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237화 (236/252)
  • 237화. 외전 (13) - 기왕 하는 거

    “음….”

    책상 앞에 정좌로 앉은 여성이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심하게 좁혔다.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박은환은 조금은 심드렁하게, 하지만 눈곱만큼은 기대를 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알겠군.”

    몇 분이나 시간이 지났을까. 중년 여성이 눈을 부릅떴다.

    “이름이야.”

    “이름이요?”

    박은환의 질문에 무속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에 불용문자가 포함되면서 오행이 어그러져 있어.”

    “불용… 오행…?”

    생소한 단어가 나오자 박은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박은환의 반응은 신경쓰지도 않고 무속인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사주에 맞는 발음오행배열부터 시작해서 수리 오행배열을 고려해….”

    정확히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박은환은 대충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았다.

    “개명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러자 무속인이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지금 처자는 사주상 상극배열이 제법 많아. 사주와 조화를 이루어야만 앞으로 미래가 더 빛이 날 거야. 지금까지 개고생이라는 개고생은 다 하지 않았나?”

    무속인의 말에 박은환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워커홀릭으로 살아왔고, 강문고를 위해 갖은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내 왔었다.

    ‘개고생이라면 개고생이지.’

    휴가 한 번 제대로 다녀온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강명문을 비롯한 학교 선생님들과 입시 준비에 매진했으니 말이다.

    “이름만 바꾸면 연애운도 속속 들어올 거야. 어때, 내가 좀 지어 줄까?”

    무속인은 자신이 이름 짓는 대는 또 일가견이 있다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일전에 봐준 커플도 개명을 했는데, 글쎄 그때는….”

    그렇게 한참을 무속인의 자랑과 상품 판매 홍보를 들은 뒤에야 건물에서 나올 수 있었다.

    “피곤해….”

    한참을 사주, 개명 이야기만 듣고 나와서 그런가 머리 한쪽이 쑤셔왔다. 양쪽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면서 눈을 떴다감았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핸드폰이 우웅- 울렸다.

    “어, 동석아.”

    [쌤, 안녕하세요! 진짜 죄송한데, 여자가 좋아하는 향수 어떤 거 있을까요?]

    “향수?”

    어머니 선물해드리려고 그러나? 생각을 이어가던 박은환은 이어진 동석의 말에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네! 은솔이한테 선물로 줄 거거든요!]

    “….”

    [쌤?]

    “…은솔이한테?”

    박은환이 초점 잃은 눈동자로 길거리를 바라봤다.

    [어… 네. 고백할 건데 그냥 하면 별로일 거 같아서….]

    “대충 아무거나 사. 차라리 은장이한테 물어보든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박은환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거리에… 나 빼고 다….’

    커플이잖아.

    갑자기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여태 일만 하느라 살아왔는데, 그에 대한 보답이 고작 이런 거란 말인가!

    게다가 영원한 모솔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동석이조차 은솔이와 연애를 하려고 하다니!

    너만큼은 그러면 안 됐잖아!

    마치 무적의 솔로부대 선봉장이 배신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악!!!! 짜증나!!!!!”

    박은환은 소리를 지르면서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아오! 그래! 다 사귀어라! 다 사귀어! 나는 워커홀릭으로 살다 죽을 테니…!”

    […저기, 쌤?]

    그때 핸드폰 너머로 동석이 아닌 다른 남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 누구?”

    [쌤, 저 명천이에요.]

    하… 이런 추태를 이제 옛 제자들에게 다 들키게 되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던 박은환에게 명천이 미끼를 던졌다.

    [쌤, 소개팅하실래요?]

    “소개팅…?”

    핸드폰을 강하게 쥐고 있던 박은환의 손이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

    며칠 뒤, 예진이가 나를 찾아왔다.

    “동석 선배를 보면서 결심했습니다.”

    “…저 모습을 보고?”

    나는 한쪽에서 꽁냥 대고 있는 동석이와 은솔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 녀석들은 며칠 전에 동석이의 적극적인 대쉬로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은장이, 정석이, 명천이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박 선생도 명천이에게 소개팅을 제의받아서 지금은 신나게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뭔….”

    연애에 집중한다는 봄날도 아닌데, 무슨 핑크빛 기류가 계속 흘러?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에게 예진이가 말했다.

