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외전 (15) - 하필.
“너희 어디 쓸 거야?”
급식을 먹은 점심 시간, 예진은 친구들과 함께 교내 벤치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대화 주제는 고3 답게 대학 진학에 대한 이야기였다.
“난 정했어.”
“뭘로?”
“대충 내신 맞춰서 갈 거야.”
“아하하하! 야 그거 안 하는 사람이 어딨냐?”
깔깔 웃으면서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진은 친구들의 말에 반응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점심시간을 즐겼다.
“예진이는?”
그러나 지효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어… 난 교대나 사범대 한번 써 보려고.”
“떨어질 거 알고 써 보는 찔러보기인가?”
옆에서 듣고 있던 남학생이 야실거리며 물었다. 예진은 남학생에게 눈을 흘기면서 크흠, 헛기침을 했다.
“종합전형 위주로 쓸 거야. 교과 성적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종합전형으로? 예진이 스펙 괜찮나?”
남학생이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정말 모르겠다면서 친구들에게 물었다.
“별로 없지 않았어?”
지효도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뭐, 수행평가 때 교육이나 선생님에 대해서 발표한 건 있었던 것 같고.”
“성적도 에이, 지방 사범대 추합이나 되면 다행이겠다.”
친구들이 너나 할 거 없이 예진의 성적과 활동을 두고 평가를 했다. 예진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분이 조금 상하려 했지만, 꾹꾹 참았다.
“그래도 이번에 성적 올리고, 3학년 활동도 채우고 하면 좀 낫지 않을까?”
예진의 반박에 친구들이 깔깔 웃었다.
“맞아. 잘 하면 될 수도 있겠지.”
“너무 기대하지 말자, 친구. 우리에게 남은 건 수능뿐이다.”
지효와 남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레 답했다. 그러다 지효가 잠깐 고개를 들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그런데 진짜 운 좋으면 4점대 애들도 교대였나 사범대였나 갔던 거 같은데?”
“뭐? 4점대?”
“응. 있었던 거 같은데….”
지효의 말에 다른 학생들이 핸드폰을 꺼내서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다.
“에이, 뭐야. 고른기회나 기회균형만 그런 거겠지.”
“근데 진짜 여기로 지원하면 4점대가 합격하기도 하는구나. 좋겠다 얘들은.”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서 예진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졌다. 지효는 예진의 얼굴이 어떤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저들끼리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솔직히 좀 부럽다 그치.”
“부러운 것도 부러운 건데, 얘네들 선발하느라 일반전형 비율 줄어들었잖아. 이거도 좀 그렇지 않아?”
듣고 있던 지효와 다른 친구들 몇몇이 불만 아닌 불만을 쏟아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예진의 표정은 점차 더 어두워져가기만 했다.
“예진아, 왜 그래?”
“어? 아, 아니, 아니야. 급식이 좀 체했나 봐.”
“진짜? 얼른 들어가자. 양호실 갈래?”
“어… 일단 5교시까지만 버텨 보고….”
자신의 상태를 걱정해 주는 친구들과 함께 예진은 교실로 돌아왔다.
‘착한 친구들인데….’
어디서부터 이렇게 됐을까.
차마 친구들에게 지원 전형을 솔직하게 밝히지 못한 예진은 곧 있을 교육정책 토론 대회를 떠올렸다.
‘제발 지효랑 평범한 주제로 토론할 수 있었으면….’
대입전략을 메모한 노트를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서랍에 넣으면서 예진은 속이 안 좋은 척 연기를 이어나갔다.
* * *
<서울 청소년 교육 정책 토론 대회>
대회 일정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북부 청소년 센터에서 홍보를 하기도 했지만, 멘토링 프로그램 참여 학생들 중 이 대회에 참가하는 학생은 예진이와 지효 둘이었다.
지효는 같이 참가하는 친구들과 함께 이동하기로 해서 이 자리에 없었고, 예진이만 마지막까지 공부를 하다 가느라 아침 일찍 센터에 나온 참이었다.
“친구들하고도 합 많이 맞췄지?”
“동아리 친구들하고도 방과 후에 연습 많이 했어요. 잘하고 올게요.”
