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최악의 크리스마스 (1/12)

1. 최악의 크리스마스

탁!

모든 울분과 짜증을 담아 엔터 키를 쳤다. 제일 끝 문장의 마침표 뒤에서 깜빡거리던 커서가 한 줄 아래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학번과 이름을 제대로 썼는지 점검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기말리포트_최종_수정_final_2차_이번엔진짜_마지막_진짜최종_아제발_내가왜이걸들었ㅈㅣtlqkf.hwp〉

가관이었다. 기나긴 파일 제목에 사흘간 내지른 나의 절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구질구질한 사족이 잔뜩 달린 제목을 깔끔하게 고쳐 썼다.

〈20□□년_2학기_경영전략론_20□□019653_정호현.hwp〉

기계적으로 손가락을 놀려 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첨부 파일을 집어넣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내용은 뭐라고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보나마나 뻔하다. 존경하는 교수님께,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건강히 지내고 계십니까 어쩌고저쩌고하는 영혼 없는 문구의 나열이 아닐까.

“아아아아악…….”

최후의 단말마 같은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천장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밝아지길 반복하며 팽팽 돌았다.

사흘이었다. 무려 사흘째였다. 이 흉악한 기말 리포트를 쓰느라 잠 한숨 못 자고 노트북을 붙들고 있었던 게. 남들은 일찌감치 시험과 과제를 끝내고 종강 파티다 여행이다 하면서 놀러 다니는 이 시기에,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방에 처박혀 있어야만 했다.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답시고 유리로 된 기숙사 출입문에 커다란 리스 장식이 걸렸다. 나는 그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리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짓밟아 불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룸메이트란 놈은 나보다 1주일 정도 먼저 종강했는데,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여친이랑 펜션 잡고 놀러 가기로 했다며 룰루랄라 짐을 싸서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이 몹시 설레고 홀가분해 보여서 나의 분노에 한층 불을 지폈다.

악명 높은 전공 시험들이 와르르 몰려왔다 밀려 나간 자리에 미뤄 두고 있던 전공 기말 리포트가 남아 있었다. 남은 기한은 3일, 쥐어짜 내야 할 분량은 50페이지.

나는 일단 심호흡을 하고 기숙사 1층 편의점에 갔다. 적진에 단신으로 쳐들어가는 장수처럼 비장한 기세였다. 에너지 드링크며 병 커피, 졸음 방지 껌 따위를 하나씩 집어 들다가 곧 손이 모자라게 되어서,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아예 박스째로 꺼내 달라고 했다. 그때 나를 괴물 보듯 보던 아르바이트생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 뒤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휴대폰 전원을 꺼서 집어 던져 놓고, 문을 걸어 잠그고, 암막 커튼을 쳐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되지 않는 방에서 귀마개를 낀 채 미친 듯이 리포트만 썼다. 마지막 문장에 온점을 찍고 컨트롤 키와 에스 키를 습관적으로 연타하며 퀭한 눈으로 컴퓨터 모니터 하단의 시계를 보니 제출 마감 기한을 딱 10분 남긴 시점이었다.

드디어 끝났다. 리포트 제출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내 한 학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점수고 뭐고, 지금은 일단 끝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3일 동안 수명이 3년은 줄어든 것 같다…….”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꾸물꾸물 이불을 찾아 덮었다. 이제껏 온갖 편법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던 졸음이 확 밀려왔다. 바깥에서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핵폭탄이 떨어져도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빈속에 카페인과 타우린만 들이부었던지라 위가 쿡쿡 쑤셨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졸린 게 더했다. 방전되어 까맣게 죽은 채로 구석에 처박힌 휴대폰을 본체만체하며 눈을 감았다.

이젠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잘 것이다.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푹 자고 말 것이다. 죽어도 자다 죽을 것이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잠꼬대인지 아닌지도 분간되지 않는 헛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빨갛고 파란 소용돌이가 마구 휘몰아쳤다. 기절하듯 의식이 까무룩 잠겨 들었다.

* * *

눈을 떴다. 눈꺼풀에 본드라도 붙여 놓은 것처럼 뻑뻑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이 손끝에 닿았다. 휴대폰은 충전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오래 푹 자고 잠깐 깼다가 다시 늘어지게 자기를 반복했는데, 그동안 잠결에 잭을 꽂아 둔 모양이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얼마나 잤을까. 하루? 이틀? 중간에 짧게 몇 번 깨긴 했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긴 시간을 잔 것은 틀림없었다. 극한의 피로에 시달리던 몸이 가뿐해졌으니 말 다 한 거지.

욕실에 비척비척 걸어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학교 기숙사는 방음이 몹시 부실해서 옆방에서 씻는 물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심지어 같은 라인에서 온수를 쓰는 사람이 있으면 미지근한 물만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방학이라 그런지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온수도 펑펑 나왔다.

평화를 만끽하며 샤워를 마치고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나왔다. 자는 동안 펑펑 돌아가던 보일러의 온도를 약간 낮추고 보송보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전원이 켜져 있지 않은 휴대폰 화면에는 배터리 충전이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표시가 선명했다.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제조사와 통신사 로고가 차례로 뜨고 익숙한 배경이 나타났다.

“어?”

잠시 뒤 뜬 화면을 보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잠이 덜 깨 흐릿하게 보이던 숫자가 좀 더 선명해졌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며칠 동안 휴대폰을 꺼 놓고 잠수를 탔으니 메시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전화까지 세 자릿수가 와 있는 거지?

전화는 대부분 가족들로부터 걸려 온 것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 세 명의 이름이 번갈아 가며 부재중 전화 목록을 메웠다.

크리스마스에도 첩첩산중 학교에 처박혀 있는 불쌍한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일 리는 없고. 너무 오래도록 연락이 안 된 나머지 가족들이 내가 실종됐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까 봐 바빠서 집엔 못 내려갈 것 같다고 미리 말씀드려 놨는데.

일단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안심시켜 드려야겠다. 당신 아들 안 죽고 무사히 살아 있다고, 과제 하느라 좀 죽을 뻔하긴 했지만 일단 숨은 붙어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시라고.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기계적인 안내 멘트만이 흘러나왔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두 분 다 받지 않았다. 다음으로 동생에게 걸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씩이나 동시에 통화가 안 된다고? 날 빼고 일가족이 연말에 해외여행이라도 간 건가? 아니, 해외에 갔으면 아예 전원이 꺼져 있거나 해외 로밍으로 연결된다는 멘트가 나왔을 텐데.

“…….”

잠이 싹 달아났다. 나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메신저 앱에 들어갔다. 수많은 알림이 나를 반겼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음을 알리는 숫자들이 쉴 새 없이 우수수 떠올랐다. 그 와중에 제일 위쪽에 있는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

[이거 보면 엄마한테 연락해 줘 꼭]

[아버지]

[우리 아들. 사랑한다]

[정지현]

[오빠 괜찮지? 괜찮은 거 맞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크롤을 쭉쭉 내려 다른 메시지도 확인했다. 과 동기들로부터, 선후배로부터, 다른 지인들로부터. 모두가 절박하고 다급한 어조로 안부를 묻고 있었다. 반나절 전쯤에 온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연락이 없었다.

[×] [어머니 저 호현인데요]

[×] [무슨 일이세요?]

[×] [엄마?]

보내는 메시지마다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알리는 엑스 표시가 떠올랐다. 액정 상단 바에 절로 시선이 갔다. 와이파이며 전화 신호며, 하나같이 게이지가 저 바닥에 가 있었다. 우리 학교가 산골짜기에 있긴 하지만 전화도 안 될 만큼 외진 곳은 아닌데. 학내 와이파이도 빵빵하게 잘 터지는데.

상대방을 바꿔 가며 몇 번 메시지 전송을 시도해 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뭔가 이상했다. 쥐고 있던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신발에 발을 꿰었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며칠 만에 열렸다.

기숙사 전체가 너무도 조용했다. 아무리 학기가 끝났다지만 이렇게까지 조용한 건 이상했다. 계절 학기를 수강하는 학생, 방학 때도 본가에 돌아가지 않고 남은 학생, 동아리 활동이나 고시 공부 때문에 도서관에 있는 학생 등, 방학 중에도 사람이 꽤 있어야 정상이었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둘러보았다. 일자로 쭉 뻗은 복도 양옆의 방문 두어 개가 듬성듬성 열려 있었다. 사람이 없는데 방문을 안 잠가 놨다고?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지나쳤다. 얼핏 곁눈질로 본 방 안은 옷이며 책 따위의 물건들이 고스란히 어질러진 채였다.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로비에서 모퉁이를 돌자 프랜차이즈 편의점 간판이 나타났다. 밥 먹으러 기숙사 식당까지 가기도 귀찮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기도 귀찮은 학생들이 종종 이용하는 곳이었다. 내가 영혼을 갈아 기말 리포트를 쓰기 전에 들렀던 곳이기도 하고.

편의점 안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익숙한 상표들이 보였다. 카운터 뒤편에는 각종 브랜드의 담배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이상한 악몽 속을 헤매다 깨어난 느낌이었다.

그래,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전화나 데이터가 안 통하는 건 일시적인 통신 장애 같은 거고, 여기까지 오면서 사람을 못 본 건 그냥 우연의 일치겠지.

“실례합니다.”

편의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어야 할 아르바이트생도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카운터 옆쪽, 재고를 쌓아 두는 창고 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계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기요. 실례합니다!”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보았다. 여전히 창고 쪽은 잠잠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안쪽에서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석에서 재고 정리를 하느라 내 말을 미처 못 들은 건가 싶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나는 문간에 서서 안쪽으로 살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매장은 환하게 불을 켜 놨으면서, 여기는 몹시도 캄캄했다. 대체 이렇게 어두운데 불도 안 켜고 무슨 재고 정리를 한다고…….

와드득. 까작.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나는 시커먼 암흑이 드리운 건너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늦게 깨달았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크륵, 크르르…….”

안에 있던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눈이 마주쳤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것은 목을 긁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느리게 다가왔다. 이윽고 밖에서 쏟아지는 환한 조명에 형체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얼굴의 피부가 죄다 썩어 있었다. 시커먼 살점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누런 진물이 질질 흘렀다. 안구는 이미 부패가 상당히 진행되어서, 수산 시장에서 보았던 생선보다도 더 탁한 빛깔이었다. 벌어진 입 안으로 보이는 잇몸과 혀도 문드러지고 녹아내려 뼈대가 드러날 듯 말 듯 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보아 줄 수 없는 몰골이었다.

그것이 등으로 가리고 있던 창고 안쪽의 풍경이 이제야 보였다. 좁은 공간에 빼곡하게 들어찬 선반과 천장까지 쌓인 공산품들 사이에, 사람이 망가진 마네킹처럼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생김새도 연령도 성별도 짐작할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한때는 푸른색이었을 편의점 유니폼 조끼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아.”

