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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웃라이어 (5/12)
  • 4. 아웃라이어 

    실내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바깥엔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내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문이 멋대로 열리지 않도록 단단히 잠갔다. 간신히 한숨 돌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에 널찍한 대리석 로비가 펼쳐졌다. 벽면에 새겨진 커다란 학교 로고가 눈에 띄었다.

    〈백일 대학교 70주년 기념관〉

    정문 쪽으로 가려면 대운동장과 테니스 코트를 지나야 했다. 눈발을 뚫고 널찍한 운동장을 가로지를 자신이 없었다. 다급하게 주변을 살피다 임시방편으로 들어온 곳이 여기였다.

    70주년 기념관은 학생들의 발길이 드문 곳이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졸업식, 취업 박람회 같은 교내 행사 때를 제외하면 평소에 올 일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안내 데스크 앞에도 아무도 없었다. 높다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만 창백하게 빛날 따름이었다.

    “쉿.”

    선배가 가만히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성긴 눈송이가 샹들리에 빛을 받아 별처럼 빛났다. 그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로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어. 일단은.”

    “네……. 콜록.”

    눈이 휘날리는 바깥을 걷느라 꽁꽁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며 잊고 있던 통증이 찾아들었다. 온몸이 으슬으슬한 게 또 열이 오를 모양이었다.

    “따라와.”

    나는 작게 코를 훌쩍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로비 옆 복도로 들어가자 사무실이 나왔다. 선배는 문 앞에 우뚝 멈춰 서서 안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다.

    “있나요? 안에…….”

    입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잠깐의 침묵 끝에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은데.”

    당연한 말이었다. 사무실 안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는 밖에서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왠지 좀 뜻밖이었다. 선배가 잘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기숙사에서도 중앙 도서관에서도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우리는 경계 태세를 갖추고 문을 열었다. 열린 문 틈으로 형광등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가 앞장서 문을 좀 더 크게 열었다. 언제라도 적의 기습에 대응할 수 있도록 문에 몸을 바짝 붙인 채였다.

    여전히 정적만이 흘렀다. 선배가 나를 돌아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흘려보냈다. 실내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추위가 좀 가셨다. 적어도 사방이 훤히 트인 싸늘한 로비보다는 훨씬 나았다. 우리는 사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도. 다행이었다. 눈을 뒤집어쓴 데다 다리까지 절뚝이는 상태로 감염자와 마주쳤다간 끔찍한 일을 겪을 게 뻔했다.

    다들 일하던 도중에 급하게 자리를 비웠는지 모든 게 근무 시간 풍경 그대로였다. 책상에 놓인 서류들, 커피가 말라붙은 흔적이 남은 종이컵. 벽 쪽 캐비닛 위에 올려 둔 작은 크리스마스트리에서 꼬마전구가 반짝였다.

    심지어 어떤 자리에는 아직도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공용 외부망 PC 같았다. 캄캄한 모니터에 학교 로고가 떠올랐다. 몇십 시간 동안 하염없이 반복되었을 화면 보호기 영상을 재생했다.

    “다 어디 갔을까요?”

    “도망갔겠지. 죽었거나, 살았거나.”

    나는 켜진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우스를 툭 건드렸다. 절전 모드가 해제되며 윈도우 암호 입력 창이 떠올랐다. 의자를 빼내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리를 구부리자 허벅지에서 둔한 통증이 올라왔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일단 떠오르는 대로 암호를 넣어 보았다. 타닥타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선배가 돌아보았다.

    “뭐 해?”

    “정보 얻을 게 있을까 해서요.”

    “인터넷 안 되는 거 알잖아.”

    “그래도, 혹시라도…….”

    q1w2e3r4, 아니고. 1q2w3e4r도……. 아니고. 그럼 다음은 z1x2c3v4인가? 찰칵. 암호를 입력하고 엔터 키를 누르는 것과 동시에 바탕 화면이 떴다. 선배가 나를 빤히 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풀었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재빨리 해명했다.

    “관공서 공용 컴퓨터 암호 뻔하잖아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우리 학교의 보안에 속으로 탄식했다. 사실 군대에 있을 때 부대 컴퓨터 암호도 저거였다. 우리나라는 나름대로 IT 강국인데, 과연 이대로 괜찮은 걸까.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X 표시가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다. 그래도 좀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유선 인터넷은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바탕 화면에는 업무용 문서 파일이 잔뜩 깔려 있었다. 켜져 있는 프로그램도 별다를 게 없었다. 워드프로세서, 스프레드시트……. 이건 뭐지. 최저가 가격 비교? 누군가 인터넷 쇼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래에서 메신저 창이 깜빡였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는 표시였다. 일단 열어 보았다.

    [연락받으셨어요? 연구실 쪽에서 실험 사고 났다는데요?]

    [무슨 사고요? 아직 따로 연락 못 받았는데.]

    [몰라요. 무슨 실험 하다가 잘못됐대요.]

    [또요? 저번엔 화학과 학부생들이 시약 폐액 처리 잘못해서 폭발하고 난리 났잖아요.]

    [이번엔 바이러스학 연구실 쪽에서 일 쳤다는데요.]

    [아이고. 또 귀찮아지겠네. 공지 떴어요? 건물 출입 통제해야 한대요?]

    [그건 아직 잘.]

    [잠깐만요. 부장님이 부르셔서.]

    그 뒤로 대화는 한 시간이 넘게 끊겼다. 제일 마지막에 상대방으로부터 메시지 한 줄이 와 있었다.

    [지금빨리ㅣㄹ;e도ㅁㅏ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나도 모르게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 [저기]

    [×] [저기요]

    [×] [괜찮으세요?]

    당연히 메시지는 전송되지 않았다. 인터넷 연결 상태를 확인해 달라는 경고 문구가 뜰 뿐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어깨에 손이 턱 얹혔다. 멍하게 화면을 보고 있다 움찔 놀랐다. 선배가 내 옆으로 상체를 숙여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문득 피식 웃었다.

    “쫄기는.”

    “선배, 전에 나혜도 그랬잖아요. 사고가 났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고요.”

    “그게 누군데?”

    그가 너무도 태연하게 되물었다.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문이 막혔다.

    “중도에서 만난 새내기 여자애요. 몇 시간 전까지 같이 있었잖아요.”

    “…….”

    “이름도 안 외우고 계셨어요?”

    “내가 그런 것까지 외워야 할까? 굳이? 뭐 하러?”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대꾸가 돌아왔다. 후배님, 정호현, 호현아, 예쁜아, 현아. 나를 부르는 호칭은 참으로 다양하면서, 다른 사람에겐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진짜 실험하다 사고 난 걸까요? 그거 때문에 우리 학교가 이 꼴이 된 거고요? 그런데 왜 우린 여기서 못 나가는 거예요? 교직원들 사이에서 말이 돌 정도면 누구든 신고를 했을 텐데.”

    “몰라.”

    그는 잠깐 뜸을 들인 끝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좀 알고 싶어.”

    * * *

    창밖에는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폭설이 내렸다. 하늘이 흐려서 한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환하게 불이 켜진 실내는 고요했다. 사무실 안에서 한참을 머물러도 다른 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탁상용 가습기가 이따금 치익 소리를 내며 습기를 뿜어냈다.

    선배는 언제나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훌쩍 자리를 비웠다. 그동안 나는 사무실 곳곳을 살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절뚝이며 탕비실에까지 들어갔다. 안을 보고 무심결에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여느 사무실이 그렇듯이, 대학교 사무실에도 여러 다과가 비치되어 있었다. 커피포트와 냉장고 옆에 믹스 커피와 티백, 비스킷 몇 종류가 보였다. 직원들이 아침으로 먹으려고 사 둔 건지 인스턴트 수프도 있었다. 강도라도 든 듯 싹 털렸던 기숙사 편의점과는 달리 이곳에 있는 식량들은 대부분 무사했다. 여기까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선배가 돌아왔을 때, 나는 수프를 담은 그릇을 사무실 구석에 있는 둥근 회의용 테이블까지 나르던 중이었다. 따뜻하게 데운 수프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이게 뭐야?”

    그가 물었다. 나는 비스킷 포장을 벗기고 컵에 주스를 따르다 말고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우리 점심요.”

    “…….”

    “이렇게 되고 나서 식사다운 식사 한 번도 못 했잖아요. 사실 이것도 제대로 된 끼니는 아니지만요. 그래도 에너지 바 같은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

    “인스턴트 수프긴 한데 먹을 만할 거예요. 아, 우유도 좀 넣었어요. 제 동생이 아플 때마다 해 주던 건데, 수프에 우유 살짝 넣고 따뜻하게 데워 주면 잘 먹었거든요. 혹시 싫어하시면.”

    선배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차려진 조촐한 상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오늘 나 생일인가? 아닌데, 내 생일 지났는데.”

    “…….”

    “이상해. 너 왜 자꾸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해? 네가 너무 예뻐서 죽을 것 같아.”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예쁘다는 말은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그걸 뺀 나머지 말에 대꾸했다.

    “죽지 마세요.”

    “안 죽을 거야. 아깝잖아.”

    그는 테이블 앞에 선뜻 앉았다. 뒤늦게 깨달았다.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다. 내 시선을 받은 그가 툭 던졌다.

    “뭘 봐?”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환자를 두고 딱 하나 있는 의자에 앉아 비킬 생각도 하지 않는 선배의 인성은 오늘도 놀라웠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젠 뭐라 지적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는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가져오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손이 잡혔다.

    “어디 가.”

    “의자 가지러요. 저도 밥은 좀 앉아서 먹고 싶어서요.”

    선배가 빙긋 웃으며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의자가 왜 필요해. 여기 앉으면 되잖아.”

    “…….”

    “빨리 앉아.”

    “아뇨. 그냥 다른 의자 가져올게요. 이대로는 선배도 불편하시잖아요.”

    “또 고집부리지? 그래, 계속 그래 봐. 내가 눈 뒤집혀서 저기 있는 의자 다 박살 내는 꼴 보고 싶으면.”

    “앉겠습니다.”

    나는 그의 허벅지에 어설프게 올라앉았다. 만원 버스가 급정거를 해서 얼떨결에 모르는 아저씨 무릎에 앉았을 때만큼이나……. 아니, 그때보다 훨씬 불편했다.

    그가 내 허리를 단단히 휘감아 안았다. 내 등과 그의 가슴이 바짝 붙었다. 뒤에서부터 끌어안긴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180센티미터에 가까운 남자가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남자 무릎에 앉아서 꼭 안겨 있는 꼴이라니. 누가 보면 굉장히 웃긴 모습일 터였다. 몸과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호현아, 이거 다 나랑 같이 먹으려고 만들었어? 나 기다리는 동안?”

    “네. 당연하죠.”

    “…….”

    그는 따끈따끈한 수프를 스푼으로 젓다 말고 낮게 웃었다. 몸이 꼭 맞닿아 있어서 나지막한 울림이 내게까지 전해졌다.

    “왜 웃으세요?”

    “다리에 칼빵 맞아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게, 쓸데없이 예쁘기만 하고 존나 덜떨어진 게. 혼자 돌아다니면서 꼼지락꼼지락 상 차렸을 거 생각하니까 귀여워서.”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아니다. 확실히 욕이었다. 아주 잠깐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의 말마따나 칼 맞은 다리를 끌고 기껏 힘들게 차려 놨는데 엎으면 아깝지 않겠는가. 선배가 무서워서는 결코 아니었다.

    “안 드세요?”

    “아니, 먹을래. 근데 다른 거 먹으면 안 돼?”

    설마 이 상황에 반찬 투정이라도 하는 걸까.

    “다른 거 어떤 거요?”

    선배가 샐쭉이 웃더니 내 뺨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잠깐 침묵한 뒤에 떨떠름하게 물어보았다.

    “저요?”

    “응.”

    “저 잡아먹으시게요? 감염된 사람들처럼요?”

    “그렇겐 안 먹어. 우리 호현이는 좆만 해서 안 그래도 한 입 거리인데. 함부로 잡아먹으면 안 되지.”

    “좆만 하다니요. 저 큰 편인데요.”

    “퍽이나.”

    “진짜예요.”

    “나보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린 들어 본 적 없는데. 아주 살짝 모자란 180센티미터인데. 서럽고 분했다.

    “대신 너한테서 나오는 거 먹을래.”

    “뭐가 나와요?”

    “왜 모르는 척해. 전에 내 손에 질질 쌌잖아. 존나 귀엽게 울면서 내 손 다 적셔 놨으면서. 기억 안 나? 더 말해 줘?”

    “아뇨! 기억나요. 너무 선명하게 기억나서 괴로울 정도니까 그만 설명해 주셔도 돼요.”

    “또 싸게 해 줄까? 네 거 다 핥아 먹어도 돼?”

    “악!”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단 한 음절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접시 위에 놓인 비스킷을 집어 선배의 입에 다급하게 물렸다. 마음 같아선 아예 여기 있는 음식이란 음식을 죄다 쑤셔 박아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는 당황하지도 않고 비스킷을 받아 물었다. 오독오독 비스킷 씹는 소리가 얄미울 정도로 태평했다.

    그 뒤로는 별말이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 따뜻한 수프가 들어가자 차게 얼어 있던 몸이 속에서부터 풀렸다.

    그는 내가 가져다 놓은 색색의 과일 주스 병들을 심각하게 응시하다 그중에서 딸기 주스를 골랐다. 귓바퀴에 줄줄이 달린 피어싱에 서늘한 삼백안, 까만 머리카락. 좋은 말로도 선하고 부드럽다고는 할 수 없는 생김새의 남자가 핏줄이 돋은 큼직한 손으로 딸기 주스 병을 돌려 여는데, 그게 이상하게 어울렸다.

    나는 스푼을 입에 문 채 테이블 가장자리에 있는 오렌지 주스를 잡으려 팔을 뻗었다. 몸이 살짝 들썩였다. 내 아래에서 그의 허벅지 근육이 흠칫 굳어졌다. 식사 도중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처음엔 착각이겠거니 했는데 계속 이러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 무게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 걸까. 그를 돌아보았다.

