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목표 (하)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었다. 그러다 한밤중에 열이 올랐다. 이제까지를 통틀어 가장 상태가 나빴다. 간신히 참고 있던 게 단번에 터져 나오기라도 한 듯. 감은 눈 너머가 너무 뜨거웠다. 눈꺼풀에 불이 붙은 줄 알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코 안쪽이 화끈거렸다.
도중에 선배가 나를 깨웠다. 그가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잠들지 못하게 자꾸 깨우던 것만 떠올랐다. 너무 졸린데, 졸려 죽을 것 같은데. 못 자게 하니 서러웠다. 딱 5분만 더 자고 일어나겠다고, 조금만 더 자면 안 되냐고 간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나중엔 서글퍼져서 울었다. 뜨끈뜨끈한 관자놀이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한참 울다가 갑자기 말문이 트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마구잡이로 늘어놓았다. 아프다, 피곤하다, 자고 싶다, 괴롭다. 마지막엔 가족들을 찾았던 것도 같다.
새벽녘이 되자 열이 내렸다. 체온이 확 떨어지면서 이번엔 견딜 수 없이 추워졌다. 나는 전신이 식은땀에 푹 젖어 덜덜 떨었다. 하도 심하게 떨어서 어금니가 따닥따닥 부딪쳤다. 온기가 간절했다. 내 옆에 누운 선배의 품에 무작정 파고들었다.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가슴팍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묻었다. 그의 티셔츠가 흠뻑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지옥 같은 새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침이 밝았다.
톡톡톡톡. 문에서 아주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겨우 막 얕게 잠든 참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에 도로 깨 버렸다. 노크를 작게 네 번 하는 건 중앙 도서관에서 만난 생존자들끼리의 약속이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로 했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이 내리며 한바탕 땀을 흘려서 그런지 몸이 묘하게 가벼웠다.
“저기, 실례합니다. 주무세요?”
무심코 돌아보았다. 내 옆자리엔 선배가 없었다. 그는 반대편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언제 일어난 것일까. 아니, 정정해야겠다. 그에게서는 잠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문 쪽을 빤히 주시하는 옆얼굴에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다. 눈가에 그늘이 진 것도 같았다.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문틈으로 김나혜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멍한 정신으로 습관처럼 인사를 건네려다 놀랐다. 그녀는 온 얼굴이 젖도록 펑펑 울고 있었다. 문을 쥔 손이 울음기로 바들바들 떨렸다.
“언니가, 으, 흑. 그 야구부 언니가.”
김나혜는 “언니가.”라는 말만 반복하며 울었다.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그녀를 따라갔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눈앞이 핑 돌았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바짝 주어야 했다. 계단에 전신이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잘려 나가 계단 아래쪽에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목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저 때문이에요.”
넋을 잃고 멍하게 서 있던 여학생이 중얼거렸다. 두 명의 야구부원 중 팔에 붕대를 감은 쪽이었다. 그녀가 걸친 말끔한 옷과 눈앞의 시신이 입은 피투성이 옷은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한 사람은 살았고 한 사람은 죽었다. 둘의 모습이 처참한 대조를 이루었다.
“제가 다친 데가 아파서 잠을 못 잤어요. 자꾸 붓고 진물이 나는데, 진통제 먹어도 소용이 없고 소독약도 못 구해서……. 차라리 냉찜질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녀가 한 손으로 다친 팔을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다.
“그래서 아름이가 새벽에 물 구하러 나갔어요. 저 찜질시켜 주려고요. 그랬다가…….”
뒷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는 팔을 끌어안고 풀썩 무릎을 꿇었다. 친구의 시체 앞에서 처절하게 흐느껴 울었다.
“형, 저 누나 나갔다가 감염된 거죠? 그러다 원래 중도에 있던 사람들이랑 마주쳐서, 그 사람들이 처리한 거겠죠?”
박진혁이 물었다. 나는 망설였다. 내가 깨달은 끔찍한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말하기 두려웠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감염……. 안 됐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피가.”
나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차마 시신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린 채였다.
“피가 너무 많아.”
사방팔방이 붉은색이었다. 계단 전체가 피범벅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새벽에 흘렀을 피는 아침이 된 지금도 여전히 새빨간 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감염되면 피가 썩어서 끈적해져. 색도 까매지고. 머리를 잘라 내도 저만큼 많이는 안 튀어.”
선배의 곁에 있으면서 좀비들의 목이 잘리는 광경을 본의 아니게 수도 없이 보았다. 감염되어 심장이 멎은 이들은 혈액이 빠르게 응고되었다. 도끼로 목을 수차례 내리찍어도 시꺼먼 피가 조금 튀는 정도에서 그쳤다. 산 사람이라면 동맥이 끊겨 세찬 피 분수가 일었을 텐데.
“그러니까, 저분은.”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한참 말을 골랐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시신 앞에서 묵념하듯이.
“아.”
김나혜가 짧게 탄식했다.
“아, 아…….”
이윽고 그녀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게 허공을 주시하며 고장 난 기계처럼 신음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녀도 깨달은 것이다. 여학생의 죽음이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보복이라는 것을.
중앙 도서관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동료가 끔찍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 발로 게이트를 넘어가 좀비의 먹이가 되기를 자처했을 리는 없으니, 누군가 그를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넣은 게 아닐까 의심했을 거고.
그러던 와중에 하필 그 남자가 죽은 장소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1층 계단에서 여학생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때다 싶었을 것이다. 그녀가 동료를 죽인 범인이 맞는다면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고, 아니더라도 중앙 도서관에 몰래 숨어들어 온 침입자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계단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아무도 오지 않는 차가운 계단에 홀로 쓰러져 죽어 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 * *
우리는 다시 기계실에 모였다. 어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비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친구를 잃고 홀로 남은 여학생, 오하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아예 웅크려 고개를 파묻고 소통을 단절해 버렸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시신 위에 카디건을 덮어 놓고 왔다. 내가 후드 티로 갈아입기 전에 입고 있던 것이었다. 다들 피 웅덩이 가운데 쓰러진 시신을 수습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언니…….”
김나혜가 대답 없는 오하은을 부르며 펑펑 울었다. 하도 울어서 눈이 잔뜩 짓물렀다. 나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 남자를 직접 질질 끌고 가서 게이트 너머의 감염자들에게 던져 준 게 우리 둘이었으니까.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지만 않았어도 그 여학생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5층에 있어요.”
한참 말이 없던 오하은이 문득 말을 꺼냈다. 그녀 또한 울음기로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그 사람들, 5층에 있어요. 5층에 자기들이 모은 물자 다 쌓아 놨어요. 약이랑 식량 포함해서. 우리가 그렇게 목숨 걸고 찾았던 게 다 거기 있어요.”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도 거들었다.
“그 자식들 에너지 바 하나를 나눠 주기 아까워서 사람을 죽였어요. 다른 사람들을 죄다 적 취급 하고 있고요. 아예 여길 요새로 만들 생각인가 봐요. 물자 아무한테도 안 나눠 주고 자기들끼리만 독점하면서.”
“전 이대로는 못 참아요. 소독약, 거즈, 아이스 팩……. 고작 그딴 것 때문에 아름이가 죽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새끼들 물건 가져올 거예요. 목숨 걸고서라도.”
박진혁이 벌떡 일어났다.
“당장 뺏으러 가죠. 다 죽여 버려요. 그 누나랑 똑같이 만들어 주자고요. 우리 지금 인원수도 꽤 되니까 꿀릴 거 없잖아요.”
“안 돼.”
그의 말허리를 단호하게 잘랐다.
“물건 가져오는 건 나도 찬성인데. 그건 안 돼.”
“아니. 왜요? 저기요, 형. 당장 우리 쪽 사람이 죽었잖아요. 씹, 마음만 같아선 확 쳐들어가서 모가지 다 따 버리고 싶은데. 근데 가만히 있자고요?”
박진혁이 곧장 발끈했다. 그는 아까부터 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씨근덕대고 있었다. 내 말이 도화선이 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큰소리가 나서 놀랐는지, 김나혜가 훌쩍이던 것도 잊고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하은마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혈 사태 없이 얻을 것만 얻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자. 아예 상대방이랑 안 마주치면 제일 좋겠지만, 그게 어려우면 최대한 마찰 피하고.”
