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자각 (7/12)

6. 자각 

70주년 기념관 전체의 전기가 나갔다. 수도와 가스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사태가 발생한 지 몇 시간 만에 와이파이와 유선 인터넷이 끊겼다고 했다. 그 직후 전화와 라디오가 끊겼다. 다음은 뻔했다.

실내의 조명이 모조리 꺼져 어둑어둑했다. 사무실 책상에 있던 건전지로 작동하는 LED 시계 정도가 유일한 광원이었다. 이렇게 되자 지하실에 떨어뜨리고 온 플래시라이트가 아쉬워졌다.

나는 선배에게 제안해 보았다. 다른 짓 안 할 테니까, 들어가서 곧바로 그것만 가지고 나올 테니까, 딱 한 번만 지하실에 다녀오면 안 되냐고. 선배는 대답 대신 활짝 웃으며 나를 보았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 해 보든가. 너 뒈지고 나 뒈지는 거 보고 싶으면.’ 결국 눈물을 머금고 플래시라이트를 포기했다.

우리는 직감했다. 이제 70주년 기념관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물론 다른 곳으로 가 봤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건물 중 이곳만 전기와 수도가 뚝 끊길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아니, 그럴수록 더욱 밖으로 나가야 했다. 우리의 목적은 연명이 아닌 탈출이었으므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일단 1층 로비 게시판에 걸려 있던 캠퍼스 맵을 빼 왔다. 유리 상판 아래로 손끝을 밀어 넣고 살살 당기자 금세 빠졌다. 캠퍼스 내의 모든 시설물을 상세히 나타낸 지도는 몹시 컸다. 지도를 펼치자 사무실 바닥이 꽉 찼다. LED 시계를 조명 삼아 바닥에 내려놓고 널찍한 지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우리가 처음엔 여기 있었죠.”

기숙사를 가리켰다. 기숙사는 수십 개의 건물이 모여 있는 캠퍼스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었다. 뒤에서 내 어깨 너머로 지도를 구경하던 선배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엔 여기로 왔고.”

손가락을 아래로 죽 그어 중앙 도서관을 짚었다. 점과 점을 잇는 선이 생겼다. 산기슭에 바로 접한 외곽에서 중앙 쪽으로, 거기서 좀 더 아래쪽으로. 우리는 조금씩 정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70주년 기념관 아래에 커다란 빈 공간이 보였다. 대운동장과 테니스 코트였다. 운동장 바로 옆에 체육관 건물이 붙어 있었다. 체육관은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강당 보수 공사 중이었다.

체육관에서 철근에 배가 꿰뚫려 죽은 적이 있다는 선배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운동장을 곧바로 가로질러 가야 할까요? 아니면 옆에 있는 사범 대학 건물 쪽으로 돌아서…….”

나는 고민에 잠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내 뒤에 있던 선배가 어느새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가슴팍이 답답했다. 선배의 손은 나처럼 지도를 짚기는커녕 엉뚱한 데 감겨 있었다.

“잠깐만요. 좀 떨어져 주실래요.”

나는 선배의 손을 떼어 내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한술 더 떴다. 몸통을 휘감고만 있던 손이 슬금슬금 올라와 잡을 것도 없는 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읏, 그만……. 선배!”

“왜에.”

그가 내 어깨에 턱을 얹고 칭얼거렸다. 한껏 집중하던 중에 방해받아서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저 생각하는 중이잖아요. 지금 심각해요.”

“나도 심각하게 생각 중이야. 우리 후배님 어떻게 따먹을까 하는 생각.”

“악!”

난데없는 음담패설이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런 말을 하세요.”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랬어. 알잖아, 내가 분노 조절을 좀 못 하는 거.”

그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변명했다. 그 와중에도 손길은 더욱 파렴치해졌다. 한 손으로는 가슴을 주무르면서, 다른 손이 슬금슬금 허벅지로 기어들어 왔다.

“아까부터 후배님이 날 무시하고 지도만 보는데, 내 기분이 더럽겠어요, 안 더럽겠어요?”

“아니, 당연히 지도를 봐야죠. 지도를 봐야 계획을 짤 거 아니에요. 지금 딴짓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그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저 좆같은 지도 박박 찢어서 불 싸지르고 올 테니까.”

“제가 잘못했어요. 안 볼게요.”

재깍 사과했다. 선배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성의 소유자였다.

“아냐, 봐. 내가 언제 보지 말랬어? 실컷 봐. 나보다 저 지도 쪼가리가 더 좋다는데, 당연히 봐야지.”

그러나 한번 더러워진 선배의 기분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반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이제 안 볼 테니까 화 푸세요, 하고 소심하게 빌어 보았다. 선배가 살벌한 눈매를 확 치켜떴다.

“씨발, 보라니까?”

“…….”

나는 입을 다물고 바닥을 가득 메운 지도에 시선을 고정했다. 절대 선배가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절대로.

하지만 그림과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선배의 손은 어느덧 허벅지를 넘어 사타구니까지 넘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뒤에서부터 폭 안긴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점차 등에 그의 체중이 실렸다. 지도를 짚은 채 어렵게 버티다가, 결국 못 이기고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지도 위에 엎드린 꼴이 된 내 위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올라탔다.

바지 위를 더듬던 손이 순식간에 버튼을 풀고 지퍼를 내리더니 안으로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그는 나를 달래듯 목덜미에 입술을 꾹꾹 눌렀다. 맥박이 뛰는 곳을 고스란히 내주고 있으려니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흐응, 아…….”

간지러워서 이리저리 도리질을 했다. 이번엔 목 뒤쪽이 덥석 잡혔다. 고양이나 강아지 새끼를 붙잡듯. 선배가 고개를 틀어 내 입술에 쪽 키스했다.

“집중해. 심각하다며.”

그 말에 홀린 듯 멍하니 앞을 보았다. 탁상시계 액정에서 나오는 빛에 반사되어 건물 그림에 광택이 돌았다.

“그래서, 넌 어디 가고 싶은데.”

큼직한 손이 속옷째로 성기를 움켜쥐었다. 아, 하고 소리 없는 신음이 터졌다. 발기하지 않은 기둥과 그 아래 음낭까지 한 손아귀에 감싸고 천천히 주물렀다.

“운동장? 사범대 건물? 국제관? 난 어디든 좋아.”

“저…… 헉, 저는.”

“네가 그랬잖아. 반드시 여길 나가자고. 내가 되돌아가는 일은 두 번 다신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네 뜻대로 이끌어 줘.”

그의 엄지가 속옷 위로 귀두를 비볐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점점 발기했다. 힘을 주면 주는 대로 말캉말캉 일그러지던 물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밭은 숨을 흘리며 허벅지를 움츠렸다.

“그렇게 좋아? 지도를 보랬더니 발딱 세우기나 하고. 아, 그래. 자지 세웠으니까 젖꼭지도 세워 줄게. 그래야 공평하지.”

윗옷 아래로 손이 들어왔다. 긴 손가락이 배와 갈비뼈를 더듬어 올라와 유두를 툭 건드렸다. 위아래가 모두 짓이겨졌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현아,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빨리 생각해 봐, 어디 갈지.”

“생각, 하려고, 했는데요.”

“응. 그런데요.”

“선배가, 자꾸 이상한 데 만지니까아…….”

선배가 갑자기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고 맨자지를 만지는 바람에 말꼬리가 늘어졌다. 내가 들어도 칭얼거리는 것 같았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한 손은 상체에, 한 손은 하체에 가 있는 탓에 그의 팔에 내 몸이 칭칭 휘감긴 것 같은 꼴이 되었다. 몸부림쳐 빠져나가고 싶어도 그의 품에 완전히 갇혀서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체격 차이 때문에 위에서 보면 나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길고 단단한 손이 내 성기와 가슴을 우악스럽게 주무르고 문질러 댔다. 꼿꼿이 일어선 유두가 굳은살에 쓸려서 아플 지경이었다. 하의는 무릎까지 내려가고, 상의는 쇄골 아래까지 끌려 올라갔다.

나는 차가운 지도 표면에 뺨을 댄 채 헐떡였다. 반들반들하게 코팅된 지도 표면 위에 입김이 서렸다. 이제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빨리 말 안 해? 지금 딴짓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온갖 개지랄은 다 하면서 나 엿 먹일 땐 언제고, 왜 대답을 안 해. 꾸물거리다 여기서 뒈지고 싶어서 그래?”

그가 윽박지르듯 채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힘겹게 돌려 시선을 맞추고 물어보았다.

“저기, 선배. 혹시 삐지셨어요? 제가 계속 지도만 봐서.”

그는 부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를 팩 외면했다.

“몰라. 말 안 해.”

“죄송해요.”

“사과만 하면 다야? 후배님은 맨날 그런 식이지.”

“선배…….”

“선배라고 부르지도 마. 누가 네 선배야?”

그가 작게 이를 갈았다. 내 것을 쥔 손에도 왈칵 힘이 들어갔다.

“악!”

아파서 눈앞이 하얘졌다. 순간 자지가 터지는 줄 알았다. 뒤이어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중의 절반은 욕설과 신세 한탄이었다. 나는 비굴하게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형님, 헉, 흐윽! 형…….”

“…….”

“잘못했어요. 이것 좀, 제발 손 좀 놔주세요. 너무 아파요.”

“…….”

“다신 안 그럴게요. 무시 안 하고, 지도도 안 볼게요. 네?”

그는 내게서 고개를 돌린 그대로 잠시 멈춰 있었다. 그러다 되물었다.

“진짜?”

“진짜.”

그가 이쪽을 흘긋 곁눈질했다. 서늘한 삼백안이 도르르 굴러 나를 향했다.

“그럼 따라 해 봐. 영원이 형, 형밖에 없어요.”

“…….”

얼굴이 절로 일그러지려는 걸 참고 억지로 웃었다. 성기를 움켜쥔 손에는 아직도 힘이 풀리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다간 조직이 괴사해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여, 영원이…… 형. 저는…… 읏, 형, 밖에, 없어요.”

“응. 나도 호현이밖에 없어.”

선배가 내 턱을 움켜쥐었다. 고개가 거칠게 휙 돌아갔다. 입술이 잡아먹혔다.

“흡, 흐윽…….”

내 위에 실린 체중도, 숨도 못 쉬게 입 안을 헤집어 놓는 혀도 버거웠다. 엎드린 자세로 그의 아래에 깔려 있어 매달릴 수가 없었다. 나는 맞물린 입술 너머로 헐떡이며 무기력하게 바르작거렸다.

선배가 내 혀를 휘감는 대로 허겁지겁 따라가다가, 무심코 그의 아랫입술을 어설프게 빨았다. 내 턱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어느 순간 선배가 고개를 확 떼어 냈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으며 몸을 일으켰다.

“구멍 빨아 주는 것도 나밖에 없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배가 바닥에서 번쩍 떠올랐다. 선배가 내 허리를 팔로 휘감아 들어 올린 탓이었다. 나는 바닥에 엎어져 엉덩이만 치켜든 상태가 되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캉한 혀가 속살에 닿은 건 그다음이었다.

“헉……!”

상체를 퍼뜩 일으켰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어 내 등을 꽈악 짓눌렀다. 나는 도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흐아, 읏, 안 돼, 하지 마요. 싫, 아아!”

그는 탄탄한 팔로 허벅지를 휘감아 고정한 채 엉덩이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다. 사냥감의 배를 갈라 내장을 씹어 먹는 짐승처럼 야만스럽고 천박하게 혀를 놀렸다. 쭙쭙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미끄덩한 혀가 닫힌 입구를 문질렀다. 보송하게 말라 있던 주름을 죄다 적시고 안까지 불쑥 쑤셨다. 아랫배가 절로 꽉꽉 조여들었다.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어정쩡하게 든 자세가 무너지려 할 때마다 그가 팔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해도 도망칠 수 없었다. 부끄럽고 서러워서 나도 모르게 흐느꼈다.

“으응, 저번에도, 싫다고 했, 는데. 앗, 왜…….”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척척하게 젖어서 움찔대는 구멍에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리 빨아 줘도 좁아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혀끝만 넣어도 꽉꽉 물어 대는데. 이렇게 작은 게 저번엔 내 좆을 어떻게 먹었을까.”

선배는 싫다는 내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가 보고 있을 광경을 상상하니 지독하게 부끄러워졌다. 그의 시선 아래에 고스란히 노출된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큰 손이 내 엉덩이를 가만히 토닥였다.

“엉덩이 씰룩거리지 마. 더 꼴리잖아.”

선배는 다시 내 사타구니에 얼굴을 박았다. 이번엔 고개를 더 깊숙이 들이밀어 구멍 아래 회음을 집요하게 빨았다. 한 손으로는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 늘어져 있던 성기를 주물렀다. 질척하게 깨물고 핥다가 음낭까지 입에 머금었다. 단단하게 부풀어 있던 음낭이 뜨겁고 습한 입 안으로 쭉 빨려 들어갔다.

“흐, 으응, 아, 아, 읏……!”

성기만 빼놓고 골고루 주어지는 자극이 야속했다. 왜 자지는 안 빨아 줘요?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들어갔다. 그 정도의 이성은 아직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흐으, 하고 새된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젖혔다. 나는 본능을 따라 어설프게 허리를 추어올렸다. 잔뜩 발기한 성기가 덜렁덜렁 흔들렸다. 귀두에서 맑은 액체 방울이 떨어졌다.

“보채기는…….”

선배가 한 팔로 허리를 휘감고 내 뒤에 몸을 바짝 붙여 왔다. 엉덩이 사이에 묵직한 성기가 끼워졌다. 설마 이대로 넣는 걸까.

지난번의 기억이 떠올랐다. 저게 들어오는 내내, 아니, 들어오고 나서도 죽을 것 같았다. 그 경험을 다시 한다니.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황급히 뒤로 손을 뻗어 선배의 허벅지를 꾹꾹 밀어냈다.

“서, 선배, 선배. 잠깐만요.”

“뭔데.”

목소리가 욕망에 잠겨 한껏 낮아져 있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

“오. 생각씩이나 하셨어요? 아깐 내가 이상한 데 만져서 생각 못 하시겠다더니?”

“그게, 저,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그래, 씨발. 들어나 보자. 이번엔 또 왜.”

그가 이를 악물고 읊조렸다. 한 음절 한 음절에 살기가 묻어났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넣으면 죽지 않을까요?”

“저번에 안 죽었잖아.”

“저번에 안 죽었다고 이번에도 안 죽으리란 보장은 없…….”

“정호현, 너 진짜 뒈질래? 우리 호현이가 이렇게까지 뒈지고 싶어 안달이 난 줄은 몰랐네?”

“어, 음. 그러니까, 저 남자잖아요. 선배도 남자고요. 이런 건 아무래도 좀.”

“근데 뭐 어쩌라고. 나한테 박히면서 좋아 죽던 새끼가.”

말마따나 그와 몸을 섞으며 몇 번이나 절정에 달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성별이나 취향을 핑계로 빼는 것도 웃긴 짓이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선배가 피식 웃었다.

“자, 다음은? 다음엔 또 무슨 좆같은 핑계 댈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최후의 카드였다.

“콘돔요!”

“……뭐?”

“노콘노섹 몰라요? 전 그거 꼭 지키자는 주의예요.”

“으응. 그래. 알지, 알지. 노 콘트롤 노 섹스.”