    “저 안 무거워요? 무거울 텐데. 내려갈까요?”

    “무겁지.”

    그가 덤덤하게 고개를 수긍했다. 하지만 내 허리를 감싼 팔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 이제…….”

    “아래가 자꾸 무거워져. 피 몰려서.”

    “네?”

    “밥 먹다 설 뻔했잖아. 네가 자꾸 엉덩이로 내 거 비벼 대서. 우리 예쁜이는 아주, 씨발, 시도 때도 없구나? 영악한 게 야하기까지 해.”

    “…….”

    시도 때도 없는 건 내가 아니라 선배였다. 나는 경악에 젖어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배가 슬쩍 인상을 썼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꼴리게. 넣어 줬으면 좋겠어?”

    “뭘 넣어 줘요? 제 통장에 현금을요?”

    나는 필사적으로 현실 도피를 했다.

    “내 좆을 네…….”

    “으악!”

    큼직한 사탕을 그의 입에 무작정 밀어 넣었다. 선배가 사탕을 문 채로도 킥킥 웃었다.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살면서 들을 음담패설을 선배에게서 다 듣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 대해 여전히 아는 게 없었다. 우리가 무사히 탈출할 가능성도 여전히 요원했다. 절망스러운 상황도 내가 품은 의문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툭툭 주고받으며 식사를 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씩 편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만큼 그가 꺼림칙하지 않았다.

    * * *

    어느덧 밖이 어두워졌다. 아직 초저녁밖에 안 됐는데 깜깜했다. 폭설이 내려 해도 빨리 지는 모양이었다. 이따금 스산한 칼바람이 창을 두들기고 지나갔다. 아무리 실내라도 제법 쌀쌀했다. 파티션 옆 행거에 걸려 있던 누군가의 패딩을 슬쩍 빌려 입었다.

    선배는 문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팔짱을 끼고 느슨히 등을 기댄 자세로 앉았다. 아까 밖에서 찾아왔는지 옆에 길쭉한 쇠 파이프를 둔 채였다. 그 모든 행동이 그에겐 몹시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다친 허벅지를 혼자 소독했다. 붕대를 풀고 피가 묻어난 거즈를 조심스레 걷어 냈다. 허벅지를 가로지른 시뻘건 선이 보였다. 솜에 소독약을 묻혀 조심스럽게 발랐다.

    “읏…….”

    상처에 소독약이 닿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처음 칼에 베여 살이 쩍 갈라져 있을 때만 죽을 만큼 아팠지, 조금 아물고 나자 견딜 만했다.

    의약품을 도로 챙겨 넣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선배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선배가 아까 그러셨잖아요. 생일 지났다고.”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럼 언제예요? 선배 생일.”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판국에 그딴 거나 묻고 있다니 제정신이냐고 나를 비난할까. 그러지 않으면…….

    그는 덤덤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돌아온 것은 비난도 욕설도 아닌 반문이었다.

    “우리 후배님이 갑자기 왜 그런 걸 신경 쓸까? 나한테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전 계속 선배한테 관심 많았어요.”

    “…….”

    “관심 가지면 안 돼요?”

    그는 한동안 나를 집요하게 주시했다. 있을 리가 없는 변수를 보듯, 난생처음 보는 희귀 생물을 보듯 나를 보았다. 가지런히 정렬된 그래프에서 홀로 삐져나온 점을 발견한 연구자처럼. 미적지근하게 흐르던 긴장이 툭 끊겼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12월 24일이야. 내 생일.”

    “와, 크리스마스이브네요.”

    내가 기숙사 방에서 깨어나 선배와 마주치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른 채 샤워실로 향했던 때가 크리스마스였다. 그는 생일을 맞자마자 이 끔찍한 참극에 휘말린 셈이었다. 과제를 끝내고 뻗어 잠들었다 깨어났더니 좀비 사태가 닥친 나만큼이나 그도 지독하게 운이 없었다.

    “원래 생일에 뭐 하려고 했어요?”

    친구들과 술 약속을 잡았을까, 영화나 공연을 예매해 뒀을까, 아니면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연말 분위기를 만끽하려 했을까. 다른 평범한 대학생들처럼. 그런 삶을 살았던 게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고작 한 달쯤 전만 해도 자연스럽게 누리던 것들인데. 이젠 눈 내리는 고립된 캠퍼스가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다.

    “기억 안 나.”

    “그럼 겨울 방학에는요? 뭐 하고 지낼 계획이었어요?”

    “까먹었어.”

    “제가 사과 좋아하는 건 알고 계셨으면서.”

    “왜 몰라? 우리 사이에.”

    “그런데 방학 계획은 잊어버리셨어요?”

    “이제 와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선배가 픽 웃었다. 하지만 눈매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후배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똑바로 하지 그러세요. 머리 굴리는 거 빤히 보여서 귀엽긴 한데, 뭐 하자는 개짓거린지 모르겠네? 왜, 너무 심심해서 갑자기 인터뷰 놀이라도 하고 싶어졌어?”

    나는 복잡하고 성가신 걸 싫어했다. 괜한 갈등을 만들기 싫어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도 적당히 웃으며 흘려 넘겼다.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귀찮아 두루두루 얕고 넓게 지냈다. 이제껏 만났던 생존자들처럼 선배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만 대할 거였으면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았다. 하더라도 예의상 한 번쯤 물어보고 곧 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선배는 그들과 달랐다. 그는 이미 몇 번이나 나를 구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내게 절박했다. 엮이기 싫어, 내가 알 게 뭐야, 어떻게든 되겠지. 마냥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좌시할 수는 없었다. 그가 나를 아는 만큼 나도 그를 알고 싶었다.

    “선배, 있잖아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예전에 우리, 만난 적 있어요?”

    선배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 예쁘다, 예쁘다 해 줬더니 이제 별짓을 다 하네. 지금 나 꼬시는 거야? 꼬시는 것치곤 멘트가 너무 좆같이 구린데?”

    “……그런 거 아닌데요.”

    “뭐, 괜찮아. 멘트가 좀 좆같으면 어때. 정호현이 좆같은 소리 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가 웃음기 어린 낯으로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그러나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선배. 대답해 주세요.”

    “그래. 이렇게 예쁜 게 대답해 달라는데, 없는 말도 쥐어짜서 대답해 줘야지. 뭐랬더라? 예전에 만난 적 있냐고?”

    “네.”

    “예전 언제.”

    “학교가……. 이렇게 되기 전에요.”

    그는 고민하지도 않고 담백하게 딱 잘라 답했다.

    “아니, 없어.”

    “…….”

    “그래서, 궁금한 건 좀 풀렸어?”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없다면 선배는 어떻게 알려 주지도 않은 내 이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

    “우리 후배님은 공부만 열심히 해서 그런가. 머리는 좋은데, 자꾸 쓸데없는 포인트에 꽂혀서 정신 팔아먹는단 말이야. 그런 데 굴릴 대가리를 살아남는 데 썼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지?”

    그가 대수롭지 않게 휘적휘적 손을 내저었다.

    “물어볼 거 다 물어봤으면 이제 약 먹고 좀 자. 또 열 올라서 골골거리지 말고. 병자 새끼 끌고 다니는 거 더는 못 해 먹겠으니까.”

    “선배는요? 선배는 언제 주무시려고요.”

    “내가 알아서 해.”

    “그럼 새벽에 저랑 교대해요. 잠깐만 눈 붙였다가 일어날게요.”

    “얌전히 누워서 잘래, 처맞고 뻗어서 잘래?”

    “…….”

    선배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개를 휙 돌렸다. 대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 * *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고개를 들었다. 세면대 거울에 내가 비쳤다. 과제를 끝내고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 거울로 언뜻 보았던 내 모습보다 확연히 해쓱했다. 앞머리가 살짝 길었고 안색이 파리해졌다. 중도에서 몸싸움을 벌였을 때 얻어맞은 턱엔 아직도 노랗고 푸른 멍 기운이 남아 있었다.

    온수도 제대로 안 나오는 공용 화장실 세면대에서 씻어야 하지만,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건 꿈도 못 꾸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사치스러웠다. 외부와 연락이 두절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꼬박꼬박 샤워를 할 수 있다니.

    나는 여행용 세면도구를 챙겨 넣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제자리에 우뚝 굳었다. 불투명 유리로 된 화장실 문에 시커먼 형체가 어른거렸다.

    “…….”

    누구세요? 선배예요? 그렇게 소리 내어 물을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문 너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밖에서 얼쩡거리던 상대가 가까이 다가왔다. 형체가 좀 더 선명해졌다.

    고개가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옷 밖으로 드러난 맨살 곳곳에 뻘겋게 파먹힌 흔적이 보였다. 흐린 윤곽으로도 산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전율이 등을 타고 흘렀다.

    70주년 기념관에 들어온 뒤로 다른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잠시 잊고 있었다. 아무리 겉으로 적막하고 평온해 보일지언정 이곳 또한 위험 지대였다. 언제든 죽은 자들이 덮쳐 올 수 있는.

    “끄으…….”

    그는 문에 바짝 달라붙어 유리를 갉작갉작 긁어 댔다. 부패한 눈동자가 먹잇감을 찾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내가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던 덕에 아직 내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화장실 문은 밀거나 당겨 여는 방식이 아닌 자동문이었다. 문 옆에 부착된 센서 앞에 손을 대면 열렸다. 젖은 손으로 손잡이를 잡을 필요가 없도록. 기념관 건물이 나름대로 최신식인 게 이 순간만큼은 몹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저것은 벌써 나를 덮치고도 남았을 테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센서는 문 반대쪽에도 있었다. 자동문만 믿고 있다가 저것이 운 좋게 센서를 작동하기라도 한다면 꼼짝도 못 하고 당할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기로 쓸 만한 게 없었다. 쭉 늘어선 화장실 칸 끝에 있는 청소 용구 함에 생각이 미쳤다.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쳤다.

    문을 긁는 소리가 더 커졌다. 매끈하던 유리문 표면에 시커먼 피가 덕지덕지 묻었다. 손을 뻗었다. 대걸레가 잡혔다. 길쭉한 대걸레 자루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쥐고 문에 다가갔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먼저 행동을 취할 생각이었다.

    “크악!”

    내 기척을 감지한 감염자가 문에 몸을 세게 부딪쳤다. 손톱이 빠지고 없는 손으로 유리를 벅벅 할퀴며 미친 듯이 발악했다. 유리문이 들썩들썩 불안하게 흔들렸다.

    화장실은 좁고 밀폐된 공간이었다. 한순간만 방심했다간 곧바로 구석에 몰려 손쓸 도리 없이 당할 터였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내 곁엔 나를 도와줄 동료 또한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침착하게 타이밍을 쟀다. 놈이 뒤로 물러섰다가 문을 들이받는 바로 그 순간, 센서에 손을 대어 문을 열었다.

    그는 온몸을 던져 달려들던 차에 갑자기 문이 열리자 중심을 못 잡고 고꾸라졌다. 쿵! 피와 오물을 뒤집어쓴 몸이 화장실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들고 있던 대걸레로 등 가운데를 힘껏 내려찍었다. 그는 이를 한껏 드러내고 울부짖었다. 잇몸이 문드러져 치아 뿌리가 고스란히 보였다.

    “윽…….”

    반항이 하도 거세서 제압하기 쉽지 않았다. 막는 것만 해도 벅찼다. 나무로 된 대걸레 자루가 기어이 꺾였다.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었다. 두 동강이 난 자루를 본능적으로 휘둘렀다. 손에 썩은 살점을 뚫고 들어가는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삐죽삐죽하게 부러진 단면이 상대의 목에 푹 꽂혔다.

    “끅, 크르르르.”

    놈의 성대가 망가졌는지 공기가 새는 듯 기이한 소리가 났다. 끔찍한 광경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상대가 멈칫한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부러진 대걸레를 목에 꽂은 채로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내 손등을 물어뜯으려는 것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꺼져!”

    배를 퍽 걷어차고 거리를 벌렸다. 화장실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다친 허벅지에서 욱신대는 통증이 일었지만 무시했다. 쾅! 쾅쾅! 문이 격렬하게 들썩였다. 귀를 찢는 괴성이 그 뒤를 따랐다.

    “헉, 허억, 헉…….”

    나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잠금장치를 붙잡은 채 헐떡였다. 잠깐 동안 격투를 벌인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내가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도 아니고, 목을 자르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괴물을 상대로 맨손으로 상처 없이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다급하게 두리번거렸다.

    화장실 안은 휑했다. 물건이라 할 만한 게 없었다. 플라스틱 휴지 걸이, 뚜껑이 닫힌 변기, 작은 쓰레기통. 벽에 붙은 비상 호출 벨이 눈에 띄었다.

    〈위급한 상황에 눌러 주세요. 즉시 출동하여 도와 드리겠습니다.〉

    즉시 출동은 무슨. 벨을 백 번 눌러도 아무도 안 올 텐데. 이 상황에도 부아가 치밀었다.

    상대는 쉴 새 없이 문에 몸을 부딪치고 팔다리로 쾅쾅 내려쳤다. 우악스럽게 밀어 대는 통에 부실한 잠금장치가 금방이라도 열릴 듯 덜걱거렸다. 다른 수가 없었다. 나는 변기 뚜껑을 잡았다. 도자기 재질이라 제법 묵직했다. 뚜껑을 들어 힘껏 내리쳤다. 쩡! 생각보다 쉽게 깨어졌다. 날카로운 파편이 튀었다.

    잠금장치에서 잠깐 손을 뗀 틈을 타 기어이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있던 자리에 상대가 달려들었다. 피 섞인 침을 뚝뚝 흘리며 탐욕스럽게 허공을 할퀴었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날 선 도자기 파편을 거꾸로 쥐고 그의 목에 힘껏 꽂아 넣었다.

