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놓아 주셔야 합니다.
특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모의논술 시간에 학생들은 집중해서 문제를 풀었다. 제시문 해설을 맡은 담당 교사들은 열성을 다해 제시문을 해석해 주었다.
“역사 지문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그중에서 차 선생과 최지은 선생의 강의가 단연 돋보였다.
차 선생은 학생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인터넷으로 배운 역사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제시문은 제시문에서만 해석을 해야 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절대 넣지 말 것을 강조했다.
최지은은 역사와 관련된 지문을 다른 지문이나 문제들과 어떻게 연결해서 읽으면 좋을지에 초점을 맞췄다. 역사와 관련된 글이 나오면 문제는 항시 역사만 해석하기보다는 다른 영역으로의 융합을 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자리가 상당히 재미있다면서 강의 자체를 즐기듯 이야기를 풀어갔다.
물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전 일정이 끝나고 점심시간, 우리는 강연을 마친 차 선생에게 수고 인사를 했다. 차 선생이 부끄럽다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감사합니다. 지은이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저분도 실력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만….”
최지은이 강의가 끝난 후 보여 주었던 가장 큰 문제점. 누군가를 의식하는 듯 시선이 불안했다는 점이었다.
의식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명백했고.
‘나영희….’
최지은은 강의가 끝난 뒤에도 나영희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듣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대답만 하는 최지은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박 선생에게 말했다.
“아직 기사 뜬 건 없죠?”
나와 이사장의 예상대로라면 아마 오늘 중으로 무언가 말이 나올 것이었다. 그래서 박 선생에게 특이사항은 없는지 물었다.
“네, 아직은요. 기자님한테도 연락 없었죠?”
나는 박 선생의 질문에 고개를 살짝 위아래로 움직였다.
“괜히 불안하네요. 할 거면 빨리 터트리지.”
“그러게 말이야. 대책도 다 세워 놨을텐데. 그렇지?”
홍 선생과 오 선생이 차례대로 말했다. 나는 어제 학생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오 선생에게 상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가 굳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지금 시점에서 그에게 많은 걸 알려 줄 필요도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책은 준비되어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다만….”
나는 곽형조를 비롯한 그들이 어떤 공격을 해 올지 생각해봤다. 나를 향한 공격도, 내 주변 교사들이나 학생들을 향한 비난도 모두 피해 갔다.
그럼 남은 건 하나였다.
‘아마도….’
“첨삭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가 와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다시금 강의실로 들어갔다.
“아무튼, 이따 뵙겠습니다.”
우리는 다 먹은 도시락을 정리하면서 각자 배정된 강의실로 이동했다. 차 선생은 나와 같은 강의실에서 첨삭을 해 주기로 되었기에 나와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는 배정된 강의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석기ㅇ… 차석기 선생님, 강명문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나영희, 최지은이 강의실에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도 하나둘 들어오는 강의실 안에서 차 선생의 어색한 웃음이 들려왔다.
* * *
첨삭 시간, 몇 명의 학생들의 수준을 확인한 나는 살짝 놀랐다.
“잘 썼네.”
강양외고, 춘영고, 원일고 학생들 중에서 논술 실력이 제법 괜찮은 녀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논술 실력을 갖춘 학생도 있었다.
“딱 하나. 3번 문제는 제시문을 기반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가) 제시문 이야기가 근거로 사용되기에는 빈약해. 여기를 보면….”
나는 학생의 답지와 문제를 번갈아 보여 주면서 더 나은 답변으로 적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아냐. 조금만 노력하면 논술 고득점 가능하겠다. 어느 학과로 갈 거니?”
“저 미디어… 아, 영어영문….”
“응? 미디어? 영문?”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학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일 가고 싶은 곳은 영어 분야이기는 한데….”
잠시 이야기를 망설이던 학생이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옆에서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나영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윤지야.”
“헉! 네, 네 쌤.”
“넌 미디어로 가야 한다니까? 아직도 영문과 생각하니?”
나영희가 윤지에게 다가와서 눈을 부라렸다.