선배가 짜증이 가득 밴 말투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게 대체 뭔 헛소리냐고 따질 겨를도 없었다. 그는 내 골반을 우악스럽게 잡아 짓누르고 구멍에 귀두를 맞췄다. 숨이 턱 막혔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다가올 고통이 무서웠다.

하지만 다음 순간, 굵직한 기둥이 엉덩이 골을 따라 비스듬히 미끄러졌다. 구멍과 회음이 번들번들하게 젖어 있어 미끄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선배는 내 등 뒤에 몸을 겹치고 엉덩이 골에 성기를 연달아 박았다. 퍽, 퍽, 퍽.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가 내 허벅지 사이에 마찰했다. 낯선 감각에 허벅지가 움츠러들었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꽉 조여진 허벅지 사이를 뚫고 나온 그의 것이 내 성기에 닿았다. 귀두가 수없이 들락날락하며 끄트머리에 고여 있던 액체를 여기저기 펴 발랐다.

“으응…… 흐, 으읏, 윽…….”

사타구니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성기도 구멍도 마찰에 죄다 뭉개지는 것 같았다. 나는 주먹 쥔 손으로 바닥을 짚고 간신히 버텼다. 바닥에 떨어지는 쿠퍼액의 양이 늘어났다. 지도에 그려진 건물들 위로 말간 물방울이 고였다.

내 아랫도리도 이미 두 사람분의 체액으로 엉망이었다. 그의 성기가 우연인 듯 아닌 듯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구멍이 멋대로 뻐끔거렸다. 자꾸 흐물흐물 무너지려는 나를 선배가 안아 올렸다.

“아직도 내 좆이 그렇게 무서워?”

“…….”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그의 성기에 잔뜩 쓸린 허벅지가 화끈화끈하다 못해 아팠다. 사정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한 끗 부족한 것 같기도 했다.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었다. 정말 미친 것 같지만, 이러느니 차라리 넣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진짜, 박을 거야.”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성기를 일정한 각도로 리드미컬하게 찌걱찌걱 미끄러뜨리다가, 어느 순간 허리를 살짝 세웠다. 허릿심만으로 귀두를 구멍에 맞추고 그대로 비스듬히 찔러 넣었다.

“읏…….”

선배가 짤막하게 신음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삽입에 안이 쫘악 오므라들었다. 숨을 할딱일 때마다 안에 박힌 게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충격을 못 이겨 바닥에 깔린 지도를 할퀴었다.

“아, 아…… 아!”

“반도 안 들어갔어……. 벌써부터 못 먹겠다고 울면 어떡해.”

그는 작게 숨을 내쉬고 어정쩡하게 물린 성기를 도로 잡아 뺐다. 아니, 빼려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내벽이 잔뜩 좁아져서 그의 것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악……!”

“현아, 긴장 좀 풀어 봐. 내 좆 터지겠어.”

괴로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배 안이 통째로 딸려 나가는 줄 알았다. 나는 울면서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 못 해요, 흐으……. 선배, 저 죽어요…… 헉, 정말 죽을 것 같아요.”

“또 울어? 하여간 위든 아래든 질질 흘리는 덴 타고났다니까.”

그가 앞으로 손을 뻗어 내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곧잘 신음했다. 허리를 앞으로 빼면 선배의 손에 성기가 짓눌리고, 뒤로 물리면 그의 것에 더 깊이 박히는 꼴이 되었다. 딱 미칠 것 같았다.

“읏, 아, 흐으, 응.”

선배가 낮게 웃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리서 들렸다.

“힘 빼라고 만져 줬더니 더 조이고 있어.”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구멍에 힘이 살짝 풀렸다. 그 틈을 타서 성기가 퍽 틀어박혔다. 빈틈없이 다물려 있던 내벽을 일시에 가르고 저 안까지 꽂혔다.

“……!”

입이 벌어졌다. 비명 대신 공기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덜덜 떨리는 팔을 뒤로 뻗었다. 선배를 밀어내려는 건지 붙잡으려는 건지 모를 움직임이었다. 그가 내 팔목을 움켜쥐고 다시 허리를 밀어붙였다. 성기가 젖은 내벽을 팽팽하게 벌렸다. 커다란 불덩이를 아랫배에 쑤셔 박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걸 넣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이러다간 배가 너무 물을 많이 넣은 물 풍선처럼 터질 것 같았다. 무서웠다. 나는 아랫배를 끌어안고 아, 아, 하고 연거푸 신음했다.

“왜, 왜에……. 으, 흑, 왜 갑자기.”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들반들한 지도 표면에 이마를 비비며 울었다. 선배가 열에 들뜬 기색으로 웃더니 내 귓가에 쪽쪽쪽 입을 맞추고 뺨을 잔뜩 만져 주었다.

“원래 분홍색이던 게 지금은 더 빨개졌어. 귀엽게. 더 박으면 너 정말 죽을 것 같은데, 박고 싶어 미치겠어. 하아…… 어떡하지.”

그가 이를 악물고 힘을 주어 성기를 뽑아냈다. 기둥에 돋아난 흉악한 핏줄이 안을 긁는 게 모조리 느껴졌다. 입구에 귀두를 걸쳤다가, 다시 꾸욱 밀고 들어왔다. 더 안 들어갈 때까지 꾸역꾸역 파고든 성기가 한곳을 지그시 눌렀다. 배꼽 아래 어딘가가 뻐근해졌다.

“아…… 아!”

나는 감전된 사람처럼 몸서리쳤다. 철썩철썩 살 치대는 소리가 났다. 같은 곳에 연달아 자극이 가해졌다.

“이상해요. 잠깐만요…… 여기 이상…… 아! 하지 마세요.”

한 번 처넣을 때마다 점점 허리가 뒤틀리고 고개가 젖혀졌다. 귀두가 내벽을 쾅 찍었다. 순식간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그래. 여기가 좋아? 여기 더 박아 줘?”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선배는 내 말 따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고 내 위에 올라타 박아 댔다. 바닥과 선배의 몸 사이에 끼어 배가 눌린 탓에 성기가 쑥쑥 드나드는 것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선배 미워…… 흐으, 왜 이렇게 커요.”

나는 바닥을 긁으며 발버둥 쳤다. 이상한 감각이 무서워서 자꾸 배에 힘이 들어갔다. 속살이 성기를 휘감고 달라붙었다. 턱, 턱, 턱. 그가 박을 때마다 자꾸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선배가 내 허리를 안아 끌어 내렸다.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어설프게 저항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서워요. 이제 싫어, 싫다니까…….”

“내가 미워? 그렇게 싫어?”

“…….”

아닌데,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는 내 옆 바닥을 짚은 그의 팔목을 잡았다. 선배가 싫은 게 아니라 선배 자지가, 정확히는 자지의 길이와 굵기가 싫은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속 깊은 곳을 찌른 것이 목 너머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응? 호현아. 나 싫어?”

그가 나를 뒤에서 안은 채로 다시 물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숨이 제법 거칠어져 있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빼 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싫어?”

이번엔 끄덕였다. 선배가 한숨처럼 웃었다.

“그래. 그럼 계속 박을게.”

그가 뒤에서 거칠게 치받았다. 그가 나를 꽉 안고 있어 앞으로 떠밀려 나가는 일은 없었다. 단단하게 굳은 허벅지가 내 엉덩이를 눌렀다.

“헉!”

내벽을 타고 찌르르한 전율이 퍼졌다. 조금만 더 방심했으면 그대로 사정해 버릴 뻔했다. 이럴 줄 알았다. 나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미 체액으로 엉망이 된 지도에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왜 울어. 안 싫다며?”

“그, 흣,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괜찮아. 더 울어. 넌 우는 것도 예뻐.”

그는 짐승처럼 내 뒤에 달라붙어 안을 쑤셨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뺨과 목, 입술을 물고 빨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번들거리는 성기를 길게 뽑았다가 푹 처넣을 땐 히익,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터졌다. 깊숙이 박은 채로 사타구니를 맞대고 비비적거리면서 내벽을 죄다 헤집어 놓기도 했다.

선배의 아래에 깔린 내 종아리가 허공에 휙 떴다가 도로 떨어졌다. 떨리는 발끝으로 바닥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밀어 댔다. 어정쩡하게 벌린 채 꿇은 무릎 사이로 묽은 액체가 툭, 투둑, 떨어졌다.

이대로 계속 박히다가는 이상해질 것 같았다.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 허겁지겁 바닥을 기어 어떻게든 달아나려 했다.

“어디 가아…… 응? 가지 마.”

선배가 내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나른한 말투와 달리 손아귀 힘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나를 질질 끌어다 도로 자기 품에 넣었다. 반쯤 빠졌던 성기가 틀어박혔다. 끝도 없이 눈물이 났다.

“진짜로 쌀 것 같단 말이에요…… 으, 흑.”

“싸도 돼.”

“자꾸 이상한 데만 찌르고, 으응…… 내가 계속, 이상하다고, 헉,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 그래.”

“제발, 영원이 혀엉…….”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나를 안은 팔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턱, 턱, 턱, 찔러 넣는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세차게 박힐 때마다 발끝까지 저릿저릿 울렸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을 정도로 쾌감이 강해졌다. 허벅지를 꼬고 골반을 움찔대며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아흐윽……!”

나는 입술을 깨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만져 주지도 않은 성기에서 정액이 뿜어졌다. 그 순간 선배가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앗, 아, 아아!”

척추가 모조리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절정에 달한 내벽이 멋대로 쭉쭉 오므라들어 성기를 깨물고 조여 댔다. 그러나 더 주어지는 자극은 없었다.

“왜에……. 아, 아으, 흐, 읏…….”

사정하는 내내 구멍 안이 발씬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실컷 박아 줬으면 좋겠는데, 안을 잔뜩 긁어서 간지러움을 해소해 줬으면 좋겠는데. 선배가 너무도 야속했다.

나는 더듬더듬 그의 팔을 찾아 쥐었다. 애원하듯 팔목에 이마를 문지르고 뺨을 비볐다. 엉덩이를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며 쾌락을 졸랐다. 혼자 서툴게 허리를 들썩여도 보았다. 안을 꽉 채운 성기가 여기저기를 둔하게 찔렀다. 하지만 선배가 박아 주는 것보다는 훨씬 못했다.

결국 사정이 끝났다. 해소되지 못한 미적지근한 열기를 남긴 채. 질질 새던 정액 줄기가 점차 잦아들었다. 나는 제풀에 지쳐 바닥에 풀썩 엎어졌다. 홀로 절정에 몸부림친 게 수치스럽고 서러웠다.

퍽. 가만히 들어앉아 있던 성기가 갑자기 안을 힘차게 쑤셨다. 마침 내벽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상태였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번쩍였다.

“아!”

서서히 속도가 빨라졌다. 방금 사정했으니까 괴롭기만 하고 못 느껴야 정상인데. 자꾸 성기 뿌리 뒤쪽이 간지러웠다. 시큰시큰한 것 같기도 했다. 이상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읏, 흐읍, 그만, 그만!”

“헉……. 하아.”

힘겹게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선배의 눈이 새까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성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돼요, 잠깐만요.”

내 말을 듣긴 한 건지, 그는 내 이마에 입술을 누르며 허리를 놀렸다. 그의 치골에 수없이 부딪힌 엉덩이가 얼얼해졌다. 그의 어깨와 팔뚝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쭉 빼냈다가 들어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처넣은 순간.

“흐읏, 헉, 아, 안 돼, 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성기에서 또다시 무언가가 왈칵 쏘아졌다. 물 같은 투명한 액체였다. 때마침 선배가 사정을 시작했다. 정액을 머금은 굵직한 성기가 내벽에 틀어박혀 꿈틀댔다. 그의 정액이 몇 번에 걸쳐 배를 가득 메웠다.

그에 맞춰 내 귀두 끝에서 물이 쭈욱, 쭉, 쭉, 기세도 좋게 튀어 나갔다. 내벽에 꽉 물린 성기를 간신히 약간 뒤로 뺐다 처박을 때면 물줄기가 한층 거세어졌다. 순식간에 바닥이 물 잔을 엎지른 것처럼 흥건해졌다. 나는 소리조차 못 지르고 파들파들 떨었다.

한계까지 수축한 내벽이 씰룩대며 그의 자지를 압박하는 게 낱낱이 느껴졌다. 점막 전체에 가득 쏟아지는 정액을 꾸역꾸역 탐욕스레 받아 삼켰다. 선배가 읏, 하고 짧게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물을 싸는 내내 단단히 굳은 허벅지와 아랫배 근육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독하게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성기에서 질질 새던 물이 멎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냥 딱 죽고 싶었다.

“후배님, 예쁜아. 얼굴 좀 보여 줘.”

“싫어요.”

“나 좀 봐.”

“꺼져요.”

“너 좀 재능 있는 것 같아. 난 또, 갑자기 실내에 비라도 내린 줄 알았잖아. 후배님이 하도 많이 싸질러서.”

그가 열기가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킥킥 웃었다. 더더욱 죽고 싶어졌다.

“입 좀 다물어 주실래요…….”

“쑥스러워하기는. 괜찮아. 너 툭하면 위아래로 물 질질 흘려 대는 거 잘 아는데 뭐.”

그는 축 늘어진 나를 추슬러 안았다.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성기가 구멍에 허술하게 박혀 있어 불편했다. 하지만 빼 달라는 말을 할 기운조차 없었다.

“그래서, 섹스하는 동안 생각은 좀 해 봤어? 어디 갈지?”

“…….”

나는 엉망이 된 지도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온갖 수상한 액체로 범벅이 돼서 깔개로도 못 쓸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학교 로고 부분에 내가 싸지른 정액이 듬뿍 묻어 있었다. 때와 장소를 분간 못 하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깔끔한 일러스트로 그려진 건물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본관이었다.

우리 학교는 산 입구에 있는 정문을 지나서 도로를 따라 한참 올라와야 캠퍼스가 나오는 구조였다. 부채꼴 혹은 거꾸로 된 병처럼 생겼다.

드문드문 설치된 가로등 외엔 아무것도 없는 산길을, 그것도 오르막길을 몇십 분 동안 걷는 경험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좋게 말하면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당장이라도 산 쪽에서 멧돼지가 난간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학생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셔틀버스를 타고 다녔다.

본관은 외부인의 방문이 잦아서인지, 학교를 대표하는 건물이라는 의미가 있어서인지 그나마 접근성이 좋은 곳에 지어졌다. 부채꼴의 꼭짓점 부분에 있어서, 정문에서부터 쭉 직진하다 보면 머지않아 커다란 본관 건물이 보였다. 우리 입장에서 본관은 정문으로 가는 관문이자 거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선배가 내 말을 도중에 뚝 잘랐다.

“아니, 아냐. 굳이 지금 말할 필요 없어. 생각 좀 더 해 봐.”

“네?”

저게 무슨 말이지? 어리둥절해졌다. 선배가 내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붙여 올 때까지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아…….”

그가 달콤한 한숨을 쉬었다. 정액을 뒤집어쓰고 내 안에 박혀 있던 성기가 점점 부풀었다. 순식간에 단단함을 되찾은 귀두가 내벽을 빠듯하게 밀어 올렸다.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선배가 샐쭉이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한 번 더 싸자, 호현아. 응?”

* * *

여기서 본관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대운동장과 테니스 코트를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물론 몹시 위험한 작전이었다. 건물 안에서는 감염자들을 만나도 따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사방이 트인 운동장에서는 불가능했다. 한번 따라잡히면 그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전함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주변에 있는 다른 건물들을 거쳐 가는 방법도 있었다. 우리가 기숙사에서 중앙 도서관으로, 중앙 도서관에서 70주년 기념관으로 온 것처럼.

