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기대하시죠.
자리에서 일어선 학생들이 씨익 웃었다.
“앞으로 강문고의 위상을 더 높여야겠는데?”
“부정부패들도 싹 다 밝혀내야지!”
은장이와 정석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는 전국단위를 노려야겠습니다.”
“맞아. 그래야 장학재단이라고 할 수 있지. 안 그래요?”
명천이의 말에 채영이도 맞장구를 쳤다. 태성이와 정아도 도와주겠다며 밝게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믿음직한 얼굴들. 이사장은 졸업생들로부터, 이전에는 없었던 감정을 받은 모양이었다.
‘신뢰감.’
이사장의 얼굴에 전에 없이 환하게 미소가 번졌다.
‘그래서 그랬군.’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사장이 지금까지 학생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
단순히 돈과 인맥으로 학교를 구하고 싶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면서 소통하고, 교육으로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다.
그런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이 결과적으로는 강문고를 정상궤도로 돌려 놓고, 강진 장학재단을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강진 어르신처럼 교육으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좋게 바꾸고 싶다.
이런 가치관과 목표가 있었기에, 이사장은 지금까지 학생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었다.
“고마워요,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에이, 됐어요! 저희도 담임쌤 덕분에 학교 비리 캐는 거 적응했으니까요!”
정석이가 가슴을 탕탕 두드리면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근데 그거도 덕분이라고 할 수 있는 거냐…?”
태성이가 중얼거리자 녀석들이 한 번 더 낄낄 웃었다.
녀석들의 말을 듣던 나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사장을 바라봤다.
“그럼 새로운 학생들을 발굴해야겠군요.”
“맞아요. 그래서 논술특강 때도….”
나는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면서 말했다.
“강진 장학재단이 다시 생기면, 그때 추천할 만한 인원을 추려 봐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짐을 챙겼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봐야겠네요.”
“참, 그런데 굳이 이걸 여기서 보여 주신 이유가 있어요? 그냥 학교로 부르셨어도 됐을 텐데.”
은장이가 궁금했었다면서 물었다. 나는 무슨 당연한 걸 묻냐면서 답했다.
“보는 눈이 많잖아.”
“아.”
만약 학교에 녀석들이 우르르 들어왔다면, 그것만으로도 또 이목이 집중될 수 있었다.
그럼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모였다면? 혹시나 언론사 관계자들이 지나가면서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작당모의를 하는 건 아니냐고 오해를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목대에서 만나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나와 이사장은 논술 특강이라는 핑계로 이 자리에 온 것이었고, 학생들은 친구인 명천이가 있는 대학교라 자기들끼리 여행 겸, 친구도 보러 온 형태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와 진짜… 쌤, 조심성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정아가 혀를 내두르며 내 신중함을 칭찬했다.
“칭찬 고맙다.”
“아니 칭찬 아닌데….”
뒤로 나오는 말은 못 들은 척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진짜 가 봐야겠다. 곧 첨삭 시간이야.”
“네 쌤, 다녀오세요!”
이따 바비큐 파티라도 같이 하자는 녀석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자리를 이동했다. 이제 남은 건 논술특강을 잘 마무리하고, 강문고 교사들의 실력을 다른 학교 교사들로부터 인정받는 게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학생 발굴도 해 보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특강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홍 선생이 울먹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그러니까, 미술 교사가 이런 건 어떻게 아느냐, 누가 컨닝페이퍼라도 준 건 아니냐, 이러면서 공격을 받았다는 말씀이죠?”
쉬는 시간, 나를 비롯한 강문고 교사들은 특강이 열리는 강당 건물 바깥에서 음료를 마셨다.
“그렇다니까요. 홍 선생님이 설명도 다 잘 하셨거든요? 심지어는 미술 전문가만 할 수 있는 내용들도요. (마) 그림 제시문 속 인물의 구도, 색감을 토대로 그림이 갖고 있는 의미와 (가), (나), 제시문을 연결해서까지 설명을….”
박 선생은 홍 선생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얼마나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는지를 이야기했다. 확실히 박 선생에게 들었을 때, 홍 선생의 강의는 꽤 실력자의 강의였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다 끝나고 나왔을 때, 홍 선생에게 그런 거나 물었단 말이죠?”
