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외전 (12) - 알지도 못하면서
“하….”
예진은 터져나오는 한숨을 내쉬면서 손에 들린 펜을 빙빙 돌렸다. 문제집을 푸는데도 집중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예진아?”
그 모습을 발견한 은장이 예진을 불렀다.
“아, 네!”
“집중이 안 되니?”
“아, 아뇨 괜찮습니다!”
지금은 멘토링을 진행 중이었기에 예진의 옆에는 은장이 앉아 있었다. 국어 킬러문항을 설명해 주던 은장은 예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왜, 왜, 그러세요?”
“너… 고민 있지.”
은장의 말에 예진이 화들짝 놀랐다.
“아, 아, 아뇨! 어, 없어요!”
“있네. 설마 연애는 아니지?”
농담을 던지는 은장에게 정석이 말했다.
“예진이는 그건 아닌 거 같던데? 연애는 내가 볼 땐 은솔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떠올리던 정석의 팔을 은장이 세게 꼬집었다.
“아야!”
“행여나 그런 소리 은솔이 앞에서 하기만 해 봐.”
“어휴, 알았어. 그런데 예진이는 왜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정석도 예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예진은 괜히 선배들의 주목을 받는 것 같아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데?”
끈질기게 묻는 은장을 보며 예진은 계속해서 대답을 망설였다.
‘이걸 말해도 되나.’
고민을 이어 가던 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가자.”
“네?”
“나가자. 바람 좀 쐬면 훨씬 나아질 거야. 어차피 멘토링도 마지막 타임이니까 곧 끝날 시간 다 됐잖아?”
은장은 예진의 손에 들린 펜을 억지로 내려놓고, 예진의 손을 잡았다.
“어, 어어어, 어?”
예진은 은장의 리드를 받으면서 자리에서 엉겁결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센터 밖으로 나갔다. 정석도 허겁지겁 두 사람을 따라나왔다.
“마실래?”
은장은 언제 챙겼는지 주머니에서 캔커피 하나를 꺼냈다. 커피를 받아든 예진은 캔을 따지 않고 그저 손에 쥐고만 있었다.
“공부가 잘 안 돼?”
정석도 옆에 앉아서는 예진을 향해 물었다. 은장도 걱정된다면서 예진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망울이 참 선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예진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그것도 그렇고….”
예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말해 보자. 지금 내가 준비해야 하는 전형이, 정말 저소득층 전형 이외에는 답이 없는 건지. 그리고 그렇게 입학했을 때 나중에 놀림을 받지는 않는 건지.
그렇게 몇 번을 되뇌이고 나서야 예진은 결심을 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저기 동석이 아냐?”
그때 공원의 공터 한쪽으로 동석의 얼굴이 보였다. 정석은 동석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위로 세우면서 동석이 무엇을 하는지 살폈다.
“…옆에는 은솔인데?”
“은솔이!?”
정석의 말에 은장이 놀라면서 정석의 머리를 눌렀다.
“아! 왜!”
“잠, 잠깐만!”
은장은 흥미롭다는 듯 동석과 은솔을 바라봤다. 동석은 은솔이 준비해 왔는지 간식을 먹고 있었다.
“…라니까요!”
“…해.”
그런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려오기는 했다. 은장, 정석은 어느새 공원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예진도 분위기에 휩쓸려 두 사람의 뒤에 조심스레 몸을 숨겼다.
“그러니까 밥 좀 제때 먹으라니까요!”
“미안해. 그런데 연구하다 보면 시간이 없어서….”
“어휴, 내가 못 살아. 선배가 맨날 그렇게 밥 거르니까 이런 거도 만들었는데. 이거는 가져가서 먹고 있어요?”
은솔은 자신이 만든 에너지바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동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먹고 있지 당연히. 맛있게 먹고 있어.”
“…설마 이것만 먹는 거 아니죠?”
은솔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동석을 향해 찌릿, 눈빛을 날렸다. 동석이 당황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아, 하하, 하하하….”
“이거 오늘은 꼭 먹어요. 알겠어요?”