하지만 그 방법을 택하면 탈출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건물들을 전전하는 사이에 그나마 남아 있는 몇 없는 물자마저 떨어질지도 몰랐다.

우리는 떠날 준비를 했다. 먹고 남은 식량을 챙기고 서랍과 캐비닛을 뒤지며 가져갈 만한 것들을 찾았다. 바깥 날씨에 대비해 사무실에 옷걸이에 걸려 있던 패딩을 입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도리도 챙겼다.

“……아.”

덜그럭대며 책상 서랍을 뒤지다가 짧게 탄성을 질렀다. 선배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손에 든 것을 보여 주었다. 자동차 스마트키였다.

기숙사와 중앙 도서관은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자가용이 있는 대학생은 물론 없진 않겠지만 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여기서 근무하던 교직원들은 대부분 각자 차가 있을 거란 사실을.

“이 차 타고 정문까지 가면 안 돼요?”

“어디 주차돼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삐빅 소리 나게 할 수 있는 버튼 있잖아요. 여기요. 이거 눌러서 찾으면 되지 않을까요?”

선배는 별다른 반박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모를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그래, 뭐. 해 보든가.”

로비로 나갔다. 눈발이 휘날리는 날 다리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비틀 들어온 뒤로 70주년 기념관의 문은 내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문이 드디어 열렸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 같은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 차갑고 버석버석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내내 퍼붓던 눈은 이미 그쳤다. 말간 허공에 흐린 입김이 퍼져 나갔다.

주변에는 감염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밖으로 나오자마자 습격당하는 일은 피했다. 하지만 조금만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얼어붙은 캠퍼스 곳곳을 느리게 배회하는 형체들이 눈에 띄었다. 그 모진 폭설을 견디고도 꿋꿋이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불에 완전히 태워 재로 만들기 전까진 온몸이 까맣게 탄 채로도 움직이던 것들이었다. 기온이 좀 내려간다고 얼어 죽을 리가 없었다.

건물 입구부터 시작해서 보도블록이 깔린 통행로들이 죄다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가로수와 관목에도 눈꽃이 내려앉았다. 소복소복 눈이 쌓인 곳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얼음이 꽝꽝 언 비탈길은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저기서 넘어지면 최소 골절이겠지.

“길이 그대로 얼었네요.”

“눈을 치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가 검은 마스크를 올려 쓰며 대꾸했다.

“이래서 기숙사에 되도록 오래 있으려고 했어. 어중간한 시점에 눈이 오면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히니까.”

“…….”

“아니면 사태 발생하자마자 잽싸게 튀어 나가서 다른 거처를 확보해 놨어야 하는데……. 그건 어렵지. 네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내 말을 믿고 따라 줄 리가 없잖아.”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뒤로 선배는 아무 거리낌 없이 비현실적인 얘기를 툭툭 던졌다. 그와 내가 숱하게 겪었을, 그러나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평행 세계의 과거들을.

“여긴 몇 번이나 와 봤어요?”

“세 번? 네 번? 모르겠어. 기억 잘 안 나.”

“운동장에 갔던 적은요?”

“한 번…….”

“그때도 본관에 가려고 했던 거예요? 어떻게 됐어요?”

그는 운동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널찍한 운동장 곳곳에 돌아다니는 것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념관 지하실에서 그 꼴을 보고……. 그대로 뛰쳐나갔어. 죽기 살기로 뛰었어. 그런데 운동장이 너무 넓어서, 반대편까지 가기 전에 힘이 빠졌어. 그대로 잡혀서…….”

운동장 한복판에 쓰러진 나와 선배의 위로 수많은 감염자들이 달려드는 광경이 상상되었다. 섬뜩했다. 두 발로 운동장을 가로지른다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누구의 것인지, 어떤 기종인지도 모르는 차 키를 꽉 쥐었다.

“탈것을 찾아야겠네요. 운동장을 통해서 가려면.”

우리는 건물 근처를 돌아다니며 차를 찾았다. 눈을 뒤집어쓴 채 길가에 주차된 차가 몇 대 있었지만, 그중 내가 가진 키에 반응하는 것은 없었다. 내가 공대생이었다면 차 유리창을 부수고 들어가 전선을 이어서 시동을 걸었을 텐데. 진짜 공대생이 들으면 뭔 헛소리냐고 혀를 찰 생각을 했다. 그만큼 아쉬웠다.

건물 뒤편 주차장에도 갔다. 차가 거의 없었다. 교수 연구실이나 외빈용 컨벤션 홀이 있는 건물에는 고급 외제 차가 꼭 한두 대씩은 주차되어 있기 마련인데.

문득 중앙 도서관에서 김나혜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바이러스가 퍼졌을 때, 높은 사람들은 이미 다 내빼고 없었다고. 말단 직원들과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만 남아서 변을 당했다고. 그 말이 사실일 거라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삐빅. 주차장 구석에서 너무도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기둥 뒤쪽에 주차된 승용차에서 주황색 불빛이 반짝였다.

“선배, 저기요. 저 차인가 봐요.”

“응.”

다급하게 선배를 잡아끌었다. 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 같은 태도였다. 묘하게 불길했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 버튼을 누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구체화되었다. 아무리 해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덜덜덜, 부르릉. 요란한 소음만 났다. 계기판에 각종 경고 신호가 어지럽게 깜빡였다.

“배터리 방전됐네.”

“그러네요.”

“…….”

“…….”

정적이 흘렀다.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계기판만 바라보았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후배님, 자가용 가져 본 적 없지?”

“있겠어요?”

“그래. 그럴 것 같더라.”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나를 폄하했다. 그러는 선배는 차 있냐고 발끈하려다가 참았다. 지금은 쓸데없는 걸로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용지물이 된 차 키를 운전석에 대충 던져두고 내렸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가는 건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럼 루트를 어떻게 짜야 하지? 국제관? 멀티미디어 교육관? 사범대? 체육관? 머리가 아팠다. 그때 무언가 시야에 들어왔다. 주차장 벽에 기대어 세워 놓은 자전거 한 대가.

“선배, 있잖아요.”

선배도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좀 뜬금없긴 한데요. 그게, 음. 꼭 자동차를 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감염자들보다 빨리 운동장 반대편에 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뭐. 지금 저걸 타고 가자고?”

“……네.”

그가 활짝 웃었다.

“와.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

나도 어설프게 따라 웃었다. 그러자마자 선배가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는 무슨, 씨발. 좆같은 생각이겠지.”

“…….”

내 입가에서 웃음이 씻은 듯 사라졌다.

“우리 후배님은 왜 정작 중요한 데선 머리가 안 돌아갈까? 아까 눈물이랑 좆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뇌까지 바싹 말라 비틀어졌어? 나가서 눈이라도 좀 퍼먹고 올래?”

“아니, 선배. 제 말은.”

“빙판길에서 자전거는 무슨 자전거야. 여기서 자전거 타고 페달 한 번 밟으면 데굴데굴 굴러서 순식간에 정문까지 갈 판인데. 왜, 눈 내린 거 보니까 나가서 뛰어놀고 싶어졌어? 스키도 타고, 등신 같은 눈썰매도 타고? 와, 재밌겠다.”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그래. 우리 호현이, 하고 싶은 말 다 해야지. 아무리 좆같아도 들어 줄게. 해 봐.”

선배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그를 마주 쏘아보았다.

“자전거 타고 꽁꽁 언 비탈길 달리자는 거 아니에요. 운동장에서만, 평지에서만 타자고요. 저긴 보도블록 깔린 곳만큼 미끄럽지도 않을 거예요. 운동장 가장자리로 빙 둘러서 걸어가면 시간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할 수도 있고요.”

“…….”

“선배가 말했잖아요. 저번엔 운동장에서 달려서 도망치다가 힘이 빠져서 잡혔다고요. 이번엔 힘이 안 빠지면 되잖아요.”

“타고 가다가 도중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아까 봤어요. 감염자들 운동장에 드문드문 퍼져 있는 거. 우리 발견하고 쫓아오는 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동안 자전거 세워서 다시 타든가 버리고 달려서 도망치든가 하죠.”

“있잖아, 후배님은 참.”

그가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것 같다가도, 어떤 때 보면 그냥 생각이라곤 좆도 없이 사는 것 같단 말이야.”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굴리고 있다간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배웠거든요.”

“그래서 그때도 나를 살리겠다고 뛰쳐나가서 죽었어? 아무 생각 없이?”

갑자기 딴 얘기가 나왔다. 그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 덤덤한 어조로 끔찍한 기억을 되짚었다.

“넌 누구든 공평하게 구했을 거지? 그때 네 곁에 있던 게 내가 아니었어도, 아무리 싫어하던 놈이라도, 구할 가치 없는 쓰레기 같은 새끼였어도.”

“그건 제가 기억 못 하는 일이니까 확실히 말하진 못하겠는데요. 아마 저는 그때 그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거예요.”

“…….”

“둘 다 살 수는 없고, 둘 중 하나만 살거나 둘 다 죽어야 한다면 당연히 한 명이라도 사는 게 낫잖아요. 전 그때 다쳤었고 선배는 멀쩡했으니까 선배가 사는 게 더 효율적이고요.”

“…….”

“아무 생각 없이 뛰쳐나간 게 아닐 거예요. 저는 충분히 생각한 끝에 선배를 선택했을 거예요. 선배가 제 가능성까지 안고 살아남아 주길 바라서.”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괜히 잘난 척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은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그때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뭐 그냥, 제 생각은 그렇다고요. 추측이에요.”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엇갈린 뒤로도 선배는 내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뇌리에 새기듯. 정적 끝에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그럼 페달은 누가 밟을래?”

* * *

쇠 파이프가 감염자의 다리에 꽂혔다. 양 무릎 관절이 완전히 으스러진 감염자가 신음했다. 그것은 팔로 몸을 질질 끌며 기어오려 했다. 하지만 바닥이 미끄럽게 얼어붙은 탓에 제자리에서 버둥거리기만 할 뿐 쉽사리 쫓아오지 못했다.

“정리 끝.”

선배가 한 손에 쇠 파이프를 든 채 스탠드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의 뒤로 우리 학교 야구부에서 걸어 둔 것 같은 시합용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목표에 도달하라. 승리를 쟁취하라!’ 비장한 문구 아래에 큼직하게 학교 로고가 박혀 있었다.

콘크리트로 된 스탠드 아래부터 운동장이 시작되었다. 제일 바깥에 육상용 우레탄 트랙이, 그 안쪽에 인조 잔디가 깔린 경기장이 있었다. 미끄럼 방지 처리가 되어 있어 눈이 쌓였는데도 걸을 만했다.

선배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고 안장에 올라앉았다. 정면에 널찍한 운동장이 펼쳐졌다. 한때 학생들이 땀을 흘리며 열성적으로 공을 쫓아 뛰어다니던 장소에 감염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부패하다 만 얼굴이 꽁꽁 얼어 푸르죽죽한 잿빛이 되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다행히 아직까진 거리가 꽤 있어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뒤이어 선배가 내 뒷자리에 휙 올라탔다.

“저기요, 선배님.”

“왜요, 후배님. 이번엔 또 뭐가 불만이에요.”

“왜 제가 자연스럽게 앞자리예요? 저 좀……. 아픈 것 같은데요.”

“어디가?”

선배가 죽도록 괴롭혔던 곳이요. 하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선배와 달리 수치를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럼 내가 핸들 잡을까? 쇠 파이프 들고 너 뒤치다꺼리하느라 뒈지겠는데 운전까지 해?”

선배가 짜증스럽게 빈정거렸다. 재깍 대꾸했다.

“아뇨. 제가 잘못했어요.”

“내가 또, 응? 분노 조절을 못 하잖아. 도중에 눈 돌아가면, 씨발, 핸들 꺾어서 저 새끼들 들이박고 다 같이 죽자고 나올지도 몰라.”

“타시죠. 건너편까지 모시겠습니다.”

나는 얌전히 핸들을 잡았다. 널따란 운동장을, 그 너머에 어렴풋이 보이는 본관 건물을 다시 한번 눈에 새겼다. 목표를 확인하고 페달에 발을 얹었다. 선배가 쇠 파이프를 들지 않은 팔로 냉큼 내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쳐 지나갔다. 점차 속도가 붙었다. 어정어정 돌아다니던 감염자 몇이 우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반응 속도가 느렸다. 그들이 비틀비틀 돌아볼 때쯤에 우리는 이미 멀어져 있었다.

“잠깐…….”

뭔가 이상했다.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이 어느새 다른 데 가 있었다. 긴장한 채 앞만 보고 열심히 가다가 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잠깐만요, 헉, 선배!”

핏줄이 돋은 큼직한 손으로 내 허벅지와 엉덩이를 마구 주무르다 말고, 그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왜?”

“뭐 하시는 거예요!”

그가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매를 살짝 휘어 웃었다.

“어떡하지, 현아. 나 섰어.”

“네? 지금요? 여기서요?”

“너 페달 밟는다고 엉덩이 들썩거리는 게 꼴리는데 어떡해. 네가 엉덩이 조금만 더 들어 주면 이대로 박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박고 싶어.”

“아니…….”

“그러게 누가 그렇게 야하게 생기래. 얼굴은 찹쌀떡같이 말캉거리는 게, 허벅지는 힘 들어가니까 단단해졌어. 꼴에 자기도 남자라고.”

“…….”

나는 그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벌써 우리 뒤엔 감염자 대여섯 명이 우르르 모여 따라오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간 곧 따라잡힐 터였다.

허벅지를 더듬던 손이 예고도 없이 사타구니로 들어왔다. 순간 핸들을 잡은 손이 삐끗했다. 운동장에 일직선으로 바큇자국을 남기며 곧게 나아가던 자전거가 갈지자로 비틀거렸다.

“윽!”

“이야, 우리 후배님. 운전 한번 좆같이 하네? 앞 잘 보고 가야지.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가면 어떡해.”

“제발 그 망할 손 좀…….”

앞섶을 움켜쥔 선배의 손을 뿌리칠 여유조차 없었다. 울고 싶었다. 우리가 잠시 머뭇대는 틈을 타 감염자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탐욕스럽게 울부짖는 괴성이 어깨 너머로 따라붙었다.

“캬아아악!”

선배가 내 허리를 놓고 상체를 돌렸다. 자전거가 크게 휘청댄다 싶더니,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뒤돌아보지 마.”

그가 지시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감염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디까지 쫓아왔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꿋꿋이 앞만 보고 달렸다. 끊임없이 섬뜩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쇠 파이프에 얻어맞는 소리도 여러 번 들렸다. 우리 뒤를 따라오는 기척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끄윽, 크르륵.”

시야 끄트머리에 거무죽죽한 손이 보였다. 저들 중 한 놈이 용케도 우리를 따라잡은 모양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

선배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는 내 어깨를 짚고 비스듬히 몸을 일으켰다. 아슬아슬하게 뒷좌석에 몸을 실은 채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퍼억! 뒷바퀴 쪽으로 손을 뻗던 놈이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더 빨리 밟아.”

“헉, 허억, 여기서, 더, 어떻게.”

“빨리!”

뒷바퀴에 무언가 걸렸다. 속도를 미처 못 줄이고 과속 방지 턱을 밟은 자동차처럼, 자전거가 통째로 튀어 올랐다. 시야가 마구잡이로 뒤흔들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대로 넘어지는 건가 싶었다.

