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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해방 (8/12)
  • 7. 해방 

    창고 문은 밖에서부터 굳게 잠겼다. 누군가 ‘창고 정리’를 하러 들어오기 전까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와 선배는 실내에 가득한 시신들을 피해 구석에 기대어 앉았다. 지금이 겨울인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지금쯤 창고 안에는 벌레가 잔뜩 꼬이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있는데도 이따금 등줄기가 서늘했다. 대형 폐기물처럼 쌓인 시체들이 어둠 속에서 나를 책망하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숨통을 조여 왔다. 우리는 억울하게 죽었는데, 너넨 왜 살아 있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죽어야 해? 우리도 너희랑 똑같은 평범한 대학생이었어. 우리도 살아서 나가고 싶었다고. 그런데 왜…….

    “보지 마.”

    선배가 창고 벽을 은은하게 비추던 LED 시계를 아예 이쪽으로 돌려 버렸다. 건너편의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가 손바닥 전체로 내 눈가를 덮었다.

    “…….”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을 가린 큰 손이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선배는 나를 가만히 눕혔다. 뒷머리에 단단한 허벅지가 닿았다.

    나는 들끓던 열이 내린 뒤에도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큰 감기를 앓고 난 것처럼 몸이 노곤했다. 시원한 물이라도 마시면 좀 괜찮을 것 같은데, 시체 보관소나 다름없는 창고에 식수가 있을 리가 없으니 요원한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언제 나갈 수 있을까. 나갈 수 있긴 할까. 창고를 정리하러 들어온 사람이 날 다짜고짜 죽이려 들진 않을까. 감염자에게 물렸던 건 맞는데 다시 나았다고 말해 봤자 믿어 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선배가 상체를 숙였다. 가려진 시야 너머로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입술이 맞물렸다. 무심코 입을 살짝 벌려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 입술을 헤집고 들어왔다. 흘러내린 그의 앞머리가 젖혀진 턱 아래 목덜미를 간질였다.

    “흐응…….”

    눈을 가린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선배는 요지부동이었다. 떨어져 주기는커녕 다른 쪽 팔을 냉큼 뻗어 내 몸을 더듬었다. 키스하던 와중에 큼직한 손이 사타구니에 불쑥 들어왔다.

    “헉!”

    마구 도리질하며 그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입술이 잠깐 떨어졌다. 선배는 반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음습한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밤하늘처럼 아주 새까맣게 보였다.

    “서, 선배. 갑자기 왜 이러세요?”

    “왜냐니. 네가 더위 먹은 강아지처럼 뻗어 있는 게 귀여워서 그러지.”

    “네?”

    “평소에도 이렇게 얌전하게 굴면 얼마나 좋아. 응? 기운 빠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입술은 왜 오물거려.”

    “그건, 선배가…… 먼저 했으니까요.”

    “뭘 해?”

    내 입으로 입맞춤이니 키스니 하는 말을 입에 담으려니 새삼 부끄러워졌다. 이제까지 온몸을 물고 빨고, 여기저기 만져 주고, 성기를 안에 집어넣어서 울음이 터질 때까지 박아 대고……. 아무튼 별걸 다 한 사인데도 그랬다.

    “……뽀뽀요.”

    “으응, 뽀뽀. 그렇지. 뽀뽀 좋지.”

    그가 픽 웃더니 내가 간신히 쥐어짜 낸 유치한 단어를 따라 읊었다. 나를 놀리려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우리 호현이, 그랬어? 힘이 없어도 나랑 뽀뽀는 하고 싶었어? 하……. 뭐 이딴 귀여운 게 다 있지?”

    내가 베고 있던 허벅지가 움찔 경련하더니 단단하게 굳어졌다. 뭔가 이상했다. 벼락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그냥 허벅지 안쪽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허벅지가 아니었다.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내 이마를 꾹 눌렀다. 나는 그의 허벅지에 도로 쓰러졌다.

    “잠깐만요. 저 이제 일어날게요. 불편하지 않으세요?”

    “당연히 불편하지. 네가 내 좆 베고 누워 있는데.”

    “근데 왜 점점 더 커지는 거예요…….”

    “어쩔 수 없잖아. 네가 꼴리게 구니까. 넌 어떻게 아파서 축 늘어져 있는 것까지 예뻐? 꼭 탈진할 때까지 박히다가 정액 잔뜩 받아먹고 쓰러진 것 같아.”

    “아니, 선배, 세상에.”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정신이라면 이럴 순 없었다. 바로 옆에 수십 구의 시신이 있는데, 지금은 일부러 우릴 가둬 놨다지만 언제 다른 사람이 들어올지 모르는데. 필사적으로 핑계를 주워섬겼다.

    “우리 이러면 안 돼요. 누가 문 열고 들어올지도 몰라요.”

    “와, 잘됐네. 나갈 수 있잖아.”

    “그게 아니잖아요!”

    “그게 아니면 뭔데? 문 열리는 거 싫어? 여기서 시체들이랑 평생 뒹굴고 싶어서 그래? 후배님, 생긴 거랑 다르게 취향이 좀 또라이 변태 새끼 같네.”

    선배가 눈매를 찌푸리고 천하의 쓰레기 보듯 나를 보았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저, 제 말은요. 문 열리는 건 좋은데, 그러니까, 문이 열렸을 때 우리가 뭘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저한테는 최후의 수치심이라는 게 있고…….”

    “맞고 조용히 할래, 그냥 조용히 할래?”

    “……그냥 조용히 하겠습니다.”

    “꼭 이럴 때만 쓸데없이 쫑알거리지. 실컷 물고 빨고 귀여워해 줄 땐 엉엉 울기만 하더니.”

    앞섶을 은근하게 주물러 대던 손길이 점차 파렴치해졌다. 피가 몰려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기둥을 감싸고 바지 위로 도드라진 귀두 윤곽을 따라 문질렀다.

    “아…… 아!”

    고개가 확 젖혀졌다. 태연하게 내 걸 주무르고 있는 그가 얄미워서 입술을 깨물어 주려 했다. 그러나 몸이 자꾸만 들썩들썩 흔들리는 바람에 빗나갔다. 얼떨결에 그의 목덜미를 앞니로 살짝 긁듯이 깨물어 버렸다.

    “읏.”

    그가 짤막하게 신음했다. 흠칫 놀라 입술을 떼어 냈다. 그의 목에 새겨진 커다란 흉터 위에 발간 잇자국이 희미하게 나 있었다.

    “아팠어요? 죄송해요.”

    그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좀 더 낮추어 주었다.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내가 팔만 뻗으면 목을 움켜쥘 수 있는 높이까지.

    “아냐. 더 해 줘. 살 찢어지고 피 날 때까지 물어뜯어 줘. 목 졸라도 되고 할퀴어도 돼.”

    그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목 위에 올려놓았다. 흉터는 감촉으로는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 손끝에 울퉁불퉁한 살결이 걸리는 것 같았다.

    “이 위에 새 흉터 남겨 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난 뭐든지 좋아.”

    “제가 왜 선배를 아프게 해요. 싫어요.”

    내 머리 아래에서 그의 성기가 더욱 흉흉하게 발기했다. 이대로 더 있을 수 없었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내 어깨를 잡아 쓰러뜨리고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모로 누운 채 한데 뒤엉켰다. 아랫배에 타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는 내 바지 앞섶을 뚝뚝 풀어 내리고 속옷 안에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흐으, 앗…… 싫다니까요!”

    “씨발, 정호현. 넌 그냥 다 싫지? 다 좆같지?”

    “네?”

    “맞잖아. 넌 허구한 날 싫다는 말만 존나게 해. 잔뜩 예뻐해 줘도 싫다, 잘 느끼는 부분만 골라서 박아 줘도 싫다. 이제 아주 꿈에서도 네가 싫다고 우는 것밖에 안 나와. 대체 좋은 게 뭔데?”

    “저는 때와 장소를 가리는 교양 있는 선배가 좋아요.”

    “응. 좆 까.”

    “…….”

    용기를 내어 한 말이 곧바로 무시당했다. 서러워졌다. 선배가 먼저 물어봤으면서. 그래도 일단은 틀린 걸 정정해야 할 것 같았다.

    “선배가 싫은 게 아니에요. 전 선배 싫어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아니면?”

    그가 아래에서 눈만 올려 시큰둥하게 나를 보았다.

    “지금은 안 돼요. 불안해서 그래요. 이상한 소리 날지도 모르고…….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저기 있는 시체 중에 혹시라도 감염자가 있어서, 소리 듣고 깨어나면 어떡해요.”

    “그럼 내 거 빨아 줘.”

    “네?”

    선배는 딱딱하게 굳은 낯을 풀고 빙긋 웃었다.

    “입에 좆 가득 물고 있으면 이상한 소리 날 일도 없고 좋잖아. 응?”

    “그게 대체 무슨…….”

    “빨아 줄 거지? 나도 네 거 빨아 줄게.”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자신의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졸지에 그의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파묻게 되었다. 한 박자 늦게 알았다. 지금 이 자세, 소위 말하는…….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속옷이 쭉 끌려 내려갔다. 선배가 한 손으로 내 엉덩이를 몇 번 주무르고 토닥이더니, 허벅지 사이에 늘어진 성기를 곧바로 입에 물었다.

    “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성기가 뜨겁고 습한 입 안에 쭉 빨려 들어왔다. 그는 아직 덜 발기해서 말랑한 느낌이 남아 있는 귀두를 우물거렸다.

    “으, 으응, 앗, 싫…… 하윽!”

    내 입에서 싫다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선배가 물고 있던 것을 힘 있게 빨아들였다. 귀두 아래 옴폭 들어간 부분과 기둥이 질척한 입천장에 죄다 긁혔다.

    갑작스레 주어진 자극에 눈가가 뜨끈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의 위에 그대로 엎어질 뻔했다. 액이 질금질금 새고 있을 텐데, 선배는 그것마저 맛있게도 빨아먹었다. 한술 더 떠 혀를 뾰족하게 세워 요도 구멍을 마구 쑤셔 댔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을 선배의 앞섶에 가져갔다. 그는 이미 한껏 발기해 있었다. 무시무시한 크기의 자지가 옷감 위로 툭 불거졌다. 언제 봐도 기가 질리는 광경이었다.

    바지 단추를 어떻게 풀더라. 지퍼는, 지퍼는 어떻게 내리…… 아, 이러다 죽겠, 정말 죽을 것 같아. 아무 생각이 안 나…… 그만, 선배가, 자꾸. 이걸 어떻게 해, 미쳤어, 쌀 것 같아. 지금 싸면 선배 입에 고스란히 들어가는데, 안 돼…….

    나는 헐떡이며 간신히 지퍼를 내렸다. 꼴사납게 흐느끼는 신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팽팽하게 튀어나온 드로어즈 위로 힘겨운 숨결을 흘렸다. 선배가 입 안 가득 넣고 빨던 좆을 반쯤 빼냈다. 그는 입술 사이에 사탕처럼 귀두를 문 채 나지막하게 웃었다. 울림이 성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호현아, 자지 빨아 주는 게 아무리 좋아도 할 건 해야지. 소리 날까 봐 걱정된다며?”

    발음이 살짝 뭉개졌다. 그것마저 야하게 들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홀린 듯 그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읏……!”

    안에 갇혀 있던 굵직한 기둥이 힘차게 퉁 튀어 올랐다. 자칫하면 자지에 뺨을 맞을 뻔했다. 밑동을 붙잡고 머뭇거렸다. 실물을 보자 한층 더 자신감이 없어졌다. 이걸 물었다간 입술이 죄다 터지고 입가가 찢어지지 않을까. 저번에 섹스했을 때 내가 멀쩡했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쭈웁. 선배가 내 것을 다시 머금고 빨아올렸다. 망설일 이성조차 날아갔다. 눈에 초점이 풀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흐윽…… 읏.”

    신음이 멋대로 샜다. 이러다간 정말 창고 안에 쩌렁쩌렁 울릴 판이었다. 입을 벌려 양손으로 쥐고 있던 성기 끝을 허겁지겁 물었다. 다친 입술이 따끔거렸다.

    나는 그의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성기를 어설프게 핥았다. 깊이 넣어 보려고 하면 한계까지 벌어진 턱이 아팠고, 얕게 물고 빨아 보려고 하면 앞니에 귀두가 자꾸 긁혔다. 기둥까지 힘차게 쭉쭉 빨아 대는 건 엄두도 못 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끄트머리를 물고 살짝살짝 굴리는 게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읍…….”

    헛구역질이 나고 어지러웠다. 딱 죽을 맛이었다. 중간에 선배가 내 걸 세게 빨 때마다 멋대로 신음이 터졌다. 그의 허벅지를 짚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몸에 자꾸 힘이 빠져서, 나중엔 아예 그의 위에 다리를 벌리고 엎드린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선배는 애무 방식을 바꾸었다. 귀두를 혀끝으로 살살 핥아 주는 동시에 손 전체로 기둥을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타액에 흠뻑 젖은 성기에서 찔꺽찔꺽 소리가 났다. 아, 정말로,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목 너머에서 자꾸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허리며 허벅지가 안쓰러울 정도로 후들거렸다.

    “하아……. 우리 현이는.”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진짜 더럽게 못 빠는구나?”

    “…….”

    억울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원래도 젖어 있던 눈초리가 더 흥건해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한 건데.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넌 어떻게 목구멍까지 작아? 예쁜 목에 내 좆 꽉 끼어서 안 빠지면 어떡하지.”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내 엉덩이를 벌렸다.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물고 있던 귀두를 입술 사이에서 빼내고 급하게 돌아보았다.

    “흐으…… 읏, 헉! 선배, 거기, 거기는…….”

    “왜, 싫어?”

    아까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싫다는 말을 또 하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뚝뚝 울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작게 저었다.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내 엉덩이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구멍을 혀로 핥고 쑤시고 닥치는 대로 빨면서 손으로는 성기를 흔들었다.

    구멍 안이 점차 젖어 들었다. 배꼽 아래부터 구멍까지, 그의 자지가 뚫어 놨던 길이 죄다 간지러워졌다. 내벽이 멋대로 움찔움찔 수축해서 안을 물컹하게 찔러 대는 혀를 움켜쥐었다.

    “아읏! 응, 으응…… 흑. 거기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야…….”

    나는 성기를 빨던 것도 잊었다. 그의 위에 엎드려 끙끙 앓으면서 자극을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그의 턱과 가슴팍에 체액이 마구잡이로 떨어졌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안 돼요. 이제 안 돼요…… 선배, 놔주세, 모, 못 참겠어요…… 제발…… 아, 아!”

    선배는 내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내 엉덩이를 더욱 세게 움켜쥐고 얼굴을 깊숙이 처박았다. 음낭과 회음, 구멍을 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빨았다. 혀로 문질러 적시고 앞니로 가볍게 긁었다. 이러다간 엉덩이에 손자국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하지만 곧 그런 것 따윈 조금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읏, 흐윽……!”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전류가 확 퍼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세상이 일그러졌다. 아아, 아, 아, 아, 하고 잘게 떨리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죽어 가는 사람 같기도 했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나는 선배의 허벅지에 이마를 기댔다. 허리를 들썩였다가, 본능적으로 아래를 향해 쿡 치받았다. 성기가 한 차례 크게 꿈틀거렸다. 정액이 요도를 타고 울컥 밀려 올라왔다. 그는 내가 사정하는 내내 뒤를 괴롭혔다. 손으로 성기를 빠르게 주물러 정액을 짜내면서 혀로는 구멍을 쑤셨다. 무자비한 절정에 시달리는 내벽이 쉴 새 없이 꽉꽉 조여드는 걸 모조리 만끽했다.

    얼룩덜룩해졌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왔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선배의 입 주변이 내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심지어는 뺨과 눈가에까지 튀었다. 그의 턱을 타고 흰 액체가 줄줄 흘렀다.

    “…….”

    눈앞이 깜깜해졌다. 방금 내가 본 장면을 머리에서 통째로 도려내고 싶었다. 아니, 그냥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선배가 입가에 듬뿍 묻은 정액을 핥았다. 발갛게 젖은 혀가 입술 위를 훑고 지나갔다. 몹시도 선정적인 광경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턱과 뺨을 적신 것을 손가락으로 쓸어 핥아 먹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다급히 그를 뜯어말렸다.

    “미쳤어요? 그걸 왜 먹어요!”

    “이미 삼킨 걸 도로 뱉을 순 없잖아. 기왕 먹은 김에 맛 좀 제대로 보려고.”

    “죄송해요…….”

    “진짜? 진짜 미안해?”

    “네.”

    “그럼 뒤돌아봐.”

    절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후들거리는 몸을 추스르고 등을 돌렸다. 갑자기 허리 아래로 불쑥 손이 들어왔다. 그가 나를 들어 자신의 위에 앉혔다. 그의 허벅지에 올라앉아 뒤에서부터 안긴 자세가 되었다. 내가 핥다 만 성기가 흠뻑 젖은 엉덩이 골을 쿡 밀어 올렸다. 헉.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선배!”

    “나 아직 안 쌌어. 너만 좋으면 끝이야?”

    “잠깐만요…….”

    “직접 넣어 봐.”

    “뭐, 뭘요? 입사 원서를요? 라면에 계란을요?”

    기겁해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선배가 못 참겠다는 듯 킥킥 웃었다.

    “내 자지, 직접 구멍에 꽂아 보라고. 네가 하도 좆같이 못 빨아서 이대로는 온종일 해도 안 끝날 것 같으니까.”

    서로 빨아 주는 것까진……. 그것도 사실은 정신 나간 짓이지만. 아무튼, 그것까진 백 보 양보해서 괜찮다 치자.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시체가 가득한 창고에 갇힌 상황에서 기어이 삽입까지 하려 들다니.

    “밤새 내 좆 물고 끙끙댈래, 아니면 빨리하고 끝낼래?”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우뚝 곤두선 성기 끄트머리가 다물린 구멍을 위협적으로 눌러 댔다. 입구 근육이 벌어질 듯 말 듯 팽팽하게 긴장했다. 이러다간 정말 수직으로 꿰뚫릴 것 같아서 체중이 실리지 않도록 선배의 팔을 붙잡고 버텼다.

    “또 잔머리 굴리지. 다 보여. 어떻게든 핑계 대고 내뺄 생각만 하는 거.”

    “이건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 이러면 안 돼요. 차라리 나중에 나가서…….”

    “나중에? 나가서? 난 그런 거 몰라. 나중이란 게 뭔지, 나가면 뭐가 있는지도 잊어버렸어. 지금 당장 네가 예뻐서 죽을 것 같은데,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영영 안 올지도 모르는데 어쩌라고.”

    “…….”

    “그거 알아? 아까 너 열나서 정신 못 차릴 때도, 심장 완전히 멎기 전에 너 붙들고 좆 박을까, 그 생각부터 했어. 죽었다 살아나면 넌 우리가 뭘 했는지, 내 밑에서 얼마나 귀엽게 울었는지 다 잊어버릴 테니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선배가 나를 끌어안고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웃었다.