은솔은 옆에 세워 둔 가방에서 큰 보온통을 꺼냈다. 그걸 확인한 동석의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려왔다.
“선배 몸 챙기라고 보양식으로 만든 거라고요! 진짜 이렇게 챙겨주는 후배가 어디 있….”
“자, 잠깐만!!”
그때 수풀 옆으로 은장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예진이 몸의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면서 은장, 정석의 몸도 엎어진 것이었다.
“…언니?”
“어? 은장이랑 정석이다. 예진 후배도 있네요?”
태연하게 세 사람을 향해 반가운 인사를 보내는 동석과 달리 은솔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리고는 후다닥 짐을 챙기고는 성큼성큼 자리를 피해 걸어갔다.
“어? 은솔아, 어디 가?”
“됐어요! 그거 먹기나 해요!”
빠르게 사라지는 은솔을 멍하니 바라본 동석이 곤란하다는 듯 손을 꼼지락댔다.
“아… 미안, 동석아. 분위기 좋았는데 우리가 깼네.”
정석의 사과에 동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뭘 깨?”
“…말을 말자.”
동석의 반응에 한숨을 쉰 정석이 동석의 옆에 놓인 보온통을 바라봤다.
“근데 넌 후배가 저렇게 챙겨주는데 안 먹냐? 거의 여친이구만.”
“여, 여여여, 여친!?”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감싸는 동석이었다. 은장은 동석의 반응이 의외라면서 오히려 덤덤하게 물었다.
“너희 썸타는 거 아니었어?”
“써, 써써, 썸!?”
동석의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썸이니 여자친구니 하는 단어는 태성의 어플에나 있는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지금 자신이 후배인 은솔과 썸을 탄다느니, 여자친구 같다느니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동석의 얼굴이 붉어지기에는 충분했다.
“와… 너 진짜 모르는 거냐?”
정석이 질렸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무, 무슨, 무슨 소리야. 은솔이는 그냥 친한 후배고….”
“전혀 그렇지 않던데요, 선배?”
이번에는 예진마저 가세했다. 그러자 동석은 하하, 웃으면서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어쩐지 동석의 말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은장과 정석이 동석의 옆에 앉아서는 보온통을 휙 낚아챘다.
“야!”
“어디 뭐가 들었나 볼까?”
장난스레 보온통을 쥔 정석이 뚜껑을 여는 시늉을 했다.
“그거 줘! 은솔이가 준 거라고!”
“오호? 이거 봐라?”
정석은 쥐고 있던 보온통을 다시 동석에게 건넸다.
“장난이야 인마. 그런데 이 반응 뭐지? 그냥 후배한테 받은 느낌이 아닌데?”
“그… 그게….”
동석은 대답하기를 망설이며 쭈뼛거렸다. 은장은 동석의 성격을 알기에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면서 손가락을 들었다.
“동석이가 짝사랑하는구나!”
“아, 아니야!”
은장의 말에 일단 부정하고 보는 동석을 향해 은장이 음흉한 미소를 날렸다.
“으흐흐, 이 누나가 좀 도와줄까?”
“이 형님이 도와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이걸로 모솔 탈출이냐 동석이!”
여전히 장난스럽게 접근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동석이 한숨을 푹 쉬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대조되는 모습이었기에 두 사람도 살짝 당황해 했다.
“그런 게 아니야 진짜.”
“그럼?”
정석의 질문에 동석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싱긋 웃었다.
“은솔이가 좋기는 하지만… 난 하면 안 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동석의 미소는 모든 걸 달관한 사람 같은 느낌을 보였다.
“알잖아. 내가 너희랑 스타트라인이 다른 거.”
“….”
정석과 은장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직 예진만이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 난 연애를 하면 안 돼.”
동석이 지금까지 연애를 하지 않았던 이유. 그건 연구 때문에 바빴던 것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경제적 상황에 따른 차이.
동석에게는 그 사실이 다른 것보다도 연애에 있어서는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실제로, 대학교 2학년 때 썸을 타던 연천대 후배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선배는 용돈 안 받아요?
