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붕괴 (2/12)

2. 붕괴 

“정호현. 정호현! 야. 내 말 안 들리냐?”

거칠게 윽박지르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나는 웅크려 무릎에 이마를 묻고 있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담배 내놓으라고!”

바로 앞에서 윤준석이 악을 쓰고 있었다. 그도 상태가 나쁜 건 마찬가지였다. 퀭한 눈에 실핏줄이 터져 무시무시한 몰골이었다.

꼬박 만 하루가 지났다. 바깥에서 문을 긁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이후로.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다. 까득, 까작, 철컥, 쾅. 문에서 온갖 섬뜩한 소리가 났다. 이따금 목이 반쯤 잘린 짐승처럼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괴성에서 익숙한 흔적을 찾아냈다. 한때 친근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사람의 목소리를.

사방이 적막한 가운데 문을 할퀴고 몸을 들이받는 소리가 너무도 적나라하게 들렸다.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깥에 있는 것들의 존재는 시시각각 선명해졌다. 우리는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하루를 보냈다. 저마다 극한의 스트레스에 시달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윤준석이 내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

폭언을 들어도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피곤했다. 나는 홀린 듯 주머니를 뒤적여 안에 든 것을 내밀었다. 내용물을 확인해 보기도 전에 윤준석이 담뱃갑을 채 갔다. 그의 손안에서 텅 빈 담뱃갑이 너무도 쉽게 구겨졌다.

“없잖아!”

그는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나서 들고 있던 담뱃갑을 내던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발을 쾅쾅 굴러 마구 밟아 댔다. 윤준석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진 담뱃갑을 뻥 차 버리고 몸을 휙 돌렸다. 그는 구석에 구겨져 있던 박건우로 표적을 바꾸었다.

“넌 또 뭘 꼬나보고 지랄이야.”

박건우도 결코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머리가 마구잡이로 헝클어지고, 제대로 닦지 않아 더러워진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애초에 네가 문만 안 열어 줬어도 저것들 꼬일 일 없었잖아. 네가 괜히 어그로 끄는 바람에 다 망한 줄 알아.”

“하, 하지만……. 형이, 문 열어 보라고.”

“근데 이 새끼가. 그럼 지금 이게 내 탓이냐?”

“…….”

“어? 네 여친 뒈져서 좀비 된 게 내 탓이야?”

“……아니요.”

“그럼 여기가, 씨발, 안이지 밖이냐?”

윤준석이 악에 받쳐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의 폭언이 부당하다는 것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심지어는 그 자신조차도 알 터였다. 하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모두가 너무 지쳐 있었다.

결국 윤준석이 제 분을 못 이겨 손을 휘둘렀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퍽! 박건우의 마른 몸이 무력하게 쓰러졌다. 그는 느닷없이 머리를 얻어맞고도 비명 한번 지르지 못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먹을 것도 없고. 쫄아서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다가, 다 같이 굶어 뒈지게?”

그가 주변을 둘러보고 씩씩거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야, 대답해! 내 말 안 들려?”

제각기 흩어져 있던 텅 빈 시선들이 하나둘 그를 향했다. 그 와중에 여전히 제 할 일에만 몰두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선배는 벽에 기대앉아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상의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고 긴 다리를 느슨하게 뻗은 채였다.

데이터 통신이 끊겼어도 미리 다운로드받아 놨던 음악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볼륨을 높여도 이어폰을 뚫고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올 텐데 유유자적하게 음악 감상이나 하고 있다니. 보통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영원! 내 말 안 들리냐고.”

윤준석이 열을 내며 선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박건우에게 했듯이 쉽사리 그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선배에게 코피가 터질 때까지 흠씬 두드려 맞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선배는 윤준석이 다가오는 것을 빤히 보고도 발끝을 까딱이며 음악에 빠져 있었다. 거리가 좁혀져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질 때가 되어서야 그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왜, 뭐.”

“넌 지금 노래가 귓구멍에 들어오냐?”

“너랑 쟤가 자꾸 시끄럽게 하잖아.”

선배가 그와 박건우에게 연달아 턱짓을 했다.

“쟨 자꾸 울고.”

이번엔 최다빈 쪽이었다. 윤준석은 한동안 얼이 빠져 있다 물었다.

“너……. 내 이름은 아냐?”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그걸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

이번엔 윤준석뿐만 아니라 나까지 어이가 없어졌다. 한 공간에 오래도록 갇혀 있으면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쯤은 지겹게 들었을 텐데 이름조차 모른다니. 하지만 귀찮음과 짜증이 가득한 선배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실해 보였다.

“뭐,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든 나가서 식량을 찾아봐야 할 거 아냐. 이유진이랑 서인규가 감염됐다고 우리까지 죽으란 법은 없잖아.”

“이번엔 네가 나가게?”

윤준석의 말문이 막혔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뭔 소리야! 왜 내가 가야 하는데? 내가 아니라, 그래. 네가 나가. 너랑 정호현이. 너희 둘이 우리가 먼저 와 있던 곳에 무임승차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선배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피식 웃고 가운뎃손가락을 건성으로 들어 보였다. 윤준석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준석 오빠 말이 틀린 건 아니에요. 그래도 언젠간 나가기는 해야 하잖아요.”

최다빈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온 얼굴이 흠뻑 젖고 눈이 발갛게 부은 채였다. 온종일 울더니 이젠 조금 진정됐는지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맞아. 지금 3일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뒈질 것 같다고. 샤워기 물로 배 채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전 식량 찾으러 나가는 거 찬성이에요. 인규 오빠랑 유진이는……. 어떻게든 해야겠지만. 이대로 영원히 갇혀 있을 순 없어요.”

“야, 박건우. 너는?”

“…….”

“어쭈. 씹냐?”

“나, 나간다는 건요. 밖에 있는 사람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죠.”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럼 어쩌게. 우리가 나가게 비켜 달라 한다고 저것들이 친절하게 재깍 비켜 주겠어?”

“그럼 전 안 갈래요. 못 가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유진이를.”

웅크려 앉은 박건우는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네 여친 뒈졌다니까? 밖에 있는 건 이유진이 아니라 좀비라고, 좀비. 어? 적이란 말이야. 게임 몬스터 같은 거.”

“흐으, 흐, 흑…….”

신랄한 윤준석의 말에 박건우의 울음이 다시금 터졌다. 그는 속에서부터 쥐어짜 내는 것 같은 소리로 오열했다. 결국 보다 못한 최다빈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2 대 1이네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선배는 상대방을 쳐다보지도 않고 냉큼 대답했다.

“나는 호현이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최다빈이 어리둥절해하는 낯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얼떨떨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선배가 언제 나를 저렇게 신경 썼다고? 사람을 천하의 머저리 취급 하면서 질질 끌고 다닐 땐 언제고.

“쟤한테 물어봐. 난 호현이가 나가지 말자고 하면 안 나갈 거고, 나가자고 하면 나갈 거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님 의견은요?”

“글쎄.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데. 그냥…….”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선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웃음기 없는 시선이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가 돌연 표정을 바꾸어 싱긋 웃었다.

“정호현만 있으면 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신경을 타고 올랐다.

“그럼 오빠 생각은 어때요?”

“그래. 이 자식 얘기하는 거 들어 보고 정하자. 그럼 되겠네.”

네 쌍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다. 선배가 의사 결정을 자신 몫까지 떠넘겨 버렸으니 내게 캐스팅 보트가 주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샤워실은 완벽한 요새였다. 두꺼운 철문에 도어록이 달려 있고, 샤워실 벽은 죄다 대리석 재질이라 몹시 견고했다. 난방이 펑펑 돌아가고 수도꼭지만 돌리면 맑은 물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는 세면도구와 수건까지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물자가 없었다. 식량을 구하려면, 그리고 혹시 모를 탈출의 기회를 잡으려면 나가야 했다. 간신히 얻은 안락함을 포기하고 문을 열어야 했다. 밖에 죽었다 되살아난 시체가 최소 두 구 있는 걸 알면서도.

나를 보는 이들의 표정이 각자 달랐다. 박건우는 공포에 질려 있었고, 최다빈은 각오를 다졌는지 결연한 얼굴이었으며, 윤준석은 빨리 결정하라고 눈치를 주듯 짐짓 인상을 썼다. 그리고 선배는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이런 상황은 딱 질색이었다.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가운데 내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 부담스러웠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잘되면 우리 덕이고 안되면 내 탓이 될 게 뻔했다.

이래서 적당히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었던 거다.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들끼리 설치게 내버려 두고 뒤에서 맞장구나 쳐 주면서, 가늘고 길게.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왜 이런 상황에 던져져서, 왜 하필 우리 학교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서. 나는 입매를 끌어 올렸다.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간신히 만들어 냈다.

“일단 좀 더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바깥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건우도 마음 다스릴 시간이 좀 필요할 테니까. 그래도 해결 안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죠.”

나온 답은 결국 애매한 중립이었다.

* * *

널찍한 샤워실에 불이 꺼졌다. 각자 멀찍이 떨어진 구석에 누워 입고 있던 외투를 이불 삼아 잠을 청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잠들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몇십 시간째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한 위장이 쓰라렸다. 온몸이 축축 처지는 데 반해 정신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어둠 속에서 홀로 눈을 뜨고 불 꺼진 천장을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작은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차가운 달빛을 바라보기도 했다. 모든 일상이 순식간에 망가졌는데도 밤하늘만큼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캠퍼스 기숙사에 갇혀 있다는 것이. 바깥에 괴물이 되어 버린 시체들이 돌아다니고, 당장 문 하나만 열어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바깥에서도 이변을 알아챘을 것이다. 재학생 수만 해도 2만 명에 가깝고 교직원들을 합치면 수가 더 많을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연락이 끊겼으니 당연한 일이다. 당장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대규모 구조대가 출동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방이 너무도 잠잠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길가에는 구조대가 나타나기는커녕 이미 죽은 사람들이 부패한 몸을 이끌고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나마 지금이 겨울이라 다행이었다. 여름이었다면 빠르게 썩어 가는 살에서 나는 악취가 코를 찔렀을 테니까.

부모님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는 아들을 걱정하고 계실까. 이 넓은 캠퍼스 안에 생존자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과연…….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끝 모를 의문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피로에 절어 깜빡 얕은 잠이 들었다. 가라앉은 의식 너머로 어렴풋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웅얼대는 사람 말소리도. 눈을 떴다. 그 와중에 수면 부족으로 머리가 띵하게 아파 눈살을 찌푸렸다.

온통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은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나 말고 다른 누가 또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걸까. 뻑뻑한 눈을 깜빡이고 주변을 살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샤워실 안의 풍경이 어슴푸레하게 나타났다.

저 구석에서 제 팔을 베고 잠든 최다빈의 등이 얼핏 보였다. 반대편엔 패딩을 이불 삼아 배에 덮은 채 사지를 대자로 뻗고 자는 윤준석이 있었다. 한 사람이 없었다. 불을 끄기 전만 해도 박건우가 누워 있었던 자리에는 잔뜩 구겨진 옷가지만 남아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나와 비슷하게 일어난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그의 새까만 눈이 언뜻 빛났다.

“선배.”

잔뜩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새어 나갔다. 선배는 대답 대신 스르르 눈을 돌렸다. 한순간 얽혔던 시선이 도로 풀렸다. 나 또한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유진아, 내가 미안해. 그동안 많이 추웠지. 힘들었지.”

박건우는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복도 형광등 빛이 가늘게 스며 들어오는 문틈에 이마를 박고 기대어 선 채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나만 살겠다고 모른 척해서 미안. 지금 열어 줄게. 미안해…….”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해한 순간, 나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망설일 틈 따위는 없었다.

“건우야. 안 돼, 박건우!”

도어록 버튼을 누르는 박건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그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 빨랐다. 철컥. 훤히 열린 문 바깥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화악 밀려들었다. 한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강한 조명에 노출되는 바람에 눈이 찡하게 아팠다.

“윽.”

“뭐야?”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지자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하나같이 사태 파악을 못 한 듯 부스스한 몰골이었다. 그들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 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오지 마세요!”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갔다. 내가 언성을 높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이들이 놀라 움찔했다.

문 바로 앞에 눈부신 빛을 등져 새까맣게만 보이는 형체가 있었다. 바닥에 웅크리듯 쓰러져 있다가 비척비척 일어섰다. 사지가 기괴한 형상으로 삐걱거렸다. 지저분하게 뒤엉킨 머리채가 흘러내렸다.

“유진아…….”

박건우는 검은 형체를 향해 무방비하게 다가섰다. 말갛게 번진 형광등 빛에 그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미안해.”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유진이, 아니, 한때는 이유진이었던 것이 달려들었다. 살점 씹히는 소리가 났다. 살갗이 죄다 문드러진 손이 박건우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썩은 피가 아닌 산 사람의 붉은 피가 확 뿌려졌다.

나는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에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뺨에 뜨뜻한 것이 후드득 튀었지만 닦아 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박건우가 목에서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광경이 묘하게 느리게 보였다. 인코딩이 잘못되어 깨져 버린 동영상을 재생한 것 같았다. 사방에 튄 시뻘건 피가 공포 게임이나 영화보다도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끄극, 끅.”

그는 버려진 마네킹처럼 바닥에 쓰러져 턱을 떨었다. 입에서 꾸역꾸역 피거품이 일었다. 그 위로 시커먼 형체가 타고 올랐다. 피와 오물에 절어 시커먼 색이 되어 버린 편의점 조끼가 눈에 들어왔다.

문 너머에서 다른 것이 팔다리를 질질 끌며 나타났다. 이번엔 남자였다. 그는 우악스럽게 달려들어 박건우의 다리를 깨물었다. 청바지 원단이 질겨 이가 잘 들어가지 않자 손톱이 다 빠지고 없는 손으로 종아리를 벅벅 할퀴고 앞니로 마구 긁어 댔다. 잇새로 섬뜩한 괴성이 흘러나왔다.

“아.”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정수리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공포가 흘렀다. 온몸이 빠르게 차가워졌다.

“미친, 박건우, 야, 인마.”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다를 것 없었다. 윤준석이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최다빈이 찢어지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박건우의 몸에 머리를 처박고 입가가 시뻘겋게 물들도록 살점을 씹어 먹던 것들이 고개를 들었다. 오염된 두 쌍의 눈동자가 우리를 향했다. 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위험을 직감했다.

“도망…….”

도망쳐,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 순간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벌벌 떠는 최다빈에게 이유진이 달려들었다. 말을 마칠 틈이 없었다.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목을 낚아채 내 뒤로 보냈다. 간발의 차이로 허옇게 뼈가 드러난 팔이 허공을 갈랐다. 이유진은 자꾸만 푹푹 꺾이는 고개를 힘겹게 들어 중심을 잡았다. 으스러진 턱 아래로 누런 침이 뚝뚝 떨어졌다.