“어떤 새끼 팔 깔린 거야. 신경 쓰지 마. 빨리 가!”

선배가 고함을 질렀다. 칼날 같은 바람이 우리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뒤흔들고 지나갔다.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반대편 스탠드가 점점 가까워졌다. 목적지를 20미터쯤 앞에 두고, 자전거가 갑자기 뚝 멈췄다.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어이 누군가 바퀴 아래에 몸을 던진 모양이었다.

“선배!”

다급하게 자전거에서 뛰어내렸다.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훌쩍 내려섰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눈앞에 끔찍한 풍경이 펼쳐졌다.

다섯 마리, 아니, 여섯 마리? 자전거 한 대에 감염자 여럿이 들러붙어 있었다. 바퀴에 몸이 깔린 채 한데 뒤엉켜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더욱 기세등등하게 몸부림쳤다.

본능적인 공포가 일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잡힐 순 없었다. 뻣뻣하게 굳으려는 손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자전거 프레임을 움켜잡고 그들 쪽으로 확 떠밀어 버렸다. 금속으로 된 묵직한 자전거가 그들을 덮쳤다. 누군가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썩어 문드러진 잇몸에서 앞니가 뽑혀 나가고 고름이 흘렀다.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선배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크고 단단한 손을 꽉 맞잡고 정면을 향해 달렸다. 한껏 보폭을 넓혀 큼직한 스탠드를 계단 오르듯 성큼성큼 올랐다. 눈 쌓인 길에 발을 딛자마자 살짝 미끄러졌다. 선배가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받쳤다.

“조심해.”

본관이 코앞이었다. 건물 측면에 난 유리문이 보였다. 굳게 잠긴 데다 셔터까지 내려와 있었다. 원래 쓰지 않는 문인지 앞에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된 출입 통제용 울타리를 세워 막아 두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입구를 찾을 겨를이 없었다. 지금도 뒤에선 감염자들이 어기적어기적 스탠드를 기어올라 우리를 쫓고 있었다.

“저기로 가요!”

그나마 얼음이 얇게 얼어 맨땅이 드러난 곳을 골라 밟으며 달렸다. 허리까지 오는 울타리를 짚고 휙 뛰어넘었다. 문 바로 앞까지 와서도 속도를 줄이지 못해 금속 셔터에 세게 부딪혔다. 등과 어깨에 큰 충격이 가해졌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헉, 하아, 허억…….”

쇠창살을 가로로 끼워 둔 것처럼 생긴 셔터에 등을 기댔다. 감염자 한둘이 아직도 악착같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울타리가 잠깐 동안은 저들의 접근을 막아 줄 터였다. 눈앞에 놓인 장애물을 피해 돌아가거나 뛰어넘을 지능조차 없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그래 봤자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얼른 저것들을 처치하든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야 했다. 선배가 거친 숨을 고르며 쇠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등 뒤에서 문의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와 나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셔터와 유리문 너머로 시커먼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이윽고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언뜻 보기에도 체격이 꽤 컸다. 유리문까진 열었지만 셔터를 여는 법은 모르는지, 그는 셔터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셔터 아래를 비집고 웬 하키 채가 불쑥 튀어나왔다. 뒤이어 귀를 찢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사물을 대상으로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키 채가 원한을 물씬 담아 셔터를 두들겨 패는 것 같았다.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간 셔터가 뜯겨 나가기 전에 이 주변 감염자들이 죄다 몰려올 판이었다.

“버튼요. 셔터 버튼! 문 옆에!”

안쪽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우악스레 하키 채를 내리치던 움직임이 멎었다. 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처참한 몰골이 된 셔터가 힘겹게 올라갔다.

머리를 짧게 깎은 우락부락한 체격의 남자였다. 나보다, 심지어는 선배보다도 더 컸다. 전반적으로 위압감이 넘치는 생김새였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한 감염자보다 무서웠다.

그가 입은 과잠에 큼직하게 자리 잡은 알파벳 S가 눈에 띄었다. 팔뚝에는 낯선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사투리 억양이 섞인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조차 중후하기 짝이 없었다. 왠지 ‘예, 형님!’ 하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서서히 열리는 셔터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팔을 뻗었다. 그보다 선배가 뒤에서 나를 확 떠미는 게 빨랐다.

“윽……!”

반쯤 구르다시피 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콰앙! 중심을 잡고 바로 서기도 전에 큰 소음이 났다. 바깥에서 선배가 감염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울타리를 넘어 달려온 것이 셔터에 몸을 들이박은 모양이었다. 그가 재빨리 나를 밀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저것의 아래에 깔렸을 것이다.

큰 소리를 듣고 온 것인지 울타리 너머로 다른 이들이 기웃거렸다. 그 와중에도 셔터는 답답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올라갔다. 선배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시했다.

“셔터 다시 내려.”

“선배는요?”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일단 내려!”

문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절반 넘게 올라간 셔터가 뚝 멈추더니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목과 어깨가 차례로 셔터에 가려졌다. 이대로는 감염자뿐만 아니라 그마저 들어오지 못할지도 몰랐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하키 채를 든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잠깐만 빌려 주실 수 있어요?”

“…….”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하지만 그는 하키 채를 고쳐 쥐고 직접 움직였다. 딱딱하고 무거운 하키 채가 셔터 너머에 있는 감염자의 다리를 세게 찔렀다.

“끄, 끄으…… 컥!”

발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그것은 중심을 잃고 허망하게 고꾸라졌다. 그 틈을 타 선배가 쇠 파이프로 머리를 후려갈겼다. 검은 피가 바닥에 고였다. 셔터는 이미 무릎 높이까지 내려왔다. 뒤에서 감염자들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울타리를 꾸역꾸역 넘는 게 보였다.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선배. 빨리요!”

좁아지는 틈새로 다급히 손을 뻗었다. 선배가 들고 있던 쇠 파이프를 내던지고 내 손을 붙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어 확 끌어당겼다. 그가 내게로 몸을 날렸다. 팔을 벌려 그를 품 안 가득 받아 안았다.

셔터가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 그가 발끝까지 완전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와 내가 한데 뒤엉켜 쓰러졌다. 쿵! 뒤이어 달려온 감염자들이 닫힌 셔터 위에 허망하게 몸을 부딪쳤다. 남자가 재빨리 달려가 문을 걸어 잠갔다.

우리는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내 위에 겹쳐진 선배의 가슴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 심장까지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슬슬 불편해졌다. 내 위에 엎드린 선배가 무거웠다. 뒤얽힌 다리도 신경 쓰였다. 그 와중에 키 차이가 나서 그의 발이 내 발보다 더 밑에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불편함이 가중되었다.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저, 선배.”

“왜.”

그가 뚱하게 대답했다. 호흡이 좀 거친 것 빼고는 멀쩡했다. 혹시 너무 힘들어서 탈진해 버린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비켜 주세요. 숨 막혀요.”

“싫어.”

그는 퉁명스레 받아치더니, 내 목덜미에 고개를 폭 파묻어 버렸다.

“네가 너무 예쁘고 따뜻해서 떨어지기 싫어.”

필터를 전혀 거치지 않은 말이었다. 둘만 있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남자가 덤덤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못 일어나시겠습니까? 두 분 동시에 들어 드릴까요.”

* * *

남자와 함께 본관 로비로 들어갔다. 여기도 전기가 나간 건 매한가지인지 사방이 어두웠다. 그나마 지금이 낮이라 유리문 너머로 빛이 들어왔지만, 밤이 되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되리라.

남자는 생긴 대로 과묵했다.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애초에 그가 말을 많이 하는 건 내 앞에서만이었다. 선량함이나 부드러움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키 크고 덩치 큰 남자 둘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숨이 턱턱 막혔다. 둘만 놓고 보면 평범한 대학생이 아니라 어둠의 세계에서 굴러먹다 온 사람들 같았다.

그들 사이에 끼어 눈치만 보다가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마침 남자의 등짝에 새겨진 학교 이름이 눈에 띄었다.

“세민대생이세요?”

“예.”

“아니, 거기서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도심 한복판에 있는 대학교 학생이 이 외진 곳까지 올 일이 뭐가 있을까. 평소에 원한이 있던 사람을 산에 파묻으러? 생긴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만, 아무리 해도 흉흉한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우아하게 예술 활동에 몰두하는 선배를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동계 합동 훈련이 있어서요. 그 김에 계절 학기 학점 교류 신청도 했습니다.”

예상외로 너무나 건전한 이유였다. 훈련에 계절 학기라니. 나보다도 더 성실한 것 같았다. 나는 종강하자마자 일단 뻗어서 잔 뒤에 짐 싸 들고 시골 할머니 집 놀러 갈 생각만 했는데.

“체대시죠? 실례지만 몇 학년이세요?”

“1학년인데요.”

“네? 1학년이라고요? 새내기?”

“예.”

“스무 살? 아, 이제 해 바뀌었으니까 스물하나?”

“예.”

“…….”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보다 네 살이 어리다고? 고등학교 졸업한 지 1년도 안 됐다고? 저 얼굴로? 저 덩치로? 저 목소리로? 새까만 정장 입히고 인이어만 끼워 놓으면 어느 경호 업체 실장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빈입니다.”

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중한 인사를 받으니 머쓱해졌다. 나이든 학번이든 이 상황에선 아무 소용이 없는데. 괜히 다른 얘기를 꺼냈다.

“다른 사람들은 없어요?”

“아뇨, 위층에.”

“위에 있어요? 여기도 전기랑 물 끊겼죠?”

“예.”

“아, 맞다. 저는 이 학교 경영학과 학생이고요. 정…….”

“현아.”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선배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한테도 물어봐 줘.”

“네?”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게 되물었다. 선배가 가볍게 인상을 썼다.

“나한텐 왜 안 물어봐? 나랑 얘기할 땐 맨날 바짝 쫄아선 네, 아니요만 하면서, 저 새끼한텐 궁금한 게 뭐가 그렇게 많아. 즉석 인터뷰라도 하게?”

“……뭘 물어봐 드리면 될까요?”

“아무거나. 네가 궁금한 거 뭐든지 다. 좋아하는 색이나 해 보고 싶은 자세 같은 것도 괜찮아. 아, 내 사이즈도 알려 줄 수 있어.”

“선배!”

나는 기겁했다. 얼핏 듣기엔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말이었지만 뉘앙스가 대놓고 불건전했다. 초면인 제삼자를 옆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한빈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선배의 말을 못 들은 건지 듣고도 이해하지 못한 건지 딱딱한 무표정 그대로였다.

우리는 난간에 의지하여 캄캄한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랐다.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사방이 조용했다. 벽과 바닥에 묻은 시꺼먼 핏자국만 없었다면 그냥 업무 시간이 끝나 문을 닫은 건물처럼 보일 터였다.

로비에서 멀어질수록 빛이 줄어 어두워졌다. 이러다가 불시에 기습을 받아도 제때 반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기 시작할 무렵, 발치에 발그스름한 불빛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불을 붙인 초가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채 층계를 따라 놓여 있었다.

3층 문 앞에 바짝 붙어 선 한빈이 작게 노크를 했다. 똑똑똑. 잠시 후 안에서 똑, 하고 마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다녀왔습니다. 1층에서 다른 생존자 두 분 데려왔는데요.”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후 문 너머로 둔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태는요? 다쳤어요?”

한빈은 우리를 돌아보았다. 선배나 나나 눈 쌓인 운동장을 가로질러 자전거를 타고, 빙판길을 달리고, 셔터 아래로 몸을 던지기까지 한 터라 결코 깔끔한 몰골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상도 없었다.

“아뇨.”

“…….”

저들끼리 의논하는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곧 문이 열렸다. 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듯했다.

학교를 상징하는 건물답게 본관 복도는 넓었다. 방어 목적인지 한기가 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창문을 모두 닫고 커튼을 쳐 놨다. 그 대신 드문드문 놓인 초가 실내를 밝혔다. 어두운 복도 곳곳에 주황색 촛불이 어른거렸다.

여러 쌍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각자 편한 자세로 앉거나 서 있었다. 심지어는 양다리를 쭉 뻗고 앉아 촛불 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말끔한 행색에 다친 곳도 없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였다.

“밖에서 고생 많으셨죠? 얼른 들어오세요.”

학교가 이 꼴이 된 후로 타인에게서 적의나 경계는 받아 봤어도 환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여긴…….”

“아, 괜찮아요. 여기 좀비 없어요. 저희가 1층부터 싹 정리했거든요. 지금은 계속 여기서 지내고요.”

“정리했다고요?”

“네. 한번 둘러보실래요?”

송창민이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는 한 손에 플래시라이트를 들고 자연스럽게 우리를 안쪽으로 데려갔다. 본관 3층에는 사무실과 당직실, 세미나실이 있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처음엔 다른 데 있다가, 이러다간 진짜 죽겠다 싶어서 사람들이랑 힘 모아서 본관 탈환했어요. 여기가 건물도 제일 크고 캠퍼스 중앙에 있으니까 구조될 가능성도 높을 것 같았거든요. 3층은 생활 공간으로 쓰고 있고, 1층이랑 2층은 비어 있긴 한데 주기적으로 순찰 돌아요.”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들으며 열린 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한때 교무처 사무실이었던 곳엔 생존자들이 모아 놓은 것으로 보이는 물자가 가득했다. 쇠 지렛대, 각목, 망치 같은 무기도 종류별로 보관해 두었다.

어느덧 우리는 복도 끝에 도착했다. 소회의실 표지판을 단 문이 좌우로 늘어섰다. 송창민은 그 문 중 몇 개를 가리켰다.

“여기서 여기까지 다 비어 있어요. 마침 두 분 다 남자분이시니까, 마음에 드는 곳 아무 데나 골라서 같이 지내시면 될 것 같네요. 저희도 보통 둘이나 셋이서 방 하나 쓰거든요.”

대화에 낄 의지가 없어 보이는 선배 대신 내가 그의 말을 받았다.

“네? 방을 각자 쓴다고요?”

“위험할 거 없으니까요. 어차피 빈 회의실도 남아돌고요. 한데 모여 있어 봤자 스트레스받기밖에 더 하나요.”

기가 막혔다. 내가 무슨 호텔에라도 온 줄 알았다. 캠퍼스 전체에 전기와 수도가 뚝 끊기고 사람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는데, 여기는 평화롭다 못해 호화로웠다. 기숙사 샤워실과 열람실 바닥에 웅크려 자고, 중앙 도서관 기계실에서 박스를 깔고 자고, 70주년 기념관 사무실 의자에 앉아 불편하게 쪽잠을 자던 나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또 뭐 있더라. 맞다. 물은 매일 낮 12시에 복도에서 나눠 줘요. 저기 벽시계 보이시죠? 저 시계로 12시요. 펑펑 쓸 만큼 많지는 않은데, 마시고 씻을 정도는 돼요.”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수도 끊기기 전에 미리 통에 받아 놓은 것도 있고, 번갈아 가면서 밖에 나가서 눈 퍼 오기도 해요. 눈은 모아서 녹인 다음 가스버너로 한 번 끓여서 써요.”

아까 복도에서 언뜻 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극한 상황에 조난당한 이들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체계적이시네요. 믿기지 않을 정도로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싸움 안 나요?”

