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아빠의 코스프레 (3)
교무실에는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민주는 여전히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날리고 있었다. 오성주는 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태웅이와 은솔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던 중 태웅이가 먼저 움직였다.
“저….”
슬며시 앞으로 걸어간 태웅이가 오성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네는?”
“아, 저는 이태웅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담임쌤 덕분에 옥상에서 구출된….”
“아… 그럼 자네가 그때의 그….”
오성주도 태웅이의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누군지 알겠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씀대로 했을 때 잘못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분명 민주 아버님께서도 도움이 되실 겁니다.”
“….”
여전히 고민하는 듯 보이는 오성주를 향해 민주가 몸을 훽 돌렸다.
“됐어, 태웅아. 나도 이런 아빠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민주야…!”
오성주가 당황한 듯 고개를 들었다.
“지금 와서 이야기해 봤자, 분위기에 휩쓸려서 하는 것뿐이잖아? 그런 거 듣고 싶지 않아.”
이미 마음을 정한 듯 민주가 교무실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깐, 잠깐만!”
은솔이도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웠는지 민주를 말리러 달려갔다.
“아저씨, 제발요.”
오성주는 동공이 풀린 듯 멍하니 태웅이를 바라보았다.
“진심을 담아서 사과하세요. 그러면 될 거예요.”
“…그거면 괜찮을까?”
그 말에 태웅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민주는 그럴 거예요 분명.”
오성주는 딸이 나간 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 밖으로 향했다.
“민주야!”
나도 그 뒤를 따라 나가보았다. 그러자 교무실 앞에서 은솔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민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쫌! 쫌만 더 기다려 보자. 응?”
“배은솔, 너까지 왜 그래? 됐다잖아!”
“에이 그러지 말고. 담임쌤이랑도 이야기를 더….”
나는 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녀석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민주야.”
그 고갯짓을 신호로 여겼는지, 오성주가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복도에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로 쾅! 무릎을 꿇었다.
“우리 딸, 아빠가 미안하다.”
“…그걸 어떻게 믿어?”
“정말 미안하다. 앞으로는 모두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게. 이 정치판이 어떤 곳인지, 나와 네 엄마가 지금까지 너한테 알려 준 내용들이 전부 무엇 때문이었는지, 전부 다 알려 줄게.”
민주는 오성주의 말을 듣고는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지금.”
오성주가 하고자 하는 말. 그건, 부모님에게 이용당한 학생에게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는, 회고의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이 진실을 이야기하는 시간은 민주에게 있어 괴로운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몇 가지만 이야기해 줘.”
“…여기에서?”
“응. 내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담임쌤이 있는 여기에서. 그래야 믿을 수 있어.”
그러나 때로는 그런 솔직함이 최선의 방법이 되기도 했다.
지금의 민주가 딱 그러했다.
부모님이 생각했을 때 최선의 방향으로 키워진 학생들.
강남서초권 학생들 중에는 그런 학생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삶을 원하지는 않았다.
특히, 민주처럼 주체성이 강한 학생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경영으로만 이야기를 많이 했던 건… 로스쿨 때문이 맞아.”
오성주는 마치 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모두 고해성사라도 하듯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딸을 이 동네 학교로 보내려고 했던 것도, 강문고가 최고 명문이었기 때문이 아니야.”
“그럼?”
“강남구청장은 경쟁이 심해서 서초구청장을 목표로 했으니까. 내 딸이 학교를 다니는 지역의 구청장이라면, 교육 정책도 손볼 수 있고 해 볼 만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어. 겸사겸사 지역구의원 딸이라고 하면 학교에서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것 같았고.”
“뭐, 뭐라고요!?”
오성주의 말에 은솔이가 말도 안 된다며 입을 틀어막았다. 태웅이도 부모님에게 강요받았던 지난날이 떠올랐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두 학생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른침을 삼킨 오성주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미안하다. 아빠는… 너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모두 내 욕심만 채우려는 거였어.”
“….”
“미안하다….”
오성주의 무릎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의 눈물이 아니었다.
“…용서 안 해.”
“그래. 용서 안 해도 된다.”
