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영원의 크리스마스 (6/12)
  • 5. 영원의 크리스마스 

    차가운 권태가 먼지처럼 허공에 떠다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따분해졌다.

    “인류는 더 이상 기계를 배척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고, 역으로 삶에 긴밀하게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기계의 논리가 디자인의 논리로 환원된 거죠. 이러한 이념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는 1920년대 바우하우스의…….”

    딱딱한 글씨들이 빔 프로젝터를 비춘 스크린에 가득했다. 교재를 그대로 줄줄 읽어 내려가는 교수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눈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스산한 캠퍼스의 정경이 들어왔다. 여름에 울창하게 자라 위층 창문에까지 기웃거리던 잎들이 지금은 죄다 떨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뼈처럼 앙상한 가지뿐이었다.

    예술관과 사회 과학관 사이에는 흡연 구역이 있었다. 몇 평 되지도 않는, 그마저도 건물 외벽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 때문에 더욱 비좁아진 공간에 흡연자들이 우글우글 모였다.

    흡연 구역에 접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창가에 앉는 것을 싫어했다.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곧장 담배 연기가 올라오고, 수업 시간 내내 유리창 너머로 골초들이 연기를 뻑뻑 뿜어 대는 게 고스란히 보이니 불쾌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좋았다. 다른 사람들이 미리 자리를 맡아 두니 하며 유난을 떠는 가운데 창가 자리만이 늘 텅 비어 있었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들 몇 명이 저마다 담배를 물고 모여 선 게 보였다. 그들은 뭐라 수군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문이 닫혀 있어 말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무리 중 한 명은 과잠을 입고 있었다. 등 부분에 수놓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경영학과.

    참으로 안일하고 진부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나는 곧 흥미를 잃고 시선을 거두었다. 아니, 거두려 했다. 그중에 한 명, 눈에 띄는 애를 보기 전까진.

    그는 반듯하게 다린 슬랙스에 니트 차림이었다. 우유를 살짝 넣은 커피 같은 색의 머리카락 위로 겨울 햇살이 앙금처럼 내려앉았다. 한겨울에 얇은 차림으로 밖에 서서 담배를 피우느라 어지간히도 추운지, 귓바퀴와 코끝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시커먼 패딩에 때 묻은 운동화를 신은 남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자갈밭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유리구슬 같았다.

    누군가 농담을 던졌는지 남학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도 따라 웃었다. 적당히 서글서글하게 비위를 맞추고, 적당히 대화에 끼었다. 옆에 선 놈과 등과 팔뚝을 툭툭 치며 제법 거친 장난을 하기도 했다.

    저런 유형을 안다. 처음 본 사람에게도 잘만 싹싹하게 굴고, 실실 웃으며 윗사람 기분을 맞출 줄도 알고, 과 활동이니 팀 프로젝트니 동아리니 뭐니 하면서 바쁘게 사는 놈들.

    나와는 거리가 먼 인간상이었다.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경영학과라는 전공에 대해 가진 선입견부터가 그랬다. 물론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보자마자 지레 꺼림칙해하거나 적의를 품는 놈들도 있었고,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말을 붙여 보려다 곧 포기하는 놈들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이야 학교라는 어설픈 테두리 안에 함께 묶여 있지만, 곧 뿔뿔이 흩어지게 될 테니까. 그렇게 평생 얽힐 일 없이 각자의 삶을 살 거고.

    “……이런 점에서 기계 미학은 전통적인 순수 예술과는 궤를 크게 달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스듬히 턱을 괴고 밖을 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펼쳐진 책장에는 필기 대신 정체 모를 스케치만이 얼룩처럼 남았다. 강의는 이제 막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무료했다.

    * * *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룸메이트가 방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신경질적으로 돌아누웠다.

    어젯밤 안면 있는 놈들에게 붙들려 먼 번화가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내 생일 파티 기념 종강 파티라는 핑계를 붙였지만 사실은 그냥 자신들이 거나하게 마시고 싶었던 것 같다.

    그들은 술잔을 비우며 킬킬 웃고, 질 낮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주변 여자들을 흘긋거렸다. 신물이 났다. 나는 곧 싸구려 소파에 몸을 파묻고 늘어졌다. 내 성질머리에 익숙해진 놈들은 구태여 내게까지 저속한 유희를 강요하지 않았다.

    어지러운 조명 아래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번졌다. 쿵쿵 울리는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밤을 흘려보냈다. 술값을 계산해 주러 온, 누군지도 모르는 선배의 자가용을 얻어 타고 산기슭에 있는 기숙사에까지 돌아와 꾸역꾸역 잠을 청한 게 새벽녘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해 뜨고 나서 기어 들어왔으면 얌전히 잠이나 자든가. 짜증이 왈칵 치밀었다. 결국 나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씨발. 조용히 안 해?”

    룸메이트는 내게 등을 돌린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언뜻 씨근덕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야.”

    가만히 불러 보았다. 반응이 없었다. 그의 몸이 자잘하게 들썩였다.

    “너 왜 그래. 아파?”

    “…….”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정신이 맑아졌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옷을 대충 챙겨 입었다. 그를 정성스럽게 간호해 줄 의리까지는 없지만 편의점에서 약을 사다 던져 줄 의리 정도는 있었다. 내가 마실 걸 사러 가는 김에 겸사겸사 다녀올 생각이었다.

    “감기약? 진통제? 뭐 사 올까. 어디가 아픈데?”

    맞은편 침대는 여전히 침묵이었다. 대답할 정신조차 없는 건가. 구급차 불러야 하는 건 아니겠지. 좀 심각해졌다.

    “대답 안 하면 아무거나 사 온…….”

    겉옷 지퍼를 쭉 올리며 돌아보았을 때 눈에 보인 것은, 기괴한 모습으로 입을 쩍 벌리고 내게 달려드는 룸메이트의 모습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침대 모서리에 다리가 세게 부딪쳤지만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이상할 정도로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핏기 없는 뺨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거미줄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말이 도중에 뚝 끊겼다. 상대가 다시 와락 달려든 탓이었다. 그는 뻣뻣한 사지를 움직여 악착같이 덤볐다. 성대를 긁는 것 같은 섬뜩한 소리를 내면서.

    “정신 차려. 뭐 하는 거냐고!”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그가 나를 덮치기 전에 문을 열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체중을 실어 문을 힘껏 닫았다. 하지만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상대의 손이 문틈에 끼어 있었다. 살점이 팰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는데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드러난 속살이 이상하리만치 검붉은 빛깔이었다.

    그는 문틀을 벅벅 긁어 대며 나오려 안간힘을 썼다. 손이, 팔뚝이, 팔꿈치가 점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문에서 손을 떼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윽고 그가 복도로 걸어 나왔다. 박제된 동물 시체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주시하면서.

    “컥, 크어, 윽…….”

    그의 목이 뚜둑, 뚝,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크아아악!”

    룸메이트가, 아니, 룸메이트였던 것이 탐욕스럽게 울부짖었다.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냈다. 나는 뒤돌아 무작정 달렸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상대가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나를 쫓아왔다. 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등 뒤에 따라붙었다.

    아래층 복도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급하게 그리로 갔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나를, 그리고 내 뒤를 쫓는 것을 본 사람이 기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으아, 으아악!”

    그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지고 몸이 땀범벅이었다. 게다가 옷에는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시, 식당에 있던 게, 왜 벌써 여기까지…….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그는 뜻 모를 말만 남기고 허우적대며 물러섰다. 그리고 내게서 등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는 복도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쓰러지듯 몸을 틀었다.

    그것이 어느샌가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울긋불긋하게 피멍이 든 손가락이 내 머리가 있던 자리를 할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목덜미를 잡힐 뻔했다.

    “헉, 흐윽.”

    나는 휘청대는 몸을 간신히 바로 세웠다. 필사적으로 달려 거리를 벌렸다.

    “저기요. 누구 없어요?”

    복도를 지나며 외쳤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있는 방문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일단 아무 방에나 들어가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은 단단히 잠긴 채였다. 다음 방문을, 그리고 다음 방문을 열었다. 모두 열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괴물은 뒤에서 점차 간격을 좁혀 왔다.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손에 식은땀이 고였다.

    “저기요!”

    철컥. 옆방에서 잠금장치를 조작하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저 방에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가 구원의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절박하게 달려가 손잡이를 잡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몹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손잡이를 몇 번 더 돌려 보았다. 손잡이는 여전히 그 위치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방 안에 있던 사람은 문을 연 게 아니라 잠근 거였다. 자신도 위험에 휘말릴까 봐 무서워서.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끅……. 크륵.”

    복도 반대편 계단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참하게 뜯어 먹혀 잇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팔다리에, 입가에는 침과 피가 뒤섞인 액체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또 다른 괴물이었다. 진퇴양난이었다. 악몽처럼 끔찍한 몰골을 한 것들이 앞뒤로 나를 노리고 다가왔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제발…… 헉, 제발, 누가 좀.”

    나는 비틀거리며 물러서다 다른 문에 등을 기댔다. 숨이 차서 폐가 터질 듯 아팠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의 손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어찌할 새도 없이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쾅! 내가 들어오자마자 문이 도로 닫혔다.

    “…….”

    “…….”

    나는 가쁘게 헐떡이며 앞을 주시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도 나를 보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끌어 들여놓고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지 못한 얼굴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인 듯했다. 말간 헤이즐넛색 홍채 가운데 동공이 경악과 당황으로 한껏 좁혀져 있었다. 곧장 알아보았다. 그 애였다.

    뒤얽힌 시선은 얼마 못 가 엇갈렸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몸을 날려 있는 힘껏 문을 들이받고 있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렀다.

    “누구예요? 밖에. 왜 저러는 거예요?”

    그가 당황한 낯으로 물었다. 밖에 있는 게 누군지도 모르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이 애가 나를 구한 건 정말 그냥 본능이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러는지는 나도 좀 알고 싶었다.

    쾅! 콰앙! 쾅! 우악스럽게 두들겨 대는 충격을 못 이기고 문 잠금장치가 헐거워졌다. 합판으로 된 문짝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움직였다. 2인실 방문 양옆에는 긴 직사각형 모양 옷장이 두 개 있었다. 그는 옷장을 밀어 옮기려 애를 썼다.

    “좀 도와주세요.”

    혼자서는 벅찼는지 그가 내게 도움을 청했다. 다가가 다른 쪽을 붙들었다. 둘이 힘을 합쳐 비좁은 현관을 옷장으로 간신히 틀어막았다. 혹시나 옷장이 기울어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받친 채 숨을 죽였다.

    바깥에 있는 것들은 끈질기게 발광했다. 문을 마구 두들기고 손톱으로 벅벅 긁어 댔다. 속이 울렁거렸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옷장을 지탱하느라 손이 없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흥미를 잃었는지 문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리를 냈다가 저것들이 다시 돌아올까 봐 무서웠다. 불안정하게 색색대는 호흡만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헉…… 하아.”

    기척이 멀어진 걸 완전히 확인한 후에야 그가 옷장을 밀던 손을 뗐다. 그대로 주르르 미끄러져 주저앉아 버렸다. 맥이 탁 풀린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옷장 벽에 겨우 기대어 섰다. 무릎을 짚은 손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왜 저래요, 저 사람들? 정상이 아니잖아요.”

    “몰라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잠깐만요.”

    그가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무심결에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방 안의 다른 곳은 깔끔한데 책상만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어수선했다. 시험공부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두꺼운 전공 서적이 가득 쌓여 있고, 펼쳐진 노트에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 같은 낙서가 빼곡했다. 그 옆에 빈 에너지 드링크 캔이며 커피 병 따위가 산을 이루었다. 아무렇게나 빼어 내팽개쳐 둔 것 같은 귀마개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여보세요. 경찰서죠? 여기 백일대 생활관인데요…….”

    휴대폰을 찾아낸 그가 112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는데, 그는 몹시 회복이 빨랐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괴물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탓에 그저 미친 사람들이 쫓아와 난동을 부린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테니까.

    “뭐라고요? 장난 전화? 아니, 지금 장난하시는 건 그쪽 아닌가요. 이 상황에 무슨 장난 전화를 합니까. 잠깐, 끊지 마세……. 잠깐만요!”

    그가 언성을 높였다. 말갛게 잘생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속없이 웃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왜 그래요?”

    “기숙사에서 학생들끼리 장난친 것 가지고 전화하지 말라는데요. 무슨 일 처리가 이따위야. 이러니까 억울하게 범죄에 희생되는 사람들이 자꾸 나오는 거예요. 다른 성실한 경찰들까지 욕 먹이고.”

    그는 국민 신문고에 민원 넣을 거라고 혼잣말처럼 으름장을 놓더니, 미간을 짜증스럽게 구기며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네. 백일 대학교요. 이상한 사람들이……. 맞아요. 소리 지르면서 달려들고. 네? 아뇨, 여긴 연구실이 아니라 기숙사인데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가 폰 화면을 들어 보여 주었다. 통화 종료를 알리는 표시가 떠 있었다.

    “통화량이 너무 많아서 일시적으로 장애 발생 중이래요. 끊겼어요.”

    “다른 사람들도 신고해서 그런 거 아닌가.”

    “그렇겠죠?”

    그는 휴대폰 화면을 꺼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직도 현관을 가로막고 있는 옷장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과제 끝내고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나와 봤더니……. 일단 사감 선생님한테 말씀드리러 가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알아챈 그가 습관적으로 멋쩍게 웃었다. 눈시울이 휘어 왼쪽 눈가에 있는 점이 도드라졌다. 뭘 실실 쪼개고 있어. 이 상황에서까지 웃음이 나오나. 짜증스러웠다.

    “아, 저는 정호현이라고 하는데요. 경영학과, □□학번.”

    역시나 후배였다. 나이도 어릴까? 아마 그럴 것이다. 볼을 꾹 누르면 과일즙이 나올 것처럼 생긴 게, 귀와 뺨에 솜털이 가시지도 않은 게 나보다 연상이라면 그건 또 나름대로 충격일 것 같으니까.

    “정호현 후배님?”

    “선배셨구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응. 그럴게.”

    사양할 것 없이 냉큼 대꾸했다. 한순간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다시 돌아왔다.

    “선배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

    나는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나, 영원이. 기영원.”

    * * *

    방을 나서자마자 저 멀리서부터 요란한 기척이 느껴졌다. 마구 고함치는 소리, 우당탕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뒤엉켜 메아리쳤다.

    “흐, 허억, 으아악!”

    여러 명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달려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사람이 미친 듯이 팔을 휘저었다.

    “비켜!”

    퍽! 그가 내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상체가 휘청거렸다.

    “아, 씨발.”

    확 신경질이 일었다.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화내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 다른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그 괴물들이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눈알이 터지고 목이 꺾이고 팔다리가 부러진 것들이 절뚝절뚝 달려왔다.