    “크윽! 컥.”

    뺨에 썩은 피가 확 튀었다. 지독한 악취가 났다. 나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변기 위에 엎어진 상대를 짓누르고 다시금 팔을 치켜들었다. 퍽. 퍽. 퍽! 같은 자리를 내리찍고 또 내리찍었다. 목이 점차 너덜너덜해져 안쪽의 뼈가 보였다.

    어느 순간 그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벌겋게 물들어 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았다. 좁은 화장실 칸 안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응고되어 검게 변색된 피가 사방팔방에 묻었다.

    “아.”

    손에 들고 있던 조각이 툭 떨어졌다. 격하게 몸을 움직이느라 흐트러진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세면대 앞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흠칫 놀랐다. 순간 내가 아닌 줄 알았다.

    방금 씻은 것이 무색하도록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더러운 손으로 머리를 넘긴 탓에 머리칼에도 얼룩덜룩하게 피가 묻었다. 화장실 칸 안에 쓰러진 감염자만큼이나 지금 내 모습도 괴물 같았다.

    “흐윽…….”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돌아왔다. 현기증이 일었다. 다른 적이 또 있을지 모르니 빨리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데. 사무실로 돌아가서 선배에게도 감염자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 *

    사무실 문을 닫고 들어왔다. 제대로 닦지 않은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넋이 나간 채 걸음을 옮겼다. 선배는 겉옷을 벗어 두고 검은 티셔츠 차림으로 책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었다. 기척을 느낀 그가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찬물로 미친 듯이 씻고 또 씻은 탓에 창백하게 질려 있을 얼굴과 손을, 흠뻑 젖은 머리칼을, 피로 시커멓게 얼룩져 끔찍한 꼴이 된 옷을 차례로 훑었다.

    “그게 있었어요. 감염자요. 화장실에서 씻고 있는데 갑자기 들어왔어요.”

    “…….”

    “그냥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어요. 무서웠어요, 무서운데, 살고 싶어서. 그러다 정신 차려 보니까…….”

    앞머리를 타고 물방울이 흘렀다. 나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선배도 이랬어요?”

    타인의 피를 잔뜩 묻힌 채 거울 앞에 섰을 때, 다른 누구도 아닌 선배가 떠올랐다. 지금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감염자들의 머리를 자르고 몸을 으스러뜨리지만, 그에게도 첫 살육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매일 손에 쥐는 거라고는 스마트폰이나 마우스, 기껏해야 조소용 도구밖에 없었을 대학생이 처음으로 무기를 들어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을 처참하게 죽인 순간. 그때 선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처음으로 저것들 목 잘라서 죽였을 때요. 선배도 이렇게, 이렇게…….”

    말을 맺기도 전에 헛구역질이 일었다. 입을 틀어막았다. 상체가 확 고꾸라졌다. 무릎을 짚어 쓰러지는 것만은 간신히 면했다.

    팔이 번쩍 들려 단단한 어깨에 얹혔다. 선배가 어느새 내 곁에 와 있었다. 그는 제대로 몸을 못 가누는 나를 받쳤다. 굳은살이 새겨진 긴 손가락이 내 턱을 느릿하게 더듬었다. 그러다 손끝에 살짝 힘을 주어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바로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숨소리가 허공을 메웠다. 그에게서 옅은 비누 향이 났다. 지금 내게선 무슨 냄새가 날까. 싸한 수돗물 소독약 냄새가 날까, 아니면 피비린내가 날까.

    내 눈동자를 집요하게 응시하던 선배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숨통을 틀어막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숨쉬기가 어려웠다. 이윽고 입술이 닿았다.

    키스가 부드러웠던 것은 아주 잠깐뿐이었다. 그는 곧바로 내 뒤통수를 감싸 끌어당기며 거칠게 몸을 붙여 왔다. 가슴팍이 맞닿는 순간 혀가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읏……!”

    다짜고짜 몰아붙이는 바람에 뒤로 밀렸다. 주춤주춤 물러서다 테이블에 허리가 턱 걸렸다. 상체가 휘청거렸다. 선배는 혀를 얽으며 자연스레 손을 내려 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는 그대로 나를 번쩍 들어 테이블 위에 앉혔다. 눈높이가 쑥 올라갔다.

    “큰일 났네.”

    그가 젖은 입술 위에서 숨죽여 웃었다.

    “우리 현이, 어떡하지. 입도 작고 엉덩이도 작아서. 예쁘긴 한데, 안 들어갈 것 같아서 걱정이야.”

    대체 뭐가 안 들어갈 것 같단 말인가. 궁금하…… 아니,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나도 이랬냐고 물었지.”

    “…….”

    “맞아. 존나 힘들었어. 힘들어서 죽고 싶었어.”

    심장에 커다란 돌덩이가 걸린 것 같았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팔을 더듬더듬 뻗어 그의 어깨를 마주 안았다. 그가 잠깐 침묵을 지키다 한숨처럼 속삭였다.

    “위로해 주는 거야? 충격받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게.”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몸이 뒤로 넘어갔다. 선배는 나를 테이블 위에 쓰러뜨리고 올라탔다. 그가 거칠어지려는 숨을 억누르고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벗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피범벅이 된 후드 티가 보였다.

    “옷 벗어, 정호현.”

    나는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옷자락을 끌어 올렸다. 배가 살짝 드러났다. 그 짧은 순간을 못 이기고 선배가 달려들었다. 옷이 가슴 위로 확 올라갔다. 허물 같은 옷가지들이 허공을 날아 옆에 있던 파티션에 걸렸다.

    나는 옷이 마구잡이로 벗겨지는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키스에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앓는 소리를 내며 선배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는 내 입술을 물고 혀를 빨았다. 귀와 목덜미를 자근자근 씹었다. 얼얼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던 피부가 달아올랐다.

    두꺼운 옷 아래 가려져 있던 맨살에는 다행히 피가 묻지 않았다. 그가 탄탄한 팔로 내 맨허리를 휘감았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골반이 허공에 떴다. 거침없는 손길로 바지 지퍼가 열렸다. 바지와 속옷이 단번에 쭉 내려가 발목에 걸렸다.

    “아, 선배…….”

    나만 알몸이 된 게 부끄러워 허벅지를 움츠렸다.

    “가만히 있어. 나도 너 위로 좀 해 주게.”

    큰 손이 성기를 감싸 쥐었다. 그는 엄지로 내 귀두 아래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연한 살이 마구 비벼졌다.

    “네 자지에서 보디 워시 향 나. 빨면 꽃물 나올 거 같아.”

    “아읏!”

    “네가 여기까지 뽀득뽀득 씻고 왔을 거 생각하니까 미치겠어. 아까 그 감염자 새끼도 너 샤워하는 거 봤어? 알몸 보여 줬어? 씨발, 그 새끼 대가리 마저 으깨고 와야 하나.”

    멋대로 허리가 움찔거렸다. 선배의 어깨를 다급하게 밀어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 줄까. 끄트머리만 입에 넣고 굴려 줄까, 아니면 좆 기둥까지 쭉쭉 빨아 줄까? 쌀 때까지 해 줄게.”

    그가 내 성기를 쥐고 흔들며 물었다.

    “둘 다 싫어요. 그만, 하지 마…… 앗! 세요…….”

    “그럼 어딜 빨라고?”

    그가 뚱하게 되물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기가 막혔다.

    “아무 데도 안 빨면 되잖아요!”

    “안 빨고 어떻게 배겨. 예쁜이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안아 달라고 조르는데.”

    “아무튼 안 돼요.”

    “아니? 내가 된다면 되는 거야.”

    그가 당당하게 선언하고 내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뒤에 뜨겁고 습한 혀가 닿았다. 마른 살을 핥아 적시고 구멍 위를 미끄덩하게 쑤셨다.

    “아!”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몸이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파드득 튀었다.

    “미쳤어요?”

    “으응.”

    그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발음이 뭉개졌다. 그를 떼어 내려 팔을 뻗었다. 그 순간 꽉 닫힌 구멍을 뚫고 뭉클한 혀가 파고들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확 젖혀졌다. 선배는 손자국이 남도록 내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았다. 추웁, 쭙, 츱. 몹시 적나라한 소리가 귀를 메웠다.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 마세요. 거기 이상해, 이상하다고요. 진짜 미쳤, 흐으, 앗!”

    “앙탈을 부릴 거면 좀 살갑게 부리든가, 하여튼 싫다는 말만 더럽게 잘하지. 얌전히 좀 있어. 칼 맞은 곳 확 후벼 파 버리기 전에.”

    붕대가 칭칭 감긴 한쪽 허벅지에 신경이 쏠렸다.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살벌한 협박 한마디로 나를 조용히 시키고 다시 하던 일에 열중했다. 구멍을 빨면서 한 손으로 자기 바지 앞섶을 철컥 풀었다. 탁. 탁. 탁. 아래에서 뭘 쥐고 흔드는 소리가 났다. 그가 목 너머로 낮은 신음을 삼켰다.

    “헉…….”

    어느 정도 안이 풀렸다 싶은 때에 혀를 쑥 밀어 넣었다. 두툼한 혀로 내벽을 꾹꾹 쑤시고 비벼 댔다.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오른 허벅지가 마구 떨렸다.

    “으, 흐읏…… 앗.”

    그가 입술을 슬쩍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붉게 달아올라 번들거렸다.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있었던 탓에 앞머리 또한 흐트러졌다. 티셔츠에 가려진 탄탄한 가슴과 배를 지나, 그 아래에 흉악하리만치 큰 자지가 꺼떡이며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도저히 눈 둘 곳이 없었다.

    “현아, 너 여기 점 있어.”

    그가 내 허벅지 안쪽, 드로어즈를 입으면 아슬아슬하게 가려지는 부분을 쿡 짚었다. 몰랐다. 누가 자기 사타구니를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살겠는가.

    “점도 꼭 이렇게 야한 데만 있네. 너 눈 밑에 있는 점 볼 때마다 살 빨개질 때까지 빨아 먹고 싶었는데.”

    “제발 좀…….”

    세상에, 맙소사.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음탕한 말에 눈앞이 아찔했다.

    “이것 봐. 다 젖었어. 박아도 돼?”

    그가 엄지로 질척한 입구를 살살 문질렀다. 단단한 손가락 첫째 마디가 들어올 듯 말 듯 깔짝거렸다. 그때마다 엉덩이가 움찔움찔 긴장했다.

    “뭘 박는다고요?”

    “내 좆. 보면 알잖아, 존나 꼴려서 터지기 직전인 거.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선배가 열에 들떠 무작정 하반신을 밀어붙였다. 묵직한 성기가 내 허벅지를 눌러 댔다.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서, 선배. 저 죽어요. 진짜 죽어요.”

    “안 죽어. 안 죽게 할게.”

    “안 돼요. 100퍼센트 죽는다니까요, 그런 거 넣으면.”

    “그럼 반만 넣을까? 아니면 반의반만? 응? 씨발. 박고 싶어 돌아 버리겠는데 어쩌라고.”

    그가 빠득 이를 갈았다. 눈이 맛이 가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붙들고 흐느끼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살고 봐야겠다 싶었다. 결국 그가 한숨을 쉬었다.

    “벌려 봐.”

    손가락 두 개가 구멍에 푹 파고들었다. 내벽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내장이 벌어지는 거북한 느낌에 놀라 안을 확 조였다.

    “죽기 싫으면 잘 받아먹어.”

    “흐으, 응.”

    “내 좆 바로 박으면 죽는다며. 안 죽게 손가락부터 넣어 줄게. 그러니까 긴장 좀 풀어 봐. 왜 이렇게 좁아…….”

    긴 손가락이 단단히 오므라든 내벽을 쭈욱 벌리고 들어와 점막을 뭉갰다. 배 안이 직접적으로 만져지는 것 같은 감각이 너무 낯설었다. 그는 내벽을 여기저기 더듬어 누르다가 이내 한곳을 퍽퍽 쑤셨다. 아랫배가 간헐적으로 꽉꽉 조여들었다. 속살이 그의 손가락을 물어 대는 게 낱낱이 느껴져서 부끄러웠다.

    “으, 읏, 흐윽!”

    안을 비비고 문질러 줄 때마다 배꼽 아래가 저릿저릿했다. 어느새 내 성기가 수직으로 바짝 곤두서 있었다. 귀두에서 투명한 액이 질금질금 샜다. 점점 몸이 예민해졌다. 손가락이 쭉 들어왔다 내벽을 지그시 긁고 빠져나갈 때마다 눈앞이 희끗하게 밝아졌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이 파드득 경련했다.

    “아, 아, 아!”

    짤막한 신음이 연달아 튀어 나갔다. 안 또한 그에 맞추어 바짝바짝 좁아졌다. 선배가 내 성기를 덥석 움켜쥐었다. 손가락으로 구멍 안을 찌걱찌걱 쑤시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기둥을 쥐고 흔들어 주었다. 앞뒤로 주어지는 자극이 지나치게 강했다.

    “저, 지금, 나와요, 아, 쌀 것 같아, 그만, 흐으, 헉……!”

    나는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정했다. 정액을 싸는 내내 엉덩이를 이리저리 뒤틀며 안에 든 손가락을 힘껏 쥐어짰다.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아주 좋아 죽지, 그냥? 앙앙 울면서……. 조금만 더 세게 쑤셔 줬다간 밖에 있는 새끼들 다 불러 모으겠어.”

    깊이 박혀 있던 손가락이 쑥 뽑혀 나갔다. 다음 순간 열 오른 귀두가 구멍에 맞붙었다. 공포에 질려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이대로 저 안까지 처박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끔찍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선배는 움찔대는 구멍에 귀두를 걸쳐 놓고 제 기둥을 주물러 자위했다. 젖은 살끼리 마찰하여 찌걱대는 소리가 났다. 큼직한 성기 끄트머리가 입구를 위협적으로 눌러 댔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곧장 박혀 버릴 것 같아서 무심코 아래에 바짝 힘을 주었다.