“다빈아. 정신 차려!”

“오, 오빠.”

“무슨, 이게, 뭐야. 시발……. 뭐냐고.”

윤준석이 횡설수설했다. 선배가 가볍게 받아쳤다.

“뭐긴 뭐야. 야식 처먹으러 온 새끼들이지.”

그는 이 상황에서조차 긴장감이 없었다. 공포에 사로잡히기는커녕 침착했다.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유진은 이번엔 바닥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못 하는 윤준석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끔찍한 몰골의 상대를 가까이서 마주한 그는 기겁을 했다.

“흐아악!”

퍽! 윤준석이 무심코 팔뚝을 내밀어 달려드는 이유진을 막았다. 이유진은 그가 입고 있던 두꺼운 패딩에 입이 막혔다. 그녀는 두툼한 소매를 잘근잘근 씹으며 몸부림쳤다. 갈 곳 잃은 손이 허공을 헤집었다.

“큭, 컥!”

“덤벼! 다 덤벼, 이 새끼들아!”

그는 이유진에게 물린 패딩을 벗어 던졌다. 한 번 방어에 성공하고 자신감이 생겼는지 잔뜩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다. 그 덕에 뒤에서 박건우의 다리를 뜯어 먹던 서인규까지 다가오기 시작했다.

윤준석은 순식간에 두 명의 좀비에 둘러싸였다. 이대로 있다간 그까지 박건우 꼴이 날 판이었다. 곁에 있던 물건을 보지도 않고 집어 던졌다.

“피해요. 빨리!”

하필 손에 잡힌 게 샤워실에 공용으로 비치된 대용량 샴푸 통이었다. 묵직한 플라스틱 용기가 힘차게 날아가 서인규의 옆머리를 갈기고 떨어졌다.

“와, 시발. 어그로 끌려서 죽을 뻔했네.”

윤준석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서인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쯤 으깨져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이 내게 원망을 쏟아 내는 것 같았다. 너 그때 방 안에 있었잖아. 내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 들었잖아. 그런데 왜 안 구해 줬어? 너 때문에 죽었어. 그때 네가 모른 척하지만 않았어도.

“헉…….”

팔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상대의 시선을 내게로 돌려놨으니 뭐라도 조치를 해야 하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야 뼈저리게 느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영화에 나오는 CG나 게임 몬스터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은 현실이었다. 너무 끔찍해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는 현실.

서인규가 내게로 비틀비틀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을 무렵, 선배가 불쑥 나타나 그를 세게 걷어찼다. 상체가 단숨에 꺾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발을 들어 뒷머리를 콱 찍어 눌렀다. 상대를 최소한의 인격체로도 보지 않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잠깐만 혼자 놔두면 꼭 이러지.”

그는 언제 가져왔는지 한 손에 도끼를 들고 있었다. 서인규가 발밑에서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데도 태연자약했다.

“후배님, 한눈팔지 말고 내 옆에 붙어 있으랬잖아요. 아무튼 말귀 한번 더럽게 못 알아 처먹는다, 그렇지?”

“…….”

“후배님은 좋겠다. 존나 막 살아도 돼서.”

곧 서인규가 그를 뿌리치고 일어섰다. 선배는 당황하지도 않고 훌쩍 물러섰다. 도끼날이 허공을 갈랐다.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 서인규의 턱이 일격에 쪼개졌다. 위턱과 아래턱이 벌어져 혀와 입천장이 낱낱이 드러났다.

“으악!”

옆에 있던 윤준석이 지레 놀라 펄쩍 뛰었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그의 패딩 위에 시커먼 피가 확 뿌려졌다.

“저 새끼들 상대할 땐…….”

선배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바닥에 고꾸라진 서인규의 가슴을 발로 밟아 누르고 다시 도끼를 치켜들었다.

“재만 남을 때까지 불에 태우든가.”

퍽!

“모가지를 완전히 따서, 몸이랑 분리시켜.”

퍽!

“그래야 다신 안 움직여.”

으깨진 살점이 마구잡이로 튀었다. 차마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뒤집히려는 속을 억누르고 시선을 돌렸다. 최다빈은 탈의실 가운데 놓인 벤치를 두고 이유진과 대치하고 있었다. 차마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피하기만 했다.

“캬아아악!”

이유진이 괴성을 질렀다. 근육이 반 이상 뜯겨 나간 목이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툭 꺾였다. 나는 편의점에서 저 모습을 이미 한 번 보았지만 최다빈은 아니었다.

“흐, 으, 아…….”

패닉에 빠진 그녀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 있던 로커 문에 등이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이유진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최다빈을 챙기러 거기까지 갈 틈이 없었다. 내 앞에 있던 벤치를 다급하게 밀쳤다.

예상보다 효과가 좋았다. 흉측한 괴물로 변이했다지만 기본적으로 작고 마른 체구의 여자애였다. 무거운 벤치에 허리와 허벅지를 세게 부딪친 이유진이 속절없이 비틀거렸다. 그 틈을 타 벤치 한쪽 모퉁이를 들어 올렸다. 아예 몸을 통째로 눌러 움직임을 봉쇄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금속으로 된 벤치는 뜻대로 들리지 않았다.

“준석 형, 도와주세요!”

“어, 어…….”

“헉, 으읏. 빨리요!”

아까부터 윤준석은 넋을 놓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거친 숨을 색색 내쉬며 탁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큭.”

젖 먹던 힘까지 짜내었다. 이유진이 팔을 휘저어 나를 붙들기 직전에 벤치를 뒤엎어 그녀를 깔아뭉개는 데 성공했다.

“크르륵. 컥!”

이유진이 긴 벤치 아래에 깔린 채로도 격렬하게 버둥거렸다. 핏줄이 터지고 고름이 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귀를 찢는 듯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광경이었다.

“딱 붙들어 놨네? 나 대가리 따기 좋으라고?”

내 옆으로 선배가 불쑥 나타났다. 서인규 쪽을 완전히 정리한 모양이었다.

“잘했어.”

그는 이유진의 턱을 축구공 차듯 세게 걷어찼다. 뻐억! 관절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목이 끊어지진 않았다.

“쓸데없이 질겨 가지고는.”

그는 귀찮게 됐다는 듯 짧은 한숨을 쉬고 도끼를 치켜들었다. 꿈틀대며 저항하는 이유진의 목을 망설임 없이 내려쳤다. 목 근육은 이미 절반 이상 손상된 상태였다. 단번에 머리통이 잘려 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를 잃은 시체가 벤치 아래에서 축 늘어졌다.

“유, 유진, 아…….”

참혹한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최다빈이 로커에 간신히 기대앉은 채로 온몸을 경련했다. 눈에 초점이 나가 있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선배의 등 뒤에서 달려드는 박건우를. 그는 목과 팔다리가 피범벅인 채로 절뚝절뚝 움직였다.

“선배!”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선배를 확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박건우가 몸을 날렸다. 그는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박건우의 상체가 속절없이 로커 문에 부딪쳤다. 선배가 빠르게 중심을 잡더니 내게 눈짓했다.

“로커 문 열어 놔.”

“어느 로커요?”

“내 뒤쪽!”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손에 닿는 로커를 아무거나 열어젖혔다. 목을 긁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박건우가 다시 선배를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의 머리는 닫힌 문 위가 아닌 로커 안에 처박혔다. 눈앞에 장애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구별할 지능조차 없는 것 같았다.

“크아악!”

박건우가 버둥거렸다. 그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쳐 빠른 속도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달려가 그의 뒷머리를 퍽 밀어 도로 처넣었다. 뒤늦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손에 박건우의,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따끈따끈한 체온이 남은 시신의 감촉이 선명했다.

“헉.”

손이 마구잡이로 떨렸다. 토할 것 같았다.

“웬일이야, 후배님. 웬일로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굴어. 나 오늘 생일인가?”

선배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피투성이 도끼를 쳐들어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의 숨통을 서슴없이 끊었다.

야밤의 사투가 끝났다.

* * *

복도에 켜진 형광등 빛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와 안을 어스름하게 비추었다. 엷은 빛으로도 실내가 온통 피범벅이 된 것이 보였다. 난장판이 된 탈의실에 제각기 처참한 모습으로 고꾸라진 시체가 세 구 있었다.

최다빈은 아직까지도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지 못했다. 로커 벽에 기대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손 틈으로 억눌린 울음이 새어 나왔다.

“우욱. 웩!”

저만치 구석 쪽에서 토악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윤준석이었다.

온통 검붉은 색으로 덕지덕지 칠해진 사방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

무릎이 멋대로 풀썩 꺾였다. 눈앞이 까맣게 잦아들었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귓가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들렸다. 자꾸만 몸이 푹푹 고꾸라지려 해서 힘겹게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에 뜨뜻하고 질척한 피가 묻었다. 가쁘게 몰아쉬는 스스로의 숨소리가 몹시도 역겹게 느껴졌다.

“이것도 이제 못 쓰겠네.”

선배가 시큰둥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도끼는 피와 살점이 처덕처덕 묻어 엉망이었다.

“손맛은 좋은데 날이 너무 빨리 나간단 말이지.”

그는 못 쓰게 된 도끼를 아무 데나 툭 던졌다. 팔다리를 기괴하게 꺾고 쓰러진 박건우의 시체 옆에 도끼가 나뒹굴었다.

“…….”

그의 태연한 언행에 소름이 끼쳤다. 삼류 고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꼴로 죽어 있는 시체들보다도 선배가 더 무서웠다.

사람이었다. 정체불명의 병원체에 감염되어 괴이하게 변해 버렸다 한들 한때 사람이었다. 저들 중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이야기하고 잠들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런 상대의 목을 자르고 팔다리를 토막 낼 수가 있는가. 살육에 신물이 난 도살자처럼. 보통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죽이는 경험이라고는 게임에서밖에 없었을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따닥따닥 부딪치는 어금니를 억지로 악물었다. 정신 차려야 했다. 일단 일어나서 주변을 수습하고, 최다빈과 윤준석을 진정시키고, 다음 계획을 논의하고, 그리고, 그다음엔.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서 내가 나서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냥 포기하고 싶었다. 넋을 놓고 가만히 있으면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대책을 제시해 줄 테니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결국 끝은 절망일 텐데, 굳이 살아남으려 독기를 품고 발버둥 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노력해 본들 결국은 나도 저들과 같은 꼴이 될 텐데.

“후배님.”

그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는 무덤덤한 음성이었다. 눈을 떴다. 선배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 묻었네. 씻으러 가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도끼를 휘두르던 손은 핏물에 담갔다 뺀 듯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무심결에 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그와 다를 것 없었다. 피 칠갑을 한 바닥을 짚고 있었던 탓에 손바닥과 손가락이 온통 시뻘건 색이었다.

“욱……!”

속이 확 뒤집혔다. 도로 고개를 푹 숙이고 헛구역질을 했다. 오랫동안 먹은 게 없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선배는 그런 나를 묵묵히 기다렸다. 그의 손은 끝내 잡지 않았다.

* * *

수십 개의 샤워기가 나란히 붙은 내부는 불을 켜지 않아 컴컴했다. 서늘한 냉기에 실려 수돗물 소독약 냄새가 났다. 샤워실 전체가 뻥 뚫린 수챗구멍 같았다. 안으로 홀린 듯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샤워기 앞에 서서 기계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쏴아아. 차가운 물이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졌다. 피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물을 맞았다. 물줄기가 머리카락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 시야를 가렸다.

“정신 어디 빼놨어? 옷은 벗고 씻어야지.”

팔목이 잡혔다. 선배가 물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돌려세웠다. 캄캄한 샤워실을 배경으로 그의 얼굴 윤곽이 창백하게 도드라졌다. 그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내가 입고 있던 셔츠 칼라를 젖혔다. 가장 위에 있던 단추가 툭 풀렸다.

저 손은 고작 몇 분 전에 사람의 머리를 잘랐던 손이다. 내가 입은 옷엔 고작 몇 분 전에 죽은 사람의 피가 튀었다.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기도 안으로 썩은 피 냄새가 물씬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만!”

날카로운 외침이 튀어 나갔다.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은 물에 젖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 그만하세요.”

“정호현.”

“이거 놔요!”

발작적으로 선배를 밀쳤다. 가슴이 세게 떠밀렸는데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서늘하고 습한 어둠 속에서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그가 조용히 물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

앞머리에서 물이 뚝뚝 흘러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힘겹게 심호흡을 했다.

“싫고 아니고 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안 돼? 저것들 사람 아니야. 내가 몇 번이나 더 말해야 알아 처먹을 거야. 징징거리지 말고 정신 차리라니까. 응?”

“선배가 말하는 정신 차린다는 게, 눈에 띄는 대로 무작정 도륙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 미끼로 써서 살아남는 거고요? 그런 식으로 살아남을 바에야, 전 차라리.”

“그래, 차라리. 차라리 뭐?”

“…….”

“후배님, 넌, 정말. 사람 병신 만드는 데 재능이 있어.”

“…….”

“한 번만 더 그따위 쓸데없는 소리 해 봐. 내 손으로 죽여 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테니까.”

선배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셔츠 옷깃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나는 참지 않았다. 팔을 들어 그의 손길을 확 뿌리쳤다.

“이것 봐라?”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혀끝이 느릿하게 아랫입술 위를 훑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팔목을 잡혔다.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억센 힘이었다. 팔이 위로 확 꺾인 채 벽에 거칠게 떠밀렸다. 샤워기 버튼이 등에 눌렸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윽!”

잠시 멈췄던 물줄기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미 젖어 있던 나는 물론이고 선배까지 빠르게 젖어 들어갔다.

“야, 넌 내가 좆같이 싫지?”

그가 거리를 좁혔다. 무표정한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가슴끼리 맞닿고 다리가 얽혔다. 숨이 막혔다.

“싫어서 미치겠다고 얼굴에 써 붙여 놓고는, 싫단 소리는 한 마디를 안 하네? 허구한 날 속도 없이 실실 쪼개는데, 비위 맞추려고 억지로 웃는 게 빤히 보이고.”

그가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낮은 목소리가 흥분으로 예민해졌다. 우리가 뒤집어썼던 피가 온수에 섞여 차츰 씻겨 나갔다.

“그냥 다 적당히 넘기고 싶다, 귀찮은 것도 싫고 주목받는 것도 싫다. 넌 매번 그딴 식이잖아. 꼴에 도덕은 더럽게 챙겨서 혼자 고고한 척은 다 하지.”

선배의 말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가슴 한구석이 푹 찔린 듯 아팠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제껏 살고 싶다고 생각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워 적당히 흘려 넘겼다. 사람을 죽여 놓고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냐고 선배를 비난하면서도 정작 위급할 땐 그의 뒤에서 안락함을 누렸다. 기숙사 방에 잠깐 숨었을 때도 문밖에서 살려 달라 외치던 사람을 구하러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면서 결국은 선배에게 의존했다.

