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치동 클래스-187화 (187/252)

187화. 아빠의 코스프레 (2)

민주가 아버지와 함께 강명문과 상담을 받고 있을 때, 태웅은 친구들의 수행평가 발표 자료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야, 나 잠깐만! 한 줄만 고칠게!”

오늘 실시되었던 국어 시간 수행평가는 ‘나의 아름다운 고교시절 에세이’였다.

이미 발표는 끝났지만, 에세이 완성본을 오늘 밤 10시 전까지 담임선생님께 제출해야 했다.

때문에 시간이 있는 학생들은 지금 방과 후에도 자리에 남아서 내용들을 수정하고 있었다.

“다 걷었어?”

태웅이 한참 친구들의 에세이 완성본을 걷고 있는데, 민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상담 벌써 끝났어?”

은솔이 의아하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빠랑 쌤이랑 두 분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봐.”

“와, 기사에 나온 그거? 정책 논의였나?”

민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아무튼, 그거 다 걷은 거 맞지?”

“응. 여기.”

태웅은 모아둔 A4용지를 민주에게 건네주었다. 학급 반장인 민주가 정리해서 강명문에게 제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이 갈까?”

“아냐. 나 혼자 갈게.”

“에이, 그러지 말고. 나도 같이 갈게.”

태웅과 은솔이 웃으면서 교실 밖으로 나섰다. 민주는 둘의 배려를 거절하기를 포기하고 미소를 지었다.

* *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걸 기반으로 의원님의 이미지를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요.”

나는 오성주를 향해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확실하게 말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려던 딸이 큰 뜻을 품고 법조인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딸의 아버지이다. 지금까지 쌓아 둔 청렴한 이미지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최적의 조건 아닙니까?”

내 말에 오성주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이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다는 듯 목덜미에 핏줄이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님은 민주에게 경영학과를 강요했던 겁니다. 아니,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 주셨겠죠. 시사에 관심이 있다? 경영적 마인드로 해결해 보는 게 좋다. 사회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그럼 그 정책을 기업과 연결 지어 봐라.”

“말씀이 너무 심하신….”

“그렇지 않고서는 민주가 저렇게 다른 학과는 생각하지도 않고 경영만 생각할 리가 없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오성주는 나를 보면서 어디 한번 말해 보라며 두 눈을 부라렸다.

“민주는, 건축에도, 외식경영에도, 일본어에도, 한국어 교실에도, 공학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뭐라고요?”

민주와 이번 학년에 같이 활동을 해 보고, 수업을 해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민주는 정말이지, 호기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고교시절 에피소드는, 작년에 은장 언니랑 했던 시사RPG대회 준비입니다!

오늘 있었던 국어 수행평가가 시간이었다.

‘나의 고교시절 에세이.’

다른 녀석들이 모두 3학년 활동을 꺼내서 들고 올 때, 민주만이 유일하게 고2 때의 활동을 꺼냈다.

-그때 동석 선배와 정석 선배가 했던 역할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만약 저도 저 위에 있었다면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민주는 작년 시사RPG대회 준비를 돕고, 사회도 보면서 동석이와 정석이가 했었던 발표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말하더군요. 여러 분야들을 알게 되어서 즐거웠다고.”

“….”

오늘 수행평가 발표를 마무리하면서 민주는 나를 보면서 밝게 웃었다.

-쌤 덕분에 올해 진짜 다양한 활동을 해 볼 수 있어서 기뻐요!

그 말을 들은 학생들이 나도, 나도, 하며 손을 들었었다.

녀석들의 반응대로, 올해 1학기 초반에는 여러 활동들과 사건들을 녀석들이 직접 경험하도록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학생들의 역량을 엿볼 수 있었다.

그중 민주로부터 엿본 역량은, 융합형 인재였다.

“오히려 경영은 민주의 선택지 중 하나 정도로만 보였습니다. 융합형 인재인 민주는 여러 학과를 고민해 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후….”

오성주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를 바라봤다.

