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231화 (230/252)

231화. 외전 (7) - 그냥요.

녀석들에게 호되게 혼을 내고 다음 날, 서울시 교육 복지 프로그램을 위해 학생들이 모였다.

“차예진?”

그러나 예진이가 결석했다.

“차예진, 오늘 안 왔나?”

출석을 부르던 나는 다시 한 번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예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흠… 몸이 안 좋은가 보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출석부를 덮으며 학생들 앞에 섰다.

“오늘은 지역 초등학교 봉사활동 오리엔테이션 날이다. 혹시 참여하지 못한 친구에게는 내용 전달해 주도록 하고. 알았지?”

예진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혹시나 다른 일정 때문에 자리를 비우거나 하는 녀석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멘티 학생들이 알겠다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번에 참여할 학교들은 해피플레이스에서 도움을 주는 학교 중 한 곳이다. 그래서 설명해 주실 분을 모셨어.”

나는 강의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남녀를 향해 손짓했다. 내 신호를 받은 두 사람이 천천히 단상 위로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해피플레이스의 박재우 대리입니다.”

박재우 주임은 그동안의 실적을 인정 받아 4년 전에 대리로 승진했다. 그 실적에는 강문고등학교의 봉사활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박재우 대리는 우리들 활동을 열심히 지원해 주고자 노력했었다.

물론, 예산 집행이라든가 정책 절차 등에 의해 무산된 것들도 많았지만, 강문고에서의 동아리 활동은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꾸준히 교류를 해 왔고, 이번 서울시 프로젝트에는 해피플레이스 차원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며 참여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강문고등학교 영어교사 박은환입니다.”

졸업생들은 반가운 환영 인사로의 박수를, 멘티 학생들은 존경의 의미로 박수를 보냈다.

강문고가 유명해지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 교사들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선 홍유진 선생. 그녀는 미술과 수영의 전문가로, 강문고의 인어공주로 이름을 날렸다.

지석 선배는 밀리터리 매니아임이 밝혀지면서 군인사회, 줄여서 군사쌤.

오석상 선생은 여전히 침묵의 권왕이었고, 차석기 선생은 이제 석기시대라는 별명을 받아들였다.

윤기준 선생은 물리, 공학분야 전문으로 이름을 날려서 물공마왕이 되었다.

그리고 박은환 선생은….

“강문고의 걸크러시!”

김영호와 있었던 일들이 홍 선생을 통해 알려지면서, 이런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오대천왕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 사이에 있는, 특히나 부당한 일에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이미지로 박혀 있었다.

“하하… 하… 그런 별명으로 불러 줘서 고마워요.”

물론 그 별명을 온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오늘 이 두 분이 봉사 대상 초등학교의 특징에 대해 알려 주실 거다. 다들 경청하도록!”

박재우 대리와 박 선생이 준비한 PPT를 열어서 학교들의 특징을 설명해 주었다.

“이번에 참여하게 될 초등학교에서는 ‘동행 봉사활동 고교 멘토’로 활동하게 될 거예요. 이곳에서는 멘티인 여러분이 초등학교에 가서는 멘토가 되는 거죠.”

박 선생의 말에 멘티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 초등학교 교육봉사는 교직이수 학생들 같은 대학생들이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힘을 좀 써 줬어요. 그 덕분에 교직이수 과정의 봉사활동을 하는 대학생들과 함께 일일체험 형태로 하게 될 거고요.”

“그리고 다음 달부터는 인근 청소년 복지관에서 공부 중인 초등학생들 대상으로 예체능 봉사, 역사 봉사를 하게 될 겁니다.”

두 사람은 이번 초등학교에서의 봉사와 이후의 과정들에 대해 설명했다.

“진짜 학교에 가는 거야?”

“우리가 해도 되나?”

“그래도 기회잖아! 난 해 보고 싶었는걸!”

평소 교육봉사를 해 보고 싶었던 학생들이 특히나 신이 나 있었다.

“여러분들이 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잘 준비해서 해 봅시다!”

설명을 모두 마친 박 대리의 말을 끝으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마무리되었다.

***

“지효야, 예진이랑 친구지?”

정석은 초등학교 봉사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곧장 지효를 찾아갔다.

“아, 네.”

“예진이한테 연락받은 거 없어?”

지효는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예진이 오늘 학교도 안 나왔어요.”

“학교도!?”

정석은 잠시 인상을 썼다가 다시 표정을 풀면서 지효에게 말했다.

“그렇구나. 알았어, 혹시 연락 오면 오티 내용 알려 줄래? 오늘 결석자라.”