    “흐, 읏…….”

    이윽고 그는 속살에 귀두를 반쯤 파묻은 채 사정했다. 진득한 액체가 구멍에 왈칵 쏘아졌다. 입구를 흠뻑 적시고 안까지 흘러들었다. 그가 내 엉덩이를 벌려 정액 범벅이 된 안쪽을 보고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와, 야해라. 길도 안 난 구멍에 좆물부터 받았네?”

    “…….”

    그 말에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타인의 정액이 아래를 흠뻑 적시는 느낌도 무서웠고, 배 안이 미끈거리는 느낌도 무서웠다.

    “비켜 주세요. 저 씻고 싶어요.”

    그는 내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태연하게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씻긴 뭘 씻어. 좆 잘 들어가라고 일부러 안에다 싸질러 놓은걸.”

    “네?”

    방금 들은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경악에 찬 눈으로 아래를 흘긋 보았다. 그의 성기는 한 번 사정했는데도 아까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번들번들하게 젖어서 더 흉흉해 보였다. 굵은 핏줄이 돋은 기둥을 타고 정액 한 줄기가 질질 흘렀다. 나한테 저걸 기어이 넣겠다고? 정말로? 미친놈인가?

    그가 성기 밑동을 쥐어 내 아랫배를 툭툭 쳤다. 그리고 배꼽 아래의 판판한 살갗을 가볍게 눌렀다. 금을 그어 길이를 표시하듯.

    “잘 적셔 놔야지. 여기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저 정말로 죽을 것 같은데요.”

    “안 죽어.”

    “피바다 되는 거 아니에요?”

    “응. 아니야.”

    “살려 주세요…….”

    결국 나는 최후의 자존심까지 버리고 비굴하게 애원했다. 저걸 집어넣느니 좀비와 치열한 사투를 한 판 더 벌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선배가 피식 웃었다. 다음 순간 그가 티셔츠를 아래에서부터 휙 올려 벗었다. 잘 짜인 몸에 새겨진 수많은 흉터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중에서 가장 큰, 목을 가로지르는 흉터 또한 턱선이 드리우는 음영 아래에 도사리고 있었다.

    몸이 반으로 접혔다. 무릎 뒤쪽을 잡아 눌러 내 다리를 M 자로 벌려 놓고, 선배는 성기를 구멍에 가져다 댔다. 귀두가 발갛게 달아오른 속살을 쿡 치받는 게 노골적으로 보였다. 충격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간을 보듯 입구에 머리를 살짝살짝 들이밀어 정액을 묻혔다. 충분히 미끄러워지자 조금 힘을 주어 넣어 보았다. 나는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고작 귀두가 절반쯤 들어가고 턱 막혔다.

    “하아.”

    선배가 인상을 쓰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성기가 도로 빠져나갔다. 안심하는 것도 잠시, 곧 다시 밀려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선배의 손에 잡힌 종아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으, 흐윽…… 흐, 읏…….”

    몇 번 왕복한 끝에 굵은 귀두가 간신히 삼켜졌다. 내벽이 우악스레 벌어졌다. 배 안에 주먹이 틀어박힌 것처럼 버거웠다. 어느 정도 길이 났다 싶었는지 선배는 성기에서 손을 뗐다. 내 양 발목을 쥐고 허릿심만으로 꾸욱 욱여넣었다.

    삽입은 잔인할 정도로 길고 적나라했다. 나는 큼직한 좆에 꿰뚫리는 내내 가슴팍을 들썩이며 흐느꼈다. 잘못 뒤척였다 골반이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질 것 같아서 마음대로 몸부림을 치지도 못했다. 허벅지와 아랫배에 간헐적으로 힘이 들어가 근육이 단단히 조였다 풀리길 반복했다.

    “어디까지 들어갔어?”

    “헉, 흐윽, 몰라요.”

    “말해 봐. 얼마나 더 삼킬 수 있을 것 같은지. 난 잘 몰라서, 말 안 해 주면 꼴리는 대로 무작정 처박을지도 몰라. 네 안 망가질 때까지.”

    “숨, 못 쉬겠, 너무…….”

    “너무 좋아? 뒈지게 좋아서 숨도 못 쉬겠어? 그래그래, 알았어.”

    그는 뻔뻔하게 내 의도를 곡해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벌리고 가파르게 할딱일 뿐이었다. 억울하고 괴로웠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선배가 아랫배를 살짝 눌러 보았다.

    “하윽!”

    안이 망가지는 것 같은 충격에 덜컥 겁이 났다. 눈초리에 눈물이 맺혔다. 형광등 불빛이 습하게 이지러졌다.

    “여기……. 좀 불룩해진 것 같아. 내 좆 때문에 그래?”

    “누르, 지, 마세요…… 제발.”

    “신기하네. 우리 예쁜이는 엉덩이도 작고 구멍도 작고 배도 날씬한데, 내 걸 이만큼이나 먹었어.”

    “못 하겠어요, 아, 읏, 빼 줘, 안 할 거야…….”

    “왜에. 하자. 나랑 계속 섹스해, 응?”

    그가 칭얼대듯 말하며 내게로 몸을 숙였다. 맨가슴끼리 맞닿았다. 성기가 더 깊이 들어왔다. 헉 소리가 절로 났다. 아주 죽을 맛이었다.

    “……할 거지?”

    그가 얼굴을 맞대고 속살거렸다. 깜빡이는 속눈썹이 뺨에 스쳤다. 안 하겠다고 하면 더 심한 꼴을 당할 것 같았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천천히 움직였다. 도중에 습관처럼 내 젖꼭지를 문지르고 고개를 숙여 가볍게 빨기도 했다. 뻑뻑한 안에 간신히 물려 있던 성기가 살짝 빠져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또다시. 몸이 위아래로 덜컥거렸다.

    나는 그의 품에 고개를 묻고 어떻게든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점점 힘들어졌다. 뭔가 이상했다. 성기가 나갈 땐 속살이 기둥에 죄다 들러붙어 딸려 나가는 것 같았다가, 다시 파고들 땐 배 안이 뭉그러지는 것 같았다.

    “하아, 흐, 읏. 헉……!”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철썩철썩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커졌다. 숨이 찼다. 나는 그의 등을 어설프게 안은 채 고개를 젖히고 헐떡였다.

    “선배, 잠깐만요.”

    선배는 분명히 내 말을 들었을 텐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해 어깨를 투닥투닥 때리고 발뒤꿈치로 그의 허벅지 뒤쪽을 꾹꾹 눌렀다. 그는 대답 대신 입 좀 닥치라는 듯 성기를 턱 찍어 올렸다.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났다.

    “흐으…….”

    아래가 너무 많이 벌어져서 무서웠다. 이건 아니었다. 이런 걸 넣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몸이 영영 망가질 것 같았다. 쿵. 때마침 굵은 것이 내벽을 세게 찧었다. 명치를, 아니, 심장을 곧바로 두들겨 맞는 줄 알았다. 아랫배 전체가 찌르르 울렸다.

    “무, 서워, 선배, 그만, 무서워요.”

    턱, 턱, 턱, 턱. 그 와중에도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졌다. 아, 아아, 아…….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신음했다. 날것 그대로의 소리가 멋대로 흘러나갔다.

    “무서워? 죽는단 소린, 그렇게 쉽게, 하더니……. 읏. 좆질은 무서워?”

    “아냐. 아니야…….”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도리질했다. 내 머리칼이 테이블 위에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스쳤다. 갈수록 더 무서워져서 몸을 자꾸만 뒤로 물렸다.

    “어디 가.”

    그가 내 골반을 움켜쥐어 쭉 당겼다. 빠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귀두만 물고 있던 구멍에 성기를 힘주어 콱 꽂아 버렸다. 굵은 기둥이 저 안까지 단숨에 짓쳐들어왔다.

    “아윽!”

    단단하게 굳은 허리가 허공에 확 떴다. 허벅지를 이리저리 꼬아 보고 엉덩이를 씰룩대며 어떻게든 참아 보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죽을 것 같았다. 배꼽 뒤쪽을 뻐근하게 누르던 성기가 잔뜩 수축한 내벽을 쫘악 긁으며 빠져나갔다. 목 뒤쪽이 뜨끈해졌다. 그 순간 억지로 참고 있던 게 풀렸다.

    “흐, 아, 아아!”

    끔찍한 절정이 몰려왔다. 수도 없이 짓이겨진 내벽에서부터 신경을 갉아먹는 쾌감이 번졌다. 성기가 허공에 퉁, 튀어 올랐다. 기어이 두 번째 사정이 시작되었다. 흰 액체가 기세 좋게 뿜어졌다. 그의 배를 잔뜩 적시고 질질 흘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앞은 제대로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남자의 성기에 박히면서 사정하다니. 미쳐 돌아가는 바깥세상만큼이나 나도 미쳐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선배를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품에 매달렸다. 잔뜩 우는 와중에도 그의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허리를 들썩였다. 무심결에 뒤에 힘을 주어 큼직한 성기를 꽉꽉 씹고 조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조금이라도 더 깊이 물어 보려고 엉덩이를 마구잡이로 밀어붙였다.

    그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박아 넣었다. 덜렁이는 내 성기와 음낭이 그의 사타구니에 턱턱 부딪혔다. 그와 내가 싸지른 정액이 뒤섞여 접합부에 흥건하게 고였다. 찌걱찌걱 부딪치면서 허벅지까지 튀었다.

    “…….”

    선배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그는 내 발목을 잡아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그리고 무방비하게 벌어진 사타구니 위로 힘을 주어 하체를 퍽 찍어 눌렀다. 엉덩이 살이 한껏 짓눌렸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의 아래 완전히 깔려서 뭉개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나를 테이블에 짓눌러 놓고 체중을 실어 꾸욱, 꾹, 몇 번 더 박았다. 마찰로 통통하게 부어오른 구멍에 귀두가 턱 걸릴 때까지 빼냈다 다시 처넣었다. 골반이 통째로 으스러지는 느낌이었다.

    “읏, 흐, 윽.”

    그의 악다문 잇새로 신음이 샜다. 찌푸린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절정의 신호임을 직감했다. 선배는 다급하게 나를 끌어당겨 꽈악 안았다. 나도 무심결에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쾅쾅 울리는 서로의 심장 박동이 겹쳐졌다. 퍽! 배가 뻐근하게 아플 때까지 쑤셔 박혔다.

    힘줄이 돋아난 울퉁불퉁한 성기가 안에서 거세게 꿈틀거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내벽이 억지로 더 벌어졌다. 한순간 정신이 물에 빠진 듯 먹먹해져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액은 서너 차례에 걸쳐 쏘아졌다. 진득한 것이 꿀럭꿀럭 밀려 나와 안을 메웠다. 기분 탓인지 배가 더부룩하게 불러 왔다.

    그는 사정을 마치고도 여전히 내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흥건히 싸지른 정액과 함께. 하지만 한가득 들어찬 좆을 빼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지쳤다. 벌어진 입으로 숨만 겨우 새액새액 몰아쉴 뿐이었다.

    “하아……. 흐, 읏. 하아.”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은 없지만……. 호현아.”

    선배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내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성기가 안을 주욱 그으며 천천히 빠져나갔다. 내장이 모조리 딸려 나가는 것 같은 감각에 지친 와중에도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귀두까지 완전히 빠져나간 자리에서 정액이 줄줄 흘렀다. 아무렇게나 벌어진 다리를 추스를 힘조차 없었다. 그가 손등으로 내 뺨을 가볍게 쓸었다.

    “나는 너를 알아.”

    뜻 모를 말이 귓가에 떨어졌다.

    * * *

    고요하고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펑펑 내린 눈이 무릎 높이까지 쌓여 천연의 장애물이 되었다. 길과 길이 아닌 곳의 구분이 모호했다. 건물 밖으로 나갈 날이 더욱 요원해졌다.

    70주년 기념관에 온 이후로 선배는 줄곧 날이 서 있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태연하던 태도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빈도가 늘었다. 또한 그는 종종 뜬눈으로 혼자 밤을 새웠다. 원래도 사나운 눈매가 옅게 충혈되어 더욱 살벌해졌다. 불침번을 교대로 서자고 말해 봐도 지랄하지 말고 자빠져서 잠이나 처자라는 화기애애하기 짝이 없는 대꾸가 돌아왔다.

    “위층 둘러보고 올게.”

    선배가 훌쩍 몸을 일으켰다. 막 식사를 끝낸 참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냉동실 구석에 꽁꽁 언 채로 처박혀 있던 케이크였다.

    “위층요?”

    갑작스러운 통보에 반문하며 따라 일어섰다.

    “네가 이미 감염된 새끼랑 마주쳤잖아. 다른 놈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몰라.”

    “더 있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정리해야지. 당분간은 여기 계속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감당 못 할 만큼 많으면 아예 통로를 막아 버리든가 하고.”

    “저도 갈래요.”

    “필요 없어.”

    “제 다리 때문에요? 이제 괜찮아요. 짐 안 되게 할게요. 선배만 고생하는 거 불공평하잖아요.”

    허벅지의 상처는 출혈량이 많았던 탓에 심각해 보이긴 했지만, 애초에 겉만 베인 거라 근육과 신경은 멀쩡했다. 갈라졌던 살이 어느 정도 붙으면서 움직이는 데도 크게 무리가 없었다.

    “나도 여기까지 와 본 적 몇 번 없어. 다른 층에 뭐가 있는지 기억도 잘 안 나. 그런데 너까지 달고 다니라고? 같이 사이좋게 뒈지자고 염불 외는 건가?”

    선배가 짜증스럽게 빈정거렸다. 그의 말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명백한 모순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선배, 그건 저도 마찬가진데요.”

    “…….”

    “우리 학교 학생들 중에 여기 자주 와 본 사람 거의 없을걸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낯선 곳이니까,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같이 가자는 거예요.”

    “필요 없다고.”