나는 무심코 주춤 물러섰다. 그것이 입을 찢어져라 크게 벌렸다. 누렇고 까만 치아가 죄다 피범벅이었다. 그 사이사이에 낀 뻘건 살점들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나는 뒤돌아 뛰었고, 그것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앙! 큰 소리가 났다. 내 어깨가 진열대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몸을 물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진열대 위의 상품 몇 개가 후드득 떨어졌다. 상체를 후려갈기는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떨어진 일회용 티슈를 밟고 휘청거렸다. 발밑을 살필 정도의 지능도 없는 듯했다. 그 틈을 타 거리를 벌렸다.

그제야 아까는 미처 못 봤던 매점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신선 식품과 생수 따위가 가득 차 있어야 할 진열대가 비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상품들도 이리저리 쓰러지고 떨어져 엉망이었다. 마치 강도가 들어 휩쓸고 간 것처럼.

“크아악!”

그것이 괴성을 질렀다. 피에 젖은 이가 번들거렸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오는 것을 피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이게 대체…… 윽!”

까맣게 썩고 살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손이 간발의 차이로 나를 놓쳤다.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해서 저 손에 잡혔다간 나도 창고 안의 아르바이트생과 같은 꼴이 될 터였다.

극도의 긴장으로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머리가 쿵쿵 울렸다. 관자놀이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좁아진 시야에 아무도 없는 텅 빈 카운터가 들어왔다. 직원이 드나드는 용도의 허리까지 오는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당히 큰 규모의 매장이니만큼 카운터 안쪽 또한 넓었다. 족히 서너 사람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곧장 내 뒤를 따라 달려 들어왔다. 뒤에서 쫓아오는 것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반대편 카운터를 짚고 휙 뛰어넘었다. 오랜만에 쓰는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파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내가 카운터 바깥쪽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그것의 허리가 카운터에 턱 걸렸다.

그것은 고작 배꼽 정도까지 오는 높이의 장애물을 넘지 못해 버둥거렸다. 피와 시커먼 진물이 뚝뚝 흐르는 손으로 카운터 위를 마구잡이로 긁으며 몸부림쳤다. 카운터에 붙어 있던 ‘미성년자 주류 및 담배 판매 불가’, ‘멤버십 카드 있으세요?’ 따위의 안내문 위에 검붉은 손자국이 죽죽 그어졌다.

“헉, 허억.”

뒤늦게 가쁜 숨이 터졌다. 그제야 나는 내가 숨을 쉬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다급하게 숨을 골랐다. 움직임을 일단 봉쇄해 놨으니 이 틈을 타 도망치면 되겠지.

그때 창고 안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끄윽…… 끄륵, 끅…….”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창고 안에는 쓰러진 아르바이트생밖에 없었다. 도저히 살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큰 부상을 입은. 그런데……. 피투성이가 되어 으스러진 팔다리를 질질 끌고 기어 나오는 저건, 대체 뭐지.

아르바이트생의 고개가 이리저리 툭툭 꺾였다. 목을 심하게 물어뜯겨 절반 이상 파인 탓에 제대로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편의점 유니폼 조끼 차림으로 사지를 꿈틀대며 내게 다가왔다.

“욱……!”

아르바이트생의 가슴팍에 새겨진 편의점 로고가 시뻘겋게 물든 것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이 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게 에너지 드링크 박스를 건네주었던 아르바이트생이 대체 왜…….

계산대 너머에서 버둥거리던 것은 카운터를 짚고 뛰어넘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카운터 위에 엎어진 채로 사방을 손으로 할퀴며 마구잡이로 발버둥을 쳤다. 무게 중심이 쏠려 점차 상체가 카운터 너머로 기울어졌다.

아르바이트생은 편의점 바닥에 긴 핏자국을 남기며 내게 다가왔다. 카운터 안에 있는 것은 벌써 허리와 골반 정도까지 밖으로 빠져나왔다. 둘 다 나를 노리고 있었다. 내 살점을 물어뜯고 내장을 씹어 먹으려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모퉁이를 돌아 편의점 유리문을 밀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출입문에 달린 종이 딸랑딸랑 울렸다. 소리가 쓸데없이 경쾌했다.

문 옆에는 길쭉한 대걸레가 기대어 놓여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매장 바닥 청소를 하고 놔둔 것 같았다.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문을 닫고 안에 있는 것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온몸으로 막아선 채, 손잡이에 대걸레 자루를 가로로 끼워 넣었다.

콰앙! 그와 거의 동시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우악스럽게 달려든 것들이 건너편에서 문에 몸을 부딪친 것이었다.

문이 크게 덜컹였다. 유리문에 검붉은 핏자국이 엷게 묻었다. ‘훈훈한 연말 보내세요. 따끈따끈 호빵 판매 중!’이라고 붙은 광고에도 붉은 얼룩이 졌다. 호빵 모양 캐릭터의 크고 초롱초롱한 눈이 피를 뒤집어써 한순간에 섬뜩해졌다.

유리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누렇게 얼룩이 진 안구가 스르르 굴러 내게로 향했다. 끔찍한 몰골을 한 괴물들이 반쯤 터지고 문드러져 초점도 맞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미친 새끼들아. 꺼져. 꺼지라고!”

악에 받쳐 고함을 질렀다.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섬뜩한 괴성과 거센 몸부림이었다. 손잡이를 붙잡고 문에 매달려 있던 내 몸까지 흔들렸다.

손을 떼고 주춤 물러섰다. 대걸레로 막아 놓은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편의점 문 안쪽을 주시하다가, 안에 있는 것들이 당장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급히 몸을 돌렸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달렸다. 아까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붙잡힐 것 같아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뛰었다. 싸늘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분 탓인지 공기에 썩은 피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최악의 크리스마스였다.

* * *

1층 로비 반대편 끝에 있는 관리 사무실로 향했다. 구멍이 송송 뚫린 작은 창문 너머로 언뜻 보이는 사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선생님, 계세요? 아무도 없어요? 저기요! 누구든, 제발.”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섬뜩하리만치 고요한 복도에 내 외침이 울려 퍼졌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손잡이를 돌려 보았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사무실에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종 서류가 책꽂이에 가득 꽂혀 있었다.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 달력에는 경비원 교대 근무 스케줄이나 건물 청소 일정을 빼곡하게 써 놓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바깥에서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하고 적막했다.

책상과 의자가 있는 창구를 지나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숙직실이었다. 사감이 야간 당직을 설 때 쓰는 곳이었다. 무심코 문을 열려다 흠칫했다. 숙직실 문에 커다랗게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빨간 유성 펜으로 벅벅 그어 거칠게 그려 놓은 ‘X’ 자가 불길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문손잡이와 문틈에 청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문 앞에는 큼직한 철제 캐비닛을 가로로 눕혀 막아 놨다.

쿵. 문안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시야가 넓어지자 문 귀퉁이에 붉은색으로 작게 쓰인 글씨가 보였다. 급하게 썼는지 지독한 악필이었지만 읽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살고 싶으면 조용히. 그들을 깨우지 말 것.〉

‘조용히’ 부분에 몇 번이고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눈앞의 문을 응시했다.

쿵. 쿵, 쿵…….

또다시 안쪽에서부터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쾅쾅쾅쾅쾅!

커다란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소음이었다. 등을 타고 차가운 전율이 흘러내렸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손을 떨고 있었다.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도를 가로질러 발소리를 내며 뛰어다니고, 문을 마구 두드리고, 목청을 높여 사감 선생님을 부르고.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테이프를 치덕치덕 발라 놓은 문이 거세게 흔들렸다. 안에서 처박아 대는 힘을 못 이기고 테이프 귀퉁이가 점점 뜯어지고 있었다. 뚜둑, 뚝.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문을 막아 놓은 캐비닛이 조금씩 밀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뛰어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무작정 위층으로 향했다.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몸 숨길 곳 없이 훤히 트인 바깥보다는 기숙사 안이 안전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콰앙! 등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거칠게 열린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공포 영화나 스릴러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한가롭게 멈춰 서서 뒤를 살피다간 죽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정신없이 계단을 올랐다. 3층인지 4층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아래쪽에서 발을 질질 끌면서 걷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난간 너머로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형체가 언뜻 보였다. 거동이 불편한 것치고는 꽤 빨랐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속도를 높였다. 자꾸만 힘이 풀려 푹푹 쓰러지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어느덧 최상층이었다. 더 이상 오를 계단이 없었다. 복도로 향했다. 복도에는 쥐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내 숨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똑같이 생긴 수많은 방문이 양옆으로 늘어섰다.

“크르륵…….”

계단 쪽에서 으스스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여기까지 나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날쌔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지능도 모자란 주제에 참으로 끈질겼다.

복도를 가로질러 달렸다. 이러다 앞쪽에서도 무언가가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가는 길이 막다른 길이면 어떡하지. 하지만 앞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장애물을 걱정하기보다는 당장 등 뒤에서 닥쳐오는 위협을 피하는 것이 먼저였다. 선택지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복도는 깨끗했다. 하지만 군데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문이 비스듬히 열린 방이 몇 군데 보였다. 어떤 곳에는 새하얗게 페인트칠이 된 벽에 어지럽게 발자국이 나 있기도 했다. 위기감 없이 태평하게 편의점을 향하던 몇 분 전까지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었다.

등 뒤의 추격자는 집요했다. 나는 줄곧 전력 질주를 한 탓에 빠르게 지쳐 갔고, 반면 저것은 산 사람이 아니라 지치지 않았다. 성대를 긁는 소리, 팔다리를 휘적대며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돌아보고야 말았다.

아는 얼굴이었다. 딱딱한 것으로 세게 얻어맞기라도 했는지 두상의 절반이 일그러져 있고, 턱관절이 기묘하게 뒤틀려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온 채 축 늘어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 사감…… 선생님.”

목소리가 형편없이 벌벌 떨렸다. 사감은 대꾸하지 않았다. 상대에게서 상한 고기에서나 날 법한 악취가 진동했다. 피로에 공포가 겹쳐 몸이 자꾸 무너지려 했다. 여기서 따라잡히면 저들과 같은 꼴이 될 것을 알면서도.

“헉, 하아, 하…….”

숨이 턱 끝까지 찼다. 눈앞이 뻘겋고 꺼멓게 보였다. 나는 비틀대며 직각으로 된 모퉁이를 돌았다. 복도 한복판에 큼직한 캐리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안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면도구와 기초 화장품, 옷가지들이 마구 튀어나와 사방팔방에 어질러졌다. 그리고 그 위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었다.

키가 큰 남자였다. 등을 보이고 앉은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새까만 겉옷 주머니에 한 손을 쑤셔 넣은 채, 긴 다리를 느슨하게 뻗고 발끝을 바닥에 무료하게 툭툭 치고 있었다.

