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목표 (상) (3/12)

3. 목표 (상)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내 위에 덮인 것이 부스럭거렸다. 낯선 향이 흘러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내가 뭘 덮고 있는 거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내 몸에 큼직한 검은 옷이 덮여 있었다. 선배의 겉옷이었다.

“선배?”

무심코 그를 불렀다 제풀에 놀랐다. 목이 끔찍하게 쉬어 있었다. 순간 내 목소리가 아닌 줄 알았다. 자갈을 한 대접쯤 삼킨 사람 같았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 작은 동작으로도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파서 무심결에 이를 악물었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고개를 간신히 움직여 사방을 둘러보아도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때도 그랬다. 그는 주변을 살피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혼자 훌쩍 사라졌다 불시에 돌아왔다. 오다 주웠다는 말과 함께 찾아온 물건을 불쑥 내밀기도 했다. 아마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그제야 주위를 살펴볼 정신이 들었다. 긴 책상 하나와 바퀴 달린 의자 대여섯 개가 겨우 들어가는 작은 방, 벽 한 면을 메운 커다란 모니터. 새하얀 조명이 눈을 찔렀다.

중앙 도서관에 있는 소형 스터디룸이었다. 학생들이 조별 과제나 동아리 활동을 할 때 빌리는. 방이 크지 않아서 의자들을 구석에 죄다 몰아넣어 놨는데도 한두 사람 누울 공간만 겨우 나왔다. 그래도 한기가 풀풀 날리는 카페보다는 여기가 훨씬 나았다.

나는 이제껏 혼자 스터디룸 바닥에 누워 자고 있었다. 내가 뭘 하다가 잠들었더라. 어두컴컴하고 싸늘한 카페에 주저앉아 있던 건 기억한다.

휘날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기숙사에서부터 도망쳐 온지라 옷과 머리카락에 군데군데 눈이 묻어 있었다. 눈이 녹아 물이 되면서 몸이 차갑게 식었다. 너무 추웠다. 오한이 들어 자꾸만 몸이 부르르 떨리는데, 정작 나는 내가 떨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선배가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던 것 같다. 아직 난방이 들어오는 도서관 안쪽으로. 나는 거의 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비틀비틀 올랐다. 그 뒤로는…….

“윽…….”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마를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마와 앞머리가 식은땀으로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목이 말랐다. 그러고 보니 물을 마신 지 한참 지났다. 기숙사 열람실을 나서기 전에 목을 축인 게 마지막이었다. 갈증은 인식하는 순간 더욱 심해졌다. 입천장과 식도가 버석버석하게 말랐다.

“콜록! 콜록, 콜록.”

마른기침이 터졌다.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차갑고 맑은 물이 몹시도 간절했다. 선배가 어디에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왜 내가 그의 옷을 덮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물을 좀 구해 와야 할 것 같았다. 선배도 마실 수 있도록 넉넉하게. 드러누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만 하염없이 기다리기엔 좀 양심이 찔렸다.

그의 겉옷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일어섰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다시 돌아왔다. 천장과 벽이 울렁거렸다.

“헉, 하아.”

불안정한 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중앙 도서관 2층에는 스터디룸 여러 개가 모여 있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작은 방들이 숫자 번호판을 달고 늘어섰다. 건너편에 얼핏 국외 자료실 표지판이 보였다.

층마다 설치되어 있는 정수기에 생각이 미쳤다. 바로 요 앞이라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한 도서관을 가로질렀다. 바닥 전체에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도서 검색용 컴퓨터 앞에 놓인 의자가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벽 쪽에 놓인 공용 프린터에선 절전 모드임을 알리는 빨간 불빛이 깜빡였다. 항상 학생들로 붐비던 장소가 한적해지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문을 열고 나와 조심스럽게 복도를 걸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내부와 달리 복도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래도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때문에 어둡지는 않았다. 여기서 모퉁이를 돌면 정면에 정수기가 보일 터였다. 그런데…….

“아니, 왜 이래요. 알 만한 분이.”

“아저씨, 노망났어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이고 벽에 바짝 붙었다.

“흐으……. 제발.”

“제발이고 나발이고. 그러게 누가 멋대로 먹을 거 훔치래.”

소리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들렸다. 이 정도면 내 존재가 곧장 발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은 사태를 파악해야 했다. 모서리 너머로 바깥을 슬쩍 내다보았다. 화장실 앞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섰다. 화장실 불빛과 푸르스름한 비상구 조명에 그들의 모습이 스산하게 비쳤다. 좀비가 아닌 사람인 게 확실했다. 험악한 어조로 윽박지르고 있었으니까.

“아오, 씨. 재수 없게.”

누군가 발길질을 했다. 바닥에 웅크려 떨던 사람이 신음을 토하며 나뒹굴었다. 익숙한 갈색 근무복이 보였다. 학교에서 일하는 청소 노동자들이 입는 유니폼이었다.

“저기요. 양심 좀 챙깁시다. 이 상황에 나잇살 처먹고 젊은 학생들 식량 뺏고 싶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어.”

“그건 우리 알 바 아니고요. 아저씨는 알아서 살길 찾으셔야지.”

“학생들이 먹을 걸 독차지하고 안 내주니까…….”

그는 60대쯤으로 보였다. 체격이 건장한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한층 왜소해 보였다.

“말대꾸 존나 하네. 우리 등록금으로 월급 받아먹고 살아서 뭘 좀 착각하나 본데. 아저씨 밥까지 우리가 책임져 줘야 되나?”

“미안해. 학생들, 내가 미안해. 이거 하나만, 딱 하나만 먹으면 안 될까? 응?”

그가 체면도 잊고 바닥에 웅크려 싹싹 빌었다. 그의 옆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에너지 바였다. 비닐 포장지가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다시금 무자비한 발길질이 꽂혔다. 남자는 옆구리를 정통으로 차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움찔움찔 경련했다. 그러면서도 팔을 뻗어 어떻게든 에너지 바를 쥐려 애썼다.

“와, 이 아저씨 독하네.”

“별 거지 같은 게.”

“헉. 악, 어억!”

폭력이 점점 강도를 더해 갔다. 저항조차 못 하고 웅크린 상대의 명치를 마구 짓밟고 걷어찼다. 누군가가 야구 방망이로 남자의 머리를 연달아 내려쳤다. 유니폼을 입은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바르작거리던 자세 그대로 축 늘어졌다.

“…….”

내가 방금 뭘 본 건지 곧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몽롱하던 의식이 날카로워졌다. 하도 주먹을 세게 쥐어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남자가 움직이지 않게 된 후에도 사람들은 곧바로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뒤늦게 폭력이 멎었다.

“뭐야. 죽었어? 죽었나?”

“헐.”

“미친 새끼야, 힘 조절 좀 해라. 저번에도 그러다 청소 아줌마 하나 골로 보냈잖아.”

“몰라. 저러다 어디 가서 물려 오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니까. 사람일 때 미리 죽여 놔야지.”

“저 아저씨도 고마워할걸? 좀비 되기 전에 인간답게 죽게 해 줬다고.”

“캬. 존엄사 지렸다.”

“하여간 좀비보다 사람이 더 지랄이다.”

“왜?”

“적어도 좀비는 기껏 모아 놓은 식량 훔쳐 먹지는 않잖아. 쓸데없이 헛소리 지껄이지도 않고.”

“그러네. 시발, 논리적인 새끼.”

나는 벽에 기대선 채 그들이 저속하게 떠드는 것을 고스란히 들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쓰러진 남자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이를 악물었다. 뜨거운 숨이 기도로 되넘어갔다.

들끓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저들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피해야 했다. 그때 갑자기 어지럼증이 일었다. 눈앞이 아찔해서 작게 비틀거렸다. 툭. 신발 밑창이 바닥에 부딪쳤다. 수군대는 소리가 일제히 뚝 멎었다.

“누구야?”

정신이 확 들었다. 목 뒤쪽부터 등허리까지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워졌다. 모퉁이 너머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다시 자료실과 스터디룸이 있는 쪽으로 들어가야 하나? 하지만 그곳은 밀폐된 공간이었다. 내가 저 안에 숨어 봤자 저들이 입구를 봉쇄하고 안을 샅샅이 수색하면 금방 들킬 터였다.

계단을 통해 다른 층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비상구는 저 사람들의 등 뒤에 있었다. 복도 반대쪽 끝에도 계단이 있을 테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엄폐물 없이 환히 트인 복도를 한참 걸어야 했다.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오갔다. 몇 개의 가설들이 빠르게 세워지고 기각되었다. 그 와중에도 저들은 나를 찾으려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토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잡아 족쳤는데 아직도 남은 놈이 있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대가 킬킬 웃었다. 나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맞붙어 싸워야 할까. 싸워서 과연 몇 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도 저 남자와 같은 꼴이 되는 건 아닐까.

“…….”

모퉁이 너머로 사람 그림자가 일렁였다. 한 손에 야구 방망이를 든 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막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는 순간, 모든 조명이 동시에 나갔다. 사방이 암흑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미친. 불 나갔어?”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자 그들이 당황했다. 나 또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밖에 내린 눈 때문에 잠깐 정전된 걸까, 아니면 전화와 인터넷에 이어 드디어 전기 공급마저 중단된 걸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는 기회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내가 서 있던 자리 옆에는 쓰레기통이 있었다. 사람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큼직한 파란색 플라스틱 통에 까만색 비닐 봉투를 씌워 놓은, 흔히 볼 수 있는 쓰레기통이었다.