    “선배. 저, 저건 대체.”

    정호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저 끔찍한 광경을 처음 보았을 테니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괴물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들이 내는 괴성이 선명하게 들렸다.

    “가요. 빨리요.”

    그가 재촉했다.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우리는 앞서간 사람들의 뒤를 급하게 따랐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무리에 정호현과 내가 추가되었다. 우리는 구르듯 허겁지겁 계단을 내려갔다.

    뒤를 쫓는 것들은 전혀 지칠 기미가 없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복도 끝에서 끝까지 추격전을 벌이면 숨이 차기 마련인데, 저들은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섬뜩한 소리를 제외하면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복도를 쭉 가로질렀다. 복도 한복판에 누군가 버려 놓고 간 캐리어가 엎어져 있었다. 안에 들어 있던 소지품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앞서 가던 사람 중 하나가 캐리어를 밀어 진로를 확보했다. 정호현이 그것을 발로 턱 받더니 힘껏 걷어차 뒤로 보냈다. 따라오던 것들 중 하나가 캐리어에 발이 걸려 비틀거렸다.

    “어디로 가요?”

    “나가야지!”

    “어떻게 나가게? 지금 1층이 무슨 꼴이 됐는지 몰라?”

    “그럼 뭐 어쩌라고!”

    한껏 날이 선 외침이 오갔다. 대화에 정신이 팔린 사이 한 명이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콰당! 사람들이 움찔 놀랐다. 하지만 전력 질주를 하던 도중이라 곧바로 멈추지는 못했다.

    “아악!”

    넘어진 사람이 쩌렁쩌렁하게 비명을 질렀다. 추격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썩은 달걀 같은 눈알 여러 개가 일제히 한곳을 향하는 모습이 소름 끼쳤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쓰러진 이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그 틈을 타 달아났다. 뒤돌아볼 짬이 없었다. 그 탓에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뭐야……. 미친 거 아냐?”

    누군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동감했다. 우리는 급한 대로 세탁실 안에 들어갔다. 잠겨 있을지 아닐지 모르는 생활실 문을 일일이 열어 보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았다.

    코인 세탁기 여러 대가 벽면을 따라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문이 비스듬히 열린 세탁기 안에 젖은 옷가지들이 뒤엉켜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빨래를 하던 도중에 급하게 도망친 모양이었다.

    등 뒤에서 문이 거칠게 닫혔다.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가 대기용 의자를 있는 대로 가져왔다. 문 앞에 의자를 겹겹이 쌓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저마다 벽에, 바닥에 널브러져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기숙사 1층에서 사람이 죽었대요. 지금 단체 채팅방이랑 학교 커뮤니티랑 다 난리 났는데.”

    “그거 헛소리 아니었어? 당연히 드립 치는 건 줄 알았는데. 진짜라고?”

    “진짜예요. 지금 여기서 살인 사건 났다고요.”

    “미쳤다. 진짜 미쳤네. 아까 그 새끼들이 범인이고?”

    “몰라요.”

    “학업 스트레스를 못 이긴 우발적 연쇄 살인, 이런 거야? 경찰은 왜 안 와? 아무리 산골짜기라도 이런 사건이면 재깍재깍 출동해야 할 거 아냐. 이러다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저도 모른다고요! 알면 이러고 있겠어요?”

    “내가 뭐 못 물어볼 거 물어봤냐? 답답해서 그런 거잖아! 왜 짜증이야, 짜증은.”

    “아, 조용히 좀 하세요! 머리 울리니까.”

    눈앞에 당면한 위험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저들끼리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잔뜩 날이 서 있던 와중에 그들의 대화가 더욱 신경을 긁어 댔다.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으, 윽. 아야야……. 아파라.”

    내 바로 옆에 널브러져 있던 사람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통통한 체격에 키가 작은 남자애였다. 그는 웅크려 앉은 채 다리를 감싸 쥐고 울상을 지었다. 바지 자락 아래로 언뜻 보이는 발목에 핏기가 비쳤다. 넘어지다 어디에 긁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뒤적여 일회용 밴드를 꺼냈다. 그러다 내 시선을 눈치채고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꼭 내가 밴드를 내놓으라고 협박하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저기요. 저……. 그게, 어. 하나 붙이실래요?”

    그가 내게 밴드를 내밀었다. 이걸 왜 주는 거지 싶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내 손등에 얕은 생채기가 있었다. 언제 났는지도 몰랐다. 옷장을 옮기다 모서리에 긁히기라도 한 건가. 주겠다는 걸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밴드를 받아 손등에 붙였다. 그가 우물쭈물하다 말을 꺼냈다.

    “제 상처도 봐 주시면 안 될까요? 혼자 붙이기 힘들어서.”

    그가 바지를 살짝 걷어 발목을 보여 주었다. 아킬레스건 바로 위쪽에 베인 건지 찍힌 건지 모를 흔적이 있었다. 꼭 무언가에 물린 잇자국처럼 생겼다.

    그것을 보는 순간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세탁실에 처박혀 있는 것도 좆같았고, 웬 같잖은 새끼가 수줍게 빌빌거리며 기분 나쁜 상처를 들이미는 것도 좆같았다.

    “싫어.”

    “네?”

    “싫다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은근슬쩍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이 굳었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더욱 기분이 더러워졌다. 아직 숙취가 남아 있기라도 한 건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밴드도 나눠 드렸는데.”

    “네가 멋대로 줘 놓고 뭐 어쩌라고.”

    “아니, 그게 무슨…….”

    “꼬우면 도로 가져가든가. 그러면 되겠네.”

    “…….”

    “뭐 해, 씨발. 가져가라고!”

    손등에 붙은 밴드를 확 뜯어 집어 던졌다. 내 피가 묻은 밴드가 구겨진 채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남자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몇 명이 내게 항의하려 입을 달싹였지만, 내가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자 곧 수그러들었다.

    세탁기에 기대어 앉은 정호현이 어느새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짧은 순간 미미하게 눈가가 좁혀졌다. 경멸의 표시였다.

    시선이 마주친 것은 아주 잠깐뿐이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한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글서글한 웃음을 머금고 아무렇지도 않게 옆 사람에게 말을 붙이기까지 했다. 속에서 차가운 불이 확 일었다 가라앉았다. 이래서 저런 유형이 싫다는 거다.

    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예민해진 청각에 주변의 소리가 밀려들었다. 누가 휴대폰으로 구조 요청 메시지라도 작성하고 있는지 액정에 손톱이 타닥타닥 부딪쳤다. 저들끼리 소리 죽여 귓속말을 주고받는 것도 들렸다.

    그 와중에 가장 거슬리는 소리가 있었다. 옆에 있던 놈이 내는 소리였다. 고작 발목에서 피가 좀 난 것 가지고 뭐가 그렇게 아픈지, 아까부터 계속 끙끙대며 앓았다.

    “야. 쟤 왜 저래?”

    “몰라. 난들 알겠어.”

    “누가 좀 깨워 봐요.”

    불안한 소곤거림이 오갔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호현이었다.

    “잠깐만요. 저 사람 좀 이상해요.”

    눈을 떴다. 사람들이 질린 표정으로 한곳을 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밴드를 내밀었던 남자애가 바닥에 웅크려 있었다. 등이 가파르게 들썩였다.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떨었다. 언뜻 보인 그의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의 발목에 시선이 갔다. 그새 상태가 더 심해졌다. 상처를 중심으로 시퍼렇게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냥 멍든 거라기엔 거미줄처럼 다닥다닥 번진 모습이 불길했다.

    “흐으, 헉…….”

    괴롭게 몸부림치던 남자애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모두가 경악했다. 한동안 지켜봤지만 그는 바닥에 고꾸라진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 물 있어. 좀 마시게 해 볼까?”

    백팩에서 반쯤 남은 생수병을 꺼낸 사람이 일어섰다. 그녀가 세탁실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맞은편 침대에서 잠든 줄만 알았던 룸메이트가 갑자기 내게 덤볐을 때를.

    그도 이상하리만치 안색이 나빴다. 허옇게 질린 목덜미를 타고 뺨과 턱 주변까지 퍼런 핏줄이 돋아 있었다. 그의 목에 물린 것 같은 상처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생수병을 든 여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다가와 남자애 옆에 앉았다.

    “저기, 물 좀 드실래요?”

    “…….”

    “제 말 들리세요? 많이 아파요?”

    그가 아주 작게 꿈틀거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시야 한구석에 정호현이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 모든 게 너무 느리게 보였다.

    “캬아악!”

    그는 용수철이 튕겨지듯 달려들었다. 무방비한 상대의 목덜미를 붙잡고 입을 쩍 벌려 연한 살을 물어뜯었다.

    “커헉.”

    목을 물린 사람은 비명도 못 지르고 제자리에 허물어졌다. 동맥이 찢긴 자리에서 피가 왈칵왈칵 흘렀다.

    “으아아아악!”

    “꺄아악!”

    다양한 비명이 귀를 찢을 듯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들이 패닉에 빠져 미친 듯이 물러섰다. 남자애는 쩝쩝 소리를 내며 살점을 파먹다가, 입가에 피를 벌겋게 묻히고 고개를 들었다. 충혈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시선이 한곳에 멎었다.

    “아악! 악! 으아아악!”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은 채 꽥꽥 비명만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까 우발적 연쇄 살인이 어쩌고 하며 투덜거리던 남자였다. 남자애의 고개가 그리로 끼긱끼긱 돌아갔다. 이윽고 그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마치 웃는 것처럼 보였다.

    또다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 짧은 시간에 희생자가 둘이나 나왔다. 모두가 그를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벽에 최대한 달라붙어 다음 타깃이 자신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쳤다. 발뒤꿈치에 건조기가 걸렸다. 퉁. 단단한 기계에 신발 굽이 부딪친 거라 제법 큰 소리가 났다.

    “…….”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다른 이들은 공포에 질려 이쪽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었다. 아,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저런 이기적인 새끼 따윈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그들의 눈에 그렇게 씌어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남자애가 구부정하게 숙였던 허리를 펴고 달려들 태세를 갖추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움직였다. 정호현이었다. 그는 문 앞에 쌓여 있던 의자를 들어 남자애를 힘껏 후려쳤다.

    퍼억! 불의의 습격에 그의 몸이 훅 꺾였다. 공황 상태에 빠져 얼어붙었던 머리가 다시 돌았다. 상대가 주춤한 틈을 타 복부를 걷어찼다. 정호현은 고개를 돌려 멀찍이 서서 구경만 하는 사람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 해요. 이 사람까지 당할 뻔한 거 안 보여요?”

    그제야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문 앞의 의자들을 주섬주섬 치웠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아 둔 게 오히려 탈출을 막는 장애물이 될 줄은 몰랐다.

    “윽…….”

    체중을 실어 무작정 덤비는 남자애의 공격을 간신히 피했다. 그는 빨래가 가득 담긴 커다란 바구니 쪽으로 엎어졌다. 쓰러진 이의 뒷머리를 잡아 다시 내동댕이쳤다. 그는 꼬깃꼬깃 뭉쳐진 옷가지에 파묻혀 뒹굴었다.

    그는 한동안 처절하게 몸부림친 끝에 간신히 일어섰다. 그러고도 바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대다 세탁기에 몸을 부딪쳤다. 이불 빨래용 대형 세탁기였다. 사람도 거뜬히 들어갈 것 같은.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세탁기 문을 일부러 열어 두고 공격을 유도했다. 그가 재차 달려들었다. 그 틈을 타 옆으로 빠졌다.

    “컥, 크륵!”

    그의 상체가 세탁기 안에 쑤셔 박혔다. 나는 이성을 잃고 그를 연거푸 걷어찼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악에 받쳐 폭력을 휘둘렀다.

    “문 열었어요. 나가요. 빨리!”

    다급한 고함이 들렸다. 드디어 퇴로가 확보된 모양이었다. 우리는 출구로 와르르 몰려들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던 희생자들이 꿈틀거렸다. 경동맥을 우악스럽게 물어뜯겨 출혈이 어마어마했는데. 움직이기는커녕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는데. 그들은 사지를 삐걱거리며 서서히 일어섰다.

    문 앞에는 사람들이 죄다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그들에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거나 다름없을 터였다.

    “으아악!”

    세탁실 안은 또다시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었다. 뒤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리는 걸 무시하고 문을 향했다. 서로 저만 살겠다고 허우적대며 아우성을 쳤다.

    간신히 세탁실을 빠져나왔다. 터엉!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복도를 달리는 내내 시커멓게 썩은 핏물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방금 전 내가 한 짓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살아 있던 사람을, 머뭇대며 내게 밴드를 건네던 애를 죽일 각오로 공격했다. 살고 싶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혀서 미친 듯이 걷어차고 짓밟아 댔다. 역겨웠다.

    * * *

    한참을 달려 괴물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까지 왔다. 으슥한 복도 구석이었다. 다리가 풀렸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세탁실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동안 수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열 명 안팎이던 인원이 고작 네 명이 되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도 꼴이 처참했다. 몸 곳곳에 멍과 생채기가 생겼고, 피가 튀어 옷이 검붉게 물들었다.

    “…….”

    머리가 아팠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그 일을 겪고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껏 의연하게 대처하던 정호현조차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칼 아래 반듯한 목덜미가 희게 도드라졌다.

    “나갈래요. 여기 있으면 다 죽을 거예요. 밖에 나가요.”

    머리를 쨍한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문신을 잔뜩 한 남학생이 울먹이며 말했다. 외모와 달리 상당히 심약한 타입인 것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괴물에게 물린 사람까지 괴물로 변한다면, 갈수록 생존자는 줄고 적은 늘어나는 셈이었다. 밀폐된 건물 안에 계속 있어 봤자 더 위험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나간단 말인가?

    “계단으로 빨리 내려가서 중앙 로비 문으로 나가면 안 돼요?”

    “1층에서 사람 죽었다면서요. 어떻게요.”

    듣고만 있던 사람이 재깍 받아쳤다. 머리를 동그랗게 틀어 올려 묶은 여학생이었다. 격한 움직임에 머리가 반쯤 풀려서 엉망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그건 식당이잖아요. 다른 데로 안 새고 바로 나가면 괜찮지 않을까요? 잡히기 전에 최대한 빨리요.”

    “1층에도 저것들 우글거리고 있으면요?”

    “일단 아래층 살짝 살펴본 뒤에, 괜찮다 싶으면…….”

    “참 나, 그러니까 그걸 누가 할 건데요. 누구 여기서 목숨 걸고 아래층 다녀올 사람? 손들어 보실래요?”

    “…….”

    “이런 건 먼저 말 꺼낸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기서 나가고는 싶고 위험해지는 건 싫어요? 존나 이기적이네.”

    보라색 머리 남학생이 도움을 청하듯 애처롭게 나를 보았다. 나는 인상을 왈칵 구겼다.