    “왜 그렇게 바짝 쫄았어, 예쁜아. 내가 역겨워? 소름 끼쳐? 미친 새끼 같아?”

    선배를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가 내 눈을 가리는 게 빨랐다. 뒤에서부터 뻗어 나온 커다란 손에 시각이 차단되었다. 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캄캄한 시야를 더듬어 자지를 붙잡았다. 곧게 일어선 성기 끄트머리를 구멍에 맞추고 엉덩이를 내렸다. 당연히 쉽게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귀두가 젖은 구멍 위에 꾹 파묻혔다 떨어진 게 전부였다. 딱딱한 게 여린 살을 짓눌러서 아프기만 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다시 시도했다. 성기를 살짝살짝 움직여 가며 어떻게든 맞물린 속살을 비집고 넣어 보려 했다. 용을 쓰느라 목 뒤쪽과 뺨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몸이 도무지 열리질 않았다.

    “흐으……. 헉, 흐읍.”

    눈을 덮은 선배의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뺨과 콧잔등을 스르르 쓸고 아래로 내려가 입을 틀어막았다. 헐떡이는 숨결이 내 입술과 그의 손바닥 사이에 머물렀다. 아래에 힘을 주었다 풀고 구멍을 움찔대기도 하며 애를 쓴 끝에 귀두가 찔꺽 들어갔다. 눈 아래 살이 파르르 떨렸다. 흐응……. 칭얼대는 신음을 삼켰다.

    체중을 실어 천천히 내려앉았다. 큼직한 성기가 아래에서 위로 나를 꿰뚫었다. 통통하게 부은 입구에 꽉 물려서 절대 안 들어갈 것 같던 처음과 달리 뒤는 그나마 조금 수월했다. 내벽이 힘겹게 벌어지고 길이 나는 게 느껴졌다.

    선배가 한 손으로 내 자지를 주물렀다. 아래에선 커다란 게 꾹꾹 밀고 들어오는데, 막 사정한 성기에 자극이 가해지기까지 했다.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성기를 집어넣는 내내 입이 막힌 채 줄줄 울었다. 한도 끝도 없이 꾸역꾸역 들어오던 성기가 안쪽 벽을 퉁 찍었다. 내장을 타고 둔한 통증이 번졌다.

    “……!”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더 넣는 건 불가능했다. 장기가 모조리 위로 밀려 올라가거나 성기가 뱃가죽을 뚫고 튀어나오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 와중에도 아래에 계속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아파서 참기 힘들었다. 선배의 팔뚝을 다급하게 툭툭 때렸다.

    “더 못 먹겠어? 이제 고작 반 들어갔는데. 우리 현이는 입이 짧네.”

    입을 막은 손바닥 아래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손을 떼 주었다. 갇힌 숨이 확 터졌다.

    “저 죽어요, 아, 읏! 흐으, 선배에……. 더는 안 돼요. 정말 죽을 것 같…….”

    “더 넣지 마세요, 자기야. 해 봐. 그럼 그만 넣을게.”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울면서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더 넣지 마, 세요…… 자기야. 아파요, 무서워. 배 망가져요.”

    “응, 알았어.”

    그가 내 허리를 부둥켜안아 성기가 더 들어가지 않게 잡아 주었다. 그제야 배가 찢어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 수모를 겪었는데도 내 성기는 꼿꼿이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 봐. 넣어 주기만 했는데 또 발딱 섰어. 싼 지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된 몸이 이렇게 야해?”

    성기를 한계까지 밀어 넣어 배 안을 가득 채운 채, 그가 허리를 툭툭 쳐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속살에 찐득하게 휘감긴 성기가 여기저기를 찌를 때마다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아, 아아…… 하읏, 으, 응.”

    “네 자지, 한 번 싸더니 색 더 진해졌어. 원래는 연한 핑크였는데. 몇 번 더 가게 해 주면 아주 빨개지겠다. 좆 대가리 쪽쪽 빨면 좆물 대신 과즙 나올 것 같아. 예뻐.”

    그가 내 귀두를 손아귀에 감싸 쥐고 주무르다 말고 홀린 듯 감탄했다. 그 감탄의 내용이 몹시 상스럽고 도착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나는 그의 위에 주저앉아 신음만 흘렸다. 어찌어찌 넣긴 했는데, 아무리 해도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양손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안에 든 성기를 뽑아내듯 그대로 쑥 들어 올렸다. 속살이 기둥에 들러붙어 살짝 딸려 나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성기가 하도 버겁게 끼어 있어서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아주 물고 놔주질 않네? 벌써 좆 맛을 들였어?”

    “하윽, 아!”

    “우리 후배님, 벌써부터 자지 먹는 거 이렇게 좋아해서 어쩌려고 그래요. 응? 몇 번 박아 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기대앉은 그의 허벅지와 아랫배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는 몇 번 간을 보듯 툭, 툭, 툭, 가볍게 치대다가 본격적으로 쳐올렸다. 성기 위에 꽂힌 몸이 격렬하게 들썩였다. 진짜 이러다 배가 뚫리는 게 아닐까. 점점 무서워졌다. 그의 허벅지 위에 활짝 벌어진 채 얹혀 있던 다리를 움츠렸다. 선배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다리 모으지 마. 읏, 너무 조여.”

    그는 내 양 무릎을 잡아 도로 벌려 놓았다. 아랫배와 사타구니 근육이 판판하게 땅겨져서 성기가 드나드는 게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엉망진창으로 흔들렸다. 성기가 안을 쿵쿵 찍어 올릴 때마다 내벽이 시큰거렸다. 어쩔 줄 몰라 선배의 허벅지를 짚었다가 팔을 잡았다가 했다. 그의 목덜미와 가슴에 등을 기대고 할딱였다.

    “서, 선배! 헉…… 잠깐만요.”

    “왜. 더 세게 박아 줘? 아니면 자세 바꿀까?”

    “아니, 아뇨, 안 될 것 같아요. 이제 못 하겠어요.”

    선배가 거친 숨을 내쉬며 나를 뚱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무작정 바닥을 짚고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갔다. 그가 내 뒤에 집요하게 따라붙어 허리를 퍽 쳐올렸다. 전립선이 우악스레 짓이겨졌다. 쌀 뻔했다.

    “아으, 흣, 으응!”

    “앙앙 우는 거 봐, 아주 밖에 있는 새끼들 다 들으라고…….”

    뒤에서 손이 불쑥 뻗어 나와 내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가 거칠게 젖혀졌다. 나는 뒤로 질질 끌려가 선배의 위에 풀썩 앉혀졌다. 거의 다 빠졌던 성기가 도로 안에 처박혔다.

    “…….”

    참고 있던 쾌감이 터졌다. 성기에서 정액이 쭉 뿜어져 허공을 수놓았다. 나는 한껏 고개를 쳐든 채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벌벌 떨었다. 선배의 손 아래에서 입을 맥없이 벙긋거렸다.

    “윽, 씨발, 너, 그만 조이라고…… 했지.”

    선배가 작게 이를 갈았다. 한 손으로는 내 입을 막고 한 손으로는 허리를 움켜쥔 채, 성기를 저 깊이까지 꾸욱 밀어 올렸다. 안에 정액이 꿀럭꿀럭 밀려 나왔다.

    “읍, 흐으…… 읏.”

    나는 작살에 꿰인 사냥감처럼 붙잡힌 채, 앞으로 사정하면서 뒤로 그의 정액을 고스란히 받았다. 그러면서 속눈썹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 나오지 못한 신음이 죄다 눈물이 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사정이 끝나기 전에 성기를 쑥 뽑아냈다. 그 와중에도 정액이 질질 흘러서 엉덩이 골에 잔뜩 묻었다. 받치고 있던 팔이 사라지자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가 나를 휙 뒤집어 올라탔다. 나는 천장을 보고 바로 눕게 되었다. 가슴팍에 묵직한 체중이 얹혔다. 입가에 번들거리는 성기가 들이밀어졌다.

    “빨아.”

    그가 씹어 뱉는 듯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는 앞을 더듬어 단단하게 굳어진 그의 허벅지를 절박하게 붙들었다. 입술을 한껏 벌려 정액이 뚝뚝 떨어지는 성기를 물었다. 두툼한 귀두가 혀와 입천장을 짓이겼다. 입 안에 정액 비린내가 진동했다. 숨이 막혔다.

    한 손으로는 내 옆 바닥을 짚고 다른 손으로는 성기 밑동을 붙잡은 채 입 안에 몇 번 박다가, 선배가 자지를 쑥 빼냈다. 나는 가슴팍을 들썩이며 연거푸 기침을 했다. 기침이 가라앉기도 전에 몸이 확 떠올랐다. 선배가 나를 안아 자신의 위에 도로 앉혔다. 이번엔 마주 보는 자세였다. 나는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달랑 들려서, 방금 사정하고도 전혀 풀이 죽지 않은 성기 위에 푹 박혔다.

    “읏! 선배에…….”

    “네에, 후배님.”

    “왜, 왜 또 넣어요. 아까 한 번 갔잖아요.”

    “한 번 싸질러 놨더니 그래도 좀 낫네. 아까보단 더 들어갈 것 같아.”

    “안 돼요. 더 안 들어가요. 저 배 찢어져요.”

    “아냐. 좀 튀어나오긴 했는데……. 뭐, 괜찮아. 안 찢어지게 할게.”

    선배가 내 아랫배를 살짝살짝 눌러 보더니 지그시 힘을 주어 나를 내려앉혔다. 정액을 잔뜩 머금은 내벽에 성기가 미끄러졌다.

    “하나도 안 괜찮…… 아, 아아!”

    그대로 시간을 들여 조금씩 박아 넣었다가 도로 빼기를 반복했다. 무작정 달려들었던 아까와는 달리 집요하고 은근했다. 점점 배가 뻐근하게 아파 와서 무서웠다.

    “못 해요, 어떻게, 어떻게 여기서 더. 이게 끝이란 말이야…… 헉!”

    내벽을 끈질기게 두드리던 성기가 기어이 더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여기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숨이 멎고 온몸이 굳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바래졌다. 한 박자 늦게 통증의 탈을 쓴 성감이 확 올라왔다.

    “흐악, 아, 으, 흐으!”

    사지가 멋대로 팔딱거렸다. 나는 선배를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울었다. 헉헉대는 숨이 연달아 터졌다.

    “봐, 현아. 저 안까지 들어갔어.”

    “이거 이상해요, 이상한 것 같아요…….”

    “너 진짜 귀여워…… 하아. 배는 볼록해져 가지고.”

    덜덜 떨리는 허벅지로 그의 허리를 꽉 조였다. 전립선이고 뭐고 구분할 새도 없이 안쪽이 모조리 짓이겨졌다. 내장이 그의 자지 모양대로 녹아내려 들러붙은 것 같았다. 사정감인지 요의인지도 구분이 안 되는 감각이 아랫배 안쪽을 할퀴었다.

    그는 내 등과 엉덩이를 받쳐 안고 조금씩 움직였다. 한 번 박을 때마다 접합부에서 정액이 질질 밀려 나왔다. 나는 새된 호흡을 연거푸 몰아쉬었다. 선배의 어깨를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움켜쥐고 몸 안이 온통 쑤셔지는 감각을 견뎠다.

    다음 절정은 어이없을 정도로 빨리 찾아왔다. 그러나 이번엔 정액이 나오지 않았다. 아까 두 번이나 싸서 그런 것일까.

    “윽…… 흐윽, 흐, 헉, 으응…….”

    나는 한 끗 부족한 쾌락에 시달렸다. 꼿꼿이 선 성기를 선배의 배에 비벼 봐도 정액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괴로워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이리저리 뒤틀며 몸부림쳤다. 나중엔 목소리도 아예 나오지 않았다.

    선배도 말이 없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성기를 입구까지 쭉 물렸다가 힘껏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아주 깊은 곳에서 사정했다. 심장과 폐에 곧바로 정액이 뿌려지고 뚝뚝 흘러 명치에 고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나는 곧장 쓰러져서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컴컴한 천장이 마구 돌았다. 의식이 깜빡 흐려졌다 돌아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선배가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까무룩 기절하듯 뻗어 버린 나와 달리, 그는 잠기운이 전혀 보이지 않는 낯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선배.”

    그를 불렀다가 제풀에 놀랐다. 목이 끔찍하게 쉬어 있었다.

    “호현아, 안 죽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안 죽고 살아 있으니까 나랑 이런 것도 하잖아.”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 또한 살짝 갈라졌다. 안 죽고 산 건 다행인데, 방금 선배 때문에 도로 죽을 뻔했다는 말이 턱 끝까지 찼다. 그가 다시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약속했잖아요. 우리 둘 다 안 죽고 살아서 무사히 나가자고.”

    “응. 그래서 네가 열 펄펄 끓다가 정신 잃을 때도 그냥 기다렸어. 안 죽을 거라고 약속했으니까.”

    “…….”

    “다 이번이 처음이야. 네가 나한테 뭘 약속한 것도, 안 죽은 것도, 나 안 싫어한다고 말해 준 것도. 좋은데, 너무 좋은데. 무서워.”

    나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무섭다고 한 것은. 무서워 벌벌 떠는 건 항상 내 역할이었다.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선배도요. 저 포기 안 하고 안 죽어서 다행이죠?”

    일부러 밝게 웃으며 물었다.

    “끝까지 안 죽고 살아서 나가면 다른 것도 할 수 있어요. 선배가 좋아하는 거 한 번씩 다 해 보고 먹어 봐요. 저 다 외워 놨어요. 잊어버린 것도 다시 기억나게 해 줄게요.”

    그는 대답 대신 나를 따라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선배는 줄곧 나를 안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결에 슬금슬금 벗어나려 할 때마다 그가 귀신같이 알아채고 나를 죽 끌어다 도로 품에 넣었다. 나는 꼼짝없이 그의 팔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밖에서 걸어 둔 잠금이 풀리고 있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바짝 들었다.

    “선배, 일어나요.”

    일단 선배를 흔들어 깨웠다. 누군가 창고 정리를 하러 온 거라면, 우리가 감염되었다고 믿고 죽이러 온 거라면. 껴안고 드러누워 태평하게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선배!”

    “알아.”

    그가 눈을 뜨지도 않고 대꾸했다. 나른함을 가장했지만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자는 줄 알았는데.

    “지금 밖에 누가…….”

    “아니까 꼬물대지 말고 있어.”

    바닥에서 일어나려 했다. 선배가 나를 붙잡았다. 그러면서 한 손을 뻗어 시계를 꺼 버렸다. 사방이 완전한 암흑으로 뒤덮였다. 그는 스르르 몸을 일으키며 나를 자신의 뒤로 보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어둠 너머를 불안하게 노려보았다.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들이쳤다. 이윽고 누군가 창고 안에 들어왔다.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플래시라이트 빛이 이쪽을 비췄다. 오랜만에 보는 밝은 빛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형님?”

    상대가 흠칫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불빛이 흔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한빈 씨?”

    눈이 빛에 익숙해졌다. 한 손에 플래시라이트를, 다른 손에 망치를 든 한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손에 든 흉악한 공구와 어울리지 않게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원래도 컸지만 바닥에서 올려다보니 한층 커 보였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도 발견했다. 머리카락도 옷도 온통 새카만 색이라 발견이 늦었던 것 같다.

    “…….”

    놀라서 풀어졌던 낯이 도로 험악하게 굳었다. 그는 망치를 치켜들었다. 손과 팔목에 힘줄이 불끈 섰다. 나는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튕겨 오르듯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한빈은 멈추지 않았다. 하도 힘이 좋아서 나를 대롱대롱 단 채로도 별 어려움 없이 망치를 휘둘렀다. 이러다간 선배가 다짜고짜 망치에 얻어맞을 판이었다. 그가 조금 늦게 자신에게 매달린 나를 발견하고 주춤했다.

    “그만. 멈춰요!”

    “하지만 감염자가…….”

    “아뇨, 저도 선배도 멀쩡해요. 감염 안 됐어요!”

    “저는 현이 형님이 저 형님한테 먹히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가 무뚝뚝하게 변명했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망치를 보고도 태연하던 선배가 와작 인상을 구겼다.

    “뭐? 씨발. 현이? 누가 네 현이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머리를 굴렸다. 한빈이 셔터를 열어 우리를 구하고 같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선배가 나를 현이라고 불렀다. 그 뒤로는 그의 앞에서 딱히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하도 경황이 없어 통성명도 제대로 못 했다. 오해할 법도 했다.

    “저 정호현이에요.”

    “현이 아니고요?”

    “네. 호현인데요.”

    “이름이 외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저처럼요. 죄송합니다.”

    한빈이 90도로 허리를 숙여 내게 사과했다. 어깨에 각이 잡혀 있었다.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만만치 않은 인상의 두 남자 사이에 낀 나만 죽을 맛이었다.

    “오늘도 창고 정리하러 왔나 봐요.”

    “예.”

    “지금쯤 우리 둘 다 사이좋게 좀비 됐을 테니까 완전히 죽여 놓고 오라던가요? 송창민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한빈은 말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것만으로 답은 충분했다. 그는 저번에도 끼니까지 거르고 창고에 들어갔다. 한때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했을 사람들을 제 손으로 끝장내기 위해서. 그가 어떤 심정으로 컴컴한 창고에 발을 들여놓았을지 짐작되어서 씁쓸했다.

    “살아 계실 줄 몰랐습니다.”

    “싫어요? 죽은 줄 알았던 놈들이 살아 있어서.”

    “아니요.”

    “그럼? 좋아요?”

    여전히 바닥만 보고 있던 한빈의 우람한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잠깐의 침묵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분위기를 풀어 주려고 장난삼아 한 말인데 더 심각해졌다. 밖에선 한빈이 우리를 망치로 때려잡고 있는 줄 알 테니 잠깐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짐짝처럼 쌓인 시체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벽에 붙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경환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나와 선배가 한발 먼저 갇힌 탓에 창고행은 면했다. 이경환을 밀어 넣으러 섣불리 창고 문을 열었다간 좀비가 된 나에게 습격받을지도 모르니까. 누군가를 시켜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나를 처리한 뒤에 일을 진행할 계획이었겠지. 그게 한빈이었고.

    본관에 있는 사람들은 하는 일 없이 물자만 축내는 ‘식충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경환을 살려 놓기 위해 한빈은 그의 몫까지 일을 해야 했다. 잘 그을려 건강한 혈색이 돌던 얼굴이 눈에 띄게 해쓱해져 있었다.

    “저, 이제 가 봐야 합니다. 늦으면 의심 삽니다.”

    그가 망치와 플래시라이트를 챙겨 일어섰다.

    “송창민한테 보고하러 가는 거예요?”