“네!”

밝게 웃으면서 답하는 지효를 보면서 정석은 쓰게 웃었다.

‘정말 아무런 자각이 없는 건가?’

정석은 어제 예진과 지효를 몰래 뒤따라갔었다. 강명문의 지시 때문이었다.

-대학생 체험, 너희들이 벌인 일 때문에 뭔가 생길지도 몰라.

그 말대로였다. 예진에게 과잠을 사 줬기 때문에 지효가 서울한국대 입학을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예진은 지효 몰래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이상한 점도 있었다.

지효가 예진을 놀리기 위해서나 무시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그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짜 모르겠네….”

정석은 지효와 나눈 이야기를 강명문에게 곧장 전달했다. 그리고 어제 두 학생의 대화에 대한 자신의 판단도 곁들였다.

“쌤, 진짜 이상한 거 같아요. 지효는 분명 악의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악의?”

“네. 예진이를 무시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냥 그게 당연한 것처럼 말했으니까요.”

아마 그래서 예진도 지효에게 반박을 하지 못한 게 아닐까. 정석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 말이 맞을 수도 있지.”

“그쵸?”

“그런데 정말 악의가 없는 걸까?”

“그럼요?”

정석의 질문에 강명문이 말했다.

“지효는 배려가 부족한 거야.”

“상식이 부족한 걸 수도 있고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은환이 다가왔다. 그녀도 예진과 지효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강 선생님이 도와달라고 해서 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요?”

“예진이가 다시 왔을 때 멘탈 관리를 도와주시면 됩니다.”

강명문은 예진이 다시 돌아오더라도 확실하게 정신을 붙잡지 않으면, 언젠가 또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강명문은 이후의 관리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박은환도 이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박 선생님의 걸크러시… 아니, 당당함을 보여 주세요. 그게 지금 예진이에게 필요할 겁니다.”

박은환이 살짝 눈을 흘기면서 강명문을 바라봤다. 강명문은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면서 정석에게 말했다.

“그런데 예진이 찾으러 가야 하지 않아요? 은장이가 갔어요?”

“은장이는 여기서 애들 학습법 봐 주고 있습니다.”

그 말에 박은환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며 의문의 눈빛을 던졌다.

“은장이가 A조니까 당연히 은장이가 찾으러 갈 줄 알았어요.”

“은장이보다 더 적합한 녀석이 있습니다.”

박은환의 물음에 강명문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상 장소는 저희보다 예진이를 더 잘 아는 분에게 물어봤죠.”

어제 정석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강명문은 곧장 임정훈에게 연락을 했다. 임정훈은 예진의 현재 상황이라면, 북부 청소년센터에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예진이가 상처를 받거나 하면 잠수를 타요.

-어디에 있을 거라 예상하십니까?

-비밀이기는 한데… 예진이는 평소에 동네 서점이랑 공원에 자주 갑니다.

그래서 지금 그 서점과 공원의 위치까지 파악해둔 참이었다.

물론, 예진이 오늘 두 장소에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집으로 찾아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도 집까지 가 본 적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임정훈도 예진의 집에 직접 찾아간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번 교육복지 프로그램에 참가한 멘토들이 예진의 집으로 방문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강명문은 예진이 자주 방문한다는 서점과 공원을 찾아가기로 했다.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것 같은데.’

강명문은 미리 장소로 이동한 멘토의 연락처를 열어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번호의 주인공이 전화를 받았다 끊어 버렸다.

“응?”

강명문은 끊어진 전화기를 붙잡고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잘 만났나 보네.”

남은 건, 녀석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서울시 교육 복지 프로그램의 초등학교 봉사 오리엔테이션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간, 예진은 정처 없이 동네를 걸어 다녔다.

홧김에 학교도 가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도, 담임 선생님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후회되지는 않았다.

다만, 갈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오전에는 근처에 있는 구립독서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챙겨 온 문제집들을 전부 풀고 나자 더 이상은 할 게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짐을 들고 독서실에서 나왔고, 자주 가던 공원에서 시간을 적당히 보낸 참이었다.

‘어디로 가지.’

이제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벌써 집으로 들어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들어간다고 해서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발길이 닿는 대로 몸을 옮겼다.

평소에 보지 않았던 골목길이 보였다. 그 주변의 풍경들이 생각 이상으로 예뻐 보였다. 어지럽게 쏟아지는 햇빛들이 나뭇잎을 스치며 바닥에 빛의 향연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마치 복잡한 자신의 심경을 대변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러다 예진은 평소 책을 구경하러 자주 다니던 서점 앞에 서게 되었다.