    “뭘 봐. 눈 깔아.”

    “…….”

    “안 깔아?”

    그가 움찔 놀라 시선을 내렸다.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파탄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다른 놈들을 위해 대표로 아래층을 보고 오라고? 저 좆같은 괴물들한테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데? 혼자서만 빠져나갔으면 나갔지, 내가 굳이 왜?

    정호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화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나는 말 거는 새끼는 다 죽여 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흉흉하게 날을 세웠다. 남자는 우리 둘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여자와 언쟁을 벌였다.

    “그쪽도 이기적인 건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이기적인데 어쩌라고요. 보태 준 거 있어요? 그럼 여기서 헤어지죠. 죽든가 말든가 각자 알아서 하자고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심하게 하세요. 다 같이 살 확률 조금이라도 높여 보자는 거잖아요, 제 말은.”

    “전 희생하기 싫은데요? 여기 있는 분들도 다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만.”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호현이었다. 그들은 서로 싸우느라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저기요. 지금 상황에서까지 꼭 그렇게 뾰족하게 나와야 해요?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싫으면 각자 행동하든가요!”

    다음 순간, 정호현이 고개를 들고 왈칵 언성을 높였다.

    “그만 좀 하라고!”

    “…….”

    “…….”

    두 명이 일제히 하던 말을 뚝 그쳤다. 정호현은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애가 얼마나 물러 터졌으면 고작 고함 한 번 지른 것 가지고 저러는 거지. 나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정작 내가 위험에 처하자 앞장서 도운 것만 해도 답이 나왔다.

    “갔다 올게요. 아래층, 내가 갔다 온다고요. 이제 됐어요? 그러니까 입 좀 다물어요.”

    “아니, 저, 그게.”

    그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다른 이들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복도 저편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럿이서 몰려다녀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판에 혼자 아래층까지 가다니. 말려야 할까? 혹시라도 내려갔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니,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쟤가 위험한 역을 자처해 준다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정호현이 살아 돌아오면 좋은 거고, 아니라도 내가 손해 볼 건 없고.

    머리가 복잡했다. 결국 나는 정호현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아무 일이 없다면 1층에서 여기까지 열 번은 넘게 왕복했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안 그런 척했지만 다들 초조해했다. 정호현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어딘가에 도망쳐 숨어 있느라 돌아오지 못하는 거면 다행이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아, 아까 그분한테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그런 거면…….”

    나와 여자애의 눈치를 번갈아 보며 의기소침하게 구겨져 있던 남자애가 결국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심사가 뒤틀렸다. 왜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하고 지랄이실까. 정호현이 가겠다고 나설 땐 말 한 마디 없이 찌그러져 있던 새끼가.

    그때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노이즈가 일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던 터라 민감하게 알아챘다.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 아, 아.

    정호현의 목소리였다. 음질 나쁜 스피커를 거친 탓에 억양이 단조로워지고 노이즈가 끼었지만 곧장 알 수 있었다.

    - 4층에 계신 분들. 들리세요? 관리 사무실에서 알려 드립니다.

    맥이 탁 풀렸다. 이 상황에 웬 안내 방송 흉내? 장난치는 건가?

    한껏 예민해져 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의 목소리에 묘하게 힘이 없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 ……내려오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한숨 같은 말을 남기고, 아무 예고도 없이 방송이 뚝 끊겼다.

    “뭐예요?”

    공기가 일시에 얼어붙었다. 다른 이들이 초조해하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럼 우리 1층 문으로는 못 나가요?”

    “바로 안 내려가길 잘했다. 큰일 날 뻔했네요.”

    “거봐요. 제가 아래층 먼저 살펴보자고 했잖아요.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불이 확 일었다. 정호현이 그렇게 힘들게 1층까지 갔는데. 그 와중에도 우리에게 1층의 상황을 전하겠다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방송을 켰는데. 정호현은 안중에도 없고 제 안위만 챙기겠답시고 허우적대는 꼴이 몹시도 추잡했다.

    내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놈이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도 정호현을 위험으로 몰아낸 장본인 중 한 명이니까. 이제 와 갑자기 정호현이 안쓰러워진 것도 아니었다. 그럴 거면 진작 그 애를 말렸을 것이다. 그가 죽든 살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환멸이 났다. 저 한심한 꼬락서니를 보자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 양심은 혼자 다 가진 양 가식적으로 구는 정호현도 짜증 났지만, 저 새끼들이 더 짜증 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명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놈이 왜 저러는 걸까 하는 불안감 반, 혹시나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반이었다. 나는 입매를 비틀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벽을 힘껏 걷어찼다. 퍼억! 둔탁한 소음이 복도 전체를 울렸다.

    “말 존나 많네. 아까 정호현이 내려가겠다고 할 때는 아가리 처닫고 눈알만 굴리던 새끼들이. 난 너희들이 갑자기 실어증에라도 걸린 줄 알았잖아. 하도 좆같이 조용해서.”

    비스듬하게 벽을 짚고 그들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그들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다들 경악에 차 입만 뻐끔거렸다.

    “근데 이제 와서 말문이 터졌어? 왜, 살고는 싶나 봐?”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맞아. 난 개새끼고, 너넨 자기가 개새끼인 줄도 모르는 개새끼고.”

    “무슨 말을…….”

    “자기가 목숨 걸고 살려 준 놈들이 하나같이 개새끼라니. 정호현도 참 불쌍하네. 그렇지?”

    나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고 바로 섰다.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어차피 좆같은 새끼들과 있다가 죽을 바에는 그나마 덜 좆같은 새끼랑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호현이 갔던 길을 고스란히 따라 아래층으로 향하는 내내 누구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따라오지도 않았다. 등 뒤에서는 조마조마한 정적이 흐를 뿐이었다. 가는 길에 붉은색 소화 장비 보관함이 보였다. 가지런히 비치된 소화기 옆에 소방 도끼가 걸려 있었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문을 열고 도끼를 꺼냈다. 묵직한 손잡이가 손에 감겼다.

    저벅저벅 걷던 걸음이 갈수록 점점 빨라졌다. 1층에 가까워질 때쯤에는 계단을 몇 칸씩 뛰어넘으며 달리고 있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 * *

    널찍한 대리석 로비가 눈앞에 펼쳐졌다. 사방이 피범벅이 되고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엎어져 깨진 화분이나 저만치 밀려난 소파 정도를 제외하면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도끼를 움켜쥔 채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공기에 어렴풋이 피 냄새가 섞였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는 로비를 기준으로 양옆으로 나뉘어 있었다. 관리 사무실과 열람실이 있는 쪽, 편의점과 식당이 있는 쪽.

    식당에서 사람이 죽었다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시선이 그리로 갔다. 멀찍이 보이는 커다란 유리문 너머로 언뜻 검은 그림자가 비친 것 같았다. 산 사람일까, 아닐까. 굳이 다가가서 확인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반대쪽 복도로 갔다.

    화장실 앞을 지날 때쯤 등 뒤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섬뜩했다. 뒤를 확 돌아보았다.

    “크으, 큭…….”

    열린 문을 통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목 근육이 끊어졌는지 고개가 비정상적인 각도로 축 늘어져 있었다. 걸을 때마다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1층에 내려온 이상 저들과 조우할 것을 각오하긴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그것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부패하다 만 것 같은 기괴한 생김새였다. 무심코 저것이 정호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도끼를 확 치켜들었다. 내려치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뺨에 썩은 피가 후두둑 튀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러운 감각이었다.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담긴 커다란 봉투를 터뜨린 것 같았다. 나는 연거푸 도끼를 휘둘렀다.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달려드는 상대를 발로 걷어차 밀쳐 놓고 끊임없이 공격했다.

    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숨이 끊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늑골이 으스러져서 가슴팍이 갈라지고 목이 반쯤 잘렸는데도 계속 움직였다. 도끼 손잡이를 움켜쥔 팔이 점점 뻐근해졌다.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 사람이 아무리 강한 마약에 중독되었어도, 아무리 끔찍한 병에 걸렸어도 저 지경이 되어서까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꼭 저예산 액션 게임에나 나오는 좀비 같지 않은가.

    ……좀비?

    퍼억! 체중을 실어 날린 일격에 마침내 상대의 목이 박살 났다. 너덜너덜해진 몸뚱이가 널브러졌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헉…… 흐윽, 하아.”

    속이 메슥거리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구역질이 나려는 걸 참고 손등으로 뺨을 대강 훔쳤다. 턱까지 내려 놨던 마스크를 올려 썼다.

    관리 사무실에 도착했다. 복도 쪽으로 난 창구를 통해 안이 보였다.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눈에 익은 갈색 머리카락. 정호현이었다.

    “정호현!”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탓에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늦은 것일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손잡이를 돌렸다. 안에서 잠가 놨는지 열리지 않았다. 몇 번 더 이름을 부르다가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도끼로 손잡이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쾅! 까앙!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문에 둥그런 구멍이 뚫렸다.

    문지방을 넘어 다가갔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수록 더욱 불안해졌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그의 어깨가 작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선배……?”

    그제야 내 존재를 알아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반쯤 감긴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는 나를 느리게 훑어보다 굳은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지금 내 몰골이 어떨지에 생각이 미쳤다. 전신에 피가 튀고, 한 손에는 피 묻은 도끼를 들고.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연쇄 살인마 같을 거다.

    “뭐 보고 있었어?”

    나는 그가 보고 있던 것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전원이 꺼진 모니터였다. 모니터 주변에 간단한 메모를 한 포스트잇이 여러 개 붙어 있었다. 학사 일정, 학내 주요 내선 번호, 위층 샤워실 도어록 비밀번호 같은 것.

    “이게 뭔데.”

    무슨 중요한 정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김이 빠졌다.

    “사과잖아요…….”

    나는 슬쩍 인상을 썼다. 포스트잇이 둥글고 빨간 사과 모양이긴 했다. 그런데 그게 뭐 어쩌라고.

    “제가 사과를 좋아하거든요. 저희 할머니가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시는데요……. 할머니 댁 갈 때마다, 매번 제일 예쁜 사과만 따로 빼 뒀다가 저 주세요. 이번 방학에도 찾아뵙기로 했는데.”

    그가 느릿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상황에도 맞지 않고 두서도 없는 말을 들어 주다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의 호흡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섬뜩한 전율이 타고 올랐다. 나는 뻣뻣한 고개를 억지로 움직여 아래를 보았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번졌다. 의자 팔걸이 아래로 늘어뜨린 정호현의 한쪽 손에서부터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시뻘건 웅덩이가 점점 면적을 넓혀 내 신발에까지 닿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정호현이 앉은 의자를 내 쪽으로 확 돌렸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안색이 너무 나빴다.

    피범벅이 된 팔목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은 줄줄 흐른 피로 뒤덮여 원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 깊게 물린 탓에 동맥까지 끊어진 것 같았다.

    “왜 오셨어요. 제가 방송했잖아요…… 내려오지 말라고.”

    “…….”

    “아무도, 안 올 줄 알았어요.”

    “…….”

    “오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분명히 제가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진짜로, 아무도 안 올까 봐…….”

    창백하게 질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힘없이 감긴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속눈썹을 적셨다.

    “여기서 혼자 죽는 거……. 무서…… 너, 너무……. 무서워. 혼자서, 계속, 너무 아팠어요.”

    나는 들고 있던 도끼를 아무 데나 집어 던졌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미친 사람처럼 손을 떨면서 그의 팔목을 감싸 눌렀다. 내 손과 소매가 흠뻑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파. 헉, 흐으……. 무서워요. 죽기 싫어…….”

    정호현은 내게 한 손을 잡힌 채 고개를 숙이고 서럽게 울었다. 피범벅이 된 팔목 위로 투명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하지만 그 흐느낌조차 점점 희미해져 갔다.

    “후배님, 정신 차려 봐. 내 말 들려? 대답해.”

    “…….”

    “대답하라고!”

    “…….”

    “호현아?”

    “…….”

    “……호현아.”

    나는 한참 멍하니 있었다. 그냥 그 자세 그대로, 피가 멎을 생각을 하지 않는 축축한 손목을 쥐고, 피 웅덩이에 무릎을 꿇은 채로.

    이제 곧 그의 심장이 완전히 멎을 것이다. 얼마간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있다가 곧 끔찍한 모습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세탁실에서 봤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조치를 취해야 했다. 도끼를 가져와서 정호현이 변이하기 전에 머리를 날리든가, 그를 내버려 두고 재빨리 도망치든가. 그게 맞는 선택이었다. 이대로라면 나까지 그에게 물려 죽을 판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손잡이를 부수고 들어온 문에서 덜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기괴한 울음소리가 뒤를 따랐다. 그것들이 기어이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헉.”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깊은 물 너머에서 듣는 것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나는 가슴팍을 움켜쥐고 쓰러져 정호현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아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헐떡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바깥의 괴물들이 쳐들어와 내 숨통을 끊은 것일까, 아니면 정호현에게 물린 것일까. 어느 쪽인지 분간할 새도 없이 의식이 빠르게 점멸했다.

    그렇게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을까. 통증이 씻은 듯이 수그러들었다. 숨도 못 쉬게 아프더니 이제 좀 살 만했다. 나는 그새 굳어 버린 것 같은 눈꺼풀을 어렵게 움직여 눈을 떴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푸르스름한 겨울 햇빛이 스며들었다. 이불이 팔다리에 감겼다. 충전기 잭을 꽂은 휴대폰 액정에 오늘 날짜가 선명하게 보였다. 12월 25일. 건너편 침대에서는 룸메이트가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다.

    내 방이었다.

    “…….”

    상체를 일으켰다. 등허리 아래에서부터 소름이 끼쳤다. 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1층 관리 사무실에 있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정호현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 괴물들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데 어떻게 내가 방에 와 있는 거지?

    꿈을 꾼 게 아닐까. 쓸데없이 생생하고 긴 악몽을. 그게 아니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안심되었다.

    이마에 엷게 땀이 배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순간 시야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다시 확인하려 손등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손등에 실처럼 가느다란 흉터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없었던 것이었다.

    어디서 생긴 흉터일까 생각하다 섬뜩한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 세탁실, 내게 밴드를 건네는 남자애, 손등에 난 상처에 밴드를 붙이려다 왈칵 화를 내는 나. 조각난 영상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흐억…….”

    다른 침대에서 자고 있던 룸메이트가 괴로운 신음을 내며 뒤척였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과민하게 흠칫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굴려 무기가 될 것을 찾았다.

    “으윽, 끄으으.”

    그는 조금씩 더 가파르게 경련했다. 근육이 뻣뻣하게 굳고 피부가 혈색 없이 허옇게 질렸다. 마치 시체처럼.

    땀으로 흥건한 목덜미에 뻘겋게 물린 자국이 보였다. 아직까지 이게 꿈일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그 광경을 보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끔찍한 악몽이, 내 망상인 줄만 알았던 지옥이 눈앞에서 되풀이되었다.

