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외전 (19) - 회포
“수상 축하해, 얘들아!”
며칠 뒤 멘토링 시간, 은장을 비롯한 멘토들은 예진과 지효의 수상을 축하해 주었다.
예진의 팀은 장려상, 지효의 팀은 최우수상이었다. 그것도 서울시 전체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회에서 말이다.
“둘 다 정말 잘했어!”
정석의 솔직한 칭찬에 예진과 지효가 쑥쓰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감사합니다!”
토론이 끝난 바로 당일, 예진과 지효는 지금까지 있었던 서로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를 풀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두 사람은 한 차례 시련을 겪은 뒤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이제는 싸울 일도 없었고, 오히려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나저나 너희 무슨 일 있었어?”
당연히 둘의 친밀한 모습을 바라보는 졸업생들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것이다.
“아, 하하하. 그런 게 있어요.”
“어… 그냥 토론하다 보니 더 친해진?”
예진과 지효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민주가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토론했어? 어떤 이야기들 있었는데?”
“주제는 뭐로 했어? 예진이가 찬성? 아니면 지효가?”
“우리가 알려 준 복식호흡은 했어?”
그렇게 예진과 지효가 졸업생들의 질문 세례를 받고 있을 때였다.
“조용히들 안 해?”
강의실 내의 시끌벅적함은 강명문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명문이 두 눈을 부라리며 학생들을 바라봤다.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꼬리를 내리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겨우 대회 하나 끝난 거다. 그것도 수상 내역은 기재도 되지 않는 대회.”
“네!? 진짜요!?”
예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지효도 그 사실을 전혀 몰랐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말했잖아. 이거 봉사 차원에서만 들어가게 된다고.”
“하, 하지만, 그… 특기사항에 수상했다고 적으면….”
“그게 허용이 안 된다고, 이 녀석들아.”
지효의 반박에 강명문이 한숨을 쉬었다.
“대신 이거 받아라.”
강명문은 며칠 전, 토론이 끝나자마자 노트북으로 작성했던 글들을 예진과 지효에게 나눠 주었다.
“와….”
“쌤 이거….”
“너희들 토론 준비하느라고 친구들하고 이것저것 논의 많이 했었잖아? 그 내용들을 동아리나 진로활동, 그것도 아니면 개세특(개인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으로 기재해달라고 학교쌤께 말씀드려.”
예진과 지효의 손에는 강명문이 작성해 둔 예시 글이 인쇄된 종이가 들려 있었다.
“참고로 그거 샘플이다. 그거 그대로 제출하라는 게 아니야.”
“네? 그럼요?”
예진의 물음에 강명문이 악마처럼 입꼬리를 올리고는 스스스,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그 내용을 참고해서 본인의 생기부에 들어갈 내용을 직접 작성해 본다.”
강명문의 웃음을 발견한 졸업생들이 어깨를 붙잡고 몸을 으스스 떨었다.
“큰일났다.”
“쌤 여기서도….”
정석과 동석이 멘티들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학종으로 준비하는 녀석들은 오늘 본인들 생기부 정리하기 전까지는 집에 못 갈 줄 알아!”
그날, 예진과 지효는 1, 2학년 학생부 분석부터 시작해서 자신들에게 부족한 영역들을 채우기 위한 활동 주제까지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분명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자리에 여섯 시간을 넘게 앉아만 있어야 했고, 계속해서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느라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예진은 힘든 기색 한 번 없이 모든 과정을 따라갔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벌써 시간은 6월. 앞으로 기말고사를 치르고, 며칠만 지나면 곧바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하는 시즌이 왔다.
그걸 체감하고 있었기에 예진은 지금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꼭, 합격할 거야!’
계속해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예진이었다. 그리고 지효는 옆에서 예진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봤다.
‘나도…!’
두 친구가 투지를 불태우면서 멘토링은 입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개명이요?”
태성은 박은환이 제안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개명이 아니라 그런 추가 서비스에도 혜택이 들어가면 어떨까 해서.”
“아하.”