사람이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

쫓기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나는 한순간 주춤했다. 기척을 눈치챈 남자가 돌아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얼굴 절반을 가린 새까만 마스크. 귓바퀴에 피어싱이 몇 개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내 쪽을 응시하며 조용히 일어섰다.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보였다. 날 부분이 붉은색인 큼직한 소방 도끼였다. 난장판이 된 기숙사 복도, 그 가운데 태평하게 앉아 있던 남자, 그리고 흉악한 생김새의 소방 도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도끼를 들어 힘껏 휘둘렀다. 나는 우뚝 굳어 버렸다. 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도끼날이 내 바로 옆 허공을 가르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퍽! 뜨겁고 끈적한 것이 발치에 확 튀었다. 조금 뒤에 그것이 썩은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멍하니 바닥을 보았다. 사감이, 아니, 한때 사감이었던 것의 쇄골에 도끼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남자는 사감의 옆구리를 퍽 걷어차 피범벅이 된 도끼날을 빼냈다. 목과 어깨가 절반쯤 분리된 사감이 꿈틀댔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리고 옷과 마스크에 가려져 있지 않은 목덜미에 몇 방울 튄 피를 손등으로 덤덤하게 훔쳐 냈다. 옷깃 안쪽으로 목을 길게 가로지른 자국이 언뜻 보였다. 흉터?

“아……. 이게 안 죽네.”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시금 도끼를 쳐들었다. 콰직! 시야 구석에서 잘려 나간 머리가 나뒹구는 게 얼핏 보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기괴한 몰골이 되었다 한들 원래는 사람이었다. 데면데면했을지언정 한때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었던 사이였다. 속이 메슥거렸다.

“안녕, 후배님. 왔어?”

남자가 내게 말을 건넸다. 묘하게 친근한 어조였다.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검은 마스크를 입 아래로 끌어 내리며 작게 웃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새까만 눈, 귀에 걸린 피어싱까지. 결코 농담으로라도 온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인상이었다.

“네?”

나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저런 선배 둔 적 없다.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용케 살았네.”

남자는 태연자약한 낯으로 물었다.

“왜 아직 살아 있어?”

뭔가 이상했다. 나는 뒤로 조금 물러섰다. 남자가 “응?” 하고 물으며 나를 따라 간격을 좁혔다. 그가 쥔 소방 도끼 끄트머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누구세요?”

“아니, 씨발. 후배님. 갑자기 왜 모른 척해. 이제 나 알은척하기도 싫어? 아, 내 이름 까먹었어? 그래서 그래?”

남자가 방긋 웃었다. 불온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나, 영원이잖아. 기영원.”

“죄송한데 누구신지 진짜 몰라서. 사람 잘못 보신 것 아니에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워섬기며 뒷걸음으로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인이라면 태연하게 남의 목에 도끼날을 처박아 넣지도 않고, 처음 본 사람에게 대뜸 알은체를 하며 ‘왜 아직 살아 있냐.’ 같은 질문을 던지지도 않는다.

“근데, 있잖아. 왜 자꾸 도망가?”

그가 조용히 물었다. 한 손에 든 피투성이 도끼가 한층 음산함을 더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도망갈 만하니까 도망가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정도의 정신머리는 있었다.

“…….”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주위를 살피다가 타이밍을 노려 뒤돌아 뛰었다. 저 남자는 지금껏 마주쳤던 혐오스러운 것들만큼이나, 아니, 그것들보다 어쩌면 더 위험했다.

남자는 곧장 나를 쫓아왔다. 덜그럭, 턱, 타앙.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가 든 도끼날이 벽이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부딪쳤다. 제 팔다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몸을 질질 끌며 걷던 괴물들과 달리 몹시 민첩했다.

“왜 도망가냐니까. 내가 그렇게 싫어? 아니면 무서워? 널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아?”

“그만, 헉, 그만 좀, 따라오…….”

“아냐. 내가 널 왜 죽여. 이름 좀 까먹고 사람 좀 병신 만든 것 가지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난 너 안 죽여. 아니, 못 죽여.”

텅 빈 복도의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아까 사감에게 쫓길 때와는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의 표적이 된 기분이었다.

“잘 뛰네. 그렇게 죽고 싶어 환장을 하더니, 이젠 또 살고 싶어졌나 봐?”

복도가 끝났다. 필사적으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남자는 키가 훤칠한 것만큼이나 다리도 길었다.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넘으며 나는 것 같은 속도로 내 뒤에 따라붙었다.

“또 그러네. 맨날 이랬다저랬다 해. 나만 바보 되고.”

저 또라이 같은 말에 대꾸해 줄 여유 따윈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도끼날에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진짜, 존나……. 너무한다.”

남자가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어느새 그는 등 바로 뒤까지 바짝 따라왔다. 심지어 전혀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달리기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서, 선배. 기영원 선배님!”

멈춰 서서 눈을 질끈 감고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내가 자신을 모르는 척하며 도망간다는 이유로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르는 척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으면 살려 줄지도 몰랐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차피 죽을 거라면 최후의 수단을 시도해 보고 죽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선배님을 몰라뵈었습니다! 잠깐 그게, 기억이 안 나서, 아니, 헷갈려서요.”

“…….”

내가 들어도 몹시 구차하고 비굴한 어조였다. 하지만 그게 먹혀든 모양이었다. 남자는 제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키고 눈을 떠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표정으로 도끼를 휘두르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으악!”

나는 꼴사납게 비명을 질렀다. 당연히 지를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이상해져서 끔찍한 괴물들이 쫓아오고, 겨우 마주한 유일한 사람은 미쳐서 피 묻은 도끼를 들고 설치는데. 이 상황에서 침착한 게 이상한 거였다.

퍼억! 도끼가 살을 으깨고 뼈를 쪼개는 소리가 났다. 한 발짝 뒤에서 내게 막 달려들려던 것이 제자리에 허물어졌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우리 학교 학생인 듯했다. 입고 있던 과잠에 새겨진 교표에 핏물이 번졌다. 썩어 끈적끈적해진 피가 느리게 흘러나와 검붉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지독한 악취가 났다.

“으, 흐윽…….”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자칭 선배는 처참한 몰골로 널브러진 학생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다음에는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이상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한숨을 쉬며 도끼날을 거두어들였다.

“후배님, 정신 똑바로 차려요.”

그는 더 이상 왜 모른 척을 하냐느니 하는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나를 죽이려 들지도 않았다. 이런 비유를 써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다가 방금 깨어난 사람 같았다.

선배는 턱까지 끌어 내려 놨던 마스크를 다시 올려 썼다. 코와 입매가 가려지고 묘하게 서늘한 느낌을 주는 눈만 드러났다.

“내 옆에 제대로 붙어 있어. 멋대로 딴 데 한눈팔았다간 저 새끼들한테 잡아먹히기 전에 내 손에 대가리 따일 줄 알아.”

괴물에게 물어뜯기는 것과 도끼에 머리가 날아가는 것 중 뭐가 나을지 생각해 보았다.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좆같았다.

“따라와. 큰 소리 내지 말고.”

“소리요?”

“똑같은 거 여러 번 묻지도 말고. 했던 말 또 하기 좆같으니까.”

“…….”

똑같은 걸 여러 번 물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재깍 입을 다물었다. 일단은 목숨이 소중했다. 선배는 손에 든 도끼를 느슨하게 늘어뜨리고 걸음을 옮겼다. 귀찮은 듯 건성으로 성큼성큼 걷는 것치고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바짝 긴장한 채로 눈치를 살피다 약간 늦게 그의 뒤를 따랐다.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제껏 마주친 것들은 대체 뭔지, 저 남자는 왜 마치 나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대하는지. 궁금한 것은 산더미 같았으나 물어볼 겨를조차 없었다.

* * *

앞서가는 선배를 따라 복도를 걷는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조용하다 못해 휑해 보였지만 이 기숙사 건물 곳곳에 흉악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때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사람을 해치는 괴물들이.

왜 저들은 저런 모습으로 변해 버렸을까. 지금 우리 가족들은 뭘 하고 있을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캠퍼스 내에서 사람이 끔찍한 몰골로 살해당했는데, 왜 경찰도 구급차도 오지 않는 것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끝나지 않는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의문은 그거였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런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는데도 저 사람은 너무 태연했다. 기다렸다는 듯 내게 말을 걸었고, 한때 사람이었던 것의 사체를 너무도 익숙하게 토막 냈다. 나를 잘 아는 척 후배님이라 불렀고 자신의 이름까지 선뜻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이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 학교 학생은 맞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정작 중요한 것은 짜증스럽게 말을 돌리거나 못 들은 체하며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기괴한 모습을 한 괴물들도 위험했지만, 적어도 내겐 저 남자도 그 괴물들만큼이나 위험해 보였다.

갑자기 불쑥 충동이 일었다. 도망갈까. 도망가려면 기회는 지금이었다. 선배가 내 쪽을 보고 있지 않을 때,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제법 벌어져 있을 때. 지금 달아나면 적어도 아까처럼 쉽게 잡히진 않을 터였다.

“후배님.”

그때 마침 그가 휙 돌아보았다. 검은 속눈썹이 길게 드리운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생각을 읽힌 것 같아 움찔했다.

“이리 와.”

그가 도끼를 들고 있지 않은 쪽 손을 냉큼 내밀었다. 숫제 애완견을 부르는 것 같은 태도였다. 어이가 없었다.

“이리 오라니까. 내 손 잡아.”

“저 도망 못 가게 잡고 있으려고요?”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뭘 튕기고 그래, 우리 사이에. 빼지 말고 어서 잡아. 시간 없으니까.”

우리 사이는 무슨, 얼어 뒈질 우리 사이.

“갑자기 무슨…….”

쿠웅, 쾅!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무거운 것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단단한 물건을 벽에 집어 던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거리가 꽤 있어 정확히는 들리지 않았다. 흠칫 놀라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선배가 마스크 안쪽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빨리.”

그가 재촉했다. 얼떨결에 그의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올려놓았다. 그 순간 억센 힘으로 손이 확 잡혔다. 아플 정도였다.

선배의 손은 나보다 한 마디쯤 컸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의 손이 건조하고 서늘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딱딱함이 느껴졌다. 손가락 마디와 손바닥에 온통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들어앉아 공부만 하는 평범한 대학생의 손은 결코 아니었다.

그때 다시금 육중한 소음이 울렸다. 아까보다 조금 커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손을 낚아채자마자 그는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반쯤은 끌려가고 반쯤은 그를 따라 뛰었다. 시야가 덜컥덜컥 흔들렸다.

“잠깐만요. 혼자서도 뛸 수 있어요. 잠깐!”

“어떻게 그래. 따라오라고만 해 놓고 먼저 갔다간 너 혼자 뒤처져서 빌빌거릴 게 뻔한데. 그러다가 발 걸려 엎어져서 질질 짜기나 하겠지.”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요.”

“그건 네 생각이고.”

“…….”

말문이 막혔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이러면 안 되지만, 울컥 짜증이 날 뻔했다.

내 손을 꽉 잡고 복도를 가로질러 달리던 선배가 어느 방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반 뼘 정도 비스듬히 열린 방문을 벌컥 열고 그 안으로 나를 우악스럽게 밀어 넣었다.

“윽!”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손길이었다. 방바닥에 처박힐 뻔했으나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다. 선배도 방 안으로 들어와 곧장 문을 잠갔다. 우리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방문에 기대섰다. 주인 없이 버려진 기숙사 방 안의 풍경을 살펴볼 겨를조차 없었다. 모든 신경이 문 너머의 복도에 쏠렸다.