곧 손끝에 바스락대는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쓰레기통을 확 밀어 넘어뜨렸다. 텅, 타당! 쓰레기통이 요란하게 복도에 뒹굴었다. 안에 있던 것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으악!”

쿵! 듣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상대가 쓰레기통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었다. 그냥 진로를 막아 잠깐이라도 시간을 끌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화려하게 자빠져 주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어떤 새끼야!”

암흑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저들도 나도 똑같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번 해 볼 만했다.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잡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팔을 뻗어 벽을 짚었다. 오로지 손끝의 감각에만 집중해서 복도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증오 어린 욕설이 들렸다. 나를 뒤쫓는 여러 쌍의 발소리도.

벽이 끝나는 자리에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미친 듯이 문을 더듬었다.

“어디 있어?”

“누구든 잡으면 놓치지 마.”

어깨 너머로 두런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잡힐 터였다. 벌벌 떨리는 손에 손잡이가 잡히자마자 확 열어젖히고 뛰어 들어갔다.

“야, 저 새끼 계단으로 갔어!”

그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묵직한 문이 닫혔다. 어둠을 뚫고 무작정 달려든 탓에 난간 모서리에 옆구리를 세게 찍혔다.

“큭…….”

한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모르긴 몰라도 나중에 옷을 들춰 보면 화려하게 멍이 들어 있지 않을까.

나는 난간에 의지하여 계단을 올랐다. 시야가 어둠에 천천히 적응했다. 어슴푸레하게 계단과 난간의 윤곽이 드러났다. 반 층쯤 올라갔을 때 아래에서 문이 열렸다.

“악, 미친! 발 밟지 말라고.”

“누구야? 방금 나 밀친 거.”

“짜증 나게 하네, 진짜.”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투덜거렸다. 그들이 고작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곧바로 한 층 위에 있는 복도로 나갔다. 유리문을 몸 전체로 밀어 열고 들어갔다. 사방이 환하게 밝을 때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무작정 추격전을 벌이는 것보다 조용히 숨어 있는 게 유리했다.

몇 발짝 걸어 들어왔을 때쯤 형광등이 몇 번 깜빡거리더니 불이 다시 들어왔다. 갑자기 사방이 밝아지자 무심결에 인상을 썼다. 곧 시커멓게만 보이던 실내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 도서관 3층에는 ‘시체존’이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었다. 물론 정식 명칭은 그럴듯하게 따로 있고, 그냥 학생들끼리 부르는 별칭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3층 구석에는 소파가 많았다. 원래는 편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일 테지만, 학생들은 소파를 다른 목적으로 애용했다. 3층에 가면 소파마다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은 채 죽은 듯이 뻗어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시체존이었다.

그런데 그 시체존에 진짜 시체가 있었다.

여기저기에 축 늘어진 육신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다. 쓰레기 처리장에 내던져 놓은 쓰레기들처럼.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뒤섞였다. 아까 그 남자가 입었던 것과 같은 유니폼 차림의 중년 여성이 눈에 띄었다. 몇몇 사람들의 목에 교직원증이 걸린 게 보였다.

“끄으…… 으…….”

그중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의식은 없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가늘게 신음할 뿐이었다. 나는 멍하게 그쪽을 보았다.

그의 하반신에 좀비가 들러붙어 있었다. 한참 다리를 붙잡고 식사에 열중하던 중이었다. 시뻘겋게 드러난 살점을 다 파먹어 정강이뼈가 드러났다. 갉작갉작 앞니로 뼈를 긁는 소리가 났다.

“우욱.”

눈앞이 핑핑 돌았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것이 내 기척을 감지하고 느릿느릿 일어섰다. 입가에 온통 벌겋게 피가 묻어 있었다. 썩은 생선 같은 눈알이 뒤룩뒤룩 굴러 나를 향했다.

뒤돌아 달렸다. 줄지어 놓인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린 두꺼운 카펫이 내 발소리를 가려 주었다. 내친김에 등 뒤의 책장에 꽂힌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밀어 떨어뜨렸다. 놈은 책이 와르르 떨어지는 소리에 반응하여 그리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그러다 무더기로 쌓인 하드커버 전공 서적을 밟고 비틀거렸다.

코와 입을 막고 숨을 죽인 채 구석에 숨었다. 어지러워 똑바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힘이 빠지는 몸을 간신히 추슬렀다. 책장 사이로 괴물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어깨 관절이 빠지고 다리가 으스러진 채로도 꾸역꾸역 움직였다. 둔한 시각 대신 후각과 청각에 의존하여 나를 찾았다.

자꾸만 가빠지는 숨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입 안쪽 살을 깨물며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부패한 시신에서 나는 악취가 진동했다. 이제 곧 들키겠다 싶은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분명히 이리로 갔는데.”

사람들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들은 곧 책장 근처를 배회하는 좀비를 발견했다.

“뭐야. 이 새끼였어? 난 또, 시발.”

야구 방망이를 든 사람이 다짜고짜 그것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다른 사람들 또한 기다렸다는 듯 동조했다. 좀비는 하나였고 사람은 다섯 명이 넘었다. 일방적인 공격이 계속되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갖고 있던 맥가이버 나이프를 치켜들었다. 목을 연거푸 내려찍어 마무리를 지었다.

“시체는 밖에 내다 버리자니까. 저기 놔두니까 계속 좀비 꼬이잖아.”

“여기서 누구 시체 질질 끌고 밖에까지 갔다 올 사람? 누가 할래. 네가 할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숨을 제대로 끊든가. 죽은 사람은 안 먹으니까.”

“좀비 새끼들, 꼴에 입맛은 고급이야.”

그들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멀어져 갔다.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온몸이 그새 뻣뻣하게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아까부터 느꼈던 위화감이 구체화되었다.

사태가 발발했을 때 중앙 도서관은 아마도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장소 중 하나였을 것이다. 모임이나 시험공부, 도서 대출 등의 사유로 방학 중에도 도서관을 찾는 학생들이 많았다. 하도 캠퍼스가 넓다 보니 여기를 만남의 장소로 잡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생존자들이 아예 중앙 도서관을 대피소로 만들어 바글바글 모여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런데 이제껏 돌아다니는 동안 이상할 정도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마주친 산 사람들이라곤 저들이 전부였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다른 생존자들을 수없이 죽였다. 식량을 저들끼리 독점하려고. 좀비들을 죽일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죄책감 없이 때려죽이고, 폐기물 버리듯 시체존에 내던져 놓은 것이다.

문득 열람실에서 만난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거기는……. 사람이 제일 무서웠어요.〉

이제 그 말이 이해가 갔다.

* * *

바깥의 동정을 살피다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한 후에 움직였다. 그 탓에 2층으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스터디룸 앞까지 가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선배가 문에 기대앉아 있었다. 내가 놔두고 간 겉옷을 한 손에 들고, 정작 자신은 검은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선배.”

그가 앉은 자세 그대로 눈만 확 치켜떠 나를 보았다. 새까만 삼백안이 나를 형형하게 쏘아보았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내 팔목을 잡아 뽑을 듯 거칠게 움켜쥐었다.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정호현, 너 진짜 뒈질래?”

“네?”

“씨발.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지? 그럴 거면 나한테 말하라니까. 내가 죽여 줄 테니까. 왜 괜히 멀리까지 나가서 지랄을 해.”

그가 이를 악물고 나지막이 쏘아붙였다. 나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선배, 그런 거 아니에요. 물……. 헉, 물 찾으러 갔었어요…….”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바닥이 가까워졌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의 팔에 걸쳐지다시피 하여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하아, 헉. 쿨럭!”

그 와중에 기침이 터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에게 기댄 채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선배가 기가 찬다는 듯 빈정거렸다.

“이 꼴을 하고 어딜 기어 나가. 참 가지가지 한다, 그렇지?”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놀랄 만큼 차가웠다. 얼음장 같았다.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선배……. 손이 너무 차요.”

“네가 뜨거운 거야.”

“…….”

“알아? 너, 하루 넘게 못 일어났어.”

몽롱한 정신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그랬었나. 전혀 몰랐다. 그냥 푹 자고 일어난 기억밖에 없었다.

선배는 무자비한 손길로 나를 붙잡아 스터디룸 안에 처넣었다. 나는 무력하게 질질 끌려갔다. 스터디룸 책상 위에 못 보던 물건이 있었다. 작은 페트병에 담긴 꿀물 한 병과 물에 적신 수건이었다. 이제 선배가 왜 자리를 비웠는지 알 것 같았다. 눈시울이 뜨끈뜨끈해졌다.

“마시고 싶어?”

“네.”

순순히 대답했다. 마음 같아선 꿀물이 아니라 수돗물, 아니, 빗물을 마시래도 기쁘게 받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세요, 해. 그럼 줄게.”

“……주세요.”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가 시킨 대로 했다. 하지만 선배는 내게 꿀물을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가 샐쭉하게 웃으며 요구했다.

“따라 해 봐. 자기야, 꿀물 주세요.”

뭐라는 거야. 미친. 아파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욕이 나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 끝에, 안 올라가는 입매를 억지로 올려 최대한 무해하게 웃었다.

“자…… 기야.”

자기는 무슨. 도자기도 아니고. 이가 빠득빠득 갈리려는 걸 겨우 참았다.

“꿀물 주세요…….”

선배가 작게 한숨을 쉬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내게 꿀물을 건넸다.

“넌 예쁜 짓을 너무 잘해. 영악해선.”

“…….”

“뭘 또 쫄아, 쫄긴. 네 겁먹은 얼굴 보니까 설 뻔했잖아.”