그제야 태성은 박은환의 이야기가 이해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은환은 개명을 하기 위해 이전에 찾아갔던 사주카페에 다시 연락을 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개명까지 의뢰를 하니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개명 신청을 하지는 않고, 태성에게 VIP 회원을 위한 서비스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데 쌤, 개명 조건 되세요?”
태성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을 물었다.
개명을 하기 위해서는 사유를 명확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했다.
“나 정도면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잖아!”
“아니, 그건 그냥 쌤 연애에만 적용….”
중얼거리는 태성을 향해 박은환이 찌릿, 눈을 흘겼다. 태성은 입을 틀어막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쌤 정도 유명인이면 일상생활 하시기 힘들기는 하겠어요, 하하하하.”
“…시끄러워.”
박은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정말 개명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개명을 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는 사실상 가능성을 접어 둔 것이었다.
박은환의 아버지인 박성혁의 판단은 이랬다.
-그건 개명 사유로 좀….
눈치 없는 동생도 한 마디를 했다.
-누나, 그거 바꾸려면 이름이 욕처럼 들려야 해. 예를 들면 박섹희 같은….
그래서 박은환은 개명에 대한 의지를 사실상 접은 상태였다.
“근데 진짜 이러다 평생 솔로로 살면….”
그건 개명 이야기를 꺼낸 사주카페 잘못이기도 하려나?
사실 박은환이 연애를 못 하는 데는 워커홀릭이라는 이유가 가장 강했지만, 자기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게 또 사람 마음이었다.
그래서 박은환은 괜히 자기 이름을 걸고넘어진 사주카페 상담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려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짜증나….”
“쌤?”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면서 중얼거리는 박은환을 보며 태성이 몸을 움찔했다.
* * *
토론대회가 끝나고도 시간이 제법 지났다.
이제 학생들은 기말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강문고등학교 학생들 국어 수업 지도와 함께 입시 준비까지 해주면서 서울시 교육복지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를 않을 것 같았다.
“아, 피곤하다!”
기지개를 쭉 켜면서 소리를 지르는 나를 보며 박 선생이 키득 웃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 하니까 피곤하죠.”
“넌 진짜 좀 쉬어야 해. 어떻게 된 게 다른 건 하나도 안 하고 교육, 교육, 교육, 입시, 입시, 입시 이러고 있냐.”
지석 선배도 참 대단하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박 선생님이랑 선배도 다 저랑 같이 준비하시면서 뭘 그러세요.”
“우리는 강문고에 더 집중하지, 너처럼 지자체 프로그램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잖아.”
선배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서 그냥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강문고 사건이 정리된 이후에는 점차 지자체 교육 복지에도 신경을 써 왔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그 규모도 커졌고 말이다.
“하다 보면 재밌으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거도 일인데 참 대단하다 너….”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배는 나에게 칭찬을 던졌다.
“하긴, 너한테 지도 받아서 그런가 토론장에서도 애들 자기주장이 아주 강하더라.”
“아, 예진이요? 그쵸? 제가 은장이랑 민주를 토론 연습 멘토로 붙였거든요. 그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 입시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칭찬 아니다, 이놈아.”
“아니, 난 칭찬으로 들었는데?”
지석 선배의 말을 들은 오 교감이 다가오면서 껄껄 웃었다.
“강 선생 말대로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어야 면접을 보지. 요즘은 파이팅 넘치는 학생들 보기가 어려운데, 토론대회에서는 제법 많이 보여서 보기 좋았어.”
“진짜요…?”
옆에서 듣고 있던 박 선생이 그게 말이 되냐며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교감선생님은 제 뜻을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크하하하! 강 선생 마음이야 내가 잘 알지!”
한바탕 크게 웃은 후 나는 박 선생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일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박 선생님, 개명하려 하신다면서요?”
“뭐!?”
“개명!?”
지석 선배와 오 교감이 깜짝 놀라며 박 선생을 돌아봤다. 박 선생의 얼굴이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태성 이 자식을 그냥….”
“태성이가 자기 어플 사업 구상을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잠깐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진짜 개명하실 겁니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박 선생은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는 없어 보였다. 물론, 그녀가 겪고 있는 아픔은 알고 있었다.
유명세를 띠고 있어서 귀찮은 사람들이 엮였고, 연애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등이었다.