“저 새끼들 또 한 건 잡았나 보네.”

“한 건이요?”

“식사거리 잡았다고. 인육. 사람 고기.”

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설명했다. 저녁 메뉴를 읊는 것 같은 무신경한 태도였다. 아까 편의점에서 얼핏 본 광경이 그의 입을 빌려 구체화되었다. 속이 확 뒤집혔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었다.

“사람을, 먹는다고요…….”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돼? 여기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인간 몇 없어. 사감이고 뭐고 다 그 꼴이 됐다고. 아는 얼굴이랑 마주쳤다고 멍청하게 서 있다간 순식간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뜯어 먹힐걸.”

“…….”

“빠릿빠릿하게 행동해. 저 새끼들처럼 변해서 배에서 창자 질질 흘리면서 기어 다니고 싶지 않으면.”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죠? 경찰이든 군대든 출동해야 정상 아닌가요.”

그는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소리 죽여 웃었다.

“오긴 누가 와. 왔더라도 다 죽었어. 시체 주제에 흐느적대면서 돌아다니는 새끼들도 죽은 거라고 할 수 있으면 말이지만.”

“선배, 선배는 대체 어디까지 아시는 건데요?”

“나?”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기이하게 형형한 빛을 띤 눈으로 나를 주시하며 무어라 말할 듯 뜸을 들였다.

쿵! 그 순간, 우리가 기대고 있던 문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온 힘을 다해 뭔가를 내려찍은 것 같았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한순간 문짝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누구 없어요? 헉, 살려, 살려 주세요…… 크헉!”

바깥에서 누군가 절박하게 애원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헐떡이면서. 동시에 산발적으로 그륵그륵대는 괴성이 들렸다. 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급하게 문에 다가섰다. 위기에 처한 생존자를 도와야 했다.

“야, 후배님. 뭐 하자는 거야.”

잠금을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도중에 턱 막혔다. 선배의 손아귀에 우악스럽게 잡힌 팔목이 부서질 듯 아팠다. 새까만 마스크 위로 보이는 그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내가 정신 차리라고 했어, 안 했어.”

“들으셨잖아요. 밖에 사람 있는 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아까도 피 몇 방울 튄 것 가지고 잔뜩 쫄아서 나자빠졌으면서.”

“그럼 이대로 모른 척 무시하자고요?”

이를 악물고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했다. 그가 더욱 힘을 가했다. 뿌득. 살벌한 소리가 났다.

“밖에 있는 것들 한두 마리가 아니야. 아까 너한테 달려들던 놈 같은 게 드글드글하다고. 그런데 네가 혼자 나가서 뭘 어쩔 거야.”

“적어도 숨거나 도망치는 걸 도와줄 수는 있겠죠.”

“할 수 있을 것 같아? 너 따위가?”

“안 해 보면 모르는 거잖아요.”

“좋게 말할 때 내 말 들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랄하지 말고.”

그는 여전히 기괴할 정도로 차분한 태도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방문 하나 너머에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머리에 피가 확 솟구쳤다.

“아, 네. 제가 지금 좆도 모르고 설치는 건 맞는데요. 근데 사람이 죽어 가잖아요. 살려 달라고 하잖아요. 되든 안 되든 적어도 시도는 해 봐야 될 거 아냐!”

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이제까지는 피 묻은 도끼를 휘두르며 비정상적인 언행을 하는 그가 무서워서 비굴하게 굴었다. 처음 본 낯선 남자를 꼬박꼬박 선배라 부르며 비위를 맞춰 주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도 나처럼 기숙사에 틀어박혀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평범한 대학생일 터였다. 누군가의 자식이자 형제자매이자 친구일 거고. 무고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도움을 청하는데, 빤히 듣고서도 그냥 숨어 있기엔 양심이 찔렸다.

홧김에 버럭 소리를 질러 놓고 나는 제풀에 긴장했다. 저 남자가 또 눈이 확 돌아서 나에게 도끼를 휘두르진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선배는 다짜고짜 성질을 내지도 않고 나를 해치려 들지도 않았다.

“나가서 죽으려고 그러는 거지?”

원래도 낮은 편인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말끝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절로 뻣뻣해지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선배 위험하게 안 해요. 저 혼자 나가서, 저 사람만 데리고 곧바로 들어올게요.”

“넌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하잖아. 그게 죽으러 가는 거랑 뭐가 달라.”

“죽어도 저 혼자 죽어요. 제가 죽더라도 선배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란한 소음이 터져 나와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밖에 있는 사람이 반격을 시도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반대로 당했거나.

“아악!”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무작정 선배의 손을 뿌리치고 뛰쳐나갔다.

“정호현!”

뒤에서 팔이 확 뻗어 나왔다. 큼직한 손바닥에 코와 입이 막혔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다시 돌아올 무렵, 나는 선배의 손에 입을 막힌 채 뒤로 휘청휘청 끌려가고 있었다.

“헉!”

뒤에 있던 침대에 등부터 쓰러졌다. 텅! 매트리스가 거세게 튀어 올랐다. 힘없이 나자빠진 내 위로 그가 타고 올랐다. 검은 옷에 검은 머리, 새까만 색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묵직한 체중이 턱 실렸다. 단단한 허벅지가 내 허벅지와 뒤엉켜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방금 그는 처음 듣는 날 선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반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이름을 알려 준 적 없었다.

“우리 호현이, 아주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네? 그렇게 죽고 싶으면 내가 죽여 줄까.”

선배가 반쯤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잇새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전히 내 입을 단단히 막은 채였다. 이리저리 고개를 휘저어 보려 해도 얼굴을 붙든 손힘이 하도 강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나오지 못한 뜨거운 숨이 기도 안에서 맴돌았다. 괴로웠다. 그는 눈물 고인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코끝이 닿을락말락한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잡티 없이 새까만 빛깔이라 내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숨통이 막힌 채 벌겋게 충혈된 눈에 눈물이 잔뜩 맺혀서는, 악귀라도 본 듯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내가.

“그래. 어차피 넌 나 존나게 싫어하니까. 한 번쯤 죽인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겠지.”

그가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까만 속눈썹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손아귀 힘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귓가에서 삐 소리가 크게 들렸다. 밖에서 누군가 사투를 벌이며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이 점차 아득하게 멀어졌다.

선배는 내 입을 틀어막고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다가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고 나서야 손을 떼 주었다. 산소가 모자라 눈앞이 핑핑 돌던 와중에 막힌 숨이 왈칵 터졌다.

“컥! 쿨럭, 헉…….”

그는 나를 찍어 누르던 것을 그만두고 몸을 훌쩍 일으켰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벽에 기대어 뒀던 도끼를 도로 집었다.

“이제 가자.”

나는 괴롭게 기침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어이가 없었다. 밖에 있는 사람을 구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절망하던 것조차 잊었다.

“아까는 나가지 말라면서요. 나가면 죽는다고 협박할 땐 언제고!”

“그건 그때고. 지금은 아니지.”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빨리 바뀌세요?”

“하……. 후배님. 과거에만 얽매이지 말고 현재를 좀 사세요.”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대꾸했다. 이유 모를 울분이 치솟았다.

“저기요, 선배님. 바깥 사정 신경 안 쓰고 숨어 있을 거면 그냥 여기 계속 있는 게 낫지 않아요? 침대 있고 전기 들어오고 난방 잘되고 물도 잘 나오고.”

“저기요, 후배님. 너 학점 좋지 않아?”

그가 안쓰러움과 한심함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머리가 왜 이렇게 안 돌아가? 방에 처박혀서 공부만 해서 그래? 문제 풀고 레포트 쓸 머리로 가끔은 생각이란 것도 하고 살아.”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뚜벅뚜벅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문간에 다가갔다. 그리고 발을 들어 문짝을 뻥 걷어찼다. 나는 넋이 나가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퍽, 콰직! 고작 발길질 두어 번에 문이 망가졌다. 분명히 들어올 때 잠가 놨는데, 문이 힘없이 덜렁거리며 한 뼘 정도 열렸다. 바깥에서 가해진 충격에 이미 잠금장치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던 데다가 선배의 무자비한 발길질까지 더해진 탓이리라.

“이런 허술한 데 숨어 있겠다고? 왜, 저 새끼들 죄다 불러 모아서 파자마 파티라도 하게? 입장은 프리패스겠네. 문이 이 지랄이 났으니까.”

“아뇨. 죄송합니다. 잘못했네요, 제가. 제 입이 문제였네요.”

나는 재빨리 사과했다. 저 좆같은 말을 더 듣고 있느니 차라리 내가 져 주고 끝내고 싶었다. 선배는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살피다가 내게 까딱 손짓했다.

“나와.”

바깥은 조용했다. 방에 들어오기 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망가진 문이 제멋대로 흔들려 끼익끼익 소리를 내기에 무심코 돌아보았다. 문짝에 길게 묻은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선배!”

“보지 마.”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 새끼들 갔어. 당분간 이쪽으로는 안 올 거야. 지능이 낮아서 먹잇감 하나 물면 다른 데는 신경 안 써.”

불길한 생각이 직감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럼 아까 나가지 말고 모른 척하라고 한 게…….”

“우리 몫까지 대신 시선 끌어 주고 있는데 굳이 나서서 뭐 하게.”

“…….”

“걔한테 고마워해. 온 복도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 줘서, 네가 나가겠답시고 지랄한 것도 다 묻혔잖아. 목청 좋던데? 성악과인가?”

“하.”

절로 헛웃음이 났다. 그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미끼로 썼다고 태연하게 고백하고 있었다. 지금 이 사태가 화재나 지진처럼 평범한 다른 자연재해였더라도 그는 저렇게 행동했을까. 저 하나 안전하게 대피하겠답시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피해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음으로 떠밀었을까.

“뭐 해. 가자니까? 시간 끌어서 좋을 것 없어.”

그가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저항도 못 하고 얼떨결에 잡혔다. 내 손을 꽉 얽어 오는 힘이 하도 억세서 아플 지경이었다.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나는 복도를 뒤로하고 서둘러 걸었다. 이동하는 내내 선배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린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이 몹시도 침착했다.

“있잖아요, 선배님.”

“왜요, 후배님.”

그제야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장난처럼 건들건들하게 내 말을 받아치면서. 꾹 참고만 있던 의문들이 터져 나왔다.

“저 왜 데리고 다니세요? 전 아무것도 모르고 짐만 되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을 왜 굳이 끌고 다니시냐고요. 전 지금 좀 이해가 안 되는데요. 선배한테 득 될 거 하나도 없잖아요.”

“…….”

“아니면……. 저도 여차하면 미끼로 쓰시려고요?”