이젠 선배의 언행에 일일이 경악할 힘도 없었다. 뚜껑을 열고 꿀물을 마셨다. 식도를 따라 달콤한 액체가 흘러 들어갔다. 살 것 같았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혼자서 벌컥벌컥 한 병을 다 비울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았다. 절반 넘게 남은 꿀물 병을 도로 내밀었다. 선배는 망설임 없이 받아 들어 병 입구에 입을 대고 마셨다.

입술에 단맛이 감돌았다. 평소엔 단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혀로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선배가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고개를 살짝 틀어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에서도 꿀물 향이 났다.

“하지 마세요. 감기 옮아요.”

뜨거운 숨을 내쉬며 그를 밀어냈다. 그는 가만히 인상을 썼다. 그다지 험상궂은 인상도 아닌데, 오히려 서늘하게 잘생긴 편인데. 왜 이렇게 무서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후배님. 맞을래요, 가만히 있을래요.”

“가만히 있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 나갔다. 내가 생각해도 몹시 비굴했다. 선배는 빙긋 웃고 다시 키스했다. 단내가 나는 입술을 헤집고 들어와 입 안의 여린 살을 살짝살짝 긁었다.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고 다시 맞대어 문질렀다. 뺨을 감싼 그의 손이 차가워서 오싹할 정도로 좋았다. 나를 괴롭히던 열이 조금 가라앉았다. 너무 좋아서 목 안에서부터 앓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선배가 손가락을 쭉 펴더니 아래에서부터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손마디끼리 단단히 얽혔다. 동성과, 그것도 크고 무섭게 생긴 연상의 선배와 키스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꺼림칙하거나 싫지 않았다. 펄펄 끓는 열 때문에 이성이 흐려져서일까. 그냥 시원하고 달콤해서 더 해 줬으면 하는 생각만 들었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잊고 있던 기침이 올라왔다. 나는 선배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옷소매로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했다. 이미 혀를 잔뜩 섞고 입술을 빨아 대서 감기가 옮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어쩌지. 네가 빌빌거리는 것까지 예뻐 보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제 일일이 경악할 힘도 없었다. 나는 힘없이 대꾸했다.

“기왕이면 잘생겼다고 해 주실래요.”

“하기야. 넌 다 죽어 가는 것도 예쁘니까.”

선배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제 할 말만 했다. 사실 그가 나를 무시하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일일이 화내다간 내가 내 명에 못 살 것 같았다.

앞의 말이 달랐다면 나름대로 로맨틱한 멘트였을지도 모르겠다. ‘넌 자다 일어나도 예뻐.’나 ‘넌 입가에 뭐 묻히고 먹어도 예뻐.’ 같은 거. 그런데 가정한 상황이 저렇게 살벌해서야. 선배에게 넘어오려던 사람도 모조리 도망갈 판이었다.

“보신 적 있나 봐요. 제가 죽어 가는 거.”

“…….”

대수롭지 않게 툭 던졌다. 하지만 그 순간 선배가 우뚝 굳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는 잘 만든 인형처럼 섬뜩한 무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농담이었어요.”

침묵 끝에 간신히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 * *

하루가 지나자 증세가 더 심해졌다. 살기등등한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던 도중에 좀비까지 만났던지라 내내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격렬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 탓에 근육통이 지독하게 악화되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가슴과 옆구리가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시간이 지나도 열이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식이 토막토막 끊겼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내 꼴이 오죽했으면, 툭하면 온갖 트집을 잡아 내게 핀잔을 주던 선배조차 조용했다.

“어제도 약을 구하러 갔었어. 실패했지만.”

“…….”

“다시 갔다 올게.”

“안…… 콜록, 안 돼요.”

나는 힘겹게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목소리가 나오다 말아서, 도중에 한 번 힘겹게 목을 가다듬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어요. 곧 나을 거예요. 감기는 약 먹으면 1주일 가고 안 먹으면 7일 간다잖아요.”

“7일은 무슨. 맥도 못 추는 게. 사망까지 D-7일이겠지.”

“…….”

“퍽이나 뜻깊은 최후겠네. 지금까지 잘 버텨 놓고 고작 감기로 죽으면.”

환자를 앞에 두고도 저 말본새는 어디 가질 않았다.

“밖에 위험한 사람들이 있어요. 물자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요. 가지 마세요.”

선배는 말없이 고개를 까딱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일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중요한 식량도 아니고 고작 감기약 따위를 구하러 가겠다고 하는 걸까. 살인자들이 돌아다니는 바깥으로.

그는 스터디룸 벽에 기대앉은 채 드러누워 끙끙 앓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문득 생뚱맞은 물음을 던졌다.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당연한 소리를.

“네. 걱정하는 거예요.”

“왜?”

그가 재차 물었다. 빈정거리지도 비난하지도 않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위에 뜬 모든 불순물들을 걷어 내고 남은 맑은 물처럼.

“선배가 무사하길 바라니까요.”

나는 뻑뻑한 눈꺼풀을 간신히 뜨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열에 시달리며 떠오르는 대로 횡설수설했다.

“만약 제가 여기서 죽으면 그건 제가 무능해서였거나, 운이 나빴던 탓이겠죠. 좀 많이 괴롭고 슬프겠지만……. 가족들한테도 미안하겠지만. 누굴 원망하진 않을 거예요.”

“…….”

“근데 선배는 아니잖아요. 그렇게 유능하고, 또 대단하신데요. 저한테 발목 잡혀서 선배까지 당하면……. 억울할 거 아니에요. 제가 원망스러울 거고요. 그러니까 저 살리려다 선배까지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말을 마치자 침도 못 삼킬 정도로 부어오른 목이 욱신욱신 아팠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무사했으면 좋겠어?”

“…….”

“현아,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어도 되니까 너는, 너만은 꼭 살았으면 좋겠어.”

선배가 내 뺨을 가볍게 건드렸다. 차가운 것이 닿자 그나마 좀 나았다. 천근만근 같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의 손에 힘겹게 뺨을 비볐다.

“다녀올게.”

그가 조용히 일어섰다. 미처 말릴 틈새도 없었다. 그 순간.

“아, 나 진짜. 그렇다니까?”

“좀비를 착각한 거 아니고?”

“아니. 확실히 사람이야.”

밖에서 수군대는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숨을 죽였다. 그늘진 벽에 붙어 미동도 하지 않고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정적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좀비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잖아. 좀비가 비상구 문 열고 도망쳐? 발밑에 있는 것도 못 보고 자빠지는 새끼들인데, 그 지능으로? 말도 안 되지.”

“그렇긴 하네.”

밖은 환하고 스터디룸은 일부러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유리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형광등 빛이 언뜻언뜻 가려졌다. 누군가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2층에서 마주쳤으니까. 아직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

“잡으면 어쩔 건데?”

“어쩌긴 뭘 어째. 식량 훔치러 온 새끼일 거 뻔한데.”

“웬만하면 죽이지는 마라. 골치 아파.”

“아, 나도 그러기 싫다고. 근데 새끼들이 죽어도 못 간다고 버티잖아. 그 아저씨처럼.”

“하기야. 좀비나 사람이나 꼭 처맞아야 말을 듣지.”

그들은 층 전체를 뒤졌다. 그러다 스터디룸 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기 시작했다.

벌컥.

“없는데? 벌써 다른 데로 토낀 거 아냐?”

“그래도 계속 찾아봐. 혹시 모르잖아.”

벌컥.

“그 새끼 때문에 넘어져서 멍 들었잖아. 썅, 걸리기만 해 봐라. 남자면 뒈지게 쥐어 패고, 여자면.”

“여자면?”

벌컥.

“몰라. 일단 생긴 거 보고.”

그들이 낄낄 웃어 댔다. 혐오감이 확 치밀었다. 문 여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대로라면 곧 선배와 내가 있는 문까지 열릴 터였다. 상대방은 최소 세 명이었다. 여기는 두 명, 그것도 나는 한 사람 몫을 못 하는 병자였다.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마침내 우리가 있는 바로 옆방 문까지 열렸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맥박이 귓속에서 쿵쿵 울렸다. 위기가 코앞에 닥쳤는데, 선배는 벽에 바짝 붙은 채 아무 동요 없는 얼굴로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단 문이 열리자마자 선공을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 우린 아무런 무기가 없는데, 무슨 수로 공격을 한단 말인가. 운 좋게 기습에 성공해서 한 명쯤 제압한다고 해도, 그다음엔?

누군가 바깥에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유리창에 시커먼 사람 형체가 어른어른 비쳤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숨을 참았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야, 잠깐만.”

“왜?”

누군가 멀리서부터 급하게 다가왔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손잡이를 놓고 뒤돌아보았다.

“상욱이 있잖아. 지금 일어났다는데.”

“그 자식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면서. 어쩌다 그 꼴이 됐는데?”

“어제 잠깐 정전됐을 때 있잖아. 그때 화장실에 씻으러 가던 참이었는데, 누가 뒤에서 머리 때려서 기절했대. 깨 보니까 갖고 있던 음료수랑 수건 없어졌고.”

“미친.”

“좀비가 음료수랑 수건을 왜 뺏어 가. 사람 맞네. 100퍼센트네.”

우리가 있는 스터디룸 문 바로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거리가 고작 1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이럴 때가 아니다. 일단 그 화장실 쪽부터 뒤져 보자.”

“그 강도 새끼 완전 상 또라이네.”

“잡히면 진짜 뒈졌어.”

기척이 점점 멀어지다가 이윽고 완전히 사라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밖을 한껏 경계하고 있었더니 머리가 부서지는 듯 아팠다.