그래, 적어도 나는 그에게 어쩜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냐고 따질 자격이 없었다.

“그놈의 좆같은 가식 좀 버려. 끝까지 착한 놈으로 남고 싶어? 그러다 네가 뒈지는 한이 있어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 조금 갈라진 소리로 속삭였다.

“알아? 정호현. 너……. 존나 잔인해.”

무심코 그의 손아귀에 잡힌 팔을 빼내려 했다. 그가 어림도 없다는 듯 힘을 가했다. 뼈를 죄다 으스러뜨려 버릴 듯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다. 짤막한 신음이 터졌다.

팔목을 단단히 쥐고 있던 손이 위로 스르르 올라왔다. 내 손마디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단단히 깍지를 꼈다. 끊임없이 퍼붓는 물에 젖어서인지, 늘 약간 체온이 낮은 편이던 선배의 손에 온기가 돌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의 속눈썹을 타고 흐르는 물이 내 뺨에 떨어질 만큼. 샤워기에서 쏟아지던 물이 어느새 멈추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허벅지가 내 다리 사이로 깊게 파고들었다. 전신의 근육이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어졌다. 흐르는 물줄기 사이로 서로의 거친 숨소리가 떠돌았다.

묘한 감각이 하반신을 괴롭혔다. 처음엔 착각이려니 했다. 몸이 뻣뻣해져 있어서 잘못 느낀 거라고. 하지만 그 감각은 갈수록 적나라해졌다. 무시하려고 해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허벅지가 진득하게 뒤얽힌 채, 상대의 것이 점차 피가 몰려 단단해지고 있었다. 남자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감각이었다.

“…….”

나는 경악했다. 충격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내 동요를 눈치챈 선배가 샐쭉하게 웃었다.

“선배.”

“왜, 예쁜아.”

또 나왔다. 저 경악스러운 호칭. 혹시 선배는 나를 자기 애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세상 어느 미친놈이 애인을 보자마자 도끼를 질질 끌며 쫓아오고, 애인에게 숨 쉬듯이 폭언을 퍼붓는단 말인가. 그랬다간 당장에 따귀를 왕복으로 50대쯤 맞고 차일 거다.

“잠깐만요, 다리 좀.”

“싫은데.”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아까까지 긴장이 고조되어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아슬아슬했던 분위기가 지금은 다른 쪽으로 아슬아슬해지려 하고 있었다. 당황으로 연달아 눈을 깜빡였다. 젖은 속눈썹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하반신을 어떻게든 빼 보려 했지만 벽과 샤워기가 뒤쪽을 가로막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선배님, 조금만 비켜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몹시 비굴해 보이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간 자꾸만 주어지는 자극에 본의 아니게 나까지 반응해 버릴 것 같았다.

“응. 꺼져 줄게. 네가 몸으로 나 위로해 주면.”

“저번처럼 또 안아 드리면 되나요?”

“아니, 그거 말고.”

“네?”

“그때 네가 상상했던 거 있잖아. 이번엔 그렇게 해 줘.”

불현듯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만든 동그라미 안을 푹푹 쑤시던 선배의…… 아니다, 그만하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무슨 말씀이신지 전 도무지.”

“알잖아, 이렇게.”

내 손을 벽에 찍어 눌러 깍지를 낀 선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허리를 퍽 밀어붙였다. 하체가 빈틈없이 맞붙어 눌렸다.

“읏……!”

완전히 힘을 받아 기세등등해진 것이 내 사타구니를 콱 짓이겼다. 어찌나 두툼하고 딱딱한지 불편하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인정하긴 더럽게 싫지만, 그의 자신감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바깥엔 시체가 뒹굴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데, 물에 쫄딱 젖은 남자 후배와 몸을 맞대며 발기하다니. 미쳤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제껏 수없이 미쳤다, 미쳤다 했지만 이렇게 미쳤을 줄은 몰랐다. 기영원 선배님께서는 진짜 미친 새끼였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꼴리잖아.”

“서, 선배, 헉, 제발 그만.”

“와, 야해라. 점점 참을 자신 없어지는데.”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야하기는 개뿔이. 나는 꼴사납게 헐떡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찼다. 충격과 거북함에 몸서리치는 나를 즐겁게 관찰하다가, 선배가 불쑥 웃음기를 지웠다. 성격 나빠 보이는 얼굴에 표정이 사라지자 한층 서늘한 분위기를 띠었다.

“호현아.”

아까와는 어조부터가 달랐다. 반사적으로 움찔 긴장했다.

“네.”

“약속하자. 나랑. 함부로 죽겠다는 말 안 하겠다고, 함부로 안 죽겠다고.”

“…….”

“약속해. 그럼 놔줄게.”

“……약속할게요.”

“약속 꼭 지켜. 네가 기억 못 하게 되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꼭.”

약속하지 않겠다고는 장난으로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언제 나를 숨도 못 쉬게 밀어붙였냐는 듯 훌쩍 떨어져 나갔다. 따뜻한 물을 잔뜩 뒤집어썼는데도 한기가 들었다.

“선배, 죄송해요.”

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순전히 충동이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선배가 한 말을 다 알아들은 건 아니에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납득했어요. 맞아요. 제가 나빴어요. 이제껏 선배 뒤에 숨어서 답답하게 군 거요. 부담 갖기 싫어서 내뺀 것도요.”

“…….”

“이해가 안 돼요. 선배가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 제게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시는지.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선배에게 그만한 잘못을 했겠죠. 그것도 사과드릴게요.”

선배는 내 말이 끝난 후로도 한동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낯으로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뒤늦게 조금 후회되었다. 괜히 나섰나. 쓸데없는 소릴 했다고 또 목숨을 위협당하고 욕을 얻어먹는 건 아니겠지.

“정호현.”

단단한 손이 내 손등을 힘 있게 감싸 쥐었다. 이제 그의 체온은 나보다 높았다. 잡힌 곳이 델 듯이 뜨거웠다. 그 상태로 덜컥 끌어당겨졌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선배의 새까만 눈동자 가운데 동공이 확 조여드는 게 보일 정도로.

“너, 진짜……. 어쩌려고 이래.”

선배가 피식 웃었다. 평소처럼 묘하게 빈정대는 듯 날티 나는 웃음이 아니었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자꾸, 기대하게 되잖아.”

“…….”

저 말은 또 무슨 의미일까.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있는 사이, 그는 잡은 손을 툭 놓았다. 그가 나가 버린 후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오빠, 호현 오빠! 나오셨어요?”

흠뻑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대강 문질러 닦고 샤워실을 나서자마자 최다빈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급하게 다가가 보았다.

“다빈아?”

그녀는 탈의실 중에서도 제일 안쪽에 있는, 모퉁이에 가려져 입구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있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시신들이 널브러진 전투 현장에서 도피하려는 것처럼.

“여기 좀 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이야?”

“준석 오빠가 이상해요. 아까부터 자꾸 숨소리가 이상하고, 정신을 못 차려서. 혹시 어디 아픈가 싶어서요.”

최다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 피투성이 패딩을 덮고 웅크려 누운 윤준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전투가 막 끝났을 무렵부터 줄곧 저 상태였다.

“형. 형? 괜찮으세요?”

그의 곁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까이서 이름을 부르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그를 흔들어 보았다. 대답 대신 두툼한 패딩 아래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패딩을 확 걷었다. 까무잡잡한 편이던 그의 피부가 허옇게 질려 있었다. 얼굴이며 목덜미가 땀으로 흥건했다. 차마 그의 몸에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최다빈 대신 열을 재 보았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열이 심해.”

“몸살이라도 난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다. 밥도 못 먹고 온갖 고생을 했으니까.”

“해열제는 1층 관리실에나 가야 있을 텐데요. 아, 아니다. 종합 감기약 정도는 편의점에도…….”

심각하게 말을 늘어놓다 말고 최다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편의점이라는 단어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떠올랐을 것이다. 머리가 잘려 나간 채 피 웅덩이 가운데 쓰러진 여자애가. 무릎을 감싸고 쪼그려 앉은 그녀의 몸이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악다문 입술 너머로 흐느끼는 것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심정을 나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눈을 감으면 처참한 최후를 맞은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한데. 숨을 쉴 때마다 코끝에 피비린내가 감돌아 구역질이 날 것 같은데. 이대로 계속 끔찍한 생각을 떠올리게 할 순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 일단 내가 수건에 찬물 적셔서 가져올게. 선배는?”

“기영원 선배님요?”

“응.”

그 선배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선배를 언급하는 최다빈의 낯빛이 묘하게 어두웠다.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떨떠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 나가셨어요. 주변 살피고 오신댔어요.”

“그래?”

“저, 있잖아요. 호현 오빠. 우리끼리만 있으니까 하는 얘긴데요.”

“응.”

“그 선배님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전에도 한번 그랬잖아요. 선배님 원래는 저런 성격 아니었던 것 같다고요.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것 같아요.”

“뭐가 이상한데?”

“너무 익숙하잖아요. 다들 죽니 사니 하면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안 되는데. 혼자서만 무슨 게임 플레이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다빈아. 지금 네 말은 그 선배가 의심스럽단 거야?”

뾰족한 물음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내가 들어도 필요 이상으로 날이 서 있었다.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아까도 기영원 선배님 없었으면 우리 다 죽었을 거예요. 근데 그냥 좀.”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여전히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소름 끼쳐요.”

“…….”

몇 시간 전의 나였다면 그 말에 마음 깊이 동의했을 터였다. 이제껏 선배의 수상함을 가장 생생히 느낀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일 테니까. 그 인간 진짜 제정신 아니라고, 돌아도 단단히 돌았다고 열변을 토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맞장구를 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어설프게나마 두둔하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흐, 으윽.”

최다빈과 나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침묵이 깨졌다. 윤준석이 괴롭게 신음했다. 핏기 없는 입술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아무리 재수 없게 구는 놈이라지만 저렇게 앓는 꼴을 보니 좀 측은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수건부터 적셔 올게.”

샤워실에 다녀오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윤준석이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때 보았다. 끌려 올라간 티셔츠 자락 아래, 그의 옆구리에 선명히 새겨진 시뻘건 잇자국을. 어찌나 모질게 물어뜯겼는지 살점이 푹 패었다. 둥글게 난 자국을 따라 시뻘건 속살이 언뜻 보였다.

조금 전 사투를 벌이는 내내 윤준석은 넋이 나가 있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판국에 저 혼자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때 부상을 입었으리라.

“으, 크윽, 큭…….”

신음에 가래가 끓는 듯한 쇳소리가 섞였다. 등을 돌리고 누운 그의 몸이 가파르게 들썩였다. 언뜻 보면 그냥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 같지만, 자세히 보니 팔다리가 자꾸만 기괴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최다빈 또한 이상함을 감지하고 내 곁에 붙어 섰다.

“오, 오빠.”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이대로 윤준석과 한 공간에 있을 순 없었다. 그를 내보내든지 우리가 나가야 했다.

아까의 경험을 통해 학습했다. ‘그들’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곧 변이했다. 애인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참혹한 몰골로 되살아났다가 선배의 손에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 박건우처럼. 이대로 있다간 나와 최다빈까지 그 꼴이 될 터였다.

윤준석은 체격이 크고 살집이 있었다. 어림잡아도 체중이 90킬로그램은 넘어 보였다.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상태라 더욱 무거울 것이다. 최다빈과 내가 힘을 합친다 해도 널찍한 탈의실을 가로질러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성공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꽤 걸리겠지. 게다가 등에 업거나 질질 끌어서 옮기던 와중에 그가 변이하여 달려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너무 위험했다.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그가 완전히 변하기 전에 숨통을 끊는다는. 하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감염되었다 할지언정 윤준석은 아직 사람이었다. 펄펄 끓는 열에 시달리며 아파하는. 선배라면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산 채로 썰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저기 보세요. 준석 오빠가.”

최다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괴롭게 몸부림치던 윤준석이 잠잠했다.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모로 웅크린 자세 그대로 바닥에 축 늘어져 있을 뿐.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숨이 멎었다. 그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곧 변이가 일어날 터였다. 박건우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컴컴한 탈의실에는 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피와 살점으로 미끈거리는 바닥에 시신들이 널브러졌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지금은 목소리를 높여 가며 대신 방향을 제시해 줄 선배들이 없었다. 다수결을 방패로 어중간하게 발을 뺄 여유 또한 없었다. 더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어떡하죠?”

최다빈이 공황 상태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그 목소리 위로 선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놈의 좆같은 가식 좀 버려. 끝까지 착한 놈으로 남고 싶어? 그러다 네가 뒈지는 한이 있어도?〉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앞에 나서서 설치는 것도. 무슨 상황이든 그냥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내 신조였다. 좀비 아포칼립스라고? 학생들이 캠퍼스에 갇혀 떼죽음을 당한다고? 웃기지도 않았다.

평소에도 그런 주제를 다룬 영화나 게임 따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딴 건 모니터 너머로 보기만 해도 기가 빨렸다. 만약 정말 좀비 사태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감염된 다음 좀비 동료들 틈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겠다고, 친구들과 가볍게 농담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그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되어야 한다니. 참 거지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쿵쿵 뛰는 가슴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마른세수를 했다. 엉망진창이던 머릿속이 제법 차분해졌다.

“나가자.”

최다빈이 화들짝 놀라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여기서 나가야 돼. 나가서 일단 선배랑 합류하자.”

“하지만 밖은…….”

“위험할지 아닐지, 나가 보기 전까진 모르지. 그리고 이 안은 100퍼센트 위험하고.”

“그래도, 오빠.”

“너, 준석 형이 다시 일어나면 형 죽일 각오로 싸울 수 있어?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도끼 들고 저 형 머리 날릴 수 있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최다빈의 손을 잡았다. 그대로 서둘러 밖을 향했다.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착실하게 따라왔다. 어두컴컴한 탈의실을 가로질렀다. 일분일초가 급해서 벽에 붙은 형광등 스위치를 더듬어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

피로 바닥이 흥건했다. 최다빈이 작게 비틀거렸다. 그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괜찮아?”

“네. 발이 미끄러져서.”

“조심해. 잘 따라와.”

어렴풋이 보이는 형체에만 의존하여 출구를 향했다. 문에 달린 도어록 버튼을 누르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끄극…… 커, 컥!”

뒤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빈아, 문!”

“못 찾겠어요. 안 보여요!”

뚝. 뚜둑. 관절이 꺾이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숨이 멎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기도 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잠깐만.”

갈팡질팡하다 주머니 속에 처박아 놓은 스마트폰에 생각이 미쳤다.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마음이 급해 그 간단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몇 번 헛손질을 했다. 액정이 발하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간신히 문을 열었다. 사방이 확 밝아져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열린 문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시커먼 것이 달려들었다.