나는 가능한 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다. 여기서 나까지 흥분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이 상황에서 형은 그딴 소리가 나와요? 아름 누나 그렇게 된 거, 불쌍하지도 않아요? 화나지도 않냐고요!”
“그런 거 아니야. 나도 화나고 억울해. 마음만 같아선 그 새끼들 아주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럼 왜……!”
“진혁아, 너. 사람 직접 죽여 봤어? 아니면 사람이 사람 죽이는 거 눈앞에서 봤어?”
박진혁이 짜증스럽게 이를 악물었다. 팽팽한 긴장이 이어졌다.
“사람 죽이는 거 그렇게 쉬운 일 아니야. 다른 방법이 있으면 그것부터 생각해 봐야지, 살인이 가볍게 꺼낼 말이야? 지금 우리가 왜 여기서 버티고 있는데? 살아남으려고 있는 거잖아. 사람 죽이려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살인을 한다고 우리까지 그렇게 될 필요 없어.”
“하지만!”
“그리고 또. 그 사람들이랑 싸우다가 안 다칠 거란 보장 있어? 죽는 게 우리가 안 될 거라는 보장은? 저 사람들은 전원 흉기로 무장했고 우린 빈손이나 다름없어. 심지어 우리 쪽에는 부상자도 있고. 대체 뭘 믿고 무작정 올라가자고 하는 건데?”
“…….”
“그래, 아주 운이 좋아서 그 사람들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그 뒤로 너 아무 타격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사람을 죽였는데, 네 정신은 멀쩡할 것 같냐고.”
박진혁은 한동안 나를 원한마저 물씬 느껴지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형, 진짜…… 씹선비시네요?”
“뭐?”
“김나혜 구해 줬단 얘기 들었을 때부터 감이 왔는데. 천사 병 걸린 것도 정도가 있지.”
“박진혁. 너 뭐라고 했어.”
그의 말에 대꾸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김나혜가 표정을 확 굳히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박진혁은 그녀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저라면 그냥 뿌리치고 모른 척했을 것 같은데. 몹쓸 짓 당하는 거 구해 줘 봤자 좋은 꼴 못 보잖아요. 나한테 불똥이나 안 튀면 다행이지.”
“야, 박진혁. 야! 내 말 안 들려?”
“솔직히 그게 팩트죠. 이런 상황에선 약한 사람이 당하는 건 당연하고요. 안 당하려면 힘을 기르든가, 무기 들고 방어를 하든가, 아니면 애초에 몸집 크고 힘센 사람으로 태어나든가 해야지.”
김나혜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지워졌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섬뜩하리만치 차분하게 물었다.
“그럼, 네 말은 지금……. 내가 당할 만해서 당했단 거야? 당연한 거라고?”
“아니, 뭐. 미안하게 됐다. 근데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리고, 형. 사람 죽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요?”
그가 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입가에 일그러진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저 이제껏 좀비만 열 마리 넘게 잡았어요. 사람 죽이는 게 그거랑 뭐가 다른데요? 사람은 지능이랑 민첩 좀 더 높고, 좀비는 체력 더 높고. 그 차이 아닌가? 전 사람도 잘 잡을 자신 있어요.”
“…….”
“양심의 가책? 그딴 거 왜 따져요? 호구같이. 그냥 다 죽이고 아이템 파밍 하면 되는데. 살인인지 뭔지 알 게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템이 여기서 왜 나와!”
“왜요? 어차피 지금 이 상황, 생존 게임이나 다를 바 없잖아요. 파티를 짰으니까 이제 아이템 모아서 장비 맞춰야 할 거 아니에요.”
말문이 턱 막혔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물자가 모자라 고통스러워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지금껏 겪은 생지옥이 박진혁에게는 스릴 넘치는 게임처럼 느껴졌을까. 그래, 그렇다면 저 애에겐 내가 천하의 바보 멍청이 같아 보였을 수도 있겠다. 이 와중에도 인간성을 지켜 보겠다고, 최후의 양심만은 잃지 않겠다고 아등바등하고 있으니까.
“……게임?”
눈앞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걸 빤히 보면서도 방관하고 있던 선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한껏 날이 섰다.
“게임은 무슨, 씨발. 얼어 뒈질 게임.”
선배는 신경질적으로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희번덕거렸다.
“흐악!”
그는 박진혁의 멱살을 확 낚아챘다. 박진혁은 나보다도 작았다. 선배에게 붙잡히자 키 차이 때문에 발뒤꿈치가 맥없이 공중에 들렸다. 한 손으로 남자애를 거의 들다시피 했는데도 선배는 그다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이게 대가리에 뇌 대신 좆을 처박았나. 좆같은 소리만 하고 자빠졌네, 아주?”
그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박진혁을 노려보다가, 곧장 바닥에 처박아 내동댕이쳤다. 박진혁은 억 하는 비명과 함께 나뒹굴었다.
“야, 너 같으면 할래? 너 같으면 이 게임 하겠냐고. 응? 세상에 이딴 병신 같은 게임이 어디 있어?”
그가 박진혁을 툭툭 걷어차며 빈정거렸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흉흉했다. 선배는 이따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부분에서 화를 내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화가 난 건 보지 못했다. 지켜보는 나까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정호현 말이 맞으니까, 살고 싶으면 쟤 말대로 해. 능력이라곤 좆도 없는 새끼들이 지랄하지 말고. ……씨발, 뭘 아가리 처놀리고 있어. 안 닥쳐?”
쓰러진 박진혁이 입속말로 욕을 섞어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선배가 말하던 도중에 고개를 확 돌려 윽박질렀다.
“…….”
박진혁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갈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하은은 친구를 잃었다. 그건 김나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동고동락해 온 친구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그녀는 내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기색이었다.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분위기 속에서 계획이 세워졌다.
중앙 도서관 5층. 우리는 물자를 교대로 지키는 사람들의 경계가 소홀해진 틈을 타 필요한 것을 가져오기로 했다. 상대는 우리와 수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았다. 불 꺼진 복도에서 언뜻 본 기억에 의하면 다섯 명은 넘고 열 명은 안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은 수시로 몰려다니며 도서관을 순찰했다. 혹시나 미처 챙기지 못한 물자가 있는지, 침입자나 좀비가 돌아다니지는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서. 그걸 감안하면 5층에 머무르는 인원은 몇 명 안 될 터였다.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면 이길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쪽은 살인에 익숙한 무장 상태의 장정들이고, 이쪽은 지치고 굶주린 데다 부상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타이밍을 잘 노려 물자만 가져오는 거라면 해 볼 만했다.
“언제 쳐들어가는 게 좋을까요? 역시 밤이 좋겠죠? 기습하는 거니까.”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실내라서 밤이나 낮이나 똑같은데.”
“그 사람들도 생활 사이클이 있을 거 아니에요. 밤에는 아무래도 긴장이 좀 풀리겠죠.”
“그럼 새벽은 어때? 그때가 사람들이 제일 방심하는 시간이래. 왜, 6·25 때도 북한군이 새벽 4시에 쳐들어왔다잖아.”
“아니, 언니. 우리가 북한군이에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우리는 나갈 준비를 했다. 자꾸만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괜히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었다.
김나혜는 박진혁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예 없는 사람처럼 깡그리 무시하고 나나 오하은과만 이야기했다. 오하은은 남아 있던 붕대를 모두 꺼냈다. 다친 팔뿐만 아니라 다른 팔뚝과 손에도 칭칭 감았다. 멀쩡한 쪽 손에는 야구 글러브를 꼈다. 선배는…… 뭐, 예외였다. 그는 원래 나 외의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열나고 아프시다면서요. 괜찮으세요?”
붕대를 감는 데 집중하던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내게 한 말인지 몰라 가만히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하은 씨는요?”
“이 상황에 씨는 무슨 씨예요. 동갑끼리. 그냥 말 놔요.”
“그럴까? 하은아.”
