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미안해요.
우리는 열려 있는 파일을 차근차근 확인했다.
우선, 강진 장학재단의 설립부터였다.
6.25 이후 강진 어르신은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을 갖고 강진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교육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죠. 그래서 작지만 장학재단을 만드셨어요.”
처음에는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기업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꽤 규모가 커졌다고 한다.
“그리고 초창기 장학재단 멤버 중 주현서 이사도 있었어요.”
주현서는 강진에게서 직접 수업을 받아 공부를 했던 학생이었다.
대학교 제자거나 이런 건 아니었지만, 주현서는 강진에게 별도 교육을 받았고, 강진과 뜻을 같이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어요.”
강진은 장학재단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자 이제는 학교도 설립하고자 했다. 기업들의 후원과 동시에 집안의 돈과 개인이 쌓아 둔 재력도 충분했다.
그렇기에 강진은 강문고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30년 전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죠.”
그 시기에 맞춰서 장학재단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어요. 그저 할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니, 제자니,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사람들이 나타났죠.”
주현서는 그 시점에서 새롭게 나타난 인물들과 함께하기로 뜻을 바꿨다고 한다. 결국, 개인의 욕심을 키우기 위해 스승의 뜻을 버린 것이었다.
“그럼 그때 왔던 사람들이 장학재단에 뭐라도 했던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장학재단과 강문고에 투자했던 기업가들이거나?”
정아와 은장이의 질문에 이사장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런 사람들은 일부였어요. 오히려 장학재단을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사람들이 많았죠.”
이사장의 말에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바로 되었다. 반면, 학생들은 여전히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어… 장학재단을 노려요?”
“왜요? 굳이?”
녀석들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장학재단 같은 교육복지사업 단체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좋으니까.”
그 말에 녀석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진짜…요?”
동석이가 그게 말이 되냐면서 물었다.
“지금 강문고 사건들 보면 얼추 이해가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있었던 강문고의 부정부패 사건들. 그 일들을 떠올리면, 장학재단의 경우에는 더 많은 정치적 접근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학생들도 그제서야 대충 이해가 된다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면 이 사람들 때문에 장학재단이 사라진 거예요?”
은장이의 질문에 이사장이 답했다.
“네, 맞아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이사장을 바라봤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학생들에게 GF파일을 오픈시키자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학교의 방향성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이걸 다른 사람도 아닌, 졸업생 학생들과 함께 오픈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사장님, 이 녀석들에게 이걸 보여 주시는 이유는….”
“말씀 드렸듯이, 믿을 수 있으니까요.”
이사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가르침도 있었고요.”
“어떤 가르침이었습니까?”
내 질문에 이사장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학생들과 함께해라. 여차할 땐 어른이 아니라 학생들을 믿어라. 학생들이 너를 도와줄 거다.”
이사장의 말에 졸업생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래서 강 선생님이 학생들을 입시로 도와주고, 정신적으로도 도와줄 때,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거였죠.”
나는 어느 정도 의문이 해소가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또 하나의 의문.
지금까지 이사장은 자신의 사비까지 털어 가면서 학생들을 향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돈은 모두 어디에서 나온 걸까.
“이사장님의 그 재력은 어떻게 된 겁니까?”
“옛날에는 강남이 허허벌판이었던 거 아시죠? 그때 할아버지가 강문고랑 같이 올린 빌딩만 3개는 되고, 그게 지금은 제 거거든요, 호호호.”
“헐….”
“갓… 물주…?”
강남서초권에서 살아온 학생들에게도 이사장의 재력은 정말이지 놀랄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강남에 빌딩이 3채나 있다니. 그러면 지금까지 상당한 부를 축적했을 터였다.
“거의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이시네요.”
“중견기업 수준일 수도 있겠는데요?”
정석이와 은장이가 입을 떡 벌리면서 말했다.
나 역시도 놀랐다. 설마 이사장이 이 정도까지의 재력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내가 더 놀란 건, 이사장의 돈 씀씀이였다.
돈이 많은 것과 돈을 많이 쓰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이해는 되지 않는군요. 이사장님이 굳이 이렇게까지 돈을 많이 쓸 이유가 있었나요?”