향후 우리나라 법조계는 로스쿨 출신들이 휘어잡게 된다.

사법고시 출신 법조인들이 서서히 은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초기 로스쿨 졸업생들이 법조계의 탑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은, 정치인인 오성주가 오히려 더 자세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 예상대로, 미래에는 상경계열로 진학한 학생들의 로스쿨 합격률이 높았다.

이건 입시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판사, 검사, 변호사를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로스쿨로 진학하겠다는 이야기를 학생부에 담지 못했다.

대학교의 평가자들이 그런 학생들을 상대적으로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입학하자마자 로스쿨 준비부터 할 학생을 뭣하러 뽑아?

그런 이야기들이 돌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때문에 법조인을 꿈꾸는 학생들은 대부분 상경계열이나 사회학 관련으로 방향을 돌려서 입시를 준비했다.

“인문계열의 탑 학과인 경영학과, 그것도 서울한국대 경영학과를 나와서 로스쿨로 진학하면 선후배 라인도 탄탄하겠죠.”

“그것까지….”

“판검사를 한다 해도 학연이 없으면 더 위로 올라가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아버님은 인원수도 많고, 공부도 잘 하는 학생들이 많이 포진한 서울한국대, 그중에서도 경영학과를 목표로 하라고 강조해 온 겁니다.”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오성주는 이제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렸다.

“어떻게 제 의중을 전부 눈치채셨습니까?”

“민주의 현재 모습과 아버님의 모습, 그리고 현재 입시와 미래 입시까지 함께 분석하면 이 결론을 내기가 어려운 건 아닙니다.”

“아뇨, 충분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강명문 선생님이십니다.”

그가 앞에 놓인 캔커피를 탁, 따면서 중얼거렸다.

“쉽지는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딸에게 로스쿨로 진학하라고 말할까, 아니면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게 만들까.”

캔커피를 벌컥벌컥 마신 오성주가 씁쓸한 듯 웃으면서 입가에 묻은 커피를 슥 닦았다.

“하지만, 정치 선후배들을 보니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제가 우습게 보이더군요.”

“어떻게 하면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기들만의 카르텔을 세울 수 있을까, 수도 없이 고민했을 테니까요.”

내 말에 오성주가 헛웃음을 날렸다.

“허허, 이것 참… 모르는 게 없으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에게 비밀로 한 채 진로진학계획을 설정해 두신 건 잘못되었습니다.”

나는 오성주에게 현재 민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민주는 사회적기업, 공정무역. 이 두 가지 키워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갖추고 있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깊습니다. 자신의 길을 직접 설정할 수 있는 역량도 됩니다.”

그 말에 오성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아니요, 아버님은 여전히 민주를 믿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했는지 오성주가 좀 더 몸을 가깝게 앉았다.

“그런 아버님의 의도,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킬 게 뻔합니다.”

“철저하게 숨겨 왔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민주는… 아니, 학생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말을 잠시 멈추고 오성주의 뒤에 위치한 교무실 자리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성주도 내 시선이 향한 곳이 궁금한지 뒤를 돌아봤다.

“민주야…!”

“아빠… 진짜…야?”

그 자리에는 방금 전에 와 있었던 민주, 태웅이, 은솔이가 있었다. 민주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는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했다.

“다른 학과 말고 경영으로만 이야기했던 게… 이거 때문이었어?”

민주의 작은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려왔고, 시선은 오성주를 잡아먹을 듯했다.

“로스쿨… 보내려고 했다고?”

“아니, 민주야 그게 아니라….”

오성주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민주에게 핑계를 대려 했다.

“게다가 나… 나도… 아빠 정치에 이용하려고 했고? 그냥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 내 진로까지 마음대로 결정해서?”

민주는 생각보다 더 빨리 교무실에 도착해서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꽤 많은 정보를 들었는지 민주의 눈이 붉어졌고, 태웅이와 은솔이도 난감한 듯 민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오성주는 나와 민주를 번갈아 보면서 그런 게 아니라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아니라, 아, 아빠가 정치하면서 네가, 네가 하려는 것도 도와주고….”