    “커헉.”

    룸메이트는 외마디 비명만 남기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불길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 간격을 벌렸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뒤로 손을 뻗었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놨던 조각칼이 손에 잡혔다.

    마침내 그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덮치기 전에 내가 한발 먼저 달려들었다. 등을 짓누르고 체중을 실어 조각칼을 목에 박아 넣었다.

    혹시나 이게 정말로 꿈이고, 저 자식은 그냥 조금 아팠던 것뿐이라면 어떡하지? 내가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되는 거라면?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칼에 찍힌 자리에서는 피가 나지 않았다. 검고 끈적한 액체가 칼날에 조금 묻어 나올 뿐이었다. 산 사람이 아니었다. 최후의 불안감마저, 혹은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캬악. 크아악!”

    그는 목에 구멍이 뚫리고도 미친 듯이 발악했다. 그의 목덜미를 잡아 침대에 우악스럽게 처박았다. 손에 닿는 축축하고 미지근한 살의 감촉조차 혐오스러웠다.

    같은 자리를 찍고 또 찍었다. 살이 팬 자리에 시꺼멓게 썩은 피가 고였다. 내 아래에 깔린 것이 사람으로, 아니, 같은 생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저것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혔다.

    마침내 그가 침대에 축 늘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칼날을 쑤셔 넣어 목을 힘껏 그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흐윽, 헉, 헉.”

    주춤주춤 물러섰다. 손에 힘이 빠져 피범벅이 된 조각칼이 떨어졌다. 한동안 눈앞의 참상을 멍하니 보다 내 꼴을 내려다보았다. 온몸에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바지에 튄 것은 옷감이 검은색이라 그나마 티가 덜 났지만 맨상체에 묻은 피는 몹시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피.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줄줄 흐르던, 바닥을 흠뻑 물들이고도 모자라 내 신발까지 적시던…….

    “…….”

    나는 우뚝 멈췄다.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당장 정호현을 찾아야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아, 그렇지. 지금 나 피투성이인데. 피를 지워야 하는데. 정호현은 죽는 게 무섭다면서 울었으니까, 피를 보고 기겁해서 울다가 또 죽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피범벅이 된 어깻죽지와 가슴팍을 문질렀다. 내 손이 지나가는 대로 검붉은 흔적이 남았다. 혼란스러워졌다. 왜? 왜 안 지워지는 거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린 검은 티셔츠가 눈에 띄었다. 그것을 집어 대강 걸쳤다. 피가 묻은 상체가 옷에 가려졌다.

    나는 비틀대며 신발을 꿰어 신고 문을 나섰다. 기억 속에 남은 그 애의 방을 향해 달렸다. 내가 지금 어떻게 보일지는 생각하지 못한 채로.

    * * *

    정호현의 방 문 앞에 섰다.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불안해졌다. 굳게 잠겨 있던 관리 사무실 문과 내게서 고개를 돌린 채 축 늘어져 있던 정호현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다짜고짜 문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덜컥. 너무도 쉽게 방문이 열렸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한쪽 침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침구조차 없이 매트리스만 있는 상태였고, 다른 쪽 침대는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있었다.

    이불을 확 젖혔다. 그 아래에서 정호현이 잠들어 있었다. 양쪽 귀에 귀마개를 꽂은 채로. 입술을 살짝 벌리고 베개에 고개를 반쯤 파묻은 채 곤하게 자는 얼굴이 아기 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과 너무 달라서 위화감이 들었다.

    “너…….”

    헐렁한 반팔 티셔츠 아래 드러난 흰 팔을 움켜쥐고 확인했다. 피가 끝도 없이 울컥울컥 솟던 팔목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정호현이 눈을 떴다. 나를 보는 눈동자에 경멸도 슬픔도 아닌, 공포와 경악이 담겨 있었다.

    “누, 누구, 누구세요?”

    그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까까지 천진하고 평온하게 자고 있던 정호현은 어디로 가고, 맹수에게 쫓겨 궁지에 몰린 먹잇감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떻게 한 거야.”

    “누구세요. 헉, 왜 이러세요…….”

    그가 내게서 빠져나가려는 듯 다급하게 몸을 들썩였다. 힘을 주어 팔을 가차 없이 비틀었다.

    “악!”

    비명이 터졌다. 그의 다리가 침대 위에서 고통스럽게 버둥거렸다. 이불을 확 걷어 치웠다. 정호현은 새하얀 반팔 티셔츠 아래 드로어즈만 입은 차림이었다. 옅은 민트색? 그 와중에 색도 꼭 자기 같은 걸 골랐다.

    그의 위에 올라타 움직임을 제압했다. 허벅지가 깊숙이 얽히고 아랫배가 맞닿아 눌렸다. 내 아래에서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게 느껴졌다.

    “너 죽었잖아.”

    “네…… 네?”

    “너, 분명히 죽었어. 팔목 물려서 피 잔뜩 흘리면서 울다가 죽었잖아. 너 심장 멈추는 거까지 다 봤어.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살아났어? 나는? 너랑 같이 관리 사무실에 있었는데, 왜 눈 감았다 뜨니까 다시 내 방이냐고.”

    정호현이 패닉에 빠져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내 팔에 시선이 닿았다. 검은색 반팔 티셔츠가 채 가려 주지 못한, 팔뚝에서부터 손등에까지 덕지덕지 묻은 검붉은 핏자국을 보았다.

    “…….”

    그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밝은색 홍채 가운데 동공이 확 조여들었다. 그가 내게 잡히지 않은 팔을 빼내어 주먹을 휘둘렀다. 퍽!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그리고 연이어 나를 걷어찼다. 무릎에 명치가 정통으로 찍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신음을 삼켰다. 그는 그 틈을 타 잽싸게 빠져나갔다.

    “신고할 거예요.”

    그가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고 최대한 의연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짱하게 살아서 숨을 쉬는 정호현이, 상처도 흉터도 없이 매끈한 그의 팔목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건데. 저 이상한 괴물 같은 것들은 또 뭐고.”

    “…….”

    “지금 다들 짜고 나 속이는 거야? 아니면 내가 돌아서 헛것을 보는 건가? 설명해 봐. 제발 이 좆같은 일 좀 설명해 보라고!”

    정호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피해 창가 쪽으로 뒷걸음쳤다. 침착함을 가장하려 애를 썼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였다.

    열린 문을 통해 복도가 어수선해지는 것이 어렴풋이 들렸다. 급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룸메이트에게 쫓겨 정호현의 방 앞까지 왔을 때 복도에는 이미 다른 괴물들이 있었다.

    “나가자.”

    정호현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는 바짝 날을 세우고 뒤로 물러섰다.

    “나가야 한다고! 또 죽고 싶어?”

    “이 미친 새끼가. 오지 마!”

    “씨발. 존나 답답하게 구네.”

    점점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대로 꾸물거리고 있다간 곧 저것들이 들이닥칠 터였다. 무작정 다가가 그의 팔목을 틀어쥐었다. 억지로 질질 끌고라도 나갈 생각이었다.

    “입 좀 닥쳐!”

    “흐윽, 헉…… 아악!”

    정호현이 악을 쓰며 저항했다. 그러다 갑자기 뭐에 홀린 듯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를 향했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방에 들어오면서 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게 떠올랐다. 문은 한두 뼘 정도 비스듬히 열린 채였다. 그 사이로 거무죽죽하게 부패한 얼굴들이 우글우글 모여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늦었다. 가장 먼저 그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나치게 요란을 떨었고, 지나치게 미적거렸다.

    “아, 아…….”

    정호현이 탄식했다. 끔찍한 광경에 넋이 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씨근덕거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정호현, 내가 말했지. 빨리 나가자고!”

    그가 덜덜 떨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더욱 공포에 질렸다. 이가 따닥따닥 부딪치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렸다.

    “내, 내 이름…… 어떻게.”

    방문이 활짝 열렸다. 여러 명이 팔다리를 끌며 꾸역꾸역 기어들어 왔다. 기숙사 방은 좁고 밀폐되어 있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헉, 허억…… 흐윽…….”

    이성을 잃은 정호현이 제대로 서 있을 기운조차 없어 휘청대며 창가에 기댔다. 그는 등 뒤를 더듬다 창문을 밀어 열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방 안으로 확 밀려들었다. 목뒤와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리께까지 오는 창틀을 짚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호현?”

    다음 순간 정호현의 상체가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등 뒤로 펼쳐진 흐린 하늘과 삭막한 겨울 캠퍼스를 배경으로 그의 갈색 머리칼이, 새하얀 티셔츠가 펄럭펄럭 나부꼈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내 손 잡아.”

    창 너머로 상체를 내밀고 손을 힘껏 뻗었다. 뒤에서 달려드는 괴물들이 이 순간만큼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잡으라고!”

    온 힘을 다해 윽박질렀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정호현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미 간격이 너무 벌어져 있었다. 우리는 닿지 못했다. 그의 손끝이 내 손마디를 짧게 스친 것이 전부였다.

    “…….”

    나는 아래로 손을 내민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는 그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갈퀴 같은 손이 내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심장을 저미는 통증이 번졌다. 곧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오는 거라고는 피와 시체밖에 없는 싸구려 고어 영화가 막을 내리듯.

    나는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어설프게 덮여 있던 이불이 주룩 흘렀다. 공황 상태에 빠져 호흡조차 잊고 있다가, 물에 빠졌다 끌려 올라온 사람처럼 불시에 숨이 터졌다.

    “허억, 헉…….”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헐떡였다. 건너편에 누운 룸메이트가 몸을 뒤틀며 끙끙 앓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변이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한숨 돌리고 이따 죽여야지.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얼굴을 가린 손을 스르르 내렸다. 손가락에 못 보던 작은 흉터가 있었다. 정호현의 손톱이 긁고 지나간 자리였다.

    나는 룸메이트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오는 결론은 비현실적인 것뿐이었다. 하도 뻔해서 요즘은 만화나 게임에서도 잘 쓰지 않는 연출 아닌가.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터무니없다 한들 내겐 현실이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정호현이 죽는 순간 모든 것은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 * *

    룸메이트의 시체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복도를 걸었다. 도착한 정호현의 방 앞은 언제 끔찍한 일이 벌어졌냐는 듯 말끔했다. 저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 연다면 먼젓번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곤히 자고 있던 정호현이 깜짝 놀라 깨어나고, 나를 흉악한 침입자 취급을 하겠지. 그럼, 열지 않는다면?

    나는 문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그의 방을 처음부터 못 본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숙사 방은 도저히 있을 곳이 못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방음이 허술해서 큰 소리를 내면 복도에까지 들렸고, 문짝은 별다른 연장 없이도 몇 번 세게 두들기고 걷어차다 보면 곧장 망가졌다. 위층 샤워실로 향했다. 도어록이 달린 굳건한 철문이 떠오른 탓이었다. 관리 사무실 모니터에 붙은 사과 모양 포스트잇도.

    샤워실 앞에는 벌써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학생들이 몇 명 모여 있었다. 무작정 도망쳐 오긴 했는데 문을 열 줄 몰라 우왕좌왕하던 와중이었다. 나는 그들을 밀치고 도어록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삑삑삑삑, 띠로롱, 철컥. 두꺼운 철문이 쉽게 열렸다.

    “어떻게…….”

    당황한 사람들이 눈을 굴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비밀번호가, 고작 숫자 네 개가 쓰인 포스트잇이 정호현이 마지막 순간까지 보고 있던 풍경이었다.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나는 심장이 한 번 멎어야 했다.

    샤워실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우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깥으로부터 단절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흘긋흘긋 내 눈치를 보았지만 무시했다. 그중에 어떤 여자애 한 명은 나를 아는지 기영원 선배님 어쩌고 하며 쭈뼛거렸다. 미안하지만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해 줄 겨를이 없었다. 아니, 사실 미안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얌전히 샤워실에 처박혔다. 바깥에 돌아다니는 괴물들부터 안전하게 몸을 피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 얼마뿐이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위험에서 벗어나자 다른 문제가 닥쳤다.

    샤워실에 먹을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수돗물과 비누, 샴푸뿐이었다. 굶주림에 시달린 이들은 두려움을 잊고 과감해졌다.

    “먹을 거 구해 오자. 다 굶어 뒈지기 전에.”

    “어디서요?”

    “1층 편의점 말고 더 있냐? 식당은 그 난리가 났다고 하니까 안 되겠고. 편의점 털어 오면 되겠네.”

    웬 불규칙적으로 생긴 새끼가 침을 튀기며 떠들어 댔다. 자기가 이 무리의 리더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름은 그럴 가치를 못 느껴서 외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벌써 가져갔으면 어떡해요?”

    “그렇게 정신이 없었는데 누가 편의점 털 생각을 하겠어? 다들 도망가기 바빴을걸. 이런 생각은 우리처럼 안전하게 피난처 찾은 놈들밖에 못 해.”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말 위험한 상황에서는 배고픔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피 웅덩이 가운데 앉아 힘없이 눈을 감고 있던 정호현처럼. 몇 번이고 잊어버리자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처참한 광경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알았어요. 나간다고 쳐요. 근데 누가 나갈 거예요?”

    결정적인 물음이 던져졌다. 서로가 서로를 불편하게 곁눈질했다.

    “가위바위보로 정할까? 제비뽑기? 투표?”

    “혀, 형. 저기, 죄송한데요. 유진이는……. 유진이는 한 번만 빼 주시면 안 돼요?”

    남자애가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부축하고 있던 여자애를 등 뒤로 보냈다.

    “뭐? 야 인마, 박건우. 지금 그게 말이 되냐? 이 상황에 예외가 어디 있어?”

    “지금 유진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하, 쓰읍. 꼭 이런 고문관 같은 새끼가 하나씩 있다니까.”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다 얼굴을 구기고 솥뚜껑만 한 손을 확 치켜들어 때리는 시늉을 했다.

    “이 찐따 새끼가.”

    화들짝 놀란 남자애가 물러섰다. 그는 이번엔 자신이 대신 나갈 테니 여자 친구는 빼 달라고 사정했다.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디서 염병을 떨고 자빠졌냐, 꼴에 커플이라고 유세 부리는 거냐는 욕설만 잔뜩 듣고 기가 꺾였다.

    우리는 결국 가위바위보로 바깥에 다녀올 사람 두 명을 정하기로 했다. 모두가 널찍한 샤워실에 둥그렇게 모여 섰다.

    “가위, 바위.”

    목숨이 오가는 심각한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멀리서 언뜻 보면 MT라도 온 것 같아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표정만은 다들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보!”

    모두가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모였다. 정확히는 내게로.

    “…….”