    “두 분 다 여기 있으세요. 무사히 처리했다 할 테니까, 분위기 봐서 먹을 거 갖다 드릴 테니까. 지금 밖에 새로 온 사람들도 있어서 어수선합니다. 잘하면 안 들킬 겁니다.”

    “그거 한빈 씨 몫이잖아요. 이경환 씨랑도 나눠야 하고요. 그걸 우리한테까지 주면 빈 씨는 뭐 먹어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령 없고 말수 적고 우직하고. 한빈이 이제껏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자신을 배척하는 이들 사이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눈에 그려졌다. 화가 났다.

    쿵쿵쿵.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확 돌아보았다. 이윽고 저들끼리 쑥덕대는 소리가 들렸다.

    “세민대 새끼 왜 안 나와? 평소보다 너무 늦는데.”

    “혹시 안에 있는 놈들한테 당한 거 아닙니까?”

    “그럼 저 새끼까지 우리가 잡아야 해? 한 번에 세 마리?”

    한빈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우리를 남겨 두고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보다 내가 빨랐다. 문 옆에 선배가 들고 들어왔던 쇠 파이프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고 문을 벌컥 열었다.

    “어?”

    창고 문은 안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 밖에 있던 이들은 문 뒤에 숨은 나를 곧바로 발견하지 못했다. 그중 한 놈의 멱살을 잡아다 캄캄한 안으로 확 끌어들였다. 익숙한 진녹색 트레이닝복이 보였다.

    선배가 짜기라도 한 것처럼 옆에 있던 놈을 질질 끌어다 바닥에 패대기쳤다. 한빈이 나설 새도 없었다. 플래시라이트 불빛에 비친 우리를 알아본 이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했다.

    “너, 그때 물렸던…….”

    “그래. 물린 놈이다, 왜.”

    “어, 어떻게…… 컥!”

    못 움직이도록 그의 멱살을 잡아 찍어 누른 채 씩 웃었다.

    “좀비치곤 말을 좀 잘하지?”

    “으헉, 억. 흐아악! 저리 가. 저리 가라고!”

    그는 내 아래에서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내가 감염되지 않았다는 걸 알 텐데, 이성을 잃어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무작정 도망가려고만 했다.

    곧 사람들이 소란을 듣고 몰려왔다. 애초에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 두 명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멀쩡히 창고에서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하나같이 대경실색했다.

    “저 새끼 물린 새끼잖아! 뭐야, 어떻게 나왔어. 누가 풀어 줬어!”

    “미친. 다가오지 마!”

    “무기, 빨리 무기 가져와.”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다. 먼발치에서 당장 나를 잡아 죽일 듯 험악하게 노려볼 뿐, 정작 달려드는 이는 없었다. 창고 문 앞에 선 우리와 그들 사이에 공터가 만들어졌다. 내가 무슨 역병신이라도 된 줄 알았다.

    나는 그들을 노려보며 쇠 파이프를 고쳐 쥐었다. 공격에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지능이 없는 좀비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물렸다 하셨지 않습니까?”

    “그때 분명히 물렸다고 하셨는데. 그 말 믿고 팔다리 묶고 재갈 채워서 창고에 넣었는데…….”

    “혹시 선배님이 착각하신 건.”

    우글우글 몰려선 사람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물음이 튀어나왔다.

    “뭐?”

    사방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송창민이었다. 그는 머리에 흰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선배에게 얻어맞은 자리였다. 약 한 알에 위층 탐색 1일이라더니, 저 붕대는 며칠짜리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누구야. 뭐라고 했어. 내가 착각했다고?”

    “하지만.”

    “저 새끼 물린 거 맞는다니까? 내가 봤어. 잇자국 나 있는 것까지 봤다고. 근데 씨발, 어떤 싸가지 없는 새끼가 내 결정에 토를 달아. 어? 하나같이 빠져 가지고, 어딜 선배 말에!”

    그가 히스테릭하게 고함을 질렀다. 아무도 쉬이 나서지 못했다. 다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거친 숨을 씨근덕거리며 나를 노려보다가, 파르르 떨리는 입매를 억지로 올려 웃었다.

    “그래, 그거네. 물리긴 물렸는데 바이러스 늦게 퍼지나 보네. 얕게 물린 새끼들은 한참 있다가 변이하잖아. 지금은 멀쩡한 거 같아 보여도 좀 있으면 열 올라서 죽을걸.”

    “그래도…….”

    “뭐. 내가 틀린 말 했다 이거냐?”

    “…….”

    “지금 여기서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새끼 손 들어 봐. 한 명씩 손 들고 학번이랑 이름 읊어. 손 안 들어? 야!”

    “아주 지랄들 났네.”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던 선배가 픽 웃었다. 불온한 정적을 가르고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진짜 뒈져서 모가지 덜렁거리는 새끼들 볼 땐 아무렇지도 않았으면서, 사지 멀쩡한 정호현은 무서워? 대가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

    송창민이 빠득 이를 갈았다. 핏발 선 눈이 나에게서 선배로, 그리고 한빈에게로 옮겨 갔다.

    “야. 거기 세민대생. 뭐 해? 이리 와.”

    그나마 만만한 대상을 찾았다 싶었는지 그는 대뜸 열변을 토했다.

    “판단 똑바로 해. 저 새끼들 옆에 붙어 있다간 너까지 뒈져. 그럼 그 대학원생은 누가 돌봐 주겠어? 응? 그러니까 좋은 말 할 때 이리 오라고.”

    “…….”

    한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송창민은 더욱 다급해졌다.

    “인마, 이제껏 군기 좀 잡은 거 때문에 서운해서 그러냐? 사내새끼가 속 좁긴. 너도 체대생이니까 알잖아. 이쪽 전공은 원래 군기 빡세게 잡는 거. 너네 학교에서도 그랬을 거 아냐.”

    마침내 한빈이 입을 열었다.

    “우리 학교는 안 그러는데요. 무슨 꼰대도 아니고.”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변했다. 대놓고 면박을 당한 송창민이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무기를 든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우리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낭랑한 목소리였다.

    “뭐예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체격 좋은 체대생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곧 누군가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애였다.

    “어……. 어?”

    그녀는 나를 한 번, 선배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우리와 대치하고 선 이들을 보았다. 뒤이어 다른 사람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배트를 든 과잠 차림의 여학생이었다.

    “…….”

    그녀 또한 얼이 빠져 우리를 보았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녀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하지만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을 겨를 따윈 없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송창민이 악을 썼다.

    “저 새끼들 잡아!”

    나는 두 사람과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내가 눈으로 말했다. 쟤네 나쁜 놈들이야. 그들 또한 눈으로 대답했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먼저 김나혜가 움직였다. 그녀는 발을 들어 바로 앞에 있던 체대 남학생의 가랑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으헉!”

    졸지에 봉변을 당한 남자애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아무리 몸 좋은 체대생이라도 급소를 얻어맞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음으로 오하은이 배트를 휘둘러 자신을 가로막는 놈을 후려갈겼다. 뻐억! 몹시 경쾌한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김나혜와 오하은이 갑자기 왜 자신들을 공격하는지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쪽은 수적으로도 우세하고 체격도 좋으니 여자애 두 명쯤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텐데도, 하도 뜻밖이라 그들이 빠져나가는 걸 미처 막지 못했다.

    그들은 두 진영 사이에 놓인 공터를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한 박자 늦게 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요. 빨리!”

    나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했는지 얼떨떨하게 서 있는 한빈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뒤돌아 달렸다. 굳게 잠겨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김나혜가 무작정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한빈이 내게 플래시라이트를 턱 건넸다. 그리고 김나혜의 뒷덜미를 다급하게 잡아챘다.

    “악!”

    그냥 말리기만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김나혜의 몸이 허공에 대롱대롱 떴다. 그 모습에 아까 한빈의 팔뚝에 애처롭게 매달렸던 내가 겹쳐졌다. 묘한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저, 밑에, 정찰.”

    한빈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그녀를 도로 내려놓았다. 자기도 이렇게 쉽게 들릴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정찰하러 간 사람들 있습니다. 아래로 가면 잡힙니다.”

    우리는 황급히 위로 방향을 틀었다. 바로 뒤에서 송창민을 비롯한 사람들이 쫓아오고, 아래에는 정찰조가 있었다. 갈 곳은 위층뿐이었다. 언제 감염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가장 먼저 올라간 선배가 서슴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4층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재빨리 문을 걸어 잠갔다. 뒤를 따르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를 쫓는 데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고 돌아간 것일까.

    새카만 복도가 다시 우리를 반겼다. 책장 아래에서 처참한 몰골로 끌려 나오던 이경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애써 끔찍한 기억을 지워 버리고 한빈이 건넨 플래시라이트로 앞을 비추었다. 이제 내가 일행의 선두가 되어 길을 열었다. 모두 조심스럽게 내 뒤를 따라 나아갔다.

    “이 라인에 있는 연구실들은 다 안전했어요. 내부도 멀쩡하고.”

    “그럼 일단 여기로 가자.”

    우리는 문 열린 연구실 중 하나에 들어갔다. 안에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했다. 전력 질주로 거칠어진 호흡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김나혜가 한빈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까 저 내려가려는 거 잡아 주셨잖아요.”

    몹시 공손한 태도였다. 저 애, 나랑 선배한테도 저렇게까지 깍듯이 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나혜야?”

    “네, 호현 선배.”

    “일단 다시 만나서 반가워.”

    “저도요.”

    “그리고 말해 줄 게 있는데.”

    “네.”

    “걔 너랑 동갑이야.”

    “네에엑?”

    김나혜가 화들짝 놀라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체대 조교님이나 시간 강사님이신 줄 알았…… 던 게 아니라, 앗.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

    “어, 그럼, 으음. 아, 안녕…… 친구야?”

    “…….”

    “죄송합니다!”

    김나혜는 말을 길게 해 봤자 제 무덤 파는 꼴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한빈은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오하은은 그 옆에서 한빈과 김나혜를 번갈아 보며 경악했다.

    선배는 이러나저러나 아무 관심 없어 보였다. 그가 따분한 기색으로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장난치듯 손끝만 가볍게 건드리더니 손길이 점점 끈적해졌다. 긴 손가락이 손목 안쪽 여린 살을 문지르다 소매 안으로 슬쩍 들어왔다.

    나는 그를 떼어 내려 애를 썼다. 태연한 척 정면을 보면서 아래로는 투닥투닥 손 싸움을 하다, 아예 울분을 담아 힘껏 깍지를 꼈다. 그제야 좀 얌전해졌다. 하지만 이번엔 단단히 얽힌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놔주세요. 빨리요.”

    고개를 돌려 다급하게 속삭였다. 선배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왜.”

    “다른 사람들도 있잖아요.”

    “뭘 또 내외를 해. 네가 먼저 야하게 내 손 주물러 놓고. 나 꼴리라고 그런 거 아니었어?”

    “제발……. 그런 거 아니에요.”

    “있잖아, 현아. 아까 네가 내 거 꽈악 조일 때 뭐 생각났는지 알아?”

    “선배!”

    왜 굳이 손이라는 단어를 두고 대명사를 쓰는 걸까. 오해하기 쉽게. 그 뒤에 이어질 말은 결코 듣고 싶지 않았다. 건조한 무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던 선배가 피식 웃었다.

    “얌전히 있어. 마음 같아선 엉덩이 움켜쥐고 싶은데 손으로 참는 거야.”

    앞에서는 김나혜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열심히 사과하고 있고, 옆에 있는 선배는 엮인 손을 풀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 * *

    우리는 교수 연구실 바닥에 모여 앉았다. 아까 미처 못 했던 인사를 나누고, 영문을 모르는 한빈에게 우리가 중앙 도서관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이라는 걸 설명했다.

    “그때 말했던 것처럼, 나혜랑 나는 학생회관에 갔어. 눈이 하도 많이 와서 꼼짝없이 발이 묶였어. 구조대가 올 때까지 거기서 계속 머무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오하은이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창가에 다가갔다. 책상 뒤쪽으로 난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실내가 캄캄해서 창문이 있는지도 몰랐다. 커튼이 걷혔다. 시각은 마침 밤이었다. 가로등도 건물 불빛도 없는 바깥은 안과 다를 바 없이 어두웠다.

    “얘길 들었어. 학생회관에 같이 있던 사람한테서.”

    김나혜와 한빈은 짜기라도 한 듯 침묵했다.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어둠에 파묻힌 캠퍼스가 보였다. 곳곳에 덜 녹은 눈이 희뿌옇게 뭉쳐서 얼어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다 나와서 그런지, 뺨을 스치는 바깥 공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4층 높이에서 내려다보자 자전거를 타고 헐레벌떡 달려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앙상한 가지를 뻗은 가로수 너머로 무채색 콘크리트 건물들이 보였다. 실험동이었다.

    “저기 봐.”

    오하은이 한 곳을 가리켰다. 실험동 앞 공터에 큰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살짝 눈매를 찌푸리고 창 너머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대형 구급차였다. 옆엔 경찰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듬성듬성 드리운 가로수 가지 사이로 운전석 문이 활짝 열린 게 보였다. 그 주변을 시꺼먼 형체들이 돌아다녔다.

    “둘 중 하나겠지. 경찰이랑 119 대원들이 차 버리고 튀었거나, 다 죽었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 같은 건 안 와.”

    나는 말을 잃고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차디찬 겨울바람에 뺨이 얼어붙으면서도 추운 줄 몰랐다.

    “정부에서 여길 포기했다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오는 결론은 그것뿐이었다. 오하은이 못을 박았다.

    “살고 싶으면 제 발로 나가야 돼. 학교에 처박혀서 버텨 봤자 답 없어. 굶어 죽든 물려 죽든 죽을 거야.”

    “커튼 쳐서 창문 다 가리고 생활했던 이유가요.”

    묵직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느새 한빈이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저기 생존자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데 못 가고 공터에 고립된 것 같았는데. 여기서 인기척 느껴질 때마다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불빛만 보고 무작정 뛰어오는 사람도 있었고.”

    “…….”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인원 더 늘면 식량 부족해진다고, 며칠 동안만 버티면 어차피 다 죽을 테니까 그때까지 커튼 치고 양초 켜고 없는 척하자고…….”

    송창민의 주도하에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창문이란 창문에 죄다 커튼을 쳤다. 머릿수가 늘어날수록 한 사람 앞에 돌아가는 물자는 적어질 테니까.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하여 여기까지 온 이들은 굳게 닫힌 셔터 앞에서 절망했다. 그리고 뒤따라온 감염자들에게 잡아먹혔다. 한빈은 그런 일을 몇 번이나 보고 들었다. 그래서 선배와 나를 마주했을 때 차마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벌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우리를 구했다.

    운이 좋았다. 마침 원래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 죽어서 인원이 비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다쳤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나서야 받아들였다. 혹시라도 부상을 입어서 노동력을 못 써먹는 상태면 안 되니까.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당사자 입으로 듣는 건 또 기분이 달랐다.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 둔 이어폰 줄처럼.

    “저, 형님.”

    한빈이 나를 불렀다. 어울리지 않게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었다.

    “네. 말해요.”

    “경환 형님요. 데리고 갈 수는 없겠습니까? 3층에 두고 온 게 자꾸 마음에 걸려서. 잠깐 내려가서 그 형님만 데리고 나오면…….”

    “…….”

    “말도 안 되는 얘긴 건 아는데. 그냥, 한 번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의 말마따나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지금 여기 모인 다섯 명이서 살길을 찾기도 바쁜데, 거동 못 하는 환자까지 챙겨 가자니. 그것도 우리를 잡으려 눈에 불을 켠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3층까지 돌아가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일말의 여지도 없이 기각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배척받던 와중에 우리가 와서 너무 좋다고 순박하게 웃던 이경환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 결정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왜 절 보세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

    “저, 선배? 선배 의견은 어때요?”

    손님용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선배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네에, 후배님 좆대로 하세요.”

    성의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건 선배 나름대로의 지지 표명이었다. 네가 뭘 하든 따를 테니 좋을 대로 하라는.

    “다른 사람은. 하은아, 나혜야?”

    “선배가 결정하셔야죠?”

    김나혜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왜?”

    “저랑 하은 언니랑 다 선배한테 도움받았잖아요. 그 개새끼한테서 저 구해 줬고, 언니 발목 접질려서 못 움직일 때도 안 버리고 끝까지 챙겨 줬고, 약도 나눠 주셨고요.”

    “그건 당연한 거야. 내가 잘나고 대단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당연한 걸 안 하는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요. 아, 몰라요. 아무튼 일단 이번은 선배 뜻대로 할 거예요. 그렇죠, 언니?”

    기가 막혔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데. 그러나 더 기가 막히는 건 오하은의 반응이었다.

    “호현이 네 맘대로 해. 너 하나 보고 아까 그놈들 대갈빡 갈기고 뛰쳐나왔는데 뭐.”

    무슨 애들이 이렇게 막무가내지. 이래서 이제껏 어떻게 살아남았나 모르겠다. 말문이 막혀서 한빈을 돌아보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투견 같은 생김새와 달리 눈빛은 아기 강아지 같았다.

    “그럼…….”

    여러 쌍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데리고 나가자. 어차피 1층으로 나가려면 3층 거쳐야 하잖아. 이분들 방이 복도 제일 끝이니까, 타이밍 맞춰서 잽싸게 데리고 나오면 돼. 이경환 씨만 챙기고 바로 나오면 안 잡힐 거야.”

    나름대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 상황에 왜 오지랖 부리고 지랄이냐고, 다 같이 죽자는 거냐고 길길이 날뛰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선배는 물론이고 오하은과 김나혜까지 태연자약했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렇지. 여기서 데리러 가지 말자고 하면 정호현이 아니지.”

    이 말, 선배한테도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다. 영 떨떠름했다.

    “감사합니다.”

    한빈이 차마 고개를 못 들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북받치는 감정을 담아 내 손을 힘껏 잡았다. 표현이 서툰 그로서는 이게 최선의 감사 인사일 것이다. 오하은과 김나혜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손아귀가 죄다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공업용 프레스에 손이 끼이면 이런 느낌일까.

    그 와중에 선배만이 잔뜩 험악한 낯으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감히, 씨발, 이때다 싶어서 주무르고 자빠졌어. 안 놔? 취소야. 그 새끼 그냥 뒈지라 그래.”

    * * *

    우리는 왔던 길을 도로 돌아갔다.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으니 최대한 빨리 3층에 가서 이경환을 데려와야 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간 그들이 이경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쓸모가 없어진 사람은 창고에 가둬서 사실상 생매장하는 자들이었으니까. 이제까지는 이경환을 구실 삼아 한빈을 부려 먹어야 했기에 눈감아 줬지만, 한빈이 등을 돌린 이상 살려 둘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방이 조용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 앞에 있는 초는 그 난리 통에도 꺼지지 않고 종이컵 속에서 고요히 타올랐다. 김나혜가 소리 죽여 소곤거렸다.