송창민은 그게 대체 무슨 살벌한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싸움이라뇨? 부족한 것도 없고, 각자 제 역할 잘해 나가고 있는데 싸울 일이 뭐가 있어요. 이런 때일수록 사이좋게 지내야죠.”

심드렁해하는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선배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복도가 조용했던 탓에 너무도 잘 들렸다. 그가 이곳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좆 까고 있네.”

“…….”

“…….”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나는 한순간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송창민의 미소에도 금이 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아, 저……. 죄송해요. 저래 봬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송창민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해해요. 상황이 상황인데 당연히 예민해질 수도 있죠. 이따가 다른 애 시켜서 기본적인 생필품들 갖다 드릴게요. 피곤하실 텐데 일단 쉬세요. 자세한 얘긴 나중에 해요.”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중앙 복도로 돌아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자전거 하나만 믿고 막무가내로 운동장을 달리던 아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현실감이 없었다.

“선배.”

비상구 유도등에 선배의 무표정한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건물 전체가 정전이 된 탓에 여기서 멀쩡한 거라고는 비상 전력으로 가동하는 비상구 등과 출입문 셔터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그를 끌고 빈방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그나마 복도에는 촛불이나 비상구 등이라도 있었지만, 여기는 광원이 아무것도 없었다. 들어와서 문을 닫자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 우리 둘만 있게 됐네.”

선배가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무심코 뒤로 물러섰다. 등 뒤에 폭신한 벽이 닿았다. 스피커나 마이크 같은 음향 장비가 있는 회의실답게 벽에 방음 처리가 되어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드디어 나한테 질문할 마음이 들었어? 뭐가 궁금해?”

그가 내게로 몸을 붙여 왔다. 옷자락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니까, 제가 묻고 싶은 건요.”

“응. 후배님.”

“아까 왜 그런 말을 했어요? 저 사람들 알아요?”

“…….”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작게 이를 갈았다.

“씨발, 웬일로 먼저 예쁜 짓을 하나 했더니. 그래. 꼭 이렇게 분위기를 좆창 내 놔야지. 그래야 정호현이지.”

“대답해 주세요. 알아요?”

“아니. 내가 저런 새끼들까지 알아야 할까?”

그는 심기가 틀어져서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나는 고쳐 물었다.

“그럼 예전에 여기 왔던 적은 있어요?”

“없어.”

“…….”

“근데 쟤네들 본 적은 있어. 체육관에서.”

체육관은 겨울 방학을 맞아 건물 보수 공사를 하던 중이었다. 지금도 공사 중인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을 터였다. 선배는 그곳에서 철근에 배가 뚫려 죽었다고 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저 존나게 구린 옷 보고 알았어.”

“무슨 옷이요?”

“아까 그 새끼가 입고 있던 거. 썩은 매생이 으깬 것 같은 색.”

송창민이 입은 옷이 떠올랐다. 위아래 한 벌로 된 짙은 녹색 트레이닝복이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복도에서 보았던 사람들 중 몇 명도 그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아…….”

“그거 체대 단체복이잖아.”

그나저나 썩은 매생이라니. 난 그냥 진한 카키색이구나 하고 말았는데. 미대생이라 그런가, 선배의 표현력은 참 대단했다. 내 몸의 특정 부위 색에 집착할 때부터 알아봤다.

“사태 발생했을 땐 체육관에 있다가, 거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본관으로 옮겨 온 걸까요? 그 세민대생도요.”

“글쎄. 그런데 있잖아. 내가 체육관에서 마주쳤을 땐 그 새끼들, 한 놈 둘러싸고 죽어라 패고 있었거든.”

“네?”

“그랬던 새끼들이 이제 와서, 뭐? 사이좋게 지내야죠? 그 염병을 떨고 자빠졌는데 웃음이 나와, 안 나와.”

선배가 끔찍한 일을 태연하게 입에 담았다. 수더분하게 웃던 송창민의 모습과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저번엔 그랬지만 이번엔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이제껏 느낀 건…… 시간을 아무리 되돌려도,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도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거야. 내 예쁜 호현이는 몇 번을 뒤졌다 살아나도 매번 도덕 챙기느라 헛짓거리 하고, 병신 새끼들은 매번 병신같이 굴고.”

반박하고 싶은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떨떠름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운이 좋아서 전보다 여유로워졌을 순 있겠지. 근데 저 새끼들은 원래 근본부터가 그런 새끼들이야.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상황만 갖춰지면 얼마든지 돌변할 준비가 돼 있다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믿어?”

“안 믿어요.”

나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선배는 조용히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껏 생각한 것을 찬찬히 꺼내어 놓았다.

“이상한 건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눈치챘어요. 선배 말 듣고 확신했고요.”

문이 열리고 처음 복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를 되짚어 보았다. 송창민이 망설임 없이 다가와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처럼. 열 명이 넘는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신기해서 인사를 건네거나 말을 걸어 볼 법도 한데, 다들 그의 결정에 납득하고 묵묵히 하던 일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 또한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생필품을 갖다 주겠다니? 꼭 부하 직원에게 손님 접대를 명령하는 상사 같은 발언 아닌가.

“리더가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기숙사 열람실에서도 제일 학번이 높은 사람이 리더 역할을 했잖아요. 그런데 저 정도면…… 단순히 리더가 있는 수준을 넘어서, 서열이 꽉 잡혀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도 이상했다. 지금 캠퍼스에는 맨몸으로 문을 부수고 사람을 뜯어 먹는 괴물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런 자들로부터 본관 건물을 탈환하면서 부상자가 한 명도 안 나왔다고? 싸움에 도가 튼 선배는 예외로 두더라도, 당장 나만 해도 허벅지가 칼에 찔려 피를 한 바가지 흘린 적이 있는데.

“부상자가 없는 건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들 전투력이 뛰어나고 군기가 잘 잡혀 있어서 기적적으로 아무도 안 다쳤거나, 다친 사람은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수 없게 되었거나.”

선배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방 안이 어두워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헛다리를 짚었나 싶어 불안해졌다.

“제 생각이 틀렸나요?”

“아냐, 아냐. 잘했어. 야무지게도 추리했네. 우리 후배님이 좀 정신머리가 빠져서 자꾸 쓸데없는 데 한눈을 팔아서 그렇지, 원래 머리는 좋다니까.”

이건 칭찬일까, 욕일까. 하긴 뭐 이번에도 욕일 게 뻔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뭐든지 좋아. 죽겠다고 설치는 것만 아니면.”

“그게 무슨…….”

“네가 주인공이잖아.”

선배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딱 잘라 말했다.

“호현아, 나는 네가 죽으면 죽어. 네가 살면 나도 살고. 내 세계에선 네가 주인공이야.”

내겐 그 반대였다. 선배는 뭐든지 척척 해내는 유능한 주인공이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주인공을 헐레벌떡 따라다니기만 하는 엑스트라가 된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기숙사 방을 나섰다가 복도에서 그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그랬다.

이제껏 만난 다른 사람들에겐 마음을 열지 않고 그저 적당히 대했다. 내게 그들은 생존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임시로 뭉친 타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 하나 살아남기도 바쁜데 그들이 각자 품은 사연이나 고민 따윈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신경 쓰였다.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궁금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나도 그에게 휘말려 있었다. 울고, 웃고, 키스하고 몸을 섞고, 날것 그대로의 밑바닥을 드러내 가며 부딪쳤다.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정신을 차려 보니까 여기까지 왔더라, 그 말밖에는.

“왜 하필 저일까요? 왜 제가 죽으면 선배가 돌아갈까요?”

“몰라. 네가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인가 보지. 네가 죽으면 아예 세상이 멸망한다든가. 멸망을 막으려면 네가 살아 있어야 해서 계속 세계가 리셋되는 거고.”

“그게 뭐예요. 무슨,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같은 것도 아니고.”

위태롭게 흐르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졌다. 무심결에 웃어 버렸다.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선배도 픽 웃었다.

“사실 난 상관없어. 네가 뭐든.”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쌌다. 단단한 손가락 끝이 귀 뒤쪽의 예민한 살갗을 스쳤다. 윗입술에 타인의 숨결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입술이 닿았다.

“아……!”

그는 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고 비비적거리다 혀를 밀어 넣었다. 맥없이 벌어진 입술을 헤집고 들어와서 속살을 잔뜩 빨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벽에 기대선 내 위로 그가 자연스럽게 몸을 겹쳤다. 내가 미적미적 몸을 빼는 걸 민감하게 알아채고 내 허리를 한 팔로 확 휘감아 당겼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그의 허벅지가 우악스레 파고들었다. 단단한 근육에 사타구니가 적나라하게 문질러졌다.

그가 손을 내려 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지그시 허리를 놀려 아래를 부딪쳐 왔다.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고 맞닿은 앞섶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헉, 흐으…….”

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헐떡였다. 그 바람에 젖은 입술이 떨어졌다. 그가 내 입술 바로 위에 낮은 속삭임을 흘렸다.

“뭘 떨어. 더 꼴리게.”

퍽, 퍽. 허벅지 안쪽이 연거푸 끈적하게 짓이겨졌다. 너무 크고 단단해서 아팠다.

“선배가…… 계속.”

“계속해 달라고? 으응, 알았어.”

“제 말 좀…… 읏, 흐윽, 말 좀 들어 주세요!”

“또 간식 뺏긴 햄스터 같은 표정 하고 있지? 안 봐도 알아. 넌 기겁을 해도 꼭 존나 귀엽게 한단 말이야.”

간식 뺏긴 햄스터……. 기운이 쭉 빠졌다. 저게 키 크고 건장한 군필 남대생한테 할 말인가. 나만 보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할머니께서도 날 강아지라고 부르면 불렀지 햄스터라고 한 적은 없으셨는데.

“자빠뜨려서 좆 빨고 싶어. 너 앙앙 울면서 쌀 때까지.”

시도 때도 없는 음담패설에 어질어질해졌다. 미친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내 몸은 착실히 반응했다. 키스하고 몸 좀 비빈 것뿐인데, 이러다가 속옷을 적실 판이었다. 사실 더 미친 건 내가 아닐까.

“빨아도 돼? 그래. 빨게.”

선배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멋대로 상큼하게 결론을 내렸다.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던 손이 앞으로 향했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급하게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때 등을 타고 진동이 전해졌다. 똑똑똑.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새로 오신 분들, 여기 계세요? 다른 방엔 아무 데도 안 계시길래.”

방음 처리가 된 벽 너머로 둔탁한 소리가 흘러들었다.

“저기요? 쓰실 물건 가져왔는데요.”

“네! 여기 있어요!”

나는 재빨리 뒤돌아 문을 열었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사람들인데, 일단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반가웠다. 벌컥 열린 문 너머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캄캄한 회의실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씨발.”

선배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물건을 가져온 사람만이 영문을 모른 채 문간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가져온 것만 전해 주고 곧 돌아갔다. 여기엔 지시를 받아서 온 것뿐이고, 필요 이상으로 말을 섞지 않겠다는 태도가 확고했다. 양초에 불을 붙여 테이블 가운데 올려 두었다. 테이블, 의자, 모니터만 있던 회의실에 어울리지 않게도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배급받은 생필품 중에는 수건과 세면도구, 물이 가득 든 페트병, 심지어는 새 속옷과 양말까지 있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걸까. 한 층 아래에 있는 ROTC 사무실? 아니면 직원용 당직실?

“저 사람들,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요?”

이쯤 되자 불안해졌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 탓이다.

“우리한테 바라는 게 있겠지. 곧바로 죽여 버릴 거였으면 이런 물건을 줄 리가 없으니까.”

“주더라도 밥 한 끼 정도만 줬겠죠. 그것만으로도 경계 풀게 하는 덴 충분할 테고. 그런데 굳이 생활용품까지 준다는 건.”

촛불은 테이블 위에서 고요히 타올랐다. 발그스름한 불빛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했다. 선배가 빙긋 웃었다.

“두고두고 뒈지게 부려 먹겠다 이 말이네.”

* * *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누군가 우리 방문을 두드렸다. 그를 따라 복도 중앙으로 나갔다. 복도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동그랗게 앉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실상이 어떻든 간에 겉보기엔 마치 MT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는 것 같았다.

나를 발견한 송창민이 손을 흔들었다. 자신 옆의 빈자리를 권하기에 다가가 앉았다.

“초를 여기저기 많이 쓰시네요.”

“사무실마다 정전 대비용 양초가 잔뜩 있더라고요. 플래시라이트는 나중을 대비해서 아껴 놓고, 일단 양초부터 쓰고 있어요.”

“낮에는 커튼 열어 둬도 되지 않아요? 초 아깝잖아요. 실내 온도 떨어져서 그러시는 거예요?”

“네, 그런 것도 있고요. 바깥 공기 쐬고 싶으시면 잠깐 정도는 열어도 상관없는데 너무 오래는 열지 마세요. 저희도 다 이유가 있어서 커튼 쳐 놓은 거니까.”

더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묵묵히 내 앞으로 배당된 음식을 받았다. 오늘의 메뉴는 미트볼 통조림이었다.

곧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미트볼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주위를 살폈다. 선배와 송창민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낯선 얼굴들이었다. 성별도 나이도 다양했다. 체대 단체복을 입은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었다.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송창민에게 물었다.

“한빈 씨는요?”

“네?”

“세민대생이요. 저희 데리고 왔던. 지금 어디 있어요?”

“아, 그분이요. 그분은 식사 안 해요. 지금 창고 정리하고 계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1층 출입문 셔터가 좀 망가졌더라고요. 물어봤더니 그분이 자기가 실수로 그랬다고 자백하셨고요.”

“그래서요?”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반대편을 흘긋 곁눈질했다. 선배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느라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지, 그 몫의 통조림은 뚜껑조차 열려 있지 않았다.

“외부의 침입을 막아 주는 소중한 셔터를 망가뜨렸으니까, 그만큼 반성을 해야죠.”

송창민이 웃는 낯으로 태연하게 설명했다.

“그것 때문에 식사를 못 하게 했다고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잘한 것도 없는 사람을 왜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줘요?”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송창민의 말수가 늘어났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 다 같이 죽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프리라이더들 때문이에요. 물자만 꼬박꼬박 축내는 것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열심히 제 할 일 하는 사람들이 억울해지잖아요.”

“…….”

“저흰 안 그래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합리적이죠?”

얼핏 들으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두가 목숨 걸고 감염자를 처치하고 물자를 찾아오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혜택을 나누는 건 불공평했으니까. 하지만 그 논리를 굳이 이 상황에까지 적용해야 했나? 악의적으로 셔터를 훼손한 것도 아니고,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져 타인을 구한 사람에게까지.

“그래도 좀비 막느라 셔터 겉만 좀 찌그러진 것뿐이고, 기능엔 별문제 없던데요.”

반박의 말은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왔다. 미트볼을 깨작깨작 집어 먹던 남학생 하나가 그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웃고 있던 송창민의 얼굴이 딱 굳었다.

“뭐, ‘요’? 씨발, 지금 ‘요’가 어디서 나와. 너희 직속 선배가 그따위로 가르쳤냐?”

“헉…….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따 내 밑으로 네 위로 다 집합하라고 해.”

“…….”

“안 들려? 야, 저 새끼 직속 누구야. 누구냐고!”

조용히 오가던 젓가락질이 뚝 멎었다. 맞은편에서 머리를 짧게 자른 여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섰다.

“접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애들 교육 제대로 해라, 응? 뒈지게 구르기 싫으면.”