“읏……!”

황급히 몸을 돌렸다. 수직으로 방향을 틀어 문 바로 옆으로 피했다. 맞은편 벽에 육중한 형체가 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벽에 몸을 크게 들이박은 윤준석이 비틀대며 어렵게 중심을 잡고 섰다. 목이 뿌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기괴한 각도로 틀어졌다.

그는 죽은 자 특유의 표정 없는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허옇게 질린 얼굴 곳곳에 혈관이 터져 울긋불긋 금이 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을 쉬고 살아 있던 사람이라, 이유진이나 서인규처럼 몸이 부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섬뜩한 모습이었다.

윤준석이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그에게 일어난 비극에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복도를 따라 달렸다.

“어디로, 헉, 가죠?”

“일단 따돌리자. 무기가, 없어서……. 하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나도 최다빈도 달리면 달릴수록 숨이 가빠 왔다. 산소가 모자라 머리가 핑핑 돌고 폐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비상사태에 젖 먹던 힘까지 짜내고는 있지만 우리 둘 다 원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숨이 찰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산골짜기에 있다 보니 놀 곳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이런저런 운동을 했던 내가 최다빈보다 그나마 약간 나았다.

따돌리자고 말하긴 했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도망만 칠 수는 없었다. 하염없이 추격전을 벌여 봤자 불리한 건 우리였다. 저쪽은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으니.

일직선으로 쭉 이어지는 복도가 끝나고 계단이 나타났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윤준석은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쿵쿵 발을 울리며 용케 우리를 쫓아왔다. 계단 난간 사이로 아래층, 그리고 그다음 아래층 난간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층층이 겹쳐진 디귿 자 형태였다. 그것을 보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반대편 계단으로 가자.”

“헉, 허억, 하…….”

그녀를 잡아끌고 아래층 복도를 역으로 가로질렀다. 필사적으로 나를 따라오는 그녀의 몸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이따가, 네 손을 놓을 건데.”

“오빠?”

“그러면 뭐든지……. 뭐든지, 때릴 거 찾아와.”

“그게, 무슨.”

일일이 설명해 줄 틈이 없었다.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1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우리를 쫓아오는 윤준석의 눈에 시뻘겋게 핏발이 섰다. 멋대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끈적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아까 물린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지금쯤 생존자들을 뒤쫓는 건 윤준석이 아니라 나였겠지. 내가 살아남고 윤준석이 희생당한 건 내가 윤준석보다 대단한 사람이어서도, 뛰어나서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우리는 곧 반대쪽 복도 끝에 도착했다. 기숙사 복도는 좌우 대칭으로, 양쪽에 계단이 있는 형태였다. 아까와 똑같이 생긴 난간이 보였다.

“다빈아, 지금!”

최다빈의 손을 뿌리치듯 놓고 그녀를 확 떠밀어 보냈다. 그녀는 비틀대며 복도 가장자리로 떠밀렸다. 윤준석은 함께 달아나던 최다빈이 갑자기 시야 밖으로 빠져나갔는데도 여전히 나를 노렸다. 나만을 목표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반대 상황이었으면 난감해질 뻔했다.

“크아아악!”

윤준석이 괴성과 함께 달려들었다. 그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어 움찔대는 몸을 억누르고 기다렸다. 아직은 아니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마침내 쩍 벌린 그의 입 안에 있는 벌건 잇몸과 치아가 보일 때까지 거리가 가까워졌다. 지금이었다. 나는 확 몸을 낮추어 옆으로 구르듯 피했다. 윤준석은 내가 빠져나가고 나서도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그의 몸이 고스란히 철제 난간에 부딪쳤다. 텅! 요란한 소리가 온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난간은 그의 허리까지 왔다. 상체의 무게 중심이 순간 밖으로 쏠렸다. 윤준석은 난간 너머로 양팔을 내밀고 속절없이 버둥거렸다.

“여기요!”

최다빈이 달려왔다. 어디서 찾은 건지 손에 묵직한 수험서를 들고 있었다. 때릴 걸 찾아오랬더니, 내가 예상한 범주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걸 잘 가져왔다. 그녀는 책을 들어 윤준석의 머리통을 연달아 후려갈겼다.

“죽어. 좀 죽어, 이 새끼야!”

최다빈이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그녀가 든 책의 표지가 언뜻 보였다. 〈토익 리스닝, 한 권으로 확실히 때려잡기〉. ‘확실히 때려잡기’ 부분에 뻘건 피가 점점이 튀었다. 한 편의 구역질 나는 블랙 코미디 같았다. 그 틈을 타 윤준석의 다리를 퍽 걷어찼다. 윤준석의 발이 허공에 떴다.

“크아, 큭, 캬악…….”

난간에 배를 걸치고 대롱대롱 흔들리던 그는 점점 바깥쪽으로 넘어갔다. 한번 체중이 실리자 걷잡을 수 없이 가속이 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모습이 난간 너머로 사라졌다.

쿠웅! 사방을 뒤흔드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이 책을 휘두르던 최다빈도, 가차 없이 발길질을 한 나도 동시에 우뚝 굳었다.

“…….”

“…….”

승리의 기쁨 따윌 만끽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긴장과 흥분이 빠져나간 자리를 자괴가 메웠다. 나는 방금 끔찍한 짓을 했다. 사이가 좋지는 않았을지언정 한 공간에서 동고동락했던 동료를 내 손으로 떠밀었다. 이미 한 번 죽었다 되살아난 사람이라고, 걸어 다니는 시체일 뿐이라고 변명해 봤자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윤준석은 여기서부터 최하층까지 곧장 떨어졌으니 전신이 성하지 않을 것이다. 사지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올 거야.”

“네?”

“준석 형, 다시 올 거야. 도망가야 해.”

선배가 말했다. 재만 남을 때까지 불에 태우거나 아예 머리를 몸에서 분리시켜 놔야 한다고. 그래야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고.

“그렇지. 도망가야지. 똑똑하네, 우리 호현이.”

뒤에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기도 전에 팔이 불쑥 뻗어 나와 내 허리를 휘감았다. 몸이 확 끌려갔다. 전투가 막 끝나 안심하던 와중이었다. 나도 최다빈도 깜짝 놀랐다.

선배였다. 한 손엔 평소에 들고 다니던 소방 도끼 대신 웬 박스가 들려 있었다. 아까 최다빈과 한 대화가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뒷말을 해 버린 것 같아 괜히 그를 볼 낯이 없었다.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선배는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숨죽여 웃었다.

“나도 데려가. 응?”

* * *

위층 샤워실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도어록이 처참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배터리 커버가 저만치 날아가고, 안에 가지런히 들어 있어야 할 건전지들은 다 어디 가고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를 맹목적으로 쫓아오느라 문에 몸을 들이받던 윤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 도어록에 충격이 간 게 아닐까.

어디를 구르고 있을지 모르는 AA 건전지 세 개를 일일이 찾아다 끼울 수는 없었다. 그 전에 윤준석에게 붙잡혀 목숨이 달아날 터였다. 그러나 도어록이 작동하지 않는 샤워실 문은 몹시 허술했다.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눌러 수동으로 잠글 수는 있었지만 충격을 받으면 곧장 열리는 수준이었다.

“완전히 맛이 갔네.”

한 팔에 상자를 끼고 한 손만으로 도어록을 살펴본 선배가 깔끔하게 선언했다. 최다빈이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 이제 어쩌죠? 우리 어디 가요?”

한시가 급했다. 최하층까지 떨어져 참혹한 몰골이 된 윤준석이 언제 쫓아올지 몰랐다.

“그런데, 얘들아.”

그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까만 머리가 사르륵 흐트러져 귓바퀴에 달린 은제 피어싱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지금 조심해야 할 게 그 새끼만 있는 건 아니거든.”

영문도 모른 채 불길해졌다.

“너희가 하도 요란하게 깽판을 쳐서, 다른 층에서도 다 들리던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사무치는 불안함에 입을 꾹 다문 나 대신 최다빈이 질문했다. 선배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뜻이긴. 우리 좆됐다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어설프게 닫혀 있던 생활실 문이 열렸다. 그 틈으로 무언가 빠져나왔다.

“끄으…….”

그것은 시커멓게 썩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엉금엉금 기었다. 벌레처럼 꿈틀대며 어렵사리 문지방을 넘었다. 하체까지 문밖으로 빠져나오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양다리가 잘려 나가고 없었다. 찢어진 바지 자락이 시커먼 피에 절어 있었다.

지나온 자리를 따라 검붉은 핏자국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무작정 우리에게 다가왔다. 쩍 갈라진 복부 안쪽으로 언뜻 내장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게 보였다.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덜컥, 덜컥, 부스럭. 곳곳에서 작은 소음이 들렸다. 우리가 윤준석을 유인해 난간 너머로 떨어뜨리며 낸 소리가 다른 이들을 자극한 것이다.

“이야, 여기 있는 새끼들 다 깨웠네? 집합시켜서 점호라도 하게?”

선배가 무덤덤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 말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돌아왔다. 그것이 입을 크게 벌려 괴성을 질렀다.

“캬아악!”

그와 동시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돌렸다. 구르다시피 하여 계단을 내려갔다. 주변을 살펴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1층이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식당의 풍경이 언뜻 보였다. 큼직한 유리문 앞에 로비에 있던 집기들을 죄다 가져다 쌓아 놨다. 손잡이에 굵은 체인이 칭칭 감긴 게 보였다.

“식당 쪽은 안 돼요!”

최다빈이 절박하게 외쳤다. 기숙사에 처음 감염이 퍼진 게 식당에서부터였다고 했다. 거기가 지금 어떤 꼴일지 알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 안쪽을 가리켰다.

“저기 들어가자.”

열람실 표지판이 보였다. 중앙 도서관보다는 훨씬 못하지만 기숙사에도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바깥쪽에 정수기와 소파가 있는 휴게실이 있고, 거기서 문 하나를 더 열면 칸막이가 달린 책상들이 잔뜩 늘어선 열람실이 나오는 식이었다.

계단을 타고 위층에서부터 쿵쿵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우리를 찾아내기 전에 모습을 숨겨야 했다.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갔다. 최다빈과 선배가 무사히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급히 문을 걸어 잠갔다.

열람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하얀 형광등 불빛이 평온하게 실내를 비추었다.

“헉, 허억…….”

긴장이 탁 풀렸다. 이제껏 참고 있던 숨이 일시에 터졌다. 문짝 위에 등을 기댔다. 그러다 힘이 빠져 주르르 미끄러졌다.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 내린 선배가 내 옆에 기대어 호흡을 고르고, 최다빈이 옷에 먼지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심코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벽에 귀를 댄 채 집중하고 있던 선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우리는 엉금엉금 기어 소파에 엎어졌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최다빈이 꾹 참고 있던 숨을 토하듯 말했다.

“흐아, 살았다…….”

“그러게.”

“영화 보면 왜, 사람들이 좀비 보고 멘탈 나가는 장면 있잖아요. 잽싸게 도망가도 모자랄 판에 빽 소리 지르고 주저앉아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요. 저 그런 거 볼 때마다 답답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민폐만 끼친다고.”

그녀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소매로 문질렀다. 자조 어린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근데 제가 이 상황 돼 보니까 알겠어요. 몸이 안 움직였어요. 이대로 있으면 죽을 거 뻔히 아는데. 그냥 그랬어요. 진짜, 바보같이.”

최다빈은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곱슬곱슬하게 펌을 한 그녀의 단발머리가 마구잡이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래도 윤준석 그 새끼는 진짜 잘 죽었어요. 저 후회 안 해요. 더 많이 못 때린 게 후회되면 모를까. 그런 인간은 죽어도 싸요.”

“…….”

“잘 죽은…… 거, 맞죠? 우리 잘못한 거 아니죠. 그렇죠?”

분위기가 한없이 침울해지려 했다. 나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선배, 그 상자는 뭐예요? 아까부터 들고 계셨는데.”

“이거?”

선배는 아직까지도 옆구리에 상자를 끼고 있었다. 짐까지 든 채로 도주를 감행했으면서도 그다지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가 상자 입구를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 나는 내용물을 보고 말을 잃었다. 비닐로 개별 포장된 컵라면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오다 주웠어.”

“헉, 라면이에요? 미쳤다. 대박.”

최다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우울해하고 있던 것도 잊은 듯했다. 선배와 나, 두 남자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멋쩍게 웃었다.

“하핫.”

그것이 시작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내가 그녀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즐겁고 행복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이상하게도 절로 웃음이 났다. 이 상황 자체가 웃겼다. 조금 전까지 생과 사를 오갔으면서 먹을 것에, 그것도 고작 컵라면 따위에 반응하는 게.

웃음은 전염병처럼 점점 크게 번졌다. 우리는 미친 사람들처럼 웃고 또 웃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옆머리를 기대고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최다빈은 배를 잡고 뒹굴며 웃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내가 웃는 걸 지켜보던 선배까지 눈매를 휘며 싱긋 웃었다.

“저…….”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웃느라 듣지 못했다.

“저기요.”

두 번째가 되어서야 알아챘다. 여기에 우리 말고 다른 존재가 또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웃음을 뚝 그치고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열람실로 통하는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우리를 보았다. 저마다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안도감과 반가움이 반, 불안함과 의심이 반이었다.

“그쪽 분들……. 혹시 위층에서 오셨어요?”

“어, 언니?”

그 물음에 반응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최다빈이었다.

“성아 언니, 여기 있었어?”

그녀는 홀린 듯 일어나 비척비척 걸어갔다. 상대도 얼떨떨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기를 잃은 눈에 빛이 돌아왔다.

“다빈아.”

“언니 혹시나 잘못됐나 싶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나 여기 있었어. 나도 너 계속 찾았는데, 전화도 안 되고.”

“흐으…….”

문이 열렸다. 최다빈은 여자의 품에 뛰어들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가 목 놓아 울었다.

“흐, 흑, 으아아앙!”

* * *

열람실 안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휑했다. 줄지어 놓여 있던 칸막이 달린 책상들이 치워진 자리에 둥그스름한 공터가 생겼다. 책상은 바리케이드가 되어 문을 막는 데 쓰였다. 열람실 문은 기숙사의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허술한 나무 재질이었지만, 그 앞에 묵직한 책상을 여러 개 쌓아 올리자 제법 견고해졌다.

“여기요.”

휴게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온 컵라면을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저희 이대로 갇혀서 굶어 죽는 줄 알았어요.”

이제껏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컵라면을 받았다. 면이 익는 3분을 못 기다리고 허겁지겁 라면을 휘저어 보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 며칠은 책상 뒤져서 초콜릿이랑 사탕 같은 거 찾아 먹었는데, 그것도 얼마 안 돼서요. 편의점이랑 식당은 갈 엄두도 못 냈고요. 정말 감사해요.”

“아, 네.”