    “저….”

    예진이는 그날 이후로 고민을 많이 했다면서 결연한 의지를 다진 듯 고개를 들었다.

    “저소득층 전형… 지원하겠습니다.”

    어떤 연유로 동석이 덕분에 결심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예진이가 지원 전형을 확정한 사실이 중요했다.

    “괜찮은 거니?”

    “네, 친구들의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혼자 겁먹었던 것 같아요.”

    사실 조금은 겁나기는 하지만….

    마지막 말을 흐린 예진이를 향해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지원 전형에 대한 고민이 끝났다면, 이제는 활동들을 채워 갈 시간이야. 기말고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나는 사전에 준비해 둔 예진이 맞춤 활동 체크리스트를 펼쳤다.

    “아니 쌤….”

    “이런 건 언제 하셨어요?”

    태웅이와 민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평소대로 아니냐며 살짝 어깨를 들어 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첫 번째. 교육 관련, 인문학 도서들을 읽어라.”

    예진이에게 부족한 활동 중 가장 빠르게 진행할 수 있는 활동. 바로 독서활동이었다.

    지금까지 예진이는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제외하면 교육 관련 도서는 없었다. 인문학 도서 역시 학교 교육 과정 내에서 숙제 때문에 혹은 조별 수행평가 때문에 읽은 책이 전부였다.

    “초등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영역 중 하나가 바로 독서활동이다. 추천 도서는….”

    추천도서를 확인한 예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동석이와 같이 구매했던 십여 권의 책도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북부 청소년 센터 내에 있는 도서들이었기에 따로 서점에 갈 필요도 없었다.

    “동아리에서도 하나 했으면 좋겠는데.”

    예진이가 회장인 자율동아리에서는 올해 딱히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다.

    “고3이라 다들 시간을 안 내려고 해서요….”

    그게 이유였다.

    지금 시점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면서 졸업생들이 맞장구를 쳤다.

    “다른 건 필요 없고, 딱 하나만 해 보자.”

    나는 강의실 벽면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가리켰다. 예진이는 물론이고 강의실 내에 있는 졸업생들이 고개를 포스터 방향으로 돌렸다.

    “저게 뭐예요?”

    <서울 청소년 교육 정책 토론 대회>

    “저 토론 대회를 자율동아리 차원에서 교장 선생님 승인 하에 봉사활동으로 다녀올 수 있는지 담당 선생님께 여쭤봐.”

    지금 예진이에게 부족한 활동 중 가장 큰 것은 예진이의 교육소양이었다. 특히, 이러한 교직소양은 혼자 탐구하는 것보다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논의한 모습을 보이는 게 효과적이었다.

    ‘그래야 교수법이나 교육 시사문제들을 다각도로 분석해 보는 역량을 보여 줄 수 있지.’

    게다가 <서울 청소년 교육 정책 토론 대회>는 단순히 토론으로 경쟁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토론을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교육 정책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해 주는 시민 재능 기부와 같은 형태였다.

    그래서 실제 학교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진행하는 발표식 토론이었다.

    그러다보니 참가 학생들에게는 봉사활동 시간을 주겠다는 공지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의 참가를 유도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봉사활동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동아리 특기사항으로도 기재할 수 있어.”

    토론 발표 점수는 교육 관련 종사자들이 듣고, 질의응답을 통해 판단한다. 심사위원들도 강문고 교사들을 비롯해 교육 관계자들이 담당했다.

    “동아리에 이 내용만 적히면 이번 동아리는 따로 더 준비할 건 없다.”

    토론 내용이 자세히 적히기만 하면, 예진이의 교직 역량을 어필할 수 있었다.

    때문에 지금 예진이에게 이 활동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대회 준비는 걱정하지 마라. 도와줄 녀석들한테 말해 둘 거니까.”

    나는 이미 머릿속에서 예진이 대회 준비를 도와줄 녀석들을 구상해 둔 참이었다.

    “음… 쌤, 잠깐만요.”

    예진이는 조금 고민하다가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서 톡을 남겼다.

    “담임쌤이 자율동아리 담당쌤이셔서 연락드렸어요. 한 시간쯤 뒤에 전화 주신다고 하시니까 말씀드려 볼게요.”

