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꼭두각시
용희 어머니는 나와의 상담을 끝내고 잠시간 학생들의 봉사현장을 지켜봤다.
“나도 좀 도와줄까?”
그러다가 은솔이가 준비하고 있던 급식팀에 들어가서는 한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네! 감사합니다!”
은솔이는 지금도 일손이 부족했다면서 용희 어머니의 합류를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이 반찬은 여기에….”
“아, 이 통으로 꼭 해 주세요. 이게 비쥬얼도 좋아야 하거든요.”
은솔이가 급식으로 마련한 수라상 도시락은 말 그대로 수라상에나 어울릴 법한 오색찬란한 반찬들로 이루어진 도시락이었다. 둥근 형태의 반찬 통부터 해서 형형색색 반찬들, 그리고 된장국으로 이루어진 도시락.
당연하게도 도시락을 받아드는 시점에서부터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오, 배은솔. 잘 만들었는데?”
“야, 난 반찬 한 통 더 줘!”
“헤헤, 재료가 부족하니까 더는 못 줘! 준 만큼으로 만족하고 간식 먹어!”
은솔이의 말마따나 재료가 부족해서 더 많은 반찬을 제공해 주지는 못했다. 대신, 과자나 음료수 등 간식들도 대량으로 준비해 두었다.
학생들과 급식팀 이모님들도 중간중간 당 충전을 해 가면서 봉사를 했다.
마지막 도시락까지 나눠 주는 시점이 오자 박 주임이 다가왔다.
“이번 봉사는 이전보다 더 활기찬데요?”
박 주임이 다 먹고 빈 통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사건들도 있고 하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전에 없이 적극적이라고 해야 하나… 저희로서는 좋지만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홍보영상은 잘 촬영하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박 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신 기자가 촬영을 담당하러 온 카메라맨이 촬영한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강 선생님, 이번에 제대로 나올 거예요!”
신 기자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아까 선생님 상담하시는 거 찍었거든요!”
아….
“지워 주세요.”
“싫어요.”
“당장 지우세요.”
“이거 내보낼 거예요! 오성주 의원의 제안까지 걷어찬 공교육의 희망! 그의 상담은 어떤 방식인가!”
무언가 들뜬 듯 보이는 신 기자를 향해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이번 봉사활동도 성공적이었다.
* * *
“어휴 피곤해 죽겠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나는 어제 있었던 해프닝을 생각하면서 양쪽 목을 좌우로 스트레칭을 했다.
“갑자기 쳐들어와가지고 무슨 일이야 이게….”
이번 년도에는 스승의 날이 어제인 일요일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자각 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저희 쌤 동네 앞이에요!
그렇게 동석이, 은장이, 명천이, 정석이, 태성이, 정아, 채영이에게 둘러싸여서 동네 사람들 보는 앞에서 축하를 받았다.
게다가 이제 대학생 되었다며 학생 때 주지 못한 선물공세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가관은 태성이였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녀석들에게 휘둘렸던 하루를 생각하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 그래도….”
쓸데없는 과잉친절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녀석들이 나를 기억하는 건 고마웠고.
“하긴, 그렇게 합격시켜 줬으면 고마워하기는 해야지, 암, 암.”
“또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중얼거려요?”
어느새 다가온 박 선생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물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저야 항상 웃상이죠. 그건 그렇고 학부모님들한테 문의 전화 안 받으세요?”
박 선생은 지금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대입 준비에 차질이 없겠느냐는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있다고 말했다.
봉사활동 때 용희 어머니가 했던 말들과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역시.’
지금 시점에서는 그런 불안이 오히려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박 선생에게 학부모들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올해 3학년 학생들 전부 제 특강 듣게 할 거라고 해 주세요.”
“전부 다요?”
“희망하지 않는 녀석들은 당연히 제외입니다.”
내 말에 박 선생이 작년 특강을 떠올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거… 저도 해야 하죠?”
“당연하죠. 올해는 홍 선생님, 차 선생님도 하실 겁니다.”
그 말에 반응한 건 박 선생이 아니라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선배님!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요!!”