“전공이 영어니까 미디어 공부하면 더 성공할 수 있어. 영문과로 가면 안 된다니까? 언제까지 고집만 부릴래?”
“그게… 학교에서도 영어 전공이기도 하고…. 전 영문학이 재밌는….”
작게 중얼거리던 윤지가 이내 침묵했다.
“그러니까 학생은 영문과를 가고 싶은데, 학교 선생님은 미디어로 가야 한다고 하시는 거구나. 그렇지?”
내 물음에 윤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학생은 강양외고 학생이에요. 논술 첨삭 다 하셨으면 다음 학생으로 넘어가시죠.”
“아뇨, 그냥 넘어가기는 어렵겠습니다.”
나영희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어제부터 궁금했었던 점을 나영희에게 던졌다.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이 질문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대체 왜 최지은 선생을 괴롭히는가. 아무리 입양된 딸이라고는 해도, 그건 부모의 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왜 강문고 선생님들에게만 공격적인가. 어제와 오늘, 그녀가 보여 준 언행들은 명백히 우리는 마치 적처럼 여기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방금 윤지라 불린 학생. 왜 학생의 진로를 구체적 이유 없이 결정짓고 있는가.
그런 여러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영희는 윤지에게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만 이해했다.
“왜 학생에게 그러냐고요? 당연하죠. 어설프게 인문학 공부했다가 나중에 밥벌이하기 힘든 거 몰라서 그래요?”
“스무 살 넘어가면 각자 본인들이 책임질 일입니다. 대학 졸업할 때쯤 후회하면 그때 코딩을 배우든, 창업을 하든,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요?”
나영희가 목소리를 높이면서 말했다.
“당신 같은 선생 때문에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는 진로는 못 찾고 타인이 강요하는 길로만 빠지는 거야.”
아, 그런 거구나.
나는 나영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강명문 선생도 그렇죠? 다 당신 실적 위해서 일했잖아. 학생들이 존경이나 하겠어요? 대학 잘 보낸다고 능사가 아니야. 교사란 자고로….”
“그래서 윤지도 최지은 선생처럼 만드실 생각입니까?”
갑작스런 내 반박에 나영희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뻥긋거렸다. 나는 최지은 선생을 잠깐 돌아봤다. 그녀 역시 놀란 눈을 하고서 내 시선을 마주했지만, 뭐라 의견을 내지는 못했다.
“윤지라고 하는 이 학생은 좋아하는 분야가 명확합니다. 윤지야.”
“네, 네.”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니?”
“아, 저 피츠제럴드 좋아해요!”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니?”
“저는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제일 좋아해요!”
윤지의 답변을 듣고 확신했다.
이 녀석은 정말로 피츠제럴드에 관심이 있다.
다른 작품도 아니고 피츠제럴드의 작품인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을 가장 좋아한다니.
대부분은 이 작품을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영화화 되면서 바뀐 버전이고, 진짜 원작 제목은 바로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이었다.
윤지가 이 작품을 언급하고, 좋아한다고 했다는 것 자체가 피츠제럴드에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보셨습니까?”
나는 의기양양하게 나영희에게 물었다.
“윤지와 이런 대화 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
“윤지가 좋아하는 분야는 명백합니다. 그런데 굳이 미디어로 보내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나영희가 두 손을 꽉 쥐고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은이는 원래 영어를 좋아했어.”
최지은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변했다.
“역사교육과에 간 건 저기 있는 차석기 때문이야. 처음에는 남자한테 홀려서 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야.”
나영희는 고개를 치켜들고 사시눈을 하고서 나를 노려봤다.
“스승이 제자를 제대로 인도해 주지 못해서 그런 거였어.”
“그게 무슨….”
“다른 학생들도 지은이처럼 되면 안 돼. 지은이가, 만약 영어교육과로 진학했으면 지금처럼 외고에서 비주류 과목이라고 무시 받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나영희는 최지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더는 최지은 때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 다시는 제자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 단 한 명의 제자라도, 미래에 무시받고 살지 않도록, 해 줘야 해. 내가, 강양외고의 진로진학부장이자 영어과 교사인 내가! 내가 학생들을 인도해 줘야 한단 말이야!”
