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각자의 계획
한명심은 천우원과 헤어진 후 집에 틀어박혀서 불도 켜지 않은 거실 중앙에 몸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28인지 대형 캐리어 2개가 놓여 있었다.
“여, 여보세요!”
그는 갑자기 걸려온 류지훈의 전화를 황급히 받았다.
“그, 그래, 그렇지. 그런게 있지! 내가? 그거야 그렇지만…. 괜찮을까? … 맞는 말이야. 그래도 우선 고민을… 아, 알았네.”
전화를 끊은 한명심은 뛰어오르는 심장을 오른 손으로 감쌌다. 헉, 헉, 거친 숨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것만… 그것만 찾으면….”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하고서 한명심은 노트와 펜을 찾았다. 그리고 거기에 류지훈과 이야기를 나눈 사항들을 마구잡이로 적어내려갔다.
* * *
한명심과 전화를 끊은 직후, 류지훈은 키보드를 열심히 치고 있었다.
<모음집>
그가 작성하는 한글 파일 안으로 강문고에 있었던 각종 부정한 사건들 리스트가 올려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강명문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었다.
‘그 녀석은 입시에 미친 놈이야. 반드시 허점을 찾아야 해.’
하지만 강명문의 허점을 찾는다고해서 과연 이사진이 자신을 가만히 놔둘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답은 No 였다.
“그걸 구하도록 하면….”
지금까지 이사진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명심의 처우를 보면 확연히 드러났다.
“교감이랑 통화하길 잘했어.”
방금 한명심과 통화하면서 류지훈은 그가 지독하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협박 과정에서 사용된 무기를 알게 되었다.
‘비리가 모두 적혀 있는 파일.’
그 파일만 습득하면 자신의 과거 행적은 깨끗하게 지울 수 있었다.
‘반드시 찾아야 해.’
류지훈은 한명심처럼 계속해서 이용당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모든 일에서 우위를 점하고 빨리 발을 뺀 후, 영원히 이들과는 이별을 고하고 싶었다.
때문에 그 파일의 확보가 필요했다. 통으로 가져올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했던 부정부패 자료들만 삭제하면 되는 일이었다.
“누가 쓰다 버려지는지 한번 보자고.”
그 파일을 찾는 순간, 역공이 시작된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듯 류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 *
며칠 뒤, 석가탄신일까지 지난 수요일, 강문고는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먼저 학생들의 태도 변화였다.
<학생들이 학교와의 정면도전을 선포하다!>
정책제안 프로젝트에 대해 신 기자는 이런 타이틀의 기사들을 여럿 작성했다. 그중에는 가장 인상 깊었던 정책을 발표한 학생들의 인터뷰도 있었다.
-이제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아야죠.
그런 인터뷰를 태웅이, 은솔이, 용희를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했다.
정책제안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은 학생들은 친구들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야, 나도 같이할래.
그런 말들이 학생들 사이에서 돌았다. 정치적 이념 때문이 아니라, 학생으로서 공정한 시험 결과를 요구할 권리가 있고, 학교에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라는 식이었다.
여기에 학부모들도 변했다.
이전에는 입시에만 집중하던 학부모들이 나에게 이런 연락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선생님, 우리 수호 진로가 고민입니다.
-미주가 꿈만 높아요. 현실을 알려 주세요.
나뿐만이 아니었다. 3학년 학급 담임을 맡고 있는 박 선생, 지석 선배, 오 선생 등 다른 교사들도 학부모들의 연락을 자주 받았다.
“입시 문의가 아니라….”
“진로 문의가 늘었어.”
강남서초권 학부모들인 강문고등학교의 학부모들의 질문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진로와 관련된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지금까지 학부모들이 내신 올려달라, 대학 잘 보내달라 요청하던 분위기에 익숙했던 교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제가 그 분야는 잘 몰라서….”
“의, 의류요? 그건 제가 아니라 예체능 선생님께 여쭤 봐야….”
당연하게도, 오로지 학생들 수업만 해 오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해 오지 않았던 교사들은 학부모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서 다수의 교사들이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오늘 수업하다가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 질문해라!”