    “위층엔 행사용 홀이랑 연회장 있어요. 200명, 300명씩 들어가는 곳이요. 아무도 없으면 물론 다행인데, 혹시나 바이러스가 처음 퍼졌을 때 거기서 행사 열리던 중이었다면……. 혼자선 위험하잖아요.”

    “네까짓 게 따라와서 뭘 할 수 있는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아무것도 모르는 게.”

    인격을 깔아뭉개는 폭언에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모멸감으로 입매가 일그러졌다.

    “내가 혼자 갔다 오겠다면 그런 줄 알아.”

    “하지만.”

    “말을 하면, 씨발. 좀 알아 처먹어!”

    선배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무심결에 움찔했다. 그는 늘 나를 무시하고 숨 쉬듯 막말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압적으로 군 적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못 할 말을 한 건가 싶었다. 낯선 곳을 홀로 정찰하겠다는 동료가 걱정되어 같이 가자고 한 것뿐인데. 선배가 아니라 다른 누가 내 곁에 있었어도 그렇게 말했을 거다.

    “…….”

    며칠 동안 한곳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으니, 신경이 한계까지 날카로워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기서 나까지 성질을 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간신히 화를 삭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형형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허공을 가로질러 살벌한 시선이 오갔다. 한데 뒤엉켜 입을 맞추고 몸을 섞었던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요. 알았어요. 알겠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기만 하는 건 제가 싫어요. 그럼 전 지하에 갔다 올게요. 바로 아래층이니까 금방 다녀올 수 있어요.”

    “가긴 뭘 가. 가 봤자 아무것도 없어.”

    “네?”

    “없다고. 감염자도, 식량도.”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정호현, 좀 닥쳐. 네가 뭘 하든 좆도 도움 안 되니까 얌전히 처박혀 있기나 해. 멋대로 기어 나왔다간 네 대가리부터 따일 줄 알아.”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쇠 파이프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 버렸다. 눈앞에서 문이 거칠게 닫혔다. 나는 순식간에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이 가슴에 앙금처럼 남았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 날카롭게 구는 거지? 사람들이 눈앞에서 줄줄이 죽어 나갈 때도 아무렇지 않았으면서.

    나는 그가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퍼즐을 짜 맞춰 나갔다.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기각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를 하나씩 모두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퍼즐의 빈 공간에 꼭 들어맞는 조각은 없었다.

    * * *

    약을 챙겨 먹고 상처를 다시 소독했다. 요 며칠 틀어박혀 잘 먹고 잘 잤더니 감기도 많이 호전되었다. 문틈으로 환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혹시나 이목을 끌까 봐 형광등을 끈 채 선배를 기다렸다. 어둠에 젖은 사무실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학교 로고가 찍힌 서류철, 안에 채워 넣은 물이 다 떨어져 더는 동작하지 않는 가습기, 파티션에 다닥다닥 붙은 포스트잇, 박스 가득 쌓인 이면지까지.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갔을 공간이 황량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그러다 약 기운이 돌면서 깜빡 졸았던 것 같다.

    악몽을 꿨다. 내 손으로 죽여 버린 감염자가 꿈에 나타났다. 그것은 검붉은 피로 엉망이 된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다 썩은 몸을 끌고 나를 향해 꿈틀꿈틀 기어왔다. 목의 근육과 힘줄이 너덜너덜해져 머리가 이리저리 꺾였다.

    〈끅, 크윽…… 크르르.〉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탓에 뺨이 땅에 질질 쓸렸다. 그것이 지나온 자리를 따라 핏자국이 남았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섰다.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아야 했다. 어떻게 되살아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시라도 빨리 저것의 목을 완전히 잘라 내 다시 숨통을 끊어야 했다.

    〈네까짓 게 따라와서 뭘 할 수 있는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머릿속에서 선배의 목소리가 울렸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내가 여기서 죽어라 발버둥 쳐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운 좋게 이것을 해치운다 해도 다음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멀쩡할 거란 보장이 어디 있을까. 애초에 정문까지 가서 탈출한다는 계획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 아득바득 발악하다 고통 속에서 죽느니 차라리…….

    아니, 아니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다짐했다. 무사히 살아남아 여기를 빠져나가기로. 안개처럼 스며드는 절망을 억지로 몰아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뒷걸음치던 내 등에 푹신한 벽이 닿았다.

    “……!”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앉아 있던 의자 등받이에 체중이 실려 탄력 있게 젖혀졌다 다시 돌아왔다.

    “헉, 흐읍.”

    입술을 깨물고 숨을 삼켰다.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선잠을 자면서 가위까지 눌렸는지 전신의 근육이 뻐근했다. 세수라도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건너편의 출구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파티션 너머로 발견했다. 문 근처에 웅크린 시커먼 형체를.

    분명히 문을 잠가 놨는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 생각부터 들었다. 좀비들에겐 문을 열 지능조차 없었다. 팔다리로 마구 두들기거나 몸을 부딪치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렇게 요란한 방식으로 문을 때려 부수고 들어왔다면, 아무리 잠결이라도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사무실 전체에 내려앉은 어둠 탓에 상대방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등을 위로 향하고 엎드려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네발로 바닥을 기어 느릿하게 움직였다. 아직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

    나는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섣불리 일어섰다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손안에 땀이 고였다.

    저건 내가 죽여 버렸던 좀비일까, 아니면 다른 개체일까. 지금 이 순간 또한 악몽의 연장선은 아닐까. 하지만 귓가에서 불안하게 뛰는 맥박이, 꽉 조여드는 갈비뼈가 이 상황이 현실임을 일깨웠다.

    나는 뻣뻣이 몸을 굳히고 눈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책상에 여러 가지 사무용품이 있었다. 클립보드, 스테이플러, 금속 자, 커터 칼. 전투에 쓰기엔 하나같이 한 끗 모자란 것들뿐이었다.

    다시 앞을 보았다. 시커먼 형체는 어느덧 제법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마침 커다란 드라이버가 눈에 띄었다. 그나마 이게 제일 나았다. 소리 없이 손을 뻗어 드라이버를 움켜쥐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기다렸다. 당황과 긴장으로 들끓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것이 모퉁이를 돌아 내 자리 쪽으로 다가오는 순간 확 덮쳤다.

    목 뒤쪽을 콱 짓눌렀다. 상대는 불시의 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방비하게 엎어졌다. 아예 체중을 실어 상대의 몸 위에 타고 올랐다. 미친 듯이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제압했다. 목을 찍어 숨통을 끊을 요량으로 드라이버를 확 치켜들었다.

    “아악! 아, 흐아, 악!”

    원래 감염자들이 저런 소리로 울부짖던가? 순간 얼떨떨해졌다. 드라이버를 꽉 쥔 손에 힘이 빠질 뻔했다. 슬쩍 인상을 쓰고 상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윽, 아파……. 살려 주세요……. 흐엉.”

    내 아래에서 웬 초췌한 남자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목덜미를 움켜쥔 내 손 아래로 그가 목에 걸고 있던 것이 얼핏 보였다. 교직원증이었다.

    * * *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나서 남자와 나는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흑.”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콧잔등을 쓱 문지르며 애써 울음기를 삼켰다. 서른이 훌쩍 넘어선 새파랗게 어린 학생 앞에서 울어 버린 게 뒤늦게 부끄러워진 모양이었다.

    그는 평균보다 작은 키에 둥그스름한 인상이었다. 때가 묻어 꼬질꼬질한 카디건에 구겨진 와이셔츠, 까치집이 된 머리, 걸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것 같은 교직원증. 전반적으로 안쓰럽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다.

    “저, 저기. 학생.”

    그가 애처롭게 고개를 슬쩍 들었다.

    “물 좀 주면 안 될까요? 목이 너무 말라서.”

    “냉장고에 있어요. 직접 가져다 드세요.”

    불도 안 켠 사무실에 몰래 슬금슬금 기어들어 온 침입자에게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사실 그는 원래 이 사무실 소속이었으니 내가 침입자인 셈이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못 움직이겠는데…….”

    그가 우울하게 고백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는 내가 내민 차가운 생수병을 냉큼 받아 물을 들이켰다. 벌컥벌컥 경쾌한 소리가 났다. 1리터짜리 병을 거의 다 비우고 나서야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시설 관리 팀 하재민 과장. 그의 이름과 직함이었다.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70주년 기념관과 주변 건물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때도 건물 돌면서 설비 점검하고 있었어요. 방학 기간 중에 수도관 동파되거나 폭설로 정전되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공지가 떠서.”

    처음엔 실험 사고가 발생했다는 내용으로 교직원들에게 긴급 연락이 갔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다지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관련 학과에서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겠거니 싶었다.

    “교직원들끼리 쓰는 단체 채팅방이 난리가 났더라고요. 실험실에서 유해 물질이 새어 나갔다고 하면서……. 119 특수 구조대에 경찰 과학 수사 팀까지 왔대요. 국과수에 의뢰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었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중앙 도서관에서 만났던 학생들도 그 사실은 몰랐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특수 구조대와 과학 수사 팀까지 나섰는데 왜 사태는 해결되기는커녕 캠퍼스 전체로 번진 거지? 출동했다는 대원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죠? 경찰이든 군대든 출동해야 정상 아닌가요.〉

    〈오긴 누가 와. 왔더라도 다 죽었어.〉

    선배와 나눴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설마 그는 이것까지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어떻게?

    “1층 내려와서 사무실 들어가려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했어요. 문은 활짝 열려 있고, 다들 불안하게 웅성거리고. 그러다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열린 문을 통해 사람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영문을 모르는 그만 멀뚱히 로비에 서 있었다. 뒤늦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 누군가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입가에 피와 살점을 묻힌 채 팔다리를 질질 끄는,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가까운 곳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지하로 몰려 내려갔다. 그 또한 황급히 동료들을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몇십 초 차이로 늦었다. 눈앞에서 지하실 문이 굳게 닫혔다.

    “지하엔 중요한 설비들이랑 서고가 있어서 항상 잠가 놓거든요. 지하실 키는 마침 사무실에 두고 나왔고. 그래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순간에도 상대는 뒤에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그는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다리가 푹푹 꺾이는데도 절박하게 계단을 올랐다. 2층, 3층, 4층. 마침내 꼭대기 층까지 왔다. 빈 회의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구석에 웅크렸다. 정체 모를 괴물은 다행히 거기까지 쫓아오지는 않았다. 얼마간은 회의실에 비치된 다과로 간신히 연명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계속 버텼어요. 무서워서 밖에 나갈 엄두가 안 났어요. 그런데 배고프고 목마른 건 정말 못 참겠더라고요.”

    그는 말하다 말고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꾀죄죄하고 후줄근한 남자가 그러고 있으니 한층 더 안쓰러워 보였다.

    “결국 용기 내서 나왔어요. 죽더라도 사무실에 있는 과자랑 음료수는 먹고 죽으려고요. 혹시 그 괴물이 아직도 있을지 모르니까, 나름대로 몰래 들어온다고 들어왔는데.”

    이제야 자초지종이 이해되었다. 필사적으로 사무실 바닥을 기어오던 그를 떠올리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음, 저기, 과장님. 죄송해요. 그 과자랑 음료수 저희가 좀 많이 먹었는데요.”

    “아니,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살자고 그런 건데. 아, 그렇지. 잠깐만요.”

    그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책상 서랍을 뒤져 짤랑이는 열쇠 뭉치를 꺼내고, 벽 쪽으로 걸어가 잠긴 캐비닛을 열었다. 안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초콜릿과 쿠키, 커피 원두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손님 접대용으로 따로 사 둔 거긴 한데. 지금 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사람 목숨이 중요하지. 많이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맘껏 먹어요.”

    “감사합니다.”

    그는 상자를 열어 낱개 포장된 쿠키를 꺼내더니 주머니에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서른 중후반쯤 되는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겠지만, 꼭 볼에 견과류를 저장하는 다람쥐 같았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학생들한텐 공지도 제대로 안 간 것 같던데. 교직원들끼리 대피하니 마니 할 때도 학생들은 뭣도 모르고 공부하고 있었다던데…….”

    식량 확보를 마친 그는 몇 주 사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초췌해진 얼굴을 양손으로 문질렀다.

    “저…… 어린 학생한테 이런 부탁 하기 좀 그런데, 나랑 같이 지하에 좀 다녀와 줄 수 있어요? 사무실 사람들 아직 다 거기 있는 것 같아서요.”

    이 상황에서도 그는 직장 동료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허술하고 어수룩하고 눈물 많고 착해 빠졌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 사람도 여러모로 좀비 아포칼립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나야 회의실 다과 먹으면서 버텼다지만, 지하실에 식량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걱정되더라고요. 원래는 사무실에서 열쇠 챙겨서 혼자 가려고 했는데……. 누가 같이 가 주면 덜 무섭고 안심도 될 것 같아서.”

    “…….”

    섣불리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가 덥수룩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쓰게 웃었다.

    “내가 너무 어려운 부탁을 했지? 알아요. 이제껏 자기 몸 건사하는 것도 어려웠을 텐데, 어른들 사정까지 헤아려 달라고 하면 염치가 없는 거지.”

    “일행이 있어서요. 먼저 의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여기 학생 말고 사람이 또 있어요?”

    하재민의 말에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의자 뒤에 선 선배가 서늘한 무표정으로 쇠 파이프를 막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새까만 마스크가 코와 입을 가려 더욱 섬뜩했다.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자리에서 튀어 올라 쇠 파이프를 든 선배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선배!”

    위에서 내리찍는 힘과 아래에서 막는 힘이 맞붙었다. 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내 손아귀가 부들부들 떨렸다.

    “허억, 흐아악!”

    졸지에 쇠 파이프에 정수리가 깨질 뻔한 하재민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선배는 물론이고 나보다도 한참 작았다. 두 남학생 사이에 낀 그가 몹시도 애처로워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신경 써 줄 겨를이 없었다.

    “그만하세요. 사람이에요. 산 사람이라고요!”