“후배님,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고 그러세요.”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 어깨를 으쓱했다. 별 싱거운 놈 다 보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너는 죽으면 안 돼. 여기 있는 사람 다 뒈져도 넌 살아야 돼.”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깊어졌다. 더 이상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우리는 굳게 닫힌 금속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기숙사 꼭대기 층에 있는 남학생용 공동 샤워실이었다. 기숙사 방마다 욕실이 있긴 하지만, 4인실을 쓰는 학생들을 위해서 샤워실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

원래는 샤워실 문도 방문과 마찬가지로 얇은 나무 재질이었다고 한다. 열쇠 하나로 쉽게 열고 잠글 수 있는. 그러다 몇 년 전, 누군가 한밤중에 몰래 실 핀으로 여자 샤워실 문을 따고 들어가 로커에 숨어 있다가 발견된 뒤로 도어록까지 달린 철문으로 교체되었다. 일과 시간 외에는 잠가 놔서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여기밖에 없어. 안전하게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이건 어떻게 열려고요.”

도어록 비밀번호는 사감 선생님이나 직원들만이 알고 있었다. 도끼로 잠금장치를 때려 부술 셈일까. 그랬다간 아예 문이 망가질 텐데.

“너 대체 왜 이렇게 멍청해졌어?”

선배는 눈매를 찌푸리고 나를 희귀 동물 보듯 보았다.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천하의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너무 충격받아서 도어록 여는 법도 까먹었어? 덮개 열고 번호 누르면 되잖아.”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어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제집 현관문 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삑삑삑삑, 띠로롱, 철컥.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

할 말을 잃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학생에게 알려 줄 리가 없는 비밀번호를 저 선배가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단단한 철문 너머로 탈의실 풍경이 보였다. 똑같이 생긴 로커가 줄지어 늘어섰고, 목욕 바구니나 수건을 올려 둘 수 있는 선반이 달렸다. 사람들이 벤치 근처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도어록 잠금이 해제되자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

누군가 버벅버벅 삿대질을 했다. 나도 덩달아 얼떨떨해졌다. 그 와중에 선배만이 유일하게 담담한 무표정이었다. 때마침 그가 들고 있던 도끼 끄트머리가 바닥에 긁혀 섬뜩한 소리를 냈다.

“으아아아악!”

뒤이어 우렁찬 비명 소리가 터졌다.

폭풍 같은 혼란이 휩쓸고 간 후 사람들은 쭈뼛쭈뼛 선배와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가 ‘그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안심한 듯했다.

“비밀번호는 대체 어떻게 알고 들어오셨어요?”

“적혀 있잖아. 관리 사무실 컴퓨터 모니터 옆에. 너희도 그거 보고 문 땄으면서 뭘 물어.”

선배가 귀찮은 듯 건성으로 대꾸했다. 나한테도 그랬지만, 저 사람들에게도 초면에 아주 태연하게 반말이었다. 여러모로 참 한결같은 인간이었다.

“어……. 그렇긴 한데요.”

처음 질문을 던진 남학생이 멋쩍은 듯 말끝을 흐렸다. 더 캐묻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과잠을 입은 차림이었다. 팔에 새겨진 학번을 언뜻 보니 새내기였다.

“그것보다 잠깐만. 너희 말이야.”

그의 말을 끊고 다른 사람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턱과 입 주변에 다듬지 않은 수염이 듬성듬성 났고, 머리를 덥수룩하게 길렀다. 나는 생각했다. 저 사람 100퍼센트 복학생이다. 저런 외모로 20대 초반이라면 다른 의미로 소름이 끼칠 것 같았다.

“이제껏 어디 있었냐? 여기 멀쩡한 사람은 우리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다른 곳은 다 좆됐잖아. 식당부터 시작해서.”

선배는 그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야, 묻잖아. 어디 있었냐고.”

“몰라. 기억 안 나.”

“뭐? 씨발. 장난하냐?”

복학생이 인상을 확 구기며 욕설을 뱉었다. 선배가 처음으로 무표정을 깼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이 가느스름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량함과는 거리가 먼 인상이 한층 무서워졌다.

“씨발은 네 면상이 씨발이고. 생긴 게 좆같으면 말이라도 곱게 하든가.”

속으로 감탄했다. 어쩜 저렇게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 속을 득득 긁어 놓을까. 서로를 빤히 노려보다가 복학생이 먼저 눈길을 피했다. 기세 싸움에서 밀린 게 분했는지, 그는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내게 삿대질을 했다.

“미친, 별 또라이 같은 게……. 야, 옆에 있는 놈. 그럼 넌 어디 있었는데.”

“저는 제 방에 있었는데요. 레포트 제출이 25일 자정까지여서.”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여러 사람 앞에서 벼락치기로 과제를 끝내고 쭉 자빠져 잤다고 고백하려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계속 방에 혼자 있어서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뭐? 밖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 몰랐다고? 이 새끼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냐?”

“저, 저기. 준석 형.”

과잠을 입은 남학생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러다 남자에게 퍽 밀쳐졌다. 마른 체격의 그는 속절없이 비틀거렸다.

“내가 못 할 말 했냐? 여기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지 사람들은 죽어 나가지, 아주 미쳐 버릴 것 같은데. 한 놈은 치매 걸렸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한 놈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네? 지금 이게 말이 돼? 되냐고. 어?”

허공을 가로질러 불안한 눈짓이 오고 갔다. 샤워실 안에 있던 모두가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이제껏 선배에게 어영부영 끌려오느라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내가 세상모르고 쿨쿨 자는 동안 이들은 이 사태를 처음부터 겪었으리라는 것을. 끔찍한 시간을 보내며 신경이 한계까지 곤두섰으리라는 것을.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이런 상황에.”

나는 일단 웃었다. 어쨌든 간에 샤워실에 먼저 와 있던 건 저들이었다. 거기다 우리가 다짜고짜 난입한 거고. 그러니 져 주는 한이 있더라도 좋게 넘어가고 싶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이목을 끄는 것도, 상대를 긁어서 쓸데없이 갈등을 만드는 것도. 그저 뭐든지 적당히 흘려 넘기는 게 제일이었다.

“좀 뜬금없이 들릴 수 있다는 건 이해하는데요. 정말 그랬어요. 밀린 과제 하느라 방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왔고, 그 뒤로는 귀마개 끼고 뻗어서 자느라 다른 소린 못 들었어요.”

나는 선배를 흘긋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세상만사에 무관심해 보였다. 여기까지 날 데려와 놓고선 자기는 제삼자라는 태도였다.

“여기 이 선배는……. 나쁜 사람은 아닌데요. 형이 이해해 주세요. 하도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다 보니까 말이 좀 날카롭게 나갈 수도 있고, 뭐 그렇잖아요. 비상사태인데 남은 사람끼리라도 잘 지내야지 않겠어요. 네?”

복학생은 나를 위아래로 못마땅하게 훑어보았다. 그러나 뭐라 대꾸하지는 않았다. 내가 대놓고 저자세로 나오니 기분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소개부터 할 걸 그랬네요. 저는 경영학과 정호현이라고 하고요.”

그때 뒤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여학생이 반색하며 앞으로 나섰다.

“오빠! 저 기억 안 나세요?”

“응?”

“저 다빈이요. 최다빈. 저 1학기 때 교양 팀플 같이했잖아요. 스포츠 마케팅의 이해. 기억 안 나세요?”

나는 기억을 더듬다 짧게 탄성을 질렀다. 지난 학기에 들었던 교양 수업 조원이었다. 산업 디자인과였나 시각 디자인과였나, 아무튼 디자인 전공이었는데. 긴 생머리를 짧게 자르고 펌을 한 탓에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아……. 다빈아. 미안. 머리 모양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얼떨떨한 와중에 습관적으로 안부를 묻는 말이 흘러나갔다.

“덕분에요. 그때 팀플 최고점 받고 A+ 떠서 간신히 장학금 안 잘렸어요. 선배님도 안녕하세요.”

최다빈은 내 곁에 있던 선배에게도 인사를 했다. 내게 친근하게 알은체를 한 것과는 달리 상당히 공손한 태도였다.

“아는 사이야?”

“네. 조소과 기영원 선배님이시잖아요. 미대 통합 전공 시간에 몇 번 뵈었어요. 이름은 출석 부르는 거 듣고 알았고요.”

나는 내심 놀랐다. 이제껏 그는 내게 비현실 그 자체였다. 첫 등장부터가 그랬고, 도저히 정상이라고는 보아줄 수 없는 행동거지가 그랬고, 시도 때도 없이 흘리는 뜻 모를 말들이 그랬다. 그와 있었던 모든 일이 저예산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새삼 얼빠진 생각이 들었다. 진짜 우리 학교 학생이었구나. 전공도 있고 수업도 듣는.

깍듯이 인사를 한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선배는 그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성의 없이 대꾸했다.

“난 너 기억 못 해.”

최다빈은 전혀 기죽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꽁꽁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최다빈은 내 팔을 잡아끌고 일행의 한가운데로 데려가서는 다른 이들을 소개해 주었다.

“여긴 수학 교육과 1학년 박건우라고 하고요.”

“아, 안녕하세요. 형들.”

안경 낀 남학생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기 있는 사람은 행정학과 윤준석 오빠. 졸업반이세요. 저……. 준석 오빠. 인사 안 하실 거예요?”

“인사? 이 상황에 무슨 인사를 하고 자빠졌냐. 미팅 나온 것도 아니고.”

그는 날 선 태도를 고수했다. 욕을 섞어 투덜거리더니,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최다빈이 나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묘한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 * *

사람들은 저마다 탈의실 로커와 선반, 벽에 기대앉았다. 2인실을 써서 이제껏 올 일 없었던 공동 샤워실에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이야. 저만치 구석에서 줄담배를 뻑뻑 피우던 윤준석은 아예 벤치 하나를 차지하고 뻗어 잠들었다.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나는 아는 게 없는지라 딱히 할 말이 없었고,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선배는 입을 열 의지가 없어 보였다. 결국 두 후배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그날 저는 본가 내려가려고 짐 싸고 있었어요.”

“저는 전공 시험을 늦게 봐서……. 시험 막 끝나고 기숙사 오던 중이었어요. 1층에 있는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가 방 올라가려고 했는데.”

우리 학교는 캠퍼스가 몹시 넓었다. 산속에 지어 땅값이 싸서 규모만 쓸데없이 큰 거라고 모두가 투덜거렸다. 매년 초마다 캠퍼스에서 길을 잃는 새내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 넓은 캠퍼스 중에서도 학생 기숙사 건물은 제일 외진 곳, 산기슭과 접한 외곽 지역에 있었다. 산 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온갖 벌레가 들어오는 건 물론이고, 몇 년 전엔 멧돼지가 복도까지 들어왔더라는 소문이 괴담처럼 돌아다녔다. 그래서 학교에 일어난 이변을 알아채는 것이 가장 늦었다.

“캐리어 끌고 가는데 식당 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뭐지, 싸움 났나? 음식에서 벌레 나왔나? 그런 생각 하면서 지나가려는데.”