“저거 선배 얘기예요?”

선배가 태연자약하게 수긍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

중앙 도서관에서는 먹을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열람실과 자료실에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어서였다. 음료수를 마시려면 카페나 편의점에 가야 했고, 건물 내부에는 그 흔한 자판기조차 없었다. 층마다 있는 정수기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용케 꿀물을 구해 왔다 싶었다. 저런 방법을 썼구나.

어둠을 뚫고 소리 없이 다가와 상대방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선배를 상상해 보았다. 너무 위화감이 없어서 놀랐다. 선배가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물자를 얻어 오는 게 오히려 더 어색했다.

“비상구 문 열고 토낀 건 후배님 얘기고?”

“네…….”

이번엔 내가 인정할 차례였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렇게 남의 입을 빌려 서로의 행적에 대해 들을 줄은 몰랐다. 선배가 픽 웃었다.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하면서,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은 주제에. 그래도 도망치는 건 잘하네. 또 겁먹은 다람쥐처럼 요리조리 쪼르르 뛰어다녔지?”

겁먹은 다람쥐? 저게 건장한 20대 청년에게 할 말인가? 어이가 없다 못해 등골이 서늘해졌다. 열이 심해서 헛소리를 들은 줄 알았다.

“그래. 우리 후배님이 정신머리 빼놓고 다니고 성격도 지랄 같고 좀 덜떨어졌긴 하지만, 뭐, 괜찮아. 어쩔 수 없지. 가끔 눈 돌아가게 예쁜 짓을 하니까. 원래 예쁜 것들은 생긴 값 해.”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이 아니라, 어떻게 들어도 욕이었다. 곱상하게 생겼단 말은 들어 봤어도 예쁘다는 말은 못 들어 봤는데. 아, 우리 할머니가 날 볼 때마다 예쁜 내 새끼라고 하시긴 했다. 아무튼 평생 들을 예쁘단 말을 선배한테 다 듣는 것 같았다. 들어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어제 정전됐던 건.”

“앞으로 그런 일 자주 있을 거야. 이제까지 멀쩡하게 전기 들어오고 물 나왔던 게 용하지.”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힘없이 뜨거운 한숨을 쉬었다. 코와 입으로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내 숨결에 내가 델 것 같았다.

“장소 옮기자. 여긴 이제 위험해.”

선배가 짤막하게 선언했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의 말대로 지금이야 운 좋게 넘어갔다지만 저 사람들이 다시 오면 백발백중 들킬 터였다.

“움직일 수 있어?”

이 상황에 움직일 수 있고 없고가 어디 있는가. 못 움직일 정도로 아프더라도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 했다. 바닥을 짚은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나는 분명히 똑바로 섰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몸이 꺾였다.

“있기는 무슨. 혼자선 서지도 못하는 게.”

“…….”

“아, 엎드려서 네발로 기어가게? 굳이 사족 보행을 하고 싶은 거면 안 말리겠는데, 꼴이 존나 등신 같지 않을까?”

“그런, 읏, 그런 거 아니에요.”

그가 작게 혀를 차더니 나를 확 끌어당겨 부축했다. 그의 탄탄한 어깨에 얹힌 팔이 신장 차이 때문에 끌려 올라갔다. 나도 어디 가서 키 크다는 소리를 들으면 들었지 결코 작지는 않은데.

“헉……. 하아.”

저기요, 선배. 어깨 빠질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거라고는 불안정하게 색색대는 호흡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이끌려 휘청휘청 스터디룸을 나섰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선배가 가는 대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고개가 맥없이 꺾여 그의 목덜미에 툭 기대어졌다. 가던 도중에 메마른 입술을 달싹여 그에게 무어라 말했던 것 같다. 죄송하다고 했던가, 고맙다고 했던가. 어쩌면 둘 다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내 말에 뭐라 대답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가 내 허리를 감싼 팔을 한 번도 풀지 않았던 것, 그것만 기억났다.

* * *

우리는 도서관 1층으로 갔다.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1층은 출입문을 통해 바깥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외부에서 침입하기도 쉬웠다.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지하나 꼭대기 층에 머무를 터였다.

하지만 감염자들을 피하는 데는 결코 좋지 못했다. 처음 들어온 카페에서 2층으로 올라갈 때는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비상구 계단을 이용했다. 그래서 도서관 1층이 어떤 꼴이 되어 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정호현, 정신 똑바로 차려.”

선배가 내 뺨을 툭 건드렸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에 힘을 주어 간신히 눈을 떴다.

1층에는 열람실들이 있었다. 8인용 책상이 쭉 붙어 있는 일반 열람실과 책상마다 콘센트가 설치된 노트북 전용 열람실, 학기 초에 학교 홈페이지에서 미리 신청해야만 쓸 수 있는 지정 좌석제 열람실까지.

천 명이 넘는 인원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도록 좌석을 빽빽하게 배치했다. 그만큼 인구 밀도도 높았다. 그 말인즉슨…….

“…….”

소리 없는 경악이 터졌다. 최후의 이성을 발휘해서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선배가 나를 거의 옆구리에 끼다시피 해서 부축하고 있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 터였다.

감염자들이 너무 많았다. 널따란 열람실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죽은 학생들이 어정어정 돌아다녔다. 잘 움직이지도 않는 사지를 질질 끌고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책상 사이를 걸었다.

책상에는 전공 서적이나 수험서가 놓여 있고, 의자에는 백팩과 과잠이 걸려 있었다. 벽 쪽 콘센트에 노트북과 스마트폰 충전기가 주렁주렁 꽂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 그들의 끔찍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었다.

저만치 앞에 있던 좀비 하나가 우리를 발견했다. 뚜둑. 뚝. 섬뜩한 소리를 내며 그것의 목이 돌아갔다. 거리가 꽤 있어 바로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냥 못 보던 형체가 나타나서 반사적으로 쳐다본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섣불리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가는 괜히 상대를 자극할지도 몰랐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텅 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다 허리쯤까지 오는 게이트에 턱 걸렸다. 팔다리를 휘저으며 마구 허우적거렸다.

“크륵, 캬아악!”

열람실 안에는 출입 게이트가 따로 있었다. 외부인이 멋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게이트는 학생증 카드를 갖다 대거나 학생용 앱을 켜서 QR 코드를 읽혀야 열렸다. 저것에게 학생증을 꺼내 찍을 지능은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히 게이트를 넘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자.”

선배가 입 모양으로 속삭이고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의 존재에 반응한 것은 한 명뿐이었다. 다른 감염자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조리실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아무리 앞에 장애물이 있어도 좀비의 수가 많으면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은 꾸역꾸역 밀려들어 시체의 산을 만들어서라도 어떻게든 장애물을 넘어왔다.

삑, 삐삐삑! 이상 반응을 감지한 게이트 경고등이 빨갛게 깜빡였다. 요란한 기계음이 울렸다. 보통 저럴 때면 뒤로 잠시 물러났다가 학생증을 다시 찍으면 그만이었다. 좀 짜증 나긴 하지만 별것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재앙을 알리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다른 좀비들이 하나둘 이쪽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우리는 무작정 달려 어둑어둑한 구석까지 왔다. 정사각형 모양의 사물함들이 가로세로 열을 맞추어 쌓여 있었다. 그것이 금속 벽이 되어 우리의 모습을 가려 주었다.

“허억, 헉. 헉…….”

선배가 나를 놔주자마자 사물함에 주르르 기대어 쓰러졌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숨을 고른 끝에 간신히 물어보았다.

“여기……. 과연 안전할까요?”

“안전하다곤 못 하겠는데, 적어도 위층보단 나을걸. 게이트 앞에서 얼쩡거리면서 저 새끼들 자극하지만 않으면 괜찮으니까. 여기 산 사람이 왜 이렇게 없는지 알아?”

나도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그 사람들을 빼고 다른 생존자들은 코빼기도 못 보았다. 중앙 도서관 건물은 기숙사보다 훨씬 컸다. 명색이 학교를 대표하는 도서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수용 인원도 그만큼 많을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사람 보기가 힘들다는 건.

“죽었겠죠. 사람들한테 죽든 감염되어서 죽든.”

“잘 아네. 걔네들 지금 거리낄 게 없어. 살인 한 번 해 본 것들이 두 번, 세 번, 네 번은 못 하겠어? 살아 있는 사람 마주쳐도 식량 나눠야 해서 아깝다는 생각부터 할걸.”

“…….”

“걔네한테 우린 적이야. 동료가 아니라.”

선배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몸서리가 쳐질 만큼 차가운 사물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지독하게 씁쓸했다.

* * *

“아아악!”

깜빡 선잠이 들었다가 비명에 깼다. 나는 사물함 옆 구석에 콕 처박혀 자고 있었다. 언제 위험한 상황이 생길지 몰라 경계하느라 깊게 잠들지도 못했다.

가장 먼저 눈으로 선배를 찾았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도 전에 왈칵 불안해졌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잠결에 어딜 좀 갔다 오겠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때 나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어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는 열이 올라 홧홧한 내 뺨을 서늘한 손끝으로 톡 건드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한 귀로 듣다가 다시 잠들었던 것 같다.

“그만. 그만하세요!”

또다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날카로운 소리에 머리가 찡하게 울렸다. 나는 벽을 짚고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지. 내가 나가 봐야 할까? 나갔다가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아니, 그래도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 잠에서 덜 깬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갔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누군가 다급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빼곡히 늘어선 사물함들 사이로 달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악!”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학생이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데다 땀범벅이었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바짝 굳어 있다가, 내가 생존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안심했다.