떨떠름하게 웃었다. 감사 인사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닌데. 정작 컵라면을 찾아온 선배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에 아무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열람실 안에는 공부하던 학생들이 놔두고 간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방석과 목 베개, 무릎 담요부터 시작해서 텀블러와 나무젓가락까지. 덕분에 맨손으로 라면을 먹어야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포슬포슬한 극세사 담요를 두르고 둥글게 모여 앉았다. 각자의 앞에 놓인 일회용 용기에서 뜨거운 김이 폴폴 피어올랐다. 한참을 울던 최다빈은 이제 좀 진정됐는지 코를 훌쩍이며 언니라 부른 여자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

식사는 놀랄 만큼 조용했다.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먹는 내내 누군가 코를 훌쩍였다. 라면이 매워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국물 한 방울까지 깨끗이 비웠다.

오랜만에 섭취하는 음식물이었다. 혀와 식도, 위장이 기쁘게 요동쳤다. 내가 이렇게 본능적인 인간이었나 싶어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빈 용기를 모아서 구석에 치워 두고 마주 앉았다. 배가 좀 차자 대화할 여유가 생겼다.

“저희는 쭉 여기서 생활했어요. 화장실은 교대로 망보면서 바로 앞에 있는 곳 급하게 다녀오고요.”

“저희는 위층 남자 샤워실에 있었어요. 다른 사람 몇 명도 같이 있었는데…….”

무심코 이야기를 꺼냈다 도중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들의 죽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럼 그쪽 분들은 기숙사 내부에 계속 계셨던 거예요?”

“네, 그렇죠.”

“저희는 각자 달라요. 기숙사 방에 있다가 나온 사람도 있고, 밖에서 들어온 사람도 있고.”

“저요.”

열람실에 있던 일행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다들 제대로 못 자고 못 먹어 몰골이 말이 아니라지만, 그는 그중에서도 특히나 초췌해 보였다.

“저는 도서관에 있었어요. 중도요. 급하게 도망쳤어요.”

무심코 머릿속으로 캠퍼스 지도를 떠올려 보았다. 중앙 도서관은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이었다. 저 사람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한밤중에 여기까지 도망쳐 왔을까.

“도망쳤다고요? 중도에는, 그러니까, 그것들이 많은가요?”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이요?”

“네.”

“네, 그, 그렇죠. 물론 많긴 한데.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남자가 어설프게 말을 더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이상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거기는……. 사람이 제일 무서웠어요.”

“…….”

“큰 싸움이 났어요.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려 들고.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런 거. 이상하잖아요. 우린 그냥 평범한 학생들인데.”

여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다행이죠. 여기는 적어도 학생들끼리 해코지를 하지는 않으니까.”

“원래 기숙사 사셨어요?”

“네. 아, 맞다. 소개를 안 했지. 전 조성아라고 하고요. 다빈이 룸메예요. 철학과.”

그녀가 짤막하게 학번을 댔다. 나보다 선배였다. 이 상황에 선배인지 후배인지, 몇 학번인지를 따지는 게 부질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일단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경영학과 정호현입니다. 저쪽은…….”

일행에서 떨어져 혼자 시간을 죽이고 있던 선배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선배는 그 시선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죄다 무시하며 내게 손짓했다.

“후배님, 이리 와.”

“저 지금 다른 분들이랑 인사하고 있는데.”

“이름 기억해서 뭐 하게? 어차피 다 뒈질 건데.”

“…….”

“…….”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배려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선배는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재차 나를 불렀다.

“현아, 이리 오라니까. 나 혼자 놔두지 마. 네가 없으니까 또 기분이 좆같아지려고 하잖아.”

그 입 좀 제발 다물어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니, 아예 달려가서 선배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재앙을 부르는 주둥아리란 바로 저런 것일까.

“……네, 선배.”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약하며, 불의를 보면 잘 참는 인간이니까. 우리 둘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차마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다 미안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난처하게 웃어 보였다. 그들이 부디 내 무언의 사과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가 냉큼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자마자 팔이 확 당겨졌다. 순식간에 나는 그의 옆에 앉게 되었다.

“어딜 빨빨거리고 돌아다녀.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게.”

“그냥 사람들이랑 통성명만 한 건데요.”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잖아. 왜 그렇게 목숨 아까운 줄을 몰라.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우리 후배님은 자살 시도를 좀 신기한 방식으로 하네? 그렇게 죽고 싶었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죄송해요. 또 제가 잘못했어요. 저 죽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혹시나 이 골 때리는 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까 봐 최대한 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선배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내 말을 듣다 희미하게 웃었다. 서늘하게 트인 눈매 위로 검은 속눈썹이 사뿐히 드리워졌다.

그는 친근함이나 선량함과는 거리가 멀게 생겼다. 몸에 무서운 문신이 잔뜩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의 벗은 상체에는 문신이 아니라 그보다 더 무서운 흉터가 가득했지만, 아무튼 말이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저 웃음은 그걸 다 만회할 만큼 예뻤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선배가 그냥 평범한 대학생처럼 느껴졌다.

“있잖아, 후배님.”

“네.”

“나 섰어.”

취소다.

“너 잔뜩 쫄아 있는 얼굴 보니까 이렇게 됐잖아. 어떻게 할 거야. 응? 책임져야지.”

“…….”

나는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고 필사적으로 앞만 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의 하반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를 빤히 보던 선배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더 쫄았네.”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놔두고 간 세면도구 세트를 슬쩍 빌리고 휴게실의 정수기에서 받은 물로 씻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 잘 자리를 만들었다. 폭신폭신한 쿠션을 베고 무릎 담요를 덮고 누웠다.

가장 급한 문제인 배고픔을 해결하자 사람들은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늘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있던 최다빈은 룸메이트와 이야기하며 종종 웃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니까 꼭 MT 온 것 같다.”

“MT는 무슨. 그게 지금 할 소리야?”

“누가 뭐래. 그냥 느낌이 그렇단 거지.”

나란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속닥속닥 농담 섞인 대화가 오고 갔다.

“있잖아요. 다들 여기서 나가게 되면 뭐 하실 거예요?”

누군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전 제일 먼저 부모님 뵈러 갈래요. 친척들이랑 친구들도.”

“나는 밥부터 먹고 싶다. 방금 지은 따끈따끈한 쌀밥에, 돼지고기 잔뜩 넣은 김치찌개, 스팸에 계란 묻혀서 굽고…….”

“야, 먹을 거 얘기하지 마. 안 그래도 배고파 죽겠단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난 치킨. 간장 순살로. 아니다, 간장 한 마리 양념 한 마리 시켜서 나 혼자 다 먹을래. 배 터지게 먹고 뻗어서 잘 거야.”

“나는 스트리밍 채널 만들어서 내가 겪었던 일들 얘기하는 방송 할 거야. 벌써 제목도 정해 놨거든. ‘충격 실화. 학교에 갇혀서 좀비 사태 경험한 썰 푼다.’ 구독자 폭발하겠다. 와, 나 스타 스트리머 되는 거 아냐?”

“가능할까? 오빠 얼굴로?”

“야, 인마. 말로 사람 패는 거 아니다. 스트리머가 꼭 잘생겨야 하냐?”

이제 대화의 주제는 ‘구출된 후 언론에서 인터뷰를 할 때 무슨 말을 할 것인가.’로까지 넘어갔다. 저들은 이제껏 함께 지냈던 사이였고, 최다빈도 아는 사람이 있기에 쉽게 대화에 끼었다. 완전히 초면인 나와 선배만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마저 자장가처럼 달콤하게 들렸다. 오늘 밤은 왠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컵라면 한 박스는 금세 동났다. 잠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도로 침체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삼가고 열람실 안에만 머물렀다. 거기다 책상을 쌓고 또 쌓아 바리케이드를 쳤다. 복도를 정찰하거나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조차 극도로 꺼렸다.

좋게 말해서 신중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방어적인 행동이었다. 적어도 샤워실에 있던 사람들은 조를 짜서 식량을 찾으러 나갈 생각을 했었는데. 다른 곳에서 험한 일을 겪고 간신히 도망쳐 온 사람도 있어서인지 모두가 움츠러들어 있었다.

전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 문을 열면 맞은편에 식당 출입문이 보였으니까. 손잡이를 쇠사슬로 칭칭 휘감고 갖가지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은 데서 악에 받친 광기가 느껴졌다. 그 어떤 ‘출입 금지’ 표시보다도 강렬했다. 저 안이 대체 어떤 꼴이 되어 있을지를 상상하면 몸을 사리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우리는 학생들이 열람실에 놔두고 간 짐을 샅샅이 뒤지고 또 뒤졌다. 뒤져 봤자 별게 없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오늘 내내 찾았는데 이것뿐이에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량을 배급받았다. 손바닥에 작은 젤리 두 개가 톡 떨어졌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곰돌이 모양이었다. 이름 모를 학우의 백팩 구석에 구겨져 있던 젤리 한 봉지를 간신히 찾아낸 것이었다. 그것마저도 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나누려니 한 사람 앞에 고작 두 개가 떨어졌다.

“이것만 먹고 어떻게 버텨.”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젤리를 냉큼 받았다. 오늘 처음 입에 넣는 음식물이었다. 그러나 배고픔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 우리 내일부터 또 굶어요?”

“짜증 나, 진짜.”

모두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은 상태였다. 그때 누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만 없었어도 하나씩은 더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작은 목소리였지만 밀폐된 공간에 같이 있다 보니 너무도 잘 들렸다. 내게 주어진 젤리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다가 흠칫했다. 가슴이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 아팠다. ‘저 사람들’이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작 젤리 하나였다. 먹어 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가는. 하지만 스트레스와 허기가 사람들을 한계까지 내몰았다.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평소처럼 잡담을 주고받고 앞으로 있을 일을 의논했다. 모든 것이 조금 전과 같았다. 하지만 공기가 묘하게 서늘해진 느낌이 들었다.

“밖에 나가서 먹을 걸 찾아봐야 할 것 같아.”

다음 날, 싹 털어서 젤리 한 알 남지 않은 열람실을 둘러보던 조성아가 선언했다.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데다 기숙사 생활을 오래해서 여기 사정에 빠삭한 그녀가 리더 노릇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언니, 음식을 구할 만한 데가 없잖아. 식당은 못 들어가고, 편의점은……. 그렇게 됐고.”

최다빈이 반박했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 의아함을 표했다.

“맞아요. 얘기 들어 보니까 다른 층도 별다를 것 없다고 하던데요.”

“누나, 혹시 다른 건물로 옮겨 가자는 거 아니죠? 그럼 전 빠질래요. 두 번 다신 그 짓 못 해요.”

“사실, 식량이 있긴 있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조성아가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식당에.”

“아, 난 또 뭐라고.”

“그건 저희도 알아요.”

사방에서 김빠진 한숨 소리가 들렸다. 사태가 발발하기 직전까지도 식당에서 학생들이 평화롭게 식사를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음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필사적으로 막아 놓은 문을 무슨 용기로 도로 연단 말인가. 그 안에 대체 무엇이 있을 줄 알고.

“너희 조리실 위치 알지? 배식 창구 건너편에. 거기 재료가 보관돼 있을 거야. 다른 건 몰라도 냉동식품은 안 상했을 거고.”

“거기까지 가려면 어쨌든 식당 안에 들어가야 하잖아. 그 식당엘 어떻게 들어가냐고!”

마침내 다른 사람이 왈칵 신경질을 냈다. 자꾸 허황된 소리만 하는 그녀에게 화가 난 듯했다. 조성아가 그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화물용 엘리베이터.”

사방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뒷문으로 나가서 지하 주차장에 가면 구석에 엘리베이터가 있어. 식자재 배달 오면 바로 운반할 수 있도록. 화물용이긴 한데 꽤 커서 사람 한두 명쯤은 들어갈걸. 그거 타고 올라가서 식량 가져오면 될 것 같아. 그럼 식당 쪽 안 통하고도 갈 수 있어.”

기숙사에 오래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업무용 차량만 드나들 수 있는 지하 주차장에 가 본 학생은 손에 꼽을 터였다. 그 안에 화물용 승강기가 있다는 걸 아는 학생은 더 적을 거고.

“와…….”

누군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는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왜 그 얘길 지금 해? 굶어 죽는 줄 알았잖아.”

“뭘 뜸을 들여요. 빨리 가져오자고요.”

“어쨌든 나가야 하잖아. 요 앞 화장실 잠깐 다녀오는 거랑은 달라. 잠깐이지만 아예 기숙사 밖에 나가야 한다고. 위험할 거야. 지금까지보다 훨씬. 그래서 섣불리 말 못 꺼냈어.”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서로 흘끔거리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나갈 것인가. 누가 모두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녀올 것인가.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살면서 눈치 때문에 손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럴 때면 좀 싫었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되어 버리니까.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졌다. 공기가 살갗을 따끔따끔 찌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죄송한데요. 거기 두 분이 다녀와 주시면 안 될까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았다.

“아니, 너무 나쁘게만 듣진 마시고요. 저희는 지금껏 여기 자리 잡으려고 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그쪽 분들은 저희가 터 다 닦아 놨더니 몸만 들어온 거잖아요. 그쪽도 그만한 수고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

“우리끼리 생각해 봤는데, 이대로는 좀 불공평한 것 같아서요. 솔직히 지금 식량 부족 때문에 고생하는 것도 인원 늘어서 그런 게 없지 않아 있고.”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반대하는 이 또한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나와 선배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슬아슬한 침묵.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저게 선배가 가져온 컵라면을 하하 호호 맛있게 나누어 먹던 사람들이 할 말인가. 항의하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는 이방인이었다. 항의해 봤자 미움만 더 살 뿐이었다.

하지만 그냥 순순히 네 알겠습니다, 하고 수긍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조성아 곁에 서 있던 최다빈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배와 내가 나중에 온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나가야 한다면 그녀 또한 당연히 나가야 했다.

“아…….”

내 시선을 받은 최다빈이 움찔했다. 차마 나와 눈을 못 마주치고 쭈뼛쭈뼛했다. 그러다가 나중엔 아예 고개를 돌려 모른 척 피해 버렸다. 심장이 싸하게 식었다.

“…….”

조성아는 그녀를 슬쩍 밀어 자신의 뒤로 보냈다. 그래, 아끼는 동생이라 못 내보내겠다 이거지. 나는 처음 보는 놈이니 맨손으로 사지에 나가도 상관없고.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지랄도 가지가지 하고 앉았네.”

선배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싸늘하던 분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가워졌다.

“야, 부탁을 할 거면 솔직하게 해야지. 뒈져도 너희들이 대신 뒈져 줬으면 좋겠다 이거잖아.”

“아니, 저기요. 무슨 말을 그렇게!”

누군가 울컥해서 언성을 높였다.

“밥은 처먹고 싶고, 직접 가지러 가긴 무섭고?”

