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외전 (11) - 한 계단씩
초등학교 봉사활동이 끝난 당일 저녁, 박은환은 동생인 박재우와 함께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다음 달에 나가는데 뭘 벌써부터 준비해?”
이미 봉사활동 짐들은 정리를 끝내둔 상태였다. 지금 정리하는 짐은 박재우의 개인 짐이었다.
박재우는 해외 지부에서 2년간 근무하기로 결정이 되어서 잠시 외국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부터 조금씩 짐을 포장하고 있었다. 미리 택배로 보내 둘 생각이었다.
“일하다 보면 이거 준비할 시간 없을 거 같아서. 얼른 해서 시간 맞춰가지고 해외 택배 보내야지.”
“얼마나 있으려고?”
박재우 대리는 지금까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을 했고, 현재도 여러 활동들을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해피플레이스는 이 점에 주목했고, 본사가 있는 미국에서 제의가 왔던 것이었다.
“원래는 2년인데, 거기서 일 더 있으면 좀 더 보고 오기는 할 거야.”
“그래. 가서 여자친구도 좀 사귀고 그래라. 언제까지 솔로로 살래?”
박은환의 타박에 박재우가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누나부터 하지 그래?”
“됐네요. 난 평생 멋진 솔로로 살 거야.”
여즉 연애 생각이 없는 누나를 보는 박재우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래,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누나도 나이가 있는데.”
“말 다 했냐, 동생아.”
박재우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머리를 쥐어박은 박은환은, 그러면서도 한 가지 고민을 떨칠 수 없었다.
‘진짜 이러다 평생 솔로로 사는 거 아냐?’
화려한 솔로로 살고 싶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물론, 혼자 지내는 지금의 삶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게 완벽하느냐 묻는다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심지어는 최근 들어 헛헛함이 자주 느껴지기도 했다.
“근데 누나, 진짜 그러다가 혼자 산다. 어머니, 아버지 은퇴하시면 누나랑 놀아 주실 거 같아? 나도 지금처럼 해외로 나가면 누나랑 놀아줄….”
“친구들이랑 놀면 되니까 신경 꺼라.”
“누나 친구들도 다들 결혼하고 나서 만나기 어렵잖아. 아이 있는 누나들은 더 그렇고.”
진심으로 걱정된다며 묻는 동생의 말에 박은환이 찌릿 눈길을 날렸다. 그러자 박재우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말했다.
“아니, 뭐, 그렇다고. 아무튼, 도와줘서 고마워.”
누나가 저런 눈을 할 때면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한다. 생각을 마친 박재우는 후다닥 자신의 짐을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하….”
동생 짐 정리를 도와주고 방으로 돌아온 박은환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최근 태성이 오픈했다고 하는 연애 가이드 어플을 열었다.
제자의 부탁에 일단 등록하기는 했는데, 기왕 한 김에 제대로 해 볼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진짜 해봐…?”
박은환의 눈동자가 어플 한쪽에 있는 데이트 가이드, 성공적인 연애의 시작, 입문자 갤러리 방향으로 돌려졌다.
“나와 상대 모두 만족할 맛집 찾기… 내 취미와 상대의 취미의 공통분모 찾기… 알고보면 고구마인 내 이상형… 이건 뭐야?”
그다지 영양가 있는 내용들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글은 없었다.
이미 박은환도 많이 시도해 봤던 내용들이었으니까.
상대에게 맞춰 보려 취미를 바꿔 보기도 했었고, 좋아하는 맛집 취향도 숨기고 상대에게 맞춰 주던 적도 있었다. 더러는 학교 동료인 강명문, 홍유진, 차석기 등의 선생님들에게도 가끔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새로운 게 없네….’
이리저리 스크롤을 내리고 글을 클릭해서 읽어보던 박은환은 한 게시글에서 엄지 손가락을 멈추었다.
<모든 시도를 해 봤는데도 되지 않을 때 점검할 10가지!>
거기에 눈이 딱 꽂힌 박은환은 게시글을 터치했다. 그리고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
<내 사주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 보자!>
왜 이걸 생각 못했지!