“강 선생님 특강인데,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진정시켰다.
“아무튼 중요한 건, 우리도 우리인데 내부에서도 또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럼 내가 나설 때가 됐구만.”
이제 막 선도부 활동을 마무리 하고 들어온 오 선생이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보다는 경력이 더 많고, 실력도 좋으신 오 선생님께서 제안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네.”
“다른 선생님들께도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차 선생이 질문을 던지자 오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저런 잡것들을 어떻게 믿고 같이 가나. 됐어. 우리끼리 해도 충분하네.”
오 선생의 패기 섞인 말에 나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교사들은 그래도 살짝 불안한 모양이었다.
“3학년 전체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학원 갈 놈들은 학원 갈 겁니다. 우리는 작년처럼 하면 됩니다.”
“후… 알았어요. 열어야죠 특강.”
그렇게 중얼거리던 박 선생이 퍼뜩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이거, 강문고에서 계속 근무하면 매년 특강 열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오히려 황당하다는 내 말에 박 선생이 인상으 팍 썼다.
“효율적인 방안을 고민해 보겠어요.”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미 구상해 둔 게 있습니다.”
박 선생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시선을 짐짓 모른 척 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참, 6월 첫째 주 주말에 다들 시간 되십니까?”
“왜? 무슨 일 있나?”
오 선생이 엑스칼리버를 책상 옆에 세우면서 내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았다.
“한목대에서 강원도 고등학생들 전체를 대상으로 논술 특강을 연다고 합니다. 그때 선생님들께서 심사위원 및 교육자로 참여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 교수님 부탁이죠?”
누가 이야기했는지 알겠다면서 박 선생이 말했다.
“네, 맞습니다. 강문고 선생님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한번 만나고 싶다고 그랬다더군요.”
내 말을 들은 네 사람이 팔짱을 끼고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나는 일정 괜찮을 것 같네.”
먼저 오 선생은 갈 수 있었고.
“저도 괜찮아요. 아니, 뭣보다 꼭 가야 하지 않겠어요?”
박 선생도 당연히 오케이.
“그럼 홍 선생님, 차 선생님은….”
“아, 죄송해요. 전 미술이라 논술을 도와주기에는….”
홍 선생의 우려도 맞는 말이었다. 그녀가 가르치는 미술은 논술과는 큰 상관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논술특강에서만큼은 아니었다.
“홍 선생님도 필요합니다. 이번 논술특강의 한 파트는 이미지를 해석해 내야 하는 구술면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울한국여대라든가 연희대 패션디자인학과 등 여러 학교들은 그림이나 사진 몇 장을 던져 주고 그에 따른 자유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 논술특강에서는 그런 문제들을 알리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예체능 선생님들도 모셔올 수 있으면 모셔오도록 해! 왜, 그 인어공주 선생님? 수호천사? 그분 있지 않은가 껄껄!!
천우원 이사를 만나고 서 교수, 이사장과 술을 먹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홍 선생님은 그쪽 논술 파트를 담당해 주실 겁니다.”
그리고 홍 선생을 향해 말했다.
“이번 논술특강에서도 선생님의 실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일정만 괜찮으시면….”
“하겠습니다!!”
갑작스레 손을 번쩍 들고 소리를 지르는 홍 선생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참석하겠습니다. 제가 역량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소한 첨삭이라도 도움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차 선생도 확정이 되었다.
아쉽게도 뒤이어서 들어온 지석 선배, 윤 선생은 일정상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6월 첫째, 둘째 주에 진행할 대회, 활동들이 있어서였다.
“마지막으로….”
류지훈 선생은? 물어볼 것도 없었다.
“나? 나야 뭐, 하하하하. 강 선생이 가자고 하면 가야지!”
이렇게 나까지 총 여섯 명. 강문고에서 한목대 논술특강에 참석할 인원이 정해졌다.
* * *
한명심은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잡고서 메모를 해나갔다.
“2년 전에는 사구기업… 12월에는 에이치흠이었나? 거기였고….”