“우와. 말 놓으란다고 바로 놓네? 그래, 호현아.”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처음으로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보일러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 솔직히 아까 그냥 뛰쳐나가려고 했어. 그 새끼들 죽이고 나도 콱 죽으려고. 목숨 걸고 달려들면 한 놈쯤은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그 와중에 네 말 들으니까 짜증 나더라. 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넌 너무 침착해서.”
“어……. 미안해.”
박진혁과 대거리를 하며 떠오르는 대로 쏘아붙이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 말이 오하은에게는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는 걸.
“근데, 진짜 짜증 나는데. 맞는 말이라서 정신이 들었어.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 애초에 아름이가 물 구하러 나갔던 게 나 살리려고 그런 거잖아. 어떻게든 나랑 같이 살아남으려고.”
“…….”
“그 애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복수하겠답시고 눈 돌아가서 덤비다 나까지 허무하게 죽으면……. 아름이가 희생한 건, 걔랑 내가 지금까지 발버둥 친 건 다 뭐가 되는 거냐고. 다른 게 개죽음이야? 그게 개죽음이지.”
“…….”
“그래서 나도 살아 보려고. 악착같이. 끝까지 살아남아서, 그 애가 얼마나 좋은 애였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세상에 다 알릴 거야.”
“그거 좋네.”
“호현이 넌 나가면 뭐 할 건데?”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내게 한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일단 병원부터 갈래. 감기 때문에 죽을 것 같아.”
“응. 넌 좀 그래야겠다. 나도 환자긴 한데 넌 더해 보여.”
“우리 사이좋게 병원 침대에 드러눕겠네. 나는 내과, 너는 외과.”
내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에 오하은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절망에 빠져 정신을 반쯤 놓고 있던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그리고 가족들한테 나 살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연락하고, 할머니한테도 전화드리고.”
“또?”
“음, 글쎄.”
나는 벽에 등을 기대며 씩 웃었다.
“선배랑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이번엔 제대로 된 거. 사과랑 미니 초코바 같은 거 말고.”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여전히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몸은 여전히 쿡쿡 쑤시고 으슬으슬해 죽겠는데, 당장 몇 시간 후의 내가 5층에서 물자를 가져오려다 살해당할지도 모르는데. 미래를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 * *
우리는 늦은 새벽에 움직였다. 일단 5층을 정찰하고, 상대의 수가 예상보다 많으면 후퇴하고 한두 명 정도로 적으면 행동을 감행하기로 했다. 몇 명이 나서서 상대를 제압하면 그때 다른 사람들이 물건을 들고 달아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우는 내내 박진혁은 큰 불만 없이 따랐다. 물론 얼굴에야 불만이 가득했지만 적어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쇠 지렛대를 만지작거리며 벽에 기대서 있는 선배가 무서워서일 확률이 컸다.
오하은이 정찰을 맡았다. 그녀는 자신이 놔두고 간 물건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5층까지 갔던 적이 있었다. 가는 길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물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잘 알 터였다. 4층 비상구 문 옆 벽에 바짝 붙어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위층으로 올라갔던 오하은이 잠시 후 내려왔다.
“언니, 위에 사람 많아요? 몇 명이나 있어요?”
김나혜가 소곤소곤 물었다. 오하은은 어쩐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아니, 그게.”
“혹시 다 모여서 거기 지키고 있는 거 아니죠?”
“그게……. 아무도 없어.”
“네?”
“지금 5층에 아무도 없어. 혹시나 싶어서 계속 살펴봤는데, 입구 안에까지 살짝 들어갔다 나왔는데. 진짜 아무도 없어. 다 자리 비웠나 봐.”
최악의 경우에는 물자는 하나도 못 건지고 내빼거나 상대에게 들켜서 몸싸움을 벌이는 것까지 생각했었는데. 지금이 기회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원하는 것만 얻을 수 있는.
“빨리 가죠, 그럼.”
박진혁이 당장이라도 뛰어 올라갈 듯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도 초조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선배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지금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김나혜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이제껏 선배가 무서워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 애가 불쑥 말을 건 것을 보면. 하기야 그녀의 입장에선 그럴 만도 했다. 선배는 첫 등장부터가 살벌했다. 쇠 지렛대를 질질 끌며 나타나서는 날 내놓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선언했으니.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네?”
물론 선배는 부연 설명을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뭘 그딴 걸 다 물어보냐는 듯 시큰둥하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도 없다는데 왜 가면 안 돼요? 이유를 알려 주세요.”
“진짜예요. 진짜 아무도 없었다니까요. 지금 바로 다시 갔다 올 수도 있어요. 아예 증거로 물건 하나 가져올까요? 그럼 믿으실래요?”
“사람들 언제 올지 모르잖아요. 지금 아니면 언제 가요!”
항의가 쏟아졌다. 선배는 어디서 개새끼가 짖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들을 싹 무시했다. 사람들의 불만이 점점 커졌다.
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가 저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들처럼 따지고 들 마음은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 그새 내가 선배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는 그가 친절했던가. 첫 만남부터 다짜고짜 날 죽이니 살리니 하던 인간인데.
“선배, 그럼 어떻게 해요? 우리 다시 돌아가요?”
결국 내가 대표로 그에게 물었다.
“기다려.”
“언제까지요?”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더욱 알쏭달쏭한 대답이었다. 약간의 논쟁 끝에 일단 그의 말대로 4층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물론 사람들을 설득하는 건 내 몫이었다. 이번에도 나만 진을 뺐다.
1분, 5분, 10분, 20분이 지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이러다간 다른 층에 있다가 5층으로 돌아오던 사람들과 마주칠지도 몰랐다. 물자는 얻지도 못하고 위험만 자초하고,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박진혁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김나혜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계단을 번갈아 보며 불안하게 발을 굴렀다. 위층의 정황을 직접 보고 온 오하은이 가장 답답해했다.
“저 봤어요. 문 너머에 있는 것들. 아예 구급상자를 통째로 갖다 놨던데요. 과자랑 초콜릿 같은 것도 잔뜩 있고. 이럴 시간에 다녀왔으면 진작 가져왔잖아요.”
톡. 뺨에 뭔가 닿았다. 돌아보았다. 선배가 내 뺨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지금은 별로 안 뜨겁네.”
“열이 좀 가라앉았잖아요. 새벽에, 그러고 나서…….”
무심코 말을 잇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새벽에 우리가 뭘 했는지 떠오른 탓이었다. 밤새 열에 시달리며 그의 품에 안겨 훌쩍훌쩍 울었던 것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선배가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너, 다시 뜨거워졌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평온한 대화였다. 결국 참다못한 박진혁이 폭발했다.
“씹,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짓거린지 모르겠네. 쫄려서 못 가는 건지 뭔지. 나 혼자라도 갈 거예요! 나중에 전리품 나눠 달라고 하지나 마시죠.”
그는 증오에 찬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몸을 확 돌려 계단을 올랐다.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사람들 모두 당황해서 그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박진혁이 사라진 뒤에도 선배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가 나를 향해 까딱 손짓했다.
“손.”
무심코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목을 잡아 올려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다시 놓아주었다.
“그래. 착하다.”
뒤늦게 강아지 취급을 받은 것을 깨달았다. 표정이 어쩔 도리 없이 일그러졌다. 아까 뺨을 건드렸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선배와 내가 꼭 붙어서 대화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눈이 점차 묘해졌다. 이 상황에 저 새끼들은 대체 무슨 헛짓거리를 하나 싶은 시선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조금 몸을 물렸다. 선배가 그것을 민감하게 눈치채고 와락 인상을 썼다.
“왜, 싫어? 나랑 닿기만 해도 기분 더러워?”
“…….”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똥 씹은 표정 하지 말고. 누가 보면 꼭 내가, 응? 후배님 괴롭히기라도 한 것 같잖아요. 씨발.”
“아뇨. 싫을 리가요.”
나는 잽싸게 얼굴을 도로 펴고 웃었다. 선배의 손에 들린 쇠 지렛대가 눈에 들어와서는 결코, 정말로 아니었다. 불현듯 서러워졌다.