그녀가 내게 확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한쪽 팔이 붙들렸다. 고작해야 내 어깨까지 오는 작은 여자애인데 어찌나 필사적으로 매달려 오는지 팔뚝이 다 저릿저릿했다. 그녀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도, 도와주세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뭐라 대꾸할 틈조차 없었다. 곧 다른 사람이 씨근덕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다부진 체격에 험상궂은 생김새의 남자였다.

“어딜 내빼고 지랄이야. 그런다고 내가 너 못 찾을 것 같아?”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2층 복도에서 유니폼을 입은 남자를 폭행하던 무리 중에 저 사람도 끼어 있었다.

“이 자식은 또 뭐야. 일행이냐?”

“뭐?”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도 되지 않는데 다짜고짜 멱살이 잡혔다. 쿵! 우악스러운 힘으로 벽에 밀어붙여졌다.

“윽…….”

그렇지 않아도 지끈거리던 머리가 아주 깨질 듯 아팠다. 귀에서 삐 소리가 들렸다. 여학생이 악을 쓰며 달려들어 내게서 그를 떼어 놓으려고 했다.

“하지 마세요! 그만 좀……. 하지 마, 이 미친놈아!”

“어딜 쪼르르 내빼고 지랄이냐고. 식량을 훔쳐 먹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그래도 넌 특별히 봐줘서 죽이지는 않겠다니까?”

숨이 막혔다. 반사적으로 남자의 팔을 턱 움켜쥐었다. 그는 나를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했는지 여학생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죽거렸다.

“야. 팔 게 없으면 몸이라도 팔아. 아니면 다른 놈들처럼 뒈지든가.”

더 들을 가치가 없었다. 일단 상대의 얼굴에 주먹부터 날렸다. 퍽! 있는 힘껏 휘두른 주먹이 적중했다. 불의의 기습에 그가 비틀거렸다. 그 틈을 타 한 대 더 갈겼다.

“윽. 미친 새끼가!”

그가 나를 퍽 밀쳤다. 비틀대다 중심을 잡았다.

“개새끼야. 웬만하면 내가 사람한테 이런 말 안 하는데.”

이번엔 내가 역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 밀쳤다. 몸집이 꽤 큰 편이라 민다고 제대로 밀리지도 않았다.

“넌 좀 죽어도 될 것 같다.”

상대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내 팔을 확 뿌리치고 주먹을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턱에 비껴 맞았다.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더럽게 아팠다.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여학생이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아예 뒤로 꺾어 버릴 속셈인 듯했지만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게 진짜!”

“악!”

남자가 그녀를 세게 떠밀었다. 그녀는 굵직한 팔에 아랫배를 얻어맞고 속절없이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넌 뭔데 끼어들어? 저게 우리 식량 훔쳤다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왜 가만히 있는 사람 멱살 잡고 지랄이야.”

“이 새끼가 돌았나.”

험악한 말이 오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한참 일어서지 못하던 여자애가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사물함들이 있는 구석은 너무 좁았다. 여기서 나보다 체격이 큰 상대와 몸싸움을 해 봤자 승산이 없었다. 구석에 몰려서 뒈지게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게다가 열람실에 있는 감염자들이 우리 소리를 듣고 몰려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거친 숨을 내쉬는 상대를 흘긋 바라보고 뒤돌아 바깥쪽으로 뛰었다. 열람실 게이트가 보일 때쯤 상대에게 붙잡혔다.

“어딜 토껴.”

그는 내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고꾸라졌다. 내 위로 육중한 몸이 타고 올랐다. 발을 뻗어 그의 명치를 걷어찼다.

“억! 시발. 가만히 좀 있어!”

“헉…….”

두꺼운 손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아래에 깔린 사지가 바르작거렸다.

“뭐야.”

이대로 정말 죽는 건가 싶은 순간이었다. 그가 갑자기 움찔했다.

“왜 이렇게 뜨거워.”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이 조금 풀렸다. 가까스로 숨통이 트였다.

“하아, 하…….”

“너, 너 혹시. 물렸냐?”

남자는 경악으로 말을 더듬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 살기 대신 공포가 어렸다. 그의 말을 이해한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그의 아래에 깔린 채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입 안이 제대로 터졌는지 피로 흥건했다. 지금 내 모습은 상당히 기괴할 게 분명했다.

“그래. 물렸다. 어쩔래.”

피범벅이 된 입술로 씩 웃어 주었다. 그리고 내 목을 쥔 남자의 팔뚝을 콱 깨물었다. 살에 시뻘건 잇자국이 남았다. 거기다 내 입에서 난 피까지 묻어 물린 부위가 아주 가관이었다. 내가 봐도 그럴듯했다.

“아악!”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나를 더러운 세균 덩어리 보듯 하며 확 밀쳤다. 졸지에 또다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으아, 아, 악!”

그는 패닉에 빠져 엉금엉금 물러섰다. 그의 뒤로 언뜻 열람실 게이트가 보였다.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 떠올랐다.

여학생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자기 몸만 한 쓰레기통을 껴안은 채였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녀는 쓰레기통을 냅다 들어 그의 머리에 덮어씌워 버렸다. 안에 있던 쓰레기가 그의 몸을 타고 우수수 떨어졌다.

“뭐, 뭐야! 뭐냐고!”

뒤이어 발끝으로 그의 다리 사이를 힘껏 걷어찼다.

“흐아악!”

호쾌한 일격이 꽂혔다. 내가 다 아찔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은 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찼다는 점에서 집요한 살의가 느껴졌다. 그녀는 똑같은 자리를 연달아 찼다. 남자가 입은 바지 사타구니 부분에 발자국이 마구 찍혔다.

그는 거품을 물고 나뒹굴었다. 뒤집어쓰고 있던 쓰레기통이 벗겨졌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삑삑삑삑!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여자애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뜻이 통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리가 풀려 다시 주저앉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팔을 붙잡고 힘을 합쳐 질질 끌었다. 무겁긴 더럽게 무거웠다. 허리가 빠지는 줄 알았다. 그는 몸부림치며 카펫이 깔린 바닥 위를 끌려왔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다 싶은 순간, 그를 냅다 떠밀었다. 게이트 쪽으로.

게이트에 그의 등이 세게 부딪쳤다. 그는 고통에 신음하며 눈을 떴다. 뒤늦게 허겁지겁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게이트 사이로 거무죽죽한 손이 쑥 뻗어 나왔다. 손은 한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손이 허공을 마구 휘저으며 남자를 붙잡으려 했다.

눈먼 손에 뺨이 붙잡혔다. 남자의 몸이 점점 위로 끌려 올라갔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남자가 미친 듯이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허억. 으아아악!”

콰직, 콱, 우드득.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연달아 났다. 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도망쳤다. 달리는 내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경험을 통해 배웠다. 감염자들은 한번 먹잇감을 물면 그것에 집중하느라 다른 데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가 큰 소리를 내거나 대놓고 눈앞에서 뛰어다니더라도 저들이 ‘식사’를 마치기 전까진 괜찮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괜찮으세요?”

여학생이 감사 인사를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남자의 가랑이를 무자비하게 걷어차더니, 지금은 긴장이 풀렸는지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고 있었다.

“괜찮…….”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애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저, 저기. 저.”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내 얼굴을 가리켰다. 왜 그러지? 물어볼 새도 없이 뭔가 후드득 떨어졌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뻘건 핏방울이 셔츠 가슴팍을 흠뻑 적시고 바닥에도 떨어져 있었다.

“아…….”

뜨뜻한 게 코에서 줄줄 흘렀다. 손을 대어 받쳤다. 피가 끊임없이 나와 손바닥을 적셨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정신 차리세요. 저기요!”

어찌할 도리 없이 몸이 기울었다. 나를 붙들고 다급하게 외치는 그녀의 얼굴이 의식이 끊기기 전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얼마 전에 여기서 큰 싸움이 났었어요. 피 튀고 장난 아니었어요.”

“아, 맞다. 그때 많이 다친 사람도 있었는데. 무사할지 모르겠네.”

“무서워서 짐이랑 다 놔두고 도망가긴 했는데, 나중 되니까 아쉬워져서 다시 왔어요. 이 꼴이 났을 줄은 몰라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려 했는데 떠지지 않았다. 내 이마와 눈 위에 차갑고 축축한 게 덮여 있었다.

“근데 우리가 두고 갔던 것들까지 저놈들이 다 챙겨 갔더라고요. 다시 돌려 달라니까 뭐라는지 아세요? 도둑질하지 말래요. 진짜 미친놈들 아니에요?”

이번엔 몸을 일으켜 보려 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단단한 손끝이 내 어깨를 꾹 눌렀다. 나는 졸지에 다시 풀썩 눕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손을 뻗어 이마에 덮여 있는 물수건을 치우고 눈을 떴다.

“읏…….”

지금 깨달았다. 나는 선배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안녕, 후배님. 잘 잤어?”

선배가 나를 내려다보고 활짝 웃었다. 살포시 휘어진 눈매가 몹시 살벌했다. 따라 웃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일단 어설프게나마 웃었다. 호되게 얻어맞은 턱 부분이 욱신욱신 아팠다. 하루쯤 자고 일어나면 얼굴 전체에 멍이 번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웃어?”

“…….”

“뭘 잘했다고 처쪼개고 있어.”

뻣뻣한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도로 입매를 굳혔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한데?”

“쓰러진 거…….”

“쓰러진 거. 또?”

“선배……. 다리 베고 잔 거……?”

선배가 한숨을 쉬었다.