민주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소매로 훔치면서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지켜볼 거야.”
“달라질 거야. 오늘 이후로… 우리 딸이 하고 싶은 일, 적극적으로 응원해 줄게.”
“아빠 일 도와주는 일 다시는 없을 거야.”
“그래. 그럴 필요 없어.”
민주와 오성주가 잠시간 침묵했다. 태웅이와 은솔이가 어떻게 해야 하냐며 나를 돌아봤다.
나는 녀석들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민주에게 말했다.
“민주야.”
“…네, 쌤.”
“경영학과 진학하자.”
“…로스쿨은 싫어요.”
민주의 말에 내가 코웃음을 날렸다.
“미쳤냐? 내가 너한테 로스쿨 추천하게?”
“…네?”
“넌 법을 전문적으로 배울 만한 인재가 아니야. 빨빨거리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지, 언제 법 공부하고 있을래? 이 기업, 저 기업 돌아다니면서 컨설팅도 해 주고, 사회에 무엇이 부족한지 알아낼 거 아냐? 그런 걸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기업, 만들어야지?”
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자 민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그 기업의 첫 후원자는 내가 되어 주마.”
“킥… 쌤, 진짜죠?”
“그럼! 나랑 이사장님이 최초 후원자가 될 거니까, 그만큼 너도 필사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알았냐?”
“또 이사장님까지 껴서….”
“쌤 월급 적잖아. 어쩔 수 없….”
중얼거리는 태웅이와 은솔이를 향해 종이몽둥이를 한 대씩 날렸다.
“끄응….”
이마를 부여잡는 은솔이를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오성주를 돌아봤다.
“민주 아버님도 동의하시죠?”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양보할 수 없겠군요.”
오성주가 민주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 기업의 첫 후원자는 선생님이나 이사장님이 아닌, 제가 되어 줄 겁니다.”
그 말에 민주가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쪼잔하게 후원하기만 해 봐.”
“그때까지 돈 열심히 모아둘게.”
“불법적으로 모으지 말고.”
“아빠가 언제 불법적으로 돈 모으는 거 봤니? 아빠 용돈에서 조금씩 모아둘 테니까 걱정 마.”
이제야 조금씩 웃음을 찾은 두 부녀를 보면서 속으로 안도했다.
“그럼 다시 교무실로 들어가시죠.”
“아, 네. 상담 도중이었죠.”
“민주도. 이제 제대로 된 상담 해 보자.”
나는 오성주와 민주를 교무실로 다시 안내했다. 그리고 태웅이와 은솔이에게는 그만 올라가도 된다고 말했다.
“쌤, 프린트물 옆 책상에 올려 뒀어요.”
“그래, 고맙다.”
태웅이의 말대로 수행평가 종이들이 내 책상 옆자리에 올려져 있었다. 그 종이들을 챙기면서 민주와 민주의 아버지 앞에 환한 웃음과 함께 앉았다.
“그럼 서울한국대 전형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 * *
민주의 상담은 약 삼십여 분 정도 이어졌다.
이미 알려 준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현재 민주의 상황, 부족한 학생부 내용, 자기소개서에서 어필할 만한 소재들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상담이 끝날 때쯤 되자 오성주가 말했다.
“허어… 방금 전에 분명 상담을 들었는데, 지금 이 상담과 비교할 바가 못 되는군요.”
“방금 전에는 민주의 방향성에 대해 아버님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셨으니까요. 자녀의 상황, 가치관, 희망 진로 로드맵을 이해하신 지금이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니까요.”
내 말에 민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경영학과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가 로스쿨 때문만이 아니라는 거, 이제 알겠지?”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정말이지, 아빠로서 부끄러워진다.”
오성주는 부끄럽다면서 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앞으로 민주 응원 많이 해 주세요. 그리고 세 번째 조건은….”
꾸벅 인사를 하던 오성주가 고개를 다시금 들었다.
“참, 세 번째 조건이 있었죠. 그건 무엇입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민주에게 눈빛을 보냈다.
“네, 먼저 올라가 있을게요.”