예진이는 억지로 밝은 척 웃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토론 대회 준비를 도와준 은장이와 민주도 파이팅이라며 응원을 해 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버스를 타러 가는 예진이를 바라보던 임정훈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짜 괜찮은 건가….”
임정훈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예진이와 동아리 친구들이 대결하게 될 팀에는 지효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정석이가 했던 말이 맞다면, 예진이와 지효는 가치관에 있어서 상극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음….”
그렇기에 나도 팔짱을 끼고 예진이가 사라진 방향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에게 정석이가 물었다.
“쌤,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학교장으로부터 승인은 받았기에 이 대회에 참가한 내용이 봉사활동 인증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따라서 학교생활기록부에는 확실하게 기재될 수 있었다.
입시 서류 준비를 위해서 하는 부분에서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상을 받든, 받지 않든, 대회에서 이기든, 지든, 어쨌든 자기소개서나 면접 소재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진이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겨 낼 수 있도록 해 줘야지.”
예진이기에 이번 대회는 반드시 이겨 낼 수 있어야 했다.
‘토론에서의 승리보다도….’
생각을 마친 나는 정석이에게 말했다.
“대회 현장에 가야겠다.”
“현장에요?”
심사위원이 아닌데 가도 괜찮은지 묻는 정석이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겸사겸사 오 선생님, 아니 교감선생님이랑 지석 선배한테 인사도 좀 하고.”
두 사람은 이번 대회에서 교육 현장의 전문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이것도 모두 강문고등학교 사학비리 사건 이후에 차곡차곡 쌓아 온 명성 덕분이었다.
“매일같이 학교에서 보는 사이에 뭔 인사를….”
핑계도 그럴듯하게 대시지, 라며 중얼거리는 정석이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야!”
“헛소리 하지 말고, 후배들 잘 케어해 줘라. 대회 끝나면 바로 올 거니까.”
정석이는 인상을 쓴 채 이마를 문질렀다. 그 모습을 피식 웃으며 바라 본 후 곧장 택시를 잡았다.
* * *
대회 현장에 도착한 예진은 동아리 친구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바로 대회 현장으로 향했다.
‘넓다…!’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토론대회 방청들도 있었다. 방송으로도 만들어지는지 카메라도 여러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심사위원 자리에는 교육 전문가들, 현장 전문가들,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들 자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진아….”
“우리 잘 할 수 있을까…?”
동아리 친구들이 걱정스레 예진에게 물었다. 예진도 분위기에 압도당할 뻔 했지만, 친구들의 말을 듣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부장이니까 중심을 잡아야 해!’
“그럼! 당연히 할 수 있지! 다들 힘 내자!”
억지로 밝게 웃으며 친구들에게 응원을 보낸 예진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오늘의 대진표가 붙어 있었다.
‘하필 지효랑 붙다니….’
지효가 갖고 있는 가치관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효와 맞붙으면 자신이 어떤 이야기들을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만약 복지 정책을 옹호한다면, 평소에 자신과 어울려 놀았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비판받을 것 같았다. 대회에서 이기기 위해 억지로 맞춘 기회주의적인 녀석이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란 생각이 자꾸만 맴돌았다.
“다들 자리에 앉아 주세요! 곧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로 초빙된 아나운서의 멘트에 맞춰서 참가 학생들이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제일 끝에 앉은 지효가 예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예진도 지효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주고는 사회자에게 집중했다.
“오늘 대회는 사실 대회라고는 하지만, 정책 토의 자리나 다름없다고 보면 됩니다. 학생들에게는 재능기부처럼 되기 때문에 봉사활동 시간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끝나면 인증용 서류를 뒤에서 준비해 줄 테니 꼭 받아가세요!”
주의사항을 들으면서 예진은 오늘 토론, 토의 주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사회자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이 심사위원들도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했다.
“주제는 사전에 오픈했던 것처럼, 총 열 개의 주제 중 하나를 선정하게 됩니다. 제비뽑기를 통해 주제 선정 우선권을 얻은 팀이 주제를 선정하면 됩니다.”
“저기, 혹시 주제가 여러 개인 이유가 있나요?”
참가 학생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러자 사회자는 질문을 심사위원들을 향해 돌렸다.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솔직한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입니다.”
뒤에서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한 남성이 말했다.