과외 아르바이트와 연구활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동석에게, 그 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가정형편이 좋지 않기에, 그래서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으면서 생활하지 못했기에, 데이트 비용도 항상 부족했었다.
-아… 여기보다 저기가 더 맛있는데….
가게를 들어가도 만 원이 더 비싼 가게를 선호했었던 후배였다. 카페를 들어가도 항상 디저트까지도 주문했던 후배였다.
그리고 동석은 그런 후배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자체적으로 썸을 끝냈었다.
그 스토리를 모두 알고 있던 정석과 은장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냥 운이 없었다, 그렇지 않은 애들도 많다, 하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했었다.
그러나 동석에게는 이 사건이 연애에 있어서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은솔이가 저렇게 챙겨주는 게 고맙기는 한데… 나랑 연애하면 재미도 없을 거고, 데이트 비용도 항상 부족할 거야.”
정석과 은장은 동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모든 과정들을 알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아직 동석의 생활은 많이 나아졌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니까.
“그래도….”
용기를 내서 반박을 해 보려는 은장을 향해 동석이 미소를 지었다.
“은솔이한테 고맙기는 하지만… 나는….”
“그게 무슨 소리죠?”
그때 예진이 소리쳤다. 동석이 깜짝 놀라며 예진을 바라봤다.
“들은 그대로예요. 연애를 할 경제적 여유도 없고 시간도….”
“그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연애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예진은 언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봐왔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성공적인 연애스토리를 만들어 왔던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 기사도 생각했다.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잖아요.”
“하고 싶은 대로?”
“네. 하고 싶은 대로 준비해서 연천대 합격하신 거 아니에요? 그때 강명문 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기도 하셨지만, 결국 선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서 성공했다면서요.”
예진은 며칠 전 동석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다시금 동석에게 말했다.
“여유가 없다고, 시간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두려움을 갖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동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진은 새로운 목표를 가졌었다.
-저 선배처럼 되고 싶다.
그러나 지금 동석의 모습은 예진이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동경하는 선배가 아니다.
“비록 아아도 잘 모르고, 최신 유행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저 현실에 굴복한, 사랑의 패배자였다.
“선배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내가 그런 선배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힘을 받았는데요.
그 말을 속으로 삼킨 예진은 동석을 향해 조용히 분노를 날렸다.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현실의 문제 때문에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니. 예진이 봤을 때, 동석의 의견은 일견 맞는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회피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사랑에 그런 게 어딨어!
가난이 방해가 될 수는 있지만, 동석 선배는 지금 대학생 아닌가! 은솔 선배의 모습도 동석 선배의 현 상황 같은 건 전혀 신경 안 쓴다는 모습이었다.
그러면 대체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은솔 선배도, 동석 선배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그런 노력은 모른 척 하고, 선배 좋을 대로만 해석할 거예요?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게 예진이 현재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예진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동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동석아?”
예진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정석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석을 보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은솔이 잡으러.”
“응? 이렇게 갑자기?”
친구의 질문에 동석이 히죽 웃었다.
“우리 후배가 저렇게 응원해 주고 있는데, 당연히 힘내 봐야지. 나도….”
동석은 쿵쾅대는 심장 부근으로 손을 올렸다.
“은솔이가 좋으니까.”
동석의 얼굴은 여전히 붉은 채였지만, 방금 전까지 있었던 고민을 훨훨 털어 버린 듯 보였다.
“다녀올게.”
자리를 비우는 동석을 보면서 예진은 방금 전에 자신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내가 뭐라고 그런 조언을 했지?
내가 연애를 해 본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소리를 했지?
부끄러워서 자리를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 동석에게 했던 말을 되뇌었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핸드폰을 쥐고 달려가는 동석,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정석과 은장.
세 선배의 모습을 보면서 예진은 생각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했던 조언. 동석에게 현실에 굴복하지 말라는 조언.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던 조언.
그 조언에 해당하는 사람은 동석 한 명만이 아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예진의 마음에 새로운 결심이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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