    손을 내지 않은 건 나뿐이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뿐만 아니라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무릎이 풀썩 꺾였다. 심장이 터질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맥박이 뛸 때마다 온몸의 혈관이 모조리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헉…….”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속절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샤워실 천장이 빙빙 돌았다. 경악 어린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까맣게 물들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가물가물하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아, 씨발. 좆같은 정호현.

    * * *

    또다시 정호현을 만났다. 시치미를 떼고 첫인사를 나누고 자기소개를 했다. “정호현이라고 하는데요, 경영학과.” 단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여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은 알았다. 이 좆같이 환상적인 시스템에 의하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호현을 살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내가 먼저 죽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반복의 매개체는 정호현이었다. 그 애가 죽음을 피해 끝까지 살아남는 데 실패하는 한 굴레는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캄캄한 암흑에서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끌려왔다.

    하지만 내가 그의 곁에 붙어 있다고 해서 딱히 더 나아지는 것 또한 없었다. 나도 정호현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몇 번이나 다른 시간을 겪고 되돌아왔다는 점을 제외하면. 내게 초능력이 생기지도, 저 새끼들이 약해지지도 않았다. 애초에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 자체가 판타지인 주제에 이런 부분에선 더럽게 현실적이었다.

    그 애는 나의 천형(天刑)이었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무런 징조도 없이 불쑥 찾아온 재앙이 천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다지 착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이런 벌을 받아야 할 만큼 나쁘게 살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엿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살길을 찾기 위해 세탁실과 샤워실에 갔다. 열람실과 편의점에도 갔다. 무작정 로비를 지나 정문으로 돌진하기도 했고, 옥상에 올라가 보기도 했다. 가끔 운이 좋으면 기숙사를 탈출하는 데 성공해서 다른 곳으로 간 적도 있었다.

    어느 층에 적들이 얼마나 있는지, 어느 길로 가면 위험한지, 잠긴 문을 어떻게 여는지, 어떤 무기를 쓰는 게 효율적인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몸으로 익혔다. 교훈을 얻기 위해 너무도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둘만 남아 발악할 때도 있었고, 여러 명이 있는 무리에 속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정호현이 나를 구했고, 때로는 내가 정호현을 구했다. 다만 그는 나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공평히 선의를 베풀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 죽어도 좋으니 정호현만은 살길 바랐다.

    수많은 끔찍한 시간을 거치는 동안 그 애는 단 한 번도 나를 외면한 적이 없었다. 고맙기는커녕 가증스러웠다. 그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 나를 구하고 죽어 봤자 내가 도달하는 결말은 하나뿐이었으므로.

    나는 종종 큰 부상을 입었다. 정호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정호현의 상처는 기억과 함께 깡그리 날아가는 반면, 내 상처는 흉터가 되어 고스란히 몸에 새겨진다는 것이었다.

    멀쩡히 살아나 방에서 깨어난 후에도 이따금 지난번의 후유증이 남았다. 팔이 통째로 물어뜯기는 경험을 하고 돌아왔을 때는 멀쩡한 팔을 붙들고 침대를 뒹굴며 신음을 삼켰다. 무너지는 구조물에 다리가 깔려 으스러진 뒤에는 한참이나 침대 아래 바닥에 발을 디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점차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이게 현실이 맞는 건지. 내가 현실이라 생각하는 게 사실은 되다 만 악몽이거나, 나아가서는 질 낮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따위인 건 아닌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정말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림자처럼 들러붙는 절망을 외면하려 정호현에게 더욱 집착했다. 아무리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열쇠였다.

    그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뇌리에 새겨졌다. 옅게 솜털이 남은 뺨이, 사뿐히 웃는 눈매가, 왼쪽 눈 아래 있는 눈물점이 눈을 감아도 어른거렸다. 거울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가물가물해진 내 얼굴보다 그 애의 얼굴이 더 익숙했다.

    정호현은 대체로 타인에게 무관심했다. 놀랍게도 그랬다. 첫인상만 보면 세상의 모든 일에 다 넉살 좋게 참견하고 다닐 것 같았는데, 그는 의외로 자기중심적이었다.

    웃는 얼굴로 상대를 훑어보며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상대해 봤자 득 될 것 없다는 판단이 서면 웃는 얼굴 그대로 돌아섰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에게도 형식상으로 적당히 무르게 굴며 비위를 맞췄다. 귀찮으니까 져 준다는 게 빤히 보여서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

    그가 내게 격렬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처음으로 돌아왔을 때뿐이었다. 느닷없이 방에 들이닥친 나를 사이코패스 살인마 보듯 보았을 때. 초면인 척 평범하게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트고 나면, 그는 자연스럽게 내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껄끄럽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니고 있는 놈. 성격 안 맞는 선배. 꼬박꼬박 존대를 쓰며 대접해 주고 있긴 하나 그 이상으로는 절대 가까워질 일 없는 사람. 나는 정호현에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참 존나게 불공평한 일이었다. 나는 그 새끼 속옷 색깔까지 아는데. 어느 쪽으로 수납하는지도. 피를 왈칵 쏟으며 어떻게 신음하는지, 숨이 멎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까지 기억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억울하거나 화나지는 않았다. 나는 정호현이 나를 싫어하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깊이 그를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 * *

    이번에도 실패했다.

    정호현과 기숙사 복도를 가로질러 도망치던 중이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것들을 따돌리기도 전에 앞에서 새로운 놈들이 나타났다. 루트를 잘못 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가는 곳마다 시체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왔다.

    우리는 머지않아 막다른 곳에 도달했다. 최상층이었다. 등 뒤의 복도에도, 아래층에서부터 올라오는 계단참에도 놈들이 가득했다. 진퇴양난이었다. 정호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에도 그들은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개중 누군가 정호현의 팔목을 붙잡았다.

    “으악!”

    정호현이 기겁하여 몸부림을 쳤다. 그를 도와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내 다리가 잡혔다. 우리를 둘러싼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부패한 침이 뚝뚝 떨어졌다. 틀렸다. 다 끝났다. 절망이 뇌리를 잠식했다.

    그들이 탐욕스럽게 달려들었다. 정호현의 모습이 인파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끔찍한 통증과 함께 몸의 일부가 뜯겨 나갔다.

    “서, 선배.”

    꿈틀거리는 수많은 팔다리 사이로 시선이 마주쳤다. 정호현의 눈이 절박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뜯어 먹히느니, 차라리…….

    우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그들을 뿌리치고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몸이 허공에 붕 떴다. 버둥거리며 난간 너머로 손을 뻗는 것들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최상층에서 최하층까지 떨어지는 동안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쿵! 끔찍한 충격이 전신에 퍼졌다.

    “흑……. 으윽.”

    나는 힘겹게 바닥을 기었다. 다리에 전혀 감각이 없었다. 신경이 끊어진 것일까. 아니, 이미 통째로 뜯겨 나갔을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그다지 확인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조만간 내 심장은 또 멎을 테니까.

    내 바로 앞에 정호현이 쓰러져 있었다. 미처 감지 못한 눈꺼풀 아래로 흐린 갈색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그의 눈가를 타고 한 줄기 피눈물이 흘렀다. 떨리는 손을 뻗었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손이 닿는 순간 그의 뺨은 더욱 처참하게 피범벅이 되었다. 내 손도 피로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순간 정호현의 시선이 움직였다. 이미 의식을 잃은 줄 알았는데, 그는 느리게 눈을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맥없이 풀려 있던 입매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미소 짓는 것처럼. 뒤이어 그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슴이 갑갑해졌다.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해 달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목구멍 너머로 울컥 피가 솟았다. 나는 희미한 호흡을 할딱이며 핏덩이를 쏟아 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정호현은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벌린 모습 그대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헉…….”

    느리게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보이는 정호현의 얼굴이 점점 흐려졌다. 이윽고 세상이 어둠에 완전히 잠겼다. 또다시 배드 엔딩이었다.

    나는 어김없이 의식을 되찾았다. 식은땀이 밴 팔뚝에 몸에 미지근한 이불이 감겨들었다. 짜증스럽게 이불을 밀어 치우고 축축한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날카로운 이명이 귀를 할퀴었다.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이명이 이번엔 치직거리는 노이즈로 바뀌었다. 머릿속에 뇌 대신 고장 난 앰프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옆 침대에 누운 룸메이트가 괴롭게 신음했다. 귀를 막고 웅크린 채 중얼거렸다.

    “조용히 해…….”

    환청은 잦아들기는커녕 더 심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고개를 확 들었다.

    “조용히 하라니까?”

    나는 돌아누운 그의 등을 빤히 보았다. 갑자기 허공에서부터 피가 분수처럼 확 튀어 그의 위로 흩뿌려졌다. 슬래셔 무비처럼 과장된 연출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곳을 오래 보고 있으면 시야가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벽과 천장이 녹아내리고, 내가 죽인 괴물들의 형상이 허공에 떠올라 꿈틀거렸다. 눈 닿는 곳마다 지옥이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나를 잡아먹으려 들고, 죽을 때마다 과거 여행을 하는 판국에 환청이 들리고 환각을 보는 것쯤이야. 나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귓가에는 여전히 백색 소음이 들렸다.

    “넌 지겹지도 않냐? 매번 이 지랄 하는 거.”

    건너편에서는 대답 대신 앓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인상을 구겼다.

    “대답 안 하지?”

    “으헉, 큭.”

    “대답 안 할 거면 조용히라도 하든가.”

    “끄으으…….”

    “맞다. 너 뒈졌지. 대답을 못 하겠구나?”

    책상 위의 조각칼을 찾아 쥐고 침대 가장자리에 다가갔다. 그는 아직 완전히 변이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는 아니게 되겠지만, 일단 지금은 사람이었다. 치료할 방법이 없는 데다 치사율이 100퍼센트에 달하는 신종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 하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목에 칼을 꽂았다.

    “커억!”

    어차피 이건 튜토리얼 몬스터 같은 거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나타나서, 기본적인 조작법을 알려 준다는 제 사명을 다하고 죽는. 괴물이 된 뒤에 죽이나 지금 죽이나 결과는 같다.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조용히 안 해? 응? 씨발, 조용히 좀 하라고!”

    콱. 콰직. 콱! 칼날이 살을 연거푸 갈랐다. 이제는 놈들의 머리를 따는 데도 요령이 생겼다.

    인간의 목은 의외로 단단해서 도끼나 톱으로 몇 번씩 내리쳐도 잘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근육과 뼈에 보호받는 목 한가운데를 노리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대신 턱 아래의 연한 살에 칼날을 찔러 넣고 근육 결을 따라 쭉 긋는 게 제일 쉽고 빨랐다. 기억도 안 나는 오래전 옛날, 기초 드로잉 시간에 배웠던 걸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헉……. 하아.”

    팔목으로 턱을 쓱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팔이나 얼굴이나 피가 잔뜩 튀어서 그래 봤자 별 효과는 없었다. 룸메이트는 움직임을 멈춘 지 꽤 오래되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이 찔러서 사방이 피바다였다. 하지만 무섭거나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크린 너머로 보는 것처럼 아무 감흥이 없었다.

    “…….”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흉악한 충동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뻘겋게 물든 시야가 일그러졌다. 쓰러진 룸메이트의 뒤통수 위에 해골 모양이 떠올랐다. 화질 낮은 홀로그램처럼 화상이 잔뜩 뭉개져 있었다. 해골은 대각선으로 잘려 반 토막이 나더니 곧 스르르 사라졌다. 환각도 참 지랄 같은 것만 보인다 싶었다.

    “하하…… 아하하하.”

    나는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도 우스웠다.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끊임없이 들리는 노이즈도 내 웃음을 따라 치직치직 끓어올랐다.

    웃음을 뚝 그치고 벌떡 일어섰다. 손끝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어쨌든 방에서 나가야 했다. 나가서 정호현을 만나야 했다. 평범한 대학생인 척, 아무것도 모르고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있다 놀라서 뛰쳐나온 척하려면 피를 말끔히 씻어 내야 했다.

    물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 섰다. 얼굴과 팔을 한 번 문지를 때마다 물에 붉은색이 옅게 섞여 들었다. 좁은 욕실에 썩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막 틀었을 때는 얼음장 같던 물이 점점 따뜻해졌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하염없이 피를 씻고 또 씻었다.

    문득 지난 죽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를 빤히 보던 정호현, 시시각각 빛이 사라져 가던 갈색 눈동자, 흰 뺨에 내 손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벌겋게 묻은 핏자국까지.

    “…….”

    나는 말끔하게 제 색을 되찾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홀린 듯이 손을 들어 내 뺨에 얹어 보았다. 뺨도 손도 오래 물을 맞은 탓에 얼얼하기만 했다. 별다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스르르 내려 입술에 갖다 댔다. 손끝에 닿은 정호현의 뺨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 애가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는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필사적으로 되짚었다.

    피를 뒤집어쓰고 죽어 가는 정호현, 비명을 지르는 정호현, 내게 날을 세우는 정호현을 하도 많이 본 탓에, 이젠 그 애가 웃는 모습만 보아도 가슴 한구석이 선뜩했다. 이번엔 또 얼마나 빨리 죽으려고 그렇게 달게 구나 싶었다. 정호현이 나를 꺼려 하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그 반대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흐읏…….”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무심코 내려다보았다. 내 것이 반쯤 발기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죽고 살고를 반복하느라 성욕 따윈 생각나지도 않았는데. 한 번 흥분을 인식하자 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자괴감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다른 손으로 성기를 쥐고 뒤쪽 타일 벽에 등을 기댔다. 젖은 기둥을 감싸고 몇 번 문질렀다. 뜨뜻하고 습한 손아귀에 귀두를 넣고 주무르다 아래로 쭉 쓸어내렸다. 힘줄이 돋은 예민한 피부가 죄다 쓸렸다. 성기 전체에 빠르게 피가 몰렸다. 등줄기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탁, 탁, 탁. 물기 어린 살이 연달아 마찰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정호현을 떠올리며 자위했다. 안 된다고 도리질 치는 정호현을 그의 침대에 찍어 누르고 올라타서 새하얀 반팔 티셔츠를 벗기는 상상을 했다.

    그 존나게 깜찍한 민트색 드로어즈를 발목까지 끌어 내리고, 속옷 위로 윤곽만 본 게 전부인 것을 끄집어내서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빨고 싶었다. 사내새끼 자지를 무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지만 그 애 거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정호현은 얼굴 생김만큼이나 자지도 말갛고 예쁠 테니까.

    사타구니에 고개가 파묻히도록 좆을 목구멍에 깊이 처박은 다음에 힘주어 쭉쭉 빨아들이면 숨넘어가는 소리로 앙앙 울겠지. 그다음엔 어떻게 할까? 뒷구멍에 혀를 집어넣어 잔뜩 문질러 줄까. 아니면 내 걸 빨게 시킬까. 모양 좋은 엉덩이를 잔뜩 벌려서 좆을 쑤셔 박을까.