    나는 녀석의 추진력에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예진이가 부끄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살짝 웃었다.

    “그리고 나머지 창체영역과 교과목 세특에서는….”

    “아직도 더 있어요!?”

    그리고 예진이는 나머지 스물세 개의 체크리스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눈동자를 파들파들 떨었다.

    “힘내, 예진아….”

    “우리도 다 겪었어….”

    “그래도 그 끝은 합격으로 이어질지니….”

    졸업생 녀석들의 한탄 아닌 한숨 소리가 들려온 건 덤이었고 말이다. 그런 한숨을 날린 녀석들 중 두 명을 향해 내가 날카로운 시선을 날렸다. 두 녀석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

    강명문의 입시상담을 받은 예진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는 봐주셨던 걸까?’

    이전에 상담받았을 때는 이렇게나 많은 준비사항들을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아마 경기교대를 지원할지 말지, 저소득층 전형을 할지 말지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닐까.

    그래도 예진은 괜찮았다.

    ‘많기는 하지만….’

    준비할 사항들은 많았다. 내신 성적도 수직상승으로 만들어야 했고, 비교과 활동도 지금부터 빠르게 준비해야 한다.

    책도 읽어야 하고, 동아리 활동 보고서에 세특 수행평가로 제출할 주제들에 대해서도 인터넷, 책을 통해 공부를 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멘토 선배들 아이디를 빌려서 논문 사이트에서 학술지 논문도 찾아봐야 한다.

    그럼에도 예진의 기분은 한층 들떠 있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마음을 담은 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쌤 안녕하세요! 저기, 자율동아리에서 혹시….”

    예진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고, 향후 입시 목표까지 이야기했다. 예진의 담임교사는 예진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은데? 내가 학교에 요청드려 볼게.]

    “진짜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예진은 전화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기왕 준비하는 거 잘 해 보자. 우리 학교에서 많이 나가는 것 같아서 승인받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또 누가 나가나요?”

    담임교사는 다른 학생들 중에서도 봉사활동 시간을 받기 위해 신청을 한 학생들이 몇 있다면서 말했다.

    만약 3학년 친구들 중 예진과 같이 이 대회에 참가하는 친구가 있다면, 같이 준비를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응. 예진이 친구도 있을 수도 있어. 같은 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네! 그러면 같이 준비해 볼게요!”

    [경쟁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건 대진표 나오기 전까지는 모르니까. 아무튼, 승인받으면 바로 알려 줄게!]

    예진은 전화를 끊으면서 강의실 내부를 한 번 둘러보았다.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 왜 그러세요…?”

    졸업생 선배들이 음흉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예진이, 대회 나가니?”

    “토론대회인 것 같은데… 그치?”

    은장과 민주가 천천히 귀신처럼 예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예진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네, 네… 그럴 것… 같은….”

    “야야, 예진이 겁먹었잖아. 왜들 그래.”

    정석의 타박이 들어왔지만, 오히려 은장과 민주는 그 말을 신호로 더 가깝게 다가왔다.

    “토론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닌데 말이야….”

    “기왕 하는 거 수상도 해야지?”

    은장과 민주는 강명문으로부터 특명을 받았다.

    -예진이 대회 입상, 너희들이 책임지는 거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토론 대회 준비에 은장과 민주는 칼을 갈았다.

    “우리가 예진이 네 토론대회 책임진다!”

    은장이 예진의 손목을 잡고는 힘차게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억지로 강의실 한쪽 구석에 놓인 책상 앞으로 이동시켰다.

    “토론을 하려면 일단 상식부터 키워야지?”

    “정확한 스피치 실력도 갖춰야 해요, 언니.”

    “맞아. 그러니까 오늘부터 1시간은 상식 수업, 30분 스피치 연습, 1시간 독서, 30분 스피치 연습으로 총 3시간 달린다.”

    “3시간 특훈이 끝나면 운동이야. 발성이 좋아야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서, 선배님들!?”

    두 사람이 예진을 향해 각종 계획들을 잔소리처럼 늘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진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힘내라 진짜….”

    다른 졸업생들이 주먹을 살짝 쥐면서 응원을 보냈다.

    어쩐지 점점 강명문화 되어 가는 졸업생들이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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