    한창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 시선이 마주쳤다. 선배가 마스크 너머로 피식 웃었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말문이 막혔다. 잠깐 약해진 틈을 타 선배가 내 손을 우악스럽게 찍어 누르려 했다. 이를 악물고 다시 힘을 주었다. 힘겹게 버티는 손등에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살았든 아니든 뒈지면 똑같잖아. 다 죽여 버리면 거슬릴 일 없을 거 아냐. 응?”

    “뭐 해요. 윽, 빨리 가요!”

    어렵사리 그를 막으며 하재민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한 박자 늦게 허둥지둥 몸을 피했다. 더 이상 손힘으로만 견디는 건 무리라 판단했다. 그의 팔목을 놓고 달려들어 몸을 끌어안았다. 가슴팍끼리 거칠게 맞닿았다.

    “…….”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해 있다가, 그의 몸에서 느리게 힘이 풀렸다. 이젠 괜찮겠다 싶을 즈음에 팔을 풀었다. 그도 나도 그새 숨이 가빠져 있었다.

    “아니, 이게, 이게 대체.”

    하재민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나와 선배를 번갈아 보았다.

    “제 일행인데요. 나쁜 사람은 아니…….”

    습관적으로 선배를 옹호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 변명이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호현아……. 좆같은 우리 호현이. 잠깐만 가만히 놔두면 꼭 이러지?”

    그가 바닥에 시선을 향한 채 중얼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확 들어 하재민을 향해 사납게 윽박질렀다.

    “꺼져.”

    “아니, 학생. 여기 내가 일하던 사무실인데.”

    “어차피 곧 뒈질 게 말이 많아. 안 꺼져?”

    “그, 그렇지만.”

    하재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나가야 하는 건 우리였다. 하지만 상식과 논리로 선배를 설득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하재민이 내게 도움을 구하듯 불쌍한 시선을 보냈다. 나라고 딱히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쇠 파이프로 머리를 쪼개 버리고 싶다는 듯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선배를 막는 것만 해도 벅찼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하재민이 머뭇거리며 물러섰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뒤돌아 나갔다. 사무실이라고 완벽하게 안전한 건 아니었지만 밖은 더 위험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사무실에는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쇠 파이프를 아무 데나 던져둔 선배가 겉옷을 벗어 내렸다. 드러난 팔뚝에 가느다란 생채기가 보였다. 오래된 흉터들 사이에서 새로 생긴 상처가 유독 도드라졌다.

    “선배, 다쳤어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확연히 지쳐 있었다.

    “보여 주세요. 치료해 드릴게요.”

    “놔둬. 물린 거 아냐.”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겉만 살짝 까진 거라, 그냥 소독하고 연고 바르고 밴드만 붙이면 될 것 같았다.

    “물린 상처 아닌 건 보면 알아요. 그냥 긁힌 거라도 치료는 해야죠. 곪거나 덧나면 안 되잖아요.”

    그는 대답 대신 짜증스럽게 나를 확 뿌리쳤다. 그 순간 인내의 끈이 뚝 끊겼다.

    “선배, 제발 좀!”

    신경질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네? 제가 선배한테 해 되는 일 하자고 했어요? 일부러 선배 짜증 나게 하려고 이러는 거 같아요? 아니잖아요. 선배 걱정해서 그런 건데 왜 그런 식으로!”

    “걱정? 걱정은 씨발. 누가 누굴 걱정해. 너나 정신 똑바로 차려.”

    “아까 그 사람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오히려 잠긴 캐비닛 열어서 먹을 거 꺼내 주고 갔어요. 그런 사람을 굳이 쫓아내야 했어요?”

    “내가 못 들었을 줄 알아? 지하에 가니 어쩌니 하던데. 멍청한 게 또 홀려서 쫄래쫄래 따라가려고 했지?”

    “아까 그 말 들었으면 다음 말도 들으셨겠네요. 일행이랑 상의해 봐야 한다고 거절한 거요. 선배가 저 천하의 멍청이로 생각하시는 건 잘 알겠는데요, 선배한테 말도 없이 홀랑 갈 정도로 골 빈 놈은 아니거든요.”

    “…….”

    “선배가 그랬잖아요. 지하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럼 가도 위험할 것 없지 않아요?”

    “하…… 이것 봐라.”

    그가 내 어깨를 잡아 확 떠밀었다. 나는 뒤에 있던 책상에 쾅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덜 나은 허벅지에 거센 충격이 가해졌다. 너무 아파서 순간 눈앞이 까매졌다.

    “많이 컸네, 정호현. 쫄아서 눈이나 굴리던 새끼가 바락바락 대들 줄도 알고. 뭘 안다고 설쳐? 살고 싶으면 아가리 닥치고 내 말이나 잘 들어. 네가 그딴 식으로 짖어 댈 때마다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통증에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고 눈을 부릅떴다. 신음을 흘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어야 했다.

    “왜 안 죽이고 지금까지 살려 두셨어요. 매번 저 죽이고 싶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제가 좆같고 등신 같으면 그냥 죽여 버리면 되잖아요. 그 사람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빈정거렸다. 우리는 흥분으로 거칠어진 호흡을 색색 내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한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선배였다. 그가 내 어깨를 쥔 손을 거칠게 놓고 몸을 돌렸다. 잇새로 씹어 뱉는 듯한 말이 따랐다.

    “그러게. 마음 같아선 천 번도 넘게 죽였는데. 씨발, 내가 병신이지. 이딴 게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 * *

    그렇지 않아도 결코 곱지 못하던 분위기가 한층 험악해졌다. 대놓고 주먹다짐만 하지 않았을 뿐 치고받고 싸운 거나 다름없었다. 선배는 잔뜩 날이 선 채 인상을 구기고 나를 무시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남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숨이 막혔다. TV나 컴퓨터, 스마트폰을 쓸 수 없는 탓에 더욱 갑갑했다. 시간이 몹시 더디게 흘렀다.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던 내 눈에 반쯤 열린 책상 서랍이 들어왔다. 아까 하재민이 열쇠를 찾느라 열어 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저 책상이 그의 자리였던 모양이다.

    서랍 안을 들여다보았다. 남의 서랍을 멋대로 뒤지는 건 큰 실례지만, 지금에 와서까지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기엔 너무 지쳤다. 그랬으면 애초에 남의 패딩을 멋대로 가져다 입지도 않았을 거다. 집게와 포스트잇부터 시작해서 색색의 펜들과 명함 케이스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한데 뭉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허술한 겉모습만큼이나 정리·정돈에 서툴렀다.

    서랍 구석에 처박힌 담뱃갑이 눈에 띄었다. 옆엔 라이터까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내가 피우는 종류는 아니었지만 담배를 보자 갑자기 욕구가 확 당겼다. 머리는 복잡하고, 기분은 최악이고, 잘 낫고 있던 허벅지는 다시 아프고. 지금처럼 니코틴이 절실했던 적이 없었다.

    한두 개비만 피우고 고스란히 돌려놓으면 하재민은, 그 사람 좋은 남자는 허허롭게 웃으며 넘어가 주지 않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담배와 라이터를 슬쩍 챙겼다. 그 아래에 깔려 있던 것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캐릭터 밴드였다.

    “…….”

    나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커다란 바위가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선배의 팔에 새겨진 상처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는 그냥 놔두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였다. 그가 나를 책임지고 지키는 것만큼이나 나도 그에게 책임이 있었다.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캐릭터 밴드를 손에 쥐고 몸을 돌렸다. 선배는 여전히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나를 없는 사람 취급 하고 있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일부러 기척을 내며 그의 앞에 다가갔다.

    “선배.”

    그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눈을 곧게 바라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깐 제가 잘못했어요. 선배 입장 이해 못 하는 거 아닌데, 선배가 제 몫까지 고생하고 계시는 거 아는데. 홧김에 말을 심하게 했어요.”

    “…….”

    “저한테 기분 상하신 거 알아요. 당장 풀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상처만 보게 해 주세요. 그냥 선배가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그것까지 안 된다고 하지는 마세요.”

    선배는 어떻게 반응할까. 필요 없으니까 꺼지라고 할까, 아니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무시할까. 멱살을 잡히거나 또 밀쳐지는 건 아닐까. 불안함을 억누르고 답을 기다렸다.

    “정호현, 넌……. 누구한테나 쓸데없이 착해.”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살짝 잠겨서 평소보다 더 낮아졌다. 조금 힘이 빠진 것처럼도 들렸다.

    “속으론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챙길 건 챙기지. 네가 잘못한 게 아닌데도 사과하고. 공사 구분하는 거 하난 좆같이 철저해.”

    “…….”

    “그때도 그랬잖아. 인문관에 있을 때. 날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눈만 마주쳐도 질색했으면서. 거기서 나서긴 왜 나서? 바보같이.”

    “저.”

    그의 말을 도중에 뚝 잘랐다.

    “선배랑 인문관에 갔던 적 없는데요. 지금 무슨 얘기 하시는 거예요?”

    “…….”

    그는 날카로운 삼백안을 치켜뜨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집요한 눈길이 한참이나 내게 머물렀다. 위태로운 침묵 끝에 그가 나를 향해 팔을 턱 내밀었다. 건조한 무표정 그대로였다.

    “밴드 붙여 줘. 영원이 아파.”

    아슬아슬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와장창 깨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까는 그냥 놔두라면서요.”

    “시간 지나니까 더럽게 아파졌어. 영원이 뒈질 것 같아. 빨리 붙여 줘.”

    “아까 선배가 저 밀쳐서 허벅지 책상에 찧은 건 기억나요? 호현이도 아파 죽을 것 같은데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뭐? 호현이도 아파? 와……. 씨발, 귀여워 미치겠네. 뭐 이런 게 다 있어. 너 진짜 어쩌려고 이렇게 사람을 홀려? 다른 새끼들한테도 이따위로 애교 있게 굴어?”

    “아니, 저기요. 선배. 그게 아니라.”

    “옷 벗고 다리 벌려 봐. 다 나을 때까지 허벅지 핥아 줄게. 네 것도 빨아 줄까? 그럼 아픈 거 다 잊어버리지 않을까?”

    “아뇨.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한동안 투닥거리다가 선배의 팔에 밴드를 붙여 주었다. 핏줄이 서고 흉터까지 죽죽 그어진 팔에 죽어도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정체 모를 귀여운 캐릭터가 커다란 하트를 품에 꼭 안은 채 허공으로도 하트를 뿅뿅 날려 댔다.

    그 뒤로는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선배의 옆에 앉아 사무실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뒤늦게 옆에 선배가 있다는 걸 인지했다. 입술에 물린 담배를 도로 빼 손에 끼웠다.

    “죄송해요.”

    그는 대답 대신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원래 담배 피우셨어요?”

    “아니. 네가 피우는 거 볼 때마다 하도 맛있게 빨아 대길래 궁금해서.”

    “괜찮겠어요? 안 피우던 사람이 피우면 별로일 텐데.”

    “우리 현이가 내 좆도 그렇게 맛있게 빨아 주면 참 좋겠다.”

    “선배님, 한 대 피우시죠.”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잽싸게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렸다. 우리는 라이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맞댔다. 서로 코끝이 닿아 방해되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틀었다.

    달칵. 정적 속에서 라이터를 켰다. 화르르 불꽃이 솟았다. 선배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서늘한 눈매 위로 속눈썹이 드리워졌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도 발그스름한 불이 타올랐다.

    담배를 문 채 숨을 들이마시자 곧장 불이 붙었다. 볼이 패도록 깊이 빨아들였다.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입술 새로 느릿하게 연기를 흘려보냈다. 매캐하고 느슨한 쾌감이 기도와 폐를 타고 번졌다.

    간만에 피우는 담배에 정신이 멍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연기만 뿜어냈다. 새하얀 형광등 빛에 눈이 부셨다. 눈물이 고일 듯 말 듯 해서 눈을 나른하게 깜빡였다. 문득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선배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도 어느덧 절반가량이 타 있었다.

    “진짜 야하게 빠네.”

    그가 가볍게 손을 튕겨 재를 탁 떨며 웃었다. 비흡연자치고는 지나치게 능숙했다. 타들어 가는 것은 담배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불이 붙었다.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조용히 빼냈다. 그가 자연스레 내 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우리의 입술에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씁쓸한 맛이 났다.

    * * *

    오늘도 선배는 나를 남겨 두고 위층에 올라갔다. 동행하겠다는 내 의견은 언제나처럼 묵살되었다.

    그의 예상대로 위층에는 감염자가 있었다. 그중 한 마리가 우연히 계단을 통해 1층 화장실까지 내려왔던 거고. 당장 여길 포기하고 떠나야 할 정도로 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한 번에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은 것도 아니라, 그는 매일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리를 비웠다.

    똑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선배는 이렇게 착하고 얌전하게 노크를 하지 않는다. 문을 뻥 걷어차고 들어오면 들어왔지.

    “…….”

    조용히 문간에 다가갔다. 밖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학생.”

    하재민이었다. 그를 들여보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그를 보자마자 서슴없이 쇠 파이프를 휘두른 선배가 떠오른 탓이었다.

    “곤란하면 안에는 안 들어갈게요. 잠깐 얘기만 해요.”

    결국 나는 문을 살짝 열고 그와 마주했다. 정작 사무실 직원인 그는 밖에 있고 내가 안에 들어앉아 텃세를 부리고 있다니. 미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그 학생 지금 있어요?”

    “아뇨. 나갔어요. 위층 둘러보러요.”

    “위험할 텐데……. 내가 회의실에서 1층까지 내려올 때도 그 이상한 괴물들 여러 번 봤는데.”

    그러게요, 저도 걱정이에요. 아니요, 그 선배는 괜찮을걸요. 두 가지 상반된 말이 동시에 떠올랐다.

    “지하실 같이 가는 건 의논해 봤어요? 뭐래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하재민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분명히 나보다 열 살은 연상일 텐데, 그러고 있으니 몹시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생각해 보니까 나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지하실에 위험한 게 없으면 없어서 다행이고, 있으면 애먼 학생들 휘말리지 않아서 다행이고.”