    “그냥 우릴 포기한 거 아닐까요? 위층에 올라갔다가 다 죽었으려니 하고.”

    “그럴 리가 없어. 쟤네가 얼마나 집요하고 치사한 새끼들인데.”

    오하은이 이를 갈았다.

    “야구부 활동 때문에 운동장 빌려 쓸 때도 줄기차게 텃세 부렸단 말이야. 원래 운동장은 자기들 거라고. 1년 내내 그러더라.”

    “참 나. 걔네 등록금엔 운동장 사용료도 들어가 있대요?”

    “쉿.”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이 재깍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들어갈까요?”

    선배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문을 빤히 응시했다. 나도 덩달아 집중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빈이 문 앞까지 다가갔다. 문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들어 보다가, 간 크게도 노크를 했다. 똑똑똑. 몇 미터만 떨어져도 안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근처에 누가 있다면 바로 알아챌 수 있으리라.

    깜짝 놀란 김나혜가 입을 벙긋거리며 그를 끌어당겼다. 긴장되지도 않는지 한빈은 여전히 무덤덤한 낯이었다.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처음 그가 선배와 나를 데리고 3층에 왔을 때도 저렇게 노크를 세 번 했다. 안에서 곧 마주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그제야 그의 돌발 행동이 이해되었다. 그는 정찰을 다녀온 사람으로 위장해서 안쪽의 동향을 떠보려 했던 것이다.

    잔뜩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문 안쪽은 조용했다. 한빈은 한술 더 떠 손잡이를 소음이 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돌려 보았다. 아무 저항 없이 돌아갔다. 심지어 문조차 잠겨 있지 않았다. 내가 가진 쇠 지렛대나 한빈의 망치를 써서 손잡이를 때려 부술 각오까지 했는데.

    지금이 기회였다. 문을 열고 복도 끝으로 들어가서, 제일 바깥쪽에 있는 방에서 이경환을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지금 들어갈까? 오하은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달려 들어갈 준비를 갖추었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흠칫했다. 문 아래쪽 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스며 나왔다. 층계참에 놓인 것과 다르지 않은 촛불 빛이었다.

    선배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조용히 아래를 가리켰다. 가늘게 새어 나오던 불빛이 파르르 떨렸다. 문틈이 워낙 좁아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문과 창문을 모두 닫아 놓은 밀폐된 공간이라, 불빛이 이렇게 크게 흔들릴 리가 없는데.

    “…….”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이 통했다. 우리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야, 저 새끼들 눈치 깠어.”

    “잡아!”

    난간 너머로 우리를 쫓는 놈들이 보였다. 아예 작정하고 우리를 기다렸는지, 모두가 무기를 챙겨 들고 있었다. 컴컴한 계단에 어지러운 발소리가 울렸다.

    앞뒤 잴 것 없이 위층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낯익은 복도가 나타났다. 플래시라이트로 앞길을 밝히며 달리다가, 복도에 놓인 정수기를 있는 힘껏 밀어 쓰러뜨렸다. 물통이 텅 비어 있어서 생각보다 넘어뜨리기 쉬웠다.

    “흐악!”

    “억!”

    큰 소리가 났다. 여러 명이 정수기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려는 김나혜와 오하은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냥 가. 뛰어!”

    신입은 최소 1주일간 위층을 탐색해야 한다는 게 그들이 세운 웃기지도 않은 룰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아래층에서 꿀 빨면서 시시덕대던 놈들보다는 목숨 걸고 여길 탐험했던 우리가 더 잘 알 터였다.

    “산 사람들끼리 뭐 하는 거야. 이럴 시간에 감염자나 잡아!”

    뒤를 향해 소리쳤다. 곧바로 날 선 고함이 돌아왔다.

    “네가 감염자잖아, 새끼야!”

    내 옆에서 달리던 선배가 빈정거렸다.

    “아직도 그 개소리를 믿어? 대가리는 무게 중심 맞추려고 달고 있는 거지?”

    “야, 방금 뭐라고 했어!”

    송창민이었다. 이쯤 되면 자기 실수를 인정할 법도 한데 권위를 잃기 싫어서 바득바득 우기고 있다니. 저 인간도 어떤 의미에서는 참 대단했다. 우리는 복도에 곳곳에 놓인 물건으로 그들의 접근을 막아 가며 달아났다. 중간쯤 왔을 무렵,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반대편 복도 끝에서 문이 열렸다.

    “저기 있다!”

    무기를 든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어쩐지 인원이 절반 정도밖에 없다 했더니, 나머지는 반대편에 있었다. 소위 말하는 양동 작전이었다. 앞과 뒤가 모두 막혔다.

    다급하게 플래시라이트로 주변을 비췄다. 아무 연구실에나 들어가서 농성해야 하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컴컴한 연구실 문간에서 이상한 각도로 고개를 쭉 빼고 여길 바라보는, 얼굴이 반쯤 팬 사람과.

    뚝. 뚜둑. 그것은 사후 경직으로 뻣뻣하게 굳은 목을 억지로 움직였다. 머리가 고장 난 시계추처럼 멋대로 흔들거렸다. 이윽고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입을 찢어져라 크게 벌려 울부짖었다.

    “캬아악!”

    곧 다른 감염자들이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플래시라이트 불빛 아래 피와 오물이 묻은 그들의 피부가 썩은 생선처럼 번들거렸다.

    “미, 미친.”

    “4층은 거의 정리됐다고 했는데.”

    “‘거의’지 다는 아니잖아!”

    우리를 쫓던 이들 또한 평정을 잃었다. 감염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든 저쪽 사람들이든 무차별하게 공격했다.

    “저것부터 죽여!”

    3층 사람들은 우리를 잡으려 챙겨 온 무기로 급하게 대응했다. 복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까까지 벌이고 있던 추격전 따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우리 쪽으로도 감염자들이 다가왔다. 한빈에겐 망치가, 오하은에겐 야구 배트가, 내겐 쇠 지렛대가 있다지만 선배와 김나혜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들고 있던 쇠 지렛대를 선배에게 던져 주었다.

    “여기요!”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인 선배가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쇠 지렛대를 턱 받았다. 그리고 능숙한 손길로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까맣고 끈적끈적한 피가 뿌려졌다.

    김나혜에게 감염자 하나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다가, 복도에 굴러다니고 있던 바퀴 달린 사무용 의자를 발견하고 뻥 걷어찼다. 일직선으로 굴러간 의자가 상대의 명치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나는 입고 있던 패딩을 벗었다.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는 감염자에게 확 덮어씌워 순간적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그 틈을 타 한빈이 망치로 그를 후려갈겼다.

    나름대로 손발이 맞는 우리와 달리 저쪽은 가관이었다. 감염자의 습격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던 사람이 자신의 옆에 있던 후배를 잡아끌어 방패로 썼다. 감염자는 기다렸다는 듯 후배의 목을 대신 물어뜯었다.

    “아아악!”

    바닥에 피가 흥건히 흘렀다. 기어이 희생자가 나왔다. 분위기가 더욱 긴박해졌다.

    “야, 너. 네가 든 거 줘 봐.”

    “서, 선배님.”

    “빨리 안 내놔?”

    “그럼 저는 어떻게 싸우라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 와중에 송창민은 다른 이의 무기를 억지로 빼앗아 갔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다른 때, 다른 장소였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나빴다. 주변이 캄캄해서 적군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데다 복도가 인원에 비해 좁았다.

    잠시 후 목을 물려 즉사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검붉은 피가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의 상반신 전체를 물들였다. 그가 초점 없는 눈으로 송창민을 돌아보았다.

    “죽어. 죽으라고!”

    송창민이 하키 채를 붕붕 휘둘렀다. 다른 이들이 눈먼 공격에 맞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주변에서 산발적인 비명이 터졌다.

    “윽…….”

    “흐악!”

    살점 으깨고 뼈 부수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 번 때릴 때마다 꺼먼 피가 튀었다. 하지만 목의 신경을 완전히 끊어 놓지 않는 이상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감염자는 원래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로 꾸역꾸역 다가왔다.

    “뭐 하고 있어. 빨리 공격 안 해?”

    송창민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의 후배들은 그를 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무작정 휘두른 하키 채에 얻어맞아 신음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무기를 빼앗겨 빈손이었다.

    “선배님이 제 하키 채 가져가셔서 못 하지 말입니다.”

    “그럼 맨손으로라도 덤비든가.”

    “지금 저보고 죽으라는 겁니까?”

    “이 새끼가 진짜. 지금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그들이 빽빽 소리를 질러 이목을 끌어 준 탓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선배는 한 손에 든 쇠 지렛대를 늘어뜨리고 턱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쓱 훔치며 입을 열었다.

    “멍청한 것들끼리 모여서 참 잘 논다. 리더라고 세운 새끼부터가 저 모양인데, 다른 새끼들 수준도 알 만하네.”

    “닥쳐! 외부인 주제에 무슨 상관이야? 우리 일에 신경 쓰지 마.”

    “그래. 신경 꺼 줄 테니까 계속 그렇게 등신같이 살다가 뒈져. 너네 존나 잘 어울리니까.”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체대생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씨발. 너희는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우리한테 빌붙어 보려고 기어들어 왔던 주제에.”

    “너네한텐 정호현이 없잖아.”

    “…….”

    그들뿐만 아니라 나도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나는 왜?

    선배가 나를 끌어당겨 어깨에 팔을 턱 얹었다. 그가 빙긋 웃었다.

    “너넨 이런 예쁜 거 없지?”

    모두가 말을 잃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정적을 깨고 큰 소리가 들렸다. 하키 채를 빼앗겼던 이가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려 송창민을 힘껏 들이받았다. 그는 속절없이 비틀거리다가 감염자에게 붙잡혔다.

    “야! 이 새끼들아. 빨리 어떻게 해 봐!”

    “큭, 끄륵…….”

    “내 말 안 들려? 안 들리냐고!”

    “캬아아악!”

    “제, 제발.”

    한때 송창민을 선배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해 주었을 사람이 피범벅이 된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주춤주춤 거리를 벌렸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송창민과 같은 단체복을 입은 체대생들조차도 그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으악, 악, 흐아아악! 으, 흐으, 커억…….”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탓에 송창민이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고, 찢어진 기도에 피가 들어차 끄륵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마침내 숨이 끊어지는 것까지 적나라하게 들렸다. 송창민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를 붙들고 실컷 살을 뜯어 먹던 감염자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온통 피와 살점 범벅이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3층에 내려갔다가 여기까지 도망쳐 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떠올랐다. 지금이 타이밍이었다. 오하은과 김나혜, 한빈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옆에 선 선배를 잡아끌고 무작정 뛰었다.

    “야!”

    다른 이들이 한 박자 늦게 알아채고 허겁지겁 쫓아왔다. 복도를 달리는 와중에 그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그런데 왜 잡아야 합니까?”

    “그거야 저놈이 감염…….”

    “아시지 않습니까. 감염자 아닌 거.”

    “몰라. 일단 잡아서 족쳐. 물자 털어 가려는 거면 어쩔 거야!”

    계단을 구르듯 내려가 3층으로 향했다. 잡히기 전에 간신히 문을 닫는 데 성공했다. 가장 나중에 들어온 김나혜가 잽싸게 문을 잠갔다.

    “빨리 이경환 씨 데리고 나가요. 반대쪽으로 올 거예요.”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플래시라이트로 어두컴컴한 회의실 안을 비췄다. 이경환은 널찍한 회의용 테이블을 침대 삼고 한빈의 과잠을 이불 삼아 누워 있었다. 부러진 팔다리에 어설프게 부목을 대고 붕대조차 없어 테이프를 감아 놓았다. 그는 우리가 다가가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못 깨어나신 거예요?”

    “예. 책장에 머리를 잘못 부딪친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만 하루 넘게 의식을 잃고 있던 사람이 멀쩡히 나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지만 씁쓸해졌다. 한빈이 이경환을 둘러업었다. 다시 복도로 나갔을 땐 이미 사람들이 출구 앞을 점거하고 있었다.

    “뭐야. 뭘 털어 가려고 그렇게 발악을 하나 했더니. 고작 저 새끼 데리고 나온 거였어?”

    “곧 죽을 짐 덩어리를 왜?”

    아무리 설명해도 저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다. 왜 한빈이 무모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경환을 데려가자고 했는지, 왜 우리가 그에 동의했는지.

    한빈에게 업힌 이경환을 흘긋 돌아보았다. 안색이 나빴다. 뇌진탕에 골절상까지 입은 환자였다. 업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태가 악화될 터였다.

    “비켜. 꺼져 줄 테니까.”

    상대편을 똑바로 보고 쏘아붙였다. 무작정 치고받고 싸우기 전에 일단 대화를 시도는 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누군가 헛웃음을 지었다.

    “뭐?”

    “새로 온 사람들 심하게 부려 먹고, 규칙은 갈수록 빡빡해지고. 다 먹을 거 점점 떨어져서 그런 거잖아. 외부인들 죽어 나가는 한이 있어도 너희끼리 잘 먹고 잘 살려고. 그 귀하신 식량 안 건드리고, 이 사람만 데리고 나갈 테니까 비키라고.”

    “그걸 믿으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나는 다른 사람 착취해서 얻은 물건엔 관심 없거든. 끝까지 후배 부려 먹다 배신당해서 죽은 누구랑 다르게.”

    누군가를 대놓고 노린 말에 눈길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상대방 무리 중 누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배신자. 시선을 받은 남학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선배의 덤덤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야, 정호현이 너희 같은 줄 알아? 그랬으면 너희들 진작 다 뒈졌어. 열받은 호현이가 국자로 대가리 깡깡 때리고 다녀서.”

    “아니, 선배. 국자 얘긴 왜 하세요…….”

    그가 내 아픈 과거를 끄집어냈다. 기숙사 조리실에서 황급히 무기를 찾으려다 뜬금없이 둥그런 국자를 집었던 일을.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주변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한창 살벌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와중에 얼굴이 빨개진 걸 들켰다면 더 부끄러웠을 테니까.

    한 손으로 배트를 툭툭 치는 시늉을 하며 듣고만 있던 오하은 또한 입을 열었다.

    “됐고, 아무튼 우린 나갈 거야. 너희는 그냥 그렇게 살든가 말든가 해.”

    “나가면 뭐가 달라지는데. 길바닥 돌아다니다 얼어 죽으려고?”

    “그러는 너희는 어쩔 건데. 위층 올라가서 선배들 너희 손으로 죽이고, 그리고? 또 새로 온 사람들 부려 먹으면서 지내게?”

    “…….”

    “적어도 여기 갇혀 죽는 것보단 낫겠지. 너희도 알 거 아냐. 여기 머물러 봤자 가망 없다는 거. 이제까진 그 꼰대가 찍어 눌러서 그냥 있었던 거고.”

    “꼰대라고? 이게 진짜. 말 다 했냐?”

    체대생들이 그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오하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맞는 말 아냐? 그 나이 먹고 서열 잡으면서 왕 노릇 하는 게 꼰대가 아니면 뭔데. 적어도 우리 쪽 리더가 너희 꼰대보단 나아.”

    그녀가 나를 척 가리켰다. 어이가 없었다. 언제부터 내가 리더가 됐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 빼고 비밀 투표라도 했나?

    “애가 좀 싱겁고 물러 터졌긴 하지만, 인성 하나는 아주 칼같이 장착했다고. 착하고 똑똑하고…….”

    오하은이 말을 하다 말고 슬그머니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선배가 미미한 짜증이 담긴 무표정으로 툭 뱉었다.

    “예쁘고.”

    “……예쁘고.”

    그녀가 떨떠름하게 덧붙였다. 선배는 나랑 둘이 있을 때만 예쁘다는 소리를 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정호현 예쁜이 설’을 강요하고 있었다. 키가 18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남자를 두고. 아주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들이 또다시 우리를 막아서기 전에 재빨리 움직였다. 한빈은 이경환을 업고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막 비상구 문 앞에 섰을 무렵,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 나도…… 아니, 저도요.”

    돌아보았다. 진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앳된 생김새의 남학생이었다. 송창민을 떠밀어 감염자에게 잡아먹히게 만든. 폭압적으로 굴며 모두의 불만을 사던 송창민을 몸소 처리했는데도, 그는 다른 이들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눈총을 받고 있었다. 이대로 있어 봤자 배척당할 뿐이니 차라리 우리 쪽에 붙는 걸 택했으리라.

    또다시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는 문 쪽을 가볍게 턱짓했다.

    “올 거면 빨리 와. 시간 없어.”

    내 마음이 바뀔세라 헐레벌떡 따라붙는 발소리를 어깨 너머로 들으며 문을 열었다.

    * * *

    1층에 도착하자 바깥이 보였다. 밖은 새벽이었다. 아직 일출의 붉은 기가 섞이지 않은 검푸른 하늘이 유리문 너머로 펼쳐졌다. 문과 창문을 꼭꼭 닫고 촛불까지 켜 놨던 위층에 있다 로비로 내려오자 추웠다. 실내인데도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희미하게 입김이 새어 나왔다.

    “조금만 기다렸다 나가요. 원래 해 뜨기 직전이 제일 어둡고 춥잖아요.”

    내 말에 다른 사람들이 동의했다. 출발을 앞두고 모두가 짧은 휴식을 취했다. 한빈은 로비에 있던 소파에 이경환을 내려놓았다. 오하은은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잠깐 눈을 붙였다. 체대 남자애는 쭈뼛쭈뼛 눈치만 보고 있었다. 당연히 어색하고 불편할 거다. 당장 얼마 전만 해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사이였으니까. 그에게 말을 걸어 주는 건 김나혜 정도밖엔 없었다.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선배가 옆에 와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바깥을 내다보았다. 여기서 큰길을 따라 쭉 나아가면 정문이었다. 하도 캠퍼스가 넓은 데다 가로수나 건물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곧바로 정문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도, 그리고 그도 이 앞에 출구가 있음을 안다.

    “여기까지 와 본 적 있어요?”

    “아니. 없어.”

    이 문을 나선 뒤부터는 선배도 모르는 영역이었다. 우리 앞에 죽음이 있을지 삶이 있을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는 이파리가 죄다 떨어진 나뭇가지가 새벽빛에 젖어 드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물었다.

    “선배, 있잖아요. 학교 나가서 쭉 내려가면, 저어기 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는 카페요. 기억나요? 이 동네 하도 외진 곳이라 카페 몇 개 없잖아요. 그중 하난데.”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쿡쿡 쑤시듯 아팠다. 그 카페는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곳이었다. 대학가답지 않게 유흥을 즐길 곳이라곤 치킨집과 분식집, 호프집 몇 곳이 전부인 동네에서 거기가 그나마 인테리어가 세련되고 분위기도 괜찮았으니까.

    “거기 딸기 주스 괜찮은 것 같더라고요. 제가 시킨 건 아닌데, 그거 먹은 사람이 맛있다고 했어요.”

    “…….”