김나혜와 오하은이 절박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자신들도 박진혁처럼 선배의 말을 무시하고 올라가야 하나 싶은 기색이었다. 그때 위에서 큰 소리가 났다. 쿵! 묵직한 진동이 아래층까지 전해졌다. 모두 흠칫 놀랐다.
“으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박진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저 새끼 잡아!”
분명히 5층엔 아무도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누군가 목청껏 고함을 지르는 게 벽 너머로 작게 들렸다. 요란한 소음이 연달아 났다.
“그러게 기다리라니까.”
선배가 대수롭지 않게 툭 던졌다. 이제야 그의 말이 이해되었다. 그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들인데, 식량을 독점하기 위해 살인까지 하는 사람들인데. 본진을 덩그러니 놔두고 자리를 비울 리가 없었다.
다들 굶주리고 지쳐 한계까지 몰린 탓에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당장 물자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에만 집중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못 할 만큼.
“도, 도망가요. 우리 빨리 도망가요.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김나혜가 다급히 나와 오하은을 잡아끌었다. 나는 넋이 나간 채로 그녀가 당기는 대로 몇 걸음 움직였다. 그러다 도중에 턱 걸렸다. 선배가 반대쪽에서 내 팔을 쥐고 있었다.
“선배?”
“기다리라고 했지.”
“그게 무슨……!”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팍! 갑자기 건물 전체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예기치 못한 정전에 위층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다 어지러운 고함 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뭐야. 또 정전인가?”
“이 자식 어디로 튀었어?”
덜컥 불안해졌다. 어둠 속에서 내 팔을 잡은 선배의 손을 더듬더듬 찾아 쥐었다. 그가 잠깐 멈칫했다가, 나를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래, 현아. 내 옆에만 꼭 붙어 있어. 그렇게.”
선배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뜻밖의 사태에 모두가 당황했다. 오직 그만이 침착했다.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근데 내 손은 왜 그렇게 야하게 잡아. 지금 보채는 거야? 네 좆도 이렇게 주물러 달라고?”
“선배, 제발요.”
나는 기겁했다. 정말이지 맥락도 없고 두서도 없는 음담패설이었다.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은 옆에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리 귓속말이라지만 혹여나 누군가 들을지도 몰랐다.
“안 보여도 계단은 올라갈 수 있지? 잘 잡고 따라와. 걸려 자빠져서 울지 말고.”
“안 울거든요?”
“다 봤는데. 툭하면 엉엉 우는 거. 나한테 안겨서 막…….”
“그건 좀 잊어 주실래요.”
선배는 피식 웃고 나를 잡아끌었다. 난간을 더듬어 가며 어둠을 뚫고 계단을 올랐다. 어느 순간 계단이 끝나고 평지가 이어졌다.
“잘 봐 둬.”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비스듬히 짚고 속삭였다. 뭘 잘 봐 두라는 말일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 순간 깜빡하고 스파크가 튀듯 불이 켜졌다. 눈앞의 풍경이 환하게 보였다. 5층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열을 맞춰 쌓아 놓은 생수병이 흐트러져 사방에 굴러다녔다. 테이블 위에 놓인 구급상자도 입구가 활짝 열려 안에 든 것들이 와르르 엎질러졌다.
무기를 든 사람들이 씩씩대며 한 곳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박진혁이 쓰러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찌나 끔찍한 짓을 당했는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불길하게 파직거리는 형광등은 3초를 못 가고 도로 꺼졌다. 잠시나마 돌아왔던 시야가 도로 암흑에 잠겼다.
“미친. 또 꺼졌어.”
“못 도망가게 잘 잡아 놔!”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잔상이 눈에 남아 어른거렸다.
“아까 본 거 기억하지?”
선배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옅게 피비린내가 나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손에 구급상자가 닿았다. 내용물을 확인할 새도 없이 무작정 챙겼다.
바로 옆에서 붕 하고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확 숙였다. 정수리 위에서 바람이 일었다. 눈먼 배트가 내 머리가 있던 자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거기 누구 있지? 누구야?”
누군가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인기척을 느끼긴 했는데 자기편인지 아닌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것 같았다. 대답 대신 목소리가 들린 쪽을 뻥 걷어차 주었다.
“흐억!”
복부를 세게 걷어차인 상대가 풀썩 쓰러졌다. 충격으로 들고 있던 배트를 떨어뜨렸는지 묵직한 것이 카펫 위를 굴렀다. 다시 불이 들어왔다. 배를 끌어안고 바닥을 뒹굴던 남자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한껏 노려보았다.
“이, 이 새끼가…….”
바닥에 떨어진 그의 배트를 집어 들었다. 마침 옆에 오하은이 보이기에 휙 던져 주었다. 배트도 써 본 사람이 제일 잘 쓰겠지. 그녀가 한 손으로 배트를 턱 잡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불이 꺼졌다.
팔을 뻗어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에너지 바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있었다. 잡히는 대로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야! 여기 도둑놈들 있어!”
“한 놈도 놓치지 마.”
험악한 외침이 오갔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너네 다 죽여 버릴 테니…… 악!”
도중에 배트로 뭔가를 후려갈기는 소리가 났다. 처참한 비명과 함께 말이 뚝 끊겼다. 홈런이라도 친 줄 알았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적군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으니 모두가 근처에 있는 상대를 무작정 공격했다. 그러다 책상이나 의자에 걸려 엎어지기도 했다. 언제 다시 불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캄캄한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나가요. 챙길 거 챙겼으면 빨리 나가요!”
몸을 돌려 출입문 쪽을 향했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내 후드 티 모자를 확 낚아챘다. 억센 힘으로 목이 조여졌다.
“헉!”
숨이 막혔다.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너 아까 나 찬 새끼지? 씨발. 뒤졌어.”
그가 나를 끌어당겨 팔로 목을 확 졸랐다. 뚜둑. 압력을 받은 목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몸에 점차 힘이 빠졌다.
“흐윽, 컥.”
나는 괴롭게 신음했다. 이렇게 당하는 건가 싶었다. 그때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이 쓰레기야. 우리 선배 건드리지 마!”
김나혜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날랜 몸놀림으로 카펫 위를 밟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
상대는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쓰러졌다. 그는 바닥에 고꾸라져 헉, 헉, 하고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김나혜가 어딜 찼는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이것들이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나.”
다른 사람이 스산하게 읊조리며 다가왔다. 찰칵찰칵 금속이 맞물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퍼뜩 떠올랐다. 3층에 숨어서 저 사람들이 좀비를 해치우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때 보았다. 저들 중 한 명이 맥가이버 나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왜, 너희도 그년처럼 만들어 줘?”
주춤주춤 물러나던 김나혜의 몸이 내게 닿았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용기를 내서 회심의 일격을 날렸지만 내심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를 내 등 뒤로 보냈다. 다시 불이 켜졌다. 가장 먼저 날카로운 칼날이 눈에 들어왔다. 칼끝이 바로 코앞을 가르고 지나갔다. 내가 한 뼘만 더 앞에 있었어도 얼굴이 가로로 쭉 베일 뻔했다.
“아깝네. 대가리 쪼개 버리려 했는데.”
그가 비릿하게 입맛을 다시고 다시 칼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무표정한 얼굴로 쇠 지렛대를 치켜든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위아래로 검은 옷. 그가 꼭 사신처럼 보였다.
“대가리 쪼개지는 건 너겠지.”
선배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상대가 뒤돌아보기도 전에 쇠 지렛대를 휘둘러 뒷머리를 내려쳤다. 남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맥없이 허물어졌다.
우리의 위치를 파악한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멍키 스패너와 파이프, 자물쇠를 끊을 때 쓰는 금속 절단기까지. 저마다 흉흉한 물건들로 무장했다.
“가자. 빨리.”
김나혜의 등을 확 떠밀었다. 그리고 나도 달렸다. 배트 하나로 용케 버티고 있던 오하은이 따라 나왔다. 김나혜가 멘 백팩은 제법 빵빵해졌고, 오하은이 입은 과잠 주머니도 불룩했다. 그 난리 통에 다들 뭘 챙기긴 한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이 새끼들이 어딜 도망가려고!”