지금 그는 GF파일에 있을 자신의 부정한 내역들을 찾아서 지우기 위해 나름의 리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일들부터 적었는데도, 이미 연습장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하….”
깊은 한숨을 쉬면서 글씨가 빼곡히 찬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나, 주선했던 일들까지 합치면 이것보다 더 많을 터였다.
큰 건은 없었지만, 자잘자잘하게 많은 부정을 저질렀기에, 액수도 만만치 않았다.
-6월 초에 한목대를 다녀올 겁니다. 그때까지는 조용히 몸 사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퇴근 중 류지훈으로부터 받은 문자였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고민을 이어 가던 한명심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핸드폰의 진동을 느끼고 대충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한명심은 빠르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이이이, 이사님! 아, 안녕하십니까!”
[뭘 그리 긴장하고 그러나. 우리가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곽형조는 핸드폰 너머에서 끌끌 웃었다.
[지금 시간 좀 괜찮나?]
“지, 지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두 번 안 묻겠네. 지금 괜찮나?]
한명심은 앞에 존재하지도 않는 상대를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예! 가능합니다. 어디로 갈까요?”
[부르는 주소로 오도록 해.]
긴장한 채 볼펜을 쥔 한명심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럼 곧 보지.]
한명심은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무슨 일로 자신을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공포심으로 인해 딱 한 가지만 기대할 뿐이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이라고 말이다.
* * *
곽형조는 전화를 끊고서 앞에서 차를 마시는 천우원을 향해 말했다.
“무회는 어떻지?”
“결심을 단단히 한 것 같습니다. 다시는 우리와 엮이지 않겠다면서 짐 싸더군요.”
한무회는 곽형조와 천우원을 찾아와서 이제는 서로 간섭하지 말자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각자의 길을 걷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 피 보는 일 없도록 하죠.
그렇게 한무회는 자리를 떠났다. 옆에 딸려 왔던 조신자도 살짝 고개를 까딱이고는 일어섰다.
“그래, 있는 정 없는 정 다 떠났다 이건가.”
곽형조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두 사람이 배신할 확률은?”
“높지는 않습니다. 배신하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게 될 테니까요.”
실제로 한무회와 조신자는 크게 감정이 상하는 일 없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로서도 자신들의 잘못이 세상에 알려져서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었다.
“됐어. 그나저나 우리 이사진도 단촐해졌구만 그래.”
“이번 기회에 충원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천우원의 말에 곽형조가 끌끌 웃었다.
“그래서 한명심이를 부른 거 아닌가.”
“믿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녀석이야. 게다가 가장 효율적인 말이기도 하지.”
곽형조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주현서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현서 자네는 항상 그 조심성이 문제야.”
말을 이어가려던 주현서는 곽형조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지나친 조심성은 없느니만 못하네. 한명심이는 해외로 도망갈 생각까지 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천우원은 얼마 전, 한명심이 무릎을 꿇고 빌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니 교감직 적당히 유지하면서 잠시 쉬다 오라고 해. 안식년이라고 하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천우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한명심은 강명문과 접점이 있어서 외부 이미지도 나쁘지 않아. 꼭두각시로 세우기는 딱이지.”
그렇게 말하던 곽형조는 조심스럽게 울리는 노크 소리를 듣고 조용히 웃었다.
“들어와.”
한명심이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레 들어왔다.
“저, 저… 하실 말씀이라는 게….”
“자네, 관선이사 파견 좀 맡게.”
그 말에 한명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과, 과, 관선, 이사요?”
곽형조는 한명심을 바라보며 후우-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이사진 자리를 채워야 할 것 아닌가. 자네가 강은숙이에게 추천을 해 주도록 해.”
한명심은 떨리는 손으로 천우원이 건네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 종이에는 두 명의 이름과 간단한 이력이 적혀 있었다.
“그 두 사람이 우리 핵심 인력이 될 거야. 이것만 잘 되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곽형조는 한명심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날렸다.
“자네 딸 유학비, 향후 교장직까지 챙겨주도록 하지.”
한명심의 얼굴에 기쁨과 기대, 그리고 또 다른 두려움이 뒤섞여 나타났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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