고3이라 공부 생각을 좀 해서 그런 걸까. 예진은 자조적인 웃음을 날렸다.

“공부해 봤자 갈 수 있는 학교도 별로 없는데.”

자조 섞인 웃음을 날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나 수능에서 찍신이라도 발동한다면? 한두 문제라도 더 맞춘다면? 그런 일말의 가능성을 또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예진은 서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자주 들르지만, 단골처럼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 서점 주인이 예진을 향해 무뚝뚝하게 인사를 했다. 예진도 주인에게 까딱 인사를 하고는 문제집 코너로 이동했다.

‘아, 이거 여기 있었네.’

예진은 자신이 풀던 문제집의 다음 버전인 파더텅 문제집을 펼쳤다. 국어, 영어, 수학 각 파트로 나눠진 미니 모의고사 킬러 파트 문제집이었다.

“!!”

문제집을 확인한 예진은 생각지 못한 숫자에 깜짝 놀랐다.

‘무슨 한 권에 만 원이야!?’

국어, 영어, 수학을 모두 구매한다면 3만 원이었다. 예진의 지갑에 있는 돈은 겨우 1만 원뿐이었다.

‘그래도… 한 권만 살까…?’

만약 그렇게 되면 이번 주 용돈을 모두 소진하게 된다. 집에 남은 라면이 있었나? 국 끓일 만한 재료는? 쌀은 있고… 반찬은…?

그런 여러 생각들을 하던 예진은 국어 문제집과 영어 문제집을 들고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서점 주인이 이쪽을 보는지 안 보는지를 슬쩍 살폈다.

서점 주인은 재미있는 예능이라도 보고 있는지, 스마트폰을 보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할까?’

결정을 내린 예진은 생각했던 국어 문제집을 들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는 영어 문제집을 들었다.

평소보다 더 심장이 뛰었다. 가방의 지퍼를 천천히 열었다. 서점에 있는 몇몇 손님들이 작은 소리로 수다를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로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서점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예진은 두 문제집을 들고서 어떻게 할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지금 이 두 권을 모두 풀어 보면 분명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효과적인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더는 나사 빠진 녀석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당당하게, 수능이라는 시험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그랬기에 예진은 두 문제집에 시선을 집중했다. 오롯이 예진과 두 권의 문제집만 어두운 공간 안에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의 소음들은 이미 예진의 귀에서 차단된 상태였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예진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영어 문제집을, 지퍼가 열린 가방 가까이로 끌고 갔다.

‘이, 이번만… 이번만…!’

그때, 누군가가 예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두 권 사려고요?”

예진은 화들짝 놀라 자신의 손목을 잡은 남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떨리는 동공으로 상대를 확인한 예진은 입을 벌린 채 뻐끔거렸다.

“서, 선…배…?”

예진은 눈앞에 서 있는 대학원생 선배를 확인했다.

“문제집 살 거죠? 제가 사 줄게요.”

동석은 자신있게 검은색 카드를 꺼내면서 말했다.

“쌤한테 지원도 받았어요. 그리고 이 두 권은 후배님한테는 별로 도움 안 될 거예요. 이거 킬러문항 문제집이잖아요.”

“…네?”

예진은 동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최상위권으로 올라가려면 킬러 문항을 정복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동석은 그게 잘못된 선택이라며 다른 문제집들을 하나씩 찾아서 꺼내 주었다.

아니, 문제집뿐만이 아니었다.

“국어는 숨클릭으로 하고, 영어는 마이스토리… 그리고 은장이가 추천한 인문학 책이랑 쌤이 추천해 주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동석의 앞에 선별해둔 책들이 쌓여 갔다.

“이거 다 사죠!”

“네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선별한 문제집과 도서들은 총 열 권이 넘었다.

“사장님! 이거 계산이요!”

“자, 잠깐만요 선배!”

“응? 왜 그래요?”

예진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동석의 팔을 붙잡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빛만을 보낼 뿐이었다.

왜 이러냐고.

나한테 왜 그렇게까지 해 주냐고.

잘못하면 형평성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니냐고.

지금 이 모든 상황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의문을 가득 담은 눈이었다.

“그냥요.”

“…네?”

“나 때가 생각나서요.”

더 이상 긴 설명을 하지 않은 동석은 검은색 카드를 들고 도서들을 계산했다. 그 모습을, 예진은 여전히 지퍼가 열린 가방을 들고 멍하니 서서 바라만 볼 뿐이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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