최다빈이 기억을 더듬어 가며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 학교는 굉장히 외진 곳에 있는 만큼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았다. 산길을 따라 한참 들어와야 해서 따로 자가용이 없으면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 몇 시간에 한 번씩 산 아래 시가지까지 다니는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종강을 맞은 기숙사는 의외로 붐볐다. 짐을 다 싸 놓고 셔틀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 종강 기념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학생이 식당에 비틀비틀 달려 들어와 쓰러졌다. 누가 보아도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인데 어떻게 움직인 것인지 미스터리였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누군가는 경비원을 부르러 달려갔다. 그중 용기 있는 학생이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저기요! 괜찮으세요?〉

〈…….〉

〈네? 뭐라고요?〉

피 웅덩이 가운데 고꾸라져 있던 이가 꿈틀거렸다.

〈움직일 수 있으시겠어요? 저기……. 어?〉

〈큭, 끄륵, 크아아악!〉

곧 학생 식당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뒤로는 그냥 캐리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뛰었어요. 저도 그렇고 여기 건우도 그렇고, 밖에서 유리 너머로 보기만 한 거라서 그나마 빨리 도망칠 수 있었어요. 식당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식당과 로비에 있던 수백 명의 학생들은 패닉에 빠져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은 활짝 열린 출입문을 통해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갔고, 소수는 도로 건물 더 깊이 들어갔다. 최다빈과 박건우는 후자였다.

“저희는 운이 좋았죠. 샤워실 문 꼭 걸어 잠그고 조용히만 있으면 괜찮거든요. 밖에 있는 것들은 눈이 잘 안 보이는 대신 소리에 민감해요.”

선배도 그런 말을 했었다. 큰 소리 내지 말고 따라오라고. 그 또한 괴물들의 습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빠도 무사할 수 있었을 거예요. 방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었으니까. 비명 지르거나 소리 내면서 돌아다녔던 사람들은 다 들켰어요.”

“그래도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먹을 것도 없고. 물이야 차고 넘치게 있겠지만.”

샤워실 문 너머로 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수십 개의 샤워기가 보였다. 여기 있으면 탈수로 죽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나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지금 기숙사에 인터넷도 안 되고 전화도 안 터지던데. 이럴 바에 차라리.”

“형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정말 방에만 계셨나 보네요.”

웅크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박건우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 애가 낀 안경알이 창백한 형광등 빛을 반사했다.

“보세요.”

박건우는 비척비척 일어서 창가로 향했다. 탈의실 구석에는 환기용으로 작게 창이 나 있었다. 그는 잠금을 해제하고 창을 위로 비스듬히 밀어 열었다.

창문 틈으로 서늘한 햇살이 쏟아졌다. 살짝 눈을 찌푸렸다. 밖에 나가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햇빛이 낯설게 느껴졌다. 눈부심에 새하얗게 물들었던 시야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차갑고 버석버석한 겨울 캠퍼스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흰 보도블록이 깔린 널찍한 길과 잘 관리된 화단, 드문드문 있는 벤치와 자판기, 그리고…….

“아.”

나는 조용히 탄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걷는 몸짓이 뻣뻣했다. 누군가는 팔이, 누군가는 다리가 없었다. 누군가는 창자가 길게 삐져나와 무릎께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검붉은 피로 얼룩진 부패한 육신이 햇살 아래 도드라졌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저것은 사람이라 불러서는 안 되었다. 이미 죽은 자들, 시체들이 캠퍼스를 배회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

“나가면 죽어요. 운이 좋아서 안 잡히고 제일 가까운 다음 건물까지 간다고 해도, 거기서 다음 건물까지는 또 어떻게 가요? 그다음 건물까지는? 정문까진 평소에도 걸어서 30분 넘게 걸렸는데, 어떻게…….”

“…….”

“우리 갇혔어요. 못 나가요. 갇혀 있다가 이대로 다 죽을 거예요.”

“야, 박건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최다빈이 언성을 높였다. 움츠러들어 있기만 하던 박건우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반박했다.

“누, 누나는 어차피 여기 친한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죠. 저는 유진이가 있단 말이에요. 걱정돼서 미칠 것 같은데 어쩌라고요.”

“유진이?”

낯선 이름이 나왔다. 무심결에 되물었다.

“너만 걔 걱정해? 나도 걱정된단 말이야. 그래도 어떡해. 당장 찾아서 데려올 수도 없고.”

“전 지금이라도 찾으러 가고 싶어요. 나가기 전에 그렇게 무서워했는데……. 같이 가 줄걸. 그렇게 보내지 말걸.”

박건우는 제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키가 작고 마른 그가 몸을 움츠리자 과잠에 푹 감싸인 것처럼 보였다. 최다빈이 어설프게 그를 위로했다.

“별일 없을 거야. 인규 오빠도 같이 갔잖아. 지금 둘 다 어디 잘 숨어 있을걸. 타이밍 살피느라 못 돌아오고 있는 거고.”

“흑, 으흑…….”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 앉아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건우야, 유진이가 누구야? 괜찮으면 형한테 말해 줄 수 있어?”

“제 여자 친구요.”

푹 숙인 고개 아래에서 울음기 어린 대답이 새어 나왔다.

“여자 친구가 지금 밖에 있어?”

“먹을 게 없어서 여기 있는 사람들끼리 두 명씩 조 짜서 식량 찾으러 나가기로 했어요. 유진이랑 다른 형이 뽑혔어요. 그 애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이번 한 번만 빼 달라고, 제가 대신 가겠다고 했는데. 준석 형이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예외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그가 이성을 잃고 횡설수설했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윤준석은 코까지 골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었다. 자신의 험담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랬구나. 많이 걱정되겠다.”

“혀, 형. 호현 형. 있잖아요.”

그가 갑자기 고개를 확 들었다. 흠칫 놀랐다. 충혈된 눈이 눈물에 얼룩진 안경알 너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혹시요, 혹시 여기 오시기 전에요. 1층에 있는 편의점 가 보셨어요?”

남자애의 마른 손이 내 상의 자락을 절박하게 움켜쥐었다. 옷이 잡아당겨져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유진이가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일 터졌을 때도요, 카운터 보고 있는 걸 제가 급하게 잡아끌고 오느라 유니폼도 못 벗고 왔어요.”

과제를 앞두고 죽을상을 한 내게 에너지 드링크를 박스째로 꺼내다 주던 아르바이트생이 떠올랐다. 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묶고 유니폼 조끼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음 장면. 불길하게 열려 있던 편의점 창고 문과, 무언가를 씹는 소리와, 그 안에 쓰러져 있던……. 나는 애써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공부도 하고 야간 근무도 하느라 밤 꼬박 새우다가 뭣도 모르고 도망 온 애를, 서른 시간 넘게 못 자서 정신도 못 차리는 애를……. 식량 찾아오라고 다시 내보냈어요. 네가 알바니까 편의점 물건 위치 잘 알 거 아니냐고.”

박건우가 한 맺힌 말을 쏟아 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이 떨리는 것을 감추려 이를 악물었다.

“호현 형, 그 애…… 유진이 보셨어요? 키는 한 160 정도고, 머리 어깨까지 오고, 회색 맨투맨 위에 편의점 조끼 입었는데. 오는 길에 마주치진 않았어요? 네? 제발.”

그는 대답을 채근하듯 나를 흔들었다. 나는 그가 흔드는 대로 휘청휘청 흔들리면서 침묵을 지켰다.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건우야, 그만하자. 오빠는 방에만 있어서 아무것도 몰랐다잖아.”

최다빈이 그를 뜯어말렸다. 박건우는 결국 불안함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 애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선배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내 방관하고만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감지한 듯 문 쪽을 보았다.

“얘들아.”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나와 최다빈, 심지어는 훌쩍훌쩍 울던 박건우마저 그를 보았다. 선배는 팔짱을 풀어 문을 가리켰다.

“밖에.”

쿵.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울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쿵.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우리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윤준석이 슬금슬금 합류했다.

쿵. 쿵.

“……줘.”

소리가 들렸다.

“문 좀 열어 줘.”

사람의 말소리였다. 문 너머로 둔탁하게 흐려진 채 넘어온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았다.

“아파……. 뜨거워. 문 열어 줘.”

“인규 형?”

박건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내 뒤쪽에 서 있던 그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아까까지 서럽게 울던 녀석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나 싶을 정도였다.

“형, 인규 형! 지금 바로 열어 드릴게요.”

박건우는 허겁지겁 도어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금 해제 버튼을 미처 누르기 전에 선배가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야, 열지 마.”

“네?”

“밖에 있는 게 뭔 줄 알고 열어.”

그는 선배의 흉흉한 시선을 받고 멈칫했다.

“말하는 거 못 들었냐? 뭐긴, 사람이잖아!”

윤준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성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떻게든 선배의 의견에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았다.

“식량 가지러 갔던 놈들 이제 왔나 보네. 박건우, 뭐 하냐? 네 여친 왔다는데 재깍 문 안 열고.”

박건우는 두 남자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선배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은 사람일지 모르겠는데. 저 새끼 들여보내 준 뒤에도 사람일 것 같아?”

절박하게 도움을 구하는 외침. 문 너머에 있는 낯선 사람을 돕는 것을 꺼려 하던 선배.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등을 타고 불쾌한 전율이 흘렀다.

나는 ‘인규 형’이라는 사람을 아까도 마주쳤었다. 구할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건우야, 나 다쳤어. 아파……. 빨리 열어 줘.”

“형! 유진이는요?”

“유진이……? 유, 진이.”

“유진이 지금 형이랑 같이 있어요?”

밖에서는 대답 대신 신음 섞인 불안한 숨소리만 들렸다. 결국 박건우가 선배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잠금 해제 버튼을 눌렀다. 띠로롱.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전자음이 울려 퍼졌다.

“헉.”

그는 버튼을 누른 뒤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바짝 굳어 버렸다. 문이 느리게 열렸다. 반 뼘 정도 벌어진 틈새로 피투성이 손이 불쑥 밀고 들어왔다. 곳곳에 살점이 패어 시뻘건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꼭 무언가에 물어뜯긴 것 같았다.

모두가 처참한 광경에 넋을 잃은 가운데 선배 혼자만이 민첩하게 반응했다. 그는 한쪽 발을 들어 문을 찍어 버렸다.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손에서 피가 튀었다.

“흐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렸다. 파득파득 경련하는 손이 도로 힘겹게 빠져나갔다. 선배는 친절하게도 문을 한 번 더 걷어차 주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자동으로 도어록 잠금이 걸렸다.

문밖에서는 한동안 괴로운 신음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소리가 잦아들었다.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사태가 마무리된 후에도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미친. 미친 새끼야!”

윤준석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선배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돌았냐? 이 사이코 새끼, 네가 뭔 짓을 한 건지 알아?”

코앞까지 다가가 놓고 막상 멱살을 잡거나 때릴 용기는 없었는지, 윤준석은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왜?”

“왜? 너 방금 왜라고 했냐? 사람 손을 으깨 놓고, 왜?”

“내가 말했잖아. 저거 사람일 것 같냐고.”

“뭐라고?”

“이해가 안 돼? 생긴 게 씨발이랬더니 대가리 돌아가는 수준까지 씨발이네?”

선배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끌어 내리고 손등으로 눈가를 슥 훔쳤다. 아까 튄 피가 벌겋게 묻어났다. 짙은 눈매 옆에 핏자국이 번져 한층 더 살벌한 몰골이 되었다. 불같이 화를 내던 윤준석마저도 순간 움찔할 정도였다.