강의실 내에 울려 퍼지는 절규를 들으면서 학생들과 교사들이 모두 숙연해졌다. 나영희가 가지고 있던 아픔들. 그걸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최지은을 잘못 인도한 사람. 그 사람이 강문고의 차석기 선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영희 선생님 의견을 틀렸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놓치고 있는게 있었다.
“뭐, 뭐라고?”
“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미워했는지, 그리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강압적으로 해왔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래, 여기까지는 모두 알았다.
그런데 정말 그게 진실일까?
나영희가 놓치고 있는 건 세 가지였다.
“최지은 선생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내 시선을 받은 최지은이 침을 꼴딱 삼켰다.
“고등학교 때 차석기 선생님, 좋아했습니까?”
“어… 아니요, 그땐 그냥 친한 친구였어요.”
“뭐라고!?”
마지막 반응은 차 선생이었다. 그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럴 만도 하겠지. 우리한테는 최지은이 자신을 좋아해서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진학했다고 말했으니까.
“그럼 언제부터 사귀셨습니까?”
“그… 대학교 2학년 때 엠티 가서….”
평범한 대학생 러브스토리다.
“보셨죠? 남자 때문에 동건대 역사교육과를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영희를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 그게 어쨌다고?”
“나영희 선생님. 선생님은 세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최지은 선생님이 차석기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건 대학생이 된 이후라는 점입니다.”
나영희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렇다면, 최지은 선생님은 왜 차 선생님과 같은 학교, 학과로 진학했을까요?”
“그니까 그게 남자에 홀려서 그런 거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되잖아!”
나영희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그러니 이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최지은 선생님이 학생 때 부모님을 잃었을 때, 나영희 선생님이 많은 도움을 주신 건 알고 있습니다.”
“….”
“그런데, 만약 강양외고를 떠나게 된다면, 최지은 선생님은 누구에게 마음을 줘야 했을까요? 누굴 기대고 의지해야 했을까요?”
나는 최지은과 차 선생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건, 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자신의 아픔을 모두 이해해 주는 친구 말입니다.”
“낯선 곳에서 마음을 열기가 어려우니까….”
차 선생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두 번째로 놓치고 있던 점. 그건, 최지은 선생님은 차 선생님을 정말 친구로서 믿고, 의지했던 겁니다. 이성으로서가 아니라요.”
어쩐지 차 선생은 조금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아무튼.
학생들과 교사들도 이제는 첨삭을 멈추고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최지은 선생님에 대해 나영희 선생님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뭔데?”
나는 최지은이 이번 논술특강에서 강의를 했을 때를 떠올렸다.
“최지은 선생님은 역사를 좋아합니다.”
차 선생의 다음 타자로 강단에 올라가서 강의를 하는 모습. 그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후배들에게 알려 주는 선배의 모습이었다.
순수하게 역사를 좋아하고, 그걸 누군가에게 알려 주고 싶어하는 사람.
그게 바로 최지은이라는 교사였다.
“그리고 나영희 선생님의 영향으로 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고요.”
“!!”
나영희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했다.
여러 심경이 복합적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놓치고 있는 세 번째. 최지은 선생님은 고등학생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고, 나영희 선생님을 보면서 교사를 꿈꿨습니다.”
최지은과 나영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좋아하는 분야인 역사와 교사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역사교육과에 진학한 겁니다.”
설명을 마친 후, 나영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나영희에게 반드시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던 바를 꺼냈다.
“청소년을 대하는 학부모 행세는 그만 두십시오.”
나영희가 보이는 건 정말이지 잘못된 학부모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학교 교사로서의 책임감까지 위에 덧입혀졌다.
그 결과, 자신을 모든 학생들의 부모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학생은 물론이고, 졸업생에게도 과도한 간섭을 해 왔다.
“이제 그만, 놓아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그만 멈추어야 했다.
털썩, 나영희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게 학생과 선생님, 모두가 발전하는 길입니다.”
조용한 강의실 안에서 시계초침 돌아가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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