“알겠습니다.”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촛불이 따뜻하게 타오르는 건 아까와 같은데, 이상하게도 실내 온도가 몇 도쯤 내려간 것 같았다.

예체능 계열이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건 알고 있었다. 체대나 연영과는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제일 군기를 덜 잡는다는 미대조차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최다빈이 선배를 꼬박꼬박 ‘기영원 선배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둘은 같은 과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저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신입생도 많고 편입생도 많고 복전생도 많아서, 200명짜리 전공 수업에 들어가면 누가 선배고 누가 후배인지도 분간 안 가는 우리 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악귀처럼 일그러졌던 송창민의 얼굴에 다시 여유가 돌아왔다. 그는 나를 돌아보고 난처하게 웃었다.

“아, 놀라셨죠. 저희 애들이 좀 거칠어서, 가끔 한 번씩 잡아 놔야 해요. 저희 문제니까 저희끼리 잘 해결할게요. 신경 쓰이실 일 없게요.”

부드럽게 돌려 말했지만 핵심은 그거였다. 넌 제삼자니까 신경 끄고 입 다물고 못 본 척하라고. 전공이, 학과 따위가 다 뭐라고 캠퍼스가 이 지경이 된 와중에까지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가. 어이가 없었다.

생수병 뚜껑을 열어 마시다 말고, 선배가 병 입구에 입술을 댄 채 픽 웃었다. 송창민의 시선이 곧장 그리로 향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선배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냐, 계속해. 지랄 염병도 자꾸 보니까 웃기네.”

“…….”

다시금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차마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상대가 수상한 만큼 불필요한 관심을 끄는 건 피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었다.

* * *

본관에서의 첫날밤이 지났다.

일단은 여기 머무르기로 선배와 합의했다. 의심쩍고 아니꼬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의식주와 안전이 보장되는 환경을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정문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본관에서 오래 지낸 사람들이니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필요한 걸 얻을 때까지는 몸을 사려야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우리는 또다시 중앙 복도로 불려 나갔다. 역할을 배정받기 위해서였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싶었다.

“식량이랑 물 구해 오고 아래층 순찰 도는 것 말고도 일이 있어요. 제일 중요한 일요.”

송창민은 굳게 닫힌 문 너머에 있을 계단을 가리켰다.

“지금 여기가 3층이죠? 본관 건물은 7층까지 있고요. 저흰 매일 조를 짜서 위층을 탐색해요. 좀비 처리하고, 물건 찾으면 가져오고요. 원래는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하는데, 새로 들어온 사람 있으면 그 사람이 1주일 동안 전담해요.”

“왜요?”

“왜냐니요. 저희가 드린 생필품이 얼만데. 그 값만큼은 일하셔야죠. 4층에는 교수 연구실 있어요. 이미 반쯤은 정찰 끝나서 조금만 더 살펴보면 될 것 같아요. 안전 확보되면 4층까지 보금자리로 삼고 5층을 탐색할 거고요.”

처음 본 우리에게 다짜고짜 물건을 퍼 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미리 말해 주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게 다 빚이었다. 목숨 걸고 갚아야 할 빚. 무슨 다단계 판매원도 아니고, 수법 한번 저급했다.

선배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송창민이 뭐라 지껄이든 내내 지루한 표정으로 딴 곳만 보고 있었다. 내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태도였다. 지시에 따를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나거나, 얌전히 위층을 탐험하러 가거나.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이 오갔다. 여기서 도주를 시도한들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사지 멀쩡하고 힘 좋은 체대생이 여럿 있는데. 나가 봤자 밖에는 소복이 쌓인 눈과 좀비밖에 없는데.

게다가 한빈이 마음에 못내 걸렸다. 그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문까지 부수려 들었다. 셔터를 망가뜨린 게 우리라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불합리한 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의 안위를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요. 알았어요.”

만들어 낸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일단 여기서는 한발 물러나서 동정을 살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런데, 호현 씨.”

송창민도 나를 따라 웃었다.

“몇 살이에요?”

“네?”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나이를 안 물어본 것 같아서. 이제 한곳에서 얼굴 보고 살 사인데 나이 정도는 알아 놔야죠.”

갑자기 나이를 묻는 의도가 뻔했다. 나는 같은 과 후배가 아니니까, 다른 것으로라도 찍어 눌러서 서열 정리를 하려는 거겠지.

“얼마 전까지 스물넷이었는데요.”

“나보다 한 살 어리네. 이제부터 형이 말 편하게 할게. 그래도 되지? 호현아.”

나이를 듣자마자 송창민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놓았다. 나는 더욱 활짝 웃었다.

“네, 형. 마음대로 하세요. 기껏해야 1년 일찍 태어난 걸로 되게 유세 떠시네요. 어디 가도 국적 의심받을 일은 없겠어요.”

“뭐라고?”

송창민이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가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녹색 트레이닝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게 보였다.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그는 키는 나와 비슷했지만 체대생답게 몸집이 다부졌다. 육탄전으로 붙으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야.”

선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 너. 형이상학적으로 생긴 새끼.”

“네? 아니, 지금 뭐라고…….”

“나보다 한 살 어리네. 이제부터 형이 말 좀 편하게 할게. 그래도 되지? 좆만아?”

선배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지금까지도 말을 불편하게 한 적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송창민의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달아올랐다.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졌다. 이러다 진짜 맨몸으로 위층으로 쫓겨나는 거 아닐까. 순간적으로 욱해서 상대의 성질을 긁어 놓긴 했지만 뒤늦게 걱정되었다.

“저기, 저희 왔는데요.”

그때 뒤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빈과 처음 보는 남자 한 명이었다. 한빈은 내 시선을 받자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안색이 나빴다.

“이제 오늘 나갈 사람들 다 모였네요. 어제 새로 오신 두 분은 오늘부터 1주일 동안 탐색조고, 여기 이분들은 4일 동안 나가셨으니까 이제 3일 남았어요.”

애써 평정을 되찾은 송창민이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각종 공구류였다.

“이건 이번에 배급해 드리는 무기고요. 하나씩 가지세요. 다 같이 쓰는 거니까 망가뜨리시면 안 돼요. 위층 다녀오셔서 반납하셔야 해요. 알죠?”

한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큼직한 망치를 집었다. 그는 원래도 말수가 적은 성격인 것 같았지만 지금은 유달리 힘이 없어 보였다.

다음으로 선배가 냉큼 쇠 지렛대를 가져갔다. 저번에 중앙 도서관에도 저걸 썼던 것 같은데. 쇠 지렛대가 손에 맞는 모양이었다. 상대의 음악 취향, 음식 취향을 알아 가도 모자랄 판에 무기 취향이나 알게 되다니. 새삼 씁쓸했다.

“어떡하지. 난 힘이 없어서 무거운 건 잘 못 드는데…….”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허둥지둥하며 멍키 스패너를 골랐다. 나는 별다른 선택지 없이 남은 것을 잡았다. 눈을 퍼내는 데 썼던 것 같은 삽이었다. 마지막으로 송창민이 선심 쓰듯 플래시라이트 하나를 건넸다.

복도 끝의 문이 열렸다. 시퍼런 비상구 등 불빛이 인적 없는 계단을 비추었다. 우리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문턱을 넘었다.

“무사히 다녀오세요.”

송창민의 웃는 얼굴 앞에서 문이 닫혔다.

* * *

“어제부터 인사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 못 했네요. 새로 오신 분들이시죠? 저는 이경환이라고 해요.”

내가 대표로 플래시라이트를 들고 앞을 밝혔다. 사람들은 나를 따라 묵묵히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 와중에 낯선 남자만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하도 분위기가 살벌해서 말 한 마디를 못 하겠더라니까. 어린놈들이 벌써부터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게다가 또 텃세는 얼마나 심해요? 나랑 여기 빈이는 아주……. 아, 맞다. 두 분은 이 학교 학생이세요?”

“네.”

그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는 선배 대신 내가 대답했다.

“그럼 좀 덜하겠네. 빈이는 다른 학교에서 계절 학기 들으러 왔고, 전 이 학교 학생이긴 한데 대학원생이거든요. 학부는 다른 데서 나오고 석사를 여기서 밟고 있어요. 어휴, 타 대 출신이라고 어찌나 배척하는지. 서러워서 못 살겠어요.”

남자는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 댔다. 송창민을 비롯한 체대생들 틈에 끼어서 얼마나 기가 죽어서 지냈으면 저러나 싶어 안쓰러울 정도였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대학원요?”

“네. 저기 연구동 건물 있잖아요. 사태 터지기 직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랩실에 처박혀 있다가 왔어요.”

“혹시, 실험 사고 일어났던…….”

“거긴 바이오 쪽이라 저희랑 달라요. 저희는 전기 자동차 공학. 뭐 어차피 바로 옆 건물이긴 한데.”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저희 일 하기도 바쁜데 옆 랩실 사정까지 어떻게 신경 쓰나요. 새벽에 누가 온도였나? 조명이었나? 아무튼 조절 장치를 잘못 건드려서, 바이러스가 돌연변이 해서 비정상적으로 증식했다나? 그랬던 것 같은데.”

그쪽 전공이 아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도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라 그냥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으로만 들은 거라 정확하지 않다며 얼버무렸다.

“마지막으로 뉴스 기사 뜬 것까지 봤어요. 백일대 연구실에서 살상력 있는 바이러스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 캠퍼스 출입 전면 통제, 피해자 수는 현재 파악 중. 그 뒤로는 인터넷 끊겨서 확인 못 했고요. 이대로 있다간 진짜 죽겠다 싶어서 본관으로 왔죠.”

기숙사 방에서 깨어나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하여 학교 외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이제야 이해되었다. 그들은 뉴스 속보가 뜬 것을 보고 혹시 나도 바이러스에 당한 게 아닌가 싶어서 급하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한빈 씨는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창고 정리하셨다면서요. 많이 힘드셨어요?”

“…….”

창고 정리. 그 말을 듣는 순간 한빈의 표정이 딱 굳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 채 고개를 저었다. 차마 더는 물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덧 4층 복도에 도착했다. 플래시라이트에서 뻗어 나온 희미한 빛이 캄캄한 복도를 비추었다. 벽과 바닥에 군데군데 거무죽죽하게 피가 묻은 게 보였다. 창문이 깨져 찬 바람이 고스란히 들어오는 곳도 있었다. 목이 잘린 채 쓰러진 감염자의 시체가 보였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여긴 교수 연구실만 있는 층인데요. 거의 비었더라고요. 교수들은 사태 터지자마자 자기들끼리 연락 쫙 돌려서 튀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학연 없고 지연 없는 불쌍한 우리 지도 교수님은 제때 못 튀고 남아 계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셨나 몰라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경환이 내게 붙어 줄기차게 소곤거렸다. 선배는 결코 말을 걸기 쉬운 인상이 아니고 한빈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니, 그나마 만만한 나를 대화 상대로 삼은 것 같았다.

“입구 쪽은 며칠 전부터 저랑 빈이가 정리했어요. 아무것도 없을 거예…… 으악!”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기다렸다는 듯 감염자가 튀어나왔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퍽! 힘껏 휘두른 삽이 감염자의 목덜미에 꽂혔다. 이경환을 막 움켜쥐려던 팔이 허공에서 맥없이 버둥거렸다.

“컥, 커걱.”

삽날은 생각보다 쉽게 빠지지 않았다. 자루를 쥐고 잡아당기자 그것의 몸이 삽에 꿰인 채 통째로 끌려왔다. 잿빛으로 얼룩진 눈알과 시선이 마주쳤다. 섬뜩했다.

마음을 다잡고 명치를 세게 걷어찼다. 발에 묵직한 감각이 걸렸다. 감염자가 쩍 벌어진 목의 상처에서 검은 피를 질질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수직으로 세운 쇠 지렛대로 목을 내리찍어 마무리했다.

“헉, 허억, 흐으…….”

다리가 풀린 이경환이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쓰고 있던 안경이 삐뚤게 흘러내렸다. 조용히 다가갔다. 그가 반사적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나는 그를 한 번 가리키고, 내 입매를 가리키고, 가로로 쭉 그어 지퍼를 닫는 시늉을 했다. 이경환이 넋이 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야 주변이 좀 조용해졌다.

어둠을 뚫고 그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 교수는 보이지 않았다. 아래층 사무실에서 도망쳐 올라온 직원들이거나, 기껏해야 조교로 추정되는 사람 정도였다. 이경환이 말한 대로 교수들은 진작 다 내뺀 모양이었다.

복도 좌우에 늘어선 연구실 문을 플래시라이트로 비췄다. 안의 동향을 살펴 감염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방 안도 마찬가지로 캄캄했다. 교수 연구실답게 전면에 커다란 원목 책상이 놓여 있고, 벽 한 면을 차지한 책장에는 전문 서적이 가득했다. 연구실마다 있는 작은 냉장고를 열자 음료수나 과자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얼른 챙기죠.”

“내가 가방 가져왔으니까, 여기 담을게.”

이경환이 등에 멘 백팩 지퍼를 열었다. 우리가 물자를 챙기는 동안 한빈과 선배는 복도에서 망을 보았다. 찌익, 슥, 스윽. 바닥에 천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감염자 두엇이 복도 저편에서 기어오고 있었다. 둥그런 플래시라이트 불빛 아래에서 부패한 사지가 삐걱거렸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한빈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서슴없이 망치를 휘둘렀다. 상대는 망치질 몇 번 만에 목뼈와 신경이 통째로 으깨진 채 축 늘어졌다. 날붙이도 아니고 둥그스름한 망치로 감염자를 무력화하다니. 보통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와, 역시 체대생.”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옆에서 수박 깨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콰직! 잘린 머리가 내 쪽으로 굴러왔다.

“헉.”

소스라치게 놀랐다. 끔찍한 광경은 숱하게 봐서 이젠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시커먼 어둠 속에서 머리통이 굴러다니는 데는 영 적응하기 힘들었다. 건너편에서 선배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잘했지?”

“네?”

“미대생도 칭찬해 줘.”

“칭찬요?”

“빨리.”

그가 나를 재촉했다. 한빈은 그 옆에서 덤덤한 표정으로 정면을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웃으며 속삭였다.

“대단하세요.”

선배가 쇠 지렛대를 휘둘러 까맣게 묻은 피를 떨며 씩 웃었다. 내가 처한 상황도 잊고 한순간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우리는 연구실을 차례차례 뒤졌다. 어떤 곳은 녹차 티백 몇 개 말고는 건질 만한 게 없었고, 어떤 곳에서는 무려 양주병이 나왔다. 냉장고 전원이 끊긴 지 오래되어 미지근했지만 상태는 양호했다. 알코올은 마시는 용도 외에도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 꼭 챙겨야 했다. 이경환이 멘 백팩에 큼직한 위스키병이 들어갔다.

우리는 차근차근 수색을 진행했다. 별게 없다는 이경환의 말대로, 복도도 연구실 안도 조용했다. 감염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서 생지옥 같던 기숙사 식당이나 중앙 도서관 1층 열람실에 비하면 텅 빈 수준이었다.

사고는 이제 4층이 거의 다 정리됐다 싶을 때쯤, 찾은 물자를 가지고 무사히 아래층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될 때쯤에 일어났다. 나는 연구실 냉장고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이경환은 쪼그려 앉아 각종 잡동사니가 든 서랍을 뒤적이고 있었다. 불 꺼진 냉장고 구석에서 500밀리리터짜리 생수병 몇 개를 찾아내고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저…….”