“하… 네, 솔직히 생각은 해 보….”
“무슨 소리야, 박 선생!!!!”
그때 오 교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네!?”
“자네가 무슨 개명이야 개명은! 지금 강문고등학교 박은환! 영어계의 걸크러시! 그런 사람이 왜 개명을 하나!”
오 교감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박 선생에게 수업 듣고 싶다면서 강문고에 입학하려는 녀석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 아니, 그러니까 저는 개명을….”
“나도 교감선생님 말씀에 동의해. 박 선생, 굳이 개명할 필요가 있어? 연애가 힘들 수는 있겠지만, 짝은 어디든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 와이프도 박 선생 엄청 좋아하는데? 박은환 팬클럽에도 가입되어 있다고.”
“그런 팬클럽이 있어요!?”
박 선생이 금시초문이라며 펄쩍 뛰었다.
근데 이건 나도 처음 듣는데.
“아, 와이프 친구들 사이에서 만든 작은 소모임이야. 규모가 크거나 하지는 않고.”
“다행이…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저는 개명 생각 없어요!”
“그래그래, 개명은 생각도 하지… 응?”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지석 선배는 물론이고 방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던 오 교감도 두 눈을 꿈뻑꿈뻑거렸다.
“생각이 없어?”
“그렇다니까요. 정확히는 개명을 할 수도 없을 거 같아서 그냥 포기하려고요. 귀찮은 절차도 많아 보이고.”
그제야 두 사람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럼 내가 박 선생 소개팅 자리 좀 만들어 볼게! 연애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오 교감이 한층 신나서는 말했다. 박 선생은 기대도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예의상 감사하다고 말했다.
“음… 그런데 제가 봤을 때 박 선생님은 소개팅 같은 건 별로 효과가 없을 것 같네요.”
내 말을 들은 세 사람이 일제히 나를 돌아봤다.
“무슨 말이야?”
“소위 말하는 자만추를 해야죠.”
지금 박 선생은 자신의 유명세 때문에, 혹은 직업 때문에 만나려는 사람보다는 정말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이름 때문에 제대로 된 연애로 이어지지 않을 게 뻔하니까.
“자만추를 하려면 강문고 선생님들 중에서?”
이제는 자만추의 뜻을 알고 있는 지석 선배가 손가락으로 교무실 바닥을 가리켰다.
“강문고도 있지만, 발을 여러 방면으로 넓히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박 선생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뭘 꾸미는 거죠?”
“쳇, 눈치가 빨라졌어.”
“아! 방금 쳇, 이라 했죠!!”
“나도 들었어. 교감 선생님도 들으셨죠?”
“아주 명확하고, 선명하게,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정확한 소리였지.”
세 사람이 나를 노려보고 있든 말든, 나는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같이 하시죠, 박 선생님.”
<서울시 교육복지 프로젝트, 입취 캠프>
“입취 캠프…?”
지석 선배가 어리둥절했다. 나는 친절하게 이에 대해 설명했다.
“일주일 중 토요일 하루, 강문고 선생님들이 12시간 동안 학생들을 지도해 주는 캠프입니다. 입시와 취업 모두요.”
“뭐라고요!?”
박 선생의 매서운 눈길을 받으면서도 나는 설명을 이어 갔다.
“그래도 졸업생 녀석들보다는 낫습니다. 녀석들은 3교대로 주말 이틀 모두 나오니까요.”
“… 불쌍한 졸업생들. 언젠간 정의의 응징을 당할 거예요, 강 선생님”
불쌍하기는. 이번 프로젝트가 모두 봉사시간도 들어가고, 우수 멘토링 팀에는 제주도 여행권도 지급되는데.
그 기간 동안 갖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아무튼.
“그런데 이 캠프, 저희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강문고 이외의 학교 선생님들도 오실 겁니다.”
나는 참가 선생님 명단을 보여주었다.
<강양외고 최지은 / 원일고 한지현>
서울시 프로젝트이지만, 강원도 선생님들의 참여가 이루어졌다.
“오래간만에 회포나 푸시는 게 어떠세요?”
반가운 이름에 박 선생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맺혀 갔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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