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242화 (241/252)

242화. 외전 (18) - 미안.

강은숙 이사장은 여느 때처럼 녹차를 타서 작은 찻잔에 담았다. 찻잔을 앞에 앉은 남성에게 살짝 밀어 주면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남성은 살짝 웃어 보였다.

“역시 향이 좋군요.”

남성이 이제는 이사장실에서 녹차 한 잔 마시는 건 익숙하다 못해 휴게실처럼 느껴진다면서 말했다.

“이번에 새로 구했는데 괜찮은 모양이네요, 호호호.”

“매번 새로운 차를 주시니 저도 반 전문가 되겠습니다.”

살짝 웃으면서 답을 한 남성은 이사장을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예의 그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 때문에 교감 선생님을 불렀어요.”

이사장은 오석상 교감에게 ‘그 건’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강진 재단이 준비한 강진 장학재단. 학교가 정상화되어 가고 있으니 슬슬 첫 기수 모집을 할까 해요.”

“강 선생이랑 학생들도 모두 동의한 결과인가요?”

뭐,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학생들 동의까지 받아내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린 오석상이 다시금 찻잔에 입술을 가져갔다.

“학생들 중 일부는 물론 동의했어요. 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아요.”

“일부라 하심은…?”

이사장은 자신의 찻잔에도 천천히 녹차를 따랐다. 따뜻한 녹차향을 담은 수증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왔다.

“졸업생들은 동의했어요. 하지만 그 아이들, 아니 이제는 아이들이 아니죠. 졸업생들은 장학재단의 첫 기수가 될 수는 없어요.”

“그렇죠. 이제는 다들 대학생이기도 하고, 우리 학교 학생들 지원을 위해 만든 장학재단은 아니니…. 그럼 다른 후보군이 있으십니까?”

그의 질문에 이사장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학생을 설득할 타이밍 잡기가 쉽지 않네요.”

“장학생이 되는 걸 거부하고 있습니까?”

오석상의 질문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장학재단의 장학생이 되면 등록금 지원도 해 주고, 취업 스펙 쌓기도 도와줄 수 있다. 그런 혜택을 싫어할 학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사실 그것보다는….”

이사장은 자신이 점찍어 둔 학생에 대해 오석상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사장의 설명을 모두 들은 오석상이 미간을 좁혔다.

“큰일이군요. 그런 학생이라면… 쉽지는 않을 겁니다.”

과거 자신도 그와 비슷한 학생을 상담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학생도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 오석상이 최대한 좋은 이야기를 해 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학생은 대입도 실패하고, 이후 취업도 좋지 않았다는 소식만을 듣게 되었었다.

“그럼 강 선생은 그 타이밍을 보고 있겠군요.”

“맞아요. 그 학생만 와 준다면 빠르게 진척할 수 있는데 말이죠.”

“굳이 지금까지 지연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죠. 강 선생의 전략이 있을 테니까요.”

오석상의 말에 이사장도 동의한다며 씨익 웃었다.

“그 전략이 조만간 나올 거라고 하더군요.”

“어떤 전략인지 귀띔이라도 해 주었습니까? 적어도 저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던데.”

그는 며칠 전에도 강명문과 커피를 마셨었다. 그러나 그때 나온 이야기라고는 주말에 뭐 했는지, 최근 본 영화 중 무엇이 재밌었는지 같은 내용들 뿐이었다.

그래서 오석상은 아쉬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저한테도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어요. 다만….”

이사장은 강명문의 얼굴이라도 떠올리는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자신감과 뻔뻔함 중 자신감은 생겼다고 하더군요.”

“자신감과… 뻔뻔함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되묻자 이사장도 고개를 저었다.

“허어… 자신감은 알겠는데 뻔뻔함이라….”

혹시 그건가. 오석상은 강명문의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복지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강명문과 졸업생들. 그 안에서 자신감을 키우고 있고, 뻔뻔함까지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거라면….

그러자 하나의 결론이 예측되었다.

“크하하하하! 설마 그런 생각을… 으하하하!”

“교감 선생님?”

“크하하… 헛, 커흠! 죄송합니다.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라 생각이 되어서….”

옷매무새를 정돈한 오석상이 헛기침을 한 번 더 하고는 말했다.

“강 선생이 뻔뻔함이라고 말했다면… 그건 아마 세간의 시선에서 봤을 때의 뻔뻔함일 겁니다.”

“세간의 시선이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학생 자신에게는, 뻔뻔함이라기보다는 떳떳함이나 당당함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럼에도 굳이 뻔뻔함이라고 강명문 선생이 말한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오석상은 강명문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자신감과 뻔뻔함이라… 크큭.”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는 오석상을 보면서 이사장도 미소를 지었다.

* * *

예진은 독기를 품은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상대는 같은 반 친구인 한지효.

지효는 예진의 눈빛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고는 어깨를 폈다.

“그럼 나도 너처럼 고른기회 전형으로 준비해 보라는 거야?”

“아니, 겨우 그거 하나 말하는 거겠어?”

피식, 웃으면서 지효를 비웃어 준 예진이 방청객들과 지효를 번갈아 바라봤다.

“잘 들어, 네가 다 해낼 수 있는지 말이야.”

“뭐 얼마나 대단한 걸 말하려….”

지효는 예진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맞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예진을 향해 코웃음을 날리면서 어떻게 예진에게 망신을 줄지 고민했다.

“문제집 하나 구하기 힘들어서 서점에서 문제를 외우면서 공부할 수 있어?”

“…뭐?”

그러나 지효의 결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무너졌다.

“학원 안 다니고, 인강 지원해 줘도 인강을 틀 수 있는 컴퓨터가 없어서, 청소년 센터 선생님한테 노트북 빌려다가 볼 수 있어?”