“쟤네 다 잡아 죽여!”
물론 상대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를 놓치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켜고 우르르 몰려왔다.
“나, 나도 데려가. 제발. 나혜야……. 누나, 하은 누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박진혁이 처절하게 우리를 불렀다. 아까 언뜻 봤을 때도 그는 이미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대로 두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
그러나 김나혜와 오하은 둘 중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아예 못 들은 것처럼 덤덤하게 표정을 굳히고 아래층을 향했다.
“형들, 저 좀……. 호현 형.”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선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는 긴 다리를 이용해서 계단을 한 번에 두세 개씩 가뿐하게 뛰어 내려갔다. 그에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어깨 너머로 들리는 그의 애원이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잦아들었다.
* * *
여러 개의 발소리들이 우리 뒤에 따라붙었다. 계단과 복도를 번갈아 달리며 간격을 벌렸다. 일부러 모퉁이를 여러 번 돌아 간신히 상대를 떨쳐 냈다. 그래 봤자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다수 대 소수로 술래잡기를 벌이는 이상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수적 우세를 이용해 길목을 틀어막고 포위망을 좁혀 온다면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어디, 헉, 허억, 어디로 가요?”
“나가자. 건물 밖으로 나가야 돼.”
“악! 흐윽.”
배트를 쥐고 힘겹게 달리던 오하은이 비명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비틀대다 복도에 풀썩 주저앉았다.
“발목, 나, 발목.”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한쪽 발목이 비정상적으로 벌겋게 부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팠다.
“언니!”
“아까, 넘어졌……. 윽.”
이제껏 아무런 내색 않고 죽어라 달렸던 게 용할 정도였다. 보통은 저런 부상을 입고는 달리기는커녕 걷기도 힘들 텐데.
“나 두고 가. 그냥 가라고.”
오하은이 자신을 부축하려는 김나혜를 발작적으로 밀어냈다. 우리가 바로 떠나지 않자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 해, 멍청이들아. 이러다 다 죽어! 빨리 좀 가!”
“싫어요. 언니 놔두고 어떻게 가요.”
“나혜야.”
김나혜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그녀가 내 팔을 뿌리쳤다.
“언니 버리고 가자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전 그렇게 못 해요. 누구 말처럼 씹선비에 호구 짓 하다 죽더라도, 쓰레기같이 살기는 싫어요.”
“그런 얘기 아냐. 내 말 들어. 하은이 데리고 어디 잠깐만 숨어 있다가, 바로 정문으로 가. 우린 후문으로 갈 테니까. 저 새끼들 어차피 사람 나뉘면 우리부터 쫓아올 거야.”
“하지만, 그럼 선배들이…….”
“말다툼할 시간 없어!”
왈칵 언성을 높였다. 내 기세에 놀란 김나혜가 움찔했다. 하지만 말뜻은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눈에 결연한 의지가 어렸다.
“네.”
“밖에서 만나자.”
그 말만 남기고 미련 없이 그들을 등졌다. 이제 내 곁에는 선배만이 남았다. 내가 한 선택이 과연 맞는 것일까. 동의를 구하듯 그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묵묵히 나를 따랐다.
미친 듯이 달려 1층까지 내려왔다. 멀찍이 후문과 카페 유리문이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 몇 명이 이미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전원 무장한 상태였다.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이 재빨리 계단을 막아섰다. 곧 우리가 온 길도 봉쇄되었다.
“이제 잡았다. 더럽게 애먹이네.”
그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살기등등하게 웃었다. 앞뒤가 모두 적으로 둘러싸였다.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뒤돌아 달렸다. 똑같이 생긴 게이트들이 늘어선 열람실 쪽으로.
게이트 안에서 하염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시체들의 모습이 보였다. 입구 근처에 있던 몇 명은 벌써 우리의 기척을 감지했는지 뻣뻣한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그 자식 죽은 거, 너희 짓이지?”
“그 자식?”
“어디서 발뺌을 해. 그럼 걔가 제 발로 게이트 넘어가서 죽었겠냐?”
김나혜와 내가 질질 끌고 가 게이트에 밀쳐 버린 남자를 말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싸하게 식었다.
“야구 동아리 과잠 입고 있던 애는……. 너희가 죽였잖아.”
“아니, 한밤중에 웬 미친년이 혼자 돌아다니는데. 좀비인 줄 착각했잖아. 어두우니까 구분이 잘 안 돼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렇게 말하는 이의 손에는 톱이 들려 있었다. 톱날과 손잡이 사이의 틈에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빨간 핏자국이 보였다. 속이 메슥거렸다.
“살인자 새끼들이 말이 많네.”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빈정거렸다. 그들은 내 말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 그래. 기왕 살인자 된 김에 두 놈 더 죽이지 뭐.”
상대방이 조금씩 거리를 좁혔다. 바로 몇 걸음 뒤가 게이트였다. 달아날 곳이 없었다. 5층에서 훔쳐온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들어 있는 바지 앞주머니 대신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어디서 잔머리를 굴려.”
누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퍽! 모진 발길질이 옆구리에 꽂혔다. 몸이 확 꺾였다.
“윽……!”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떨어졌다. 그는 내가 폰을 도로 줍지 못하도록 발로 차 게이트 바로 앞까지 보냈다.
“뭐야, 이건. 이 와중에 폰? 참 나. 경찰에 신고하게? 아니면 유언이라도 남기려고?”
남자가 저속하게 낄낄거렸다. 나는 상체를 웅크리고 신음을 삼켰다. 그는 나를 한 대 더 걷어차기 위해 발을 들었다. 알면서도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선배가 쇠 지렛대로 그를 세게 후려갈긴 탓이었다. 상대가 일격에 허물어졌다.
“이 씨발 것들이……. 지금…… 어디서.”
선배가 이를 악물고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잇새로 불안정하게 흐트러진 호흡이 새어 나왔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동공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정호현을 건드려…… 응?”
그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쇠 지렛대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그의 배를 콱 내려찍었다. 옷 위로 피가 번졌다.
“흐아악!”
끔찍한 광경이었다.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상대편 또한 할 말을 잃고 굳어 버렸다. 선배는 표정 없는 얼굴로 다시 쇠 지렛대를 치켜들었다. 남자의 배가 찢어져 내장이 흘러나올 때까지 연거푸 내려찍을 기세였다. 이러다간 선배까지 살인자가 될 판이었다.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큰 소리가 난 것을 들은 감염자들이 어기적어기적 몰려오기 시작했다.
“선배!”
한 팔로 옆구리를 감싸고, 다른 팔로 선배를 급히 잡아끌었다. 최대한 게이트에서 멀리 떼어 놓았다. 다행히도 선배는 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개새끼들, 다 죽었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죽은 자들의 괴성이 점점 더 커졌다. 앞에서는 흉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누군가 멍키 스패너를 휘둘러 선배를 노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쇠 지렛대를 들어 막았다. 캉! 묵직한 금속과 금속이 부딪쳤다.
난투극이 벌어졌다. 모두가 무기를 가진 가운데 나만 맨손이었다. 선배가 내 몫까지 상대를 막아야 했다. 아무리 선배가 노련하다 한들 수적 열세를 메울 수는 없었다.
“죽어!”
맥가이버 나이프를 든 사람이 선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마침 정면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느라 대응할 짬이 없었다. 앞뒤 재고 따지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칼을 든 남자의 손을 힘껏 걷어찼다.
칼날이 팽글팽글 돌며 허공을 날아 먼 곳에 떨어졌다. 안심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한 박자 늦게 허벅지에서 화끈한 통증이 번졌다.
“헉.”
뜨거운 것이 바지를 적셨다. 찢어진 바지 옷감 사이로 길게 베인 상처가 보였다. 바닥에 피가 뚝, 뚝, 떨어졌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등에 차가운 벽이 닿았다. 게이트였다.
“캬아악!”
바로 위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가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게이트에 우글우글 몰려든 좀비들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게이트가 바닥에 쓰러진 나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한껏 상체를 기울여 나를 잡으려 했지만, 뻗은 손끝이 한두 뼘 정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헤집었다.