“그, 그래. 상담? 당연히 해 줘야지! 응, 오늘 점심시간에 바로 할까?”
“수행평가 점수? 평가 방식을 알고 싶다고? 그럼그럼! 내가 파일로 만들어서 나눠 줄 테니까 게시판에 붙여 둬. 알겠지? 꼭 붙여야 해!”
이전에는 수업도 대충 하고, 시간을 보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교사들이이었다. 그러나 정책제안 프로젝트가 끝난 후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그렇게 달라진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언제 신고당할지 모른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온갖 부정한 행위들. 그 부분에 대한 평가가 학생들의 평가에 반영이 된다면, 최악의 상황에 닥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사자질평가는 정책제안이 끝난 바로 다음 날인, 주말부터 시작되었으니까.
거기에는 이사장의 단호한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어머나, 그런 파렴치한….”
“정말이에요? 그럼 그 선생님은 징계위원회에 올려야겠군요.”
이사장은 주말 동안 학생들의 연락을 수차례 받았고, 여러 증언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중하다고 생각한 사안은 바로 2학년 7반 담임이었다.
“2학년 7반 담임이 학생을 성희롱했다고 하더군요. 당장 조사하세요.”
주말에 이루어진 그 조사 결과, 2학년 7반 담임은 해임처분을 받았다.
“이사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과는 당신에게 모욕받은 학생들에게나 하세요.”
이사장은 단호했다. 용서를 구하는 2학년 7반 담임에게 한 치의 자비도 허락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해임 처분을 받은 2학년 7반 담임은 터덜터덜 짐을 싸고 학교를 나갔다.
그게 불과 정책제안 프로젝트가 끝나고 사흘 만에 이루어졌다.
“정직 정도로도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라고 묻는 한 교감에게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교감 선생님, 지금 학생 성희롱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여태까지 이런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저 자신이 부끄러워질 지경인데, 교감 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이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몇 시간의 잔소리를 들은 한 교감은 조용히 이사장실을 나올 뿐이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나는 한껏 기분이 고양되었다.
“5월은 바야흐로 입시의 계절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평소보다 더 높은 텐션을 갖고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입시의 계절이라니….”
“그런 계절도 있어요…?”
“그럼! 입시에 좋은 또 다른 계절로는 1월과 2월, 3월과 4월! 6월부터 11월, 그리고 12월이 있다! 다 알고 있지?”
“에이!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궤변이다! 쌤이 말장난 치신다!”
“너무해!”
학생들이 불평을 있는대로 쏟아내자 교실이 한층 시끌벅적해졌다.
나는 교탁을 손으로 탁탁 치면서 녀석들의 불만 섞인 비명을 잠재웠다.
“조용히들 해. 수행평가 준비는 다들 많이 했냐?”
내 말에 손을 번쩍 든 몇몇이 눈에 띄었다. 은솔이, 민주, 태웅이였다.
“다른 녀석들은?”
쭈뼛쭈뼛 손을 드는 녀석들이 추가되었다. 모두 봉사활동에 참가했던 학생들이었다.
“그래도 많이 했네. 다음 주 화요일에 발표인 거 알지?”
내 말에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들이 한숨을 푸욱 쉬었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들 마. 너희가 그럴까 봐 이번 주 토요일에 해피플레이스 봉사활동을 갈 거니까.”
그러자 아직 수행평가에 사용할 소스가 부족했던 학생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쌤! 저도 가도 되나요?”
“저도요! 저, 지금까지 한 게 없어서 꼭 가야 해요!”
학생들이 너도나도 꼭 참가하고 싶다며 소리를 질렀다.
“쌤, 그럼 저희도 가죠?”
“당연히 가야지. 너희는 동아리 부원이니까 필참이야 필참.”
민주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너나 할 거 없이 히죽 웃으며 ‘우리도 간데!’ 라며 기뻐했다.
“이번 봉사활동에는 대학생 선배들이 많이 오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많이들 물어봐라. 은장이 알지?”
“누나도 온대요?”
태웅이가 친근하게 부르자 친구들 사이에서 오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상도 좋지, 암암.”