    내가 뭘 하든 그는 눈 아래 있는 점이 눈물로 흠뻑 젖도록 울 것이다. 몸부림치고 저항할 것이다. 나를 증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필시 증오할 것이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로써 드디어 우리가 공평해질 수 있을 테니.

    정호현이 끝까지 반항하면 어떡하지? 죽어도 내가 싫다고 하면. 그러면.

    ……죽일까?

    어차피 죽여 봤자 다시 살아날 텐데. 그에겐 아무 기억도 남지 않을 텐데. 내가 이 좆같은 상황에 처넣어진 게 다 정호현 때문이니까, 좀 죽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흣, 흐윽.”

    잇새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물에 흠뻑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들러붙어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앞머리를 쓸어 넘길 여유조차 없었다.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고 죽었다 되살아나 제 방에서 자고 있을 정호현이 이런 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음란한 상상을 하는 와중에도 내게 데면데면하게 굴지 않는 정호현만은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다.

    혐오스러워 죽겠다는 눈을 하고서는 입매만 올려 억지로 웃지 않을까.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서는, 그 뒤로 나를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새끼는 그런 새끼니까.

    〈저는 정호현이라고 하는데요, 경영학과.〉

    〈사과잖아요……. 제가 사과를 좋아하거든요.〉

    〈아파. 헉, 흐으……. 무서워요. 죽기 싫어…….〉

    〈서, 선배.〉

    머릿속에서 정호현이 속삭였다. 어떤 때는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고, 어떤 때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환청인지 아닌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손에 힘을 주어 성기를 거칠게 비비고 흔들었다. 단단하게 굳어진 배와 허벅지 근육이 움찔 경련했다. 점점 손놀림이 빨라졌다. 숨이 가빠 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노르스름한 욕실 조명이 얼룩졌다. 아찔했다. 목 너머로 신음을 삼키고 고개를 젖혔다.

    “헉……! 읏…….”

    싸질러 넣을 구멍을 찾지 못한 좆 대가리가 손아귀 안에서 무의미하게 꿈틀거렸다. 음낭에 가득 고여 있던 정액이 기다렸다는 듯 쭉쭉 뿜어졌다. 기계적으로 기둥을 주물러 정액을 뽑아낼 때마다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공허하고 야만적인 쾌락이었다.

    사정이 끝났다.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물줄기가 정액을 곧바로 씻어 내렸다. 희끄무레한 액체가 투둑, 툭, 떨어져 물에 뒤섞여 배수구로 흘러갔다. 그 광경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역시 이건 현실이 아니었다. 현실이라면 이렇게 끔찍할 리가 없었다. 현실이라면, 결코 이럴 리가…….

    * * *

    이 모든 것은 현실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리가 맑아졌다. 모든 게 명료하게 정리되었다.

    나는 더 이상 놈들을 죽이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살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리셋하면 다시 원상 복귀될 것들이었다. 리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몇 번이고 같은 장면을 재생하는 비디오 플레이어처럼. 그러니 굳이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점차 무감각해졌다. 식칼로 누군가의 팔다리를 썰면서도 혐오스러워하기보다는 칼날에 기름이 묻어 무뎌지는 걸 걱정하게 되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도 시체가 통로를 막아서 귀찮게 됐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커녕 생김새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턴가 정호현을 제외한 이들의 얼굴이 잉크를 엎지른 것처럼 새까맣게 보이는 때가 늘어났다. 말소리에도 종종 치직거리는 노이즈가 끼었다. 현실이 아니라는 내 믿음은 더욱 공고해졌다.

    나는 게임 맵을 탐사하듯 여기저기를 누볐다. 죽어도 진짜로 죽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우선 시작점은 기숙사였다. 거기서부터 선택을 해야 했다. 기숙사에 계속 있을지, 다른 곳으로 옮겨 갈지.

    기숙사에 머무르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식당과 편의점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식량을 찾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다른 건물들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좁은 방 수십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방어에 취약했다.

    기숙사를 나가면 가장 가까운 곳에 학생회관과 중앙 도서관이 있었다. 학생회관은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있어 눈이라도 오면 속수무책으로 고립되기 십상이었다. 중앙 도서관은 평지에 있는 데다 널찍했지만 내부 사정이 암담했다. 흉기로 무장한 집단이 다른 사람들을 죄다 몰아내고 도서관을 점거하고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주로 급소를 잘못 물어뜯겨 과다 출혈로 죽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었다. 식당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화재에 휩쓸려 죽은 적도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좀 더 다양하게 죽었다. 중앙 도서관을 점령한 무리들과 싸우다 칼에 찔려 죽기도 했고, 열람실 게이트를 부수고 나온 괴물들에게 전신을 뜯어 먹혀 죽기도 했다. 사태 발생 당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던 체육관에서는 철근에 배가 뚫려 죽었다.

    70주년 기념관에서는 정호현이 자살했다. 지하실 배관에 목을 매어서였다. 두 번째로 돌아왔을 때 창문 너머로 떨어진 걸 제외하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죽음에는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나조차도 한순간 넋을 놓아 버렸다. 정호현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고 내 심장이 멎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정호현을 보고 또 보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호현이 먼저 죽어 준 덕분에 나는 상처를 늘리지 않고 되돌아갈 수 있어서. 기왕 리셋할 거면 깔끔한 방법으로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수많은 전투와 도주와 죽음을 반복하며 나는 조금씩 요령을 습득했다. 다른 사람들이 갑자기 닥친 재앙에 혼비백산하고 있을 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쉽게 놈들의 목을 잘랐다. 빽빽 비명을 질러 대는 이들을 보아도 측은하기는커녕 한심하기만 했다. 연기 참 잘한다 싶었다. 어차피 진짜도 아닌데.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괴물 보듯 꺼려 했다. 괴물은 내가 아니라 저 새끼들인데도. 더럽게 답답했다. 능력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그저 호들갑 떠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새끼들이, 그냥 좀 닥치고 가만히 있을 것이지. 영화로 치면 이름 없는 엑스트라고, 게임으로 치면 무한정 복사해서 붙여 넣은 NPC에 불과한 주제에.

    차곡차곡 쌓이던 짜증이 결국 폭발했다. 인문관에서 만난 사람들과 빈 강의실에 모여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던 중이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물자는 다 떨어진 것 같으니 다른 건물로 옮겨 갈지, 아니면 계속 남아 있을지로 의견이 갈렸다.

    나는 이동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남아 있자고 주장했다. 밖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구조될 때까지 인문관에서 버티자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아무리 버텨 봤자 구조 따위는 오지 않는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그들의 멍청함에 환멸이 날 뿐이었다.

    “며칠만이라도 여기 더 있어요. 곧바로 움직이는 건 위험하니까.”

    “맞아. 먹을 거라면 몰라도 물은 지금도 충분히 있잖아.”

    “6층은 아직 안 뒤져 본 것 같은데. 거기 교수 연구실 있지 않아요? 한번 쭉 둘러볼까요?”

    “그건 일단 상황이 좀 정리된 후에…….”

    “지금은 우선…….”

    심각하게 수군거리는 소리에 노이즈가 섞였다. 듣고 있자니 머리가 아팠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닥쳐.”

    사람들은 내 말을 듣지 못하고 여전히 떠들어 댔다. 속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발을 들어 옆에 있던 의자를 있는 힘껏 찼다. 요란한 소음이 강의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들이 깜짝 놀라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닥쳐. 아가리 닥치라고!”

    그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눈에 보이는 의자와 책상을 있는 대로 걷어차 뒤집어엎었다. 누군가 책상에 맞아 휘청거렸다. 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 사람도 아니니까.

    “뭘 안다고 떠들어? 어차피 곧 다 뒈질 것들이. 나가자고 했잖아. 내가 하자면 좀 하자는 대로 해!”

    사람들이 주춤 물러섰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웬 추상적이고 비대칭적으로 생긴 새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벌벌 떨며 뒷걸음치다 다리가 꼬여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아니. 갑자기, 갑자기 왜.”

    “갑자기 왜, 뭐.”

    “지금 그쪽 말 안 들어줬다고 이러는 거예요? 그건…….”

    그가 한껏 쫄아 있는 와중에도 용케 항의했다. 다른 사람들도 동조의 눈빛을 보냈다. 말을 안 들어줘? 웃기는 소리였다. 제깟 게 뭐라고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거지? 나 아니었으면 벌써 나가 뒈졌을 주제에.

    “그래. 그렇게 여기 있고 싶으면 있어. 배 째고 좆 까고 있다가 사이좋게 다 뒈지라고. 이번 겨울방학 MT는 저승으로 가나? 프로그램은 집단 자살 체험이고? 와, 존나 퍽도 재밌겠네.”

    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윽박질렀다.

    “씨발, 뭘 봐!”

    “선배, 그만 좀 하세요.”

    입을 다물고 상황을 살피던 정호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지금 선배 의견에 무조건 반대하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죠.”

    항상 저런 식이었다. 방관할 거면 끝까지 방관하든가, 저 새끼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겁하지는 못했다. 내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다가도 어느 선을 넘으면 정호현은 적당주의를 버리고 나섰다. 그리고 속에 품고 있던 결벽적인 도덕관을 내세웠다.

    “뭐?”

    그는 내 앞에선 늘 똥 씹은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땐 생글생글 잘만 쳐 쪼개더니. 씨발, 좆같게. 다른 새끼들 면상을 칼로 죽죽 그어 놓으면 그만두려나.

    “선배가 생각하고 있는 거 하나도 말씀 안 해 주시는데 어떻게 알아요. 무작정 강요하기만 하시고.”

    “…….”

    “우리 처음 만났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서로 모르는 것도 많고 이해 안 되는 것도 많은 게 당연해요. 그러니까 그만큼 더 대화를 해야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확 뒤집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정호현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퍽! 정호현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그는 의자와 책상이 모두 밀려나고 없는 텅 빈 강의실 바닥에 쓰러졌다. 주변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처음 만나?”

    간신히 몸을 추스른 정호현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돌발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한쪽 입가가 터져 피가 고였다.

    “죽고 싶어 환장했지.”

    나는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멍하니 벌어져 있던 그의 입매가 스르르 다물렸다. 충격으로 흔들리던 눈에 다른 감정이 어렸다. 분노, 그리고 적의.

    정호현이 내 멱살을 잡아 확 끌어 내렸다. 그리고 서슴없이 주먹을 휘둘러 얼굴을 갈겼다. 내가 비틀거리는 사이 그가 나를 힘껏 떠밀었다. 콰앙! 벽에 부딪힌 등에서 둔한 통증이 일었다. 나도 참고 있지만은 않았다. 정호현의 팔을 잡아 꺾으며 다시금 주먹을 날렸다.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짐승처럼 뒤엉켰다. 그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뺨을 깨물면 생크림 맛이 날 것처럼 생긴 주제에, 저도 나름대로 체격 좋은 사내자식이라고 주먹이 제법 단단했다.

    “꺅!”

    “어…… 어떡해요.”

    “누가 좀.”

    사람들이 패닉에 빠져 전전긍긍했다. 그러면서 정작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말릴 용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정호현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쿵!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나는 쓰러진 그의 위에 올라탔다. 움직이지 못하게 체중을 실어 누른 채 양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

    정호현이 입을 벙긋거리며 괴로워했다. 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피 맺힌 입술 사이로 절박한 호흡이 터졌다. 이대로 계속 목을 조르면 정호현은 죽을 것이다. 그가 죽으면 나도 죽고, 기숙사 방에서 깨어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겠지.

    다시, 처음부터.

    〈우리 처음 만났잖아요.〉

    그 애가 그렇게 말했다. 이제껏 나는 셀 수도 없이 정호현을 만났다. 하지만 그에게 나는 항상 타인이었다. 나는, 살아 보겠다고 아등바등 발악하던 나는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갑자기 덜컥 무서워졌다. 너무 무서워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고 숨이 막혔다. 내 아래에서 버둥거리던 움직임이 점점 둔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끝과 발끝이 얼어붙었다.

    “아, 아…….”

    화들짝 놀라 목을 조르던 손을 놓았다. 하지만 정호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꺼풀이 힘없이 감겨 있었다. 나는 손을 덜덜 떨면서 그 애의 뺨을 감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호현아,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말이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묵직한 것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흐려지는 시야에 철제 의자를 든 사람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 * *

    나는 케이블 타이에 손과 발을 칭칭 묶인 채 강의실에 감금되었다. 강의실 바깥의 복도에서 내 처분에 관한 회의가 열렸다.

    “지금이라도 바로 쫓아내야 하지 않을까?”

    “미쳤나 봐요. 사이코패스 같아. 저런 사람이랑 어떻게 같이 다녀요.”

    “저 아까 진짜 소름 돋았어요.”

    “이따가 호현 씨 깨어나면 물어보고 정하죠. 피해자 의견이 중요하잖아요.”

    다 들린다, 등신들아. 나는 신음을 삼키며 속으로 빈정거렸다. 의자에 얻어맞은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다. 팽팽하게 당겨진 케이블 타이가 손목과 발목에 파고들었다.

    나는 차가운 벽에 옆머리를 기대고 웅크려 앉은 채 생각해 보았다.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서. 내가 정호현을 죽이려 들었던 건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이 놀라웠다. 나는 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내 손에 죽든 물려서 죽든, 어차피 정호현은 생채기 하나 없이 말짱한 상태로 되살아날 텐데.

    잠들어 있던 정호현을 다짜고짜 덮쳤다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그가 창 너머로 떨어진 뒤로 뼈아픈 교훈을 배웠다.

    나는 죽음으로부터 되돌아와 정호현을 만날 때마다 연기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모든 게 처음인 척했다. 죽었다 살아나며 같은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 봤자 미친 사람 취급 받으며 경멸당할 뿐이니까. 아직까지는 다행히 내 같잖은 연기가 먹혀들어서, 정호현은 나를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껄끄러움 반 무관심 반으로 거리를 두긴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최악이었다. 나는 정호현을 두들겨 팬 걸로 모자라 죽이려 들기까지 했다. 악에 받쳐 그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목을 졸랐다. 이제 정호현은 나를 경멸하다 못해 혐오하게 되었으리라. 분명히 그럴 것이다. 공포에 질린 그가 내게서 주춤주춤 멀어지다 창밖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의식을 되찾은 그는 필사적으로 요청할 것이다. 저 소름 끼치는 새끼랑 도저히 같은 공간에 못 있겠으니까 쫓아내자고. 다른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 동조하겠지. 나는 정호현을 더 이상 못 보게 될 거고, 그는 내 시야 밖에서 죽을 것이다. 그럼 나는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암흑을 두려워하면서…….

    “…….”

    고개를 숙여 꽁꽁 묶인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될 대로 되라지. 이번은 그냥 이대로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하면 되니까.

    “어? 호현 씨!”

    “정신이 들어요?”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드디어 정호현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아…….”