“아, 아…….”
공포로 전신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입을 쩍 벌리며 울부짖는 시체들의 얼굴이 코앞에서 낱낱이 보였다. 누렇게 고름이 낀 안구도, 썩어서 반쯤 떨어져 나간 콧대와 입술도. 수십 개의 손이 허공을 휘저으며 나를 노렸다.
“저 새낀 곧 잡아먹히겠네.”
“오케이. 한 놈 처리했고.”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게이트 앞에 와서까지 나를 처리하고 싶지는 않은지 미련 없이 물러섰다. 내게 신경을 끄고 선배에게 집중했다. 나는 힘겹게 팔을 뻗었다. 바로 앞에,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휴대폰이 있었다.
그때 위에서 시커먼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손톱이 내 얼굴 바로 위를 할퀴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피했다. 뺨에 난 솜털에 섬뜩한 감각이 스쳤다. 이를 악물고 팔을 뻗었다. 좀 더, 조금만 더. 손과 팔목,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포기해야 하는 건가 싶은 순간 손에 폰이 닿았다.
모두가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선배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공격을 간신히 막아 냈다. 등 뒤가 게이트로 막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탁 트인 곳에서 사방에서 포위되었다면 정말 어쩔 도리가 없을 터였다.
“윽……. 흐으.”
칼에 베인 허벅지가 지독하게 아팠다. 피가 계속 흐르고 있는지 바닥이 질척거렸다. 시야가 흐려졌다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애써 눈을 부릅떴다.
화면을 켜자 배터리 부족을 알리는 경고 메시지가 떴다. 전원을 아예 끄거나 초절전 모드로 해 두고 거의 사용하지 않긴 했지만, 충전한 지 하도 오래 지나서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무시하고 다른 기능을 켰다.
삐비빅. 아수라장 한가운데 너무도 평온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액정에 뜬 학생증 QR 코드를 인식한 게이트에서 파란 불빛이 깜빡였다.
한껏 뻗고 있던 팔을 내렸다. 미친 듯이 허우적대는 좀비들의 손길을 피해 리더기에 휴대폰을 갖다 대느라 진이 다 빠졌다. 팔목을 붙잡힐 각오 정도는 했는데 운이 좋았다.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옆으로 굴러 몸을 피했다. 게이트가 활짝 열렸다. 수십 명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게이트가 좌우로 갈라지자 그 사이로 좀비들이 와르르 쓰러졌다.
“끄륵, 끄, 윽…….”
그들은 처음에 저들끼리 뒤엉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먹잇감의 존재를 감지한 이들이 곧 하나둘 일어섰다.
“으아아악!”
“미친, 이 미친 새끼가!”
이제 싸움에 열중할 여유 따윈 없었다. 공동의 적 앞에서 산 사람들끼리 싸워 봤자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협공하여 선배를 몰아붙이던 것도 잊고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정호현.”
선배가 손을 내밀었다. 입술을 깨물고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그 손을 잡았다. 그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나를 확 끌어 올렸다.
“나한테 기대. 뛸 수 있어?”
“…….”
나는 대답 대신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의 목소리가 깊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시야 또한 흐릿했다.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 것일까.
선배가 작게 이를 갈았다. 들고 있던 쇠 지렛대를 서슴없이 던져 버리고, 나를 끌어안다시피 하여 부축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태연하던 다른 때와는 달리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덜컥, 덜컥. 좀비들이 끼어 있어 게이트가 닫히지 않았다. 자동으로 닫히려다 장애물을 인식하고 다시 열리길 반복했다. 그 틈을 타 끝도 없이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우리는 뒤에서 몰려드는 감염자들을 피해 도망쳤다. 내가 지나온 자리마다 드문드문 핏자국이 남았다.
우리보다 한발 먼저 나섰던 사람들은 부리나케 후문 쪽으로 몰려갔다. 도서관 뒤쪽으로 난 후문은 한두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았고, 그들은 수가 많았다. 서로 1초라도 더 먼저 나가려 아웅다웅했다.
“흐억!”
결국 힘 싸움에서 밀린 사람이 나자빠졌다. 그의 몸에 걸려서 누군가 또 넘어졌다. 몇 명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어 나갔다.
“이 더러운 새끼들아. 너네만 살겠다고! 내가, 씨발, 죽어도 혼자 죽을 것 같아?”
쓰러진 남자가 악에 받쳐 꿈틀꿈틀 기어가 문을 틀어막았다. 남은 사람들이라도 절대 못 나가게 막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게 진짜 미쳤나!”
“비켜, 좀. 안 비켜?”
“꺼져!”
마음이 급해진 사람들이 그를 매정하게 걷어찼다. 아예 몸을 짓밟고 넘어가려는 사람도 있었다. 추악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절로 눈이 갔다.
“보지 마.”
선배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툭 던졌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그의 말에 따랐다.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후문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복도를 통해 도서관을 모로 가로질러 정문으로 가기로 했다. 선배의 손을 꽉 붙잡고 앞만 보며 달렸다. 한 발짝 뗄 때마다 끔찍한 통증이 다리를 할퀴었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몸을 못 가누고 자꾸 푹푹 쓰러지려는 나를 선배가 추슬러 받쳤다.
“크륵……. 컥, 크아아!”
“으아악!”
곧 등 뒤에서 섬뜩한 괴성이 들렸다. 열람실에서 풀려난 감염자들이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이 그 위에 얹혔다. 나는 그의 말대로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 * *
복도 끝에 정문이 보였다. 큰 유리문 너머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가 5층으로 쳐들어간 게 늦은 새벽쯤이었으니까, 겨울이라 날이 짧은 걸 감안해도 슬슬 해가 뜰 때가 되었다.
“허억, 헉.”
땀이 뚝뚝 떨어졌다. 중간부터 나는 거의 선배의 옆구리에 끼워지다시피 하여 간신히 움직였다. 다리에 자꾸만 힘이 풀렸다. 감각이 거의 사라진 종아리와 발목을 타고 피가 줄줄 흐르는 게 느껴졌다.
“정호현.”
“…….”
“정호현! 내 말 들려?”
“네……. 선배.”
“똑바로 걸어. 정신 차리라고! 여기까지 와서 잡히면.”
선배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끊임없이 쫓아오는 감염자 떼를 확인하고, 우리가 지나온 복도 바닥을 한 번 보았다. 바닥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나를 받쳐 안은 팔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출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서관 밖의 풍경이 보였다. 온통 새하얬다. 흐린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유리문에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순간 흠칫 놀랐다.
“선배들, 여기요!”
김나혜와 오하은이었다. 눈을 맞으며 서 있었던 탓에 코와 귀가 빨갰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김나혜가 잽싸게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문 틈으로 몸을 날렸다.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감염자들은 여전히 달려오고 있었다.
김나혜가 커다란 화분을 끙끙대며 문 앞으로 밀었다. 오하은은 발목이 아파 움직이지 못하는 대신 팔을 뻗었다. 김나혜가 힘이 모자라 못 들고 있던 화분을 번쩍 들어 옮겨 주었다. 마지막으로 선배가 금속으로 된 도서관 이용 안내 표지판을 발로 뻥 차서 문 앞에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정문 앞에 어설픈 바리케이드가 생겨났다.
쿵! 콰앙! 두꺼운 문에 그들이 연달아 몸을 부딪쳤다. 문 전체가 들썩였다. 그들은 우리를 노려보며 유리를 벅벅 긁어 댔다.
“후문으로 오신다고 해서 그쪽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낯선 사람들만 잔뜩 뛰어나오고 선배들은 안 보여서……. 뭔가 일이 잘못됐구나 싶어서 여기로 돌아왔어요. 후문 아니면 여기밖에 없잖아요.”
“…….”
“저 좀비들, 우리가 시야에 보이는 한 계속 저럴 거예요. 빨리 가요.”
김나혜가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았다는 말 한 마디를 할 기운조차 없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김나혜가 나를 훑어보았다. 곧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헉, 서, 선배. 호현 선배…….”