“후배님은 맨날 그래.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사과만 잘하지. 됐어. 그럴 거면 사과하지도 마.”

그는 고개를 홱 돌려 나를 외면했다. 저렇게 말해 놓고, 막상 진짜로 사과를 안 했다간 무슨 폭언을 들어 먹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지하에 있었다. 배관과 공조기, 보일러를 비롯한 커다란 기계들이 보였다. 실내가 기계에서 나는 둔한 백색 소음으로 가득했다.

사람이 꽤 많았다. 내가 마주쳤던 여자애 말고도 남자 하나, 여자 둘이 더 있었다. 그들은 선배와 내 곁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내가 깨어난 걸 보고서야 슬금슬금 거리를 좁혔다.

“저기요. 저 사람 진짜 일행 맞아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다가온 여자애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쪽이 쓰러지셔서 간호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기 들고 와서는……. 뭐라고 했더라.”

“…….”

“정호현 안 내놓으면 다 죽여 버린댔어요.”

나는 선배를 흘긋 돌아보았다. 그의 옆에 놓인 흉흉한 금속 공구가 눈에 띄었다. 영어로는 크로우 바, 한국어로는 쇠 지렛대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그들이 느꼈을 공포가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일행 맞아요. 그리고 저분은……. 원래 좀 그래요.”

괜히 변명을 덧붙였다.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기계가 윙윙대며 돌아가는 지하에 앉아 자초지종을 들었다. 내가 만났던 여학생은 일행이 있었다. 저기 있는 남학생이 그녀와 같은 과 동기로, 둘 다 새내기였다. 똑같은 디자인의 과잠을 입은 여학생들은 여기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그들은 식량을 비롯한 물자를 찾으러 중앙 도서관에 들어왔다. 이미 도서관에 터를 잡고 있던 무리를 피해 이리저리 숨어 다녔다.

“전 처음 일 터졌을 때, 그러니까 학교가 이렇게 되기 직전에요. 중도에서 빈둥거리고 있었어요. 약속 있어서 친구 기다리는 중이었거든요. 얘요.”

“본가 안 가는 사람들끼리 치맥이나 하러 가자고 그랬죠.”

남자애가 가볍게 거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도서관 전체에 방송이 나왔는데.”

김나혜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애는 말하면서도 흘긋흘긋 내 얼굴을, 정확히는 다친 부분을 쳐다보았다.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냥 밖에 나가지 말랬어요. 실험동 쪽에서 무슨 사고가 났다고, 당분간 출입을 통제하긴 할 건데 별일 아니니까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댔어요. 질서 지키면서 얌전히 있으면 방송으로 상황 알려 주겠다고.”

“…….”

“다들 그 방송만 믿었어요. 난동 부리는 사람도 없고, 그냥 폰 만지고 책 보면서 기다렸어요.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방송이 안 나오는 거예요.”

왜 열람실에 학생이 그렇게 많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들 대피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거다. 별일 아니니까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믿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사무실에 여쭤보러 갔어요. 높은 사람들은 벌써 다 내빼고 없고, 말단 직원들만 남아서 수습하고 있더라고요.”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죠, 솔직히. 그때 열람실에서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돼서는 비명 지르면서 뛰어 올라오던데요. 그 뒤로는 뭐.”

두 새내기의 말을 듣던 과잠 차림의 여학생이 끼어들었다. 과잠 어깨 부분에 새겨진 야구공 모양 자수가 선명했다.

“저흰 그냥 의약품 좀 찾으러 왔어요. 소독약 같은 거요. 학생회관 보건실까지 가긴 힘들 것 같아서. 중도에도 구급상자 같은 건 있잖아요, 원래.”

그녀는 입고 있던 과잠을 훌렁 벗었다. 어깨까지 걷어 올린 옷소매 아래로 붕대가 감긴 팔이 보였다. 꽤 두껍게 감았는데도 피가 배어 나와 붕대가 벌겋게 물들었다.

“보시다시피 팔이 이 꼴이 돼서. 아, 물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쩌다 다치셨어요?”

“싸우다가 그랬죠. 글러브 끼고 좀비들 두들겨 패다가 좀 긁혔어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만큼은 아니지만 이 사람들도 상당히 박력이 넘쳤다.

“근데 여기도 허탕인 것 같아요. 소독약이 다 뭐야. 아예 일회용 밴드 하나까지 싹 긁어 갔던데.”

“그 씹새끼들, 우리 동아리 이름 쓰인 배트를 자기들이 갖고 있더라고요? 염치도 없지.”

갖고 있기만 했을까. 그 배트로 사람까지 죽였다.

“아, 맞다. 이거요.”

김나혜가 내게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았다. 진통제 알약이었다. 열 개들이 상자에 네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많이 아프신 거 같아서. 감기약 아니라서 큰 효과는 없겠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 나아요.”

“…….”

“사실 정신 못 차리고 계실 때도 먹였어요. 나머지는 저기 다친 언니 드렸고요. 네 알밖에 안 남았긴 한데, 그래도 꼭 챙겨 드세요.”

어쩐지 컨디션이 좀 나아졌다 했다.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건 여전했지만 아까보다 통증이 덜했다.

“그리고 이것도요.”

그녀는 이번엔 자기 백팩을 꾸역꾸역 뒤져 옷을 꺼냈다.

“옷에 피 묻으셨잖아요. 갈아입으시라고요.”

품이 넉넉한 회색 후드 티였다. 아무리 봐도 저 애 사이즈는 아니었다. 나에게도 좀 클 것 같았다. 피와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내 셔츠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복장만 보면 이미 훌륭한 감염자였다. 이 꼴을 하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었다니. 새삼 머쓱해졌다.

“누구 옷이에요?”

“제 남자 친구요.”

“남자 친구분은 어디…….”

“아까 만났어요. 열람실 안에 있던데요.”

“…….”

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말 앞뒤에 무엇이 생략되어 있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받으세요. 남자 친구도 필요한 사람한테 주길 바랐을 거예요. 저 구해 주신 분한테 드리는 거니까 하나도 안 아까워요. 전 다른 옷도 있어서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김나혜는 애써 씩씩하게 가방을 뒤적였다. 그런데 가방에서 나오는 게 점점 늘어났다. 자기 몸 반만 한 백팩에 뭘 그리 많이 넣어 다니는지, 순식간에 내 앞에 물건 더미가 생겼다.

“이건 핸드크림인데, 이것도 받으시고요. 폼 클렌징도 드릴게요. 안경닦이 가지실래요? 참, 안경 안 쓰셨지. 또 뭐 있지? 머리끈…… 은 필요 없으시겠죠? 하하.”

“얼씨구. 나한텐 티끌 하나 안 나눠 주더니. 야, 김나혜. 아예 다 퍼 주고 가라.”

“박진혁 네가 뭐가 예쁘다고 나눠 줘? 너나 잘해.”

그들은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남자애가 괜히 한마디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물러났다.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각자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갈 거라 했다. 한곳에 너무 많은 인원이 뭉쳐 있으면 살인자 무리에게 들키기 쉽다고.

“저기, 선배. 깨어나셔서 진짜 다행이에요.”

김나혜가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나를 불렀다.

“물론 제가 끔찍한 짓 당하지 않게 구해 주신 것도 고마운데요. 여기 쓰레기 같은 인간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해 주셔서. 그게 제일 고마워요.”

약발이 떨어져 가는지 통증이 슬슬 심해졌다. 둔하게 번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웃었다.

“혹시 또 그런 놈 만나면 이번엔 아예 밟아서 터뜨려 버려요. 쓰레기통 씌워 놓고. 그런 새끼는 남자 구실 못해도 싸요.”

김나혜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는 옆에서 박진혁이 기겁하며 “너 대체 뭔 짓을 하고 온 거야?” 하고 캐묻는 것도 무시하고 손을 흔들었다.

“무사하셔야 해요. 꼭요.”

* * *

찬물밖에 나오지 않는 세면대 앞에서 덜덜 떨며 피와 땀을 씻어 냈다. 기계실 한구석에 쌓여 있던 박스를 침대 삼아 웅크려 누웠다. 이래선 감기가 낫기는커녕 덧날 판이었다.

“자?”

얼음장 같은 손이 내 뺨을 건드렸다. 손이 닿은 부분부터 살갗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나는 작게 몸서리치며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선배에게서도 차가운 비누 향이 났다.

“아뇨, 아직.”

“열이 안 내려. 젖은 수건도 얹어 주고 뺨도 식혀 줬는데. 약을 안 먹여서 그런가.”

선배가 박스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나는 잠이 덜 깬 채로도 미적미적 비켜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대뜸 내 옆에 누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아픈 건 처음이라서.”

“처음요?”

“보통은 이렇게까지 아프기 전에…….”

그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뚝 다물었다. 뭐든지 필터를 안 거치고 말하는 것 같던 선배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조금씩 정신이 맑아졌다.

“그러게 왜 괜한 일에 꼈어.”

“…….”

“잠깐만 혼자 놔두면 그새 어디 쪼르르 달려가서 쓸데없는 짓 하고 있고. 찬 바람 좀 쐰 걸로 비실대고. 아파서 정신도 못 차리는 걸 재워 놨더니 다른 새끼들이랑 시시덕거리기나 하고. 하여간 넌 사람 바보 만드는 데 뭐 있어.”

“…….”

“내가 뭐 갖다줄 때마다 딱 굳어서 희한한 표정 짓더니, 걔가 주는 건 잘만 받더라? 난 또 우리 호현이가 걔한테 돈이라도 준 줄 알았잖아. 가게에서 물건 사는 것도 아니고, 하도 자연스럽게 받아 처먹어서.”