“네. 좋은 의미로 물어본 게 아니고, 비아냥 대면서 물어봤어요. 미술 교사 주제에 이런 걸 알 리가 없잖아? 누가 알려 줬어? 이런 느낌이요.”
방금 전을 생각하면 그런 말을 했던 사람들 뒤통수를 때리고 싶다면서 손을 휘두르는 박 선생이었다.
“학생들 반응도 엄청 좋았는데, 아오!”
“진정들 하게. 아마 미술 교사임에도 자기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강의를 한 홍 선생을 시기해서 그런 거니까.”
오 선생이 커피를 마시면서 침착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의 한쪽 손에 들린 엑스칼리버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로 보아, 그 역시 분노가 상당한 듯 보였다.
“누가 그렇게까지 공격했습니까?”
“누구긴 누구겠어요. 그 세 사람이죠.”
아마 강양외고의 나영희, 춘영고의 조부겸, 원일고의 한지현인 모양이었다.
“이상하군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교사들에게 말했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를 이렇게까지 공격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도 쪼잔한 공격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실제로 박 선생에게 들은 공격들은 조금 민망하다 싶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구체적인 실력에 대한 문제라던가, 강의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미술교사니까 이런 걸 알 리가 없다는 식의, 원색적인 표현들뿐이었다.
“그건….”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차 선생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가 머뭇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물었다.
“뭔가 더 있습니까?”
“네? 아, 아뇨, 그… 아무것도 아닙….”
그의 반응이 다소 이상하게 보이자 모두의 시선이 차 선생에게 집중되었다. 차 선생이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조금 민감한 문제인 것 같아서… 모른 척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부탁에 알겠다며 동의를 했다. 헛기침을 한 번 한 차 선생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지은이와 저와의 관계… 아까 말씀드린 내용 있지 않습니까?”
“네.”
“그게 다는 아닙니다.”
대답을 하던 홍 선생이 살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저와 지은이가 사귀었다는 것과 함께 나영희 선생님과의 관계도 끼어 있습니다.”
“설마 삼각관ㄱ….”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용히 해 보세요.”
홍 선생의 말을 끊은 차 선생이 홍 선생에게 핀잔을 주었다.
“크흠, 아무튼… 나영희 선생님은 지은이에게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입니다.”
“은인?”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묻는 나에게 차 선생이 말했다.
“지은이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지은이가 방황하고 있을 때, 나영희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나영희는 강양외고 졸업생인 최지은을 유독 아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주된 이유는 하나였다.
“나영희 선생님은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강양외고에서의 지분이 상당하신가?”
“그건 맞습니다만, 이사장의 가족이라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학교에서 나영희 선생님의 실력은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합니다. 강문고의 오 선생님이나 강 선생님 같은 분이라고 말씀드리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차 선생은 나영희가 강양외고의 인기 교사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추가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다만, 언젠가부터 실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정도가 심해졌고, 성격도 좀… 그래서 학교에서의 입지도 서서히 줄어들었죠.”
“학생들이 부담스러워했겠군요.”
박 선생의 말에 차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지은이는 나영희 선생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공부도 잘 했고, 실제로 저와 같이 동건대 사범대에 들어가기도 했고요.”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는 혹시나 누군가 엿듣고 있지는 않은가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차 선생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은이가 진학한 학과가 저와 같은 역사교육과라는 점이었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영어가 아니어서 그런 건가요?”
“그게 아니라, 외고에서는 비주류 교과목이었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홍 선생의 말에 내가 대신 답했다. 그러자 차 선생이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최지은 선생님은 나영희 선생님을 엄청 따르셨다면서요? 왜 영어교육과를 가지 않았나요?”
“그게… 그….”
차 선생이 대답을 망설였다.
“아….”
“혹시….”
“에이 설마….”
홍 선생, 오 선생, 박 선생이 차례대로 차 선생을 향해 눈을 흘겼다.
“당시 저를 좋아해서 저랑 같은 학교, 학과 가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덕분에 나영희 선생님과의 관계도 엉망이 되었겠군요.”
“네. 아마 저를 엄청 미워하실 겁니다….”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반응에 낄낄 웃는 건 오직 나 한 명뿐이었다.
“아니, 지금 이게 웃겨요?”
“웃기지 않습니까? 진짜 자식도 아닌데 뭘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기대한 걸까요. 다들 자신만의 삶의 방식이 있는 건데 말입니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박 선생에게 지금의 상황이 왜 어이가 없는지 간략히 설명을 했다.