내 다리가 대체 어떤 꼴이 됐기에 저러는 거지.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면 더 아플까 봐 일부러 안 보고 있었다. 선배도 그렇고 김나혜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안 보길 잘한 것 같았다.
“너 괜찮아?”
제 발목을 다치고도 의연하던 오하은마저 나를 보더니 표정을 싹 굳혔다.
“괜찮긴. 딱 나가 뒈지기 일보 직전인데.”
선배가 잔뜩 날을 세우고 빈정거렸다. 오하은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도서관을 뒤로하고 허겁지겁 달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무작정 뛰었다. 선배가 나를, 김나혜가 오하은을 부축했다. 눈이 쏟아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꾸 발이 눈에 푹푹 빠졌다. 멀리는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때마침 앞에 은행 ATM 부스가 보였다.
근처 가장 가까운 건물까지 가려면 수백 미터를 더 가야 했다. 이 순간도 눈발은 점점 거세어졌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부스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벽면에 나란히 설치된 ATM 기기 여러 대가 우리를 반겼다.
- 어서 오십시오. 시각 장애인이시면 갖고 계신 이어폰을 기기의 오른쪽 중앙에…….
위기감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안내 문구가 흘러나왔다. 등 뒤에서 덜컥 문이 닫혔다. 선배가 한 팔로 나를 받친 채 손을 뻗어 문을 잠갔다. 그 짧은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그의 까만 머리칼 위에 눈송이가 몇 개 붙어 있었다.
“하아, 헉…….”
무사히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벽에 기대어 주르르 미끄러졌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서 있을 기운이 없어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헉헉대는 숨소리 외에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저, 이거요.”
부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숨을 고르던 김나혜가 비척비척 일어섰다. 그녀는 메고 있던 커다란 백팩을 열어 안을 뒤적였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까 5층에서 가져온 거예요. 선배 다치셨잖아요. 빨리 쓰세요.”
생수와 이온 음료, 깨끗한 수건, 여행용 세면도구 세트. 내 앞에 온갖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처음 그녀를 구해 줬을 때도 소지품이란 소지품은 다 꺼내 주려 해서 당황스러웠는데.
“아, 맞다. 잠깐만. 나도 붕대 남은 거 있어. 과자도 몇 개 가져왔고.”
오하은도 다급하게 붕대 뭉치를 내놓았다. 나는 통증과 어지러움에 시달리며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그냥, 다 이상했다.
선배는 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나를 악착같이 데리고 나왔을까. 저 애들은 왜 자기가 목숨 걸고 어렵게 얻은 물건을 내놓으려 하는 걸까. 내가 피를 흘리든 말든, 쓰러져 있든 말든 놔두고 가면 그만일 텐데.
“여기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모두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다친 곳을 내려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후드 티와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나는 아까 5층에서 무작정 쑤셔 넣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타박상에 바르는 연고, 해열제와 진통제, 소화제 같은 상비약들, 반창고와 거즈, 그리고 소독약.
다행이었다. 아까 몸싸움을 벌이며 흘리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5층에 들어가자마자 구급상자부터 뒤진 보람이 있었다.
“와.”
오하은이 짤막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중앙 도서관에 오기 전부터 의약품을 찾고 있었으니 기쁠 만도 했다. 선배가 입고 있던 외투 지퍼를 쭉 내렸다. 툭, 투둑. 안에서 뭔가 떨어졌다. 반찬이 든 작은 통조림들과 인스턴트 죽이었다.
“오다 주웠어.”
그는 지퍼를 도로 끌어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와.”
이번엔 우리 모두가 감탄했다.
* * *
“선배들 기다리는 동안 언니랑 저랑 의논해 봤는데요, 학생회관에 가 볼까 해요.”
물자 분배가 대충 끝나자 김나혜가 말을 꺼냈다. 오하은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둘 다 일행을 잃었으니 함께 행동하기로 한 것 같았다.
“일단 거긴 보건실도 있잖아요. 지금까지 약이 남아 있을진 모르겠지만. 잘하면 여학생 휴게실에서 담요나 전기 매트도 구할 수 있을 거고요. 동아리방 뒤져 보면 생필품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웬만하면 거기 그냥 계속 있으려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건 역시 너무 위험해.”
“맞아요. 눈도 점점 더 많이 오는 것 같은데……. 아시잖아요. 우리 학교 산골짜기라서 눈 한번 오면 무시무시하게 오는 거.”
왜 모르겠는가. 우리 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폭설 때문에 셔틀버스 운행이 정지되고, 교수님들이 제때 출근하지 못해 긴급 휴강을 하기 일쑤였다. 안 그래도 캠퍼스에 비탈길이 많은데 눈까지 오면 더 가관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미끄러져 다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안전한 환경에서 최대한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해결되지 않을까? 경찰이 구하러 오든, 밖에 좀비들 다 얼어 죽든 간에.”
“선배들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학관 가는 거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가실래요?”
질문의 화살이 우리에게 날아왔다.
“나는…….”
여기서 학생회관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평소에도 걸어서 5분쯤 걸렸다. 그러니 지금은 훨씬 오래 걸릴 터였다. 언제 감염자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인 데다 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다리도 다쳤으니. 내가 미적대는 만큼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에 처하겠지.
“선배는 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말고요.”
“뭐?”
선배가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서늘한 눈이 나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입 안이 말랐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지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저는, 그러니까……. 혼자 있어도 돼요. 그냥, 여기 혼자 있을게요.”
“…….”
“솔직히 저 짐만 되잖아요. 데리고 다녀서 좋을 거 없잖아요, 이 꼴이 됐는데. 지금까지 선배한테 도움받은 것만 해도 너무 고마워요. 고마운데, 더 이상은 못 그러겠어요. 미안해서…….”
힘겹게 말을 잇다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나중에 여유 생기시면요……. 나중에요. 그때 저 데리러 와 주세요.”
눈앞이 흐렸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김나혜가 작게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있잖아, 후배님. 그거 알아?”
길지 않은 침묵 끝에 선배가 조용히 물었다.
“후배님한텐 사람 기분을 개좆같이 만드는 재주가 있어.”
선배가 살짝 웃었다. 서늘하게 트인 눈매가 휘어졌다. 웃었는데 분위기가 풀리기는커녕 더욱 살벌하게 얼어붙었다.
“열이 안 내려서 머리까지 돌았나, 별 등신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혼자 있을 수 있긴 개뿔이.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게. 혼자 웅크려서 질질 짜다가 뒈지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하지만.”
“정호현, 너.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해 봐. 한 번만 더…….”
그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확 돌려 김나혜와 오하은 쪽을 향해 흉흉하게 못을 박았다.
“가든 말든 알아서 해. 꺼져.”
선배의 폭언에 말을 잃고 입만 벙긋거리던 오하은이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네……. 알겠어요. 그런데 호현이 상처는요?”
김나혜도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쓱 훔치며 끼어들었다.
“소독하고 붕대 감는 것만 도와 드리고 갈게요.”
“필요 없어.”
“혼자서 하기 힘드시잖아요. 그것만 같이해요.”
선배는 소독약과 붕대를 집어 자신의 앞에 놓고 내게 손을 뻗었다. 철컥.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 바지 단추가 풀렸다.
“뭘 봐. 안 꺼져?”
그가 지퍼에 손을 대며 툭 쏘아붙였다. 찌익.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아.”
김나혜와 오하은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굳어 버렸다. 그들의 얼굴이 뒤늦게 달아올랐다. 김나혜가 터질 듯 빨개진 얼굴로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 그, 그게. 어, 네. 호현 선배 잘 부탁드려요. 두 분 다 꼭 무사하세요!”
그들은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네 명 중 두 명이 떠났는데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선배가 내 바지를 천천히 끌어 내렸다. 다친 허벅지에 천이 쓸렸다. 눈물 나게 아팠다.
“윽!”
그는 바지를 한쪽 종아리에 걸릴 때까지 벗겨 놓고 소독약 뚜껑을 열었다. 의료용 솜을 약으로 잔뜩 적셨다.
“숨 참고 이 꽉 깨물어.”