“할 말 더 없으면 꺼져. 난 씻으러 갈 거니까. 안 그래도 기분 좆같은데 더 좆같은 상판 들이밀지 말고.”

그가 상큼하리만치 담백하게 툭 던지고 몸을 돌렸다. 윤준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야, 기영원 이 씨발 놈아!”

“그렇게 문 열어서 뒈지고 싶으면 안 말리겠는데. 이번엔 네가 직접 열어 봐. 후배 시키지 말고.”

선배가 어깨 너머로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못 하겠지?”

윤준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샤워실 안쪽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속말로 욕설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 * *

선배가 씻으러 샤워실에 들어간 후 남겨진 사람들의 상태는 처참했다. 최다빈은 탈의실 가운데 놓인 벤치에 웅크려 앉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고, 박건우는 자꾸만 울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아까 본 참혹한 광경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난처했다. 박건우를 달래 줄까 하다가 저런 상태인 애를 건드려 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 같아 그만두었다.

“호현 오빠.”

최다빈이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불렀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응, 다빈아.”

“오빠는 기영원 선배님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사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내 쪽에선 생판 남인데 상대방이 나를 알은체하더라. 자꾸 친한 척을 해 오는데, 거부했다간 도끼에 머리 쪼개져 죽을 것 같아서 장단 맞춰 주고 있어. 솔직한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들어갔다. 왠지 그렇게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오다가 마주쳤어. 어쩌다 보니까 같이 행동하기로 했고.”

“그럼 예전엔 서로 몰랐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지. 그런데 그건 왜?”

“저 선배 원래도 저랬었나 싶어서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전 잘은 모르고 그냥 알음알음 소문으로만 들었는데요. 기영원 선배님, 미대 쪽에선 유명하셔서. 앞에선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면서 뒤에서 몰래 좋아하는 애들도 많았고.”

내가 모르는 그의 이야기가 최다빈의 입을 빌려 흘러나왔다.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미대생 기영원. 여학우들에게 인기를 끄는 기영원. 와, 너무 안 어울려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런데 제가 아는 바로는 저렇게까지……. 저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녀는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망설였다. 그러다 곧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다.

“아니에요. 그냥 다들 예민해져서 그런 거겠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이런 때에까지 평소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냥 못 들은 거로 해 주세요.”

최다빈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어드라이어와 전신 거울, 면봉 따위가 있는 구역은 그의 전용 흡연실이었다. 그쪽에서 나오는 것을 보니 또 한 대 태우러 갔던 것 같다.

“아, 나. 씨발.”

그가 손에 움켜쥐고 있던 것을 짜증스럽게 내던졌다. 그게 하필 내 쪽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피했다. 잔뜩 구겨진 빈 담뱃갑이 내 옆 허공을 날아 벽에 퍽 맞고 떨어졌다.

“담배 떨어졌잖아. 이유진한테 편의점 가게 되면 담배도 가져오라고 말해 놨었는데. 씁, 짜증 나게.”

식량을 찾기 위해 보낸 원정은 실패했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의 기대를 걸고 떠났던 두 사람은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말 몇 마디 좀 한 것 가지고 질질 짜면서 나가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재수 한번 더럽게 없네.”

윤준석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때 최다빈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건 오빠가 너무하셨어요.”

“뭐?”

“오빠가 너무하셨다고요. 유진이 그때 아팠어요. 한 번쯤은 빼 줄 수도 있었잖아요.”

황당해하던 윤준석이 왈칵 성질을 냈다.

“그럼 이게 내 잘못이냐? 어? 내 탓이냐고!”

“오빠 잘못이 전혀 없다고는 못 하죠. 건우가 자기가 대신 나가겠다고 했고, 저랑 인규 오빠도 찬성했는데 오빠가 예외는 없다고 끝까지 우겨서 걔가 간 거잖아요.”

“이게 지금 애들 소꿉놀이냐? 사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개인 사정 일일이 다 따져서 누군 봐주고 누군 안 봐주냐? 야, 군대에서 그따위로 해 봐. 당장에 뒈지게 기합받지.”

“그래서…….”

뒤쪽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구석에 웅크려 있던 박건우가 어느새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초췌한 얼굴에 묘한 광기가 어렸다.

“그래서 아픈 애한테 이년 저년 해 가면서 욕 퍼부으셨어요?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우는 애 결국 문밖으로 내보내셨고요?”

“뭐? 이것들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진짜.”

윤준석이 솥뚜껑만 한 손을 확 쳐들었다. 벌떡 일어나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내 등 뒤에서 최다빈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만하세요.”

“이래서 계집애들은 안 된다니까. 뭐만 하면 못 하겠다고 질질 짜고, 남자 뒤에 숨으려 하고. 아주 버릇이 잘못 들었어. 박건우 너도, 인마. 군대도 안 다녀온 새끼가 여자에 빠져 가지고.”

“형!”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인상을 쓰며 언성을 확 높였다. 윤준석이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보았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딱딱하게 굳으려는 얼굴을 풀고 억지로 웃었다.

“잠시만요.”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끝에 직사각형 종이 상자의 감촉이 느껴졌다. 방에서부터 갖고 나왔던 건데, 다행히 도중에 잃어버리지 않고 제자리에 있었다.

“한 대 피우실래요?”

“이거 약해서 피워 봤자 입맛만 버리는데.”

내가 내민 담뱃갑을 본 윤준석이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자칭 흡연실 쪽으로 턱을 까딱였다. 사실상의 승낙이었다.

“가시죠. 불도 빌려 드릴게요.”

“불은 나도 있다, 이 새끼야.”

그의 어깨를 가볍게 밀며 걸음을 옮겼다.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최다빈과 박건우가 나를 보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쉬고 눈짓했다. 최다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풍기와 헤어드라이어가 설치된 화장대 앞까지 왔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흘러들었다. 간만의 흡연이었다. 기숙사 내부는 전면 금연이라, 사흘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과제를 하면서도 담배는 한 번도 피운 적 없었다. 카페인과 타우린을 물처럼 들이켜면 들이켰지.

“형, 기분 푸세요. 아시잖아요. 다들 신경 곤두서 있는 거.”

“야, 정호현. 너도 내가 우스워 보이냐?”

마음 같아선 그 말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여 주고 싶었다. 자기 객관화 한번 정확하시다고 박수도 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캠퍼스 내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현재까지 밝혀진 생존자는 이 다섯 명이 전부였다. 분열을 일으켜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케이스가 저마다 갈라져서 각자도생하는 거고, 최악의 경우에는 전멸할 수도 있었다.

무슨 상황이든 그냥 적당히 넘길 것. 튀는 행동 하지 말고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 것. 내 신조였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런 상황에서까지 신조를 지키려니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리가요.”

“너도 아까 봤지? 어? 새파랗게 어린 게 싸가지 없이 한 마디도 안 지고 말대꾸하는 거.”

“어려서 그래요. 이제 갓 스물 넘긴 애들인데요, 뭐. 어린애들 상대로 싸워 봤자 김만 빠지죠. 형이 이해하세요.”

“하여간 새끼가, 뺀질뺀질하게 입만 살아서는.”

그는 착잡하게 연기를 뿜어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야, 지금 꼭 영화 같지 않냐?”

“무슨 영화요?”

어이가 없었다. 이 상황에 영화 타령이 나오나.

“좀비 영화. 딱 그거잖아.”

듣고 보니 지금 상황에 묘하게 들어맞는 말이었다. 왜 이제껏 좀비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 좀비라니, 부조화도 이런 부조화가 없었다. 차라리 미세먼지와 만성 스트레스로 인한 신종 질환이 퍼져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고 하는 게 더 그럴듯했다.

“살다 보니 별일 다 겪는다. 난 우리나라가 망한다면 북한에서 핵 쏴서 망할 줄 알았는데.”

윤준석은 끝도 없이 싱거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한껏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긴장으로 몸이 굳어 있던 차에 니코틴이 들어오자 정신이 멍해졌다.

“좀비는 미국 같은 데서나 나오는 거 아니냐? 샷 건으로 대갈빡 날리고 화염 방사기로 싹 구워 버리고. 우리나라는 시발, 총 쏠 줄 아는 놈들이 수두룩하면 뭐 하냐. 정작 총이 없는데. 야, 너는 군 복무 어디서 했냐?”

“저 수방사였습니다.”

“뭐? 이 새끼, 빠졌네. 군 생활 꿀 빨았네. 이 형은 강원도에서 복무했어, 인마. 이기자 부대 아냐?”

대화 주제 선택이 참으로 지리멸렬했다. 이제 와서 군 생활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대로 놔두면 군대에서 축구했던 얘기까지 죄다 끄집어내서 지껄여 댈 것 같았다.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밖에 있는 것들요. 진짜 좀비일까요?”

“모르지.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 새끼야.”

“…….”

“좀비 바이러스 퍼뜨린 새끼도 웃긴단 말이야. 나라 망하게 하고 싶었으면, 서울 한복판에 쾅! 크게 터뜨려 줘야지. 신촌이나 강남이나 그런 데 있잖아. 이런 산골짜기에 퍼뜨려서 뭐 어쩌려고. 멧돼지랑 고라니만 실컷 감염되겠네.”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멀거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허여멀건 형광등 빛에 눈이 부셨다. 그나마 전기와 수도는 아직 작동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정호현, 그거 아냐? 좀비 영화에도 법칙 있는 거.”

“무슨 법칙이요?”

“그런 영화 보면, 꼭 꼴값 떠는 커플이 제일 먼저 죽는다더라. 이유진 훅 갔으니까 이제 박건우 저 새끼만 남았네.”

그가 담배를 빨다 말고 낄낄거렸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농담으로라도 해선 안 될 말이었다. 부디 탈의실에 있는 박건우에게 이 대화가 들리지 않길 바랐다.

“그 뒤에는 민폐 캐릭터가 죽는다던데. 쓸데없이 징징거리기만 하는 애. 그럼 다음은 최다빈 차례인가?”

“형, 생각해 보니까 그 법칙 저도 들어 본 것 같네요.”

불쑥 입을 열었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

“그런데 제가 아는 건 좀 다르거든요.”

절반 정도 남은 담배꽁초를 툭 떨어뜨려 발로 비벼 껐다. 그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대가리에 든 것도 없으면서 지랄하는 꼰대 새끼가 제일 먼저 뒈지던데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농담이었어요.”

“씨발. 정호현, 돌았냐?”

멱살이 잡혀 우악스레 밀어붙여졌다. 쿵! 벽에 처박힌 뒤통수가 욱신욱신 울렸다. 한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가 뒈지려고!”

“윽.”

시야가 얼룩덜룩하게 물들었다. 아프긴 더럽게 아팠다. 좀비에게 죽기 전에 내 머리가 깨져 죽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한껏 인상을 쓰고 앞을 더듬어 그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퍽! 내 멱살을 움켜쥔 손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시큰시큰한 통증을 무릅쓰고 힘겹게 눈을 떴다. 윤준석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무방비하게 고꾸라진 그의 위로 연달아 폭력이 가해졌다.