선배를 노려보는 사람들의 낯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음식 하나 제힘으로 못 찾아 처먹는 게 꼴에 살아 보겠다고.”

이대로 두면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을 것 같았다. 급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손을 내밀어 선배의 손을 힘 있게 쥐었다. 선배가 아주 짧은 순간 흠칫했다.

“네. 알겠어요. 갈게요. 가라니까 가겠는데요.”

날 선 시선들이 내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나는 습관처럼 웃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가능한 한 또렷하게 말했다.

“선배 말대로 차라리 그냥 까놓고 말하지 그랬어요. 우리가 생판 남이라서 내보내는 거라고. ……그게 그나마 기분이 덜 더러울 것 같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열람실을 나섰다. 선배는 사납게 빈정거리다가도 막상 내가 다녀올 것을 자처하자 별말 없이 동행했다. 사람들은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예 식량 들고 다른 데로 콱 도망가 버릴까.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올 곳이라곤 결국 여기밖에 없었다. 저들도 그걸 알아서 우리를 가차 없이 내보낸 거겠지.

단단히 봉쇄된 식당 문이 보였다. 유리문 너머로 언뜻 무언가 움직인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리로 눈길을 주었다. 내가 본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테이블과 의자가 잔뜩 놓인 식당에 죽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밀폐된 공간을 배회했다.

얼굴이 처참히 찢겨 나가 피범벅이 된 사람이 문 바로 앞에 서 있다가 내 쪽을 보았다.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너덜너덜해진 뺨과 절반 넘게 뜯겨 나간 입술 너머로 썩어 문드러진 속살이 고스란히 보였다.

“헉…….”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제껏 잔인한 모습을 수없이 보면서 면역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보지 마.”

선배가 손을 뻗어 내 눈을 덮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던 끔찍한 광경이 가려졌다. 나는 선배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는 식당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가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서늘한 손이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기영원 선배님.”

“네, 정호현 후배님.”

선배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다녀오겠다고 한 건 전데 왜 선배까지 나오셨어요? 선배는 납득 못 하셨잖아요. 절대 안 간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어떻게 혼자 보내요. 후배님 혼자 나가겠다고 하는데.”

“그래도 선배까지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네가 죽으러 가겠다고 하면 나도 따라갈 거야. 네가 죽여 달라고 하면 내 손으로 죽여 줄 거고. 뭘 하든 상관없는데 내가 보는 데서, 내 옆에서 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내가 들은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가 산산이 부서져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선배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 갑자기 킥킥 웃었다.

“갑자기 뭔 미친 소린가 싶지? 내가 병신 같아 보이지?”

“…….”

“괜찮아. 나도 그러니까.”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뚝 그치고 입을 다물었다. 대관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앞장서 가는 선배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기계적으로 발을 놀리면서도 생각은 다른 데 가 있었다. 복도 끝에 난 문 앞에 섰다. 까치발을 하고 팔을 뻗어 위쪽에 있는 잠금장치를 풀었다. 이 너머는 기숙사 밖이었다.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우리를 숨겨 줄 벽과 문이 없는 바깥.

“문 열게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칼바람이 확 밀려들었다. 줄곧 실내에서만 생활하느라 잊고 있었던 겨울이 몰아닥쳤다. 선배는 그나마 외투라도 입고 있다지만, 나는 셔츠에 얇은 카디건 차림이었다. 오한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한겨울의 캠퍼스는 쓸쓸하고 적막했다. 하늘은 회색에 가까운 칙칙한 연청색이었다. 통행로를 따라 심은 가로수의 잎이 죄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를 드리웠다. 출입 금지 표지판이 붙은 울타리 너머로 노랗게 시든 잔디밭이 보였다.

“아.”

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손을 들어 무심코 슥 훔쳤다. 손등에 물기가 묻어났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하늘에서 하나둘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쌀알 같은 눈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살을 에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멋대로 나부꼈다.

“선배, 눈 와요.”

그 광경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내가 들어도 얼빠진 놈 같았다. 목숨 걸고 식량을 구하러 나온 판국에 눈 타령이라니.

“그러네.”

그러나 선배는 내 말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잖아요, 선배는. 여기서 나가게 되면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기왕 머릿속이 꽃밭이 된 김에 헛소리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날 때부터 피 묻은 도끼를 들고 태어났을 것 같은, 아니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그런 선배에게도 일상으로 돌아가면 하고 싶은 게 있을지 궁금했다.

“글쎄. 있었던 것 같은데 까먹었어.”

“…….”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그냥, 궁금해서요.”

“이상하네. 너 나 싫어하잖아.”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시선이 내게서 비껴가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 싫어해요. 그 말이 입술 안에서 맴돌았다가 사그라졌다.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어.”

선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공기 중에 새하얀 입김이 퍼졌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머리에 흰 얼굴. 오래된 시집에 실린 흑백 사진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선배의 말은 항상 수수께끼 같았다. 눈을 가리고 앞을 더듬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그와 대화하는 매 순간마다 새롭게 의문이 피어났다. 두려워하고 꺼림칙해하면서도 알아선 안 될 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었다. 눈을 가린 손 틈새로 공포 영화를 끝까지 보고, 반창고 아래의 곪아 터진 상처를 눈살을 찌푸리고 기어이 들춰 보듯이.

나는 원래 타인에게 그리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윤준석이 패악을 부려도, 최다빈이 배신을 해도, 가슴 한구석이 차게 얼어붙긴 했지만 큰소리 내지 않고 넘어갔다. 그들에게 애초에 애착을 가지고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선배는 예외였다.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굴었다면 몰라도, 그가 뭔가 비밀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 버린 순간 결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그가 던지는 엉뚱한, 가끔은 섬뜩한 말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쏠렸다. 다른 극의 자석이 어쩔 수 없이 끌리듯.

반듯하게 뻗은 선배의 콧잔등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추위 탓에 어느새 코끝이 조금 발그스름해져 있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지, 선배는 몸을 휙 돌려 지하 주차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주차장 입구를 가로막은 차단 바 아래로 지나갔다. 지하 특유의 퀴퀴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먼지 쌓인 지하 주차장 안에서도 가장 구석진 벽면에 있는 승강기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 * *

화물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조성아의 말대로 엘리베이터는 제법 컸다. 배식용 카트나 끌차가 무리 없이 들어갈 정도였다. 선배와 내가 서고도 한참 남았다. 층 버튼은 두 개밖에 없었다. 지하와 지상.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자 문이 삐걱삐걱 닫혔다. 엘리베이터는 몹시 느리게 움직였다. 괜히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운 좋게 식량이 가득 차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벌써 누군가 싹 털어 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엔 문이 열리자마자 습격당할 수도 있겠지.

“조리실에까지 그것들이 들어와 있으면 어쩌죠? 우린 지금 무기도 없는데.”

“뭐, 싸우는 데까지 싸워 봐야지. 그러다 안 되면 죽는 거고.”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비참한 죽음을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는 너무도 태연해 보였다. 집 앞에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무심한 말을 툭 던져 놓고, 선배는 뒤늦게 생각난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긴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휘어 눈웃음을 쳤다.

“그래도 기왕이면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지?”

나는 말없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 호현이가 내 손도 잡아 주고, 하고 싶은 거 없냐고 먼저 물어도 봐 줬는데. 죽으면 아깝잖아.”

“…….”

“아, 하고 싶은 거 생각났다.”

“뭔데요?”

선배가 활짝 웃으며 한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다음에 이어질 동작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아, 아니요. 뭔지 알겠어요. 알아 버렸어요. 죽어도 알기 싫었는데. 아무튼 말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고 그를 뜯어말렸다. 마음 같아선 다른 쪽 검지와 중지를 움켜쥐고 확 꺾어 버리고 싶었다.

덜컹. 쿵! 미적미적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위층에 도착했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여 몸을 바짝 굳혔다.

조리실은 끝에서 끝까지 달리기를 해도 될 만큼 널찍했다. 조리 기구와 식기세척기, 차곡차곡 쌓인 식판들이 보였다.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허리 높이로 난 배식 창구 너머로 식당을 배회하는 형체들이 언뜻언뜻 보일 뿐이었다. 일단은 다행이었다.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에 일이 터졌던지라 조리실은 그 시간에 고스란히 멈춰 있었다. 대형 냄비 안에 가득 담긴 미역국이 그대로 상해 버렸다. 개수대에 산처럼 쌓인 설거지거리에도 곰팡이가 피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큼직한 업소용 냉장고를 발견했다. 문을 열자 한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안에는 식재료들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고기는 벌써 거무죽죽하게 변했고, 채소는 숨이 다 죽었고. 까나리액젓…… 은 가져가 봤자 소용없을 것 같고. 그나마 돈가스와 만두를 비롯한 냉동식품 몇 가지가 괜찮아 보였다.

비어 있는 통 몇 개를 찾아 가져갈 것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가득 담자 양팔로 들었는데도 꽤 무거웠다.

“선배, 여기요. 사람 수대로 가져가려면 혼자선 못 들 것 같아요. 좀 도와주세요.”

“그 새끼들 다 먹여 살리게?”

“어쨌든 가져가긴 해야죠.”

“대단한 성인군자 납셨네.”

선배는 나를 거들어 주기는커녕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하여간 남 돕는 건 더럽게 좋아하지. 제 몸 하나 간수 못 하는 게. 네 목숨부터 챙겨.”

“저라고 그 사람들 맘에 드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일단 다 같이 살고 봐야 하니까.”

“그러다 네가 뒈져도?”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냐, 됐어. 그래. 그래야 정호현답지.”

선배는 살래살래 고개를 젓더니 멋대로 대화를 중단했다. 내가 그를 노려보는 것도 깔끔하게 무시했다. 내가 들고 있던 통이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먹을 것이 든 통을 옮겼다. 일은 식량을 거의 다 날랐을 때쯤에,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무사히 나가기만 하면 될 때쯤에 벌어졌다.

냉동식품 더미 위에서 만두 한 봉지가 떨어졌다. 꽁꽁 언 만두 봉지가 스테인리스 조리대에 큰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도로 튕겨 나가 사방에 부딪치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고요하던 조리실에 소음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너무 시끄러워 귀가 다 아플 정도였다.

나도, 그리고 선배조차도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우리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하염없이 식당을 절뚝절뚝 걸어 다니던 것들이 제자리에 섰다. 무의미하게 흘리던 가래 끓는 소리 또한 뚝 멎었다. 불길한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륵. 크아아악!”

수많은 감염자들이 일제히 배식 창구에 달려들었다. 팔이 없는 사람, 두상이 푹 패어 뇌가 드러난 사람, 안구가 밖으로 빠져나와 덜렁이는 사람. 온갖 끔찍한 몰골의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들러붙었다. 탐욕스럽게 몸부림치며 창구 안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썼다.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뻗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친 듯이 연타했다. 빌어먹을 엘리베이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나 굼뜬 속도로 문이 열릴 것이다. 스스로 방어할 무기를 찾아야 했다. 주변을 더듬어 잡히는 걸 아무거나 들었다. 그게 하필 국자였다. 손에 들린 둥그런 국자를 확인하고 순간 허탈해졌다. 선배가 픽 웃었다.

“이걸로 뭘 어쩌려고. 쟤네 정수리 깡깡 때리고 다니게?”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요!”

“자.”

선배는 자신이 찾아낸 것을 불쑥 내밀었다. 날이 잘 갈린 큼직한 식칼이었다.

“저 새끼들이 너한테 덤비면 일단 턱 아래를 찔러. 더 안 들어갈 때까지 찔러 넣고, 이렇게.”

그는 스스로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산 사람이라면 힘들겠지. 그런데 저것들은 죽었잖아. 살이 썩어서 칼이 잘 박혀. 망설이지 말고 그어.”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식칼을 받아 들었다. 묵직한 감촉이 손에 감겼다. 칼 손잡이에 선배의 체온이 묻어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더 섬뜩했다.

누군가의 팔이 창구 안쪽에 턱 걸렸다. 창구 사이의 틈으로 머리가 비집고 나왔다. 시커멓게 변색된 얼굴이 이상한 각도로 틀어진 채 나를 노려보았다.

많은 수가 뒤에서부터 밀어 대는 탓에, 요령 없이 허우적거리기만 하는데도 꾸역꾸역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이, 어깨가, 상체가 조리실 안으로 넘어왔다. 여기까지 당도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띵, 철컹. 느긋하기 짝이 없는 벨 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문이 열렸다. 손에 잡히는 음식 통을 대충 끌어다 처넣고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엔 문이 닫히는 데 또 한참 걸렸다. 나는 닫힘 버튼을 쉴 새 없이 눌렀다. 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뭐 이딴 고물 엘리베이터가 다 있지?

“망할 놈의 학교. 기숙사비 실컷 받아 처먹어 놓고 어디 쓰는 거야!”

초조함에 분통을 터뜨렸다. 선배는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았다. 감염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뭔가를 찾았다.

“선배?”

그는 바닥에 놓인 식용유들을 끌어냈다. 큼직한 사각형 통에 담긴 덕용 식용유였다. 뚜껑을 열고 번쩍 들어 내용물을 죄다 바닥에 콸콸 부었다. 투명한 기름이 타일 틈새를 타고 쭉 번졌다. 매끈한 바닥이 순식간에 흥건해졌다. 선배는 텅 비어 버린 기름통을 내던지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호현, 라이터.”

갖고 있던 담배가 다 떨어지고 나서, 내 바지 주머니에는 스마트폰과 라이터만 달랑 들어 있었다. 무심결에 손이 주머니로 갔다.

“아니다. 됐어.”

그는 고개를 젓고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 하지만 머리를 굴려 추측해 볼 틈이 없었다. 체구가 비교적 작은 감염자 하나가 창구 아래로 굴러떨어지듯 넘어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선배가 아직 조리실에 있는데, 그를 남겨 두고 혼자서만 엘리베이터에 탈 순 없었다.

“캬악!”

그것은 무작정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다 바닥에 쏟아진 식용유를 밟고 비틀거렸다. 멀쩡한 사람도 중심을 잡기 힘들 텐데 이성이 없는 상태니 더했다. 그는 요란하게 나자빠졌다. 바닥에 엎어져 꼼짝 못 하던 것은 잠깐이었다. 그것은 전신에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채로 곧장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일어섰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다. 식칼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달칵, 달칵. 뒤에서 작은 소리가 연달아 났지만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지척까지 접근한 감염자가 내게 달려들었다. 크게 찢어진 입이 기분 탓인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났다.

“헉…….”

간신히 피했다. 선배가 아낌없이 들이부은 식용유가 어느새 내 발치까지 번져 있었다. 이러다간 나까지 자빠지겠다 싶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바로 섰다.