아파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 말이 귓가에 들렸다. 한 대 갈기기라도 하려는 걸까, 엉뚱하게도 그 생각부터 들었다. 다음 순간 선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상처에 소독약이 듬뿍 묻었다. 순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이 터졌다. 찢어진 살에 칼날을 넣어 통째로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흐으, 아…… 아윽!”
다시금 솜이 닿았다. 나는 고개를 확 젖히고 미친 듯이 도리질했다. 목과 턱이 덜덜 떨렸다.
내가 이제껏 살면서 입은 상처라 해 봤자 별것 없었다. 몸싸움을 하다 주먹에 맞아 코피가 나거나, 축구를 하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는 정도였다. 칼에 베인 상처는 그런 것과 차원이 달랐다. 종이나 과도에 손가락을 베였을 때보다 딱 5천 배 정도 아팠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앞에 별이 보였다.
“가만히 있어.”
다시 무자비한 아픔이 다친 곳을 할퀴었다. 허리가 퍽 튀었다. 저절로 몸이 들썩였다.
“좀 참아. 뒈지는 것보다는 덜 아플 테니까.”
선배는 내 다리를 꽉 잡아 눌러 고정했다. 내가 흐느끼며 몸부림칠 때마다 맨허벅지를 틀어쥔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너무도 야속했다. 갈 곳을 잃은 손이 움찔 경련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도록 힘껏 주먹을 쥐었다 펴고, 바닥을 할퀴었다. 힘없이 늘어진 발끝이 발작적으로 이리저리 뒤틀렸다.
“흐윽, 선배, 제발……. 아프, 너무, 아파요…….”
생리적인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흐으, 흑, 하고 흐느끼는 것 같은 신음이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샜다. 소독에만 집중하던 선배가 문득 멈추었다. 그의 손에 피범벅이 된 솜이 들려 있었다. 그의 손도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프긴 아픈가 봐? 혼자 있어도 괜찮니 어쩌니 개소리 찍찍 하더니. 그러게 왜 쓸데없는 말을 했어. 이렇게 몸도 못 가누고 울 거면서.”
“…….”
“우리 호현이, 다음에 또 그럴 거예요? 응?”
선배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물었다. 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씨발, 대답 안 하지? 그딴 소리 또 하기만 해 봐. 상처에 소독약 병째로 처박아서 다 부어 버릴…… 아니, 내 손으로 네 다리 아예 잘라 버릴 거니까.”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팔을 필사적으로 뻗었다. 사실 선배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냥 다친 곳이 너무 아팠고, 너무 서럽고 괴로웠다. 꼴사납게 후들거리는 팔이 그의 목에 감겼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겪은 사람처럼 굳었다. 그러다 이내 작게 한숨을 쉬고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그는 한 팔로 나를 감싸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나는 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상처를 소독하고 피를 닦고 붕대를 감는 과정 내내 비명을 억눌러 삼켰다. 잔인할 정도로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선배의 손이 내 허벅지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저릿저릿 울리는 통증이 두꺼운 붕대 아래 둔하게 흐려졌다.
드디어 끝났다. 선배를 안은 팔이 스르르 풀렸다. 나는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등이 차가운 바닥에 닿는 순간 선배가 와락 달려들었다. 피를 완전히 닦아 내지 않은 손으로 뺨을 감싸고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가파른 숨결이 우리의 입술 사이에서 반 토막이 났다. 내 몸에서 흘렀을 피 냄새가 소독약 냄새와 섞여 공기 중에 진동했다.
“흡, 으응……!”
젖은 입술이 간신히 떨어졌다. 그는 내 턱을 고쳐 쥐었다.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각도를 바꾸어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의 혀가 벌어진 입술 사이를 쑥 뚫고 들어왔다. 벌어진 속살이 질척하게 문질러졌다. 그저 키스일 뿐인데 몸 안에 성기를 밀어 넣는 것만큼이나 음란했다.
“흐읏.”
그는 내 다친 쪽 허벅지를 잡아 활짝 벌려 놓고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의도겠지만 자세가 자세이니만큼 몹시도 야하게 느껴졌다. 속옷만 입은 내 사타구니에 그의 체중이 실려 지그시 눌렸다.
입 안을 헤집는 혀에 내 혀를 본능적으로 마주 얽었다. 젖은 살을 핥고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허공을 더듬던 손이 그의 어깨에 어설프게 얹혔다. 그가 내 손을 확 그러쥐어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했다.
조금 망설이다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입술을 겹친 채 열 오른 한숨을 쉬었다. 허리를 지그시 놀려 묵직해진 하체끼리 비볐다. 옷 위로 문질렀을 뿐인데도 자극적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아, 아, 하고 짧은 신음이 흘렀다.
“하아, 헉, 허억…….”
키스가 끝났을 때는 우리 둘 다 전력질주를 한 사람처럼 숨이 턱 끝까지 차 있었다. 선배가 가만히 이마를 맞대 왔다. 코끝이 살짝 맞닿고 윗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젖은 아랫입술을 습관적으로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그가 앞니에 눌린 입술을 엄지로 꾹 눌러 도로 빼냈다.
“이젠 나 보기도 싫어? 좆같아서 눈도 못 마주치겠어?”
“선배, 왜 그런 말을…….”
말하다 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바로 위에서 나를 빤히 들여다보며 집요하게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선배 볼 낯이 없어서……. 매번 선배가 절 구해 주시고, 전 도움을 받기만 하니까요.”
“아니. 그 반대야.”
“네?”
“네가, 정호현이 매번 나를 구했지. 쓸데없이 착해 빠져 가지고……. 그렇게 싫어하는 날.”
그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문장만큼은 이해했다.
“저 선배 싫어한 적 없어요. 처음부터 한순간도.”
“거짓말.”
그가 서슴없이 받아쳤다. 나도 그에 지지 않고 곧장 반박했다.
“진짜예요.”
“거짓말이야. 네가 어떻게 나를 안 싫어해? 나는 너한테…….”
그가 말하다 말고 뚝 굳었다. 나를 멍하니 응시하는 검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알고리즘이 충돌해서 고장 나 버린 기계 같았다. 저번에도 저런 적이 몇 번 있었다.
김나혜와 오하은의 말대로 학생회관에 가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학생회관까지 가려면 산 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출구에서부터 오히려 멀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눈발은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학생회관은 산기슭 바로 아래라 곧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눈이 쌓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언제 올지 모르는 구조를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 샤워실에 있을 때 박건우가 그런 말을 했다. 정문까지 가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도중에 좀비들에게 잡힐 게 뻔하다고. 우린 여기 갇혀 다 죽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는 기숙사를 벗어나 중앙 도서관까지 왔다. 우리는 이미 안락한 칩거와 위험한 돌파 중 후자를 택했다. 실낱같을지언정 가능성이 트였다. 도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는 선배는 항상 일상보다는 비일상에 가까웠다. 선뜻 손에 피를 묻혔고, 한때 사람이었던 것의 몸을 능숙하게 토막 냈다. 뜻 모를 말을 퍼부으며 혼자 화를 내다가 갑자기 지레 포기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기도 했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사는 그를 보고 싶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기 대신 스마트폰과 가방을 들고, 생존과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는 대신 오늘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카페에서 과제를 하고, 오후 수업을 듣다 책상에 팔을 괴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세상의 수많은 학생들처럼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선배를 만나고 싶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충동적으로 불쑥 입을 열었다.
“선배, 저번에 그러셨죠. 제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고.”
“…….”
“그럼 지금부터 제가 하는 제안 따라 주실 수 있어요?”
내 뺨을 감싼 선배의 손을 더듬어 찾았다.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쳐 꽉 쥐었다.
“정문으로 가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한 음절 한 음절 또렷하게 선언했다.
“우리는 여기서 나갈 거예요. 구조되기만 마냥 기다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탈출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둘 다 무사히 살아남아서. 제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 선배가 기억해 주세요.”
그는 나를 응시했다. 침묵 속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서로의 눈에 비친 서로를 바라보며, 만족할 때까지 의심하고 갈구하고 질문하고 해답을 찾았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길고 검은 속눈썹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그는 무어라 말할 듯 입술을 작게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우리에게 목표가 생겼다.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