눈치가 빠른 녀석답게 한 번의 눈빛만으로도 내 의도를 정확하게 캐치해 냈다.
민주가 교무실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오성주를 향해 살짝 이동했다.
“저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정치적으로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오성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현 상황에서 강문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대응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건 저 같은 교사보다는 아버님이 더 잘 아실 것 같거든요.”
오성주는 현재 강문고의 상황이라는 말에 내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얼추 이해한 모양이었다.
“설마….”
“민주 아버님. 저는 이 학교를 지킬 겁니다.”
복수와 함께, 라는 속내를 숨기고 오성주에게 세 번째 조건을 이야기했다.
“저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해 주세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아버님을 믿을 수 있겠다 판단이 되면, 그때 교육정책 논의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오성주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딸과 자칫 잘못하면 완전 척 지고 살 뻔했는데, 그 정도가 뭐 어렵겠습니까! 편안하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밝게 웃는 그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강문고의 상황들을 그에게 설명했다.
각종 비리들, 이사진의 횡포, 그 사이에 있었던 이사진 중 두 명의 퇴진, 남은 이사진의 목적 등.
GF파일은 혹시 몰라 말을 아꼈다.
내 설명을 쭉 들은 오성주가 자신의 턱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렇군요… 그런 상황이라면….”
오성주가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는지 슬쩍 살피고는 말했다.
“저라면 충원을 하겠습니다.”
“충원이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나를 보면서 오성주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러니까 관선이사를 파견할 것 같다는 뜻입니다.”
“이사진 두 명이 사라졌으니, 그걸 채우기 위한 방편이겠군요.”
“정확하십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다양한 시뮬레이션들을 돌려보았다.
이사진은 지금 자신들의 세력이 줄어드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그 세력을 다시금 채우기 위해 액션을 취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액션은 그들이 직접 취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성주의 말대로 내가 이사진이라면, 직접 관선이사를 요청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관계자들 중 누군가겠군요.”
“그럴 겁니다. 그것도 그들이 쉽게 조종하기 쉬운 사람일 겁니다.”
이사진이 쉽게 조종할 수 있고, 학교의 관계자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
그런 인물로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문제가 터졌다 싶으면 꼬리 자르기로 도망쳐야 할 테니까, 그런 인물을 내세우겠군요.”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말입니다.”
오성주의 조언을 모두 들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강 선생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일어나서 옷을 정리하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저도 여러 사건들이 있고, 딸이 다니는 학교이기도 해서 조사를 해봤습니다. 이사진들이 누구인지, 이전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런 거라면 얼추 알고는 있다.
“그 사람들… 꽤 큰 뒷배가 있습니다. 저도 윤곽만 잡았을 뿐입니다만….”
오성주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이사진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곽형조라는 사람. 그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이사진이 지금까지 휘두른 권력들. 그게 간단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
그들의 뒤를 봐주는 제법 큰 뒷배가, 곽형조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성주는 자기 나름대로 그런 정보를 수집해서 나에게 알려주었다.
순수하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진심으로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성주의 눈빛을 보면서 천천히 짐을 챙겼다.
“교육정책 논의는 얼마간 더 지켜보고 가능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민주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신 건지,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액션이었는지 판단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짐을 챙겨서 이동하려는 동시에 그를 향해 말했다.
“민주, 응원 많이 해 주셔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오늘 제 상담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딸의 상담을 해 주어서 감사하다가 아니라, 자신을 상담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오성주의 인사를 받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을 담은 채로 교무실 밖으로 나와 생각해 두었던 인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내가 향할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뚜벅뿌덕 복도를 걷다가 목표한 장소에 도착했다.
벌컥, 이사장실 문을 열자 온화한 표정의 이사장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얼굴의 한명심 교감이 온통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가, 가, 강 선생!?”
나는 한명심이 서 있는 자리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들고 있던 종이몽둥이를 주머니에서 꺼내 걸어가자 한명심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쾅!!!!
이사장실 한가운데에 자리한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면서 한명심을 노려봤다.
“파일은 찾으셨습니까?”
내 서슬 퍼런 눈빛을 받은 한명심의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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