“강문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인 오석상 선생님이시군요!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미리 주제를 한 가지만 정해서 알려 주면, 평소 생각하는 대로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준비한 자료, 사전에 말을 맞춘 주장만 나오고, 그로 인해 실제 현장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나 교사들에게 진실된 의견을 얻기가 힘들겠죠.”
오석상은 자리에 모인 참가 학생들을 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그렇기에 미리 준비하기 어렵도록 여러 주제를 이야기해주고, 그 중 하나를 선정해서 대결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오석상의 말이 끝나자 사회자가 박수를 쳤다.
“그렇습니다! 보다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자 대회 당일까지 주제를 정해놓지 않은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들이 조금 어려워할 수도 있겠지만, 다들 괜찮죠?”
사회자가 장난스럽게 묻자 학생들이 키득거리며 괜찮다고 답했다.
“그럼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예진은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해온 자료들을 손에 들었다. 멀리 있는 지효도 팀원들과 함께 각종 자료를 들고 서 있었다.
“제일 첫 번째 토론 팀들, 나와 주세요!”
예진의 팀과 지효의 팀 학생들이 토론으로 마련된 책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첫 번째 토론 주제 선정을 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예진과 지효를 앞으로 불렀다. 바로 주제 선정권 정하기. 주어진 열 개의 주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승자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특기자 전형은 공교육 파괴에 앞장서는 것인가?>
<수능특강으로만 공부하는 3학년 교실, 이게 최선인가?>
<자사특목고와 일반고, 같은 라인에서 대입을 준비해도 되는가?>
<중학교 자유학기제는 진로탐색을 위한 소중한 시간인가, 공부하기 싫어서 노는 시간인가?>
<….>
<….>
그 외의 주제들까지 정면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예진과 지효는 서로 마주본 채 사회자가 준비한 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잘 부탁해 예진아!”
“으, 응. 나도.”
서로 인사를 나눈 두 학생들이 상자에 손을 넣었다.
“아! 주제 선정은 이쪽에서 가져갑니다!”
사회자는 지효를 향해 손을 펼쳐보였다. 지효가 손을 들면서 팀원들과 기뻐했다.
아무래도 자신있는 주제를 선정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하나 선택해주세요!”
“음…. 저희는 이걸로 할게요!”
사회자는 지효가 선택한 토론 주제를 발표했다.
“저걸 학생들이…?”
“어렵지 않을까?”
청중들로부터 우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진은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고는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학 입시 사회적 약자 특별 전형, 반드시 필요한가?>
반면, 주제를 선정한 지효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 토론대회에 참가하는 팀원들과 자주 이야기했던 주제였고, 이번 토론을 위해서 관련된 자료들도 많이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특히, 반대측 입장이라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럼 어느 진영에서 발표할지도 이야기해주세요!”
“저희는 반대측에서 하겠습니다!”
지효를 비롯한 다른 팀원들도 반대가 좋다면서 맞장구를 쳤다.
“네! 반대 의견으로 준비 부탁합니다!”
“아….”
반면, 예진은 찬성측에서 주장을 전개해야 했다. 동아리 친구들도 지효를 알고 있었기에 저들의 반대측 주장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걱정인 모양이었다. 다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서는 끄응, 신음소리를 냈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아는 만큼만 해야지.”
“하필 저걸 뽑냐. 치사하게.”
예진의 팀원들도 고3이고, 입시에 민감한 시기였다.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 평소 대입에서의 특별전형들에 불만을 갖고 있기도 했었다.
게다가 팀원들 중에는 며칠 전, 점심시간을 함께 보냈던 남학생도 있었다.
-솔직히 좀 부럽다 그치.
친구가 했던 말들이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절충안이 가능할까…?’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해볼법한 전략은 절충안 정도였다. 그래야 찬성측 의견도 제시하면서 반대측 의견도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잘 될까?
그런 의문이 토론 시작부터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서울시 청소년 교육 정책 토론 대회, 그 첫 번째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시작 선언을 들으면서 예진은 불안한 듯 다리를 떨었다. 선공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은 지효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효가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긴장한 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토론대회장의 스텝들 자리에 섞여서 앉은 강명문이 예진과 지효의 발표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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