    “저, 과장님. 지하엔 왜 굳이 가시려는 거예요?”

    “네? 뭐가요?”

    그는 내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 사람들……. 그, 사무실분들요. 과장님한테 엄청 소중한 사람들은 아닐 거 아녜요. 그렇게 무서워하면서까지 굳이 구해야 할 이유가 있어요? 무슨 이득이 있어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내내 내가 상종 못 할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기숙사에서 중앙 도서관으로, 중앙 도서관에서 70주년 기념관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온갖 인간 군상을 봤더니 나 또한 그들의 사고방식에 감화된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나까지 어리둥절해졌다.

    “직장 사람들, 당연히 좋진 않죠. 상사들은 허구한 날 들들 볶고, 동료들은 서로 험담하기 바쁘고, 후배들은 툭하면 사고 쳐서 사람 미치게 만들고. 그래도……. 저 밑에 사람들 갇혀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모른 척해요.”

    “…….”

    “나중에 이거 빌미 삼아서 승진이나 시켜 달라고 해야지. 물가는 오르는데 연봉은 오를 생각을 안 하고, 진짜 못 해 먹겠어요. 학생은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좋은 데 취직하세요.”

    그가 뒷머리를 문지르며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냐는 말. 더할 나위 없이 맞는 말이었다. 동시에 추악한 현실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회의실에서 몇 날 며칠 홀로 농성하다가 나온 그는 모를 것이다. 사람들이 한계까지 몰리면 얼마나 끔찍하게 변모하는지.

    우리는 곧 짧은 인사만 주고받고 헤어졌다. 사무실 문이 다시 닫혔다.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가 봤자 아무것도 없어. 없다고. 감염자도, 식량도.〉

    내가 지하를 정찰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말하기 싫으면 왈칵 짜증을 내며 면박을 줄지언정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열쇠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지하실 상황을 선배가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에는 정말 감염자도 없고 식량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감은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하재민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벌써 지하로 내려갔을까, 아직 준비를 하고 있을까. 혹여나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닐까. 연락을 주고받을 길이 없으니 홀로 전전긍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배는 위층에 올라갔다 올 때마다 자잘한 상처를 달고 돌아왔다. 긁힌 생채기이기도 했고 푸르스름한 멍이기도 했다. 그의 몸에 남은 수많은 흉터들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러 내려가는 하재민, 위층에 있는 좀비들을 죽이러 올라가는 선배, 이도 저도 못하고 1층에 머물러 있는 나. 세 명의 상황이 묘하게 대비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편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도 나였고 가장 무능하고 비겁한 것도 나였으며, 가장 초조한 것도 나였다.

    붉은 선을 남기고 아물어 가는 허벅지를 마지막으로 소독했다. 소독약으로 가득 차 있던 병이 깨끗하게 비었다. 빈 병을 내려놓고 붕대를 감고 옷을 챙겨 입었을 무렵, 잠긴 사무실 문고리가 느닷없이 철컥 돌아갔다.

    철컥, 철컥철컥. 문고리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몇 번 더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수상한 기척이 느껴질 때는 무조건 조용히 할 것. 내가 배운 생존 원칙이었다.

    “왜 안 열리지?”

    누군가 문밖에서 중얼거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조심스럽게 문 앞에 다가갔다.

    “문이 안 열리네? 왜 안 열리지?”

    “과장님?”

    밖의 기척에 주의를 기울이며 가만히 불러 보았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결국 잠금을 해제하고 문을 살짝 열었다. 완전히 열리지 않도록 문짝 뒤에 한 발을 받쳐 고정한 채였다.

    문 앞에 하재민이 서 있었다. 몰골이 한층 더 후줄근해졌다. 그래도 며칠 전까진 그나마 직장인이었다는 흔적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부랑자가 따로 없었다.

    “안 자고 있었네요?”

    멍한 낯으로 생뚱맞은 물음을 던지고, 그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구 헝클어지고 뒤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네?”

    “헤헤헤.”

    하재민은 활짝 웃었다. 기이할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뭔가 이상했다.

    “자는 줄 알고 불 꺼 주러 왔잖아요. 근데 안 자네요.”

    “자는 줄 알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하엔 다녀오셨어요? 다른 사람들은요?”

    “푹 자려면 불을 꺼야 해요. 불 켜 놓고 자면 숙면을 취할 수가 없대요. 저도 취준 할 때 그런 경험 있어요. 공부하다 너무 피곤해서 스탠드 켠 채로 엎드려서 졸았는데, 자도 잔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

    몇 마디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눈 끝에 깨달았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잠깐 사이에 수많은 계산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는 웃으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나 봐요?”

    하재민도 나를 따라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정답이었다. 섬뜩한 전율이 등을 타고 흘렀다.

    “어디서 자요?”

    “이 밑에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시선이 갔다. 여기서 지하실 안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왜 그런 데서 자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난방도 안 되는데. 근데 진짜 불 안 꺼 줘도 돼요?”

    “전 괜찮아요. 지금 안 자거든요.”

    “하지만 불을 안 끄면…….”

    “나중에 제가 알아서 끌게요.”

    “알았어요.”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흐려진 눈동자가 나를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고 좌우로 잘게 요동쳤다. 오싹해졌다.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은 불을 켠 채로 자고 있나요?”

    “네. 너무 불편해 보여요. 그런데 형광등 스위치를 못 찾겠더라고요. 어떡하지?”

    “…….”

    “아, 맞다. 다른 방법이 있었지. 지금 꺼 줘야겠어요.”

    그가 몸을 확 돌렸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내 입가에서 일부러 만들어 냈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과장님.”

    그는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 웃었다. 그대로 지하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재민 과장님!”

    무심코 그를 따라가려다 우뚝 멈추었다. 여기서 멋대로 기어 나갔다간 머리를 따 버리겠다던 선배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한동안 못 박힌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문고리를 움켜쥔 손에 식은땀이 고였다. 10초, 30초, 1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온갖 불길한 생각에 머리가 터질 듯 아파 올 무렵.

    팍! 아무 예고도 없이 전기가 나갔다. 중앙 도서관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전의 원인은 달랐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불을 꺼 줘야겠다던 하재민의 말은 바로 이걸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70주년 기념관 지하에도 다른 곳처럼 기계실이 있을 것이다. 건물 전체의 전기를 관리하는 배전반도 있을 것이고. 시설 관리 팀 소속인 그가 조작법을 모를 리가 없다.

    곧바로 선배가 떠올랐다. 그는 지금쯤 위층에서 감염자들을 상대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은 시각이 둔한 대신에 다른 감각이 예리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산 사람이 그들에 비해 유리한 것은 시각뿐이었다.

    중앙 도서관에서 정전이 되었을 때 선배는 타이밍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상대방이 돌발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는 사이에 치고 들어가 우위를 선점했다. 하지만 지금은.

    “…….”

    나는 입술을 깨물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과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번갈아 보았다. 선택을 해야 했다. 하재민이 꺼 버린 전기를 도로 켜러 아래로 갈지, 선배를 도우러 위로 갈지.

    어느 쪽이 맞는 선택인지는 모른다. 현실은 공략법을 찾아보고 선택지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는 게임 따위가 아니었기에. 불부터 켜겠답시고 지하실에 갔다가 우리 둘 다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반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선배를 돕겠다고 나섰다가 당할 수도 있었다.

    선배는 지하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했다. 동시에 지하에 가겠다는 내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내가 하재민을 따라 지하로 갈까 봐 아예 쇠 파이프로 그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려 하기까지 했다.

    무기도 들지 않고 맨몸으로 지하에 갔던 하재민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돌아왔다. 하지만 그 대신 정신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졌다.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지하실에서 다 자고 있다던 그의 말.

    결론은 이미 나왔다. 나는 등을 돌려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변 기물에 잔뜩 부딪혀 가며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다.

    책상 서랍에 손을 불쑥 밀어 넣었다. 묵직한 플래시라이트가 잡혔다. 하재민이 설비 점검 업무를 할 때 썼던 것 같았다. 담배와 일회용 밴드를 찾을 때 언뜻 보이기에 혹시나 해서 위치를 기억해 뒀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손잡이를 더듬어 톡 튀어나온 버튼을 눌러 보았다. 달칵. 다행히도 플래시라이트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희고 노르스름한 불빛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 사무실 벽면을 밝혔다. 나는 플래시라이트를 든 채 문을 나섰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쾅! 커다란 소음이 일었다. 플래시라이트의 작은 빛에만 의지하여 계단을 오르던 와중이었다. 벽면에 붙은 층 안내 표지가 보였다. 이 앞이 4층이었다. 나는 조용히 4층으로 들어섰다. 큰 소리로 선배를 부르며 돌아다니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 너머에 온 감각을 집중하고 달렸다.

    플래시라이트로 앞을 밝혔다. 시커멓게 입을 벌린 복도가 나를 반겼다. 세미나실과 행사용 홀이 있는 곳이라 다른 건물에 비해 천장이 높고 복도가 널찍널찍했다. 시야 한구석에 비스듬히 쌓인 책상이 어렴풋이 들어왔다.

    복도 한복판에 책상이 왜 있지? 직감적으로 이곳에 선배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전방을 살폈다. 수많은 책상들이 복도를 가로막고 있었다. 대학교에서 흔히 쓰는, 의자까지 같이 붙어 있는 일체형 책상이었다. 금속으로 된 다리들이 뒤얽혀 성긴 방벽이 되었다.

    무언가 세게 충돌했다.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귀가 먹먹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만치 앞에서 시커먼 것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플래시라이트를 확 들어 그리로 불빛을 비췄다.

    피 묻은 쇠 파이프를 든 선배가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조명 아래 그의 피부가 창백하게 도드라졌다. 뒤이어 진득한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던 까만 머리칼과 옷이 드러났다.

    그가 무사함을 확인한 순간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나도 모르는 새에 호흡마저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정호현?”

    불빛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그가 손에 쥔 쇠 파이프를 스르르 내리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한껏 날이 서 있던 눈매가 느슨해졌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사람 같았다. 그의 부름에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선배의 뒤쪽에서 달려드는 형체가 보였다. 머리가 반쯤 으깨져 피범벅이 된 감염자였다. 입을 쩍 벌리고 그의 목덜미를 노렸다.

    나는 대답 대신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일단 선배를 확 밀쳤다. 마침 손에 쥐고 있는 게 플래시라이트밖에 없었다. 유리 부분이 아래로 가도록 거꾸로 잡고, 묵직한 손잡이로 감염자의 안면을 찍어 버렸다.

    불의의 기습에 감염자가 비틀거렸다. 곧바로 발을 들어 복부를 힘껏 후려갈겼다. 기분 나쁜 감각이 발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꼭 썩은 고기가 담긴 장바구니를 걷어차는 것 같았다. 감염자의 상체가 앞으로 확 숙어졌다. 다시금 플래시라이트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선배가 빨랐다.

    그는 쇠 파이프로 뒷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상대의 등을 발로 밟아 고정한 채 쇠 파이프를 세워 위에서부터 내리찍었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목이 으깨졌다. 바닥에 쓰러져 잘게 경련하는 것을 발로 걷어차 산처럼 쌓인 책상 반대편으로 보냈다. 완전히 숨이 끊어지진 않았지만 목뼈를 조각내 놨으니 아까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왜……. 왜 가만히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눈앞의 위험을 해결하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적이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니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놀랐어.”

    선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조금도 놀란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왜요? 멍청하게 뻘짓 하다 죽었을 줄 알았던 놈이 도와주겠답시고 나타나서 놀랐어요?”

    감정이 북받쳐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말이 튀어 나갔다. 평소엔 그렇게 판단이 빠르고 냉정하던 사람이 좀비와 싸우던 도중에 넋을 빼놓다니. 아까 그 상황을 떠올리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몇 초만 더 늦었어도 선배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갑자기 환해지고, 네가 나타나서……. 눈이 부셨어.”

    “…….”

    “아까 네 표정 어땠는지 알아? 모르지?”

    “네?”

    “네가 계속 이렇게만 굴어 준다면 몇 번쯤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예요. 죽어도 괜찮다니.”

    “아니, 아니야. 안 괜찮아. 죽기 싫어. 너무 아까워.”

    더 캐묻고 싶었지만 여유가 없었다. 책상 더미 너머에서 섬뜩한 목 울음이 울려 퍼졌다.

    “바리케이드 만들던 중에 불이 나갔어. 네가 한 거야?”

    선배는 쇠 파이프를 단단히 움켜쥐고 건너편의 어둠을 주시하며 물었다. 너무도 태연한 물음에 울분이 치밀었다.

    “또라이 사이코 새끼도 아니고 그런 짓을 왜 해요. 선배 위층에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이야, 후배님. 말본새가 부쩍 험해지셨네요? 이제 좀 편하지? 살 만하지?”

    그가 덤덤하게 빈정거렸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았다.

    “죄송해요.”

    “아냐. 계속해도 돼. 넌 뭘 해도 예쁘니까 괜찮아.”

    “잘못했어요. 안 그럴게요.”

    “나한테 박힐 때도 그렇게 욕해 줘. 말갛게 생겨선 조금만 만져 줘도 앙앙 우는 게, 입은 존나 걸레같이 놀리는 것도 꼴릴 것 같아.”

    “제발 좀…….”

    이 상황에서도 선배는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았다. 귓가에 꽂히는 원색적인 말에 눈앞이 아찔했다. 애써 한 귀로 흘리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플래시라이트에서부터 번지는 흐린 빛 아래 감염자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산한 그림자에 반쯤 파묻혀 비척비척 다가왔다. 밝은 곳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무서웠다.