“야, 호현이가 농담이었다잖아.”

선배였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지 새까만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맨발에 바지만 꿰어 입고 위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차림이었다. 옷 위로 보았을 때도 짐작했지만 그는 몸이 좋았다. 팔다리가 훤칠하게 뻗었고 골격이 굵직굵직해서 언뜻 모델 같았지만 모델치고는 몸이 탄탄했다. 상반신 전체에 잔근육이 보기 좋게 붙어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의 상체는 온통 흉터투성이였다. 가늘게 난 생채기부터 수술을 받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큰 흉까지,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평범하게 자라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이라면 결코 저럴 수는 없었다.

“큭, 컥…….”

명치를 정통으로 걷어챈 윤준석이 몸을 한껏 웅크리고 뒹굴었다. 얼마나 세게 찼는지 코피가 흐르고 입가에 거품이 일었다.

“근데 왜 다큐로 받고 지랄이야.”

스산하게 중얼거리던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의 목에 가로로 커다란 상흔이 있었다. 목이 절반쯤 잘렸다 붙은 것 같은 끔찍한 흉터였다. 심지어 봉합했던 흔적조차 없어서, 살갗이 쩍 벌어진 모양이 고스란히 남은 채 새살이 돋았다.

나는 의대생도 아니고 의학에는 전혀 조예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것 하나는 알았다. 보통 사람은 저런 상처를 입으면 살 수 없다.

“응? 왜 지랄이냐고.”

선배가 다시 한번 물었다. 상대는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윤준석의 옆머리를 발로 툭툭 차며 대답을 강요했다.

“오빠들! 무슨 일이에요?”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후배들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본 박건우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으로 물러섰다.

“헉, 흐억…….”

모두의 시선을 받은 윤준석의 얼굴이 수치심과 통증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선배가 검지 끝으로 자기 입매를 툭 두드리더니, 위로 끌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웃어. 분위기 좆창 내지 말고.”

* * *

한바탕 몸싸움이 있고 나서 분위기는 완전히 최악으로 치달았다. 바닥에 쓰러져 앓다 간신히 회복한 윤준석은 씩씩대며 혼자 저 구석으로 사라졌다. 그가 간 방향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화를 못 이겨 집기라도 때려 부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샤워실에 들어갔다. 다른 이들이 절망에 젖어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각 자리마다 설치된 반투명 유리 칸막이 아래 바짝 마른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타일 벽에 등을 기대고 무용지물이 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인터넷과 전화는 여전히 연결되지 않는 상태였다.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온 메시지도 연결 끊김 표시가 뜬 그대로였다. 그래도 전기가 들어오니 충전만 제때 해 주면 시계나 플래시 라이트로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면을 무료하게 휙휙 넘기다 대학교 커뮤니티 앱을 눌러 보았다. 인터넷이 되지 않아 최신 글은 볼 수 없었지만 2, 3일쯤 전에 올라온 글이 저장되어 있었다. 저 때쯤이 그나마 데이터 통신이 가능하던 마지막 순간인 듯했다.

[익명]

제목 : 좀비 감염 안 되는 법

본문 : 10초 안에 좋아요를 누른다.

10분 안에 효도라고 적는다.

10년 동안 부모님 감염되지 않고 건강하시다.

[댓글]

익명 : 효도

익명 : 효도

익명 : 효도

익명 : 효도

익명 : 효도

익명 : 효도

……

[익명]

제목 : 나 대학원생인데

본문 : 우리 랩실은 아무 일 없는데?

달라진 거 하나도 없고 사람들도 다 평소랑 똑같아.

너네 지금 짜고 치는 거지?

[댓글]

익명 : 당연히 똑같겠지. 거기 인간들은 평소에도 좀비잖아

└익명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

제목 : 나 20대 청년인데 동년배들 다 감염됐다.

본문 : 말세로구나. 이게 다 현 대통령 때문이다.

“이거 순 미친놈들 아냐.”

지금 이 상황은 소설도 영화도 아니었다. 실제로 사람이 죽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기말고사 공부를 하고 곧 다가올 방학을 꿈꾸던 평범한 대학생들이 무수히 목숨을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까지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자빠졌다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괜히 봤다.

무심코 새로 고침을 했다. 골 때리는 글이 떠 있던 자리에는 ‘네트워크 연결 상태를 확인해 주십시오.’라는 경고 문구만이 남았다. 짜증스럽게 화면을 끄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모두가 평정을 잃은 와중에 선배만이 멀쩡했다. 그는 샤워실 선반에 비치된 공용 수건으로 대강 물기를 닦고 내 옆에 걸터앉았다. 뺨에 발갛게 혈색이 돌았다. 얼굴의 반을 가리던 마스크를 벗고 덜 마른 머리를 대충 흐트러트린 모습이 묘하게 앳되어 보였다.

“있잖아, 후배님.”

“네?”

심지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산뜻하게 말을 건다. 저 사람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건지 일부러 안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난방 잘되는 실내라 해도 한겨울인데, 그는 겉옷 안에 받쳐 입는 검은색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탄탄한 팔뚝에 낙서처럼 이리저리 새겨진 흉터를 보지 않으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

“놀랐어? 아까.”

“아까요? 네. 아니, 뭐. 안 놀랐다고 하면 거짓말인데요.”

“내가 좀, 분노 조절이 어려워.”

그는 가만히 내리깔고 있던 삼백안을 확 치켜떴다. 새까만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희번덕거렸다.

“저 새끼가 너한테 해코지하려고 해서 순간적으로 욱했어. 기분이 더러우니까 어쩔 수 없잖아. 너도 이해하지? 응?”

이해하긴 뭘 이해해. 절대 이해 못 하겠다. 정상인이 비정상인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네, 선배님. 당연히 이해하죠.”

나는 가능한 한 가장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진짜?”

“그럼요.”

“아냐. 후배님은 내 마음 좆도 몰라. 알면 그런 식으로 쉽게 말 못 해.”

그가 고개를 팩 돌렸다. 가식적으로 만들어 낸 내 미소에 금이 갔다.

“잘못했어요.”

영문을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를 했다. 선배가 벽에 기대어 세워 놨던 피 묻은 소방 도끼가 자꾸 눈에 들어와서는 결코 아니었다.

“뭘 잘못했는진 알아? 사과만 하면 다야?”

“…….”

“됐어. 후배님은 항상 그런 식이지.”

나는 더 이상 억지로라도 웃을 수 없었다. 애인 마음고생시키는 몹쓸 놈이 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리실까요.”

윤준석도 그렇고 기영원도 그렇고, 선배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 선배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후배들은 넋이 나가 있으니, 사이에 낀 나만 죽을 맛이었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호현아.”

“네.”

“현아.”

“……네.”

두 번째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선배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까닭이었다. 우리 사이에 하기에는 지나치게 친근한 스킨십이었다. 몸이 바짝 굳었다.

“나 진짜 힘들었어. 진짜로……. 그러니까 네가 위로 좀 해 줘.”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내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가 말할 때마다 어깨를 타고 은은한 진동이 퍼졌다. 잔뜩 날이 서 있던 평소에 비해 말투가 느슨했다.

“어떻게 위로해 드리면 되나요?”

선배가 나지막하게 킥킥 웃었다.

“음……. 몸으로?”

“몸으로요?”

무심결에 흠칫했다.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착각일 게 분명할 테지만, 아무래도 뉘앙스가 좀 이상하게 들렸다. 선배의 웃음소리가 좀 더 커졌다.

“뭘 그렇게 쫄고 그래, 예쁜아. 존나 귀엽게.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뭐? 뭐라고? 예쁜아?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방금 내가 들은 호칭을 깔끔하게 잊기로 했다. 차라리 윤준석처럼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뭐 생각했어?”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거짓말.”

“진짜입니다.”

“말해 봐. 무슨 생각 했냐니까.”

“말 안 해요.”

“왜에.”

그는 칭얼거리듯 말끝을 늘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활짝 웃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이거?”

선배는 한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하듯 동그라미를 만들고 다른 손의 검지와 중지로 구멍을 퍽퍽 쑤시며 상큼하게 물었다. 따로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노골적인 사인이었다.

표정이 절로 확 일그러졌다. 그 와중에 손가락을 두 개나 쓴 건 대체 뭘까. 사이즈에 대한 자신감? 이걸 알아보는 내가 싫었다. 당장 벽에 붙은 샤워기를 켜서 흐르는 물에 눈과 귀를 씻고 싶었다.

“미쳤어요?”

“아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가 결국 못 참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딱딱한 대리석 벽에 뒷머리를 툭 기대고 소리 내어 웃다가, 그는 부드럽게 풀어진 낯으로 내게 팔을 벌렸다. 샤워실 밖에서부터 스며들어 온 희끄무레한 빛이 그의 얼굴에 드리웠다.

“호현아. 한 번만. 한 번만 안아 보자.”

이상했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이상했다. 대체 날 언제부터 알았다고 이러는 건지.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느릿느릿 소름이 끼쳤다. 위화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엉뚱한 자막을 씌운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지도를 거꾸로 들고 길을 찾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당신을 전혀 모르는데, 대체 내게서 누굴 겹쳐 보는 거냐고 따지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순간 억지로 얼기설기 이어 붙여 놓은 무언가가 와장창 깨질 것 같았다.

그래,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피가 튀는 판국에 그깟 포옹 한 번이 대수겠는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쯤이야. 망설이던 나는 어설프게 마주 팔을 벌렸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등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너른 품이 밀물처럼 내게 닿았다. 다 큰 사내자식 둘이서 공용 샤워실 바닥에 주저앉아 부둥켜안고 있다니, 다른 사람이 보면 몹시도 우스꽝스러울 터였다.

“너 심장 빨리 뛴다.”

내게 뺨을 기댄 채 포옹에 집중하다 말고 그가 작게 웃었다. 그의 음성이 닿은 부분부터 찌르르하게 전율이 퍼졌다. 간질간질했다. 나도 모르게 몸을 살짝 움츠렸다. 서로의 숨소리, 심장 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에게서 어울리지 않게도 달콤한 보디 워시 향이 났다.

“그 새끼들은 이미 한 번 죽었던 것들이라 심장이 안 뛰어. 근데 넌 뛰잖아. 살아 있으니까. 그래서 안심이 돼.”

“…….”

“메리 크리스마스, 정호현.”

말을 마친 그가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체향을 느껴 보려는 듯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코끝을 살짝살짝 비볐다. 크고 단단한 손이 내 등을 받쳤다.

모든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이상했다. 의문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긴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품에 안겨서도 마음이 놓이기는커녕 더욱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를 뿌리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안겨 있었다.

* * *

혼돈 속에서 찾은 짧은 평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날 밤, 오래도록 뒤척이다 간신히 잠든 우리의 귓가에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후벼 파는 것 같은 소음에 하나둘 선잠에서 깨어났다.

까작, 까작, 까드득. 바깥에서 누군가 철문을 긁어 대고 있었다. 손톱과 손가락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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