    그가 작게 신음했다. 뒤이어 연거푸 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물 마실래요?”

    “괜찮아요.”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정호현이 몸을 일으키려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윽.”

    “왜 그러세요? 아파요?”

    “아까 바닥 잘못 짚어서 손목 접질렸나 봐요.”

    “많이 부었네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분위기가 잠시 어수선해졌다. 정호현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로 혼란을 잠재웠다.

    “저 사람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린 쫓아냈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다 동의했고요. 호현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네? 저 사람요?”

    “기영원 씨요.”

    “선배요? 선배 지금 어디 있어요?”

    “우리가 묶어서 안에 가둬 놨어요. 또 난동 부리면 안 되잖아요.”

    “쫓아낸다니…….”

    “말 그대로예요. 저분이 길도 잘 찾고 좀비도 잘 죽이는 건 알겠는데요.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아무튼 우리는 벌써 의견 정했어요. 호현 씨 생각만 말씀해 주시면 바로 움직일 거예요.”

    정호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벽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볼 수가 없었다. 그래, 표정을 봐서 뭐 하겠는가. 어차피 그의 선택은 뻔한데.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건 똑같은데, 이상하리만치 비참한 기분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저는.”

    바깥이 조용해졌다. 정호현이 잠깐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넘어가 줬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네?”

    “호현 씨, 지금 정신 완전히 든 거 맞죠?”

    “네, 멀쩡한데요.”

    “그런데 그런 말을 해요? 저 사람 정상 아니라니까요? 아까 엄청 맞았잖아요. 목도 졸리고.”

    “아깐 저도 잘한 거 없어요. 일부러 더 긁었어요. 저만 일방적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요.”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우리한테 피해만 끼치고 있잖아요!”

    “이런 상황이니까 한 번만 넘어가 달라는 거예요.”

    답답해진 사람들이 언성을 높였다. 정호현도 그에 지지 않고 맞섰다.

    “사람 그렇게 쉽게 버리면 안 돼요. 성격이 안 맞아서 버리고, 피해 입는다고 버리고, 다쳐서 거치적거리니까 버리고. 그러면 나중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조금만 폐 끼치면 서로 팽할 생각부터 하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믿어요?”

    “…….”

    “아시잖아요. 이 상황에서 혼자 쫓겨나면 누구든 못 살아남아요.”

    “좀비 먹이가 되든 어디 가서 죽든,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죠. 그럼 저 꼴을 보고도 용서해 주자고요? 저 사람은 우리를 인간 취급도 안 해 주는데. 왜 우리만 그래야 해요?”

    “선배가 잘했다는 거 아니에요.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감싸 주자는 것도 아니고요. 선배한테 맞은 것도 저고 목 졸린 것도 저니까, 당사자인 제가 부탁드릴게요. 그냥 이번 한 번만 넘어가요. 다음에 또 이런 일 생기면 그땐 다른 분들 결정 군말 없이 따를게요.”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저 사람 민폐거든요? 아시죠? 좀비 목 따는 솜씨 하난 쓸 만해서 데리고 다녀 줬더니, 아주 누굴 호구로 알아. 이젠 진짜 안 되겠네요.”

    “…….”

    “아무튼 우린 용납 못 해요. 호현 씨 의견 웬만하면 존중해 주려고 했는데, 계속 이렇게 고집부리면 호현 씨도 좋은 꼴 못 볼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다 소리 없이 웃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웃은 것은 정호현도 마찬가지였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럼 저도 민폐겠네요. 손목이 이 꼴이 됐으니까, 제 몫 못 할 것 아니에요.”

    “네?”

    “이제 어쩔 건데요. 저도 쫓아내시게요?”

    하여튼 간에 진짜 골 때리는 새끼였다. 주먹을 날리고 목을 조르고, 심지어는 손목까지 다치게 만든 놈을 감싸고 들다니. ……그래, 저래야 정호현이지. 저 지랄을 안 하면 정호현이 아니지.

    나는 벽에 기댄 채 미친놈처럼 웃었다. 내 웃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호현은 끝까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나란히 무리에서 축출되었다. 정확히는 그가 나를 데리고 떠나는 것을 택했다.

    * * *

    단둘이서만 행동하게 되었다고 해서 관계가 진전될 리가 없었다. 우리 사이는 여전히 최악이었다.

    나와 정호현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절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아니, 때로는 꼭 필요한 말조차 하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끔찍하게 싫어서 속이 뒤집혔다. 인문관을 나갈 길을 모색하는 내내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 등을 돌리고 제 할 일만 했다.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뒤로 상황이 더욱 열악해졌다. 이제껏 다른 사람들과 모은 식량이 꽤 있었지만 그것들은 공동 재산이었다. 빈손으로 박차고 나온 탓에 당장 그날그날 먹을 음식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불침번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이 잠들면 한 사람은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한계까지 날카로워진 정신에 수면 부족까지 더해졌다. 말다툼을 할 기운조차 없어 증오 어린 눈으로 서로를 외면했다.

    정호현은 이따금 후회했다. 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딴 새끼를 챙기고 나섰을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순간이 다시 오더라도 그는 매번 같은 선택을 하리라는 것을.

    나도 그가 몸서리쳐지게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 정호현에 대한 살의를 참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어차피 현실도 아닌데, 리셋하고 새로 시작했어도 진작 했을 텐데. 가망이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꾸역꾸역 연명하며 게임 오버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몹시도 좆같았다.

    결국 우리는 위기에 처했다. 인문관 출구로 나가는 길에 놈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여기까지 와 본 적이 몇 번 없었던 탓에,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손에 든 과도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교수 전용 휴게실 찬장에 머그 컵, 쟁반, 접시 따위와 함께 있는 걸 찾아냈는데 지금까지 그럭저럭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잡이에 테이프를 칭칭 둘렀다.

    콱! 앞에서 달려드는 놈의 목을 찍었다. 몇 번은 더 찍어서 목을 토막 내 놔야 완전히 무력화될 텐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곧장 몸을 돌렸다. 다른 놈이 뒤에서 나를 노리고 있었다.

    공격을 피하기엔 늦었다. 일단 팔을 들어 막았다. 두꺼운 옷을 입은 탓에 이가 곧장 파고들지 못했다. 그것은 악착같이 내 팔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을 물어뜯어 보려고 눈을 희번덕대며 달려들었다.

    나는 과도로 놈의 주둥이를 그었다. 양 뺨의 살갗이 가로로 쩍 벌어져 입 안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젠 저런 장면에도 익숙해져서 별 감흥이 없었다.

    “크억……!”

    “뭘 봐. 기분 더럽게.”

    빈정거리며 입 안에 칼을 찔러 넣었다. 혀 아래의 물컹한 살을 난도질하고, 턱에서부터 목 쪽으로 칼날을 쑤셨다.

    “선배!”

    정호현이 악을 썼다. 그가 나를 상대로 말을 건 게 얼마 만이더라. 생각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는 들고 있던 금속제 야구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는 내 바로 뒤에 있던 놈의 머리를 강타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이 물어뜯길 뻔했다.

    “으, 흐윽.”

    그의 손에서 배트가 떨어졌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무리를 거듭한 손목 관절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인대가 끊어진 건지 부은 자리를 따라 뻘겋게 피멍이 번졌다. 정호현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간신히 배트를 들었다. 입술을 깨물고 호흡을 고르다가, 손등으로 이마를 적신 식은땀을 닦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나빴다.

    문이 활짝 열린 채 복도 양옆에 즐비한 강의실에서 새로운 놈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빈 강의실을 빌려 동아리 모임을 하고 있던 학생들일까, 아니면 때늦은 기말고사를 치고 있었던 걸까.

    말 한 마디 없이 다짜고짜 정호현의 팔을 낚아채 달렸다. 그는 신음을 삼키며 내 뒤를 따랐다. 우리는 일자로 뻗은 복도를 가로질러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러다 T 자로 된 갈림길에 도착했다. 여기만 지나면 출구로 나갈 수 있었다. 여기만 지나면…….

    “…….”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앞에 보이는 다른 복도에도 괴물들이 우글우글했다.

    그나마 뒤에서만 쫓아온다면 승산이 있었다. 놈들은 지구력이 무한한 대신 지능이 모자랐다. 계단을 여러 번 오르내리거나 모퉁이를 빙빙 돌아 교란시키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세 갈래 길 중 두 곳이 놈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적이 양쪽에서 압박해 온다면 사정이 달랐다. 포위망을 벗어나기 전에 붙잡혀 죽을 터였다.

    T 자로 쭉 뻗은 통로를 보자 뒤늦게 생각났다. 이전 시도에서 인문관에 왔을 때. 그때도 여기서 죽었다. 이제껏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내가 틀렸다. 섣불리 인문관을 떠나려 해서는 안 되었다. 나중에 차근차근 나갈 계획을 세우든지 하고, 일단 지금은 위층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역시 이번엔 여기서 끝인가? 그래도 이번엔 좀 오래가나 했더니. 힘이 쭉 빠졌다.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되돌아가 기숙사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고, 초면인 척 정호현과 통성명을 하고. 생각만 해도 너무 피곤했다. 지쳤다.

    “이제 틀렸어.”

    “네?”

    “틀렸다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정호현이 나를 돌아보았다.

    “안 틀렸어요.”

    “이제 곧 저 새끼들한테 물려서 죽을 거야. 그거 말고 뭐가 더 있어. 다 끝났단 말이야.”

    “안 끝났다고요! 그딴 소리 하지 마세요.”

    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항상 입바른 소리만 늘어놓던 말간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통증을 참느라 안색이 창백하고 온몸이 자잘한 상처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그가 나를 잡아끌어 갈림길 모퉁이 벽에 밀어붙였다. 뒤에서 우리를 쫓아오는 놈들의 기척은 아직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래 봤자 몇 분 정도겠지만.

    “알겠어요? 우린 안 죽어요. 아니, 선배는 안 죽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정호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절박하게 흔들리던 눈이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이 길 따라서 쭉 가세요. 뒤돌아보지 말고요.”

    “정호현.”

    “그냥, 인문관 출구 보일 때까지 달려요.”

    “씨발.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지금!”

    “선배가 저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잖아요. 싸움 잘하고, 사지 멀쩡하고요. 전 이미 팔이 이 꼴이 됐고요.”

    “…….”

    “제가 저쪽 복도로 가서 최대한 막아 볼게요. 저놈들, 하나에 정신 팔리면 다른 덴 신경 안 쓰잖아요. 선배는 그 틈에 빨리 나가요.”

    정호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간신히 이해했다. 전신이 싸하게 식었다. 깊고 검은 얼음물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래서……. 네가 미끼 노릇 해서 시간 벌겠다고?”

    “그럼 어떡해요. 여기서 멍 때리고 있다 둘 다 죽어요? 제가 나가면 적어도 선배는 살잖아요. 빨리요. 이럴 시간 없어요!”

    “나가서 죽으려고 그러는 거지?”

    정호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만 들고 있던 배트를 보여 주었다.

    “죽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무기도 있잖아요. 최대한 시간 끌다가, 타이밍 봐서 저도 출구로 나갈게요.”

    “그게 죽으러 가는 거랑 뭐가 달라.”

    무슨 뻘짓을 하는 거냐고, 그래 봤자 어차피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네가 희생해서 나를 살리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다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멍청한 정호현을 실컷 비웃어 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호현의 손에 시선이 갔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는 게 내게까지 보였다. 어찌나 심하게 떠는지 그가 든 배트 또한 잘게 진동했다.

    숨이 막혔다. 그렇게 의연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을 자처했으면서, 사실은 저 애도 무서웠던 것이다. 죽는 게 너무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데, 곁에 내가 있어서,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살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무서운 걸 필사적으로 꾹 참고…….

    참으로 그다웠다. 아무리 내가 밉고 증오스러워도, 그것과는 별개로 그럴 만한 상황이 닥치면 망설임 없이 나를 구하는 것.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고수하는 것. 그게 내가 이제껏 보아 온 정호현이었다.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정호현이 희미하게 웃었다. 애써 서글서글한 미소를 만들어 냈지만 입매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세요. 선배답지 않게. 매번 저 아주 잡아먹을 듯이 보시더니, 왜 이럴 땐.”

    “…….”

    “선배. 무사히 탈출하게 되면요, 나중에 여유 생기시면요. 그때 저 데리러 와 주세요.”

    목이 메어 말끝이 눅눅하게 젖어 들었다. 정호현은 말을 잇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매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제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해도……. 선배가 기억해 주세요.”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섰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나를 끌어안았다.

    처음으로 안아 본 정호현은 따뜻했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죽기 싫다고, 살고 싶다고 발악하는 것처럼.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온기가 멀어졌다. 깃털처럼 짧고 가벼운 포옹을 남기고, 그는 등을 돌렸다.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은 영화도 게임도 만화도 아니었다. 정호현에게 이 세계가 현실이듯 내게도 현실이었다.

    정호현은 영화 속 등장인물도 게임 캐릭터도 아니었다. 스위치를 눌러 마음대로 죽였다 다시 살릴 수 있는 가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온기가 돌고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뒤이어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나는 지금껏 정호현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머릿속을 뒤흔드는 것 같은 충격이 닥쳤다. 모든 감각이 산산이 깨어지고 다시 합쳐졌다. 언젠가부터 시야에 항상 보이던 노이즈가 요동쳤다. 안개처럼 어른거리는 해골 모양 환영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정호현…… 호현아.”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꽈악 붙잡고 나오는 대로 횡설수설했다.

    “가면 안 돼. 너 이대로 가면 죽어. 내가 겪어 봤어. 미친 소리로 들릴 거 알아. 그런데 나, 예전에도 저기 간 적 있어.”

    “…….”

    “저 복도에 있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손도 못 써 보고 죽었어. 일곱 번째인가 여덟 번째에도, 열한 번째에도. 말 안 해서 미안해.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것도 미안해. 가지 마. 응? 호현아, 제발. 잘못했어……. 내가 다 미안해. 제발 가지 마. 가면 너 죽어. 죽는단 말이야.”

    정호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나의 눈을 곧게 마주 보았다. 그만큼이나 내 얼굴도 눈물로 엉망이었다. 그가 싱긋 웃었다. 그리고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또렷하게 말했다.

    “안 해 보면 모르는 거잖아요.”

    그가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손을 뿌리쳤다. 갈 곳을 잃은 내 손이 어정쩡하게 떴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깥을 향해 달렸다. 뒷모습이 손쓸 도리도 없이 멀어졌다.

    무심코 허공에 팔을 뻗었다. 그리고 이미 늦었음을 직감했다. 모퉁이 너머의 복도에서 먹잇감을 발견한 놈들이 기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 윽, 흐으…… 흑…….”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제자리에 허물어져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이마를 찧은 채 목이 졸린 짐승 같은 소리로 흐느꼈다. 차가운 복도에 눈물이 투둑, 툭, 하염없이 떨어졌다.