지금까지 그녀는 타로점까지만 봤었지, 사주를 본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타로는 접근성도 좋았고, 가격도 저렴했다.
하지만 사주까지는 가본 적이 없었다. 생각은 했었지만, 비용도 타로에 비하면 많이 비싸다 보니 망설여지기도 했었다.
그래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지금 게시글을 보면서 문득 사주를 봐 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게다가 아래의 문구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이 정도면 타로점 2번 정도 보는 비용이었다. 가심비도 딱이었다.
박은환은 어플의 결제 버튼으로 엄지 손가락을 가져갔다. 누를까 말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런데 금액이 너무 좋은데. 그냥 받아나 볼까.
‘그래, 재미삼아서 받아나 보자!’
결심을 한 그녀의 엄지 손가락이 스마트폰 액정을 터치했다.
***
봉사활동을 마친 다음 날, 예진이는 학교생활기록부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상담은 북부 청소년 센터에서 이루어졌다.
“흠….”
나는 예진이의 학생부를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1학년, 2학년 교과 성적이 많이 아쉽기는 하네.”
예진이의 교과 내신 평균은 약 3.5등급 정도. 그나마 2학년 때 올라간 성적이 3등급이었다.
“다행인 건 이번 중간고사 성적이 좋다는 점이야.”
서울시 교육복지 프로그램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예진이었다. 특히 국어가 1등급으로 상승한 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우선은 3학년 1학기 내신 점수는 1등급대로 만들자.”
“네!”
예진이는 그 정도는 자신도 알고 있다면서 가슴을 쫙 폈다.
“그리고 비교과 활동에서 제일 아쉬운 점은 교직소양이야.”
“교직소양이요?”
의문을 품고 나를 바라보는 예진이에게 나는 학생부에 적혀 있는 예진이의 항목들을 하나씩 짚어 주었다.
“1학년, 2학년 때까지 모두 교사체험을 했던 건 좋은 거야. 동아리도 다행히 교육과 관련된 활동들을 해 왔고.”
“그러면 오히려 교직소양을 보여 주기 좋았던 거 아닙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임정훈도 궁금하다면서 질문을 했다.
“단순히 활동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교직소양을 보여 주기 어렵습니다. 실무적인 부분을 예로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화이트보드에 대고 메모를 했다.
“A학생이 진로활동 영역으로 ‘나도 선생님’을 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보통은 이런 형태로 적히게 됩니다.”
예시 문장을 적어내려 가자 임정훈 선생과 예진이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 갔다.
<평소 교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 교육 활동에 진심으로 임했으며, ‘나도 선생님’ 활동을 통해 자신의 진로 분야인 교사로의 역량을 키움.>
“그리고 또 다른 B학생이 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이어서 그 옆에 다른 예문을 적어 갔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좌우를 번갈아가며 움직였다.
“아….”
“…다르긴 다르구나.”
예진이와 임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사에 관심이 많은 학생으로 ‘나도 선생님’ 활동에서 국어의 기초를 알려 주는 선생님 역할을 수행함. 같은 학급 친구들의 특징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각자에게 필요한 국어 영역들을 확인하는 맞춤형 수업 교재를 활용하여 친구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음.>
나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교직소양이라는 건 단순히 누군가를 가르친 사실이 있다는 점이 아닙니다. 학생들 개개인의 특징들을 알고서 대응하는지, 행정적인 부분은 어떤 걸 알고 있는지, 학교와 관련된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인식을 하고 있는지, 나름의 해결책은 구상하고 있는지 등이 필요합니다.”
예진이는 내 말을 노트에 꼼꼼히 필기했다.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지?”
“네!”
예진이가 힘차게 답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이 부분이 많이 아쉽다. 이걸 보완해야 경기교대에 지원하는 다른 학생들과 경쟁할 수 있어. 학교 선생님과는 사이가 어때?”
“음… 그냥 그런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는 예진이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학교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저소득층 전형으로 경기교대 지원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저, 저소득층이요?”
내 말에 예진이가 흠칫 놀라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 반응이 오히려 더 의외였어서 나 역시 놀랐다.
“무슨 문제 있나?”