    저것들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기 전에 어떻게든 방어해야 했다. 선배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책상 하나를 걷어차 정면을 막았다. 나는 재빨리 다른 책상을 들어 그 위에 쌓으려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전공 서적 한 권을 펼치면 꽉 차는 크기의 작은 책상에 의자를 붙여 둔 형태라, 무게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올려놔도 자꾸만 덜걱대며 무너졌다. 주변이 어두운 데다 마음이 급해서 자꾸 헛손질을 하는 탓에 더욱 힘들었다.

    “이 거지 같은 책상은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선배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거 원래 그래. 나도 더럽게 애먹었어.”

    망할 일체형 책상. 이런 상황에서까지 고생시키다니.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라곤 안 되는 물건이었다. 콰앙! 맞은편에서 다가온 감염자 하나가 책상에 몸을 부딪쳤다. 책상을 붙들고 있던 나까지 휘청댔다. 쇠창살 같은 책상 다리 사이로 손이 쑥 뻗어 나왔다.

    “크아악!”

    다급하게 상체를 뒤로 뺐다. 부패한 손이 간발의 차이로 내 얼굴이 있던 자리를 할퀴었다.

    “윽…….”

    간신히 중심을 잡고 정면에 플래시라이트를 비추었다. 노르스름한 빛에 비친 감염자의 눈알이 번들거렸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뒤이어 맹목적으로 달려온 이들이 하나둘 몸을 들이박았다. 책상으로 이루어진 허술한 벽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얼기설기 엮인 책상 다리와 상판, 등받이 틈으로 수많은 팔다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심결에 주춤 물러섰다.

    “호현아, 가자.”

    선배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만들다 만 바리케이드로는 1분도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방어를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달렸다. 쿠웅. 텅. 쾅, 콰앙! 우리의 등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묵직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번졌다. 책상들이 기어이 무너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선배의 손을 꽉 맞잡고 다른 손으로는 플래시라이트를 들어 황폐한 어둠을 갈랐다. 한 줄기 희미한 빛이 만드는 길을 따라 나아갔다. 그는 묵묵히 내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뒤에서는 굶주린 좀비들이 몰려오고 있었고, 앞에서는 언제 다른 적이 불쑥 튀어나올지 몰랐다. 한 손에 들어차는 크기의 자그마한 휴대용 라이트로는 고작 몇 미터 정도를 비추는 게 한계였다.

    하지만 암흑 속에서 그를 찾아 헤맬 때보다 불안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 * *

    있는 힘껏 달려 1층에 도착했을 때 우리 뒤를 따라오는 감염자는 없었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 버둥거리고 있거나 다른 엉뚱한 층에서 헤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책상을 쌓아 시간을 벌어 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둠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우리였다. 한시라도 빨리 불을 켜야 했다.

    “지하에 가야 해요, 빨리. 거기 배전반 스위치가 내려간 것 같아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마쳤다.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느닷없이 몸이 확 당겨졌다. 선배가 내 팔을 우악스레 잡아챈 탓이었다.

    “안 돼.”

    “왜요?”

    답답한 정적이 흘렀다. 다시 몸을 돌렸다. 그가 손에 힘을 가했다. 팔이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신음을 삼켰다.

    “다른 거 안 해요. 배전반 찾아서 스위치만 올릴게요.”

    “…….”

    “왜 안 돼요? 아래에 뭐가 있는데요? 선배가 그랬잖아요, 감염자도 물자도 없다고.”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침묵에서 오히려 확신을 얻었다. 퍼즐 한 조각이 더 맞춰졌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 물었다.

    “죽은 사람들이 있어요? 선배는 그걸 미리 알았고요?”

    하재민은 기껏 위험을 감수하고 사람들을 구하러 내려가서는 홀몸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놓아 버린 채로.

    그는 사람들이 불을 켠 채로 자고 있다고 말했다. 지하실에 옹기종기 모여 겨울잠이라도 자고 있을 리는 없고. 식량이라곤 한 톨도 없는 곳에 갇힌 이들이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확률은 희박했다.

    중앙 도서관 3층에서 본 광경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시체존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별칭이 붙은 곳에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지하실도 그와 비슷한 꼴이 된 게 아닐까.

    어떻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는 지하실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재민이 책상 서랍에서 열쇠를 찾아 문을 열기도 전부터. 그가 하재민보다 한발 앞서 지하를 살펴보았던 걸까. 그게 아니면?

    “그렇다면? 맞으면 어쩔 건데.”

    나를 노려보던 그가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설마 했던 것이 사실이 되었다.

    “그래도 가야 해요. 선배가 못 가겠다면 저 혼자서라도 갈게요. 사람 죽은 거라면 지금까지도 많이 봤어요. 이제 와서 무섭다고 몸 사릴 순 없어요.”

    “아니. 넌 가면 안 돼.”

    “왜 안 되는지 알려 주세요.”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왜 안 되는 거냐고요! 제가 언제 무작정 가겠다고 떼썼어요?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 주세요. 그럼 포기할게요.”

    “정호현, 또 말 더럽게 안 듣지? 내가 가지 말라면 가지 마.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

    “다리에 칼 맞더니 대가리에도 흠집 났나. 그 간단한 말이 이해가 안 돼? 그게 그렇게 어려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분했다. 평소였다면 성질을 눌러 죽이고 선배의 비위를 맞춰 가며 적당히 넘어갔을 터였다. 그의 말대로 나는 그보다 한참 모자라고 서툴렀으니까. 이제껏 그가 나를 몇 번이나 구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아래에 시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려가기로 다짐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충분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각오마저 무참한 폭언으로 짓밟았다.

    “그러는 선배는요? 저한테 설명 한 마디 해 주시는 게 그렇게 어려……!”

    퍽!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고개가 확 돌아갔다. 턱이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이 덮쳤다. 뒤이어 한쪽 뺨에 홧홧한 통증이 번졌다.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인지한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졌다.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와락 달려들어 선배의 멱살을 움켜쥐고 벽에 처박았다.

    그의 등이 벽에 부딪혀 둔한 진동이 내게까지 울렸다.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내가 떠미는 대로 떠밀렸다. 그저 이를 악물고 형형한 눈으로 나를 쏘아볼 뿐이었다. 주먹을 확 치켜들었다. 받은 대로 갚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차게 얼어붙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활활 타오르다 한순간에 꺼진 불처럼, 충동이 사그라진 자리에 씁쓸한 잿더미만 남았다.

    “…….”

    악에 받쳐 뼈마디가 도드라지도록 움켜쥔 주먹을 스르르 풀어 내렸다. 그를 내팽개치듯 거칠게 밀쳐 버리고 몸을 돌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플래시라이트로 앞을 밝혔다. 지하실 문은 반 뼘 정도 열린 채였다. 그 안에 끈적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호현!”

    그가 뒤에서 낮게 윽박질렀다. 살의에 가까운 분노를 꾹꾹 눌러 참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내가 문을 여는 게 빨랐다. 내부에 고여 있던 공기가 확 밀려 나왔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악취였다. 무심결에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바닥이 묘하게 끈적끈적했다. 발끝에 무거운 것이 툭 부딪쳤다. 아래를 보았다. 락스와 부동액 통이었다. 그중 몇 개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 반 정도만 남은 내용물이 충격에 작게 출렁였다. 벽에 얼룩덜룩한 것이 언뜻 보였다. 무심코 불빛을 비춰 보았다.

    수많은 손자국들이, 피와 진물이 나도록 미친 듯이 죽죽 긁고 또 긁어 댄 흔적들이 가득했다. 토사물로 짐작되는 진득한 액체로 범벅이 된 곳도 있었다. 벽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형광등 스위치를 못 찾아서 불을 꺼 줄 수가 없었다는 하재민의 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지하실에는 식량도 물도 없었다. 사람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는 몇 주, 물을 마시지 않고는 기껏해야 며칠밖에 살아남지 못한다. 바로 위층에 사람을 뜯어 먹는 괴물이 돌아다니고, 지하에 고립되어 바깥의 소식을 알 방법도 없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 보기엔 무섭고. 폐쇄된 환경에서 사람들은 서서히 미쳐 갔을 것이다.

    끔찍한 갈증에 시달린 나머지 이성을 잃고 화학 약품이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아예 목숨을 끊을 목적으로 약품을 마신 것일까. 이제 와서 추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느 쪽이든 어차피 결말은 한 가지이므로.

    플래시라이트를 비춰 저 안쪽에 있을 사람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자리에 굳어 버렸다. 구역질이 났다.

    뒤늦게 머리가 삐걱삐걱 돌았다. 하재민……. 그래, 하재민이 있었다.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는 걸 본 뒤로 그를 만나지 못했다. 위층에서부터 뛰어 내려오는 동안에도 마주치지 못했으니 높은 확률로 아직 여기 있을 텐데.

    어둠 저편에서 뭔가 작게, 아주 작게 움직였다.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차마 안을 비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과장님…….”

    손이 하도 심하게 떨려서 순간 플래시라이트가 삐끗했다. 엇나간 불빛이 시커먼 천장을 비췄다. 큼직한 배관들이 지하실 천장을 이리저리 가로질렀다. 그중 하나에 굵은 밧줄이 칭칭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과장님!”

    손발을 옭아매고 위로 타고 오르는 절망을 억지로 뿌리쳤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뒤에서부터 억센 힘으로 몸이 확 끌려갔다. 손에 든 플래시라이트가 떨어져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일부분이나마 희미하게 보이던 지하실 안의 풍경이 도로 암흑에 잠겼다.

    “정호현, 가지 마.”

    선배가 내 어깨를 붙잡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씹어 뱉듯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들어가면 죽어.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어찌나 힘껏 움켜쥐었는지 어깨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살이 손 모양대로 패어선 피멍이 드는 게 아닐까. 넋이 나간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 * *

    어떻게 지상으로 올라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1층에, 그것도 출입문에 가까운 로비 바깥쪽까지 와 있었다. 유리문을 통해 흐린 달빛이 들이쳤다. 코앞의 사물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던 건물 안보다는 나았다.

    선배가 나를 부축한 팔을 풀자마자 풀썩 쓰러졌다. 앉아 있을 힘조차 없어서 상체가 맥없이 넘어가려는 걸 바닥을 짚어 간신히 버텼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헐떡였다. 달빛 아래 차갑게 빛나는 대리석 바닥의 무늬가 빙빙 돌았다.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다시 보이길 반복했다.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말했지. 다른 사람들 다 죽어도 넌 살아야 한다고.”

    “…….”

    “또 죽으려 하기만 해 봐. 그래, 한번 좆대로 해 봐. 팔다리 묶고 재갈 물려서 어디 처박아 가둬 버릴 테니까. 감염자든 사람이든, 다신 다른 새끼들이랑은 눈도 못 마주치게 할 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시야에 어렴풋이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왜 말 안 했어요? 저한테 미리 말해 줄 수도 있었잖아요. 왜? 왜……? 왜 말 안 해 줘서 사람을 이렇게……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요.”

    “너한테 말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그 새끼 살리겠답시고 목숨 걸고 들어갔다가 멘탈 나가서 뒈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선배는 절 전혀 안 믿으시네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순간도 믿은 적이 없었어요.”

    “…….”

    “제가 과장님 살리려고 목숨 걸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세요? 왜 제가 그 사람들 따라서 자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생각 같은 건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당연한 것처럼.”

    목이 메어 말끝이 흔들렸다.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약속했잖아요. 같이 무사히 살아남아서 나가자고. 선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그때 진심이었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 안에서 어떤 꼴을 보든, 앞으로 무슨 일을 겪든, 함부로 목숨 내다 버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선배는 처음부터 혼자서 속으로 뭐든지 다 정해 놓고…….”

    말을 잇던 도중에 입가에 잊고 있던 통증이 따끔하게 퍼졌다. 간신히 피가 멎은 상처가 도로 터진 것 같았다. 무심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엷게 피가 배어났다.

    “…….”

    나는 한숨처럼 피식 웃었다. 그 직후 참을 새도 없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흉한 꼴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잘게 들썩였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손가락을 타고 흐른 물방울이 싸늘한 바닥에 하나둘 떨어졌다.

    “후배님은…….”

    내가 우는 걸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하던 선배가 문득 입을 열었다. 지금 막 깨달았다는 듯.

    “……내가 밉구나?”

    모든 악과 독기가 싹 빠져나가고 없는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흠뻑 젖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도 나를 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미안해, 호현아. 죽지 마.”

    그가 힘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 표정 없이 멍하기만 하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입매에 힘이 들어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곧 한쪽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잘할게. 이번엔 내가, 너 안 죽게, 진짜 잘할게…….”

    그는 고장 난 기계처럼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죽지 마. 나 싫어하지 마. 잊어버리지 마.”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엄지로 눈가를 느리게 쓸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는 자연스레 내 손에 얼굴을 기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바닥에 뺨을 살짝 비비고 손목 안쪽에 지그시 입술을 묻었다.

    “선배.”

    울음기로 목소리가 형편없이 잠겨 있었다. 이대로라면 꼴사납게 훌쩍거릴 것 같아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퍼즐 조각은 이미 모두 모였다. 그것을 한데 담을 마땅한 틀이 없을 뿐이었다.

    이제껏 나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설을 한 번씩 끼워 맞춰 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지금 상황에 명확히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선배가 알려 준 적도 없는 내 이름을 자연스레 부르던 것, 중앙 도서관의 정전 타이밍을 꿰고 있던 것, 굳게 잠긴 지하실 안의 상황까지 아는 것. 하나같이 비현실적인 일들뿐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밖에 없다.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점(Outlier)에 도달하는 것뿐이다.

    “제가 죽는 거 봤어요?”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눈물에 시야가 아롱졌다. 그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다. 선배는 한동안 나를 빤히 응시했다. 아주 집요하고 황홀하게. 이윽고 그가 시선을 내리깔며 순순히 대답했다.

    “……응.”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두 번째 물음을 던졌다.

    “몇 번이나 봤어요?”

    “스무 번…….”

    그는 조금 망설였다. 기억을 되짚는 듯 아닌 듯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까지 세다가, 잊어버렸어.”

    마침내 해답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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