우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제 감정을 못 이겨 울 때 옆에서 난감하게 웃는 얼굴로 달래 주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형 앞에서만은 툭하면 눈물이 났다. 스스로가 손만 갖다 대도 물을 쏟는 센서 방식 수도꼭지가 된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들었다.

    “또 울려고 하네. 얼굴은 하얗고 눈은 빨갛고. 솔직히 말해 봐. 너 사람 아니지? 진짜 토끼지?”

    형이 나를 안아서 가볍게 토닥였다. 그의 품에서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그와 꼭 어울리는 매캐한 듯 서늘한 향이었다. 그는 울음기로 가늘게 떨리는 내 뺨을 만지작거리다가 엄지로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 주었다. 그래도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건장한 청년으로서 최후의 자존심이 있어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안 운 척했다.

    “……진짜 나빴어요.”

    “응, 응. 미안해, 현아. 내가 잘못했어. 형이 다 나빴어. 너 당황하는 거 귀여워서 장난쳤어.”

    그가 곧장 사과했다. 어울리지 않게 유순한 태도였다. 아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그의 날카롭고 강압적인 모습에만 익숙해진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좆같고 열받아서 못 참겠어? 한 대 갈길래? 자.”

    그가 내 쪽으로 뺨을 내밀어 주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오던 눈물도 쏙 들어갈 판이었다.

    “화 풀릴 때까지 패. 피범벅 만들어도 돼. 원하는 만큼 때리고, 나 미워하지만 마.”

    “안 돼요. 절대 안 그럴 거예요.”

    “왜 안 되는데?”

    왜 안 되냐니.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응수했다.

    “알잖아요, 제가 형 좋아하는 거. 누가 좋아하는 사람을 함부로 때려요.”

    “…….”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기해. 네가 어떻게 날 좋아하지? 어떻게, 정호현이 나를.”

    “그러게요. 저도 신기해요.”

    설움이 덜 풀려 퉁명스레 대꾸했다. 웃음기 어린 시선이 내게 따라붙었다.

    “있지, 예쁜아. 우리 사귀는 거지? 사귀는 거 맞지?”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누구 말대로 저는 좀 덜떨어져서요.”

    “그러지 말고. 응?”

    “맛있는 거 사 주면 생각해 볼게요. 전 형한테 잘 보이려고 꽃에 머플러까지 사 왔는데.”

    나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던 그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입을 다물고 무표정하게 있을 땐 마냥 사납고 날카로워 보이던 인상이 웃음 하나로 확 바뀌었다.

    “알았어. 우리 예쁜 호현이가 사 달라는데 사 줘야지.”

    “저 많이 먹을 거니까 각오하세요. 두 그릇, 아니, 세 그릇 먹을지도 몰라요.”

    “그래. 꼭 많이 먹어. 넌 좀 많이 먹어야 해.”

    “네?”

    “그 씨발 새끼들이 애한테 뭔 짓을 한 건지. 너 엉덩이에 살이 없어서 박을 때 아파. 배도 더 홀쭉해져서 자지 넣으면 그대로 튀어나오…….”

    “악!”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음담패설이 줄줄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러 간신히 입을 막았다. 그를 쏘아보며 못을 박았다.

    “밥 먹고 바로 후식까지 먹으러 가요. 딸기 케이크랑 주스랑 마카롱이랑 다 시킬 거예요. 도중에 배불러서 못 먹는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네. 호현이 좋을 대로 하세요.”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목에 목도리를 감아 주었다. 마지막으로 매듭을 짓기 전, 목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춥잖아요. 꽃샘추위니까.”

    그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날 따뜻해지고 완전히 봄 될 때까지만 이거 두르고 있어요.”

    “응, 알았어.”

    설핏 웃고 매듭을 마저 지어 주었다. 이젠 흉터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나갈 준비가 끝났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걸 망설였다. 내가 그보다 한발 앞서 문을 열었다.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를 들으며 밖으로 나섰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복도에, 그는 현관에 서 있었다. 내가 처음 여길 찾아왔던 때처럼.

    복도에 켜진 환한 조명이 내 등 뒤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외출하기 위해 집 안의 불을 다 꺼 놓은 탓에 유독 더 밝게 느껴졌다.

    “영원이 형.”

    손을 내밀었다.

    “가요.”

    그는 잠깐 동안 내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자잘한 흉터로 가득한 손이 내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내게로 오는 그의 뒤에서 현관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기나긴 악몽의 끝을 고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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