그때 보았다. 이경환의 바로 옆에 있는 책상 밑에서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시커먼 형체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실수였다. 책상 앞에 의자가 얌전히 놓여 있기에, 그 아래에 누군가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감염이 진행되어 심장이 멎을 때까지 책상 아래에 숨어 있다가 그대로 좀비가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소리를 내서 내 쪽으로 유인해야 할까. 아니면 일단 선제공격부터 해야 할까. 섣불리 무기를 휘둘렀다 오히려 더 흥분해서 이경환을 해치는 건 아닐까.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오갔다.

살이 시커멓게 말라비틀어져 뼈대가 드러난 손이 그가 맨 백팩을 건드렸다. 달칵, 덜그럭. 위스키병이 다른 물건들과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응? 뭐지?”

이경환이 한 손에 손톱깎이 세트를 든 채 돌아보았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목구멍이 낱낱이 들여다보이도록 입을 쩍 벌린 감염자의 모습이었다.

“캬아아악!”

“허, 허억…….”

그는 패닉에 빠져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감염자가 바닥을 짚고 기어 달려들었다. 그는 허겁지겁 굴러 간신히 빠져나왔다.

“이쪽으로 와요!”

이경환이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보다 감염자가 그를 뒤에서 덮치는 게 빨랐다.

“악!”

다행히 등에 백팩을 메고 있어 곧바로 물리지는 않았다. 감염자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백팩에 얼굴을 파묻은 채 버둥거렸다. 시커멓게 피가 말라붙은 손톱이 이경환의 팔다리를 옷 위로 마구 할퀴었다.

“빨리요!”

이경환이 비틀대며 급하게 뒷걸음쳤다. 그는 뒤에 있던 책장에 등을 부딪쳤다. 쿵! 원목으로 된 책장이 휘청댔다. 칸마다 놓인 물건들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작정 그를 따라온 감염자가 책장에 어깨를 세게 찧었다. 흔들림이 더욱 심해졌다.

큰 소리를 들은 선배와 한빈이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묵직한 책장이 이경환과 감염자의 위로 기울어 쓰러졌다. 콰앙! 둔중한 소음이 층 전체를 뒤흔들었다.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꽃병과 금속 조각상, 하드커버 전공서 수백 권. 하나같이 무거운 것들뿐이었다. 연구실 안이 엉망이 되었다.

“아, 안 돼…….”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나는 무너진 책장에 달려들었다. 내 힘으로 책장을 들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손마디가 새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어 몇 번이고 일으키려 했다.

“으, 흑.”

맨손으로 용을 쓰다가 안 되겠다 싶어 들고 있던 삽을 끼워 넣었다. 그것을 지렛대 삼아 책장을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자루 부분이 나무로 된 낡은 삽이 책장 무게를 못 버티고 꺾였다. 어느덧 옆에 다가온 한빈이 나를 도왔다. 그가 험악한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쩔쩔매며 나를 말렸다.

“저, 형님. 손 다치십니다.”

“이경환 씨 이 아래에 있어요. 감염자랑 같이 깔렸어요. 빨리, 이거 빨리 세워야 해요.”

그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람이 변을 당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잡담을 주고받던 사람이. 침착하고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좀비에 물린 사람은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다지만, 책장에 깔린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빨리 대처한다면 살릴 수 있었다. 간신히 책장을 한 뼘쯤 들어 올린 내 손에 이경환의 생명이 달려 있었다.

갑자기 몸이 뒤에서부터 끌어안겼다. 선배가 나를 부둥켜안아 책장에서 강제로 떼어 놓았다. 지나치게 힘을 쓴 탓에 책장을 놓은 뒤에도 양손과 팔,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떨어져. 너까지 위험해.”

“선배…….”

“내가 할게. 떨어져 있어.”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 내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을 터였다. 반면 선배는 언제나처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의 까만 눈과 시선을 마주치고 있으니 점차 이성이 돌아왔다. 헉, 헉, 불안정하게 터지던 호흡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선배의 손을 간신히 찾아 쥐었다. 내 손아귀에 온통 시뻘겋게 피가 맺혀 있었다. 이 꼴이 됐는데 아픈 줄도 몰랐다.

선배와 한빈이 책장을 각자 한쪽씩 들었다. 건장한 청년 둘이 힘을 합치고도 버거웠다. 그래도 나 혼자 고군분투할 때보다는 나았다. 책장이 힘겹게나마 조금씩 올라갔다. 가장 먼저 쓰러진 감염자가 보였다. 앞발을 든 말 모양의 조각상이 머리에 떨어져 두상이 움푹 패었다. 그 상태로도 용케 바르작거렸다.

선배가 그것의 목덜미를 세게 짓밟았다. 책장을 받치고 있어 두 손을 쓸 수 없는 대신 발로 콱 걷어차 바깥으로 밀어냈다.

“처리해.”

그가 내게 턱짓했다. 바로 앞의 바닥에 그가 쓰던 쇠 지렛대가 놓여 있었다. 반사적으로 주워 들었다. 선배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어 따뜻했다. 나는 멍하니 쇠 지렛대를 들어 올렸다. 둥그스름하게 휘어진 끝부분으로 감염자의 목 뒤쪽을 세게 찍었다. 목덜미를 파고든 날붙이를 뽑아내어 다시 찍었다.

“커억……! 끅, 끄르…… 끅.”

그것은 필사적으로 몸을 들썩이며 나를 할퀴고 물어뜯으려 들었다. 하지만 아무 감흥이 없었다. 한 번, 또 한 번. 기계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상대가 완전히 움직이지 않게 될 때까지.

“구했습니다.”

한빈이 보고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 이경환이 안겨 있었다. 눈, 코, 입에서 피가 철철 흘러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다.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심장은 뛰고 있어요. 지금 빨리 가면, 데려가서 치료하면…….”

그가 절박한 눈으로 말끝을 흐렸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아수라장이 된 연구실을 뒤로하고 복도로 나왔다. 아래층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달렸다. 4층 탐색이 끝났다. 오늘의 탐색은 처참하게 깨진 위스키병과, 그보다 더 처참한 몰골의 부상자 한 명을 낳았다.

* * *

정찰을 떠났던 사람이 중상을 입고 돌아왔는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도 평온했다. 누군가는 작은 소리로 잡담을 나누고, 누군가는 촛불 빛 아래에서 독서를 하고, 누군가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이런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한빈과 선배는 이경환을 방까지 옮기러 갔다. 한빈이 그와 한방을 쓰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선배와 나도 그렇고, 저들도 그렇고. 외부인들을 모조리 구석에 몰아넣은 속셈이 뻔했다. 그 틈을 타 나는 탐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송창민을 찾았다.

“그래서, 가져온 건 이게 전부고?”

송창민이 이경환의 백팩을 더러운 것 집듯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흠뻑 젖은 백팩에서 위스키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의 앞에서 거친 숨을 골랐다. 내 몰골은 피와 땀에 절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약이 필요해요.”

“무슨 약?”

“이경환 씨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전문적인 처치는 못 하더라도 소독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요. 소독약 있어요?”

“있기야 있지. 근데 그걸 왜 줘야 해?”

송창민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할 말을 잃었다. 왜 줘야 하냐니. 아까 급하게 실려 가는 이경환의 모습을 그도 보았을 텐데. 뼈가 부러져 팔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이고,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된 모습을.

눈앞이 핑 돌았다. 극한의 긴장에 시달린 몸이 지쳐서인지, 송창민의 언행에 기가 막혀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볼 안쪽 살을 깨물며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식량을 찾아왔잖아요!”

“식량 찾아온 건 원래도 했어야 하는 일이고. 의약품은 특히 희귀한 물자라 최대한 아껴야 해. 알약 한 알에 위층 탐색 1일 추가, 연고는 한 통에 1주일. 우린 예외 없이 누구나 그렇게 해. 그게 공평하잖아?”

“공평하다고요?”

“저 사람은 아프단 핑계로 제 할 일도 다 못 하고 드러누웠어. 가져온 거라곤 다 망가진 백팩이랑 생수병 몇 개밖에 없고. 당장 내일부터 일할 인원이 펑크 나서 골치 아파 죽겠다고. 그런 사람한테 왜 귀한 약을 써야 하지? 뭐 하러?”

“저분 이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물자 가져오려다 다친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그래서? 일하다 다쳤든 혼자 헛짓거리 하다 다쳤든 쓸모없는 식충이 된 건 똑같은데.”

“…….”

“호현아. 넌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실적을 못 쌓았으면 보상도 못 받는 게 당연한 거야. 그렇게 살리고 싶으면 네가 저 사람 몫까지 일 더 할래?”

“저기요!”

“야, 지금 형이 말하고 있잖아. 어디서 말을 함부로 끊어? 버릇없이.”

지금도 이경환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 저딴 소리나 하고 있다니. 입매가 비틀렸다. 나는 웃는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그놈의 나이 참 두고두고 우려먹으시네요. 저보다 연상 아니었으면 억울해서 어쩔 뻔했어요? 네? 창민 형?”

“아직 정신 못 차렸네. 그러니까 바깥에서 개고생만 했지. 그리고 너, 아까 나눠 줬던 건 어쨌어? 응? 삽 말이야, 삽.”

삽은 미처 챙겨 오지 못했다. 자루가 뚝 꺾인 채 지금도 쓰러진 책장 아래에 깔려 있을 것이다.

“다 같이 쓰는 거니까 망가뜨리지 말고 반납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그걸 홀랑 내다 버리고 빈손으로 와? 장난하나.”

그가 피식 웃었다. 우위를 점한 자의 교활한 여유가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한껏 부릅뜬 눈이 아래에, 정확히는 울긋불긋 상처투성이가 된 내 팔에 닿아 있었다.

“잠깐만.”

큼직한 손아귀에 팔목을 잡혔다. 아무리 나와 그의 키가 비슷해도 근력의 차이까지는 메울 수 없었다. 아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내 팔을 우악스레 비틀어 꺾었다.

“너…….”

내 손은 무거운 책장을 붙들고 용을 쓰느라 엉망이었다. 손바닥과 손마디는 물론이고 팔목에까지 피멍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확인하기 힘든 팔목 뒤쪽에, 찍힌, 아니, 베인 상처가, 아니…….

“물렸어?”

……잇자국?

귓속에 이명이 울렸다. 시야가 좁아졌다. 횡설수설 떠들어 대는 송창민의 목소리도, 부서질 듯 세게 잡힌 팔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내 팔목에 난 상처는 얕고 작았다. 기껏해야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였다. 살점을 한 움큼 물어뜯긴 자국이라기보다는 앞니에 찍힌 자국에 가까웠다. 하기야 잇자국인 걸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심하게 물렸다면 내가 지금껏 멀쩡히 움직이지도 못했을 거다.

과연 물린 게 맞나? 맞는다면 대체 언제 물렸지? 선배의 쇠 지렛대를 주워 들고 책장 밑에 있던 감염자를 처치할 때? 내가 뭘 어떻게 했더라? 그때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아래에 깔린 감염자가 미친 듯이 발악하는 걸 무시하고 목을 연거푸 내리찍은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미친 새끼가 어딜 뻔뻔하게 기어들어 와. 애꿎은 사람들까지 다 죽이려고.”

송창민이 고개를 돌려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집합! 긴급 상황이야. 여기 물린 놈 있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평온하게 제 할 일을 하던 사람들이 불에 덴 듯 벌떡 일어섰다. 여러 쌍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복도를 울렸다. 나는 멍하니 송창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려 했다.

“이거 놓…….”

송창민이 한 손으로 내 팔을 붙들고 다른 손으로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고개가 확 돌아갔다. 나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다시금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배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마!”

누군가 나를 뒤에서 찍어 눌렀다. 나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옆얼굴을 처박고 쓰러졌다. 무자비한 발길이 내 옆구리를 걷어차고 등을 짓밟았다.

“헉, 크흑.”

반쪽짜리 시야에 나를 둘러싼 이들의 발이 보였다. 누군가 들고 있던 노끈을 팽팽하게 당겼다. 곧 팔이 뒤로 꺾이고 손목과 발목에 끈이 칭칭 묶였다.

“새로 온 놈들끼리만 보내면 꼭 한 명씩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 언제였더라? 저번에 왔던 놈도 위층 보내자마자 뒈졌는데.”

“아직 본전도 못 뽑았는데. 아깝지 말입니다.”

“그러게. 이번엔 둘씩이나 한 큐에 맛이 갔네. 내일 탐색조 어떡하냐.”

“남은 두 명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세민대생, 이 새끼랑 같이 온 놈, 이렇게 둘?”

“예.”

선배 얘기가 나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고개를 간신히 들어 올렸다. 그러나 곧바로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챘다.

“악!”

아픔을 못 이겨 비명을 질렀다. 곧장 입 안에 천 뭉치가 쑤셔 넣어졌다. 그 위에 굵은 끈을 칭칭 감아 재갈을 물렸다.

“선배님, 지금 죽입니까?”

송창민이 내 가슴팍을 무릎으로 눌러 제압하고 턱을 붙잡았다. 나는 그를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입을 틀어막은 천에 색색 뜨거운 숨이 스몄다. 그는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 눈꺼풀까지 벌려 본 후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감염 진행 덜된 것 같다. 여기서 죽이면 피 튀어서 난감해져.”

“그러면 어떻게…….”

“일단 창고에 처박아 놓자. 한 번 죽었다 살아날 때까지. 그대로 좀 썩혔다가 나중에 정리하지 뭐.”

송창민에게서 두 번째로 창고라는 말이 나왔다. 첫 번째는 한빈에게 창고 정리를 시켰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어 댈 때였다.

새로 무리에 들어온 사람은 필수적으로 1주일 동안 탐색조에 편성된다. 매일 목숨을 걸고 위층을 탐색하는데 이상하게도 부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한빈은 셔터를 망가뜨렸다는 죄로 끼니를 거르고 창고를 정리하는 벌에 처해졌다. 그리고 방금 송창민이 제 입으로 말했다. 나를 창고에 넣어 놨다 나중에 정리하겠다고.

언뜻 듣기에 서로 관련이 없는 듯한 문장들이 하나하나 쪼개졌다. 그리고 다시 맞춰졌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창고는 송창민의 말을 빌리자면 ‘식충이’가 된 사람들을 넣어 두는 곳이었다. 그리고 창고 정리란……. 손발이 묶이고 재갈이 물린 채 좀비가 되어 버린 사람들의 숨통을 끊는 일이겠지.

각종 물자가 풍족하게 있던 것도 이해되었다. 부족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목숨이 오락가락할 때까지 부려 먹다가 단물 빠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데, 쫄쫄 굶기고 약조차 주지 않아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한빈은 선배와 나를 구하려 서슴없이 몸을 던졌다. 셔터가 망가진 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변명조차 하지 않고 홀로 묵묵히 벌을 받으러 갔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생김새가 험악해도 그는 고작 대학교 새내기였다. 작년 이맘때쯤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이었던 애가 낯선 학교 학생들 틈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어른들조차도 미치기 딱 좋은 상황에.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다음 날 그에게 창고 정리가 많이 힘들었냐고 물어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빨리 가둬 놓자. 이러다 갑자기 변이할라.”

그들은 나를 억척스럽게 잡아끌었다. 손발이 묶이고 입이 막혀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몸이 도축장으로 향하는 가축처럼 질질 끌려갔다. 아픔도 수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를 따라 내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내 몸에 묻어 있던 감염자의 핏자국이 발악처럼 옅게 남았다.