선배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턱 아래에 칼을 찔러 넣고 쭉 그어 버리라고. 말이야 쉽지, 막상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드는 적을 마주하자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찌르기 전에 내가 먼저 물어뜯길 것 같았다. 스릴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던 대학생에게 칼을 들려 줬더니 갑자기 전문 킬러라도 된 듯 능숙하게 도륙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선배는 참 이상했다. 뭘 어떻게 해야 감염자들이 죽는지,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요즘 조소과에선 좀비 목 따는 법도 가르치나.

“큭!”

나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물컹한 것에 푹 꽂히는 느낌이 났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러운 기분이었다. 뒤늦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소름이 끼쳤다.

칼날은 목 측면을 비스듬하게 뚫었다. 놈이 마구잡이로 발악했다. 목에 칼이 꽂힌 채로도 어떻게든 내 팔뚝을 깨물려 했다.

“잘했어.”

불쑥 다가온 선배가 그를 가차 없이 걷어찼다. 칼날이 빠져나오며 시커먼 피가 튀었다. 그는 바닥을 뒹구는 감염자의 목을 세게 밟아 짓이겼다. 상처가 더 크게 벌어졌다. 그것의 뒷덜미를 움켜쥐어 질질 끌고 갔다.

그가 향하는 곳에 업소용 8구짜리 대형 가스레인지가 켜져 있었다. 화력을 최대로 올려놨는지 시뻘건 불이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다. 아까 들었던 달칵거리는 소리의 정체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나는 경악했다. 선배가 그것의 머리를 잡아 불 위에 처박은 탓이었다.

“……!”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괴성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썩은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지저분하게 뒤엉킨 머리카락이 녹아내렸다. 매캐한 연기가 피었다. 미친 듯 저항하는 감염자를 제압한 채, 선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의 뒤통수를 누른 손에 힘을 가했다. 그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어느새 얼굴 전체에 불이 붙었다. 기름에 흠뻑 절어 있었던 탓에 더욱 불길이 거셌다. 그는 자신의 손에까지 불이 옮아 붙기 직전에 잡고 있던 것을 내팽개쳤다. 뒤에서 다가오던 다른 이들이 기름에 미끄러지고 그것의 몸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부패한 육신들이 축축한 바닥 위에서 뒤엉켜 꿈틀거렸다. 지옥도 그 자체였다.

그 와중에 운 좋게 불을 피한 것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수가 너무 많았다. 식칼 하나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였다. 철컹. 뒤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었다.

“선배, 가요. 빨리요!”

이젠 정말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손을 꼭 쥐고 무작정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날렸다. 쾅! 어깨와 등이 엘리베이터 벽에 세게 부딪혔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틈에 누군가의 팔이 끼어 있었다.

“제발 좀 꺼져!”

악을 쓰며 발길질을 했다. 그러나 팔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곳곳에 뼈가 드러난 손가락을 기이한 각도로 꿈틀대며 허공을 할퀴었다. 선배가 엘리베이터 바닥을 뒹굴던 피 묻은 식칼을 주워 팔뚝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잠긴 문을 따듯 반 바퀴 비틀었다. 까드득. 근육과 살점이 뜯어졌다.

섬뜩한 절규와 함께 팔이 간신히 빠져나갔다. 문이 굳게 닫혔다. 밖에서 쿵쿵 두드리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이내 점점 잦아들었다.

* * *

조리실을 빠져나오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바깥에는 여전히 눈이 내렸다. 소금 같던 눈발이 조금씩 굵어졌다.

식량은 한꺼번에 나르기엔 꽤 무거웠다. 일단 엘리베이터 앞에 놔두고 옮길 수 있는 만큼만 옮기기로 했다. 무리해서 많이 들었다가 불시에 습격을 받기라도 하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테니까.

짧은 시간 동안 극한까지 시달렸던 몸이 피로를 호소했다. 축축 늘어지는 팔다리를 억지로 추슬렀다. 안전한 곳에 돌아갈 때까진 안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다행히 기숙사 뒤쪽은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인적이 없었다.

뒷문 앞에 가자 유리 너머로 사람의 형상이 비쳤다. 혹시 감염자들인가 해서 흠칫 놀랐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열람실에 있던 사람들 중 몇이 문 안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두 분 다 괜찮으시죠?”

내 꼴은 가관이었다. 이마와 앞머리가 땀으로 젖었고, 옷에는 드문드문 피가 튀어 있었다.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의 몰골은 결코 아니었다.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절로 헛웃음이 났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다 오셨어요? 아까는 문밖으론 절대 못 나가시겠다더니?”

당한 게 있는데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상대가 난처하게 웃었다.

“이쪽에서도 말을 심하게 한 것 같아서요. 다들 예민해져 있다 보니까 너무 흥분했어요. 죄송해요.”

“…….”

“두 분 돌아오실 때까지 저희들끼리 여기서 망보고 있었어요. 사과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이거라도 거들어 드리려고요.”

“위험한 건 다 우리한테 시켜 놓고 이제 와서 마중 나온 거로 생색내시는 거예요? 솔직히 좀 당황스러운데요.”

“그럴 리가요. 다음부턴 차례 정해서 돌아가면서 다 한 번씩 나갈 거예요. 그쪽은 이번에 나가셨으니까 빼고요. 아무튼, 진짜 죄송해요. 다른 분들도 다 미안해하고 있어요.”

그가 구구절절 말을 덧붙였다. 사과를 받아 주기 전까진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묵직한 통을 든 팔이 슬슬 아파 왔다.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게 뭐 하는 건지. 대화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선배가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미련 없이 몸을 뺐다.

“다른 거 가져올게.”

돌아서는 뒷모습이 얄미울 정도로 산뜻했다. 귀찮은 건 나한테 맡긴다 이거지. 사람들에게 막말을 퍼부어서 분위기를 손 쓸 도리 없이 악화시켰을 때도 뒷수습은 죄다 내 몫이었는데. 약자의 설움을 느꼈다.

“아, 맞다. 일단 짐부터 주세요. 무거우실 텐데. 문 앞까지만 날라다 주시면 저희가 안으로 옮길게요.”

문 앞에 서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선뜻 짐을 넘겨받고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뻐근하던 팔이 홀가분해졌다. 아직 가져올 게 좀 남긴 했지만, 드디어 살 것 같았다.

“저기요.”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아까에 비해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 무리에 낄 거면, 혼자 들어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되물었다. 상대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선배가 근처에 없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 사람 버리고 그쪽만 오시라고요. 그쪽은 뭐, 다빈이 아는 오빠라니까 믿고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분은 도저히 안 되겠네요.”

“뭐라고요?”

피식피식 헛웃음이 터졌다.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열변을 토했다.

“본인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저쪽이랑 같이 다니는 이상 어느 무리에 가든 환영 못 받을 거란 거. 저딴 식으로 구는데 누가 받아 줘요. 욕먹고 칼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

솔직히 그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는 말 못 하겠다. 특히 욕먹고 칼 맞는단 말엔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저 말을 그대로 선배한테 들려주고 싶었다. 목숨이 소중하니까 안 그럴 거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사자가 없다고 기다렸다는 듯 신나게 뒷말을 해 대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선배 앞에선 잔뜩 움츠러들어서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던 주제에.

“착한 척하는 거 오지랖 부리는 거 다 좋은데, 지금 상황에서까지 그러다간 골로 가기 딱 좋아요. 저 사람 감싸다가 그쪽까지 배척받아 죽고 싶어요?”

“지금 하신 제안이요. 다른 분들이랑도 합의된 건가요? 모두의 의견을 대표로 전해 주시는 거고요?”

그는 대답 대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맥이 탁 풀렸다. 다음 순간 속에서 뜨거운 게 확 치받아 올라왔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애써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다들 찬성했단 말이죠. 자기들 살자고 한 명을 몰아내는 데.”

“버릴 거면 빨리 버려요. 둘이 무슨 사인진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서까지 친분 챙기고 싶어요? 얼른 손절하세요.”

지금껏 내 잇속만 아득바득 챙기자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얘는 민폐니까 버리고, 얘는 좀 쓸 만하니까 데리고 다니고, 얘는 마음에 안 드니까 죽게 놔두고. 필요하면 배신도 하고 다른 사람을 미끼로 쓰기도 하면서.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난 상황에 타인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다 죽은 사람들이 수없이 있다. 화재 현장에서, 해일이 훑고 간 폐허에서, 침몰하는 배와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무너진 건물에서. 그 사람들은 목숨 걸고 다른 이를 도우면서 이해타산이나 호불호 따위는 따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들만큼 대단하고 유능한 사람은 못 되지만, 적어도 남의 목숨을 내버리면서까지 내 목숨을 건지고 싶진 않았다. 여기 갇힌 모든 생존자들을 구할 수는 없더라도 눈앞에 있는 사람 정도는 돕고 싶었다. 그게 당연한 거고 옳은 거라 믿었다. 저 사람의 제안을 듣기 전까진.

사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선배 곁에 있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성격이 파탄 난 수상쩍은 사람과 행동하는 것보다 다른 무리에 섞이는 게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여럿이서 분담하여 정찰과 불침번을 맡으면 위험도 그만큼 분산될 거고, 남들 의견에 맞장구나 쳐 주면서 적당히 살면 못해도 중간은 갈 테니까.

그런데……. 그럴 생각이 조금도 안 드는 걸 보니, 역시 나는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살 팔자는 못 되는 모양이다.

“말 참 재밌게 하시네요.”

지금 이 기분, 그나마 남은 인류애마저 싹 말라비틀어지는 기분을 언제 느꼈더라. 지난 학기 팀플에서 프리라이더가 잠수 탔을 때 느꼈던 것 같은데.

“버리긴 뭘 버립니까. 그런 건 쓰레기 버릴 때나 쓰는 말이고. 아, 맞다. 쓰레기 여기도 있었지? 재활용도 안 되는 인간쓰레기들이 떼거지로 있네?”

“하, 어이없네. 저기요. 지금 상황 파악 안 되시나 본데요. 나중에 끼워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해도 소용없거든요.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선배를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나였다면 그의 일부분만 보고 저들과 똑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칠고 비정상적인 언행 사이사이에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말들을 들어 버린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절박하게까지 보이는 얼굴로 내게서 함부로 죽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혼자 두지 말라고 말하며 손을 뻗었다. 죽어도 상관없다던 무심한 태도를 바꾸어,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구김살 없이 웃었다. 고작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고 물음을 건넸다는 이유로.

나는 여전히 그가 껄끄러웠다. 무섭고 꺼림칙하고 가끔은 좀 짜증 났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래, 싫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은 명확했다. 머리가 맑게 개었다.

“네. 후회할 일 없으니까 그쪽이 걱정 안 해 줘도 될 것 같네요. 그리고요.”

괜히 나서서 설치다 갈등을 빚는 건 사양하고 싶었는데. 사람들 틈에 얌전하게 끼어 있다가 무사히 탈출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나는 씩 웃었다. 아니, 웃으려 했다. 하지만 도무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입매가 멋대로 일그러졌다.

“좆 까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우악스러운 힘으로 떠밀렸다. 비틀비틀 뒤로 물러서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똑바로 섰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굳게 닫힌 유리문과,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미안하게 됐어요. 우리도 살아야죠. 그러게 혼자서라도 들어오랄 때 들어오지 그러셨어요.”

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다. 문은 약하게 덜컹거릴 뿐 열리지 않았다. 눈에 초점이 확 나갔다. 분노로 눈이 돌아간다는 게 뭔지 몸소 경험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이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선배와 내가 애써 가져온 식량들을 들고 뒷걸음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이를 악물고 유리문을 주먹으로 힘껏 내려쳤다. 분이 안 풀렸다. 주먹을 다칠 각오를 하고 연달아 후려갈겼다. 쾅! 쾅! 육중한 소리가 났다.

“그깟 음식 때문에 다른 사람을 버려? 당신들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그따위로 추잡하게 연명하면서, 그러고도 사람이냐고!”

발을 들어 문을 찍어 버렸다. 통유리로 된 문짝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알아? 식당에 있는 것들보다 당신들이 더 역겨워.”

아예 문을 부숴 버릴 기세로 걷어찼다. 안에서 뭐라 의논하던 사람들이 체인을 가져왔다. 식당 출입문을 막아 놓은 것과 같은 재질이었다. 선배와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잠금을 걸다 못해 체인까지 쓰다니. 사람이 탐욕에 눈이 멀면 이렇게까지 추해질 수 있구나 싶었다.

그들은 손잡이에 체인을 칭칭 감았다. 너희가 밖에서 죽든 말든 우리끼리 안전을 도모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내가 씨발, 죽어서 좀비 되면 너네부터 찾아가서 죽일 줄 알아.”

악에 받쳐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있는 유리를 쿵 내려쳤다. 화들짝 놀란 게 다 보이는데, 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꿋꿋이 체인을 감았다.

이렇게 화를 내 본 게 얼마 만이더라. 그리 길지 않은 생을 통틀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웬만한 갈등은 내가 져 주는 한이 있더라도 실실 웃으면서 대충 넘겼으니까. 뭐든 힘 빼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만이 정답인 줄 알았으니까.

“후배님, 죽는다는 소리 함부로 하지 말랬잖아.”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울긋불긋 피멍이 든 내 손마디를 감쌌다. 그 한마디에 이성이 돌아왔다. 뻘겋게 물들었던 시야가 서서히 걷히고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분명 엘리베이터 앞에 놓아뒀던 식량을 가지러 갔을 텐데, 그는 빈손이었다. 게다가 숨이 조금 거칠었다.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한 것일까.

“……선배.”

“말해 줄 게 있어. 아깐 후배님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홀려서 깜빡했거든.”

“적극적으로요? 제가요?”

“내 손 잡아당겼잖아. 하여간 존나 귀엽게 군다니까. 싸우던 도중에 꼴려서 난감했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발언이었다. 참으로 밑도 끝도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까까지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혀 날뛰고 있던 것도 잊었다. 선배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태연하게 고백했다.

“거기, 가스 불 안 끄고 나왔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우릴 주시하는 사람들 뒤편에 식당이 작게 보였다. 언뜻 불그스름한 것이 유리에 비친 것 같았다. 따르르르릉! 화재 경보음이 귀를 찢을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건물 전체에 울렸다.

“뭐, 뭐야?”

“사이렌 아냐?”

“저게 갑자기 왜 울려?”

모두가 아연실색하여 굳어 있는 사이 불길을 감지한 스프링클러가 자동으로 동작했다. 천장에서부터 안개 같은 물줄기가 쏟아졌다.

“아……. 안 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평범한 불은 물을 끼얹으면 머지않아 꺼진다. 하지만 식용유에 붙은 불은 오히려.

내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펑!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는지 식당 문이 통째로 깨져 나갔다. 까만 연기가 구름처럼 확 퍼지고 화염이 넘실넘실 새어 나왔다. 문을 막은 체인과 바리케이드가 죄다 무용지물이 되었다.