사회적 약자 특별 전형들로 지원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한순간이라도 부러워하는 학생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교통비 아껴서 삼각김밥 사 먹을 수 있어? 김밥 한 줄 사다가 점심, 저녁 나눠서 그것만 먹고 버틸 수 있어? 혼자 책상도 없는 집에서 밥상 펴 놓고 공부할 수 있어?”

예진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무수히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예진아 너도 이거 사 봐! 가격도 얼마 안 해! 용돈 모으면 2만 원 정도는….

-내가 좋은 가게 알려 줄게! 1인분에 만 원밖에 안 하는데….

-넌 학원 안 다녀? 학원 좋은데 알려 줄까?

예진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픔을 삼켜야만 했다.

나는 못 사잖아. 나는 그걸 수강 못 하잖아.

우리 집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겪어 봤으니까.

-아… 미안 예진아, 우리 엄마가….

-너네집 거지라며?

-용돈은 받고 사냐?

그래서 예진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그런 모든 이야기들을 숨기고 살아왔다.

그 때문에 더더욱 예진은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만 갔다. 그게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삶을 숨기는 것이 훨씬 이득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아픔은 참을 수 있어.

이런 건 당연히 겪어야지.

괜찮아, 조금만 아프면 나아질 거야.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나누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예진은 상대적 박탈감을 견디기 위해 갖은 애를 써 왔다.

“독서실 다닐 형편도 안 되니까 청소년센터 선생님한테 사정사정해서 공부 자리 만들어달라고 할 수 있어?”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친구들이 뭐라도 먹자 그러면 일부러 피해다니고, 친구들 전화라도 받으면 집에서 공부해도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처럼 꾸며낼 수 있어?”

-때로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절박함이 생기지 않을 때도 있는 거다.

기회가 없었다. 지금까지 예진에게는, 더 나은 삶이 가능할 거라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었다.

-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지금은, 아주 조금이지만 더 나은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경기교대에 합격해서 선생님이 되었을 때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런 미래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대학교 진학에 대한 절박함이 생긴 지금, 예진은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너무 불공평하잖아.’

강명문의 말처럼, 지금 이 이야기들은 나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예진에게, 더 이상의 브레이크는 없었다.

“학교 친구들은 너처럼 놀리려는 애들이나 고깝게 보는 애들이 훨씬 많아. 그 시선이 싫어서 몇 년이고 내 형편 숨기면서, 돈 없지 않은 ‘척’ 하면서 살아갈 수 있냐고!!!”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었을까.

예진의 목소리에는 이 과정을 겪고 이겨 내 왔던 당사자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울림이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예진은 울지 않았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기는 했지만, 펑펑 소리를 지르며 울지는 않았다.

-특별 전형은 역차별이 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제는 생각할 수 있었다.

초중고 12년의 교육 과정을 보내면서 겨우 마지막 대학입시에서 약간의 기회를 더 주는 정도로, 불평등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 예진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그건….”

예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지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다가 이내 부끄러워진 듯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부러우면 너도 나처럼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거지꼴로 살고 고른기회 지원하든가!!!!!”

반박에 대한 반박을 이야기한 예진이 마이크를 들고 씩씩댔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토론 현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경청하고 있었다.

‘강 선생, 자네가 말했던 뻔뻔함이 이거였구만.’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오석상이 큭큭, 웃으면서 마이크를 잡았다.

“자, 두 사람 모두 흥분한 것 같은데 잠시 진정을 좀 하도록 하죠. 차예진 학생?”

“네!”

예진은 심사위원 앞에서도 기죽지 않은 모습으로 힘차게 답했다.

“훌륭합니다.”

“…네?”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학생을, 저는 20년이 넘는 교사 생활 동안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좋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 토론대회의 목적 중 하나인 학생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그 목적이 예진의 이야기로 상당 부분 충족이 되었다.

심지석도 그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진에게 물었다.

“예진 학생은 언제부터 이렇게 우리나라 교육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나요?”

“중학생이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정확하게는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 가정형편을 이유로 왕따를 당하면서였고요.”

떨림 하나 없는 목소리를 한 예진이 심지석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역시, 뻔뻔함이 아니라 떳떳함, 당당함이라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명문이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오석상과 심지석은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작게 소곤댔다. 심지석이 마이크를 잡고는 말했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토론에서는 조금 아쉬운 모습을 보였어요. 이건 알고 있죠?”

“네,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당찬 목소리를 한 예진을 보면서 심사위원들이 어리둥절해했다.

“아쉽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으니까요.”

예진은 강명문이 앉아 있던 자리를 슬쩍 바라봤다. 강명문이 히죽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저는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인사를 받은 심사위원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예진은 곧장 친구들에게 사과를 했다.

“얘들아 미안….”

“미안, 예진아.”

그러나, 되려 친구들이 먼저 사과를 했다.

“응?”

“우리가 너무 무신경하게 말했던 게 많았던 것 같아. 미안하다 진짜.”

동아리 부원인 남학생을 시작으로, 친구들이 다들 미안해하며 예진에게 사과를 했다. 팀원들 사이에서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자 예진이 당황해하며 손을 저었다.

“아, 아냐! 너희한테 사과받으려고 한 게 아니라….”

예진은 친구들의 낯선 모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얼마 전 동석에게 자신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제야 예진은 그게 왜 동석에게 울림을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보같아.’

사과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예진은 눈물을 살짝 훔치고는 밝게 히죽 웃었다.

“고마워! 그리고 나도 미안해!”

예진의 마음 마지막 한켠에 남아 있던 망설임. 대입 준비에 걸림돌이 되어 왔던 그 마지막 감정이, 지금 초여름 이슬처럼 사라졌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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