“민주 아버님.”

그런 오성주를 향해 내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딸에게도 정직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코스프레를 하면서, 결국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아버님과는 교육 정책을 논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오성주를 조용히 응시했다.

“그게, 제가 정책 논의를 거절한 이유입니다.”

오성주가 나에게 처음 전화를 했을 때, 이 모든 것들을 알아챈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위화감.

단순히 정치적으로 나를 이용하려 한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보다도 더 나아간 목표, 보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목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목표가, 깨끗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 그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학부모님과 교사로서 뵙고 싶다고 말씀드린 이유, 이제 아시겠습니까?”

여기에 약간의 허세를 넣어 이야기하자 오성주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민주는 그 옆에서 여전히 오성주를 향해 분노가 담긴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었다.

“어설픈 연극은 이제 그만두십시오.”

“….”

“지금은 솔직해져야 하는 시간입니다. 되도 않는 변명을 했다가는, 오히려 더 큰 불길로 번질 수 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것. 그건 오성주의 솔직한 로드맵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주가 그 로드맵을 들은 후, 자기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해 내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몇 년이고 자신의 정치인생을 이 코스프레와 함께해 왔을 테니까.

“교육 정책 논의가 하고 싶으시다고요?”

“….”

“먼저 민주의 교육 로드맵 정책부터 솔직하게 잡으셔야 할 겁니다.”

대답을 못하고 입만 뻥긋거리는 오성주를 보면서 은솔이와 태웅이에게 신호를 보냈다. 녀석들은 민주의 옆을 지나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오성주와 민주 둘만이 작은 공간에 남겨져 있었다.

“미… 민주야….”

오성주의 낮은 목소리가 교무실 바닥을 향해 외쳐졌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미안하다….”

“내가… 내가 저번에 아빠 정치에 도움 되라고 인터뷰도 해 줬잖아. 그런 걸로는 부족해?”

“정말… 미안하다….”

다른 것보다도 자신은 이미 아빠의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생각했음을 알게 된 것. 그 사실이 민주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계속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도록….”

“필요 없어.”

민주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뭐, 뭐라…?”

“필요 없다고. 그딴 권력, 지위, 다 필요 없어. 차라리 백수로 살고 말지! 그딴 식으로 만들어진 자리, 난 싫어!”

딸의 완고한 주장에 오성주가 흠칫 놀랐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성주의 어깨가 떨려왔다.

“민주는 충분히 자기주도적이라고, 말입니다.”

여지껏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던 계획이 송두리째 드러난 오성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딸에게 솔직해지세요. 그게, 학부모와 교사로서의 면담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 말에 오성주가 고개를 훽 돌렸다.

“첫 번째… 라고?”

“네, 첫 번째입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오성주를 향해 손가락을 펴 보였다. 그리고 하나씩 손가락을 접어갔다.

“첫 번째가 방금 말씀드린 조건. 두 번째는 민주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나는 접어가던 손가락을 잠깐 멈추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단 첫 번째, 두 번째가 모두 이루어지면, 그때 세 번째를 말씀드리죠.”

앞으로 있을 이사진들과의 싸움에서 나는 내 전문분야가 아닌 사건들을 접하게 될 게 뻔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정치공작이었다.

‘이런 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지.’

입시에 대한 문제, 학교에서의 문제라면 내가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관련된 사건들은 모두 해결해 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일들은 입시와는 무관한 사건들도 생길 수 있었다.

바로, 강문고등학교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문제들. 그 문제들을 두고서 일어나는 곽형조, 천우원 등 이사진들과의 갈등.

그 갈등에 맞설 수 있는, 정치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 지금 나에게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민주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생각했다.

‘나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해 주면서 신뢰 쌓기.’

마지막 조건인 세 번째.

그 조건은, 오성주를 내 편으로 끌어들여서 정치공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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