    “나중에 가 볼래요? 선배 그런 거 좋아한다면서요.”

    선배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잔뜩 인상을 썼다.

    “누구랑 갔어.”

    “네?”

    “너 단거 안 좋아하잖아. 근데 주스가 맛있는지는 어떻게 알아? 어떤 씹새끼랑 마주 앉아서 달달한 거 처먹었냐고.”

    카페에 가자는 말을 꺼낸 것뿐인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나는 본전도 못 찾고 서둘러 해명했다.

    “우리 과 남자애들이랑 갔는데요. 호프집에서 늦게까지 달리다가 술 깨려고 카페 갔는데, 어떤 애가 자긴 술 마신 뒤에는 꼭 생과일 주스 마셔 줘야 한다고 해서요.”

    “시커먼 사내새끼들이랑? 심지어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

    오해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뉘앙스가 몹시 불건전하게 들렸다.

    “저, 선배?”

    “왜.”

    “삐지셨어요?”

    “응. 너 그 새끼들이랑 한 테이블에 부대끼고 앉았을 거 아냐. 샐샐 눈웃음도 쳤을 거고. 와. 심지어 밤새 술도 처마셨어? 우리 후배님은 왜 아무한테나 예쁘게 굴지? 듣는 영원이 기분 좆같게?”

    “말 꺼낸 호현이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재깍 사과하고 아예 화제를 돌렸다.

    “그러니까, 다음번엔 선배랑 저랑 둘이서만 가요. 그 말 하려고 했어요.”

    “여기서 나가서?”

    “네. 나가서요. 우리 곧 나갈 거잖아요. 아니에요?”

    “응…… 그렇지.”

    “딸기 주스도 시키고 케이크도 시켜요. 선배 농구 하는 거 좋아한다고 했죠? 그것도 해요. 농구 코트랑 공만 있으면 되는데 뭐가 어렵겠어요. 그리고 뭐 있더라, 맞다. 밤새 영화 보는 것도…….”

    선배는 말이 없었다. 분노도 긴장도 담겨 있지 않은 담백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 살짝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나도 웃으며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약속.”

    마침내 얼어붙은 밤을 지나 해가 떠올랐다. 하늘이 귀퉁이부터 점차 붉게 물들었다. 우리는 문 앞에 모였다. 최대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무기를 챙겼다. 나도 입고 있던 패딩 지퍼를 끝까지 쭉 올렸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살을 에는 칼바람이 몰아칠 테니까.

    “다들 아시죠? 정문까지 가는 길엔 다른 건물 없는 거. 제 기억으론 기껏해야 주차 관리 사무소밖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제 말은.”

    수면 부족과 피로 때문에 목이 잠겼다. 헛기침을 몇 번 해서 목을 가다듬고 애써 크고 또렷하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 거예요.”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을 입 밖으로 낸 것뿐인데,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 학교 캠퍼스는 길쭉한 와인 병처럼 생겼다. 코르크 마개가 정문이고, 병 바닥이 기숙사였다. 지금 우리가 있는 본관은, 글쎄. 와인이 찰랑찰랑 차 있는 표면 부분쯤 될까.

    정문까지 가는 길은 일자로 쭉 뻗은 도로였다. 중간에 벤치도 없고 정류장도 없는, 울창한 산속에 난 도로. 거기서 좀비를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탁 트인 도로를 질주해서 따돌리거나, 아예 울타리를 타 넘어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을 거다. 뭐가 있을지 모르는, 눈 쌓인 가파른 산속으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안 가셔도 돼요. 위층에 다시 돌아가도 되고, 근처에 다른 건물 찾아 들어가도 되고. 어떻게 하시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하은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갈 거야. 말했잖아. 여기 남아 있어 봤자 죽는다니까. 어떻게 죽든 죽을 거면, 차라리 시도라도 해 보고 죽을래.”

    김나혜도 거들었다.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꼭 살아서 나가야겠어요. 정부에서 구조를 포기해? 참 나, 어이가 없어서. 이러라고 국민들이 세금 꼬박꼬박 내는 줄 아나. 꼭 눈에 불 켜고 나가서, 나중에 나라에서 구조 시도했는데 이미 다 죽어서 어쩔 수 없었더라, 이딴 헛소리 못 하게 할 거예요.”

    “저도……. 여기 더 있긴 싫어서. 어차피 저 그 사람들이랑 계속 있으면 따돌림당해서 죽을 거예요.”

    체대 남자애가 소심하게 자기 의사를 밝히고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선배를 돌아보았다. 그는 손에 든 쇠 지렛대를 무료하게 휘적휘적 돌리며 대꾸했다.

    “뭐 해. 안 가고.”

    입장을 바꾼 사람은 끝내 아무도 없었다.

    * * *

    가시덩굴처럼 따가운 바람이 뺨을 할퀴었다. 다행히 이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정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닐 것이다. 수 명이, 혹은 수십 명이 실제로 그 생각을 행동에 옮겼을 것이다. 그중 한 명만 성공했어도 바깥세상에 캠퍼스에 생존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태껏 이렇게 잠잠하다는 건 그들이 모두 실패했거나, 아니면…….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듯 오하은이 큰 동작으로 앞을 가리켰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이 앞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몰라. 저기 커다란 구급차 끌고 온 사람들도 다 죽었어. 바이러스 유출 사고 때문에 다들 특수 장비 착용하고 왔을 텐데.”

    “그런데요. 우리 차 타고 가면 안 돼요? 저 구급차요. 저기까지만 가면 되잖아요. 문 열려 있으니까 차 키도 필요 없고.”

    김나혜가 느닷없이 제안했다. 순간 지금 농담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초롱초롱 빛나는 그녀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그 모습에 70주년 기념관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자고 당당하게 주장하던 과거의 내가 겹쳐졌다.

    “나혜야?”

    “네, 호현 선배?”

    “네 말대로 어떻게든 차까지 간다 치자. 키가 없는데 시동은 어떻게 걸게?”

    “요즘 차들은 버튼만 누르면 되는 거 아니에요? 키 꽂고 시동 걸어야 하는 건 옛날식이잖아요.”

    “…….”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발언이었다.

    “그걸 제외하고도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

    “뭔데요?”

    “시동이 걸릴까? 이 날씨에 며칠 동안 길바닥에 서 있었는데?”

    “왜 안 걸려요? 추우면 차도 얼어요?”

    티 없이 맑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선배는 대놓고 날 비웃기라도 했지만, 나는 저 천진한 얼굴에 대고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음, 나혜야.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고 들어 줘.”

    “네, 선배.”

    “너 운전 안 해 봤지?”

    “저 면허도 없어요! 이번 방학에 따려고 했는데.”

    김나혜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나는 말없이 웃었다.

    이 난리 통에 혼자 잽싸게 상황 파악을 하고 바깥에 나와 차에 올라타서는, 꾸역꾸역 몰려드는 좀비들을 죄다 따돌리고 밖으로 나갈 만한 재간을 가진 사람은 지금쯤 일찌감치 탈출하고 없을 것이다.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쳤다는 교수와 임원들처럼. 그게 아니면 차를 탈 겨를조차 없이 죽어 버렸겠지. 그러니까 주인 잃은 차들이 캠퍼스 곳곳에 방치돼 있는 것이리라.

    “차는 포기하자.”

    내 말에 오하은이 잽싸게 거들었다.

    “그래. 학교가 이 지경이 됐는데 제대로 된 차가 어디 있겠어. 있으면 진작 다른 사람이 타고 갔지.”

    김나혜는 아쉬운 듯 뒤를 흘긋거렸지만 곧장 납득했다. 나도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끝까지 두 발로 죽어라 뛰어야 할 운명인 것 같다. 그때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시체들만이 돌아다니는 캠퍼스에서 들릴 리가 없는 엔진 배기음이었다.

    “뭐야?”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돌아보았다. 저 멀리 있는 언덕에서부터 큼직한 SUV 한 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차 뒤로 수십 마리의 감염자가 따라붙었다. 선배가 심드렁하게 말을 얹었다.

    “저기 있네. 제대로 된 차.”

    자동차는 빙판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보는 내가 다 불안했다. 눈에 바퀴가 푹푹 빠져 자꾸만 헛돌았다. 그러다 결국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제때 줄이지 못해 벤치를 들이받았다. 콰앙! 범퍼가 화려하게 일그러졌다. 그 틈을 타 감염자들이 꾸역꾸역 거리를 좁혔다.

    “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나혜와 체대 남학생이 팔을 흔들며 존재를 어필했다. 그러나 차는 우리를 무시하고 본관 앞을 쌩 지나쳐 갔다. 우리는 닭 쫓던 개 꼴이 되어 멍하게 차 뒤꽁무니만 보았다.

    차를 따라 허우적대며 달리던 감염자들이 이윽고 우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금속으로 된 자동차보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등골이 싸하게 식었다.

    “도망가요. 빨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우리는 허겁지겁 몸을 돌렸다. 한빈이 등에 업은 이경환을 추스르고 달릴 준비를 했다.

    끼이익! 멈출 줄 모르고 달려가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본관 앞에서 요란하게 드리프트를 하더니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기껏 좀비들의 주의를 우리에게 돌리는 데 성공했으면서, 왜 다시 오는 거지?

    차는 우리 앞에 급히 멈춰 섰다. 뒤로 훌쩍 물러섰다. 하도 운전이 거칠어서 자칫하면 앞바퀴에 발이 깔릴 뻔했다. 짙게 선팅된 운전석 창문이 열렸다.

    “경환이?”

    안에서 누군가 외쳤다.

    “이경환. 경환이 아니냐?”

    곳곳에 먼지와 핏자국이 묻고 잔뜩 구겨진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이 상황에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경환을 찾을 만한 상대라면.

    “지도 교수님이십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설명했다.

    “이경환 씨 지금 아픕니다.”

    교수는 사이드미러와 백미러를 살폈다. 좀비들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갈등하는 모양이었다. 이경환을, 정확히는 이경환을 데리고 있는 우리를 모른 체할지 말지에 대해서. 교육자에게는 학생들을 바르게 지도할 의무가 있다지만 그건 평화로울 때 얘기였다. 지금은 차로 우리를 치어 좀비들에게 바치고 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철컥. 결국 문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교수가 우리를 향해 턱짓했다.

    “학생들, 빨리 타요. 잡히기 전에.”

    감사 인사를 할 틈도 없었다. 재빨리 SUV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뒷좌석에 이경환을 최대한 반듯하게 눕히고, 남은 자리에 한 사람씩 탔다. 여러 명이 너끈히 탈 수 있을 만큼 큰 차라서 다행이었다. 모두가 무사히 타고 선배와 내가 남았다. 차 안쪽으로 선배를 떠밀었다.

    “선배 먼저 타세요.”

    “또 남 챙긴다고 지랄하지? 너 살 궁리나 해.”

    “그런 거 아니에요. 먼저 타서 제 손 좀 잡아 주세요. 문턱이 높아서 타다 미끄러질까 봐 그래요.”

    “…….”

    “어서요.”

    선배가 나를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또 폭언이 날아올까 싶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는 곧 내 말에 따랐다. 등 뒤로 섬뜩한 감각이 스쳤다. 어느새 감염자들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게 달려드는 놈을 반사적으로 걷어찼다. 자칫하면 발목을 잡힐 뻔했다. 이러다간 차 안까지 들이닥칠 판이었다.

    “정호현!”

    선배가 나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고 팔을 뻗었다. 손을 잡기 직전에 손끝이 엇갈렸다. 문이 활짝 열린 채 차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무사히 탈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잡아.”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나는 차를 따라 달렸다. 발을 힘껏 굴러 문턱에 간신히 몸을 걸쳤다.

    “윽!”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치던 손이 맞물렸다. 선배가 나를 잡아 확 끌어당겼다. 팔이 뽑히는 줄 알았다. 나는 그의 품에 고꾸라지다시피 쓰러졌다. 중심을 잡기가 무섭게 오하은의 고함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문이 안 닫혀!”

    고개를 들었다. 뒷좌석 문 사이에 수많은 팔다리들이 끼어 있는 게 보였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학생들이 운전석의 교수를 향해 외쳤다.

    “교수님, 밟아요!”

    “이러다 차 안에 들어오겠어요!”

    교수가 엑셀을 힘껏 밟았다. 하지만 차는 빠르게 튀어 나가기는커녕 여전히 미적거렸다. 속도가 조금씩 붙긴 했지만 지리멸렬한 수준이었다. 반쯤 떨어진 범퍼가 삐걱대며 보도블록을 긁었다.

    “아까 부딪혀서 어디 고장 난 것 같은데…….”

    좌석에서 몸을 일으킨 한빈이 바깥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퍽! 퍽! 몇 마리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구부정하게 몸을 숙인 자세로는 한계가 있었다.

    “잠깐만요!”

    품 안을 뒤졌다. 70주년 기념관에서부터 조명 용도로 요긴하게 쓰던 LED 시계가 손에 잡혔다. 전원을 켜고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이 기능을 쓸 일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도 작동법을 외워 두길 잘했다.

    삑! 삐비빅! 삐비비빅! 시계에서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가 났다. 차를 따라오던 것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가 든 시계에 쏠렸다. 알람 기능이 켜진 시계 액정이 요란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팔을 뒤로 한껏 젖혀 시계를 차 밖으로 최대한 멀리 던졌다. 시계는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아가 수풀에 떨어졌다. 그러고도 여전히 시끄럽게 울었다.

    “끄으…….”

    그들이 시계를 따라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곧 저것이 먹이가 아니란 걸 알아채고 다시 우리를 쫓아올 테지만, 일단 몇 초는 시간을 벌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드르륵.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잠금이 제대로 걸리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

    차는 본관을 벗어나 달렸다.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좀 더 나은 속도로 본관 앞 널찍한 잔디 광장을 끼고 돌았다. 가로수들 너머로 작게 보이던 실험동 건물이 점점 가까워졌다.

    “경환이는 어쩌다 저렇게…….”

    교수는 말하던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넋을 잃은 눈이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실험동을 지나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감염자가 득실거렸다. 이제껏 본 것 중에 제일 수가 많았다. 중앙 도서관 열람실의 비좁은 게이트를 통해 밀려 나오던 것들을 연상시켰다.

    그들은 공터를 하릴없이 배회했다. 내장과 잇몸을 드러내고 팔다리를 덜렁이면서. 빙판에 미끄러져 저들끼리 뒤엉켜 넘어지기도 했다. 새하얀 눈 위에 거무죽죽한 오물이 묻었다. 각자 옷차림도 소속도 다양했다. 구조 요원, 경찰관, 교직원, 학생들. 혹한의 날씨 탓에 부패가 느렸다. 시퍼렇게 얼어 버린 살갗에서 썩은 피와 진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으, 헉…….”

    교수가 패닉에 빠져 평정을 잃었다. 그가 잡고 있던 핸들이 휙 꺾였다. 그렇지 않아도 너덜너덜하던 앞 범퍼가 울타리에 충돌했다.

    “으악!”

    “꺅!”

    다양한 비명과 신음이 차 안을 메웠다. 몸이 확 쏠렸다. 체대 남자애와 한빈이 양쪽에서 급하게 이경환을 받쳤다. 김나혜와 오하은은 이마를 거하게 부딪혔다. 중심을 못 잡고 휘청대는 나를 선배가 단단히 붙들었다. 그가 작게 혀를 찼다.

    “야, 후배님. 네가 대신 핸들 잡아.”

    “네? 교수님은요?”

    “내가 문 열고 길에다 버릴게.”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너 운전 잘하잖아. 자전거 잘 타던데? 내가 만질 때도…….”

    “악!”

    절로 비명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데, 제정신인가? 나는 황급히 운전석으로 몸을 내밀었다.

    “교수님!”

    교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핸들을 다잡았다. 그제야 차가 제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세요.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무사히 나가셔야죠!”

    “여, 옆에. 옆 좀 봐 줘요. 조수석.”

    핸들에서 손을 뗄 수 없는 교수와 뒤쪽에 앉은 다른 이들 대신, 조수석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내가 대표로 앞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잃었다.

    “실례지만, 교수님.”

    조수석에는 웬 커다란 박스가 있었다. 투박한 디자인의 플라스틱 박스였다. 안에는 익숙한 초록색 병들이 가득했다.

    “아무리 봐도 소주 박스 같은데요.”

    “맞아요.”

    “대체 어디서 구하셨어요?”

    “우리 랩실 옆 휴게실에 있던데?”

    “…….”

    한두 병도 아니고 궤짝으로? 새삼 숙연해졌다. 나는 박스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헝겊이 병마다 끼워져 있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났다.

    “혹시 이거…….”

    “내가 학생 운동 때 화염병 하난 잘 만들었거든. 일단 랩실에서 메탄올을 좀 구했는데 양이 영 모자라더라고. 이거 만드느라 교수 회관 가서 차 안에 든 휘발유까지 꺼내 썼어요. 여기가 이 꼴이 난 줄도 모르고.”

    그가 굳은 표정을 풀고 멋쩍게 웃었다. 움츠러들어 있던 어깨가 조금 펴졌다. 다른 교수들이 저들끼리 연락을 돌려 일찌감치 내뺀 반면, 이분은 제때 도망가지도 못하고 여기저기서 재료를 찾아 화염병을 제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참 공대 교수님다웠다.

    우글우글 모인 감염자들이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차에서 내려 울타리를 타 넘고 풀밭을 헤치며 나아간다면 모를까, 차를 타고 가면 저 앞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라이터 있어요?”

    “네.”

    재깍 대답하고 바지 주머니 깊숙이 넣어 둔 라이터를 꺼냈다. 70주년 기념관에서 선배와 담배를 나눠 피운 이후로는 쓸 일이 없어 묵혀 두고만 있던 것이었다.

    “학생들, 내가 창문 열 테니까…….”

    교수는 정문을 향해 곧게 차를 몰았다. SUV의 우렁찬 소음에 좀비들이 하나둘 이곳을 쳐다보았다. 그가 비장한 어조로 지시했다.

    “불붙여서 던져요.”

    손을 뻗어 병 하나를 잡았다. 안에 든 액체가 출렁였다.

    “모래랑 설탕 섞어 넣었으니까 조심해요.”

    “모래랑 설탕요?”

    화염병에 왜 그런 걸 넣지? 불만 붙으면 되는 거 아닌가?

    “요즘 애들은 모르겠구나. 던져 보면 알아.”

    짙게 선팅을 한 창을 통해 좀비들이 접근하는 게 보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한 손으로 병을 쥐고 다른 손으로 라이터를 켰다. 길 상태가 나빠서 차가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불을 붙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약간 헛손질을 한 끝에 병 입구에 걸친 천에 불꽃이 일었다. 한 번 불이 붙자 무섭게 타올랐다. 시간을 끌었다간 병에 묻은 기름을 타고 내 손까지 번질 기세였다.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다. 교수가 언제든 다시 창문을 닫을 수 있도록 버튼 위에 손을 올려 둔 채 외쳤다.