지금까지 그녀가 다른 건 몰라도 학생들을 위한 지원 하나만큼은 최선을 다해 왔었다.
지금 앞에 있는 녀석들을 위해 GGS 장학제도도 만들어서 노트북과 장학금을 지급했다.
올해 2학년 학생들은 수학여행비 전액 지원, 책걸상 교체까지 있었다. 책걸상 교체는 이사진의 지원금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 돈에도 이사장의 지분이 20%는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장학재단을 좀 더 설명 드리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이사장은 장학재단 명단, GF파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제 인맥, 궁금하지 않았나요?”
나도, 학생들도 모두 궁금해했던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이사장이 보여 줬던 수많은 인맥들. 대체 어디에서 나온 인맥들이었을까.
“궁금합니다.”
내 말에 이사장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동석이에게 다가가서 잠깐 노트북을 빌리겠다며 마우스를 잡았다. 동석이가 살짝 몸을 뒤로 뺐고, 이사장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거 보여요?”
“제주도의 진성수 사장님?”
은장이가 이름을 알아보고는 입을 턱, 막았다. 제주도 진성식당의 진성수 사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분도 강진 장학재단 출신이에요!?”
“네. 정확히는 장학재단의 직원으로 저와 함께 일을 했었죠. 길지는 않았지만요.”
은장이가 놀라면서 이사장이 움직이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석이가 물었다.
“혹시 이 분은 Next AI의…?”
“역시 동석 학생은 알아보네요. 맞아요.”
글로벌적으로 AI를 연구하고 있는 회사로 유명한 넥스트 에이아이. 그곳의 대표 개발자도 명단에 있었다.
“제아 리조트 대표님 아니야!?”
채영이의 말에 학생들의 시선이 한 번 더 노트북 모니터로 쏠렸다.
“대박… 천한도 대표님은 장학생이었어요?”
“네. 제가 공부도 많이 알려 줬었고요.”
아, 그때 말했던 은혜라는 게 이거였나.
수학여행을 갔을 때 만난 천한도 대표는 이렇게 말했었다.
-예전에 이사장님께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형편이 어려운 천한도를 위해 강진 장학재단이 학비를 비롯한 교육비를 지원해 주고, 이사장이 과외도 해 주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충분히 은혜라 할 만했다.
“이제 제 인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시겠죠?”
즉, 이사장의 인맥들은 모두 과거 장학재단의 혜택을 받은 ‘전’ 장학생들이거나 뜻을 같이 했던 ‘전’ 직원들이었다.
그럼 이만 한 인맥들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지금까지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셨던 이유가 있습니까? 이 정도의 재력과 인맥이면, 제가 오기 전에도 무언가 해 보실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내가 회귀하기 전, 즉 이전 삶에서 이사장은 이사진들로 인해 퇴진을 당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돈, 인맥이면, 충분히 이사진들을 압박하고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할아버지께서 당부하신 게 있어요.”
이사장은 할아버지를 떠올리 듯 고개를 들었다.
“돈과 인맥으로 모든 걸 해결하지 마라.”
어쩐지 양심이 쿡쿡 찔리는 말을 하던 이사장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돈과 인맥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사람이 나타났죠.”
“아! 쌤이군요!”
태성이가 키득거렸고, 은장이도 풉, 하면서 웃었다.
“이것들이, 웃어?”
“호호호, 그런데 정말이에요. 강 선생님은 강문고에 혜성처럼 나타나신 한 줄기 희망 같은 분이었으니까요.”
낯간지러운 별명을 있는 대로 갖다 붙이는 이사장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사장은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할아버지는 돈과 인맥으로 만들어진 관계는 금방 끝난다고 말씀하셨어요. 실제로, 장학재단은 돈과 인맥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무너졌고요. 그 결과 할아버지의 명예도 실추되었죠.”
“좋은 의미로 만든 장학재단이 비리의 온상이 되다가 사라졌으니, 그렇겠군요.”
이사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전 기억을 떠올리는 듯 보였다.
“강 선생님 말씀대로예요. 그래서 생각했죠. 강문고의 위상을 높이고 다시 강진 장학재단을 설립해서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는 것. 그리고 강문고 학생들뿐 아니라 전국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도움을 주자고.”