“태웅이가 누님 스타일을 좋아할 줄은 몰랐네.”
놀림거리를 찾았다며 학생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러자 태웅이의 귓가가 새빨개졌다.
“아, 아니야! 누나는 좋은 누나고….”
“자자, 조용! 연애는 성인 되고 해라. 태웅이는 서울한국대 합격하면 은장이랑 직속 선후배니까 그때 데이트 신청하든가.”
“쌤 제발요!”
태웅이가 그만 하라면서 손을 휘저었다. 녀석의 반응을 보면서 놀리듯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무튼, 은장이가 서울한국대에서 사회적기업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 동아리 친구들, 선배들이랑 같이 올 거야. 경영, 마케팅, 광고, 미디어, 어문, 국제 등등 인문계열 쪽으로 궁금한 점 있는 녀석들은 준비해라. 도움 많이 될 거다.”
은장이가 가입한 동아리는 사회적기업 동아리였다. 서울한국대가 있는 지역의 지자체와 협업해서 전통시장을 살리거나, 청년창업자들 및 은퇴한 창업자들을 대상으로 서울한국대 학생들이 도움을 주는 동아리였다.
-쌤! 동석이랑 봉사활동 하셨다면서요! 저도 갈래요!
그래서 은장이가 동아리 친구들, 선배들과 같이 해피플레이스 봉사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했다.
‘은장이랑 동석이가 아주 열심히 도와주고 있어.’
선배들의 후배사랑이 이렇게 전달되는 형식. 그리고 그걸 통해 학생부에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을 강조하는 것.
대학교 입시의 평가요소 중 하나인 애교심과 직결되는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활동들은 물론이고 이번 해피플레이스 봉사도 그 점을 보여 줄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 해피플레이스 봉사도 잘 해 보자. 수행평가 소재 부족한 녀석들은 이번 봉사에서만큼은 주도적으로 뭔가 해 보도록 해라! 알았냐!”
내 말에 학생들이 큰 소리로 “네!!” 라며 대답했다.
* * *
강문고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변해 가는 때, 오성주는 기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이번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드셨을 것 같습니다.”
기자의 질문에 오성주가 차분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지역 내에서 일어나는 교육 문제이다 보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 딸도 이 점을 문제 삼으면서 요즘은 밤마다 토론을 하곤 합니다 허허허.”
오성주는 딸인 오민주와 자주 교육정책이나 교육의 공정성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다면서 껄껄 웃었다. 그의 인자한 웃음에 기자들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의원님! 그럼 지금과 같은 사학비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십니까?”
제일 앞에 앉아 있던 여기자가 손을 들었다.
“이 문제는 정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할 사안입니다. 자라나는 새싹인 우리 학생들, 청소년들에게 큰 아픔과 좌절을 겪게 만든 행위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 오성주는 지금까지 촌지 하나 없이 뚝심을 지킨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끝까지 파헤치겠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이 사안 해결에 힘쓰고, 우리 학생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안겨 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오성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미나는 언젠가 민주가 이야기했던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면서 노트북 키보드를 열심히 타이핑했다.
“의원님, 사안이 사안인 만큼 혼자 움직이시기는 어려우실 것 같은데요, 혹시 함께하실 파트너도 생각해 두신 분이 계십니까?”
다른 기자가 오성주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오성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눈빛을 하면서 말했다.
“저는 강문고 선생님들과 협업하려고 합니다.”
그 말에 신미나의 눈이 번쩍 떠졌다.
“공교육의 희망으로 불리는 강명문 선생님. 먼저 그분을 만나 저와 함께 이 일에 앞장서실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일반 교사는 이런 일들을 하기에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다른 기자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오성주가 고개를 저으면서 답했다.
“강명문 선생님과 범죄 수사를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오성주는 이미 딸인 오민주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름의 방향성을 정해 두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방향성에 대해 기자들에게 간략히 이야기했다.
“공교육의 희망들과 함께하는 교육 정책 논의. 이 논의가 성사되면, 우리 강남구와 서초구의 교육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이 구축될 것입니다.”
**본 글에 나오는 용어, 사건, 학교명, 기관명 등은 허구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