“그… 꼭 그걸로… 지원해야 하나요…?”
임정훈을 슬쩍 바라봤다. 그도 예진이의 반응을 살피며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민감할 겁니다.’
그 눈빛의 의미를 해석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형이 아니면 지원하기 어려워.”
“….”
“이걸로 지원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니?”
“…그런 건… 아니지만….”
예진이는 쉽사리 대답을 이어 가지 못했다. 나는 녀석의 학생부를 보여 주면서 다시 컨설팅을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네가 일반 전형으로 지원했을 때 단점으로 작용할 요소가 많아.”
“저소득… 이 전형은 괜찮나요?”
“상대적으로 일반 전형으로 지원하는 학생들보다는 경쟁자들의 레벨이 많이 높지는 않지.”
나는 예진이의 반응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예진아.”
“…네.”
“입시는 현실이다.”
“…현실이요?”
강문고등학교 녀석들에게 숱하게 이야기했던 사항. 현실이라는 이 입시판.
녀석들에게 나는 현실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입시전략들을 알려 주면서 최선의 결과들을 내왔었다.
그리고 그 전략을 취해야 하는 건, 예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 그 모든 것들을 고려해서 가장 합격가능성이 높은 전략을 취해야 하는 것. 그게 바로 입시야.”
“그건 그렇지만….”
예진이는 계속해서 우물쭈물거렸다.
“경기교대 가고 싶다며.”
“네.”
“그럼 저소득층전형으로 지원해야 해. 그게 아니면 어려워.”
나는 예진이의 학생부를 턱, 덮고는 예진이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밀었다.
“아니면, 그 전형으로 지원하는 걸 꺼리는 이유라도 있니?”
예진이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반응을 놓치지 않은 나는 한 번 더 예진이에게 물었다.
지금 예진이의 성적, 활동들을 모두 고려해보면 일반전형으로 지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성적도 낮았고, 활동도 빈약했다.
이러한 부분을 상쇄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지원 전형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경기교대 저소득층 전형은 2명, 3명 선발하는 것도 아니고 무려 15명이나 선발한다. 조금만 보완하면 충분히 합격을 노려볼 수 있었다.
‘그걸 다 알고 있을 텐데, 이러는 이유는….’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임정훈에게 들었던 예진이의 특이사항이 떠올랐다.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 걸 부끄러워 합니다.
정말 그것 때문에 저소득층 전형을 준비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면, 입시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친구들한테 들키면 어떡하죠?”
그리고 예진이는 임정훈에게 들었던 특이사항 그대로의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떨리는 눈동자로 불안하게 나를 바라보는 예진이를 향해 말했다.
“그게 왜?”
“…네?”
입을 벌리고 되묻는 예진이는 나를 보며 눈을 꿈뻑꿈뻑 떴다.
“친구들이 알면 어때서?”
예진이가 지금 우려하는 지점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켰을 때 친구들이 모두 떠나는 것 아니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은 이거였다.
가난이 치부인가?
적어도 입시에 있어서는 치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 누구보다도 더 노력하고 성장할 수 있다면, 그건 약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약점을 없애나가는 성공 신화를 그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미 강문고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 준 녀석이 있었고 말이다.
“오히려 지금 현실을 극복해 내기 위해 현실을 인정하고, 대학에 진학한다는 사실이 더 멋지게 생각될 수 있어.”
물론, 이렇게까지 생각을 정리하려면 본인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 굳이 예진이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생각 많이 해 봐. 정 어려우면 다른 방안을 생각해 보자.”
“…네, 죄송해요.”
학생부를 받은 예진이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임정훈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괜… 찮을까요?”
임정훈이 불안한 듯 물었다.
통제되지 않는 입을 넘어서 나오는 그의 말이 떨려 왔다.
나는 강의실에 앉아 있는 예진이를 바라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아뇨, 오히려 더 좋습니다.”
가끔은 이런 힘든 상황이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될 수도 있다.
“녀석에게 필요한 건 간절함과 함께 자신감이니까요. 지금은….”
벽면에 붙은 또 다른 행사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천천히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하는 임정훈을 향해 나는 부연 설명 없이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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