    “던져. 지금!”

    이를 악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나만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차는 쉴 새 없이 덜컹거렸다. 병을 놓치지 않도록,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단단히 쥐었다. 병이 허공을 갈랐다. 차 안이라 팔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어 멀리 던지지는 못했다. 병은 우리를 보고 몰려드는 것들의 발치에 떨어졌다.

    병이 깨져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그 자리에서부터 불꽃이 화르르 타올랐다. 진득하게 녹아 흐르는 설탕이 기름과 뒤섞이면서 불길이 더욱 크게 번졌다. 그들은 제 다리에 불이 붙는 것도 모르고 소리에 이끌려 우두커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생기를 잃은 흐리멍덩한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시체들이 어슬렁거리는 무채색의 풍경 가운데 새빨갛게 피어나는 화염이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지금 처한 상황도 잊고 무심코 감탄했다.

    “와.”

    교수가 멋쩍게 고개를 으쓱했다.

    “여기다 시너까지 좀 섞으면 끝내주는데. 그건 못 구했지 뭐야.”

    그러나 생각보다 효과는 크지 않았다.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었던 건 몇 명뿐이었다. 나머지 수십, 수백 명이 불에 타는 이들을 밟고 타 넘어 다가왔다.

    “더 세게 던져! 어깨 제대로 써서. 바닥이 아니라 저 새끼들 맞춰야 해.”

    좌석 등받이를 짚고 몸을 내민 오하은이 충고했다.

    “좁아서 각도가 안 나와. 잘못해서 병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차 안에 불붙을 것 같아.”

    “비켜 봐.”

    오하은이 다가왔다. 냉큼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이런 일엔 야구부만 한 인재가 없었다. 내가 다음 병에 불을 붙이는 동안 그녀는 휘휘 팔을 돌려 어깨를 풀었다.

    “스트라이크나 처먹어라!”

    세차게 날아간 병이 입을 벌리고 울부짖는 남자의 뺨에 정확히 꽂혔다. 턱과 목덜미, 가슴팍을 타고 용암처럼 불이 번졌다.

    바짝 말라 부패한 살점이 타들어 갔다. 그것이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절규했다. 열린 차창 너머로 누린내가 진동했다. 몸이 크게 흔들렸다. 뒷좌석 쪽을 보았다. 차체에 누군가 들러붙어 있었다. 고름이 낀 눈알이 창 너머로 희번덕거리며 우리를 보았다.

    “저리 가!”

    김나혜가 주먹으로 유리를 쿵쿵 내려쳤다. 하지만 그런다고 떨어져 나갈 리가 없었다. 보다 못한 한빈이 그녀 대신 창을 후려갈겼다. 차 전체가 요동쳤다. 유리가 통째로 박살 나는 줄 알았다.

    “캬아아악!”

    충격에 순간 움찔했던 감염자가 더욱 발악하며 달려들었다. 창에 얼굴을 마구 문지르고 양손으로 긁어 댔다. 유리 위에 시꺼먼 핏자국이 남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백미러로 뒤를 살피던 교수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제자리에 멈췄던 차는 이윽고 뒤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진하여 뒷바퀴로 그것을 깔아뭉개려는 모양이었다. 퍼뜩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의 기억이었다.

    “안 돼요! 바퀴에 저것들 끼이면 앞으로 못 가요.”

    “그러면 어떡해?”

    “전진 기어 넣어요. 앞으로 빠져요!”

    “…….”

    “빨리요!”

    교수는 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갈등하다 결국 기어를 바꿨다. 차는 감염자를 단 채로 느리게 나아갔다.

    “다른 병!”

    “여기.”

    오하은이 조수석 너머로 고개를 빼고 화염병을 던졌다. 목을 긁는 괴성과 함께 끈질기게 붙어 있던 것이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교수가 잽싸게 버튼을 눌러 창문을 닫았다.

    “어디로 갈까? 정문으로?”

    “네, 정문으로요. 멈추지 말고 가세요.”

    긴장을 풀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좀비들은 지치지도 않고 꾸역꾸역 따라왔다. 우리의 속도가 저들보다 빨라서 간신히 따돌리고 있을 뿐, 차가 어디 걸리거나 멈추기라도 하면 곧장 따라잡힐 터였다.

    “다 왔어. 진짜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심장이 터질 듯 크게 뛰었다. 누군가는 손을 맞잡고 중얼중얼 기도를 하고, 누군가는 치미는 초조함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실험동이 가까워질수록 보이는 감염자의 수가 늘어났다. 우리는 끝없이 몰려드는 이들을 아슬아슬하게 뿌리치고 정문을 향했다.

    실험동 입구의 풍경이 보였다. 앞에 출입 금지 울타리가 놓여 있고, 문에도 노란 테이프가 칭칭 둘러쳐져 있었다. 감염자들이 돌아다니다 몸으로 넘어뜨렸는지 울타리는 절반 이상이 쓰러져 마구잡이로 바닥에 뒹굴었다. 운전석 문이 열린 채 방치된 구급차, 망가진 폴리스 라인.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저기가 사고 발생한 곳인가 봐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옆을 돌아보았다.

    “선배?”

    선배는 고개를 돌려 나와 같은 풍경을 보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옆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동공이 활짝 열린 눈으로 한곳을 주시하다가, 그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저기서.”

    “왜 그러세요?”

    “저기서 바이러스가 새어 나갔다고? 누가…… 조절 장치를 잘못 건드려서?”

    “선배.”

    “씨발, 그거였어? 그것 때문에 내가, 내가 이제껏.”

    “…….”

    “벌을 받은 거라고? 내가 잘못해서…….”

    “기영원 선배님!”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차게 식은 그의 손을 꽉 붙잡고 힘주어 이름을 불렀다. 그가 나를 느리게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검은 속눈썹 또한 불안하게 팔랑였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세요. 저한테 집중해요.”

    그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입 속으로 혼자 뭔가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손끝을 감싸 쥐었다.

    “제가 누구예요? 알아보겠어요?”

    선배는 한동안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새카만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이윽고 벌어진 입술 새로 나지막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정호현. 예쁘고 좆같은 우리 현이.”

    “아주 멀쩡하시네요.”

    나는 착잡하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선배가 무사하니 다행이었다.

    차는 감염자들 틈을 요리조리 헤치며 실험동을 지났다. 캠퍼스 입구 쪽에 있는 주차장도, 안내 사무소도 지났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정말로 조금만 더 가면.

    어느덧 쭉 뻗은 길 저편에서 정문이 작게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익히 알던, 큼직한 대리석 기둥에 학교 로고를 새겨 놓은 모습이 아니었다.

    높다란 금속 벽이 정문이 있던 곳을 빙 두르고 있었다. 출입이 통제된 군사 구역에나 쓸 법한 가벽이었다. 문이나 통로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틀어막아 놨다.

    그 앞에 시커먼 형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사지를 질질 끌며 벽 부근을 휘청휘청 돌아다녔다. 아직 거리가 있어서 정확히는 안 보이지만, 산 사람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차 안에 죽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모두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멀거니 앞을 주시했다.

    “저게…… 대체 뭐야…….”

    한참의 침묵 끝에, 누군가 목이 졸린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이러스 유출 사태 발생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이들이 몰살당했다. 추가 인력을 투입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랬더라도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고작 경찰관과 구조대원 몇 명이 목을 자르거나 불에 태우기 전까지 죽지 않는 괴물 수백, 수천 마리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와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이 뚝 끊겼다.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무력화되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학교를 고립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있는지 없는지도 불확실한 생존자를 찾아내 구하기엔 너무도 큰 희생이 따랐다. 어떤 생지옥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곳에 무작정 구조대를 꾸역꾸역 밀어 넣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제야 명확해졌다. 축사에 전염병이 돌면 병에 걸리지 않은 가축들까지도 집단 폐사시켜 버리듯이, 정부는 캠퍼스에 있던 사람들을 감염 여부와 관계없이 통째로 폐사 처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처참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시시각각 스치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모른 척하고 희망을 좇았다. 그러나 이 순간을 기점으로 그 희망마저 산산조각 나 흩뿌려졌다.

    핸들을 잡은 교수의 손에 점차 힘이 빠졌다. 그러지 않아도 느리던 차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 못 나가?”

    “말도 안 돼.”

    “여기서 그냥 이대로 죽는 수밖에 없다고?”

    “차라리 본관에 계속 있는 게 나았을지도…….”

    절망은 전염성이 강했다. 본관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투지를 불태우던 사람들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나까지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나는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짝! 넋을 놓고 있던 이들이 흠칫 놀랐다.

    “나갈 수 있어요. 나가요.”

    그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좌초되어 가라앉는 배에 탄 조난자들 같은 눈으로.

    “다들 왜 그러고 있어요. 이대로 죽을 거예요? 죽더라도 끝까지 발악해 보다가 죽겠다면서요.”

    입술만 깨물던 오하은이 날카롭게 내 말을 받아쳤다.

    “그래. 정호현, 격려해 주는 건 고마워. 고마운데, 이 상황에서까지 그래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와. 불가능하단 말이야.”

    “아직 저기까진 가지도 않았어. 멀리서 언뜻 본 게 다야. 그런데 벌써부터 포기해?”

    “그럼 뭘 어쩌라고!”

    “하은아, 너도 알잖아. 이제껏 안 될 것 같다고 쉽게 포기했으면 우린 진작 죽었어. 중도에서도, 본관에서도.”

    나는 딱딱하게 굳은 입매를 올려 씩 웃었다. 산산이 부서진, 그렇기에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희망의 조각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안 해 보면 모르는 거잖아.”

    “안 해 보면 모른다…….”

    시선을 내리깔고 내 말을 듣던 선배가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눈매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 전에도 그렇게 말했어. 우리 후배님은 참 한결같은 새끼야.”

    저건 칭찬일까, 욕일까. 아니, 이젠 포기했다. 생각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맞아. 해 봐야지. 호현이가 하자는데 해야지.”

    그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모두가 입을 다물고 우리 둘을 주시하고 있었다.

    “못 나간다고? 이대로 죽는 수밖에 없다고? 궁상도 정도껏 해야지. 씨발, 그래. 너넨 그냥 죽는 게 낫겠다. 등신 같은 소리 해서 기분 좆창 내지 말고.”

    적나라한 폭언이 퍼부어졌다. 그는 친절하게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아, 뒈질 거면 나가서 저 구석에 대가리 박고 뒈져. 알았지? 시체랑 한데 부대끼는 거 좆같으니까.”

    위태로운 침묵 끝에 입을 연 것은 한빈이었다.

    “저는 가족들이 한참 멀리 있습니다. 여긴 우리 학교도 아니라 아는 사람도 없고요. 여기 갇혀서 계속 살아 있어 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사투리 억양이 섞인 그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그는 자신과 체대 남자애에게 기대어 누운 이경환을 가리켰다.

    “이 형님도 빨리 병원 안 데려가면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점점 가까워지는 정문과 뒤에서 차를 노리는 좀비들을 번갈아 응시하던 교수가 불쑥 물었다.

    “너희가 지금 몇 살이지? 스물둘? 스물셋? 많아 봤자 여섯, 일곱쯤 됐으려나. 경환이가 올해 서른이고.”

    그가 쓰게 웃었다. 연륜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이렇게 죽기는 아까운 나이야. 너무 아까워…….”

    그는 갑자기 엑셀을 힘껏 밟았다. 자동차가 점차 가속했다. 뒤 유리를 긁고 두드리던 것들이 멀어졌다.

    “학생들, 손잡이 꽉 잡아요. 안전벨트도 매고. 최대한 뒤쪽에 붙어 있어.”

    최고 속도로 달려 봤자 앞에는 커다란 벽이 있을 뿐이었다. 사방이 감염자들로 꽉 막혀서 이제 와 방향을 트는 건 불가능했다. 정문을 통과하는 길은 산속에 난 일자 도로라 다른 갈림길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 왜.

    “……아직 할부 한참 남았는데.”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기도 전에 벽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우리가 탄 차는 뒤꽁무니에 감염자들을 덕지덕지 단 채로 돌진했다. 벽 앞에 있던 것들을 죄다 깔아뭉개고 벽을 들이받았다. 콰앙! 다급하게 문 옆 손잡이를 움켜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충격이 닥쳤다. 한순간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

    차체가 앞뒤로 긴 대형 SUV인지라 뒤쪽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다. 나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중심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운전석부터 살폈다. 터져 나온 에어백에 가려 교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힘없이 고꾸라진 채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교, 수님……. 헉, 흐윽. 교수님!”

    그의 어깨를 잡으려다 흠칫했다. 조수석에 놓여 있던 박스 속의 소주병들이 죄다 깨져 있었다. 좌석 시트와 바닥이 흘러나온 기름으로 축축했다. 하얗게 금이 간 유리창 너머로 일그러져 틈이 벌어진 가벽과…… 불이 붙은 보닛이 보였다.

    선배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뜻이 통했다. 벽과 차 사이에 짓이겨지고 바퀴에 깔린 감염자들이 우리를 재촉하듯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차체가 들썩였다. 지금이라면 저들에게 둘러싸이지 않고 나갈 수 있었다. 아니, 반드시 나가야 했다.

    “나가자. 이대로 있으면 위험해!”

    “교수님은요?”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일이 설명해 주고 있을 틈이 없었다. 문을 열어젖혔다. 선배의 손을 잡고 무작정 뛰어나갔다. 발에 누군가의 썩어 문드러진 몸이 물컹 밟혔다. 비틀거리는 나를 선배가 받쳐 주었다.

    내가 열어 둔 문을 통해 김나혜와 오하은이 내렸다. 체대 남학생도 재빨리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나 아직 못 나온 사람이 있었다.

    “한빈 씨? ……윽!”

    차가 크게 흔들렸다. 아래에 깔려 있던 감염자 중 하나가 내 발목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선배가 가차 없이 그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뻑!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한빈 씨. 뭐 해요. 빨리 나오세요!”

    “아직 경환 형님이.”

    이경환을 같이 받치고 있던 남자애가 제 몸만 쏙 내뺀 탓에, 한빈은 홀로 차 안에서 용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사람을 좁은 문을 통해 무사히 데리고 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더 지체하면 안 돼요. 그냥 나와요.”

    찌그러진 보닛에 붙은 불이 본격적으로 타올랐다. 저게 흥건히 고인 기름에 닿는 순간엔……. 상상하기도 싫었다. 나는 차 안으로 상체를 들이밀고 한빈의 탄탄한 팔뚝을 잡아챘다.

    “빈아. 한빈!”

    신경질적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가 멍하니 나를 보았다.

    “나라고 이경환 씨 구하고 싶지 않은 거 아니야. 다른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데려갔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안 돼. 너까지 잃을 수는 없어.”

    한빈은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보았다. 그의 눈 속에서 절박한 갈등이 휘몰아쳤다. 그가 느낄 참담함을 나 또한 이해했다. 왜 모르겠는가. 한빈이 이제껏 자신을 깎아 먹어 가면서 이경환을 챙겼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데.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의 앞에 고개를 숙였고, 천신만고 끝에 이경환을 본관 밖으로 데리고 왔는데.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위험에 처하는 한이 있더라도 불붙은 차에 그를 놔두고 나오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살겠다고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느니 차라리 정의롭게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내겐 선배가 있었다. 나보다도 더 절박하게 내 생명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이.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 했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리고, 그럴 수 없는 사람은……. 포기해야 했다.

    불이 점점 번지고 있었다. 손을 내밀었다.

    “빈아, 집에 가야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한빈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옆에 누운 이경환은 일부러라도 쳐다보지 않았다. 마음이 지독하게 쓰라렸다.

    “…….”

    결국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내 손을 단단히 잡았다. 마지막으로 한빈과 내가 차에서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도 선배는 그를 향해 날을 세웠다.

    “이 씹새끼가 또 지랄이네? 손 안 떼?”

    우리는 불이 붙은 자동차를 피해 파손된 벽 틈으로 들어갔다. 벌어진 틈새는 고작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후끈후끈한 열기가 지척에서 느껴졌다. 한시가 급했다. 한 명, 그리고 한 명. 하나하나 벽 사이로 빠져나갈 때마다 불길이 점차 커졌다. 꾸물꾸물 기어오는 감염자들을 처리하느라 선배가 일행의 제일 끝에 남았다.

    “정호현, 먼저 나가.”

    그가 나를 바깥쪽으로 떠밀었다. 왠지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선배는 이제껏 나를 지키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때로는 말 좀 들어 처먹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고, 때로는 무작정 힘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맹목적이진 않았다.

    지금 그는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 따윈 망설이지 않고 버릴 것처럼.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정문을 가로막은 벽을 발견했을 때부터일까, 폴리스 라인을 친 실험동 앞을 지났을 때부터일까, 아니면 그 전부터일까.

    끝없이 타오르는 화염이 그의 까만 머리칼에 발갛게 비쳤다. 나는 지시에 따르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같이 가요.”

    또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고, 무능한 게 오지랖만 넓어서 지랄한다고 욕을 들어 먹어도 상관없었다. 선배를 단 한 순간이라도 벽 너머에 혼자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

    그러나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눈동자 속에 도사린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작은 틈새를 비집고 기어이 함께 벽을 넘었다. 눈앞에 직선 도로가 펼쳐졌다. 이제 이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시가지와 버스 정류장이 나올 터였다.

    뒤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집채만 한 불길이 벽 위로 치솟았다. 저 너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발을 놀렸다.

    * * *

    우리는 곧게 난 도로를 따라 걸었다. 길 양옆에 겨울 산의 정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온통 새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폭발음도, 좀비들이 울부짖는 소리도,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산길. 악취를 풍기는 썩은 공기 대신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껏 학교에 다니면서 숱하게 봤던 풍경인데 지금은 오히려 낯설었다.

    “어.”

    앞서 가던 체대 남학생이 주춤했다. 저 멀리에 무언가 있었다. 가장 먼저 길 한복판에 선 커다란 군용차가 눈에 띄었다. 검문소에서 쓰이는 금속제 바리케이드도. 기관총을 든 군인 여러 명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학교를 탈출하고 처음으로 보는 외부인이었다. 극한의 상황에 몰려 환각을 보는 건 아닐까, 내 눈에 보이는 게 사실은 군인들이 아니라 가로등이나 나무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사람이 반응하기도 전에 남학생이 뛰어나갔다. 그는 미친 듯이 팔을 흔들며 외쳤다.

    “여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맞은편에서 군인이 우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거리가 있어 여기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람 있다니까요. 살려 주세요!”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외침도 저기까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남학생은 소리를 지르는 것을 포기하고 허겁지겁 달렸다. 손톱만큼 작게 보이는 군인들이 짧은 대화를 끝내고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그리고 총을 들어 올렸다. 조용했다. 기껏해야 슉 하고 바람 가르는 것 같은 소음이 아주 짧게 들렸을 뿐.