기숙사 1층은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화마에 휩싸인 감염자들이 로비로 몰려나왔다. 전신이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타서 진물이 질질 흐르는데도 꾸역꾸역 움직였다. 복도에 뿌옇게 연기가 찼다.

저마다 어디로든 몸을 피하려 몸부림을 쳤다. 누군가 달려와 문에 감긴 체인을 도로 풀려고 미친 듯이 애를 썼다. 로비가 저 꼴이 되어 정문으로 나가긴 글렀으니 뒷문으로라도 탈출할 심산인 듯했다. 하지만 견고하게 꽁꽁 감아 놓은 체인이 단번에 풀릴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마음이 급해서 계속 헛손질을 했다. 철컥, 철컥! 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문안으로 도망쳤던 사람들이 연기에 숨이 막혀 도로 나왔다. 그 와중에 식당 밖으로 나온 것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모두가 처절하게 아우성쳤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유리문을 뚫고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아아악!”

화염과 열기가 가득한 안, 그리고 칼바람에 눈이 펑펑 내리는 밖. 고작 문과 벽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너무도 대조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삼류 고어 영화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연출을 쓰진 않을 것이다.

“가자.”

선배가 내 손을 확 잡아끌었다. 그새 더 거세어진 눈발이 우리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얼결에 그에 이끌려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점차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선배는 큰길가로 다니지 않았다. 굳이 난간과 울타리를 넘어 잔디밭을 밟거나 좁은 샛길을 이용했다. 덕분에 캠퍼스 곳곳을 돌아다니는 좀비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먼 거리에서 마주치더라도 그것들이 우리를 인식하기 전에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마저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손을 꽉 잡고 달리는 내내 넋이 나가 있었다. 모든 생각을 불타는 기숙사 안에 내려 두고 온 듯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기숙사에서 꽤 떨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뒤돌아보았다. 정문에 달린 크리스마스 리스 장식이 깨알처럼 작게 보였다.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흐린 겨울 하늘에 퍼져 나갔다.

* * *

둥근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인 야외 테라스에 도착했다. 중앙 도서관 1층에 있는 카페였다. 학생들이 공부하다 커피 한잔 마시면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든 곳이었다. 열람실에 자리가 없으면 여기서 노트북과 책을 펴 놓고 공부하기도 하고.

물론 테라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싹 마른 가로수 이파리 따위가 을씨년스럽게 떨어진 테이블 위에 얇게 눈이 쌓였다. 컴컴하게 불이 꺼진 카페 안을 들여다보던 선배가 테라스에 쳐진 금속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다가갔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의자를 집어 들었다. 쾅. 쾅! 의자 다리 모서리로 창을 연거푸 찍자 유리가 사람 머리통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깨졌다. 선배는 그 안으로 팔을 쑥 집어넣어 잠금을 풀었다. 굳게 닫혀 있던 카페 문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열렸다.

“들어와.”

그가 까딱 고갯짓을 했다. 유리창을 깨서 잠긴 문을 여는 게 원래 저렇게 간단한 일이었나. 빈집털이범도 저렇게까지 과감하진 않겠다. 무언가에 홀린 기분으로 따라 들어갔다.

안도 황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쇼케이스에는 먼지만 쌓여 있고, 원래 시럽이나 파우더 용기가 있어야 할 카운터 뒤쪽도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엉망이 되어 텅 비었다. 조명도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카페 안은 음침했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있었다. 자꾸만 한기가 들어 몸을 움츠렸다.

“그 사람들, 죽었을까요?”

한참이 흐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죽었겠지. 엄청 운이 좋지 않은 이상은.”

“선배는……. 이렇게 될 걸 미리 알고 계셨어요?”

예전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을 꺼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배가 그러셨잖아요. 그 사람들 어차피 다 뒈질 거라고.”

“그냥. 보면 감이 와. 그런 새끼들은 오래 못 살아.”

“다른 사람들 다 죽더라도 전 살아야 한다고 한 건요?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데요?”

“그 말뜻 그대론데.”

“어차피 선배한텐 저도 쓸모없고 민폐만 끼치는 짐 덩어리 아니에요? 그 사람들처럼. 그런데 왜 굳이 절 구하셨어요. 그렇게 제가 성에 안 차시면 그냥 죽든 말든 버리고 가면 되잖아요.”

“넌 지금도 나 싫어하잖아. 알면 혐오하게 될걸.”

또 언제나처럼 알쏭달쏭한 이야기였다. 가슴 가운데가 턱 막힌 듯 답답해졌다. 나는 작게 이를 갈았다. 참아 보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니까요! 전 선배 말대로 답답하고 멍청한 새끼라서 못 알아 처먹겠으니까, 제발 설명 좀 해 주세요. 제가 선배를 싫어한다고요? 아뇨, 선배가 절 싫어하는 거겠죠. 처음부터 그랬어요. 저 죽이고 싶어 하셨잖아요!”

“…….”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제대로 파악된 건 하나도 없고, 선배를 포함해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 제가 잘못하고 있는 거라고만 하고. 미치겠어요. 미칠 것 같다고요…….”

울분으로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충동에 휩쓸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쏘아붙였다가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마른세수를 했다. 선배는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답을 듣는 것을 포기했다. 쿵쿵 뛰던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언제는 선배가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상대였던가. 그랬으면 첫 만남부터 나한테 다짜고짜 폭언을 퍼붓지도 않았을 거다.

우리는 다시 불안정한 침묵에 빠졌다. 벽에 옆머리를 기대고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쌀쌀한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를 보았다. 창 너머로 스며드는 흐린 빛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방치된 카운터도. 넋을 놓고 있다가 문득 힘없이 사과를 건넸다.

“죄송해요.”

선배가 내 옆얼굴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 고생을 해 가면서 먹을 거 찾았는데. 결국 반은 빼앗겼고 반은 버리고 왔잖아요.”

“나 때문에 불나서 버리고 온 건데 뭐.”

또 왜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냐느니 하면서 나를 비난할 줄 알았는데, 선배는 의외로 담백하게 대꾸했다. 아까 그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배를 감싸다가 나까지 죽고 싶냐고 했었지. 이러다간 진짜 사이좋게 굶어 죽을 판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선택지가 몇 번이고 다시 주어진다 해도 결정을 바꾸진 않을 거다.

“선배, 저 웃기죠. 이 상황에 먹을 거 걱정이나 하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메마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 웃겨. 네가 아까 국자 들고 나라 잃은 표정 지을 땐 솔직히 존나 웃겼는데, 지금은 아냐.”

“아, 예. 그러세요.”

김이 확 빠졌다. 우울에 잠겨 있던 내가 바보 같았다. 자학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

선배가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그의 손에 사과가 들려 있었다. 조리실에서 냉장고에 있던 사과 몇 알을 챙겼던 건 기억한다. 아마도 저녁쯤에 후식으로 나올 예정이었으리라. 하지만 사과가 든 통은 엘리베이터 앞에 두고 왔을 텐데. 대체 이건 언제 가져온 거지?

“오다 주웠어.”

“주웠다고요?”

“아까, 엘리베이터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던 도중에. 그냥 네가 생각났어. 너 사과 좋아하잖아.”

그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받을 것을 재촉했다. 얼이 빠져 있다 머뭇머뭇 받아 들었다. 빨갛고 둥근, 벌레 먹거나 멍든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사과.

“선배, 저.”

갑자기 퍼뜩 떠오른 게 있었다. 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최근 며칠간 쓸 일이 없어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던 라이터가 손끝에 걸렸다. 그리고 그 옆엔.

“이거요.”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미니 초코바였다.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리고 있었더니 저들끼리 짓눌려서 포장이 좀 꼬깃꼬깃해지긴 했지만, 내용물은 멀쩡할 것이다.

열람실에서 사람들과 생활할 때 배급받은 식량이었다. 휴게실 소파 뒤쪽 벽에 먼지와 함께 끼어 있던 걸 찾아냈다. 예전에 어떤 학우가 미니 초코바 여러 개를 봉지째로 샀다가 소파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못 먹게 되었으리라.

“왜 안 먹었어?”

“혹시 몰라서 챙겨 놨어요. 분위기가 좀 이상했으니까요.”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걸 눈치챘을 때부터 몰래 갖고 있었다. 이러다간 우리에게 돌아오는 음식의 양을 줄이거나 아예 배급을 끊지 않을까 짐작했기에. 뭐, 먹을 걸 찾아오라고 밖으로 떠밀어 보낼 줄은 몰랐지만. 역시 추악한 현실은 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그리고 저 원래 초콜릿 잘 안 먹어요.”

“…….”

“혹시 선배도 안 좋아하세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 초코바를 받았다. 내가 들고 있을 때도 작긴 했지만, 선배의 큼직한 손 위에 놓인 초코바는 한층 더 작아 보였다. 이제 나는 사과를, 그는 작은 초코바 두 개를 갖게 되었다.

이게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목숨 걸고 조리실을 뒤지고, 불타는 건물을 뒤로하고 도망쳐 온 끝에 남은 것이 이거였다. 사무치게 괴로워졌다. 홧김에 유리문을 내려치느라 피멍으로 얼룩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하하.”

한숨처럼 웃음이 났다. 나는 웅크려 무릎에 고개를 묻고 웃었다. 웃음은 갈수록 잦아들기는커녕 더 커졌다. 어깨가 마구잡이로 들썩였다. 이상하게 보이리란 걸 알았지만 주체할 수 없었다.

발작적으로 터지는 웃음 사이로 끅끅대며 숨이 넘어갔다. 아래턱이 떨리는 게 웃음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흐느낌을 참으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요.”

고개를 들었다. 목이 꽉 메어 볼썽사나운 목소리가 나왔다. 선배의 얼굴이 그렁그렁 맺힌 물기 때문에 흐릿하게 보였다.

“저, 선배한테 사과 좋아한다고 한 적 없는 걸로 아는데요.”

“……안 좋아해?”

잠깐 뜸을 들인 후에 돌아온 것은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가 조금 시무룩해진 것처럼 보였다.

“아뇨.”

무심코 작게 웃었다. 한가득 괴어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제야 시야가 조금 맑아졌다.

“좋아해요.”

희미한 빛이 그의 머리칼을 차갑게 물들였다. 눈매를 따라 푸르스름한 음영이 졌다. 사방이 고요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낱낱이 들릴 정도로.

선배가 내 뺨을 쥐었다. 손이 커서 뺨뿐만 아니라 턱, 귀까지 모두 감싸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다가와 시야를 메우는 것을 보면서도 멍하니 있었다.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놓고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넋을 놓고 있었다.

“…….”

우리는 폐허 같은 정적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선배는 마치 내 반응을 기다리듯 나를 빤히 주시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감각이 끔찍하게 예민해졌다.

그가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가만가만 쓸어 보았다. 입술은 아까의 키스 같지도 않은 키스로 살짝 젖어 있었다. 가운데를 엄지로 지그시 눌러 보다가, 손가락을 입술 사이로 살짝 밀어 넣어 입을 벌리게 했다. 나는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가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선배가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벌어질 것임을 알았다. 다음 순간, 그가 내 입술을 매만지던 손으로 뒤통수를 붙잡아 확 끌어당겼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을 헤집고 혀가 들어왔다.

그는 뜨겁고 질척하고 뭉근하게 내 입 안을 할퀴었다. 귓가에 세찬 바람 소리가 들렸다. 창밖에 몰아치는 칼바람이 여기까지 닿을 리가 없으니 내 숨소리일 것이다.

“헉.”

다급하게 공기를 삼켰다. 그 짧은 순간을 못 참고 그가 재차 달려들었다. 혀가 휘감겨 끌려갔다. 잡아먹히는 것 같았다. 앞니끼리 딱딱 소리를 내며 몇 번이고 부딪쳤다. 어느 순간부턴가 입술 가장자리가 따끔거렸다.

결국 상체가 뒤로 넘어가 풀썩 쓰러졌다.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내 위에 올라탔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묵직한 체중이 실렸다. 가쁜 호흡이 뒤엉켰다. 옷자락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깊숙이 들어와 얽힌 그의 허벅지가 단단하게 굳었다. 중간중간 산소를 들이마시기 위해 흉곽이 부풀고, 허리와 배 근육이 긴장으로 꽉 조여졌다. 몸이 빈틈없이 밀착한 탓에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전부 느껴졌다. 그때마다 나는 몸서리를 치듯 과민하게 움찔거렸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등에 뼈마디가 도드라지도록 바짝 힘을 주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더 해 달라는 건지 그만해 달라는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내 뒷머리를 받친 그의 손에도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혀를 얽다가 입천장을 문질렀다. 민감하고 여린 속살을 죄다 헤집고 입술을 빨았다. 헉헉대는 숨소리를 그가 모두 집어삼켰다. 허겁지겁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역으로 확 찍어 눌렀다. 일부러 저항하지 않은 건지 방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선배의 몸이 무방비하게 밀쳐졌다. 이번엔 그가 내 밑에 깔렸다. 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아예 허리 위에 올라앉은 채 입술을 떼어 냈다.

“헉, 하아, 하.”

숨을 고르며 손등으로 질척하게 젖은 입술을 훔쳤다. 손등에 엷게 피가 묻어났다. 역시나 입술이 터진 모양이었다.

“……선배, 잠깐만요.”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새까만 앞머리가 흐트러져 이마가 드러났다. 열에 들떠 풀린 눈이 묘하게 요염했다.

“…….”

그는 내 부름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내 뒷덜미를 움켜쥐어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중심을 잡으려 바닥을 짚었던 팔이 풀썩 꺾였다. 나는 그의 가슴팍 위에 속절없이 엎어졌다. 막 말하기 위해 입술을 벌린 참이었는데, 입이 도로 막혔다.

우리는 짐승들처럼, 다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뒤엉켰다. 그저 충동이었다. 성마른 손길로 서로를 끌어당기고 잡아 눌렀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차가운 바닥을 뒹굴었다.

선배는 이번엔 내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가 놓고 귓불을 입술로 자근자근 문질렀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

멋대로 새된 소리가 터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확 젖혔다. 선배가 하던 것을 뚝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와 나의 거친 숨소리만이 허공을 메웠다. 그가 스르르 내 목을 쥐었다. 길쭉길쭉 모양 좋게 뻗은 손이 목을 빈틈없이 감쌌다. 힘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경동맥이 빠르게 뛰었다.

점점 숨이 가빠 왔다. 피가 몰려 얼굴이 뜨거워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쯤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번들번들 젖은 그의 입술 또한 선정적으로 붉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것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선배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손에 힘을 줄지 말지 갈등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내 착각일까. 그가 내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목을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다시 입을 맞추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격렬하게 달려들었으면서 이번엔 어쩐지 조심스러웠다.

맞물린 입술이 떨어졌을 때, 나는 비로소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 일상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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