“뭐, 하다못해 양딸로 들어간 것도 아니면서….”
“아, 지은이는 나영희 선생님의 양딸이 맞습니다.”
“….”
이번에는 나도 입을 떡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교사들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꿈뻑거리고 있었다.
“대학 졸업하기 직전에, 저랑 헤어지고 그때 입양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와… 막장드라마네요 이거.”
내 말에 다들 세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거군요.”
시간순으로 나열하면 어려운 건 아니었다.
1. 차 선생님은 최지은 선생님과 고등 동창이자 대학 커플이었다.
2. 고등학생 시절 차 선생님을 좋아했던 최지은 선생은 차 선생과 같은 학과인 역사교육과로 진학했다.
3. 최지은이 당연히 영어교육과로 진학할 거라 생각했던 나영희는, 차 선생을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4. 그러다 차 선생과 최지은이 헤어지면서 최지은은 나영희에게로 돌아갔다.
5. 그때 최지은은 나영희에게 입양이 되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나는 황당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지간한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사연이 아닌가.
“그런데 아까 최지은 선생님은 차 선생님을 엄청 반가워하시던데요?”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홍 선생에게 공격적인 건 이상해. 또 뭐가 있나?”
홍 선생과 오 선생의 물음이었다. 그것도 매우 정당한 질문이었다.
“그게….”
더 설명을 이어 가려던 차 선생의 말은 특강 스태프의 등장으로 중단되었다.
“이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들, 들어와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스태프의 말을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기지개를 한 번 쭉 폈다.
“아무튼,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겠군요.”
강당 내부로 들어가면서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이번에는 또 누구한테 연락하시려고요?”
“윤 선생님입니다. 이제 곧 도착하실 때가 됐으니까요.”
이어지는 시간은 첨삭시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모의논술이 바로 수리 논술, 과학 논술이었다.
즉, 지금쯤 윤 선생은 한목대를 향해 열심히 운전을 하고 있을 터였다.
[어, 무슨 일?]
“어디쯤이십니까?”
[거의 다 왔어. 지금은 잠깐 주유소 들렀어. 왜?]
윤 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생각하고 있던 몇 가지를 꺼냈다.
“오시는 길에 몇 가지 부탁 좀 드리고 싶어서요.”
[강 선생이 뭘 부탁한다 그러면 항상 불안하단 말이야.]
윤 선생이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말해 봐. 뭔데?]
“오시는 길에 서윤수 교수님과 잠깐 만나실 수 있을까요?”
처음 한목대 특강을 준비했을 때, 서 교수와 만났었고, 이후에도 이야기를 주고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윤 선생도 서 교수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서윤수 교수님? 갑자기 전화 드리면 이상하게 보지 않으시려나.]
“간만에 인사드린다 생각하시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거 하나만 요청 주시겠습니까?”
나는 윤 선생에게 서 교수를 만나 대화를 하고, 무언가를 요청하라는 부탁을 했다.
[교수님들을?]
“네, 맞습니다.”
그는 조금 의아해하면서 이내 알겠다고 답했다.
[그러지 뭐. 어차피 시간도 남았고. 교수님 드릴 음료수 세트라도 사 가야겠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윤 선생과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첨삭을 기다리고 있는 강당으로 들어갔다.
“오, 공교육의 희망 오셨네.”
나를 발견한 조부겸의 말에 나영희와 한지현, 최지은의 시선도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웃으면서 자리로 향했다.
“첨삭 시간에는 강명문 선생님 실력 좀 볼 수 있겠지?”
나영희의 말에 나는 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나를 지켜보는 세 교사의 얼굴이 하이에나처럼 변했다.
“누가 얼마나 더 첨삭을 잘 해 주고, 학생들에게 나은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가. 이걸 보시려는 거죠?”
“잘 알고 있네요. 기대할게요.”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한지현이 답했다. 세 사람을 보면서 나는 오른쪽 어깨를 슬쩍 돌리고, 강당에 모여 있는 학생들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나도 이들과 승부를 볼 때가 왔다.
아, 물론 논술만 가지고 승부를 볼 생각은 없었다.
“기대하시죠. 논술첨삭 시간… 아니, 상담 시작입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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