    “커헉!”

    돌연 그의 가슴팍에서 시뻘건 피가 튀었다. 우리는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눈으로 보고도 곧장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어깨에, 허벅지에. 물이 가득 든 비닐 봉투를 송곳으로 푹푹 찌르듯 몸 곳곳에서 피가 뿜어졌다. 남학생은 온 힘을 다해 달려가던 그 자세 그대로 고꾸라졌다. 핏물이 새까만 아스팔트에 쏟아졌다. 그는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축 늘어졌다.

    왜 군인들은 스피커와 확성기를 쓰지 않을까. 생존자를 구조할 목적이라면 캠퍼스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안내 방송이라도 하면 될 텐데. 왜 총에 소음기가 붙어 있을까. 답은 뻔했다. 저들은 알고 있었다. 감염자들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그래서 최대한 소음을 줄이고 주둔해 있었던 것이다.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먼 거리에선 알 수가 없다. 또 겉으론 멀쩡해 보이더라도 이미 감염되어 곧 변이할 사람일 수도 있고 보균자일 수도 있으니,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벽을 뚫고 나오는 자가 있으면 발견하는 즉시 무조건…….

    뒤이어 허공을 가르고 무언가 날아왔다. 퍽! 날카로운 충격이 종아리를 꿰뚫었다. 나는 속절없이 비틀거렸다. 처음에는 아픈 줄도 몰랐다. 곧 다리가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아래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한 박자 늦게 바지가 흥건히 젖는 게 느껴졌다. 총알이 깊게 스치고 지나간 종아리에서부터 피가 줄줄 흘렀다.

    “정호현!”

    고개를 들었다. 선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충격으로 조여든 동공, 한껏 일그러진 눈매, 처절하게 외치는 목소리. 모든 것이 기묘하리만치 느리게 보이고 들렸다.

    선배, 죄송해요. 제가 잘못 판단했어요. 정문으로 오는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야에 반투명한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리게 보였다. 몸에 힘이 탁 풀렸다. 나는 곧 균형을 잃고 스르르 넘어갔다. 그가 이를 악물고 내게 달려들었다. 내 어깨와 허리를 악착같이 끌어안고, 나를 자신의 몸으로 감쌌다.

    “……!”

    선배의 등이 크게 들썩였다. 그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밀착한 몸을 통해 그의 목울대가 가쁘게 오르내리는 것, 나를 안은 팔이 움찔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는 부둥켜안은 채로 쓰러졌다.

    나는 선배를 간신히 받쳐 안았다. 그의 옆구리가 축축했다. 손바닥 전체에 시뻘건 피가 흠뻑 묻어 나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선배…… 흐, 윽.”

    “…….”

    “왜 그랬어요. 대체 왜!”

    “너는…….”

    선배가 탄환이 틀어박힌 옆구리를 감싸 쥐고 헐떡였다. 숨결이 위태롭게 흐트러졌다. 고통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너는, 죽으면 안 돼.”

    “…….”

    “여기 있는 사람 다 뒈져도, 헉……. 너는 살아야 해.”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한겨울인데도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탁 트인 도로에는 엄폐물 따윈 없었다. 누군가 또 총에 맞았는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가 짐짓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뭐 해, 정호현. 나 버리고 빨리 도망쳐. 다 와서 총 맞아 뒈지기 싫으면.”

    다리를 통째로 불에 지지는 것 같은 통증을 참았다. 지금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아플 테니까.

    “너만 살아 나가면, 크리스마스로 다시 돌아갈 일은 없을 거야. 네가 주인공이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선배를 놓고 가라고요? 선배는 어쩌려고요?”

    “난 괜찮아. 나는, 이제…… 됐어.”

    말을 마치고, 그는 구김살 없이 환하게 웃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이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뺨에는 피와 먼지가 묻었지만, 그 웃음에 어린 빛은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이번엔 현이 네가 기억해 줘. 내 몫까지.”

    굳은살과 흉터로 얼룩진 큼직한 손이 내 손등을 느릿하게 어루만졌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제 드디어, 다 끝이야.”

    나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목이 꽉 메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를 안은 손에 떨림이 멎었다. 마음이 단단히 굳었다. 나는 신파극 속 주인공처럼 서럽게 흐느끼는 대신, 고개를 번쩍 들고 그를 형형하게 노려보았다.

    “닥쳐요.”

    “더 이상 이 좆같은 짓 안 해도…….”

    “기영원, 닥치라고!”

    빠득 이를 갈았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선배를 붙들고 악에 받친 말을 쏟아 놓았다.

    “약속했잖아. 둘 다 살아서 나가자고. 나가면 못 해 봤던 거 다 해 보자고 했잖아! 그렇게 말해 놓고, 여기까지 와서 당신 버리라고? 혼자 나가라고? 아니, 난 그렇게 못 해. 둘 중 한 사람만 사는 결말은 없어.”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다가, 그를 받친 채 비틀비틀 일어섰다. 총알에 스친 곳이 끔찍하게 아팠다. 다행히 뼈와 신경은 멀쩡한지, 다리가 힘겹게나마 움직이긴 움직였다. 시야가 자꾸만 흐려지려 했다. 눈에 힘을 주고 주위를 살폈다.

    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앞으로 달려가던 도중에 쓰러진 남학생을 중심으로 두 진영이 대립했다. 무기는커녕 제대로 된 보호구 하나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군인들은 그런 이들에게 사격 훈련이라도 하듯 무감정하게 총을 쏘았다.

    “호현 선배!”

    김나혜가 악을 썼다. 그녀는 어느덧 다른 이들과 함께 도로 반대쪽 가장자리까지 가 있었다. 숲과 도로를 구분하는 울타리를 막 뛰어넘으려다 말고, 그녀가 내 뒤를 가리켰다. 나와 선배의 등 뒤에도 같은 울타리가 있었다.

    “산이요. 산으로 도망쳐요.”

    김나혜 또한 총상을 입었는지 한쪽 팔뚝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다친 팔 대신 한쪽 팔로만 손나팔을 만들어 힘껏 외쳤다.

    “살아서 만나요!”

    “끄륵……. 캬아악!”

    이젠 익숙해진 괴성이 들렸다. 기어이 망가진 벽을 비집고 나온 감염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군인들이 다급한 외침을 주고받았다. 총격이 잦아든 틈을 타 몸을 틀었다.

    나는 피가 솟는 선배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꽉 눌러 틀어막은 채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다친 다리에 두 사람분의 무게가 실렸다. 통증이 너무 심해 눈앞이 핑 돌았다. 선배의 상태 또한 갈수록 나빠졌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마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서는, 힘없이 눈을 감고 쌕쌕 숨만 몰아쉬었다.

    그를 둘러업다시피 하여 울타리 너머로 보냈다. 옆구리에 난 총상에 최대한 무리가 덜 가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를 무사히 보낸 다음에야 나도 넘어갔다. 다리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후들거렸다. 울타리를 넘던 도중에 손에 힘이 풀렸다. 결국 나는 울타리 안쪽에 펼쳐진 숲에 풀썩 떨어졌다.

    “헉! 윽, 흐윽.”

    소복이 쌓인 눈 아래 숨어 있던 나무뿌리와 바위에 부딪힌 몸이 욱신거렸다.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나는 팔로 땅을 짚고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일단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선배의 허리에 둘렀다. 양 소매를 매듭 삼아 다친 옆구리에 꽉 동여매었다. 그가 윽, 하고 짧게 신음했다.

    여기 있다간 언제 다시 공격을 받을지 몰랐다. 또한 선배가 중상을 입은 탓에 미적미적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나는 그를 부축하고 일어섰다. 앙상한 나무들과 눈 덮인 바위가 발 디딜 곳 없이 들어찬, 가파른 겨울 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죽으면 선배는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돌아간다. 내가 죽으면 선배를, 그가 수없이 반복한 시간들을 기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내가 죽으면 바이러스를 물리칠 방법이 묘연해진다. 그러니 나는 반드시 살아서 나가야 했다. 선배와 함께.

    입술을 타고 뭔가 뚝뚝 흘렀다. 선배를 받치고 있지 않은 손을 입가에 대었다. 피가 묻어났다. 아까 땅에 머리부터 떨어지면서 바위에 부딪혀 입가가 찢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선배의 생명이 시시각각 꺼져 가고 있는데, 이런 것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나는 건성으로 피를 훔쳐 내며 중얼거렸다.

    “나는 안 죽어. 안 죽어, 안 죽을 거야…….”

    시야가 까맣게 좁아졌다. 귓가에 헉헉대는 나와 선배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나는 핏자국이 고스란히 묻어난 손등을 늘어뜨리고 산속으로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 * *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찼다. 아스팔트 도로를 걸을 때도 신경을 후벼 파는 듯 아팠는데, 산을 타려니 더했다. 우리 학교를 둘러싼 산은 제법 가팔랐다. 몇 년 전 술을 마시고 산에 들어갔다 추락사한 학생이 있다는 말이 괴담처럼 떠돌아다녔다. 거기다 지금은 눈까지 쌓여 있었다. 발이 몇 번이나 미끄러지려 했다.

    “헉. 하아…….”

    자꾸만 땀이 쏟아졌다. 외투를 벗어 선배에게 둘러 준 탓에 체온이 빠르게 떨어졌다. 그에 반해 다친 곳은 불이 붙은 듯 홧홧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결국 발을 헛디뎠다. 바위에 쌓인 눈이 얼어 얼음이 된 것을 못 보고 밟았다.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나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선배를 꽉 끌어안았다. 우리는 솔잎 섞인 눈과 퍼석퍼석한 낙엽 위를 뒹굴었다.

    “선배. 선배! 괜찮아요?”

    정신이 들자마자 선배부터 살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눈도 못 뜨고 무작정 허공을 더듬었다. 나를 찾는 것 같았다. 무심코 손을 마주 내밀었다. 피로 얼룩진 우리의 손이 맞닿으려는 순간. 철컥. 바로 앞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나는 뻣뻣한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군인 한 명이 내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군인은 새파랗게 젊었다. 우리나라 군인 중 장교를 제외한 일반 병사들은 대부분 스물 초중반의 청년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그는 나보다도 어려 보였다. 국방색 방탄 헬멧 아래로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앳된 얼굴이 보였다. 계급장을 보니 이등병이었다.

    “꼼짝 마!”

    그가 바짝 긴장한 채로 총구를 들이댔다. 지금 내 몰골이 어떨지에 생각이 미쳤다.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리고 온몸에 피를 묻힌 놈이 중환자를 끌어안고 있다니. 나 같아도 일단 총부터 겨누고 볼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일단 상대를 진정시켜야 했다. 습관적으로 웃었다. 그가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움찔했다.

    “우, 움직이면 즉각 발포…….”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이제껏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죽이려 달려드는 것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제 다 틀렸다는 생각에 공포마저 마비된 것일까.

    “위에서 뭐래요? 나오는 사람들 다 쏴 죽이래요?”

    “즉각 발포하겠다!”

    “학생이었어요? 사회에 있을 때. 입대한 진 얼마나 됐어요?”

    “…….”

    “이런 혹한기에 작전 동원되는 거 짜증 나지 않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사……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의 떨림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내 이마에 겨눠진 총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방아쇠에 올라간 손가락 또한 몇 번이나 달싹였다. 결국 그가 마음을 정한 듯 총을 고쳐 쥐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끔찍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저게 뭐야.”

    군인이 내 어깨 너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주춤주춤 물러섰다. 뒤에서 낙엽을 밟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뜨고 돌아보았다. 빽빽이 자란 나무들 사이로 감염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벽을 뚫고 나온 것들 중 하나가 끝내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자동차에서 난 화재에 휩쓸렸는지 전신이 시커멓게 타 진물이 질질 흘렀다. 거기다 곳곳에 눈과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이제껏 온갖 처참한 광경을 보아 온 나조차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것은 우리를 발견하고 탐욕스럽게 목을 울렸다. 그리고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위와 나무줄기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놈의 몰골이 더욱 적나라하게 보였다.

    “헉…… 으, 흐윽.”

    군인은 감염자와 나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총을 쥔 손 또한 마구 흔들렸다. 저러다 실수로 발포하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정문 앞 도로를 지키고 서서 저 멀리 있는 것들만 쏘았을 테니,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으리라.

    말이 좋아 군인이지, 그는 그냥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안온한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나와 선배가 그랬듯이. 군사 훈련을 몇 개월 받았다고 이런 상황에서 기다렸다는 듯 살육을 행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쏴요. 빨리!”

    “아, 아…….”

    “이대로 죽고 싶어요? 쏘라고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고 그를 다그쳤다. 그제야 그가 더듬더듬 총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방아쇠에 검지를 제대로 걸지 못해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저런 놈을 군대에서 고문관이라고 했는데.

    마침내 그는 한 발 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준이 심하게 흔들려서 옆에 있던 나무에 맞았다. 감염자의 부패한 눈알이 삐걱삐걱 굴러 그를 향했다.

    “흐아악!”

    감염자와 눈이 마주치자 군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이 더욱 상대를 자극했다. 놈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악! 저,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적이 저 사람에게 시선이 팔린 틈을 타 선배를 데리고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환자가 환자를 부축하고 산길을 걷느라 우리의 속도는 몹시 느렸다. 감염자는 그를 실컷 뜯어 먹고 곧 다음 표적을 찾을 터였다. 이 속도라면 몇 발짝 가지도 못하고 잡히겠지. 그때는 군인 좀비까지 한 마리 추가되어 있을 거고. 그러니 여기서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꺼져!”

    군인이 총을 마구 휘둘러 상대를 가격했다. 근접전에서 기관총은 큰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둔기로 쓰기로 한 것 같았다.

    “거리 좀 벌려서 눈 쏴요. 눈 통해서 뇌를 쏘면 돼요!”

    그에겐 내 외침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선배를 감염자에게서 떨어진 나무 뒤쪽에 기대어 앉혀 두고 나섰다.

    부상을 입은 다리를 쓰는 대신 큼지막한 돌을 집어 들었다. 허리를 숙이는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죽도록 아팠다. 퍼억! 내가 던진 돌이 명중했다. 막 군인의 손을 물어뜯으려던 놈의 고개가 퍽 꺾였다. 이제 감염자는 군인이 아닌 나를 노리기 시작했다.

    “지금 쏘라고요. 빨리요!”

    망설이던 군인이 어설프게 사격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보다 감염자가 내게 달려드는 게 빨랐다.

    “캬아아악!”

    입을 크게 벌린 놈이 내 목덜미를 노렸다. 나는 휘청거리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용케 피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피할 수는 없었다. 내 위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윽!”

    급한 대로 팔을 들어 올려 목을 물리는 걸 막았다. 악에 받친 놈의 이가 팔뚝에 박혔다. 참으로 더러운 느낌이었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턱을 움직여 내 살을 물어뜯기 전에, 뒤에서 군인이 총을 쏘았다. 초근거리 사격이라 표적만 흔들리지 않으면 맞추기는 쉬웠다.

    눈앞에서 감염자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눈구멍을 노리고 쏜 총알이 썩어 흐물흐물해진 뇌를 가르고 뒤통수까지 뚫어 놓았다. 시꺼멓고 끈끈한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감염자는 푹 고꾸라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헉…… 욱, 흐윽.”

    자신이 저지른 짓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우두커니 굳어 있던 그가 총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이등병이라도 그렇지, 여러모로 참 군인 실격이었다.

    “저, 저기…….”

    그는 잠시 후 간신히 이성을 찾고 울 것 같은 얼굴로 다가왔다. 하지만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물린 곳에서부터 기분 나쁜 열기가 퍼졌다. 추위에 얼어 있던 몸이 서서히 뜨거워졌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자리에 허물어졌다.

    “제 말 들리세요? 저기요!”

    가물가물하게 흐려지는 시야로 황급히 달려와 나를 붙잡는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이즈 섞인 무전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군인이 부대와 통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에 분명히 흙과 눈이 뒤섞인 땅에 자빠졌던 것 같은데, 나는 나무그늘 아래 바위에 반듯하게 누운 채였다.

    옆을 돌아보자 선배가 보였다. 그는 내 곁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피를 많이 흘려 안색이 몹시 창백했다. 입술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옆구리에 내가 엉성하게 둘렀던 옷가지 대신 붕대가 감겨 있었다.

    내 종아리도 마찬가지였다. 총에 스쳐 너덜너덜해진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붕대를 감아 놨다. 내 팔에는 선명한 잇자국이 남았다. 물린 지 얼마 안 된 거라 새빨갛게 피가 맺혀 있었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찍힌 것처럼 아프긴 했지만 아까처럼 몸이 뜨겁고 어지럽진 않았다.

    나와 선배를 쏴 죽이려면 방금까지가 적기였는데, 왜 죽이지 않았을까. 얌전히 눕혀서 치료까지 해 주고. 일반인이면 몰라도 그는 군 복무 중이니 명령 불복종으로 큰 벌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 것도 같았다. 이것저것 재고 따져 보기 전에 몸이 움직였을 것이다. 내가 이제껏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들을 구했던 것처럼.

    마침 군인이 통신을 마쳤다. 나는 잔뜩 갈라진 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기요.”

    “예, 옙! 이병 강, 병, 찬!”

    내가 깨어난 걸 미처 모르고 있었는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화들짝 놀라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자다가도 관등 성명이 튀어나오는 이등병다웠다.

    “쉿.”

    천근만근 같은 팔을 들어 검지를 입가에 갖다 댔다. 그가 움찔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 붕대……. 보급품이에요? 직접 감아 주신 거예요?”

    “예. 저, 응급 처치긴 한데. 일단 소독도 했어요.”

    “고맙습니다.”

    그의 눈은 아까 겪은 일의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충혈되어 있었다. 그가 군복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아무것도 모르고 차출돼서 왔지 말입니다. 전시에 준하는 비상사태라고, 긴급 출동해야 한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다른 얘기를 꺼냈다. 나는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대학교였습니다.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라도 하는 건가? 캠퍼스에서 누가 총기 난사 사건 일으켰나? 아니면 산 타고 북한에서 무장 공비 내려왔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오는 것들 다 쏴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도 아니고 말도 안 통하니까, 망설이지 말고 쏘랬습니다. 대한민국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적이라고, 빨갱이 잡는 거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라고.”

    화는 나지 않았다. 말단 병사들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란 것을 알기에. 다만 캠퍼스에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걸 알면서도 비정한 명령을 내린 상부에게 환멸이 났다.

    “이상했습니다. 나오는 것들이 아무리 봐도 사람 같았습니다. 귀신 들린 것처럼 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완전히 멀쩡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근데 위에선 자꾸 전원 즉각 사살하라고만 해요. 그냥 무조건 쏘라는데 왜 쏘라는지도 모르겠고, 평범한 대학생들인데, 제 또래 학생들이 막 뛰쳐나와서 소리 지르는데.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어떻게…….”