그의 말을 듣던 도중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아니겠지. 나는 침묵을 지키다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요, 선배. 혹시……. 삐지셨어요?”

“응. 영원이 삐졌어.”

“…….”

선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말문이 막혔다. 싸늘하다 못해 살벌한 표정과 말의 괴리가 어마어마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자 그가 짜증스럽게 나를 툭 쳤다.

“뭐 해. 삐졌다니까? 영원이는 존나게 삐져서, 지금 좀, 씨발. 분노 조절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야.”

문장 끄트머리에 빠득 하고 작게 이 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잽싸게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죄송해요. 화 푸세요.”

“아냐. 화 안 났어.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그냥 좀 삐진 것뿐이라니까. 정호현이 아무한테나 좆같이 예쁘게 굴어서.”

“알았어요. 삐진 것 푸세요. 네?”

“그럼 이거 벗을래?”

그가 내가 입은 후드 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김나혜가, 정확히는 김나혜의 남자 친구가 가지고 있던 옷이었다. 품이 큰 후드 티에서 처음 맡는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그럴게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냥 피투성이 셔츠를 도로 입고 있어야겠다 싶었다. 박스 옆에 내려놓은 선배의 쇠 지렛대가 눈에 띄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나는 무심코 벗겨 달라는 듯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냥 내가 벗으면 되지, 옷 갈아입혀 달라고 칭얼대는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뻘짓이란 말인가.

“뭐야. 벗겨 달라고?”

선배가 피식 웃었다. 나는 뒤이어 날아올 수많은 비아냥거림과 욕설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웃음으로 부드럽게 풀린 목소리였다.

“너 이상해. 왜 이렇게 귀여운 짓만 해. 이러니까 진짜 착각하게 될 것 같잖아.”

“이상한 건 선배잖아요.”

“그래서, 싫어?”

“아뇨.”

그가 헐렁한 후드 티 밑단을 손끝으로 살살 매만지다 손을 밀어 넣었다. 열 오른 몸에 그의 손은 너무 차게 느껴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새어 나오는 숨결이 파르르 떨렸다.

“아…….”

큼직한 손이 맨옆구리를 어루만졌다. 건조한 살갗과 살갗이 맞닿았다. 차갑고 시원했다. 소름 끼치게 좋았다.

그는 옷 안에 손을 넣고 느릿하게 움직였다. 엄지로 갈비뼈 아래를 매만지다 허리를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우리의 간격이 확 좁혀졌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선배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까만 속눈썹이 사뿐히 내려앉는 것까지 전부 보였다. 어쩐지 숨 쉬는 것이 버거워졌다.

손이 좀 더 위로 올라왔다. 예리한 자극이 무서워 나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렸다. 헉. 짧은 신음이 악다문 잇새로 먹혔다.

“어디 가…….”

허리를 쥔 선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순식간에 그에게로 도로 끌려갔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박스 위를 스쳐 거친 소리가 났다.

“흐, 읏.”

그는 판판한 가슴팍을 손바닥 전체로 쓸며 내 표정을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손에 새겨진 굳은살이 여린 살점을 자극했다. 조금씩 유두가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빳빳해진 끄트머리가 톡 걸렸다. 허벅지가 반사적으로 확 조여들고 한쪽 눈매가 찡그려졌다.

“호현아.”

그가 내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배와 옆구리에 바깥 공기가 닿아 시원해졌다.

“지금 무슨 생각 해?”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흐느낌을 목 너머로 삼켰다. 하지만 들뜬 호흡만큼은 삼키지 못했다. 공기 중에 헐떡임이 적나라하게 번졌다.

“선배 손 크다는 생각요.”

고의인지 우연인지 그의 엄지가 유두를 툭 스쳤다. 그 한 번으로 완전히 꼿꼿하게 일어섰다. 신음이 터졌다.

“읏……. 선배는요?”

선배는 내 입에 후드 티 끝자락을 물렸다. 나는 입술 사이에 들어온 게 뭔지도 모르고 물었다. 그가 빙긋 웃었다.

“우리 후배님은 젖꼭지도 존나 꼴리게 생겼다는 생각.”

큼직한 손이 가슴을 그러쥐었다. 만질 것도 없는 가슴살이 뭉그러지도록 모아 엄지로 유두를 툭툭 건드렸다.

“이거 뭐야, 예쁜아. 씨발, 진짜 미치겠네……. 너 자지 색도 이래?”

“…….”

“몇 번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발딱 섰네. 귀엽게. 잔뜩 빨아 주면 예쁘게 빨개질 것 같은데. 빨아 줄까?”

방금 굉장히 충격적이고 외설적인 말을 들어 버린 것 같은데. 평생 살면서 들어 볼 거라고는, 그것도 남자에게 들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반응할 여유가 없었다.

“그만…….”

다급하게 선배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는 헐렁한 소매에 반쯤 가려진 내 손을 소매째로 움켜쥐어 확 꺾어 눌렀다.

쇄골까지 끌어 올려 놓은 후드 티 아래로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그는 내 가슴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묻었다. 설마, 설마 진짜로……. 내 생각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에 유두가 물렸다.

“아!”

허리가 크게 튀었다. 눈앞에 하얀 불꽃이 번졌다. 선배는 입술에 물린 유두를 쭈웁 소리가 나도록 한 번 길게 빨아올리고, 유륜 전체가 질척하게 젖도록 우물거렸다. 그는 혀끝에 힘을 주어 유두 위를 문질러 댔다. 꼿꼿이 선 젖꼭지가 뭉클하게 짓눌렸다. 괴로울 정도로 간지러웠다. 몸을 들썩여 봤자 그의 입술에 가슴을 밀어붙이는 꼴밖에 되지 않아서 난감했다.

“으, 읏, 아아…… 아!”

나는 그가 유두를 핥고 빨아 대는 내내 엉망진창으로 흐느꼈다. 입술이 멋대로 벌어졌다. 도저히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갈 곳을 잃은 다리가 멋대로 바르작거렸다. 발뒤꿈치로 박스 위를 꾹꾹 밀어내고 골반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아랫배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바지 앞섶이 갑갑해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나보다 큰 남자였다. 그리고 여긴 차갑고 어둑어둑한 지하였다. 내가 낯선 남자와 여기서 이런 짓을 할 거라고 며칠 전의 내게 말했다면 코웃음을 치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기겁하며 그를 밀어내도 모자랄 판에, 왜 선배가 가슴을 빨면 빠는 대로 앓는 소리만 내는 걸까. 이유도 모른 채 애가 탔다. 양 젖꼭지가 번들번들 젖어서 간지러워 죽겠는데, 열이 올라 뜨끈해진 몸을 어떻게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걸로는 모자랐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허공에 띄웠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사타구니를 선배의 허벅지에 대고 비비며 헐떡거렸다. 단단하게 일어선 성기를 무작정 위아래로 문지르고 쿡, 쿡, 치받아 댔다. 스스로가 발정 난 개 같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선배는 내가 발기한 걸 뻔히 알았을 텐데도 멈추지 않았다. 하도 집요하게 물고 빨아서 유두에 붉은 기가 돌았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살갗까지 울긋불긋해졌다. 그는 나를 실컷 괴롭힌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술 또한 자극으로 붉어져 있었다.

“와. 정신을 못 차리네, 아주.”

그가 흠뻑 젖은 유두를 손끝으로 튕겼다. 울먹임에 가까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바지에 갇힌 성기에서 묽은 액이 새어 나와 속옷을 적시는 게 게 느껴졌다.

“젖꼭지만 빨았는데 벌써 울어?”

“선배, 더, 더는 안 돼요. 너무, 읏, 간지러워…….”

모든 게 다 비현실적이었다. 선배가 내 옷을 벗겨 맨살을 만지는 것도, 내가 젖꼭지를 빨리며 발기하는 놈이었다는 것도. 상상조차 못 해 봤다. 열에 들뜬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독한 술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엉덩이는 왜 자꾸 흔들어. 자지도 만져 달라고? 하여간 존나 야해 빠져 가지고.”

“아니요. 으, 흑, 만지지 마세요.”

“그래, 그래. 조금만 참아. 만져 줄게.”

“만지지 말라니까요!”

그는 뻔뻔하게도 내 저항은 죄다 무시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참다못한 내가 왈칵 언성을 높였다. 선배가 입술 앞에 가만히 검지를 갖다 댔다.

“큰 소리 내면 안 되지.”

힘겹게 입술을 깨물었다. 미처 나오지 못한 홧홧한 숨결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선배가 상체를 일으켰다. 내 허벅지 사이에 허리를 끼워 넣어 도망가지 못하게 고정해 놓고 내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어설프게 허공에 떠오른 골반이 떨리는 걸 보더니 픽 웃었다.

“쫄기는. 누가 잡아먹는대?”

“……웃지 말아 주실래요.”

지금 딱 미칠 것 같으니까.

“어떻게 안 웃어. 좋아 죽겠다고 좆 비비면서 조를 땐 언제고, 막상 만져 주려니까 벌벌 떠는데.”

단추가 열리고 지퍼가 죽 내려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팔목으로 눈가를 가렸다. 내 하반신 사정을 직접 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차라리 눈을 뜨고 있을 걸 그랬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다른 감각이 몹시도 예민해졌다. 선배가 속옷 위로 내 성기를 가볍게 건드렸을 때, 나는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흐으……!”