    이제 곧 정호현의 숨이 끊어질 것이다. 격통과 함께 심장이 멎고, 나를 꾸짖는 천벌 같은 암흑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과도가 손에 잡혔다. 소매에 칼날을 문질러 닦았다. 시꺼멓게 말라붙어 있던 피가 닦여 나갔다. 칼날에 내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

    놈들은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배에 반대편이 들여다보일 만큼 큰 구멍이 뚫려도, 몸이 두 동강이 나서 내장이 줄줄 흘러도 끈질기게 움직인다. 하지만 목을 자르면 확실히 죽는다. 칼날을 깊숙이 찔러 넣고, 신경과 근육을 한 번에 끊는다는 생각으로 힘껏 그으면……. 이 끈질긴 악몽도 끝나지 않을까.

    과도를 거꾸로 쥐었다. 날 끝이 내 목젖을 향했다.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뒤쪽을 감싸 받쳤다. 힘을 실어 확실히 찌를 수 있도록.

    새하얀 형광등 빛에 칼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차가운 금속이 살을 찢고 기도에 틀어박히는 감각이 선명했다.

    정호현이 죽을 때보다는 덜 아팠다.

    * * *

    나는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그렇게 보고 있으려니 천장 한구석에 작은 얼룩이 보였다. 여름에 룸메이트가 전공 책으로 모기를 때려잡은 흔적이었다.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 침대에 누워 있는 룸메이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였다. 평소에 하던 대로 그의 목을 따고, 샤워기 아래에서 피투성이가 된 몸을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방에 있던 드라이기로 머리까지 말끔하게 말렸다.

    그 뒤로는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소방 도끼를 찾아 쥐고 기숙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저 아무 목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복도 한복판에 쓰러진 캐리어에 걸터앉아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뭘 하고 있었더라?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세찬 밀물이 생각을 싹 쓸어 가 버린 것 같았다.

    복도 저편에서부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그쪽을 돌아보았다. 낯익은 모습이었다. 정호현이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 웬 떨거지 하나를 단 채로. 인사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공포에 질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고작 한 놈밖에 없는데 왜 저렇게 쫄아, 쫄기는. 수십 마리가 우글거리는 복도에 혼자 나설 때도 침착했으면서. 하여간 웃기는 새끼였다. 나는 조용히 일어섰다. 도끼를 휘둘러 정호현의 뒤에 따라붙은 놈의 목을 찍었다.

    “끄……. 커억.”

    그것은 시꺼먼 피를 흘리며 꿈틀거렸다. 반쯤 잘린 목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일격에 깔끔하게 머리가 떨어져야 하는데. 아쉬웠다.

    “아……. 이게 안 죽네.”

    그래도 두 번째엔 제대로 머리를 딸 수 있었다. 솜씨가 녹슬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정호현은 내내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악마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안녕, 후배님. 왔어?”

    일단 인사를 했다. 정호현은 내 인사를 받아 주기는커녕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왜 저렇게 내외를 하지?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 오늘따라 참 이상하게 군다고 생각하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아, 맞다. 정호현은 죽었지. 날 구하겠다고 혼자 뛰어나갔다가 온몸의 살이 뜯어 먹혀 죽었는데. 그를 발견한 놈들이 탐욕스럽게 괴성을 지르는 것까지 다 들었는데.

    “용케 살았네.”

    그런데 왜 살아 있는 거지? 너 왜 살아 있는 거야? 왜? 왜? 왜? 왜? 왜?

    “왜 아직 살아 있어?”

    정호현은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얼버무리더니 급기야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내 손을 뿌리치고 의연하게 등을 돌리던 모습이 겹쳐졌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죽었던 놈이 멀쩡히 살아 있기에, 궁금한 마음에 왜 아직 살아 있냐고 물었을 뿐인데. 저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칠 것까진 없지 않은가. 내 이름까지 기억 안 나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호현은 원래도 나를 죽어라 싫어했으니까. 게다가 나 때문에 스스로 희생을 자처하여 죽기까지 했는데, 꼴도 보기 싫겠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말을 걸었을 뿐인데, 지레 기겁해서는……. 뭐랬더라? 왜 이러는 거냐고, 신고할 거라고 했나? 아주 기겁해서는 몸부림을 쳤지. 그러다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고.

    무리에서 쫓겨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감싸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나를 생판 남 대하듯 대한다. 죽겠다고 내 손을 뿌리치고 나갈 땐 언제고, 이젠 또 살겠다고 도망친다. 얄밉고 짜증이 나고 서운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선배님을 몰라뵈었습니다! 잠깐 그게, 기억이 안 나서, 아니, 헷갈려서요.”

    결국 정호현은 도주를 멈추었다. 잔뜩 움츠러들어선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비굴하게 종알거리는 게 제법 귀여웠다. 이쯤 해서 용서해 줄까 싶었다.

    그때 그의 뒤에서 꾸물꾸물 접근하는 놈이 보였다. 우리가 추격전을 벌이는 소리를 듣고 다가온 모양이었다. 간만에 호현이가 풋풋하고 깜찍하게 구는데, 저딴 새끼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기는 아까웠다. 도끼를 힘껏 치켜들어 놈을 내리쳤다.

    “으악!”

    정호현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더니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상했다. 너무도 이상한 반응이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고작 한 마리 죽인 것 가지고 저렇게 호들갑일까. 금속 배트를 들고 저 새끼들 대가리 잘만 후려치고 다니던 놈이.

    나는 생각에 잠겼다. 바닥에 쓰러진 놈의 시체를 보고, 정호현을 보았다. 몽롱하게 흐려져 있던 머릿속에 서서히 안개가 걷혔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기어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처절하게 목을 그었는데. 잘린 기도로 피가 울컥울컥 들어차는 감각이 아직도 뇌리에 선한데.

    이번에도 나는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끌려왔다.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정호현이 있는 시간으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 * *

    나는 매번 돌아올 때마다 정호현을 처음 보는 척했다. 아직 가지 않은 장소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이상함을 눈치챈 그는 나를 꺼림칙해하고 혐오한 끝에, 내 곁에 있느니 차라리 죽는 걸 택할 테니까.

    하지만 이번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지난 기억들과 현재를 헷갈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정호현을 붙들고 뜻 모를 소리를 잔뜩 늘어놓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에 당황과 경악,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 내가 미친 것 같겠지. 저 새끼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소름 끼친다고, 절대 상종 못 하겠다고 생각하겠지. 딱히 화는 나지 않았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또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걸까. 이젠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고, 모든 기억과 흉터를 나 혼자만 떠안은 채 처음으로 돌아가는 걸까. 늘 그랬듯이. 무력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나는 지레 포기했다. 어차피 곧 죽을 건데 분풀이라도 하고 죽자 싶었다. 억눌러 왔던 감정을 일방적으로 모조리 쏟아 놓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애에게 이제껏 미처 못 한 말을 퍼부었다. 정호현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선배, 죄송해요.〉

    그 애가 내게 사과했다.

    〈선배가 한 말을 다 알아들은 건 아니에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납득했어요. 맞아요. 제가 나빴어요. 이제껏 선배 뒤에 숨어서 답답하게 군 거요. 부담 갖기 싫어서 내뺀 것도요.〉

    내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다 갑자기 재앙 속으로 끌려 들어온 주제에. 저도 혼란스럽고 무서울 텐데, 마치 내 고통을 이해한다는 듯이.

    〈이해가 안 돼요. 선배가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 제게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시는지.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선배에게 그만한 잘못을 했겠죠. 그것도 사과드릴게요.〉

    나는 정호현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의중을 살피려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소름 끼쳐 하며 나를 밀어내지도, 패닉에 빠져 자살 시도를 하지도 않았다. 그때처럼 손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나를 마주 볼 뿐이었다.

    이상했다. 정호현은 나를 싫어하는데. 그가 내 생각이나 감정 따위에 관심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수없이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이하고, 수없이 정호현을 만났어도 그것만은 매번 같았는데.

    싸늘하게 굳어 있던 심장이 기대감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다른 때와는 다르지 않을까. 수십 번 죽음을 반복하면서 처음으로 희망이 생겼다.

    궤도가 틀어졌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어긋났다.

    〈그 새끼들은 이미 한 번 죽었던 것들이라 심장이 안 뛰어. 근데 넌 뛰잖아. 살아 있으니까. 그래서 안심이 돼.〉

    나를 그렇게 껄끄러워하던 정호현이 순순히 내게 안겼다. 끌어안은 몸은 여전히 따뜻했다. 갈림길에서 헤어지기 직전 잠깐 끌어안았던 때처럼. 다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심장이 콩닥콩닥 평온하게 뛰었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있잖아요, 선배는. 여기서 나가게 되면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그는 처음으로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예의상 이름과 나이 정도만 물어보고, 그 뒤로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완전히 거두던 예전과는 달랐다.

    〈좋아해요.〉

    불타는 기숙사를 뒤로하고 도망쳐 온 중앙 도서관에서, 정호현은 그렇게 말했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키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정호현이 이번에야말로 예전처럼 나를 증오하게 된다 해도.

    그러나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허겁지겁 달려드는 나를 받아들이려 입술을 열었다. 그의 팔이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의 심장이 겹쳐진 채 빠르게 뛰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싫었다. 죽기 싫었다. 나를 싫어하지 않는 정호현을 잃고 싶지 않았다. 사회 과학관 앞 흡연 구역에서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던 정호현을, 평범하게 웃고 떠드는 정호현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나는 이제까지를 통틀어 가장 절박하게 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죽는 거 봤어요?〉

    정호현은 정답에 도달했다. 차분한 눈으로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핵심을 찔렀다.

    아직까지 시야에 남아 있던 노이즈가 그 순간 확 걷혔다. 모든 환각이 조각조각 깨어져 사라졌다. 머릿속에 떠다니던 앙금이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 암흑에 잠겨 있던 세계에 빛이 비쳤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숨을 쉬는 법마저 잊어버렸다.

    〈……응.〉

    고해 성사를 하듯 힘겹게 대답했다.

    〈몇 번이나 봤어요?〉

    〈스무 번…… 까지 세다가, 잊어버렸어.〉

    혼자서만 간직해 오던 비밀을,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드디어 털어놓고야 말았다.

    어느덧 시간은 밤과 새벽을 넘어 아침에 가까워졌다. 70주년 기념관의 큼직한 유리문 너머로 어둠이 차츰 물러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형편없이 횡설수설했다. 참혹한 죽음을 반복하며 내 기억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대충 얼버무린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정호현은 내내 묵묵히 내 말을 들었다. 미친놈의 망상이라 치부당해도 할 말이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반박도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선배, 우리는.”

    마침내 정호현이 입을 열었다. 그가 말을 잇다 말고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긴 밤이 지나고 바깥에 해가 뜨고 있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빛이 들이쳤다. 창백한 겨울 햇살이 그 애의 뒤에서부터 스며들었다. 연한 아메리카노 같은 색의 눈동자가 한순간 금빛으로 보였다. 뺨과 귓바퀴에 남은 솜털마저 뽀얗게 빛났다.

    “무사히 살아남아서 탈출할 거예요.”

    그는 딱 잘라 말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홀린 듯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선배가 되돌아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요.”

    * * *

    강의가 끝나기까지는 5분쯤 남았다. 하지만 교수는 여전히 스크린에 뜬 글을 줄줄 읽고 있었다. 일찍 마쳐 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루했다. 펜 끝을 책장에 툭툭 쳤다. 까만 점이 아무렇게나 찍혔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창밖에 서 있던 그 애.

    담배도 다 피웠겠다, 수다도 떨 만큼 떨었겠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하고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홀로 남게 되었다. 입가에 머금고 있던 붙임성 좋은 웃음이 스르르 지워졌다. 순식간에 인상이 바뀌었다. 무미건조한 얼굴에서 언뜻 피로감이 엿보였다. 왁자지껄하게 어울리는 걸 마냥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붉은 벽돌로 된 벽에 등을 기댔다. 적막한 겨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아까 집어넣었던 담뱃갑을 도로 꺼냈다. 한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불을 붙인 담배를 빨았다. 입술 사이로 한숨 같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자, 다음 슬라이드를 봅시다. ‘데드맨 스위치’라는 용어를 들어 보셨나요? 이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일 수도 있을 텐데요. 쉽게 예를 들어 볼까요? 내가 죽으면 하드 디스크가 저절로 포맷되었으면 좋겠다. SNS 이용 내역도 지워졌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다들 해 본 적 있으시죠? 그것도 따지자면 일종의 데드맨 스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실 앞에서는 여전히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KTX나 지하철에도 이와 같이 기관사의 이상을 감지하여 열차를 자동으로 정지하는 장치가 있다고 합니다. 기관사가 운행 도중에 의식을 잃으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 선배 새끼들 비위 맞추기 참 힘들다. 그런 생각을 할까? 아니면 학교 수업이 힘들어 속으로 한탄하고 있을까? 아니, 의외로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

    곁에 다른 사람이 없으니 그는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살짝 찌푸린 눈매가 느슨해졌다. 묘하게 야릇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주위에 흡연자가 많은 편이었다. 밤새 예술관 지하에 처박혀 야간작업을 하다 잠깐 바람을 쐬러 나가면 사방이 너구리 굴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연기를 뿜어 댔다. 그 새끼들을 봐도 짜증만 날 뿐이었는데, 쟤는 이상하게 야해 보였다.

    언젠가 기억도 안 나는 상대에게서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담배를 피울 때의 기분은 사정 후의 여운과도 닮은 점이 있다고.

    저 애에게도 애인이 있을까. 여자일까, 남자일까. 사회의 주류에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듯한 생김새로 보아선 여자만 만났을 것 같긴 한데.

    침대 위를 뒹굴며 질펀하게 섹스를 한 뒤에도 저런 표정을 할까. 절정을 느낄 땐 저 뽀얗고 말끔한 얼굴이 어떤 식으로 일그러질까. 섹스가 끝난 뒤에 벗은 몸으로 담배를 피우기도 할까. 나는 비스듬히 턱을 괸 채 무료한 낯으로 음란한 상상을 했다.

    “그럼 우리가 배우고 있는 기계 미학의 시대는 어떨까요? 현대와 같이 정교한 수준은 아니지만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의 사이, 즉 1920·30년대에도 이와 유사한 장치가 있었습니다. 슬라이드 오른쪽에 실린 사진을 보면…….”

    이제 수업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그가 담배를 다 태우고 자리를 뜰 때까지 줄곧 창밖을 응시했다.

    우리는 만난 적이 없지만 나는 그를 알았다. 습관적으로 웃는 얼굴도, 피로에 젖은 무표정한 얼굴도 모두. 이상하게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게 내가 정호현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3권에서 계속〉1673287175794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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