    그가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붉어진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대체 뭐가 맞는 거예요? 그 괴물들은, 바이러스란 건 뭐고요? 그쪽은 아무 잘못 없는 민간인이잖아요. 근데 왜 캠퍼스에 갇혀 있던 거예요? 저희는 왜 당신들을 쏴야 해요?”

    나라고 확답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도 좀 알고 싶었다.

    기숙사에서, 도서관에서, 본관에서. 살고 싶어 발악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하리만치 생생하게 떠올랐다. 선하고 악하며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사람들이. 그들은, 우리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참사를 겪어야 했을까.

    산 아래쪽에서부터 여러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군인이 동시에 그쪽을 보았다. 이번에는 감염자가 아니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수풀을 거침없이 헤치며 올라오고 있었다.

    “쏘지 마십시오!”

    내 곁에 있던 군인이 벌떡 일어나 양팔로 크게 수신호를 보냈다.

    “쏘면 안 됩니다. 생존자입니다!”

    그는 내 팔에 남은 잇자국을, 그리고 변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내 눈을 한 번씩 흘긋 보았다. 그리고 다시 건너편을 향해 외쳤다.

    “……반드시 구조해야 합니다!”

    군인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아득히 멀게 들렸다. 빠르게 몸에 힘이 풀렸다. 나는 깊은 물에 잠기듯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옆에 누운 선배의 가늘고 불안정한 숨소리를 들으면서.

    * * *

    그 뒤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깜빡깜빡 정신을 놓았다 되찾을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달리는 차 안, 이동용 침대 위, 병실까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으슬으슬하고 어지럽고 아팠다. 어느 순간부턴가 내 입에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침대 옆 모니터에서 규칙적으로 삑삑대는 기계음이 났다.

    그렇게 아주 긴 시간 동안 잠들었다. 꿈조차 꾸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며칠 밤을 새워 과제를 마치고 뻗어 잤을 때처럼. 다시 깨어났을 땐 내 침대 주변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누구지?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을 본 것이 까마득히 오래전 일 같았다.

    모두가 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심지어는 눈만 마주치면 티격태격하던 여동생까지. 내가 죽은 줄 알았다고 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구조 시도 중이나 현재까지 파악된 생존자 없음. 그게 이제껏 정부가 내세운 입장이었다.

    “아이고, 호현아. 우리 강아지. 예쁜 내 새끼…….”

    할머니는 이불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내 손을 꼭 쥐고 한참을 오열하셨다. 자잘한 생채기와 멍이 가득한 손 위에 할머니의 작고 주름진 손이 겹쳐졌다. 저는 괜찮다고, 걱정 많이 하셨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마취가 덜 풀린 건지, 수액 줄을 따라 흘러들어 가는 마약성 진통제 때문인지 정신이 멍했다. 쌕쌕 내쉬는 숨을 따라 산소마스크 안에 입김이 서렸다.

    “…….”

    그래서 나는 그저 웃었다. 손가락을 힘겹게 꼼지락거려 할머니의 손을 마주 잡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병실 안은 오래도록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줄곧 1인실에 머물렀다. 병원비는 국가에서 전액 지급했다. 가족들에게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희생자를 위해 지원되는 거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건 일종의 격리 조치였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정밀 검사를 받았고,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수없이 피를 뽑혔다. 양쪽 팔과 손목, 손등이 바늘 자국으로 너덜너덜해졌다. 구조될 때부터 예상하던 일이었다. 내 몸속에 있는 무언가로 백신을 만들 수 있다면, 허망하게 죽고 끔찍한 모습이 될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피 따윈 얼마든지 뽑힐 수 있었다.

    전신에 난 상처에 거즈를 붙이고, 총알에 스쳐 길게 찢어진 종아리는 꼼꼼히 봉합해 붕대를 감아 두었다. 예전에 중앙 도서관에서 칼에 찔렸던 허벅지까지 다시 소독했다.

    “선배는요?”

    몸에 주렁주렁 달린 선이 제거되고 산소마스크를 뗄 만큼 회복되자마자, 내가 제일 처음 한 말이었다. 다짜고짜 던진 물음에 부모님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셨다.

    “선배라니?”

    “선배요. 기영원 선배. 저랑 같이 구출된.”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사람 모르겠다고, 애초에 생존자는 너밖에 없었다고 말하면 어쩌지. 눈 덮인 산에서 나란히 누워 들었던 그의 숨소리가 내가 만들어 낸 환각이었다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약 기운으로 몽롱한 머릿속에 돌아다녔다.

    “그건…….”

    마침내 부모님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답을 얻었다.

    ‘정밀 검사’가 있는 날은 면회가 금지되어 있었다. 줄곧 내 곁을 지키던 가족들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다, 문득 벽에 설치된 TV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껏 가족들은 누구나 약속이라도 한 듯 TV를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병실에서 나만 보고 있으려면 심심할 텐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한 번도 못 봤다. 홀린 듯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화면 가득 지상파 뉴스 채널이 나타났다. 정장을 차려입은 앵커가 심각한 표정으로 멘트를 읊었다. 나는 멍하니 화면을 주시했다. 그가 떠드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끊임없이 바뀌어 가며 나타나는 헤드라인만이 보였다. 익숙한 단어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백일대 참사’ 통신 고의 두절 의혹, 혼란 확산 막기 위함인가?]

    [신고 접수부터 구조 포기 결정까지… ‘침묵의 골든타임’, 그 시각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軍 은폐 시도 논란, 사살 명령 여부를 두고 진실 공방]

    [애국평화당 황기용 의원 막말 파문 “백일대 참사는 종북 세력의 자작극, 유가족들 돈받고 연기하는 것”]

    [양응식 백일大 총장 전격 사퇴 선언 “막중한 책임 느껴… 학생들에게 평생 사죄할 것”]

    넋을 놓고 있다가 채널을 돌렸다. 이번엔 시사 토론 프로였다. 우리 학교 로고를 스크린에 커다랗게 띄워 놓은 채로, 패널들이 격렬하게 갑론을박 중이었다. 화면 아래에 뉴스 속보 제목들이 줄줄이 흘러갔다.

    [생존자 김 모 양 증언 “별문제 아니니 평소대로 생활하라는 방송 나왔다”]

    [‘백일대 참사 진상 규명 촉구’ 청와대 국민 청원 현재 약 50만 명 참여]

    [‘백일대 바이러스 유출 사고’ 희생자 합동 분향소 설치… 끊이지 않는 애도 물결]

    뚝. 액정을 가득 메우던 영상이 일시에 꺼졌다. 나는 리모컨을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툭 던졌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환자복 바지 아래 드러난 마른 발을 슬리퍼에 끼워 넣고 일어섰다. 붕대를 감은 종아리에서 통증이 번졌다. 그래도 피를 줄줄 흘리며 눈 쌓인 산을 헤맬 때보다야 나았다.

    나는 널찍한 1인실을 가로질러 문을 나섰다. 이 건물의 다른 병실 중 어딘가에 있을 그를 찾아서.

    내가 있던 곳과 다를 것 없는 병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방 안은 평화로웠다. 형광등은 켜져 있지 않지만 아이보리색 커튼을 넘어 들어오는 햇살이 벽과 바닥을 은은하게 물들였다. 캐비닛 위에는 큼직한 꽃과 과일 바구니가 있고, 가습기에서 흰 수증기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아픈 다리를 끌며 천천히 다가갔다. 병상에 걸린 이름표가 보였다. 기영원, 남성, 만 25세. 검은 글자로 프린트한 이름은 익숙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만났던 그가 현실에 존재하는,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실감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병원 특유의 옅은 색 이불 아래에서 선배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이제껏 겪은 아픔과 절망을 모두 잊은 것 같은 편안한 얼굴로. 그의 손등에 꽂힌 수액 줄도, 환자복 위로 드러난 살갗에 빽빽하게 감긴 붕대도 그 순간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깨우는 대신 등을 돌려 절뚝절뚝 창가로 향했다. 닫혀 있던 커튼을 조금 젖혀 보았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배가 누운 침대에도 새하얀 선이 그어졌다. 내친김에 커튼을 아예 활짝 열었다. 오랫동안 병실에서만 생활하다가 갑자기 자연광을 받으니 눈이 부셨다. 체중이 실린 다리가 서서히 아파 오는 것도 잊고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았다. 병원 앞의 정경이 보였다.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택시가 누군가를 내려 주기도 하고 싣고 가기도 했다. 흰 가운을 입고 명찰을 건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휠체어에 탄 환자를 산책시키는 보호자들도 있었다. 화단과 뜰에 쌓인 눈은 이제 거의 녹았다.

    세상은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흘렀다. 우리가 생지옥이 된 캠퍼스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가족들은 내게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내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TV에서 끊임없이 보도하는 뉴스에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끼워 맞추는 것만으로 대충 윤곽이 잡혔다.

    바이러스가 유출된 직후, 연락을 받은 사람들은 부리나케 달아났다. 재빨리 사태를 파악한 몇몇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은 꼼짝없이 발이 묶였지만, 따로 이동 수단이 있는 이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중에 이미 감염되어 버린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학생 하나가 스쿠터를 타고 가던 도중에 정문 앞 도로 한복판에 쓰러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이했다.

    바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래도 감염자가 한 명밖에 없는 데다 시가지까지 가기 전에 변이한 게 다행이었다. 추가로 투입되어 오고 있던 구조 인력들이 목숨을 바쳐 그를 체포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한번 변이한 사람은 치료가 불가능했다. 감염자를 포박해서 격리해 두는 식으로 확산을 최대한 막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해도 언제 바이러스가 새어 나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공기나 물로도 퍼지는지, 동물에게도 옮는지,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전혀 없었으니. 결국 정부는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신속하게 캠퍼스를 폐쇄했다.

    내가 이등병을 구하려다 팔을 물린 게 천운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나와 선배는 군인들에 의해 사살되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말짱해 보이더라도 보이지 않는 부위를 물렸을지도 모르니 일단 무조건 죽이고 보자는 게 정부의 방침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등병이 보는 앞에서 물렸고, 아무리 기다려도 변이하지 않았다. 나는 바이러스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산 증거가 되었다. 연구를 위해서라도 나를 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껏 정부는 필사적으로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으나 발견된 생존자는 아무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거기에 처음으로 예외가 생겼다. 그리하여 나와 함께 정문 밖으로 달아난 사람들 또한 구조되었다.

    우리에게는 차라리 죽는 게 편했을 것 같은, 참으로 악몽 같은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골치 아픈 이슈이고 권력 다툼을 할 좋은 구실이었을 뿐이다. 격앙된 어조로 외쳐 대는 목소리들이 연일 TV 스피커를 가득 메웠다.

    “…….”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았다. 선배가 누운 자리에서 살짝 뒤척였다. 방 안에 환하게 빛이 들어와 잠이 깬 듯했다. 그의 눈매가 가볍게 떨렸다. 이윽고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선배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리고 천장을 응시했다. 초점 없는 눈을 햇빛이 스민 천장에 고정한 채, 그 자세 그대로 한동안 굳어 있었다. 병실 천장은 기숙사 방과 같은 흰색이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부러 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한곳에만 머물러 있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여 나를 향했다. 그가 가늘게 눈매를 찌푸렸다. 왜 그럴까 하다가 내 등 뒤로 들이치는 햇빛에 생각이 미쳤다.

    “안녕, 선배. 잘 잤어요?”

    “…….”

    그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내 존재를 인지한 순간 탁하게 흐려져 있던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고 색이 입혀졌다. 죽음에서 삶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경이로웠다.

    “……안녕, 후배님. 왔어?”

    처참하게 갈라져서 더 낮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말투만큼은 여전했다.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용케 살았네.”

    나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어 버렸다. 선배는 그런 나를 홀린 듯 보았다. 시리도록 밝은 겨울 햇살 아래에서도 새까맣게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따라다녔다.

    “네. 용케 살았네요.”

    그가 스르르 상체를 일으키며 손을 뻗었다. 손등에 꽂힌 수액 바늘이 툭 빠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힘껏 껴안았다. 나는 어찌할 새도 없이 침대에 끌려 들어갔다.

    “선배, 잠깐만요. 링거 바늘 빠졌어요.”

    “그래그래. 예쁜아.”

    그는 내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았다. 헐렁한 환자복 너머로 드러난 목과 어깻죽지에 고개를 파묻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의 숨결이 민감한 살갗에 고스란히 닿았다.

    “빠졌다니까요? 이거 간호사 선생님한테 다시 꽂아 달라고 해야…….”

    “그딴 건 빠지라고 해. 너한테 내 좆 넣었을 때만 안 빠지면 돼.”

    “악!”

    저 시도 때도 없는 음담패설은 역시나 어디 가지 않았다. 아까까지 아스라이 이어지던 분위기가 박살 났다. 그 와중에 선배는 내 허리를 껴안고 환자복 위로 엉덩이를 더듬어 왔다. 울고 싶었다. 그의 옆구리에 붕대가 두껍게 감긴 게 느껴져서 힘주어 뿌리칠 수도 없었다.

    “선배, 제발 좀!”

    “왜 닥치라고 안 해?”

    “네?”

    “나한테 그랬잖아. 기영원 닥치라고. 그거 존나 꼴렸어. 또 해 줘. 나한테 박히면서 그 말투로 더 세게 박으라고 하면, 씨발, 생각만 해도 쌀 것 같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절박함에 아무렇게나 던진 말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

    “한 대쯤 갈길 줄 알았는데 안 갈기더라? 지금이라도 때려 볼래?”

    그가 킥킥 웃었다. 햇살이 내려앉은 뺨에 새겨진 상처가 보였다. 핏기 없는 입술에도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왜 선배를 아프게 해요.”

    “너 정말 어쩌려고 이래. 쓸데없이 예쁘기만 하지, 아주 물러 터져 가지고는.”

    그가 내 뺨을, 손을, 상처에 덕지덕지 붙은 거즈를 만지작거렸다.

    “또 나 살리겠다고 끝까지 무리했지? 네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작고 말랑말랑한 게 꼴에 악착같이.”

    작고 말랑말랑…….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붙을 수식어는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나는 작고 말랑말랑하기보다는 크고 단단한 쪽이었다. 하지만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서 싫어요?”

    “아니.”

    그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답했다. 반장난으로 물어본 거였는데, 웃음기 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멋쩍어졌다. 괜히 화제를 돌렸다.

    “선배, 그거 알아요? 곧 설이래요. 이제 크리스마스는 지났어요.”

    선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에게 크리스마스 아침이 어떤 의미인지. 세상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말한다 해도 미치광이 취급 받을 것이다. 바이러스 참사 탓에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이상해진 거라 하겠지. 그가 수없이 느꼈을 고통을, 앞으로 그에게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광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선배는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파리한 입술이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몇 번이나 달싹였다.

    “후배님, 그거 알아? 내가……. 내가 그날, 크리스마스 새벽에…….”

    “…….”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선배는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시선이 슬쩍 엇갈렸다. 그는 붕대가 칭칭 감긴 팔을 뻗어 옆에 있던 꽃바구니에서 작은 꽃잎을 하나 떼더니, 천연덕스레 내 콧잔등에 올려놓았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였다.

    “꽃잎 얹은 토끼.”

    “네?”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선언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혹시 토끼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리셨나? 아니면 외국에 서식한다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대형 토끼 말하는 건가?

    “토끼야, 사과 먹을래?”

    “아니, 그게. 네? 저기요, 선배님?”

    그는 한술 더 떠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하나 집어다 내 손바닥에 얹어 주었다.

    “먹어. 너 사과 좋아하잖아.”

    어리둥절하게 선배와 사과를 번갈아 보다가, 뒤늦게 실소가 터졌다. 픽 새어 나온 웃음을 타고 코에 얹혀 있던 꽃잎이 팔랑팔랑 날아올랐다. 선배의 기상천외한 언행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머리가 쭈뼛 설 상황인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허공에 떠오른 꽃잎이 사르르 떨어져 침대 시트에 내려앉았다. 나는 웃고 또 웃었다. 이제껏 제대로 못 웃은 한을 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지켜보던 선배도 그만 옅게 웃어 버렸다.

    선배는 학교 밖에 뭐가 있는지,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즐겨 했는지조차도 잊어버렸으면서 내가 사과를 좋아한다는 것만은 본능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오다 주웠다며 태연하게 사과를 내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자고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던 모습도, 서슴없이 나를 감싸고 대신 총을 맞던 모습도.

    “아하하, 하하…….”

    웃음 끝에 목이 메었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눈물 고인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한번 터진 둑을 다시 막을 수는 없었다.

    “…….”

    나는 한 손에 사과를 쥐고 그의 앞에서 또 꼴사납게 울어 버리고 말았다. 중앙 도서관 1층 카페에서처럼. 줄줄 새는 눈물과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애처롭게 숨을 헐떡였다.

    이 말을 할까 말까 수없이 고민했다. 지금까지는 말하지 않고 꾹 참았다. 이 말을 하고 혹시나 내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홀로 모든 걸 기억할 선배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일일 테니까. 하지만 이젠 때가 된 것 같았다.

    “좋아해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흐른 눈물이 해쓱한 볼을 적셨다. 선배가 잠깐의 침묵 끝에 나지막하게 물었다.

    “사과가 그렇게 좋아? 울 만큼?”

    “아뇨, 선배요.”

    “…….”

    “저, 선배 좋아해요.”

    “…….”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흠뻑 젖은 눈을 간신히 뜨고, 축축한 속눈썹 너머로 그를 보았다.

    “읏……!”

    그의 표정을 확인하기도 전에 끌어안겼다. 흰 환자복 너머로 서로의 가슴팍이 우악스럽게 부딪혔다. 심장이 너 나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불안정한 숨결이 내 위로 떨어졌다. 웃음을, 혹은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의 등을 마주 안고 고개를 묻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았다. 그의 목에 새겨진 흉터가 아주 조금 옅어져 있었다. 그를 가까이서 자주 보았던 내가 아니면 알아챌 수 없는 미세한 변화였다. 하지만 확실히 회복되었다. 쩍 갈라져 있던 곳이 살짝 아물고, 발갛게 차오른 새살도 붉은 기가 덜해졌다. 여전히 참혹했지만 예전보다 덜 아파 보였다.

    흉터를 손끝으로 천천히 더듬어 보았다. 내 안에 새겨진 그를 하나하나 되짚었다. 처음 기숙사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서 몸을 맞댔을 때, 불 꺼진 어두운 건물에서, 눈발이 휘날리는 흐린 하늘 아래에서, 앙상한 나무가 가득한 숲속에서.

    그동안 눈시울에 남아 있던 눈물이 흘러내려 그의 목덜미를 적셨다. 겨우내 내린 눈이 쌓여 있다 마침내 녹아 흐르는 것처럼. 흉터가 물기를 흠뻑 머금어 한층 원래 피부에 가까운 색으로 물들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제 더 이상의 반복은 없을 것임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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