허리가 퍽 튀어 올랐다. 아랫배와 엉덩이의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그는 귀두와 맞닿은 부분에 미끌미끌하게 배어 나온 액체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만지지 말라고 앙탈은 왜 부렸어. 이렇게 팬티 다 적셔 놓고.”

선배는 기어이 내 속옷 밴드를 잡아 내렸다. 허벅지를 비틀며 저항해 보려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별 소용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옷이 죽 끌려 내려갔다.

“같은 색 맞네. 우리 호현이는 어떻게 자지까지 핑크색이야. 응? 나 꼴려서 눈 뒤집히라고?”

한층 수치스러워졌다. 난 스물몇 해를 살면서 그딴 건 한 번도 신경 안 써 봤는데, 그는 아까부터 색깔 가지고 참으로 집요하게 굴었다. 미대생이라 그런가.

“호현아. 이 예쁜 좆 이제껏 몇 번이나 써먹었어? 몇 명한테 박았어?”

“몰라요.”

“왜 몰라. 너한테 달린 건데.”

“진짜, 읏, 모른다니까요…….”

“그래, 뭐. 몰라도 돼. 앞으론 다른 데 쓸 일 없을 테니까.”

그가 쏟아 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나치게 원색적이었다. 원래도 톤이 낮은 데다 묘하게 귀를 잡아끄는 목소리였는데, 작정하고 음담패설을 하자 귀로 듣는 포르노가 따로 없었다.

그가 내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 손을 끌어다 자신의 앞섶 위에 올려놓았다. 방금 손에 비상식적인 크기의 무언가가 닿은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단추 열고 지퍼 내려 줘.”

그가 가늘게 눈웃음을 치며 속삭였다.

“다 벗겨도 돼요?”

나만 당할 순 없었다. 그에게도 남의 앞에서 알몸이 되는 수치를 겪게 해 주고 싶었다.

“응. 아주 홀딱 벗겨도 돼. 벗겨서 존나 만지고 핥아 줘. 입에 물고 쭉쭉 빨아 주면 더 좋고.”

“아뇨.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마음이 바뀌었다. 안 그러기로 했다. 머뭇거리다 지퍼에 손을 댔다. 지퍼가 반 넘게 내려갔을 때 나는 경악했다.

잔뜩 발기한 것이 어두운 색의 드로어즈 안에 팽팽하게 갇혀 있었다. 기둥이 어느 쪽으로 뻗었는지, 귀두가 어떤 모양으로 도드라졌는지 보일 만큼 선명한 윤곽이 불거졌다. 심지어 귀두 끄트머리 부분엔 얼룩이 져 있었다.

넋을 잃고 눈앞의 흉악한 광경을 바라보다 간신히 손을 뻗어 지퍼를 마저 끌어 내렸다. 퉁. 묵직한 것이 튕겨져 나왔다.

“…….”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이 안에 들어 있었지? 어떻게? 수납이 가능하긴 한가?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다른 쪽 손가락 두 개로 푹푹 쑤시던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사이즈에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쓰냐고 의아해했던가.

과거의 어리석었던 나를 패 주고 싶었다. 선배의 자신감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개는 무슨. 세 개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뭘 그렇게 봐, 예쁜아. 쑥스럽게.”

선배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웃었다.

“빨아 주려고?”

말과는 달리, 그의 태도는 쑥스러움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못 참겠어. 네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내 좆 쳐다보니까…….”

단어 사이사이에 거친 숨이 섞였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한 팔로 내 옆을 짚었다. 스스로 속옷을 끌어 내리고 성기를 쥐었다. 울퉁불퉁하게 힘줄이 돋은 굵은 기둥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살짝 힘을 주어 아래로 끌어 내렸다 다시 쭉 밀어 올렸다. 귀두 끄트머리에 맺힌 맑은 액체가 파르르 흔들렸다.

“흐읏.”

그가 이를 악물었다. 흐트러진 숨결이 내게도 닿았다.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선배가 내 앞에서 자위하고 있었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가슴 안쪽이 찌르르하게 조여들었다.

“호현아.”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스스로 성기를 주무르던 그가 눈만 들어 나를 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이름만 한 번 불렀을 뿐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홀린 듯이 아래로 손을 뻗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내 것을 쥐고 있었다. 열 오른 성기의 감촉이 손에 들어찼다.

“앗…….”

생과 사를 오가는 위협에 시달리느라 성적인 욕구 따윈 까맣게 잊고 살았다. 본의 아니게 금욕했던 몸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기둥을 느릿하게 쓸기만 하다가 좀 더 과감해졌다. 탁탁 소리가 나게 성기를 흔들고 엄지로 귀두를 누르듯 문질렀다.

“흐응…… 으, 읏.”

“헉, 하아…….”

짐승 같은 숨소리가 뒤섞였다. 퀴퀴하고 차갑던 공기가 점차 달아올랐다. 미쳤다. 미쳤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커다란 기계가 돌아가는 지하실에서,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밖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도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선배가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왜 그러냐고 묻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손을 움직여 성기를 흔들게 했다.

손이 타의에 의해 멋대로 움직였다. 낯선 리듬으로 성기를 문지르고 비벼 댔다. 내 손으로 자위하는 건데 꼭 남이 만져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탁, 탁, 탁. 규칙적인 소리가 울렸다. 이상하리만치 성감이 올랐다.

“하읏, 흑.”

나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훤히 드러난 내 목에 입을 맞추었다. 도드라진 목울대를 질척하게 깨물고 빨았다. 그러다 귀두끼리 툭 부딪쳤다. 한순간 신음이 확 높아졌다.

“아!”

“쉿. 조용히 해야지.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흐, 으, 흐응.”

“조용, 조용…….”

어린아이를 달래듯 느른하게 속삭이고, 그는 내게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만 닿던 산뜻한 입맞춤이 깊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우리는 절박하게 서로의 입술을 빨고 혀를 끌어당겼다. 젖은 점막끼리 뒤엉켜 성기로 섹스하는 것만큼이나 야한 소리가 났다.

그는 아예 손아귀 안에 성기 두 개를 모아 쥐고 흔들었다. 흥분에 젖어 뜨겁고 습해진 손바닥 안에서 귀두끼리 맞붙었다. 손안에 박아 넣을 때마다 찔꺽찔꺽 소리가 났다.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허리를 허벅지로 조였다 풀길 반복했다. 그가 흥분을 감출 생각도 않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킥킥 웃었다.

“정호현, 아주 꽉꽉……. 잘 조이네.”

어느새 우리의 하체는 교미하는 짐승들처럼 난잡하게 맞물려 있었다. 나는 다리를 잔뜩 벌려 그를 받았고, 선배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놀려 내 사타구니에 성기를 퍽퍽 치댔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수치스러웠다. 슬금슬금 몸을 물려 그에게서 달아나려 했다.

“아……. 이제, 그만. 더 못 해요. 갈래요, 갈 거야.”

“왜에. 가지 마.”

그가 내 골반을 틀어쥐었다. 몸이 고스란히 끌려가 거칠게 안겼다. 흠뻑 젖은 손바닥 안에서 성기가 쭉 미끄러졌다. 귀두와 그 아래 기둥이 너 나 할 것 없이 미끄덩하게 젖었다.

“못 참겠어요. 놔주세요. 선배, 제발, 나와요, 이제 나올 것 같단 말이에요…….”

나는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덜덜 떨었다. 성기를 맞대고 흔드는 대로 흔들리면서, 떠오르는 대로 허겁지겁 애원을 주워섬겼다. 그가 자연스레 내 뒷머리를 받쳐 품에 꼭 밀착시켰다.

“안 놔줄 거야. 읏, 이렇게 예쁜 걸, 왜 놔줘.”

“안 돼요. 흐, 으응, 진짜, 안 돼……. 흐읏! 아, 아……. 아!”

그가 속도를 올렸다. 손바닥 전체로 기둥을 감싸 주무르고 귀두를 뭉개듯이 문지르다가, 이젠 찌걱찌걱 소리가 나도록 세게 박아 댔다. 잔뜩 달아오른 내 것이 타인의 성기에 들쑥날쑥 비벼졌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울음도 신음도 아닌 것을 드문드문 흘리다가, 그만, 그만, 하고 하염없이 빌었다. 발끝이 한껏 곱아들고 허리가 파드득 경련했다. 죽을 것 같았다.

“……!”

사정하는 순간 나는 고개를 확 젖혔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벌어진 입이 정적 속에서 힘없이 벙긋거렸다. 쾌감이 아랫배를 마구 할퀴었다. 나는 이성을 잃고 무작정 골반을 밀어붙였다. 선배의 손에 성기를 퍽 박았다. 정액이 울컥 밀려 나왔다.

“큭…….”

선배가 작게 이를 갈았다. 손바닥 안에서 두 사람분의 정액이 튀었다. 우리가 흥건히 싸지른 것들이 서로의 귀두를 질척하게 적셨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선배의 손목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 아랫배에 고였다.

“헉! 하아, 하, 하아.”

뒤늦게 막힌 숨이 터졌다. 나는 사지를 늘어뜨리고 툭 쓰러졌다. 눈을 뜰 힘조차 없었다. 눈꺼풀 위로 붉고 푸른 소용돌이가 빙빙 돌았다. 선배가 내 배에 묻은 정액을 문질러 보았다. 욕망의 흔적을 확인하듯. 그러다 문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번엔 여기까지만 할 거야.”

목소리가 사정의 여운으로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그는 눈도 못 뜨고 헐떡이는 내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뒤에 할 걸 남겨 놔야……. 아쉬워서라도 더 살지.”

〈2권에서 계속〉1673287165125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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