이사장은 자신의 목표를 이야기하면서 숨을 삼켰다.
“그게 제 목표예요.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이사장에게 집중했다.
“그걸 이루기 위한 발판들이 모두 무너지고 있었어요. 더 이상 수습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확실히, 지금까지 밝혀진 이사진과 교사들의 부정부패는 생각 이상으로 많았고, 질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이사진들…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다들 과거에 한가락 하셨던 분들이에요. 그분들 인맥, 재력, 권력도 만만치 않아요.”
이건 예상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저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숨죽이고만 살았죠. 만약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사진 회의도 열 수 있고….”
“마음에 안 들면 이사장 자리에서 쫓아낼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내 말에 이사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악독한….”
“그런 사람들이야. 어떻게든 권력과 돈을 유지하려고 더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 그런 놈들.”
태성이가 주먹을 쥐고 분노했다.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작년에 강 선생님이 나타났고, 여기 있는 졸업생 여러분들… 학생들의 변화를 이끌어 가셨어요.”
동석이, 은장이, 정석이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학생들이 나타났죠. 다른 사람들은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실적들이 생겨났어요. 내신이 낮아도 명문대에 합격했고, 공부만 잘 하고 정신력이 부족한 학생들은 정신력을 키워 주기도 하셨죠.”
명천이도 과거가 생각났는지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리고 실적이 많아지는 시점에서, 점차 강 선생님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온갖 부정부패의 흔적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죠.”
내 말에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제가 학교는 마지막 보호장치라는 표현을 했었잖아요?”
“네, 기억납니다.”
“그 보호장치를 지켜 주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는 사람. 그게 강 선생님이에요.”
이사장은 작년, 중국집에서의 대화를 꺼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사람만이 최고의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 주셨죠.”
“하긴, 작년에 쌤 실적이 진짜 대단하시긴 했죠.”
동석이의 말에 다른 녀석들이 일제히 반응을 했다.
“맞아, 맞아. 우리 덕분에 쩔었지.”
“내 덕분에 문과쌤인데도 의대합격생 실적도 생기셨고.”
“나는 서울한국대!”
“급하게 준비해서 합격한 저도 있고요.”
“나도! 수능 끝나고까지 면접 준비했잖아!”
“생각지도 못한 국인대 들어간 것도 역전 케이스 아닌가?”
차례대로 정석, 명천, 은장, 정아, 채영, 태성이였다. 나는 녀석들을 바라본 후 코웃음을 날렸다.
“그게 왜 너희들 덕분이냐? 내가 잘 한 거지. 대학생 되니까 오감 프로젝트가 그립냐?”
““됐거든요!””
그러면서 녀석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웃고 있는 졸업생들에게 이사장이 고맙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학교는 어른들, 교사들만으로는 바꿀 수 없어요.”
갑작스레 고개를 숙인 이사장을 보면서 녀석들이 당황해했다.
“이, 이사장님!”
“이사진, 이사장만으로도 바꿀 수 없어요.”
은장이가 황급히 이사장의 허리를 잡고, 이러지 마시라며 이사장을 말렸다. 그럼에도 이사장의 허리는 굽혀진 채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정말 미안한 부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사장은 고개를 들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학교는 학교를 다니는, 학교를 졸업한 강문고 학생들, 졸업생들이 함께해야만 바꿀 수 있어요. 저는 그걸, 강 선생님을 보면서 배웠어요.”
그 말을 들은 녀석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솟아났다.
“실력과 인성으로 학생들을 변화시켰고, 그 힘으로 학교를 바꾸는 것. 더 이상 강 선생님 한 명에게만 맡기지 않을 거예요. 이제는 확실하게 학교를 바꿔야 하는 시기가 왔어요.”
이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장이와 정아가 빨리 고개를 드시라면서 재촉했다.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여러분들부터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은장이와 정아를 향해 빙긋 웃어보이고는 주변에 앉아 있는 우리를 향해 말했다.
“강문고를, 도와줄 수 있을까요?”
잠시간,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가 모여 있는 벤치를 중심으로만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제일 먼저 깨뜨린 건 동석이였다.
“당연하죠!”
녀석의 말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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