나는 정말로 감염된 것일까. 곧 열이 오르고 경련이 일다가 완전히 심장이 멎게 될까. 그럼 선배와의 약속은? 선배가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는, 반드시 살아남아 탈출하겠다는 약속은…….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누군가 나를 세게 걷어차 컴컴한 내부로 밀어 넣었다. 나는 딱딱한 바닥에 팽개쳐졌다. 방 안이 너무 어두운 데다 시야가 빙빙 돌아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복도 반대편에서 큰 소리가 났다.

“정호현!”

선배였다. 그가 처음 듣는 악에 받친 음성으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정호현 어디 있어. 씨발, 안 내놔?”

“흐읍, 읍!”

입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힘겹게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비스듬히 열린 문 틈으로 복도에 켜 둔 촛불 빛이 새어 들어왔다.

“너희, 다 뒈졌어…….”

그가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흐트러진 호흡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말소리만 들어도 광기가 물씬 느껴졌다. 어떻게든 나가야 했다.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하지만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묶은 노끈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역광을 받아 까맣게만 보이는 형체가 문 앞을 막아섰다. 짧게 자른 머리와 짙은 녹색 체육복이 언뜻 보였다. 송창민이었다. 그의 등에 문틈으로 들어온 빛이 가려졌다.

느닷없이 그의 상체가 풀썩 꺾였다. 선배는 쓰러진 송창민을 아무렇게나 툭 걷어차 치우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한 손에 쇠 지렛대를 든 채였다. 새까만 실루엣으로 보이는 그의 어깨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불안정하게 들썩였다.

이제껏 그는 때때로 사람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좀비를 해치울 때처럼 살의를 담아 사람을 공격한 적은 없었다. 섬뜩했다. 통증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도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흐억…… 으…… 이, 씨발. 또라이 같은…….”

쓰러져 있던 송창민이 비척비척 고개를 들었다. 쇠 지렛대에 얻어맞은 이마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피가 눈에 들어가 흰자까지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가 손등으로 피를 훔쳐 확인하더니 낄낄 웃었다.

“큭, 그거 아냐? 흐흐. 네가 그렇게 찾던 저 새끼, 감염됐어.”

그는 선배를 공격하는 대신 한 발짝 물러나서…….

“살고 싶으면 쟤 죽이고 혼자 나오든가.”

창고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나마 가늘게 들어오던 빛마저 뚝 끊겼다.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선배가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앉았다. 입을 막은 노끈에 그의 손이 닿는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정말 물린 게 맞는다면 기껏 내게 물려 놨던 재갈을 푸는 건 자살 행위였다.

“읍!”

천 너머로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가 샜다. 손발이 묶인 채 필사적으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어깨에 뭔가 툭 닿았다. 딱딱하고 묵직한 물체였다. 이윽고 푸석푸석한 실 다발 같은 것이 흘러내려 목덜미를 간질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뒤를 보려다 움찔했다. 내 목에 닿은 게 뭔지 알아 버렸다. 긴 머리카락이었다. 한때 사람이었던 것의.

“…….”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숨을 쉬는 것을 잊었다. 미처 흘러나오지 못한 뜨거운 호흡이 명치를 달구었다. 두통과 어지럼증이 갈수록 심해졌다. 아까는 그냥 피곤한 데다 스트레스까지 받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리 와.”

선배가 나를 확 끌어당겼다. 목에 스치던 머리카락이 비로소 멀어졌다. 그는 꽁꽁 묶인 매듭 위를 더듬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 풀기 쉽지 않았다. 그가 입 속으로 초조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시계는?”

70주년 기념관에 있던 LED 시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짐을 쌀 때 그 시계도 함께 챙겨서 나왔다.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줄이야.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선배는 지금 한가롭게 재갈 따위를 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아서 나를…….

갑자기 허벅지에 선배의 손이 닿았다. 생각이 뚝 끊겼다.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때와는 달리 성적 함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계. 씨발, 시계 어디 있어…….”

그는 미친 듯이,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내 허벅지를 더듬었다. 뒷주머니까지 만져 시계가 없는 걸 확인하고 위로 올라왔다. 패딩 지퍼를 쭉 내리고 가슴 쪽에 난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는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시계를 기어이 찾아냈다. 전원 스위치를 누르자 시계 액정에 숫자가 나타나며 환한 빛이 번졌다. 눈이 부셨다.

선배는 내 위에 올라타 입을 막은 끈을 풀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반항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 안에 틀어박혀 있던 수건이 빠져나가고 손과 발까지 자유로워졌다.

“숨 쉬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껏 내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정호현, 숨 쉬라고!”

그 말에 막힌 호흡이 반사적으로 터졌다. 나는 물에 빠졌다 갓 끌려 나온 사람처럼 헐떡였다.

“허억! 헉, 하아, 하…….”

그가 들고 있던 노끈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리고 달려들었다. 양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틀어, 인공호흡을 하듯 절박하게 입을 맞추었다.

내 입술은 송창민의 주먹에 얻어맞고 재갈까지 물렸던 탓에 엉망이었다. 선배가 무작정 혀를 밀어 넣자 터진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버석버석한 입술이 그가 휘젓는 대로 젖었다. 혀끝에 어렴풋이 피 맛이 났다.

뜨겁고 어지럽고 괴로웠다. 턱이 부서질 듯 아팠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미쳤…… 헉, 미쳤어요? 그걸 왜 풀어요. 저 물렸단 말이에요. 이대로 있으면 선배까지 위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횡설수설 말을 쏟아 냈다. 선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팔을 확 잡아 올렸다. 그는 상처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채, 아무 말 없이 보고 또 보았다. 시계 액정에서 흘러나온 창백한 빛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적셨다.

내심 선배가 나를 비웃어 주길 바랐다. 이게 어딜 봐서 물린 자국이냐고, 너랑 송창민 그 새끼가 뭘 착각한 거라고, 멍청한 게 지랄도 참 가지가지 한다고. 하지만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내 팔에 난 상처는 감염자가 낸 잇자국이 맞았다.

“떨어져요. 저리 가요.”

나는 몸을 비틀어 힘없이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선배는 오히려 바짝 다가와 내 옆에 누웠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이마와 목에 손등을 대어 보더니, 나를 두툼한 패딩째로 꽉 끌어안았다.

“저리 가라니까요.”

그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통증과 오한, 그리고 절망에 이성을 빼앗겼다. 마구 몸부림치면서 악을 썼다.

“제발 좀 꺼져요! 선배까지 물리고 싶어요? 산 채로 물어뜯겨서 죽고 싶냐고요!”

“응. 상관없어.”

그는 노끈 자국이 뻘겋게 남은 내 손을 들어다 자신의 목에 올려놓았다.

“네가 죽으면 어차피 나도 죽어. 네 심장이 멎었다 되살아나기 전에 죽는다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날 씹어 먹든, 잡아 죽이든.”

선배가 희미하게 웃었다. 심장이 저 바닥까지 쿵 내려앉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저항을 포기했다.

갈수록 추워졌다.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렸다. 전신의 피가 울컥울컥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1주일 동안 굶은 다음 헌혈을 하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싱거운 생각을 했다.

“자지 마.”

어지러움을 못 이겨 깜빡 잠이 들려던 찰나였다. 그가 나를 깨웠다.

“자면 안 돼.”

“그렇지만 졸리단 말이에요…….”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힘없이 칭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내 몸을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거칠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너무……. 졸린데.”

“현아, 잠들지 마. 나 혼자 두지 마. 잊어버리지 마.”

“…….”

“약속했잖아. 나 여기서 데리고 나가 주겠다고, 네 입으로 그랬잖아. ……씨발, 정호현. 내 말 안 들려?”

그가 애처롭게 중얼거리던 도중에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멱살이 잡혔다. 고개가 뒤로 툭 젖혀지고 가슴팍이 맥없이 딸려 올라갔다. 그는 나를 붙들고 억눌린 분노를 쏟아부었다.

“구해 주겠다던 건 다 거짓말이었어? 그렇게 절절하게 약속해 놓고, 또 뒈져서 다 까먹을 거야? 나를 또 지옥에 처박겠다고? 나더러 처음부터 다시 그…… 그 좆같은 짓을 하라고? 아니……. 아니야. 이건 아니야. 호현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응? 안 죽겠다고 했잖아! 대답해. 대답하라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머리가 흔들려서 토할 것 같았다. 그의 손에 힘이 탁 풀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는 매번 이렇게까지 아프기 전에 죽었어. 동맥이 끊어지거나, 심장이 파먹히거나, 목을 매달거나, 높은 데서 떨어져서…… 어쩔 새도 없이 죽어서,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그럼…… 얘기를.”

“…….”

“얘기해 주세요.”

“무슨 얘기?”

“아무거나요.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뭐 좋아하는지, 그런 거……. 궁금한 거 다 물어보라고 하셨잖아요. 저 잠 안 들게…… 계속 얘기해 주세요.”

그는 멍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내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 나는 남은 힘을 짜내어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얘기해 주고 싶은데 기억이 잘 안 나. 너무 많이 잊어버렸어. 내가 몇 살인지 까먹을 때도 있어. 근데 네 나이는 안 잊으니까, 거기다가 두 살을 더하면 내 나이가 되니까……. 그렇게 계산해 봐야 알아.”

그가 말할 때마다 맞닿은 살갗을 통해 낮은 진동이 전해졌다. 그것마저 자장가처럼 들릴 정도로 졸렸다.

“학교 바깥엔 뭐가 있었지? 난 뭘 좋아했었지? 아……. 맞아. 현아, 너는 사과를 좋아하잖아. 나는 딸기 좋아해. 딸기 케이크랑, 주스랑, 또 뭐가 있더라. 커피든 담배든 쓴 건 다 안 좋아하고…….”

그는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듬성듬성 구멍이 뚫리고 조각나 버린 기억을 힘겹게 끌어모았다. 쉴 새 없이 말해서 나중엔 목소리가 조금씩 갈라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그 말을 들었다. 내가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이걸 기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하나하나 최대한 새겨 넣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식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 * *

눈을 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운이라곤 한 톨도 없었다. 하지만 잠들기 전처럼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줄곧 정신을 할퀴던 통증이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내 바로 앞에 선배가 있었다. 눈을 감은 채로. 그의 가슴팍이 미미하게 오르내렸다. 팔은 여전히 나를 끌어안은 채였다.

LED 시계가 그의 뺨을 하얗게 비추었다. 그는 처음 보는 순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목을 가로지른 커다란 흉터도, 뺨에 점점이 튄 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둘러싼 평온을 해치지 못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언뜻 창고 안의 풍경이 보였다. 짐짝처럼 겹겹이 쌓인 팔다리들이 어둠에 파묻혀 있었다. 뒤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선배에게 집중했다. 숨을 죽이고 얼마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왜 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거지? 혹시 물린 것 자체가 꿈이었던 걸까.

소매를 살짝 끌어 내리고 팔에 난 상처를 살폈다. 상처는 그대로였다. 거짓말처럼 낫지도 않고 더 악화되지도 않았다. 찍힌 자리에 살짝 맺힌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나를 안고 있던 선배의 팔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팔과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 눈을 깜빡여 보았다. 좀비가 된 것치고는 지나치게 정상적이었다. 갑자기 사람을 뜯어 먹고 싶지도 않고, 살점이 썩어 들어가지도 않고, 목에서 괴성이 나오지도 않았다. 가슴팍에 손을 대어 보았다. 쿵, 쿵. 규칙적으로 맥박이 뛰었다. 왜?

나는 감염자에게 물렸다. 감염자의 앞니가 내 살갗에 상처를 냈고, 바이러스를 품은 타액이 상처를 통해 들어갔다. 그 사실은 명백했다. 내 팔목을 움켜쥐고 빤히 노려보던 선배의 표정이, 갑작스레 들끓던 열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하지만 죽지도 변이하지도 않고…… 도로 나았다.

선배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나는 숱하게 죽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동맥이 끊어지거나, 심장이 파먹히거나, 목을 매달거나, 높은 데서 떨어져서 참 다양하게도 죽었다. 다음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과거의 나는 왜 죽었던 거지?

지금껏 경험을 통해 배운 사실이 있었다. 물린 부위와 강도에 따라 감염이 퍼지는 속도가 달랐다. 심장에서 먼 곳을 물릴수록, 얕게 물릴수록 진행이 느렸다.

예를 들어 목덜미를 물리면 손을 써 볼 틈도 없이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 되살아나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샤워실에서 박건우가 그렇게 죽었다. 반면 옆구리를 물렸던 윤준석은 고열에 시달리며 몇십 분을 버텼다.

선배가 처음으로 좀비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고 세탁실로 도망쳤을 때, 거기엔 발뒤꿈치를 물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물린 줄도 모르고 상처에 일회용 밴드까지 붙이며 멀쩡히 말하고 행동하다가, 선배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사이에 천천히 변했다.

이제까지 나는 중상을 입어서 곧장 숨이 끊어졌던 모양이다. 선배가 말했다. 매번 이렇게까지 아프기 전에 죽었다고. 어쩔 새도 없이 죽어서, 마지막 인사도 못 했다고. 씁쓸하지만 그럴싸했다. 선배의 기억 속에 있는 나는 내 몸 하나 건사 못하면서 오지랖만 넓어서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는 놈이었으니까.

감기는 누구나 걸릴 수 있고, 또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이다. 하지만 그 감기도 누군가에겐 죽음의 원인이 된다. 좀비 바이러스가 내겐 감기나 마찬가지였다. 약하게 걸리면 한참 앓은 끝에 낫지만, 심하게 걸리면 몸이 병세를 이겨 내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

선배가 살짝 인상을 썼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잠꼬대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현…….”

내가 빠져나간 빈자리에 늘어져 있던 팔이 움찔, 경련했다. 안고 있던 사람이 사라진 걸 알아챘기 때문일까.

“호현아. 정호현!”

그가 눈을 부릅떴다. 절박하게 뻗은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손끝이 내 팔에 닿았다.

“선배? 저 여기 있…….”

그는 나를 확 쓰러뜨려 허겁지겁 끌어안고 들여다보았다. 잃어버릴 뻔했던 보물을 간신히 찾은 사람처럼. 핏발이 선 눈 가운데 새까만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탁하게 흐려져 있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

그는 나를, 방 안을 메운 어둠을, 우리의 머리맡에서 빛나는 LED 시계를 한 번씩 보았다. 그리고 안도했다. 지금이 크리스마스 아침이 아님에.

우리는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저 서로를 눈에 새길 뿐이었다. 싸구려 플라스틱 시계가 만드는 빛에 의지하여, 시체가 산처럼 쌓인 창고에서, 먼지 쌓인 바닥에 마주 보고 누운 채로. 전반적으로 암담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피든 살이든 골수든, 내 몸 어딘가에 바이러스를 이겨 낼 단서가 있었다. 이제껏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단서가. 내가 무사히 살아서 여길 나간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치료제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상황을 타개할 열쇠였다.

평소에 들었다면 그건 또 무슨 유치한 판타지 소설 얘기냐며 코웃음을 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간을 되돌려 죽음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사람도 있고 죽었다 살아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대수겠는가.

문득 선배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몰라. 네가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인가 보지. 네가 죽으면 아예 세상이 멸망한다든가. 멸망을 막으려면 네가 살아 있어야 해서 계속 세계가 리셋되는 거고.〉

비로소 머릿속이 맑게 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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